52.동양철학의 이해 (독서>책소개)/2.한국철학사상

함석헌 평전 : 혁명을 꿈꾼 낭만주의자

동방박사님 2021. 12. 23.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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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함석헌을 일컫는 수백 개의 수식어, 겨레의 큰 스승, 사상가, 평화운동가 등을 하나로 엮는 ‘혁명을 꿈꾼 낭만주의자’라는 관점

함석헌은 20세기 한국 현대사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고, 1979년, 1985년 두 차례 노벨평화상 후보로 올랐으며, 시인, 문필가, 역사가, 교육자, 언론인, 민주화 운동가, 평화주의자 그리고 씨알 사상가 등 백 개의 수식어를 붙여도 모자랄 인물이다. 그런 함석헌에 대한 평전이 시대의창에서 새로 나왔다. 지금까지 나온 평전이 함석헌의 출생부터 운명까지의 생애 일대기를 엮은 것이 대부분이었다면, 이 책 《혁명을 꿈꾼 낭만주의자 ― 씨ㅇㆍㄹ 함석헌 평전》은 함석헌 사상의 궤적을 중심에 놓고 생애와 행적을 엮었다는 점이 독특하다. 저자는 함석헌이 스스로를 “인생의 의미를 찾는 자”라고 이른 것에 착목해 씨알 사상이 만들어지기까지의 사상투쟁을 ‘혁명을 꿈꾼 낭만주의’와 연결했다.

해방 공간을 전후로 인생의 전반기가 끝나고 삼팔선을 넘으며 씨알이 자라나다

저자는 ‘낭만주의자 함석헌’의 일생을 두 시기로 나눈다. “무한의 전체”를 꿈꾸던 인생의 전반기와 꿈으로부터 시대의 “장터”로 나온 후반기다. 전반기에 함석헌은 스승과 아버지와 어린 자식과 친구를 잃었다. 후반기에는 어머니와 맏아들과 생이별하고 고향의 집과 땅을 빼앗겼다. 우연하게도 두 시기의 경계선은 해방 공간과 일치하는데, 당시 함석헌 자신도 신의주 학생 사건으로 처형과 옥고와 유배의 위기를 겪고 삼팔선을 넘었다.

저자는 전반기를 함석헌이 가장 격렬하게 사상투쟁을 벌인 시기로 본다. “일생의 친구” 김교신과 영국 시인 셸리를 만나고 ‘신앙’을 쌓고 ‘씨알 사상’의 터전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나라 밖에서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함석헌은 평양 송산농사학원을 인수해 김교신 등 《성서조선》 동지들과 함께 혁명을 꿈꾸었다. 물론 정치혁명이 아니라 ‘하나님’과 손잡는 “인간혁명”이다. 함석헌에게 “인생의 등불”이 된 남강 이승훈, 다석 유영모, 우치무라 간조를 만난 것도 이 시기다. 후반기는 한마디로 전반기의 사상투쟁과 여러 인물들과의 인연과 경험이 ‘씨알 사상’으로 구체화된 시기이다.

증언과 함석헌의 글을 통해 함석헌에게 잘못 붙인 이름을 바로잡다

저자는 이 책에서 후학들이 잘못 기록한 내용을 바로잡으려 노력했다. 예를 들면 함석헌이 오산학교를 자퇴한 사연, 신의주 학생 사건으로 투옥되어 풀려나게 된 사건의 재해석, 우치무라 간조의 영향을 받아 무교회주의를 통해 사회주의 혁명에 관심을 가진 건 사실이지만 퀘이커교도가 아니라는 것 등이다. 저자는 함석헌을 가까이서 모셨거나 곁에서 지켜본 사람들을 십여 년간 수소문해 증언을 듣고, 함석헌이 남긴 글과 시, 기록을 읽고 또 읽었다. 와전되었거나 왜곡되었던 진실은 오로지 저자의 온전한 노력을 통해 밝혔다. 이로써 10년 전에 저자가 쓴 《씨ㅇㆍㄹ 함석헌 평전》과는 완전히 다른 책이 나왔다. 전작이 일대기 평전이라면 이 책은 사상 평전이다. 오랫동안 함석헌을 곁에서 지켜보며 많은 글과 시를 되새겨 읽고 연구한 사람이 아니면 탈고하지 못했을 것이다. 책 말미에 실은 ‘덧붙이는 글 ― 씨알을 찾아서’에서 이 책의 주제를 압축해놓았다. 또한 대중에 처음 공개되는 육필 메모를 포함해 책의 이해를 돕도록 40여 컷의 사진과 200자 원고지 92매 분량의 연보를 함께 수록했다.

목차

들어가는 말


제1부 꿈을 꾸다

1장 용천 바닷가에서
감탕물을 먹고
혼자 방을 쓸던 아이
‘나’를 기다리던 길

2장 다섯 뫼 그늘에서
고읍역에 내려서
꿈을 트는 ‘나’

3장 동경에서 생긴 일
‘인생대학’ 입학식
우치무라의 세례
한 편의 영화
사회주의를 거부한 “가슴”

4장 변방에 나타난 목자
남강의 숲
어느 겨울밤의 교실
두 손으로 가린 얼굴
마지막 수업

5장 《성서조선》과 함께
겨울철 성서 모임
‘의’를 구하기
‘루비콘 하河’를 건널 때
‘조선 사람’ 그리기
헌신지교憲臣之交
지나가는 사람들 중에

6장 풀 아래 머리를
셸리와의 해후
서울행을 준비하다가
평양 송산으로
빼앗긴 꿈
서대문형무소로 가면서


제2부 꿈으로부터

7장 반역의 무대
해방의 행진곡을 따라
한 개의 짐을 지고
삼팔선을 넘을 때
한 선
들사람의 사랑
한국 기독교를 향해서
‘씨’와 ‘알’을 말하다
‘생각하는 백성’을 찾아서

8장 서풍의 노래 부르며
무너진 모래탑
혁명의 계절에
세계 여행 길에서
민중을 깨워야 한다
민족을 사랑하는 도리
반드시 해야 하는 싸움
장차 오는 세계를 위해

9장 어머니의 목걸이 찾기
씨알의 소리 내기
저항이 아니라 도전
씨알의 헌법 지키기
씨알 공동체 살리기
전태일 살리기
씨알교육의 터 닦기
한 사람의 힘

10장 꽃 지고 잎 나리어
저녁 나룻가에 서서
사탄의 간첩
민중을 배워야
흙덩이가 돼서라도
변질된 씨, 똥 묻은 명함

11장 높은 봉 구름 위에
그 발길이 올 때
악, 우리가 싸워야 할 것
씨알이 믿지 말아야 할 것
나는 님의 갈대 피리
내 몸을 실험용으로


덧붙이는 글?씨알을 찾아서
찾는 자
씨알 이야기 ‘더 읽기’
낭만주의자의 터전
세상은 밤이더라
엉겅퀴 찔레 밭에서
꿈으로

나오는 말
함석헌 연보
찾아보기
 

저자 소개

저자 : 이치석
프랑스 아미앵 대학에서 역사학 박사과정(D.E.A.)을 수료했고, 교사로 재직 중 《씨알교육》을 내면서 ‘국민학교’ 명칭 개정 운동을 펼쳤다. 현재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함석헌?씨알사상연구원장으로 있다.
저서로 《전쟁과 학교》(문화관광부 우수학술도서 선정) 등이 있고, 공저로 《세상은 그를 잊으라 했다》와 《일제황민화교육과 국민학교》가 있으며, 서양 중세사 논문으로 〈메로벵 왕조 시대에 골Gaule에서 벌어진 정치권력과 집단심리의 변화 사이의 관계〉(프랑스어)가 있다.
 

책 속으로

그가 걸었던 인생길의 자취를 더듬어보노라면, 무슨 사상이니 철학이니 하는 지식인들의 설명보다 내 가슴에 꽂히는 것은 “내가 너를 만나기만 하면 웃으니 나도 웃음의 사람인 줄 아느냐”라던 그의 심정이다. 이 반문은 시인, 역사가, 교육자, 언론인, 민주화 운동가, 평화주의자 그리고 씨알 사상가 등 세상에 널리 알려진 그의 별칭들의 옷을 벗겨주는 것 같았다. 함석헌 자신도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바치고 난 후에 최후의 진술처럼 진정으로 자기 마음을 알고 싶다면 “너는 슬픔을 품고 오너라”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은 그가 “영원 무한한 세계에서 꿈을 깨듯이 돌아온 자기임”을 밝히기 전부터 푸른 꿈에 실려서 다시 “영원의 나라”로 되돌아가기를 바란 욕망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태초의 통일성으로 돌아가려는 도정을 상상한 것이 내가 함석헌을 주저 없이 낭만주의자라고 부르기 시작한 이유였다. --- p.5

“이 땅에서는 불가피적으로 필연적으로 고난의 역사가 나온다고 할 수는 없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일개 자연 현상이지 역사는 아니다.”(〈조선 역사〉 제6장 지리적으로 결정된 조선사의 특질)
함석헌은 결정론적인 역사의식을 부정하였다. 고난의 역사는 ‘조선 사람’에게 예정된 운명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조선 사람’이 만들어낸 운명이기 때문이다. 역사의 시작과 끝을 인간 문제로 귀일시킨 그의 “성서적 입장”은 자신의 사명을 먼저 생각하는 낭만주의자의 꿈과 분리되지 않는다. --- p.122

“이 시대는 분명히 불행한 시대다. 그러나 불행함에도 불구하고 교훈은 많이 들어 있는 시대다. 평탄을 잃은 땅이 절경을 낳는 것같이 평온을 빼앗긴 이 시대는 전에 볼 수 없었던 진리를 깨닫게 한다.” (〈나의 참회〉) --- p.146

“결혼은 결코 행복을 위한 것이 아니요, 행복이 있을 수도 없습니다. 사람이 젊어서는 꿈을 꾸는 법이요, 꿈 중에서 가장 달콤한 것은 이 행복스러운 이상적 가정생활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환멸의 비애를 먹는 것 중에 이에서 더 심한 것은 없습니다. … 가정이란 행복스러운 것이 아닌 것은 다 잘 알 일입니다. 짐입니다. 힘 드는 짐입니다. 가다가 때때로 집어 내던지고 활활 자유로워 보자는 생각을 하는 것은 한 사람만이 아니고 두 사람만이 아닙니다. … 사실을 모르는 청춘남녀를 보고 행복의 살림을 하라고 말 쉽게 축사를 내던지는 사람들은 대체 누구입니까?” (《성서조선》 1938년 12월 호)
이날 딸을 시집보내는 김교신이 가정은 “환멸의 비애를 먹는 것”이라는 함석헌의 주례사를 듣고 과연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궁금해진다. --- p.150~151

“사람이란 무엇인가 사람 잡아 먹는 짐승
크게 먹어 큰 사람 적게 먹어 적은 사람
안 먹는 사람이라면 짐승 대접 하더라” [사람] --- p.182

앞뒤 정황을 살펴보면 함석헌이 철창에서 나온 것은 1946년 1월 11일이다. 그의 출옥은 사실 의문투성이다. 그 또한 공산당과 소련군정이 왜 그들에게 반역한 자신을 풀어주었는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단지 “갑자기 나가라는 바람에” 나왔을 뿐이라는 것이다.
“김일선 씨 말대로 김일성이 그때 바로 나서려 하는 때이므로 민심을 얻기 위해 정치적으로 해서 된 일인지 알 수 없으나, 하여간 다시 나오려니 생각은 하지도 못했는데 꼭 50일을 지나가 갑자기 나가라는 바람에 나왔다.” (〈내가 겪은 신의주 학생 사건〉) --- p.184

이 논쟁으로 《사상계》는 1만 부 판매를 돌파한 지 1년 만에 3만 부를 넘어섰다. 사실 함석헌이 《사상계》를 통해 한국 기독교를 비판한 내용 자체는 새삼스러울 게 없었다. 진작부터 교회 제도를 비판하는 입장에서 오랫동안 무교회 모임을 꾸려왔고, 그 신앙 때문에 일제 치하에서 《성서조선》 사건을 치렀을 만큼 한국 기독교사의 첫 세대에서 결코 배제될 수 없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자신의 신앙을 《성서조선》에 발표할 때부터 《사상계》에서 윤형중과 충돌할 때까지 함석헌은 30년 가까이 성경과 역사를 연구하면서 교회에 대한 비판을 중단한 적이 없었다. 특히 교회가 강조하는 신성한 규범을 부정하는 것이 그의 양심이 체험한 고유한 “성서적 입장”이었다. --- p.220

“이런 때, 정치가 온갖 사회 발전을 방해하고 있는 때에 입을 닫고 중립을 한다는 것은 결국 정치 한패입니다. 도둑이 왔어도 ‘도둑이야!’ 소리 아니하는 놈은 도둑의 한패 아닙니까? … 친구들조차도 ‘왜 가만있지 않느냐’ 하지만 답답합니다. 글쎄 도둑이 분명한데 도둑이야 소리를 하지 말란 말입니까? 또 내가 하는 것이 무슨 다른 욕심이 있어서 합니까? 도둑보고 도둑이야 했다가 얻을 것이 칼밖에 없는 것을 모르리만큼 내가 바보입니까? 그러면 네가 정말 바보라고 할런지 모르나 바보거든 바보대로 두십시오.” --- p.315~316

함석헌은 《씨알의 소리》를 내면서 두 가지 목적을 내세웠다. 하나는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의 입노릇을 하라”며 죽은 예수를 본받아 “한 사람이 죽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그에 따르는 “유기적인 생활 공동체”를 준비하는 일이었다. 특히 두 번째 목적을 더 중요하게 여겼는데, 그것은 나라를 건질 “새 중심 세력”을 길러내기 위해 우리가 하나라는 느낌에 이르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이른바 씨알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씨알의 소리》를 낸다는 것이었다. (중략)
“이제 우리는 저항이 아니라 도전을 해야 합니다.” --- p.318

“정치란 게 무엇이냐? ‘씨알은 짐승이다’ 하는 소리니라. 다스린다는 말부터가 건방지다. 누가 누굴 다스리느냐? … 잘살기를 목적하는 정치와 종교, 우리 씨알과는 상관이 없더라.”
함석헌은 씨알 속에 내장된 영원한 “하늘나라”를 꿈꾸면서 민民을 주인으로 여기는 민주주의를 보다 적극적이고 미래적으로 파악했다. 인간은 인간으로 출발해서 끝내 인간 이상以上의 존재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인간 “전체”의 운명과 조건은 원천적으로 다수결 정치에 의해 좌우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 p.362~363

“‘찾으라, 그러면 만난다’ 했습니다. 퀘이커들은 하나의 조직적인 운동이 있기 전에 맨 첨부터 누가 지어준 것 없이 스스로 자기네를 ‘찾는 자’라고 불렀답니다마는 나도 퀘이커의 일을 알기 전 나 스스로를 역시 찾는 자라고 했습니다.” --- p.429~430
--- p.429~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