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에서의 3.1운동 준비
평양에서의 3.1운동 준비는 기독교, 천도교 별로 각각 진행 되었다. 기독교의 3.1운동준비는 장로 이승훈이 큰 역할을 하였다. 2월7일 105인 사건의 동지인 선우혁을 만나 독립운동을 협의하였다. 이어 선천과 평양, 서울을 오가며 기독교계 인사의 독립운동 참여를 규합하였다. 15일에는 평양의 기홀병원에 입원하여 16일 장로교계 장대현교회 목사 길선주와 감리교계 남산현교회 목사 신홍식에게 민족대표에 참여한다는 확답을 받았다. 서울에서와 같이 3월1일 독립선언식을 개최 하는 것이 결정되었고 행사의 세부적인 사항이 결정되었다. 장로교게는 26일 부터 숭덕학교와 숭현여학교에서 태극기와 전단을 만들었으며, 감리교계는 남산현교회를 중심으로 독립선언식을 준비하였다. 천도교는 도사 임예환과 나인협이 24일 평양에서 서울로 올라 갔으며, 25일 중앙총부에서 민족대표로 참여하는 것을 결정 하였다. 또한 평양대교구장 회의를 소집하여 대교구내 주요 인사들이 평양으로 모여 독립선언식을 준비하였다.
기홀병원
평양에서 활동하던 감리교 선교사이자 위사인 윌리암 홀을 기념한 병원이다.1818년 2월18일 이승훈이 이병원에 입원하였으며 16일 장대현교회 길선주와 남선교회목사 신홍식의3.1운동 참여를 다짐받었다.
평양구시가지[연차보고서] 1916/조선총독부
정해문 정해문에서 바라본 평양의 시가지 전경이다. 기업강습소의 모습이 보인다.
평양 정거장 / 1910년대
1906년 문을 연 평양정거장의 모습이다. 1919년 2월16일 밤 이승훈은 이곳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남대문정거장
3.1운동 준비 과정에서 서울과 각 지방과의 연락은 철도를 통해 이루어 졌다. 이승훈은 기차를타고 정주, 선천, 평양, 서울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게획하였으며, 신흥식, 임예환, 나인협 등도 기차를 이용해 평양에서 서울로 왔고 남대문 정거장에서 내렸다.1918년 서대문정거장이 운영을 정지한 이후 남대문 정거장은 유일한 서울의 관문으로 많은사람들이 이용하여 늘 분주 하였다. 더욱이 2월 말부터는 고종의 인산을 구경하기 위해 서울을 찿은 사람까지 더해져 남대문정거장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이러한 점을 활용하여 학생들은 3월5일 남대문정거장 앞에서 대규모 만세운동을 전개하며 3.1운동을 이어가게 되었다.
세브란스병원
세브란스병원은 남대문정거장 건너 복숭아골에 있어 지방에서 올라온 기독교계 인사들이 쉽게 드나들었다.
2월12일 이승훈은 송진우와 만나 천도교와 연합할 것을 합의하고 이곳으로 와 병원에서 근무하는 이갑성과 병원 내 남대문교회의 조사 함태영을 만나 소식을 전하였다.12일과 14일 에는 이갑성이 음악회를 구실로 김원벽, 한위건 등 학생들을 초대해 독립운동을 모의 하였고, 25일에는 외부의 눈을 피하고자 학생대표 강기덕이 위장입원 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병원에 근무하던 스코필드박사는 3.1운동위 모습을 사진으로찍어 해외에 알렸다.
경성안내
경성안내라는 안내문에 지도와 기차시간표가 담겨있다. 경성과 평양을 오가는 기차의 시각을 확인할 수 있다.
기차시간표
접어서 가지고 다닐 수 있도록 만들어진 기차시간표로 조선은행에서 발행 하였다. 기차선별과 구간별 요금, 급행과 등급별 기차의 시간을 알 수 있다.
남대문 정거장을 출발하는 급행열차 [조선철도선로안내] 1911/조선총독부 철도국
남대문 정거장 사진엽서 / 일제강점기
1900년 7월 한강철교의 개통으로 노량진-서대문정거장 사이의 철로가 연결되었으며, 목조단층건물의 남대문 정거장이 설치되었다. 1915년 기존 역사를 철거하고 새로운 승강장과 시설을 갖추었다.
남대문교회,[세브란스연합의학교 제7회 졸업생 기념앨범] 1917/연세대학교 의과 대학 동은 의학 박물관
남대문교회는 제중원에 부설된 제중원교회가 그 전신이다, 1904년 제중원이 남대문 밖으로 옮겨와 세브란스병원으로 바뀔때 함께 옮겨왔고. 1910년 한옥교회당으로 고쳐 지었다. 3.1운동당시 이갑성 집사.함태영 조사로 활동하고 있었고, 기독교게와 학생들이 규합하는 장소가 되었다.
세브란스병원과 주변전경사진[한국의 언더우드] 1918 릴리어스언더우드
선교사 호러스 언더우드의 생애와 업적을 담은 책이다. 책에 보이는 세브란스병원은 1904년 제중원을 남대문 밖으로 옮겨 근대식병원을 세우고 설립기금을 기부한 사업가의 이름을 따 개칭한 것이다. 1919년 2월12일과 14일 이갑성은 음악회를 빌미로 세브란스 구내의 자택으로 전문학교 학생대표들을 물러 독립운동에 참여할 것을 독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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