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기념관
건립자 : 백범기념관 건립위원회
소재지 : 서울특별시 용산고 효창동 255번지
백범 (白凡) 김구(金九) 선생 (1876~1949)은 그 생애를 오직 조국과 민족의 독립과 통일을 바치신 우리 겨레의 영원한 스승이시고 위대한 민족의 지도자이시다. 백범기념관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높은 문화를 가진 자주. 민주. 통일 조국을 건설하기 위하여 일생을 분투하신 겨레의 큰 스승 백범 김구 선생의 삶과 사상을 널리 알리고 계승 발전시키기 위하여 2000년 6월에 기공하여 2002년 10월 22일 개관하였다.
근. 현대사 전문 역사박물관인 백범 기념관은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와 함께 한 백범 김구 선생의 삶과 사상을 통해 대한민구 임시정부의 역사와 한국 근. 현대사를 이해하고 조국의 자주. 민주평화 통일을 지향하며 민족의 아름다은 문화를 발전시켜 아아가는 온 겨레의 문화적 삶의 공간이다. 백범 기념관은 전시관 1층과 2층에 백범 김구 선생의 일대기와 한 근현대사 관련 각종 기록 및 자료를 전시하고 있으며 전문자료실과 각종 교육프로그램 및 문화행사 등에 활용될 수 있는 교육장과 대회의실 그리고 컨벤션홀 등 다양한 교육. 문화 공간을 갖추고 있다.
백범 김구 선생님 생애 요약
백범 김구 선생은 평생을 조국의 독립과 자주 평화통일에 모두 바친 민족의 지도자이며 겨레의 큰 스승이다. 선생은 1876년 황해도 해주 백운방에서 가난한 집안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서당교육을 받았으며, 1893년 동학에 입도하였고 1894년 팔봉 접주(八奉接主)로 임명되었다. 황해도에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선봉장이 되어 해주성을 공격하였다. 동학농민 가락국수 후 황해도 신천군 청계동 안태훈의 집에 머물면서 유학자 고능선(高能善)에게 유학을 배웠으며, 만주지역을 시찰하다가 의병활동에 가담하였다.
1986년에는 치하포에서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에 대한 복수를 위해 일본 중위 쓰시다를 처단하고, 체포되어 인천감리서에 투옥되었다. 선생은 옥중에서 신서적들을 읽으며 서양 근대문물을 접하였고, 탈옥 후 승려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1899년 고향으로 돌아와 황해도 각지 학교를 설립하는 등 신교육운동에 노력하였다. 또한 1905년 서울에서 을사늑약 무효투쟁을 벌였다. 1907년에는 국권회복 운동의 국내 최대 비밀조직이었던 신민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1911년 안악 사건. 105인 사건 등으로 수감되었다. 1915년 가출옥한 뒤 고향에서 농장의 관리인 생활을 하며 농민계몽운동에 헌신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선생은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임시정부에서 경무국장. 내무총장. 국무령 등을 역임하면서 당시 어려운 상황에서도 임시정부를 지키며 활성화에 전력하였다. 이후 한인 애국단을 조직하고, 1932년 이봉창. 윤봉길 의거를 일으켜 내외에 큰 영향을 끼쳤다. 선생은 일제의 추격을 피해 피신생활을 하면서, 한인 청년들을 중국 군관학교에 입학시켜 군사훈련을 받게 하는 등 다가올 독립전쟁에 대비하였다. 1940년 중칭에 정착한 선생은 임시정부 주석(主席)으로 한국광복군을 조직하여 군사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을 이루었고 연합국으로부터 전후 한국의 독립을 보장받는 등 항일운동의 최선봉에서 조국 독립운동을 위해 투쟁하였다.
1945년 해방된 조국에 돌아온 선생은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에서 결정된 미국과 소련의 신탁통치를 반대하고, 민족 스스로의 통일독립국가 건설을 주장하여 반탁운동을 전개하였다. 1948년에는 남한만의 남북협상에 나섰다. 이후 선생은 민족통일을 위한 노력을 전개하다가, 1949년 6월 26일 통일 반대세력 및 친일파 세력의 흉탄에 서거하였다.
백범 김구 (1876~1949) 연대기
1876 황해도 해주에서 김순영과 곽낙원의 외아들로 태어남
1887 양반이 되기로 결심, 과거를 위한 서당공부 시작
1892 과거낙방, 관상 공부하며 마음 좋은 사람이 되기로 결심
1894 황해도 동학농민군의 선봉장이 되어 해주 성공 격
1896 치하포에서 국모 보수 (國母報讐)로 처단
1903 아버님 탈상 후, 황해도에서 교육사업 시작
1907 국 권희복을 위한 신민회 가입, 황해도 총감으로 활동
1911 안악 사건으로 옥살이
1919 3.1 운동 후 중국 상하이로 망명
임시정부의 경무국장, 내무총장, 노동부 총판, 국무령 역임.
1931 한국 애국단 조직
1932 이봉창. 윤봉길 의사 의거로 위기의 독립운동을 되살림
1940 한국광복군 조직, 본격적 군사활동 전개
1941 일본에 선전포고
1945 미군과 국내 진입 작전 준비, 환국, 신탁통치 반대운동 전개
1949 6월 26일, 친일파 반통일 세력에 의해 서거
백범의 교육활동
백범 김구 선생은 힘이 없어 나라를 잃었으니 새로운 나라는 힘 있는 나라가 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 힘은 무력(武力)도아니요 부력(富力)도 아닌, 바로 아름다운 문화의 힘이라고 말하며, 세계적으로 어떤 나라도 한 일이 없는 문화를 아름답게 꽃 피우는 문화국가를 만들고자 하였다. 그리고 아름다운 문화의 힘이라고 말하며, 세계적으로 어떤 나라도 한 일이 없는 문화를 아름답게 꽃 피우는 문화국가를 만들고자 하였다. 그리고 아름다운 문화의 힘은 건전한 철학에 기초한 교육을 통해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였는데, 이는 그의 어린 시절 경험으로부터 비롯되었다.
1896년, 을미사면(乙未事變)의 원수를 갚기 위한 목적으로 당행 한 치하포 의거로 인해 인천감리서에 수감되었다. 감옥 안에서 김구 선생은 세계 역사(世界歷史) 세계 지지 (世界地持) 등 신서적(新書籍)을 읽으며 의리는 유학자들에게 배우고, 문화와 제도 일체는 세계 각국에서 채택하여 적용하는 것이 국가에 이익이 되는 일이라는 깨닭음을 얻었다.
또한 감옥 안의 죄수들에게 글을 가르치며 교육을 통해 나라의 힘을 강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는데, 이러한 생각은 이후 선생으로 하여금 교육자의 길을 걷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김구 선생은 학부모를 설득하여 자녀를 교육시키고 새로운 교사를 양성하고 학교를 세우는 일 등을 수행하였으며, 전국을 순회하며 애족정신 고취를 위한 연설을 하기도 하였다.
앞으로도 세계 인류가 모두 우리 민족의 문화를
사모하도록 하지 아니하려는가.
나는 우리의 힘으로 특히 교육의 힘으로
반드시 이 일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는다.
김구 선생의 교육을 통한 구국운동은 광복 후에도 계속되었다. 조국을 건설할 인재양성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1947년 건국실천원양성소(建國實踐養成所)를 개설하여 '대한민국 건국강령'에서 제시한 기회균등의 교육방침을 구체화하고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단국대학교. 국민대학교. 성균관대학교. 건국대학교 등의 설립에 깊은 관심과 애정을 기울이며 나라의 미래인 젊은이들의 교육을 가장 중요한 과제로 생각하였다.
백범 김구 선생의 교육운동은 나 자신, 내 겨례, 내 나라를 위한 교육이며, 새 시대를 준비하고 무화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인재와 지도자를 위한 활동이었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를 주기 때문이다.
백범의 독립운동
백범 김구 선생은 1919년 중국 상하이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경무국장을 시작으로 내무총장, 국무령, 주석을 역임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1928년, 국무령으로 활동할 당시 일제의 탄압으로 국내로부터의 지원이 어려워지자 이를 타개할 목적으로 '편지 정책을'을 실시하였다. 미주와 멕시코, 쿠바 한인사회에 임시정부의 형편과 광복을 위한 노력을 홍보하고 임시정부 지지와 자금지원을 요청하였다.
임시정부의 이름이라도 보전할 길이 막막하여
해외동포들에게 의뢰하는 수밖에 없었다. 동포들에게
사정을 알리고 정부에 성금을 바치게 할 계획을 세웠다.
수신인이 없어 반환되어 돌아오는 경우도 더러 있었지만
회담하는 동포들이 점차 늘어났다.
김구 선생은 이 자금으로 1931년 한인애국단을 창설, 민족독립과 조국광복을 위한 의열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한인애국단 원인 이봉창. 윤봉길. 이덕주. 유진식. 최흥식. 유상근 등이 특공작전에 투입되었으며, 이들의 활동은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이끌어 1933년 김구 선생은 장제스와 면담을 통해 낙양 군관학교에서 한인 청년들의 군사훈련을 실시하게 되었고, 미주 교포들의 재정적 지원과 중국 정부의 협력에 힘입어 1940년 9월 임시정부의 국군인 한국광복군을 창설하게 되었다.
한국광복군은 연합국과 공동작전에 적극 참여하였고 1943년 8월. 인도. 버마 전선에 공작대를 파견하기도 하였다. 1941년 1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일선전 증명서'를 발표하고 1945년 2월 대독 선전포고도 하면서 연합국의 일원으로 일본. 독일. 이탈리아를 상재로 한 전쟁을 수행하겠다는 뜻을 국제사회에 공식적으로 천명하였다.
또한 미국 전략 첩보기구인 OSS와 '독수리 작전;이란 이름으로 공동작전을 추진하였다. 김구 선생은 이들의 국내 진입 작전을 실행하기로 도노반 소장과 합의하였으나, 일제의 항복으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한국광복군이 대일 항전을 펼치고 국내 진입 작전을 시도한 것은 실현 여부와 관계없이 조국의 독립을 자주적으로 쟁취하려는 우리의 자주독립에 대한 의지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왜적이 항복한답니다!" 내게 이 말은 희소식이라기보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었다. 수년 동안 노력한
참전 준비가 모두 헛일이 되고 말았다. 미 육군성과 긴밀히
합작하였는데, 한 번도 실행해 보지 못하고 일본이 항복하였으니,
지금까지 들인 정성이 아깝고 다가올 일이 걱정되었다.
백범의 통일운동
1945년 8월 15일, 우리는 광복을 맞이하였지만 미군과 소련군이 38선을 경계로 한반도에 주둔하여 있었다. 환국한 백범 김구 선생은 남북의 통일. 자주. 독립정부를 수립하고 38선을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38선 때문에 우리에게 통일과 독립이 없고
자주와 민주도 없다. 어찌 그뿐이랴.
대중의 기아(飢餓)가 있고, 가정의 이산(離散)이 있고,
동족의 상잔(相殘)까지 있게 되는 것이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미. 소에 의한 신탁 통 치안이 채택되자 김구 선생은 즉시 신탁통치 반대 국민 총동원위원회를 조직하고, 비상 국민회의를 소집하여 반탁운동을 펼쳤다. 백범 김구 선생은 미. 소의 내정간섭 없이 유엔 감시하에 남북 총선거를 실시해 통일된 국회를 구성하고 통일된 자주독립 정부를 조속히 수렴하였다.
위도로서 38선은 영원히 존재할 것이지만,
조국을 양단(兩斷)하는 외국군대의 경계선으로서 38선은
일각이라도 존속 시킬 수 없는 것이다.
1948년 백범 김구 선생은 북측 지도자들에게 '남북 혐상' 남북 지도자회의'를 제의하였다. 김구, 김규식, 조소앙, 김창숙, 조완구, 홍명희, 조성환 등 당시 대표적 민족주의자들이 < 7 거두 성명>을 발표하여 '남북에 두정부, 두 국가를 형성하게 되면 남북의 우리 형제자매가 미. 소 전쟁의 전초전을 개시하여 총검으로 서로 대하게 될 것이니 이를 막자"고 하였다.
남북협상을 위해 평양에 도착한 백범 김구 선생은 김규식 선생과 함께 김일성. 김두봉과 '4 김 회담'을 열어 외국군대의 동시 철수와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 등을 결의, 공동 발표하였다. 하지만 한반도에는 각각 정부가 세워지고 말았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그해 12월 유엔총회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그해 12월 유엔총회는 대한민국 정부를 합법정부로 공식 승인하였다. 이에 백범 김구 선생은" 절대다수 국가의 찬성으로써 한국을 승인하였다는 것은 우리 독립운동 과정 과정 중에 있어서 영원히 기억할 만한 거대한 역사적 사실이다"라고 말하며 대한민구 정부 승인을 축하하였다. 각각의 정부가 세워진 이후에도 김구 선생은 평화적 협상을 통한 통일 대한민국을 희망하며 이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였다.
1940년 6월 26일 서거, 그리고...
1949년 6월26일, 백범 김구 선생은 안두희의 흉탄에 의해 그토록 바라던 통일 대한민국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그날은 일요일이었고 비보(悲報)를 접한 시민들이 경교장으로 몰려와 조문 (弔問)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장례식은 '국가와 민족'을 합한 국민장, 10일장으로 결정되었다.
안장 지는 생전 김구 선생의 뜻대로 삼의사 (안중근 가묘.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의 묘와 임정요인(이동녕. 조성환. 차리석)의 묘가 있는 효창원으로 결정하였다. 이곳은 광복 이후 김구 선생이 순국선열들의 유해를 모셔와 직접 조성한 애국선열묘역으로, 백범 김구 선생에게 의미 깊은 곳이었다. 7월 5일 오전 10시 30분 경교장을 출발하여 서울운동장 (현 동대문 역사문화공원에서 영결식이 거행되었다. 이후 을지로. 남대문로. 서울역. 용산 삼각지를 거쳐 효창원으로 이동하였다. 김구 선생과 마지막 인사를 하려는 시민들이 거리에 가득하여 장의 행렬은 가다 멈추기를 반복, 오후 늦게 효창원에 도착하여 하관식을 마무리하였다.
김구 선생이 서거한 후, 안두희는 현장에서 체포되어 무기징역 판결을 받았으나 15년 형으로 감형되었다. 그리고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이후, 안두희는 국방부 특명 4호로 남은 형을 집행정지 처분받고 육군 소위로 복귀하였다. 3년에 걸친 동족상잔의 비극이 있었고, 전후(戰後) 처리 과정에서 김구 선생 암살 사건은 해결되지 않은 채 추도식조차 시행할 수 없었다.
1960년, 백범 김구 선생 서거 이후 각계 인사 3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첫 추도식을 엄숙히 거행할 수 있었다. 이 자리에서 안두희의 배후를 밝히기 위한 '김구 선생 시해 진상규명투쟁위원회'를 구성하여 당국에 진상 규명을 요구하였다.
1993년 국회에 '백범 김구 선생 시해 진상규명회 국회 특별법 제정 청원서'를 제출하였고, 1995년 이르러 국회 차원에서 진행된 법제사법위원회 산하 '백범 김구 선생 시해 진상규명 조사위'는 "백범 김구 선생 암살은 이승만 자유당 정권의 비호 하에 이루어진 정권적 차원의 범죄'로 규정 의결하고, 국회 본회의에 상정하였다.
대한민국의 문지기
백범 김구 선생은 일생을 조국의 독립과 평화통일을 위해 헌신하며 겨례의 큰 스승으로 불리고 있다. 그는 1919년 이제 막 출범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찿아가 서대문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할 때 독립정부가 조직되면 정부의 뜰을 쓸고 문을 지키는 문지기가 되기로 결심하여 호를 '백범'으로 정한 것을 예로 들며 '문지기'가 되기를 청하였다.
나라의 도립을 위해 작은힘이라도 보태고 싶어 했던 백범 김구선생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경무국장. 내무총장. 국무령. 주석에 이르기까지 27년간 임시정부의 주요 직책을 역임하였다. 그는 이를 개인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임시정부의 인재난과 경제난 때문이라고 겸손해 하며 '쟁두(爭頭)를 피하고'쟁족(爭足)운동'을 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서로 머리가 되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낮은 일 부터 열심히 하려는 다리싸움을 해야 하며 모든 일을 발로 실천하고 몸소 땀을 흘려 조국을 건설하고자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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