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역사기억여행 (2010~) <여행지>/3.삼일운동기억

3.1운동을 기획하다.

동방박사님 2019. 4. 9.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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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한청년당 파견경로

파랑선- 국내

빨강선- 일본

보라선- 만주연해주

오렌지선- 파리강화회의


"우리가 만세를 부른다고 당장 독립이 되는 것은 아니오, 그러나 겨례의 가슴에 독립정신을 일깨워 주어야 하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꼭 만세를 불러야 하겠소!"

-손병희, 3월1일의 독립선언을 앞두고 천도교 간부들에게 다짐한 말-


3.1운동을 기획하다

일제에 의해 강제 병합된 식민지 조선의 현실은 비참 하였습니다. 착취와 차별은 일상화 되었고 군대와 경찰

을 통한 공포분위가 지속 되었습니다. 왜곡된 현실을 타개하기 독립운동은 계속 되었지만 그만큼 탄압은 심해 졌습니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무렵 민족의 운명은 민족 구성원이 스스로 결정한다는 민족자결주의가 조선에 전해 졌습니다. 여운형 등은 파리강화회의를 통해서 조선이 독립할수 있다는 희망을 보았습니다. 1919년 2월8일,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먼져 독립선언을 외쳤습니다. 이는 3월1일 만세운동에 마중물이 되었습니다. 2월24일 천도교, 기독교, 학생등은 각각 준비하던 독립선언을 함께 진행하는 것으로 뎔정 하였고 불교도 참여하게 되엇습니다. 3월1일 오후2시 독립선언식을 개최하는 것이 정해지고, 독립선언서는 비밀리에 인쇄되어 전국으로 배포되었습니다 모든준비는 이렇게 완료되었습니다. 


독립의 희망을 보다

러시아의 레닌과 미국의 윌슨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는 식민지 조선에 독립의 희망을 불러 일으켰다. 1918년 11월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되자 윌슨의 전후 정책인 14개조를 선전 하기위해 찰스 크레인은 중국을 방문했다. 그를 만난 여운형은 민족자결의 원칙이 논의될 파리강화회의를 통해 한국이 독립할 수 있다는 높은 기대를 하게 되었다. 그는 크레인에게 한국 독립에 관한 청원서2통을 미국대통령 윌슨과 파리정책강화회의에 전달해줄 것을 부탁하였다. 이와 더불어 국내와 일본, 만주 및 연해주에 사람들을 파견하여 국제여론을 환기시킬 목적으로 독립운동을 종용하였다. 상하이의 신한 청년당 뿐 아니라 미국내 안창호의 대한인 국민회도 파리강화회의에 대표 파견을 걱정 하엿고, 신한회 에서는 독립청원 결의서를 미국정부와 의회등에 보냈다.

연해주의 대한민국의회도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3.1운동 봉기에 매우 결정적인 계기와 구심점을 제공 하였다.



파리강화회의에 보낸 독립청원서 (1919.4)


이 문서는 김규식이 미국 윌슨 대통령과 파리강화회의 의장 클레망소, 영국 전권대표 로이드조지 등 각국대표자들에게 발송한 독립 청우너서이다. 1919년 2월 1일 상하이를 출발한 김규식은 3월13일 파리에 도착하여 "파리공보국"이란 명칭의 사무실을 설치하고 공식적인 외교활동을 시작하였다.



신한청년 창간호 (1920.3)

신한청년은 상하이의 신한청년당에서 발행한 기관지로, 주필은 박은식과 이광수였다. 1919년 12월1일에 발행된 창간호에는 독립선언서를 비롯한 독립운동사료와 3.1운동 당시 일제의 만행과 그 자료 등을 담고 있다.

신한청년은 창간호 이후에 계속 간행되지 못했지만 창간호가 재간행되어 국내에 유포되었음을 당시 신문기사와 지금 전시된 신한청년을 추정할 수 있다.  


도교에서 독립을 외치다

일본에 유학하고 있던 조선인 학생들은 이전부터 웅변회, 토론회 등을 통한 항일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때마침 미국 내 한인 들이 파리강화 회의에 대표를 파견하고 미국대통령에게 독립을 청원 하기로 결의 하였다. 이를 담당할 실행위원 10명을 뽑고, 이관수에게 선언서를 작성하도록 하였다. 1월 말에는 송계백을 국내로, 이광수를 상하이로 파견하여 이사실을 알렸다. 1919년 2월8일, 30년만에 큰 눈이 내린 가운데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 모인 학생들은 도쿄의 한복판에서 독립선언서를 소리높여 낭독하였다. 낭독을 마치자마자 경찰들이 들이닥쳐 학생들을 체포하고 해산시켰다. 이산건은 3.1운동을 촉발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고, 이후 일본유학생 678명 중 절반이 넘는 359명은 귀국하여 3.1운동에 참여 하였다. 






조선학생대검거

60여명 니시간다서 구속, 약10여명 부상

도쿄에 유학중인 조선학생 일당 580여 명이 오후 1시부터 간다구 니시오가와정 2정목













민족대연합을 형성하다

1919년 1월20일경 천도교는 독립운동의 세가지 원칙*대중화, 일원화, 비폭력)을 정하고 독자적인 독립운동을 구상하였다. 기독교도 장로교, 감리교 등 각 교파별로 독립운동을 모색하고 있었으며, 전문학교 학생들을 주측으로 한 학생들도 독자적인 독립운동을 계획하고 있었다. 이러한 개별적인 움직임에서 점차 민족대연합 전선을 형성하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거사를 5일 앞둔 2월24일 천도교와 기독교가 연합하였고 불교의 참여도 결정되었다. 연합이 확실이 성사되자 학생들도 이레 합류하기로 하였다. 유림과 연결도 시도 하였지만, 아쉽게도 성사되지 못하였다. 독립선언서는 2월27일 인쇄되어 전국에 배포되엇고 2월28일 밤 민족대표들이 모여 다음날의 행사를 최종 논의 하였으며, 이때 독립선언식 장소가 탐골 공원에서 태화관으로 변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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