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네 장터의 피눈물
본래 아우내 장터의 독립만세운동은 두계열에서 계획하고 있었다.하나는 수신면 주민과 성남면, 갈전면 주민들이 계획했고, 또 하나의 동면과 갈전면의 주민들이 계획했다. 이들 두계열의 주동자들이 서로 연락을 취하여 4월1일 아우내 장터에서 합동으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했던 것이다.
3월 31일 밤, 지령리 매봉 정상에서 시뻘건 불길이 타올랐다. 내일의 거사를 일깨우는 봉화였다. 그러자 동서남북 각지에서 봉화가 피어오르며 그 뜻에 호응햇다. 드디어 4월 1일 갈전면 아우내 장날이 밝았다. 그날 새벽부터 아우내 장터에는 천원군 일대 외에 청주.지천 방면에서도 장꾼과 장꾼을 가장한 시위군중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유관순은 동지들과 함께 장꾼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주면서 열띤 어조로 대한 독립의 당위성을 설파했다. 오전 9시경 3천여명의 시위군중이 모이자, 조인원이 긴 장대에 대형태극기를 만들어 높이 달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이어서 유관순은 단상에 올라 지금 전 세계의 피압박민족들이 독립을 쟁취하고 있다면서 우리도 이 아름다운 금수강산에서 원수 일본을 몰아내고 독립을 쟁취하자고 부르짖었더. 그녀의 열정적이면서 조리 있는 연설은 군중들의 심장을 뜨겁게 달궜다. 이어서 조인원의 선창에 따라 군중들은 일제히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연호했다.
독립선언식이 끝나자 유관순은 수천명의 군중과 함께 "대한독립" 이라는 깃발을 앞세우고 아우내 장터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그렇게 모두가 한 마음 한 뜻으로 뭉친 아우내 장터의 분위기는 해방 독립의 공간 그 자체였다. 독립만세운동이 절정으로 치닫던 오후 1시경 상황을 전해들고 긴급출동한 일본 헌병들이 시위대 앞을 막아섰다. 그 와중에 대열의 선두에 있던 한 사람이 헌병의 총검에 찔려 쓰러졌다.
분개한 유관순과 동지들은 군중들과 함께 최초의 희생자를 둘러메고 헌병파견소로 몰려갔다. 그들은 무참하게 살해된 동지의 시신을 파견소 앞 마당에 내려놓고 일제의 만행을 격렬하게 성토했다. 그때 일부 흥분한 청년들이 파견소로 연결된 전화선을 끊었다. 사태가 험학해지자 헌병들은 파견소 안으로 들어가 숨었고 군중들은 조인원의 설득으로 안정을 되찿았다.
그런데 오후 2시경 지원 요청을 받은 헌병 분견대원과 수비대원 30여명이 트럭을 타고 현장에 도착하더니 군중들을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깜짝 놀란 군중들이 일제의 만행으로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소제 등 19명이 현장에서 즉사하고 30여명이 중상을 당했다. 그날 오후 4시경 유관순은 좌복부와 머리를 찔린 채 숨진 아버지의 시신을 없고 유중무 조인원 김병호 김용이 등 40여명과 함께 다시 파견소로 몰려가 파견소장 소산과 헌병상등병 주곡 등에게 강력하게 항의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공주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아우내독립만세운동
3월 13일 유관순은 사촌언니 유에도와 함께 귀향하여 고향에서 아우내 만세운동을 벌였다. 유관순은 아버지 유중권을 비롯하여 조인원, 김구응 등 20여명의 동네 유지들과 4월1일 아우내 장날 정오에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논의하고 인근 각 면, 촌에 연락기관을 두고 대규모 독립 만세운동을 준비 하였다.
3월31일 유관순은 용두리 매봉산 봉화를 올렸으며 주변 24개 지역에서도 일제히 봉화를 올려 호응 하였다.
4월1일 조인원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유관순을 필두로 한 3천여명의 군중들은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병천 주둔 일본 헌병들과 지원군이 일제히 사격을 가하여 유관순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포함하여 수많은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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