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창 의사 (1901~1932)
효령대군 후손으로 1901년 8월 10일 서울 용산구 원효로 2가에서 전주 이 씨와 모친 밀양 손 씨의 아들로 출생하여 용산 문창 소학교를 졸업하였다. 1931년 1월 중순 상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 선생을 만나 독립투쟁에 투신할 것을 맹약하고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여 일본 국왕 폭살을 계획하였다. 1932년 일본에 도착한 뒤 상품은 일본에 꼭 팔아 버리겠으니 안심하소서 라는 안착 신호를 보내고, 1월 8일 도쿄 사쿠라다몬에서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오는 히로히토를 저격하였으나 폭발시키지 못했지만 일본인에게 조선인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하였다. 거사현장에서 체포되어 10월 10일 오전 9시 2분 일본 이치가야 형부 소에서 32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1946년 7월 6일 유해 봉환. 국민장으로 효창원에 안장되었고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 되었다.
용산구 효창동에서 이봉창과 마주하다
용산에서 태어나 자라다
이봉창 의사는 1901년 8월 10일 아버지 이진구와 어머니 손 씨 사이에서 둘째로 태어났다. 8세에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고 11세에 문창 보통학교에 입학했다. 12세까지는 부유한 가정이었으나 13세부터 형편이 급격히 어려워져 15세에 졸업 후 바로 구직 활동을 시작했다.
일본의 차별대우를 경험하다
이봉창 의사는 일본인이 운영하던 과자점, 무라타 약국을 거쳐 19세에 지인의 추천을 받아 용산 철도국에서 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승급과 봉급 등 모든 면에서 일본인이 월등히 높은 대우를 받고,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차별받는 현실을 마주했다.
민족 차별에 눈 뜨다
1925년 이봉창 의사는 민족 차별이 없는 삶을 기대하며 일본으로 건너가 기노 시다마 사조라는 일본 이름을 쓰며, 일본 사회에 적응하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일본에서도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취직과 급여에서 차별을 여러 번 받아 반일 감정이 다시 일기 시작했다.
"비통한 일이다. 이러한 하급 노동자 사회에서조차 일본이다,
조선인이다 구별하여 차별 대우를 받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가."
지사(志士)를 꿈꾸다
1928년 이봉창 의사는 일왕 즉위식을 보기 위해 교토에 갔다. 그런데 경찰의 몸수색 과정에서 한문으로 쓰인 편지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검속 되어 즉위식도 보지 못하고 9일 동안 경찰서 유치장에 구류되었다. 이로 인해 이봉창 의사의 반일, 항일 감정은 더욱 깊어졌다.
독립운동을 위해 상해로 향하다
이봉창 의사는 친구에게서 중국 상해에 조선인을 우대하는 영국 전차 회사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조선인으로 떳떳하게 살자는 생각에서 1930년 말에 상해로 갔다. 이듬해 1월 임시정부를 방문해 김구 선생을 만났다. 그해 5월 이봉창 의사는 김구 선생에게 '폭탄을 구해주면 일본에 가서 일왕을 살해하겠다"라고 결심을 밝혔고, 김구 선생은 '결심이 확고하다면 폭탄을 구해주겠다'라고 화답하며 두 지사가 의기투합했다
한인애국단 제1호 단원이 되다
이봉창 의사는 1931년 12월 13일 김구 선생이 주관하는 한인 애국단 1호 단원이 되었다. 이봉창 의사는 태극기를 배경으로 가슴에 선서문을 달고, 양손에 수류탄을 하나씩 들고 사진을 찍으며 결의를 다졌다.
일본의 심장을 겨루다
김구 선생은 이봉창 의사의 의거를 위해 중국군으로 근무하는 김홍일과 김현에게서 수류탄 1개씩 2개를 입수하고 거사자금으로 300원을 마련했다. 이봉창 의사는 1931년 12월 17일 김구 선생이 마련해 준 수류탄과 거사 자금을 가지고 일본으로 향했다. 도쿄에 도착한 이봉창의 사는 김구 선생에게 '상품이 1월 8일 꼭 팔릴 터이니 안심하라"라는 전보로 거사 일을 알렸다. 1932년 1월 8일 오전 11시 44분, 이봉창 의사는 경찰 본부인 경시청 정문 앞에 대기하고 있다가 요요기 연병장에서 진행된 육군사관 병식에 참석하고 환궁하는 일왕의 마차 행렬에 수류탄을 던졌다. 수류탄은 요란한 폭음을 내며 폭발했다.
당당한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하다
수류탄의 위력이 약해 의거에 실패한 이봉창 의사는 거사 현장에서 스스로 체포되었다. 이봉창 의사는 수차례 심문을 받고 1932년 9월 30일 일본의 최고재판소인 대심원에서 대역죄로 사형을 선고받아 1심만으로 형이 확정되었다. 1932년 9월 30일 일본 최고재판소인 대심원에서 대역죄로 사형을 선고받아 1심만으로 형이 확정되었다. 1932년 10월 10일 오전 9시 2분, 이봉창 의사는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사형이 집행, 순국하였다. 유해는 우라와 형무소 묘지에 매장되었다.
고향의 품으로 돌아오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김구 선생은 일본에 있는 박열에게 이봉창 의사, 윤봉길 의사, 백정기 의사의 유해 봉환을 부탁했다. 1946년 4월 20일, 귀국길에 오른 세 의사의 유해는 5월 15일, 부산항을 통해 들어왔다. 7월 6일, 국민장이 거행되었으며 김구 선생의 의견에 따라 유해는 효창원에 안치되었다. 이로써 이봉창 의사는 다시 고향의 품으로 돌아왔다.
동경 의거, 아시아의 정세를 바꾸다
이봉창 의사의 동경 의거로 일본 수상인 이누카이 다카시는 사직원을 제출했지만 징계처분에 그쳤다. 만주사변*이 일어나 항일 감정이 극에 달해 있던 중국은 "불행히도 폭탄이 천왕에게 명중하지 않았다"며 대서특필했다. 만보산 사건* 에 대한 한국과 중국 간의 감정 대립은 의거를 통해 정리되었으며, 중국 국민의 항일 운동을 고조시켜 제1차 상해사변을 촉발시켰다.
*만주사변 : 1931년 9월 18일, 일본이 류타오후의 선로를 폭파하고, 이를 중국의 소행이라 주장하며 군사행동을 개시한 만주침략전쟁이다.
*만보산 사건 : 1931년 7월 2일, 일본의 술책으로 중국 만보산 지역에서 중국과 한국 농민 사이 일어난 유혈사태이다.
이봉창의 사형 선거 기사
대역 사건의 범인 이봉창 사형을 선고받다. 30일 오전 9시 15분 대심원 특별 공판 공개 사망.
사형에 처함 사형, 선고의 찰나, 창백한 얼굴로 수긍하다. 각오한 듯 미동도 하지 않고 숙연히 잠잠해진 정내의 광경
*廷 (정) : 법정 (法庭)
항일투쟁의 기폭제가 되다
이봉창 의사 의거는 한국인의 정신적 정서적 입장에서 천황을 죽인 것과 다름이 없으며, 세계에 한국인이 일본에 동화되지 않고 독립을 열망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또한 당시 부진한 활동으로 인해 경제적, 사회적으로 어려운 여건에 있었던 임시정부는 활력을 되찾았고 윤봉길의 거사 성공 등을 통해 항일 투쟁의 기폭제가 되었다. 교민단체 등의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되어 뜸했던 독립운동 자금의 모금도 활발해졌다.
'상신서'는 용산역 근무 때의 일, 오사카에 있을 때의 일, 부두 노동할 때의 일 등 6개의 소제목을 붙여 자술서 형식으로 자신이 행적을 설명한 진술서이다.
선서문 나는 적성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 애국단의 일원이 돼야 적국의 수괴를 도륙하기로 맹서 하나이다. 대한민국 십삼 년 십이월 십삼일 선서인 이봉창 한국 애국단 앞
이봉창 의사 말
"제 나이가 32세입니다.
앞으로 다시 31년을 더 산다 해도 과거 반생에서 맛본
방랑생활에 비한다면 늙은 생활에 무슨 취미가 있겠습니까?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31년 동안
인생의 쾌락은 대강 맛보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얻기 위하여
우리 독립 사업에 헌신하고자 상해에 왔습니다."
김구 선생의 말
"군은 무엇인가
세상을 놀라게 할 만한 사건을
일으킬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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