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세계대전 1914년
1914년 6월28일 사라에보에서 울려 퍼진 두 발의 총성은 유럽의 열강들을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다.
이 전쟁은 같은 해 7월28일 부터 1918년 11월11일까지 4년여 동안 게속되었으며 유럽을 넘어 전세계로 전쟁이 확대 되었다. 일본은 영일동맹을 근거로 연합군 측에 가담하여 독일이 지배하던 중국 산둥반도와 태평양 남양군도를 점령하였고, 급격한 해외수출 증가로 경제적인 호황을 누리게 되었다 도한 승전국으로서 세계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일본은 조선에 대한 배타적인 지배권을 공고히 할 수 있게 되었다.
105인 사건
일제는 데라우치 조선총독 암살사건을 조직하여 1911년 9월 윤치호, 이승훈, 양기탁 등 유력인사 600여 명을 검거하였고, 105인에게 1심에서 징역형을 선고하였다. 하지만 상고심에서 증거 불충분 등으로 99명에게 무죄가 입증되어 일제 스스로 조작된 사건임을 자인하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비밀 항일 단체인 신민회가 실질적으로 해체되었고, 일부는 만주등 해외로 망명을 하여 국외에서 항일 누동을 게속하게 되었다.
일제 조선인에 대해 태형을 집행하는 모습
조건사람과 명태는 두둘겨 패야한다
[조선태형령] 은 일제강점기 가장 악질적인 법령이었다. 태형은 대표적인 신체형으로 갑오 개혁기인 1894년 이미 폐지되었다. 하지만 일제는 조선의 국민수준이 낮기 때문에 태형으로 다스릴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였고
일본인에게는 적용되지 않는[조선태형령]을 제정하였다. 아에 따라 경미한 죄에 대해 태형을 부과하였고, 야만적으로 집행되어 조선인에게 신체적인 고통과 수치심을 주었으며, 심할경우 목숨을 잃기도 하였다,
일상화된 차별과무시 1913
일제는 군인이나 관료, 일반인 뿐 아니라 어린이까지 조선인들을 무시하고 차별하였다. 하층의 일본인 경우에도 "요보"(여보를 비하하는말)라는 말을써서 조선인을 멸시하였고, 조선인 이라면 이유없이 구타하기도 하였으며 병원에가도 일본인 간호사가 공공연히 모욕하는태도를 보이는 등 차별과 멸시는 일상화 되었다.
조선총독부의 토지 강탈
1910년 시작된 토지조사 사업은 [토지조사령]이 고오된후 가속화 되었다.[토지조사령]에 따르면 토지소유자는 정해진 기간내에 관련서류를 갖추어 직접 신고를 해야만 소유권을 인정받을 수 있었는데, 미처 신고하지 못한 토지는 모두 국유지로 처리하여 조선총독부의 소유가 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이러한 토지를 동양척식주식회사 등에 헐값으로 넘겨 주었고 이 과정에서 관습적으로 인정받던 농민들이 경작권이 박탈되어 농민들은 소작농으로 전락 하거나 농지를 떠나게 되었다. 반면 동양척식주식회사는 1911년 부터 일본인을 대상으로 한 조선농업이주민을 모집하여 그 빈자리를 채워나갔다.
대동단결선언
대동단결선언은 신규식, 바굥만, 조소앙 등 해외 독립운동가 14명이 상하이에서 발표한 것이다. 이선언을 통해 주권은 민족의 고유한 것으로 순종이 주권을 포기한 것은 국민에게 넘겨준 것이며, 국내 동포가 일본의 속박을 받고 있어 그 주권 행사의 권리와 의무를 해외동포가 감당해야 하므로 해외동포가 민족대회를 개최하여 임시정부를 수립하고자 주장하였다.
"정복과 영토확장이 일삼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평화를 사랑하는 모든국가의 자신들의 생활을 유지하고, 자신들의 고유한 제도를 채택하고, 무력을 이용한 이기적인 침략 행위에 맞서 싸우면서 세계의 다른 국민들과 더불어 정의와 대등한 관게를 지킬수 있도록 보장되어야 합니다.
-미국윌슨대통령 1918년 연두교시-
물가폭등
제1차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일본의 물가는 폭등하였고, 산업화로 인한 이촌하도 현상이 본격화되어 식량상황은 점차 약화하고 있었다. 일제는 자국의 식량위기를 극복하기위해 한국에 있는 쌀을 일본으로 이입하였다. 그로인해 19117년 4월 1석당 15원대 불과하던 쌀값은 1918년 30원대, 1919년 8월28일 종로소학교의 살 판매소에서는 저렴한 쌀을 구하지 못한 시민들의 불만이 대오적으로 표출되었는데, 이 시위에는 1천여 명이 참여하였다.
민족자결주의
민족자결주의는 모든 영토와 주권은 각 민족에게 귀속되며, 각 민족의 의사에 따라 정치적운명이 결정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1917년 러시아혁명을 주도한 레닌은 식민지 반식민지 상태에 있는 약소민족의 민족해방운동을 지원하겠다고 선언 하였고, 1918년 1월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의회 연두교서에서 정쟁의 종결을 위한 14개조 평화원칙을 발표하였다. 이러한 민족자결주의는 제1차세곋대전의 전후문제 처리를 위해 개최된 파리강화회의의 기본 원칙이되어 폴란드 체코슬라바키아, 유고슬라비아, 핀란드 헝가리 등이 독립하는 계기가 되었다.하지만 승전국의 식민지에는 이원칙이 적용되지 않았다.
고종의 의문스러운 죽음
1919년 1월21일 고종은 시녀가 건넨 식해를 마시고 잠자리에 들었고, 얼마뒤 갑자기 복통을 호소하며 사망하였다. 조선총독부는 고종의 사망이 뇌일혈로 인한 것이었다고 발표하였지만, 고종이 일제에 의해 독살 되었다는 지하신문을 통해 널리 퍼져 나갔다,.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의 결혼이 예정된 상황에서 일제가 독상할 이유가 없었다는 반론도 있었지만 당시의 조선인들은 독살설을 사실로 믿었다.
이태왕전하 국장의 성의
1919년 3월3일에 치러진 고종의 장레식 과정을 담고있는 화보이다, 당시 사진들은 스크랩하여 인쇄하였다
무오년 독감
무오년 戊午年 독감아러 불렸던 스폐인 독감은 인류역사상 단기간 내에 가장 많은 사람이 죽은 전염병이었다. 당시 조선에서는 1918년 9월경에 첫 발병자가 발견 되었다.1919년 1월까지 극성을 이루었는데 740만명이 감염되었고 그중 14만 명이 죽었다. 이 기간에 각 학교가 휴교하고, 관청도 문을 닫았으며, 사람이 없어 추수하지 못한 논이 절반을 넘었다.
파리강화회의
제1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리고 2개월 뒤인 1919년 1월18일 900만명 이상이 사망한 전쟁에 대한 책임과 영토의 조정 , 평화 유지를 위한 회의가 파리에서 개최 되었다 회의에서는 국제연맹의 설립과 베르사이유 조약등이 합의 되었고 1920년 1월 국제연맹이 발족함에 따라 회의는 종료되었다. 국내에서 윌슨의 민족 자결 선언과 논의될 파리강화회의에 거는 기대가 매우컷지만, 현실은 연합국중심으로 한 열강들의 국제질서를 재편하는데 불과 하였다.
"조선인는 그 모국에서 공민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며"
오로지 과중한 납세의 권리만 지고 있을뿐
참정권을 비롯한 일체의 권리를 박탈하였다.
일본헌병과 경찰의 폭압을 겪으며 이 불운한 나라는
파탄적니 빈곤과 강탈에 시달리는 운명에 처해졌다.
조선인은 가장 필수불가경하며 기본적인 집회, 언론 출판의 자유마저
박탈당하여, 고초와 부조리에 대해 항의함으로써 처해있는 가공할
상황에 대해 공개적으로 대응할 기회마저 갖지 못하였다.
희망을 북돋는 어떤 계몽적 활동도 일본당국의
무지비한 박해의 대상이 되었고, 민중교육을 위한 어떠한 활동을
시도하면 불온행위로 몰려 잔혹하게 탄압당한다.
대한민국의회 독립선언서
1919.03.17
덕수궁국장화첩
'덕수궁'은 당시 황위를 순종에게 선양하고 덕수궁에 기거하던 고종을 지칭하는 말로 경성 일보사에서 고종의 장례식 장면을 사진으로 촬영하여 엮은 화첩이다. 고종의 장례삭은 총독부의 통제아래 일본식으로 진행되었다.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뉴스
주간으로 발행되는 영국의 정기 간행물로, 5월17일 자는 1919년 5월 7일 파리 강화회의에 참석한 독일 대표단이 기념촬영하는 장면이 표지로 사용되었다. 5월7일 강화조약 초안이 독일 측에 제시된 뒤 약간의 수정을 거쳐 6월28일 강화회의 조인식이 이루어 졌다. 1919.5.17
동척십년사 1918/ 동양척식주식회사 /개인소장
1909년 동양척식 주식회사가 설립된 이후 1918년까지의 10년사를 정리하여 출간한 책이다.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영국의 동인도 회사와 간이 일본정부의 직접적 지배 아래서 조선의 토지와 자원을 수탈할 목적으로 설립된 식민지 착취기관이다. 책에는 업무의 종류, 금융사업, 토지의 경영, 식산 산업, 식민사업 등의 내용을 차례로 정리 하였다.
민족의수난 -105인사건 진상 1955 선우훈
황실화보 /1910
일본이 강제병합을 기념하며 만든 황실 화보이다. 일왕 가족의 사진과 병합후의 일본 제국의 지도, 이한 병합사. 조선관광기 등이 담겨 있고, 작위를 받은 조선이네 대한 설명과 조선통독부관제와 주요간부의 이름이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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