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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 : 그들이 본 우리

동방박사님 2022. 7. 19.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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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군사의 관점으로 본 러일전쟁,
그 승패를 이끈 것은 무엇인가?


러일전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에게 중요한 전쟁이었다. 우리나라가 일본에 병탄되는 중요한 변곡점이었고, 우리 역사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준 세계사에서 공산주의 혁명을 촉발하는 계기가 됐다. 일본의 한국 병탄으로 직결됐던 러일전쟁은 신흥 세력인 일본이 세계적 강국인 러시아와 싸워 예상외의 승리를 거둔 전쟁이었다. 이런 뜻밖의 결과를 낳은 것은 총력을 기울인 일본의 승리이기도 했지만 군사적인 준비가 미흡했던 러시아의 패배이기도 했다. 이 책은 전쟁 준비에서부터 전장에서의 전술에 이르기까지 러시아가 패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군사적인 관점에서 정리하고 있다.

 

목차

서론

제1장 전쟁 이전의 극동 상황

제2장 러시아의 전쟁 준비

제3장 전쟁 전의 일본

제4장 20세기 초 차르 군대


군 병력의 특징 | 작전술 | 러시아 총참모부 | 전술 | 병력, 편성과 무기 체계 | 후방

제5장 일본의 군사력

병사 양성 체계 | 군 병력과 조직 | 작전술 | 전투 준비 | 무기 체계 | 병참 | 해군의 특징 | 쿠로파트킨과 오야마

제6장 전장(戰場) 개관

북만주 | 남만주 전장 | 작전 방향 | 해상 전장

제7장 양측의 계획 및 육군의 전개

일본의 전쟁 계획 | 러시아군 지휘부의 계획 | 러시아군의 전개 | 일본의 해상 활동과 육군의 전개

제8장 압록강에서 랴오양까지

압록강 전투 | 진저우 전투 | 뤼순으로 후퇴하는 러시아군 | 와팡거우 전투 | 랴오양 접근로 전투 | 다스차오와 시무전 전투 | 동부집단 전투 | 전쟁 전반기 평가

제9장 랴오양 작전

양측의 계획과 군대 배치 | 랴오양 요새 지역 | 구로키의 진격: 량자산과 안핑링 근교 전투 | 남부집단 정면 전투

제10장 전진 진지에서

전진 진지에서의 만주 주둔군 전개 | 제1시베리아군단 전선 | 제3시베리아군단의 전투 | 일본군의 타이쯔허 도하 | 8월 31일 전투

제11장 랴오양 작전의 결정적인 날들

9월 1일까지의 양측의 부대 편성 | 타이쯔허 우안에서의 군사 행동 | 네진스카야 언덕 전투 | 쿠로파트킨의 공격 계획 | 구로키의 9월 2일 공격 | 오를로프 부대의 군사 행동 | 빌데를링의 공격 | 9월 2일 자루바예프의 전선 | 러시아군의 퇴각 | 랴오양 작전의 결과

제12장 사허 작전

라오양 전투 이후의 전황 | 러시아군 지휘부의 공격 계획 | 서부집단의 ‘시위성’ 공격 | 동부집단의 군사 행동 | 렌넨캄프 부대의 번시호 공격 | 10월 9일의 군사 행동

제13장 일본군의 반격

10월 10일 전선의 상황 | 인더뉴루 전투 | 구로키 제1군의 공격 | 시타켈베르크 부대의 고개 공격 실패 | 일본군의 양자오산 점령 | 그 밖의 전선의 야간 전투 | 일본군의 10월 12일 공격 | 서부집단의 전투 | 중앙 돌파 시도 | 동부집단 전선

제14장 공세에서 수세로

방어로 전환한 쿠로파트킨 | 10월 14일 정면에서의 상황 | 빌데를링의 공격과 일본군의 반격 | 제1유럽러시아군단의 전투 | 솽펑산 공격 | 10월 14일 전투의 결과 | 방어로 전환한 오야마 | 노브고로드산과 푸틸로프산에 대한 공격 | 사허 작전의 결과

제15장 묵덴 작전 이전의 만주 전황

뤼순 함락 | 러시아 기병대의 잉커우 습격 | 그리펜베르크의 1월 공격 실패 | 결과

제16장 묵덴 작전

쿠로파트킨의 공격 준비 | 양측의 군사력과 부대 배치 | 오야마의 공격 계획 | 기습전의 교환 | 전장(戰場) | 일본군 전선 우익의 공격 | 일본군 좌익의 공격 전환 | 가와무라와 구로키의 전선 | 일본군 좌익의 전과 확대 | 다팡션과 사링푸 전투 | 러시아 제2군 남쪽 전선의 전황 | 3월 4일 러시아군 우익의 형세 | 만주 주둔군 좌익의 군사 행동

제17장 묵덴 작전의 대단원

양측의 결정적 군사 행동 준비 | 카울바르스의 공격 실패 | 노기 제3군의 우회 작전 | 짜오화툰·주안완춘·위훙툰 전투 | 훈허 뒤쪽으로 후퇴한 제1, 제3만주군 | 3월 8~9일 전투 | 일본군의 제4시베리아군단 돌파 | 러시아군의 퇴각 | 묵덴 작전의 결과

제18장 묵덴에서 포츠머스까지

묵덴 작전 이후 양측의 병력과 부대 배치 | 방어 및 공격 계획의 수립 | 러시아 기병대의 파쿠먼 습격 | 쓰시마

제19장 2선의 군사 행동

사할린 방어 계획 | 사할린의 병력과 무기 | 사할린 전장의 특성 | 남사할린의 유격대 부대의 군사 행동 | 북사할린에서의 작전 | 남우수리변강주의 방어 준비전 | 블라디보스토크 방어 대책

제20장 전쟁의 결과

러시아 차르 체제의 패전 원인 | 전선 폭 확대와 전투의 장기화 | 진지전의 발생 원인 | 지휘 방식과 참모부의 활동 | 러일전쟁의 역사적 의의
 

저자 소개

저 : 니콜라이 레비츠키 (Н. А. Левицкий)
 
1918년부터 붉은군대에 복무했고 1919년엔 제1기병사단 참모장으로 러시아 내전에 참전했다. 1925년 사단장을 마지막 경력으로 군에서 전역한 후 자신의 군 경험을 기반으로 우선은 프룬제 군사대학에서, 1936년부터는 총참모부대학에서 전쟁술과 전쟁사를 가르쳤다.
 
역 : 민경현
 
프랑스 파리1대학에서 역사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고려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 외교사와 전쟁사 등 국제관계사를 전공하고, 『러시아와 한국』(동북아역사재단)과 『러시아문화사』(후마니타스) 등 한-러 관계사와 러시아사 관련 연구를 했고, 최근에는 북한 성립과 한국전쟁 시기 러시아측 사료 아카이빙 작업을 하고 있다.
 
 

책 속으로

전쟁 초기 차르 군대는 19세기 후반에 이루어진 전쟁술의 발전을 간과한 채 진부한 군사 교범에 따라 훈련된 상태로 전쟁에 임한 반면, 제국주의 일본의 군대는 독일과 이탈리아가 단일 국가로 통일되던 시기의 전쟁 경험에 기초하여 육성되었다.
--- p.55

나폴레옹 전술에 대한 이런 식의 모방은 시대 변화와 20세기 초 러시아 육군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이루어진 것으로서, 차르 체제 러시아가 지닌 경제적·사회적 시스템의 후진성을 나타내는 일례이자 러시아가 패전한 주요 원인 중 하나였다.
--- p.55~56

의지력이 약하고 우유부단했던 쿠로파트킨은 독자적인 작전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매 작전에 앞서서 선임 지휘관들의 의견을 청했으며, 결심을 실행하겠다는 단호함 없이 ‘미지근한’ 결정을 했다. 이와 동시에 쿠로파트킨은 부하의 주도권과 자주권을 박탈하고 자질구레한 일상적인 일까지 통제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는 전투에서 중요한 것을 희생하면서까지 자질구레한 일에 열중하여 수십만 병사들을 개인적으로 직접 통제하려 했다.
--- p.122

일본은 영국의 도움으로 재정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만약 전쟁이 불리한 방향으로 진행될 경우, 일본은 미합중국과 동맹국인 영국의 도움을 예상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극동에서 러시아가 승리하면 중국 시장에서 영국이 누렸던 독점권을 위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보스포루스와 다르다넬스해협에 관심을 기울이던 차르 정부는 만주를 부차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서쪽에서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약소국 일본에 대한 승리는 유럽 쪽 전쟁 준비에 지장을 주지 않고 크지 않은 노력만으로 달성될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 p.147

그러나 일본도 많은 면에서 오판했다. 먼저 시베리아횡단철도의 수송 능력을 낮게 계산해 러시아의 부대 파병 가능성을 과소평가했다. 다음으로 차르 정부가 폴란드의 러시아 독재 체제에 대한 반감 때문에 그곳에 체류하는 군대를 차출하지 못할 것으로 보았다. 러시아가 대규모 병력을 블라디보스토크와 뤼순 방어에 투입할 것이라고 본 일본의 계산도 틀렸다.
--- p.152~153

패전을 경험한 러시아군은 사기가 저하된 상태에서 랴오양으로 이동했다. 병사들은 승리에 대한 신념을 잃었으며 의무를 느끼지도 않았다. 소극적인 방어는 측방과 후방에 대한 공포로 이어졌으며, 일본을 이길 수 없는 상대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방어적 성향으로 기울어진 지휘관은 후퇴할 필요가 없는 상황에서조차도 뒤로 물러났다.
--- p.209

랴오양 진지에서의 러시아군 배치는 일본군 좌익에 반격을 가하기에 유리한 것이었다. 일본군 지휘부는 예상되는 공격을 두려워하여 시베리아군단의 진지를 포위하는 것으로 자신의 군사 행동을 제한했다. 그러나 그것은 일본군의 실수였다. 쿠로파트킨의 군사 전술이란 일부 모험을 감수해야 하는 단호하고 과감한 군사 행동을 배제한 것이었다. 쿠로파트킨은 단지 후퇴에 적합한 순간만을 기다릴 뿐이었으며, 이미 후퇴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 p.253~254

일본군은 랴오양에서 2만 4,000명 이상의 병력을 잃었고, 이는 일본군 전체 병력의 약 20퍼센트에 해당하는 숫자였다. 반면 러시아군의 병력 손실은 1만 7,000명으로 만주 주둔군의 약 9퍼센트에 불과했다. 게다가 일본군 지휘부는 랴오양에서 더 적은 손실로도 결정적인 전과를 달성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 p.299

러시아군의 각 단위 부대 지휘관은 자신이 보유한 병력의 절반 정도를 예비대에 편입시켰다. 결국 1개 사단 예하의 1만 5,000명의 병력 중 총격전에 참가한 것은 1,000명도 되지 않았다. 이런 현상은 러시아·투르크 전쟁 이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가던 공격 전술의 잔존물이었다.
--- p.306

종합적으로, 묵덴 작전에서 러시아군의 손실이 일본군의 손실보다 현저하게 많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일본군은 묵덴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러시아군 사상자와 포로가 총 약 8만 9,000명 정도였던 반면, 일본군의 병력 손실은 7만 1,000명이었다. 이 중 사상자는 러시아군 5만 9,000명, 일본군 7만 명이고 나머지는 포로다.
--- p.532

14시 26분, 장갑함 수보로프호의 왼쪽 기관, 전신과 조타 구동 장치 등이 파손되면서 전함이 오른쪽 방향으로 틀어지기 시작했다. 오슬랴뱌호는 이미 전열에서 이탈했으며, 14시 40분 전복되어 침몰했다. 몇 분 후 전열에서 이탈한 수보로프호의 돛대와 굴뚝이 파손되면서 전함의 승조원들은 짙은 연기 속에 휩싸였다. 로제스트벤스키는 부상을 입은 것으로 판명되었으며, 사전에 내려진 명령에 따라 알렉산드르 3세호가 지휘해야 했으나 일시적으로 해당 함선이 전열에서 이탈하면서 보로디노호가 선도하게 되었다.
--- p.565

영국은 일본에게 명백한 공감을 표명했으며, 전쟁 중에는 일본을 물질적으로 지원했다. 만주와 조선 시장에 자신의 상품을 자유롭게 수출하기 원하는 미국 자본주의는 일본을 지원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서부 국경으로부터는 영국과 프랑스, 동부 국경으로부터는 러시아의 위협을 받고 있던 독일은 러시아의 관심을 유럽에서 극동으로 끌어내기를 원했기에 러일전쟁 기간 일본과 호의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 p.602~603

전쟁 말기에 접어들면서 이미 일본군은 러시아와의 전쟁에 대한 초기의 광신을 보여주지 못했다. 포로가 된 일본군 병사들은 전쟁에 따른 피로를 호소했다. 일본 국민들은 전쟁으로 인한 높은 세금을 감당해야 했다. 생활필수품의 가격이 폭등했다. 생산량의 저하는 실업을 유발했다. 각 연대 중 노동자 지역 출신으로 편성된 1개 연대가 공격을 거부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만약 강화조약이 체결되지 않았더라면 이후의 전투들이 어떻게 종결되었을지 장담할 수 없다. 그러나 차르 체제의 러시아가 승리했을 것이라고도 가정하기 어렵다. 역사 발전의 법칙에 의해 차르 체제 러시아의 패배는 이미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 p.613~614

전비로 약 20억 엔을 지출한 일본의 국채는 6억 엔에서 24억 엔으로 늘었다. 채무에 대한 연리만 1억 1,000만 엔에 달했다. 전사자를 비롯해 부상과 질병으로 사망한 일본 병사들은 약 13만 5,000명에 달했다. 의료 기관을 거쳐 간 부상자와 병자들이 약 55만 4,000명이었다. 약 150만 명의 인력이 전쟁으로 인해 생산 노동에 종사하지 못했다.
--- p.629~630

러시아는 전쟁의 대가를 더 비싸게 치렀다. 전비로 지출된 23억 4,700만 루블 외에도 일본인의 손에 넘어간 철도, 여러 항구들, 함대·무역선단의 침몰로 약 5억 루블의 추가 손실을 감당해야 했다. 러시아의 병력 손실은 전사자와 부상자, 전쟁 중 실종자, 부상으로 후송된 병사를 총망라해 40만 명에 달했다.
--- p.630
 

출판사 리뷰

러시아…전사戰史 연구를 게을리 한 예정된 패배
일본…전쟁 계속할 수 없을 정도로 출혈 커


일본의 우리나라 병탄은 러일전쟁의 직접적인 산물이었다. 만주와 한반도를 놓고 대결을 벌이던 러시아와 일본은 협상이 여의치 않자 1904년 전쟁에 들어갔다. 대한제국은 전쟁 발발 직전 중립을 선언했지만 전쟁 개시 직후 한일의정서 강요로 의미를 잃었다. 이후 일본은 전쟁 중 제1차 한일협약을 강요하고 1905년 포츠머스 강화조약으로 전쟁을 마무리한 직후 을사조약을 강요해 한국 병탄을 사실상 확정지은 것이다. 이후의 정미 7조약과 합방조약은 후속 조치일 뿐이었다. 따라서 40년에 걸친 일본의 한국 지배는 러일전쟁의 결과물이었다.

한편 러시아는 러일전쟁 패배 이후 차르 체제의 붕괴가 본격화됐다. 전쟁이 시작되고 1905년 1차 혁명이 발발, 1907년까지 이어졌고, 혁명은 1917년 완성되어 제정이 붕괴되었다. 이렇게 탄생한 공산주의 정권은 한반도에까지 영향을 미쳐 동족상잔의 참극을 불러왔다. 그러나 이처럼 우리 역사에 엄청난 의미를 지니고 있는 러일전쟁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미미한 편이다. 최근 우리말로 번역된 와다 하루키의 『러일전쟁 : 기원과 개전』이 러일전쟁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다룬 것이었다면, 레비츠키의 이 책은 전쟁 자체에 초점을 맞춘 군사사 범주의 책이다.

러일전쟁에 관한 또 다른 고전적인 저서 『만주의 러시아』를 쓴 로마노프는 자신의 책 『러일전쟁 외교사 개설』 서문에서 러일전쟁에 관한 책을 언급하고 추천했는데 바로 레비츠키의 이 책이다. “군사사의 관점에서 러일전쟁을 연구하고자 하는 자는 레비츠키의 책을 보라.” 이는 2차 대전 말미에 러일전쟁의 패배를 갚아준 소련의 대일전쟁을 직접 목격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전쟁사가 레비츠키를 향한 로마노프의 헌사였다.

2003년 러시아에서는 러일전쟁 100주년을 기념해 100년 동안 출간된 러일전쟁 연구서 가운데 지상전과 해전 관련 각 한 권을 선정해 재출판했다. 해전으로는 1942년 출판된 브이코프의 『해상에서의 러일전쟁』이, 지상전으로는 레비츠키의 『러일전쟁』이 선정되었다. 이 번역본도 2003년판을 기준으로 삼았다. 러시아혁명 이후 붉은군대에 복무하며 내전에 참전했던 레비츠키는 1925년 사단장을 마지막 경력으로 전역한 뒤 군사대학에서 전쟁술과 전쟁사를 가르쳤다. 그는 러일전쟁이 갖는 정치적 의미의 무게가 이 전쟁의 군사적 의미를 압도하던 시기에 러일전쟁을 군사사의 시각으로 천착했다.

레비츠키는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할 수밖에 없었던 주요한 원인으로 전쟁사 연구에 주목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러시아는 러일전쟁 발발 전 이미 전쟁사 연구에서 일본에게 패배했다. 러시아의 전쟁사 연구가 나폴레옹 전쟁 연구에 매몰되어 이후에 발발한 전쟁을 연구하지 않은 것은 러시아군의 치명적 약점이었다. 레비츠키가 강조한 전쟁은 청일전쟁(1894~1895)과 제2차 보어전쟁(1899~1902)이었다. 러일전쟁 이전 러시아의 어느 군사학교에서도 이들 전쟁을 연구하거나 가르치지 않았다는 점은 러일전쟁의 승패를 예측하는 데 중요한 기준이었다.

1931년 일본이 만주를 침략하고 소련에서 제2차 러일전쟁의 기운이 감지되기 시작하자 레비츠키는 러일전쟁 연구를 본격적으로 진행했다. 마침 그가 몸담고 있던 프룬제 군사대학은 그에게 러일전쟁 교재 집필을 의뢰했다. 그가 이 책을 완성하는 데에는 무엇보다 전쟁 직후 구르코 장군을 위원장으로 진행된 전사 편찬 작업의 결과 출간된 『1904년의 러일전쟁』이라는 기초 작업의 힘이 컸다. 레비츠키는 자신의 책을 위해 러일전쟁에 관한 러시아와 일본의 자료뿐만 아니라 제3국에서 종군기자나 관전무관으로 파견된 사람들이 남긴 작품까지 분석했다. 그가 1935년 처음 출판한 『1904년의 러일전쟁』은 프룬제 군사대학뿐만 아니라 총참모부대학에서도 교재로 채택되었고, 1938년 일본과 군사 충돌이 있기 직전까지 네 차례나 출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