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자유테마여행 (2006~) <여행지>/6.인물기념관

우당 이회영 기념관 방문

동방박사님 2021. 7. 31.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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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영기념관 입구

이회영 기념관

남산 기슭은 우당 이회영 가문과는 인연과 내력이 깊은 곳이다. 경주 이 씨 백사 공파 으뜸이 되는 백사 이항복이 남산 북쪽에 살았다. 백사 9대손 귤산 이유원은 백사사에 살던 집터를 수습하여 당시 쌍희정으로 희복 하였다. 이곳에서 우당과 6형제 등 가솔들은 시련에 처한 나라를 구하고자 뜻을 모모 하였다. 쌍희정에서 몇 백 걸음에 이를 수 있는 곳에 상동교회를 세운 것도 우연이 아니다. 남산자락이 북쪽으로 이어지면서 작은 능선을 이루는 곳에 종현 성당(명동성당)이 있고 그 앞쪽 일대를 저동이라고 한다. 갑신정변 이후 청나라에서 온 위안스카이는 이곳에 있는 거대한 저택을 숙소로 정했다. 이희영네 집이었다. 이희영 가문이 남산자락에 남긴 흔적과 기록은 여럿이다. 그들이 독립운동을 위해 국경을 넘은 지 110년 만에 비로소 남산 북쪽에 돌아왔으니 이희영 기념관이다.   

 

우당 이회영

인간 이회영의 폭은 넓었다. 막힘도 없었다. 그는 조선의 지배이념인 심리학을 넘어 양명학(강화학파)에 몰입한 소론 출신이었다. 열 정승을 낳은 집안사람으로서 과거시험이 아 신학문을 절에서 공부했다. 종을 풀어주고 과부가 된 여동생을 개가 시킨 근대인이었고 숯장수 출신 목사와 벗하면서 평민들의 교회 지하실에서 새 하늘을 도모했다. 백지 위임장(헤이그 외교독립운동)을 받을 정도로 황제와 가까우면서도 정작 공화주의자였고, 조국과 겨레를 한없이 사랑하되 주인 없는 공평한 세상, 더 많은 자유를 만인에게 누리는 현실을 꿈꾼 거침없는 아나키스트였다.

그는 언제나 자기 내부에서 발견한 모순을 타파하면서 새로운 경계로 이동해갔다. 그는 가장 부자였고 가장 가난했다. 의로운 생각이 바로 행동이었던 그는 패배를 몰랐고 실패 또한 몰랐다. 그의 피는 말고 뜨거워 늘 순혈의 속도로 내달렸다.  가장 심연이 가장 표면이었다.그는 자유였다. 스스로가 모든 해방이었다. 그는 내내 전투 체제이면서 한없이 고요했다. 호수가 활화산이었다. 그는 모든 행동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이름과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스스로 잊었다. 그는 가장 앞이면서 가장  나중이었다. 그는 자신이 나아갈 수 있는 마지막까지 나아갔던 최후의 인간이었다.

 

 

서간도 시종기

이회영의 아내 이은숙이 이회영과 6형제가 서울을 떠나 서간도에 세운 최초의 무장독립기지이자 학교인 신흥 무관학교 설립 과정, 베이징과 텐진 망명시절, 다시 국내 '망명, 시절 손녀들과 아들의 연이은 죽음, 이회영의 죽음과 독립하던 아들의 투옥, 광복과 전쟁 이후 까지를 한 올 한 올 잇고 있는 독립운동가의 피어린 수기이다. 사대부 여인으로 남편응 따르는 일에서 출발한 그는 안팎으로 치열한 시련을 이겨내면서 마침내 독립운동가로 우뚝 선다. 이 책은 서간도를 중심으로 전개된 독립 무장운동의 생생한 현장을 삶으로 입증하고 있는 기록 보고문학의 절정이다.

'서간도 시종기'란 서간도의 시작과 끝을 기록하였다는 뜻이다. 이는 책이름이자 이회영과 6형제의 활동과 삶을 기록으로 압축하는 말이기도 하다.

 

젊은 시절 이회영은 밀려오는 외세의 거센 바람과 검은 풍운에 맞서 겨레와 나라를 구하는 길에 나선다. 그의 방략과 행동은 명분론에 함몰되지 않고 늘 실질적으로 현실에 뿌리내린 구체로서 생동하였다. 개풍 삼포 농장 경영은 인삼을 상품으로 개발하여 경제주권을 세우고자 하는 뜻이었고, 누대에 걸친 경주가 시 백사 공파 세거지인 서울 남산 서북 사면에 있는 쌍회정 아래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한 조직활동에서도 이를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민족운동가 아내의 수기, 서간도시종기 ㅣ이은숙ㅣ 정음사ㅣ 1975년 초판

서간도 시종기 육필원고 (1966년)

이은숙이 신흥무관학교 설립 과정, 베이징, 텐진 망명시절, 다시 국내 잠입 활동, 손녀 둘로가 아들의 연이은 죽음, 이회영의 사망과 아들의 투옥 광복과 한국전쟁 이후까지를  기록한 독립운동 수기.

 

체고슬라바키아 군단공동체에서 운영하고 있는 체코군단열차전시관

 

11. 시베리아 작전지도 (2)  12. 잡지 (1918~1920)  13. 우표 (1919~1920) 14. 역사 엽서 (1919~1920) 15. 휴대용 식기 (군용) (1918~1920) 16. 일본 소녀 초상화 손수건 (1919~1920)

 

6. 사진첩 (1919~1920)  7. 체코슬로바키아 혁명 메달 (1920)  8. 체코 슬라바 키아 핀 배지(1)(2) (1920)  9. 체코 슬라바 키아 군복 배지 (1920) 10. 체코슬로바키아 국기 (1919/1920)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공동체 소장

 

1920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선포한 독립전쟁 원년이었다. 정부를 세운 지 두 해째였다. 여러 독립운동 세력은 독립전쟁을 개시하기 위하여 규율을 세우고 훈련을 거듭하는 등 무장 대오를 정비하여 최후의 승리를 얻고자 하는 결전 활동에 들어갔다. 신흥 무관학교 출신 다수는 그해 여름 봉오동 골짜기로 향했다. 이곳에서 일본군 월강 추격대를 물리친 독립군은 10월에 백두산 길목인 중국 지린성 청산리에 이르렀다. 눈밭에서 짚신을 신고 굶어가면서 엿새 동안 치른 전투에서 독립군은 커다란 승첩을 거두었다. 이 독립전쟁에서 사용한 무기 상당수는 제 이차 세계대전 과정에 유럽 동부전선에서 기차로 이동하여 블라디보스토크항에서 귀국을 기다리고 있던 체코 군단에게서 획득한 것이었다. 체코인에게 얻은 무기는 대략 소총 1,200 연정 기관총 6정, 박격포 2문, 권총, 수류탄 등이었다. 무기 구입 대금은 돈이나 금붙이뿐 아니라 여인네들이 뽑아 바친 비녀, 은가락지로 지불했다.  

 

1. 모신 소총 , 모신 소총 총검 2. 아리사카 38식 소총 , 아리사카 소총 총검과 케이스

 

3. 브라우닝 권총과 케이스 :FN Browning M1900, Case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제거할 때 사용했던 덧과 동종의 권총

 

4. 나 강권 총

 

5. 시베리아 작전지도

 

체코 슬라바 키아 군복 1919/1920.  체코슬라바키아 군화(연도미상). 체코슬라바키아 군모 1919/1920. 벨트 (연도미상)

 

흑색 공포단 조직과 마지막 임무

사회는 나의 사회요 나는 사회의 일분자니 사회가 없으면 나도 없는 것을 생각하고 공익을 경영하여 사회에 대한 책임을 다하여 행하며...  이회영 <국민보> 1914 5월 30일 자

 

푸젠성 민단편련처 동지들

1927년 가을 베이징 이회영의 후원을 받은 이을규 정규 형제와 류기석 류 지청 이기환 등이 상하이 등지의 한중일 동지들을 규합하여 푸젠성 취안저우에 밈남25현민단 관련처라는 이름으로 토비 역 탈에 맞서 농민 자위군을 조직하여 활동했다. 이 농민 자위 운동은 이듬해 1928년 6월 동방 아나 키스 연맹으로 발전했다.

 

우당 이회영 친필 편지봉투 (천 봉투)

이회영이 서울에 와 있던 아내 이은숙에게 보낸 편지 겉봉. 발신자는 상하이 한 구로이고 수신자는 경성 당주동 12번지. 수신인은 이현숙. (이회영의 딸)

 

이회영 낙관

이회영이 새긴 낙관 11점. 긴 망명 생황 동안 배고픔을 이기고자 피리를 불고 묵란을 쳐서 항일운동자금을 구하였던 우당 이회영은 돌을 깎아내도 글자를 일으켜 이름과 여러 뜻을 거기에 새기고 또 아로새겼다.

 

이회영 사진 ㅣ 인간 대지의 별이 되다

이회영 가문 내력

조선 최고의 가문,   조선 최고의 부자,   조선 최고의 형제

기록된 우리 역사 이천 년 이래 겨레가 위기에 처했을 때 떨쳐나선 숱한 인물이 있었다. 단기필마로는 단연 안중근, 군사조직적 대응은 불세출의 명장 이순신, 집안으로는 이회영과 6형제를 서습없이  꼽을 수 있다. 이들은 신분, 재산, 목숨, 자식, 우정, 눈물, 재능, 배고픔마저 조국 독립을 위해 바친 거룩한 인간상을 유산으로 남겼다. 우당 이회영과 6형제, 건석 철회 시호, 건영석영철영회영호영 , 떼어서 읽을 수 없는 6형제 이름. 건설 철회 시호, 인물을 섬기는 것은 그를 따르기 위함이다.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백사 이항복 이래 경주 이 씨 백사 공파는 열 명이 넘는 정승과 판서를 냈다. 정승은 실력과 인품을 두루 갖췄야만 이를 수 있는 자리라는 점에서 이 집안의 전통과 내력을 이어내는 일은 세습되는 왕족과는 다른 사회적 책무를 안팎으로 거듭 수행해 내에만 가능했다. 무엇보다 나라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이들의 행동은 남달랐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이 가문을 일러 삼한갑족이라 불렀다. 삼한이란 우리 땅을 이르는 말이고 갑족이란 으뜸 집안이라는 뜻이다. 이희영 형제는 서울 명례방(명동) 장단과 개성, 양주 일대, 진위(평택)등지에 넓은 땅을 두루 가지고 있었다. 왕실에서 받은 땅이 많았다. 나라가 일제 수중에서 떨어지자 이들은 전 재산을 서둘러 정리해서 서간도로 떠나는 일을 결행했다. 총칼로 빼앗긴 나라를 총칼로 되찾고자 무장투쟁의 길로 나셨던 것이다. 모든 집안사람들이 이와 같이 목숨과 재산을 송두리째 바쳐 나라를 구하는 투쟁에 나선 경우는 한국을 넘어 세계적으로 드문 일이다. 

 

우당 가문 서책  고서 13권

이회영은 서간도를 떠 너면서 평소 재능을 아끼던 최남선에게 서책을 맡겼다. 집안 대대로 내려오던 묵은 장서였다. 광복 뒤 최남선은 서책의 행방에 대해 외면했다. 청주 사는 송인택이 구입한 고서에서 우당 집안 장서 기록을 발견하고는 이를 기증했다. (2004.10.12) 책 몇 권이 돌아오는데 94년이 걸렸다.

 

경주이씨 족보 초안

조선 최고의 부자 

현재까지 조사된 우당 이회영 가문이 독립운동에 사용한 재산

 

이시영 환국 

6형제 중 다섯은 독립운동 과정에서 세상을 떠났다. 다섯째 이시영만 홀로 광복을 맞아 환국하였다. 다섯째 이시영만 홀로 광복을 맞아 환국하였다. 이시영은 김구와 동행하며 돌아오돈 상하이 공항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1945년 11월 5일

꽃다발을 목에 건 김구 주석, 안미생(안중근 의사 조카딸로 김구의 며느리 ) 중절모를 쓰고 눈물을 닦고 있는 이시영, 가운데 소년이 이종찬(10세)

 

이회영의 최후 (사진 한 장, 피 묻은 솜옷)

망명을 떠난 순간부터 무장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제국주의 왜적에게 직접 물리력을 행사하는 아나키스트 행동조직을 지속적으로 지도, 운영해 오던 혁명가 이회영. 그는 노구를 이끌고 중국인들과 항일 공동전선 형성, 지하 조직망 구축을 위해 비밀리에 배(영국 배 남창호 밑바닥 4등 선실)를 타고 상하이를 떠나 만주로 향했다.

이회영은 자신이 가야 할 운명을 이렇게 말했다. 아들 규창이 황푸강 와이탄 부두에서 전송하면서 본 게 마지막 모습이었다. 다렌항에서 다렌 수상서 경찰에 붙잡힌 그는 곧 뤼순감옥에 끌려갔다. 소식을 접한 동지들은 이회영을 구출 코저 하였으나 손쓸 겨를이 없었다. 그곳에서 모진 고문 끝에 이회영은 세상을 떠났다. 유품은 솜을 누빈 따파오, 모자, 해진 신발 한컬례가 전부였다. 예순다섯이었다. 1932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을 강요당한 날과 날짜가 같았다. 동지들의 연락을 받은 딸 규숙이 이를 서울에 있는 어머니 이은숙에게 전보로 알렸고, 일제에 의해 강제로 화장된 유해는 한 줌 재가되어 1932년 11월 28일 경기도 장단 큰 댁으로 돌아왔다.

 

한국의 요구하는 바는 정치가 군사가 보다 더 위대한 인물이니 이가 누구인고 하니 곧 개인의 천직을 다 하는 자, 사회에 적임을 다 하는자, 국가에 의무를 다하는 자.

이회영 <국민보> 1914년 5월 30일 자 

 

이회영과 6형제는 서간도에 터를 잡자마자 경학사와 신흥 강습소를 세웠다. '경학'은 발을 갈면서 공부한다는 뜻이었다. 신흥 무관학교는 1920년 일제의 탄압으로 문을 닫기까지 3,500여 명 독립투사를 길러냈다. 전성기 때 학생은 6백여 명에 이르렀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선포란 독립전쟁 원년에 전개된 한국 무장독립의 양대 대첩인 봉오동 전투 (1920년 6월) 청산리전투 (192010월)는 신흥 무관학교 사람들이 주축이었다.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은 의열단, 한국독립군과 한국광복군의 뿌리가 되었다.    

 

신흥무관학교 학생들

의열단, 한국독립군, 한국광복군의 뿌리 '신흥무관학교'를 세우다.

신흥강습소는 1912년 합니하에 새 부지를 마련하여 강당광 교무실을 비롯해 내무반, 사무실, 숙직실, 식당 등 무관학교로써 격식을 갖춘 교사를 짓는다. 산허리를 따라 지은 18개 건물이 외부에 노출되는 것을 꺼려하였던 신흥강습소는 이윽고 신흥 무관학교로 개편되면서 이석영이 교장을 맡았다. 

신흥 무관학교는 본과와 특과 두 과정이 있었다. 본과는 중학과정으로 4년, 특과는 군사학을 집중적으로 가르치는 과정으로 6개월, 개개 월 속성과였다. 본과 교사는 장도순, 윤기섭, 이규봉 등이 맡고, 특과는 대한제국 무관학교 출신인 이관직, 이장녕, 김창환 등이 맡았다. 본과 교과는 국문, 역사, 지리, 수학, 수신, 외국어, 찬가, 박물학, 물리학, 화학, 도화, 체조 등이 편성되어 있었고, 특과에는 보병, 기병, 포병, 공병 등을 위한 훈련과 총검술, 유술, 격검, 전략전술, 축성학 등을 가르쳤다. 언덕을 오르내리면서 공격전, 방어전, 도강, 상륙작전 등 실전 연습도 학습하였다. 체육은 야간에 파 저 강 70리 행군을 비롯하여 빙상 운동, 축구, 목판, 철봉 등을 통해 신체를 단련했다.

생도들은 새벽 6시 나팔소리가 울리면 3분 이내 복장을 차려입고 검사장으로 뛰어나가 인원 검사를 받은 뒤 체조를 했다. 이어서 체조를 했다. 이어서 청소와 세면을 마치면 각 내무반별로 나팔소리에 맞춰 조반을 들었다. 주석은 대개 좁쌀이었다. 반찬은 콩자반뿐이었지만 생도들은 주린 배를 움켜쥐고 기꺼이 훈련에 열중했다. 

1911년 12월 제1기생으로 40여 명이 졸업했다. 신흥 무관학교는 불의에 항거하는 정신, 임무에 희생하는 정신, 체련에 필승정신, 간난에 인내하는 정신, 사물에 엄결하는 정신. 건설에 창의 하는 정신 등을 좌우명으로 삼았다.

 

신흥 학우보

신흥 무관학교 졸업생 모임인 신흥 학우단 기관지이다. 신흥 학우단은 단순한 졸업생 모임이 아닌 학교를 중심으로 한 독립군단이었다. 신흥 학우 보는 1913년 7월 창간되었으며  보병 전투 연구와 같은 군사학과 역사를 빗냅세다 대동 청년아 안중근 전 등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글이 수록되었다.

1917.1.13ㅣ독립기념관

 

서간도 류허현에 도착한 이회영과 가족, 동지들은 1911년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하여 농업생산과 교육을 위한 교민 자치단체 경학사를 세운다. 독립군 양성소인 신흥강습소는 경학사의 부설기관으로 설립한다. 당시 대흉년과 일제에 의한 피해를 두려워한 중국인들의 경계 등으로 온갖 고초가 따른다.

학교부지를 매입하기 위하여 경학사의 살림을 맡고 있던 이횡 영은 베이징으로 가서 과거 인연이 있던 위안스카이의 도움을 받아 토지 구입과 입적 문제를 해결한다. 입교생 40여 명으로 신흥강습소는 학교 문을 열었다. 학비는 무료였고, 학생들은 이회영의 집에 머물며 공부하고 생활했다.

 

 

영웅이 건설한 나라는 길이 가지 못하되 국민이 합동하여야 세운 국가는 운명이 장구하도다.

 

1986년 삼포 농장 경영

이회영은 경기도 개풍군 일대에 삼포 농장을 경영하기 시작하였고, 농장 수익 일부를 경제 주권확립과 애국계몽운동 등에 지원하였다. 일제는 삼포농장 경영을 지속적으로 방해하였다.

1986년 항일의병 자금을 조달하기 위하여 농장 수익금을 의병들을 위해 후원했다. 1901년 70~80명이 밤에 삼포 농장에  침입하여 관리인들을 묶고 지배인들을 구타하고 5년 근 인삼을 대거 약탈한 사건이 일어나 이를 내장원에 보고하고 수사에 착수하여 용산에서 일본으로 실려가기 직전 인삼 12척을 압수하여 고발했다. 이면우(일본 유학생 출신)를 한국 측 대리인으로 법적 투쟁을 전개하자 상황이 불리해진 일본공사 하야시가 화해를 요청하여 내장원경 이용익이 양해하고 형사고발을 취하했다. 인삼 전량을 회수 매각하여 국고에 납입하였다.

1905년 을사오적에 대한 규탄

1905년 111월 17일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진덕기, 이상설, 아우 이시영 등과 를 사 늑약 파기 운동과 을사오적 척살을 도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