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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생가 & 감고당 (2024-04-08)

동방박사님 2024. 5. 11.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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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생가

명성황후 생가는 숙종 13(1687)에 처음 지어진 집으로, 그 당시 건물로는 안채만이 지금까지 남아 보존되고 있다. 1985년에는 대대적인 생가 복구가 진행이 되었다. 1996년에 안채가 수리되었고 행랑채와 사랑채, 별당채 등이 함께 지어져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명성 황후가 어렸을 때 공부했다는 방이 있었던 자리에 탄생을 기념해 세운 "명성황후 탄강구리(明成皇后 誕降舊里)"(: 명성황후가 태어나신 옛 마을)이라 새겨진 비가 세워져 있다. 명성황후 생가는 조선 중기 살림집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 집이다.

명성황후 출생과 가계

명성태황후 민씨는 경기도 여주시 근동면(近東面) 섬락리(蟾樂里) 사저 (현재의 여주시 능현동 250-1에서 민유중의 6대손으로 사도시 첨정이었던 민치록(閔致祿)의 재취부인 한산 이씨의 딸로 태어났다.어릴 적 이름은 자영이었다.

아버지 민치록의 전 부인 오씨에게서는 자녀가 없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한산 이씨에게는 13녀의 형제가 있었으나 모두 죽고 그녀만이 남았다.민유중의 아들 민진후의 5대손으로 할아버지 민기현은 예조참판과 개성부유수를 지냈으나 아버지 민치록은 정3품 사도사첨정에 이르렀고 만년에 낙향하여 여주에서 선영을 돌보며 소일하고 있었다. 뒤에 대를 잇기 위해 위해 11촌 아저씨인 민치구의 아들 민승호를 아버지 민치록의 양자로 들였다. 민승호는 흥선대원군의 부인인 여흥부대부인 민씨의 친동생인데, 1874년 권력을 쟁취하려는 흥선대원군에 의해 폭탄으로 살해당했다는 설이 있다.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는 그녀의 5대 고모뻘로, 5대조 민진후의 누이였다. 생가 감고당은 여양부원군 민유중의 묘지를 지키기 위해 지은 묘막집으로 이후 민유중의 종손들에 의해 관리되었다. 그녀의 아버지 민치록은 문음으로 나가기에 앞서 감고당에 거주하며 민유중의 묘를 지키는 일을 했다.

숙종비 인현왕후의 친정이라 했으나 그녀의 집안은 빈곤하였고, 경기도 여주의 산골 민유중의 묘지 근처에서 지냈다. 그녀의 생가 근처 200m 즈음에는 조선 전기의 문신인 임원준의 묘가 자리잡고 있다.

명성황후 유년기

명성황후는 어릴 적부터 아버지 민치록으로부터 학문을 배웠는데, 소학(小學효경(孝經여훈(女訓) 등을 즐겨 읽었고, 특히 역사를 좋아하여 치란과 국가의 전고에 밝았다고 한다. 오늘날 그녀의 공부방 자리에는 명성황후 탄강 구리비(明成皇后誕降舊里碑)(생가 입구 오른쪽)가 세워져 있다. 9세 때인 1858년 아버지 민치록이 죽자 습렴하는 모습을 어른처럼 지켜보아 주위 사람을 놀라웁게 했다. 김동인의 역사소설 운현궁의 봄에서도 명성황후는 아버지 민치록이 병으로 자리에 누웠을때에 간호를 한 효녀로 묘사되고 있다.

아버지가 죽은 뒤 섬락리 사저에서 한양 감고당으로 옮겨 홀어머니와 함께 지냈다. 감고당은 인현왕후의 사가로서 민치록의 소유였으며, 이름은 영조가 하사했다.형제와 부모를 여읜 고아인 데다가 의지할 오라비도 없었다. 그러나 이후 가까운 친척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성장했다.

민유중(閔維重, 1630~ 1687629) 한성부 판윤 등을 직책을 지낸 조선 시대 중후기의 문신, 척신, 정치인으로 인현왕후의 아버지, 곧 숙종의 장인이다. 명성황후와 여흥부대부인 민씨의 6대조이다. 호조참의 민광훈의 아들이자, 민시중과 민정중의 친동생이다. 종묘의 효종실에 배향됨으로써 종묘배향공신이 되었다.당색으로는 서인(西人) 노론(老論)이었고, 동춘 송준길과 우암 송시열의 문인이다.

감고당(感古堂)

감고당(感古堂)은 조선 후기에 건축된 건물로, 조선 고종의 왕후인 명성황후의 생가이자 숙종비 인현왕후의 친정아버지 민유중의 묘소를 관리하면서 지키던 묘막이었다. 인현왕후가 친정을 배려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었다.

본래 한성부 안국방 37번지(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 37-1번지 일대에 인현왕후가 자신의 친정에 특별히 내려 준 건물과 1687(숙종 13) 경기도 여주군 여주읍 능현리 산에 숙종의 장인이자 인현왕후의 친정아버지 민유중의 묘소를 지키기 위한 묘막이 각각 건립되었다. 그러나 안국동의 감고당은 후일 덕성여고가 설립되면서 현재의 여주 능현리로 일부 시설물이 옮겨졌고, 간판 역시 여주의 민유중 묘막에 옮겨졌다.

당시 건물로 현재 전하는 건물은 27평이며 나머지 건물은 해방 이후 복원되었다. 이후 민유중 가문의 종손들이 대대로 거주하면서 묘막을 지켰으며, 1851925일 고종의 비 명성황후가 여기서 태어났다. 이후 민치록은 1858년에 사망했으나 민자영(명성황후의 어린 시절 이름)은 비로 간택되기 전까지 어머니 한산 이씨와 감고당에서 계속 거주하였다.

일제강점기 때 파괴되고 6.25 전쟁 때 다시 파괴되었으나 1976년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 지시로 복원공사가 시작, 안채가 중수되었고 1995년에는 행랑채와 사랑채, 초당 등이 복원되었다.출처: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