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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인간 영혼의 깊은 심연까지 가닿는 무궁무진한 상상력
출간과 함께 20세기의 고전이자 미국 문학의 전설이 된 화제작이다. 멜빌의 『모비딕』과 조이스의 『율리시즈』를 합친 작품으로 현대 사회의 공포와 신화의 근원을 찾아 19세기 이후 과학기술과 자본이 만들어낸 중력의 무지개를 추적해 나가는 과정을 그렸다. 자본주의의 실상을 매우 현실적이면서도 선명하게 그려 냈으며,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잘 보여 주고 있다. 영국을 향해 날아오는 독일군의 로켓 V2와 V3. 사람들은 이 로켓이 언제, 어디로부터 날아오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기에 두려워한다. 소설의 주인공 미군 중의 슬로스롭은 공포의 상징 V2 로켓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앞으로 인간이 겪어야 할 공포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리고 ‘하늘을 가로질러’ 온다. 자본주의 발달 과정과 과학기술의 진보, 그 정점으로서 미국의 과학기술 문명의 뿌리를 탐구해 나가는 과정이 바로 이 소설의 핵심이다.
세트 구성 : 전2권
『중력의 무지개 1』
『중력의 무지개 2』
출간과 함께 20세기의 고전이자 미국 문학의 전설이 된 화제작이다. 멜빌의 『모비딕』과 조이스의 『율리시즈』를 합친 작품으로 현대 사회의 공포와 신화의 근원을 찾아 19세기 이후 과학기술과 자본이 만들어낸 중력의 무지개를 추적해 나가는 과정을 그렸다. 자본주의의 실상을 매우 현실적이면서도 선명하게 그려 냈으며,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잘 보여 주고 있다. 영국을 향해 날아오는 독일군의 로켓 V2와 V3. 사람들은 이 로켓이 언제, 어디로부터 날아오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기에 두려워한다. 소설의 주인공 미군 중의 슬로스롭은 공포의 상징 V2 로켓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앞으로 인간이 겪어야 할 공포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리고 ‘하늘을 가로질러’ 온다. 자본주의 발달 과정과 과학기술의 진보, 그 정점으로서 미국의 과학기술 문명의 뿌리를 탐구해 나가는 과정이 바로 이 소설의 핵심이다.
세트 구성 : 전2권
『중력의 무지개 1』
『중력의 무지개 2』
목차
1부 0을 넘어
2부 헤르만 괴링 카지노에서의 휴가
3부 영역 안에서
4부 대항 세력
옮긴이 후기
핀천의 우주 속으로 여행하기 위한 독자 가이드북
2부 헤르만 괴링 카지노에서의 휴가
3부 영역 안에서
4부 대항 세력
옮긴이 후기
핀천의 우주 속으로 여행하기 위한 독자 가이드북
출판사 리뷰
미국 문학의 살아 있는 전설, 하지만 얼굴 없는 은둔의 소설가, 미국 문학의 전설이 된 소설을 쓰다!
미국 문학계의 오래된 농담 하나.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은 실제로는 핀천이 샐린저라는 가명으로 발표한 또 다른 소설이다. 사진도 인터뷰도, 심지어 어디 사는지도 모르는 핀천. 하지만 이 ‘팩션’을 통해 자본주의의 진상을 사진보다 더 선명하게 보여주며, 어느 인터뷰보다 더 현대의 과학 기술의 속내를 더 잘 드러내며, 오늘날의 현대가 어디에 머물러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가장 잘 보여준다.
〈가디언〉지 선정 ‘세상에서 가장 끝내기 어려운 소설 10권 중의 하나. 하지만 가장 광범위한 열광적인 작가 팬덤과 ‘핀천 산업’이 번성하고 있는 작가.
몇 년 전에 핀천이 미국의 가장 인기 있는 TV물 중의 하나인 〈심슨네 가족들〉에 그의 신비주의를 표현하기 위해 얼굴에 종이 봉지를 씌운 채 목소리로 출현했는데, 마침 한 여대생이 그의 대표작 『중력의 무지개』를 들고 다니며 어려운 책을 읽는 유식함을 뽐내는 장면이 핀천 마음에 들어서였다고 한다(또는 아들이 이 프로를 워낙 좋아해서였다는 설도 있다). 대학생도 어려워하지만 반드시 끼고 다녀야만 ‘지식인’ 흉내를 낼 수 있는 이 책은 이처럼 고급문화와 대중문화 모두에서 열광적인 찬사를 받고 있는 보기 드문 작품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절규는 하늘을 가로질러온다.” 천 개의 입구와 천개의 출구를 동시에 가진 소설:
끝 간 데를 알 수 없는 무궁의 상상력과 2세기의 자본주의 역사를 아우르는 스펙터클하고 중후한 주제의식, 놀라운 역사적 상상력으로 가득 찬 이 소설을 읽는다면 결코 우리 시대에 대해 그리고 나에 대해 이전과 똑같이 생각할 수는 없게 될 것이다.
“절규는 하늘을 가로질러온다.” 1,500여 페이지에 이르는 이 소설은 이러한 문장과 함께 시작되는데, 이 한 문장에 이 긴 소설의 모든 것이 함축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절규는 말 그대로는 유럽 대륙 어딘가에서 영국을 향해 날아오는 독일군의 로켓 V2와 V3의 소리를 말한다. 그것은 언제, 어디서 날아오는지 모르지만 동시에 언제 어디서든지 날아올 수 있는 현대의 새로운 공포를 상징한다. 그것은 마치 어디에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지만 동시에 모든 곳에서 출몰할 수 있는 ‘모비딕’의 야성의 목소리와도 같다. 그리고 마치 에이헙 선장이 어떤 형이상학적인 원리에 의해 마술에 홀린 듯 모비딕을 추적할 운명을 타고 났듯이 이 소설의 주인공인 미군 중위 슬로스롭은 이 공포의 상징인 V2 로켓에 기묘하게 묶여 있다. 통상 인간을 살상하는 무기는 아무리 ‘첨단’이더라도 모두 인간이 조작하고, 인간이 인간을 보는 지근거리에서 작동되는데 나치가 개발한 이 V2와 V3 로켓만큼은 단지 버튼만 누를 뿐 어찌 보면 ‘사람’과는 무관한 최첨단 무기이다. 이렇게 볼 때 핀천이 2차 세계대전 때 독일 공군의 대공습마저 물리친 런던을 아연 소리 없는 죽음의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V2로켓을 주제로 삼은 이유를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이전까지의 죽음의 공포가 목전에서의 것이었다면 이제 인간의 공포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리고 ‘하늘을 가로질러 오는 것’이다. 마치 『모비딕』에서 포경선이 아무리 온갖 첨단 장비로 무장하고 있더라도 모비딕이라는 보이지 않는 공포 앞에서는 단지 일엽편주에 지나지 않듯 이제 첨단과학기술의 첨병 앞에 인간의 하늘마저 ‘공포’가 소리 없이 다가오는 또 다른 ‘황무지’일 뿐이다.
하지만 이 죽음의 공포가 소리 없이 다가오는 것을 유일하게 감지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인간이 있었으니 주인공 슬로스롭이 바로 그인데, 정작 황당한 것은 V2가 발사될 때는 그의 ‘물건’도 동시에 발기하는 기이한 현상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주인공이 이처럼 황당무계하게 된 이유를 유럽 전역을 가로지며 또 19세기부터의 자본주의 발달 과정에서 과학과 기술과 학문 그리고 산업과 대학 사이의 유착 과정을 추적하는, 그리고 그것의 정점으로서의 미국의 과학기술 문명의 뿌리를 탐구하는 과정이 이 소설의 중추를 구성한다. 물론 온갖 인물과 온갖 이야기가 사방에서 끊임없이 가지를 치고 뿌리를 내리고 있는 이 긴 소설을 몇 마디 말로 요약하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천 개의 입구와 천 개의 출구를 동시에 가진 소설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 이 소설을 독자들은 어느 문이나 열고 들어간 다음 어느 문이나 열고 나와도 좋을 것이다. 예를 들어 퓰리처상 자문위원들은 이 소설이 지나치게 ‘외설스럽다’고 본 반면 대학의 유명학자들은 ‘출간과 동시에 고전이 된 소설’이라고 극찬하고, 오늘도 인터넷에서는 온갖 팬덤들이 이 소설을 놓고 왈가왈부를 거듭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 소설이 진정 위대한 점은 무한한 상상력, 진정 끝 간 데를 알 수 없는 상상력이기 때문이다.
만약 자본주의는 음모이고, 과학은 ‘모비 딕’이고, 역사는 신의 장난이라면?
진정 하이데거의 기술 비판보다 훨씬 더 급진적인 현대 문명 비판서!
“언젠가 기계가 다 해주는 날이 오겠지. 정보 기계가. 넌 미래의 물결을 타고 있는 거야. 언젠가 기계가 다 해주는 날이.”
이 소설은 저 멀리 19세기의 아르헨티나의 혁명가들부터 러시아의 키르키스 평원의 KGB 요원까지 그리고 20세기 초 일본을 향해 가는 러시아의 발틱 함대부터 나미비아의 흑인 부족에 이르기까지 상상력의 역사적 ·공간적 포괄 범위에서 가히 광대무변의 극한을 달린다. 이 긴 역사와 지구 전역을 아우르는 온갖 사건들이 이 한 권의 역사 속에 밀도 있게 짜여 들어가 있는 것은 핀천의 ‘천재성’에는 한계가 없으며, 그의 상상력은 무한대임을 쉽게 알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정작 그처럼 무궁무진한 핀천의 상상력에 혀를 내두르게 되는 것은 그것이 바로 우리 시대의 핵심적인 문제를 정확하게 집어내는 데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현대 사회를 자본주의라고 하지만 사실 이 말은 너무도 추상적이며, 좀 더 구체적으로 규정하지 않으면 공허함을 벗어나지 못한다. 물론 진보적인 사람들은 바로 이 자본주의라는 추상적 개념을 즉각 계급, 잉여가치, 계급투쟁 등의 낯익은 구체적 개념으로 보충하려 하지만 잘 알려진 대로 20세기에 진보 진영은 ‘자본’에 처절하게 완패했으며, 자본주의는 온갖 ‘모순’과 ‘병폐’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멀쩡하게 지구 전역을 활보하고 있다.(왜 이러한 일이 벌어졌을까? 이와 관련해 실제로 2차 대전 이후 진보 진영은 ‘도구적 이성’ 이상의 진단을 내놓지 못했다면 하이데거는 훨씬 더 이전부터 기술적 사유에 의한 존재의 망각이라는 진단을 내놓은 바 있다. 하이데거가 나치에 참여한 것은 정말 그의 말대로 그러한 기술 지배의 극복에 대한 (헛된) 희망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전후에 그가 소련을 비롯한 어떤 ‘진보 세력’에도 기대를 걸지 않은 것은 기술의 지배가 그만큼 진보/보수의 동일한 뿌리이자 일용한 양식으로 점점 더 전일적인 지배력을 넓혀왔기 때문일 것이다. 라캉은 끈질기게 쓰여지기를 거부하는 것이 있다고 하는데, 아마 하이데거가 보기에는 현대 문명의 토대이자 기반 그리고 일상을 이루는 ‘기술’이 그처럼 끈질기게 쓰여지기를 거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기술 문명에 대한 통찰 면에서 하이데거는 다소 낭만적인 해법 말고는 가장 뛰어난 ‘자본주의 분석’을 보여준다고 말하면 너무 지나친 것일까?) 아무른 좌파는 도구적 이성 비판 이상으로 기술 문명 비판을 넘어서지 못했고 우파는 기술 숭배를 자본주의 비판의 가림막으로 철저하게 이용할 묘수를 발휘해 20세기 후반에 자본주의의 영광을 재현해왔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하여 스티브 잡스는 드디어 자본가로서는 처음으로 우상화의 대상까지 되는 지경에 이르지 않았는가?
그리하여 드디어 우리는 정확히 ‘과학과 기술이 단순히 우리 삶의 도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신념과 영혼까지’도 움직이는 시대에 살게 되었다. 이를 이 소설의 배경을 이루는 2차 세계대전과 관련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1차 세계대전의 경우 이전까지의 전쟁이 오직 군인만이 특정한 시공간에서 하던 데서 벗어나 군인과 민간인 가릴 것 없이 모두 총동원되는 ‘총력전’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다시 2차 세계대전과 함께 전쟁은 다시 탱크와 폭격기라는 기계가 모든 것을 순식간에 결정하는 ‘전격전(Blitzkrieg)’으로 바뀌었다. 이것은 전격전의 창시자인 구데리안 장군의 저서 『차렷 탱크!』라는 제목 속에 함축적으로 나타나 있다. 즉 (군부든 민간이든) 인간이 아니라 이제 기계가 전쟁을 대신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다시 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은 프랑스 근처에도 가보지 못하고 4년을 참호에서 소진하다 항복하고 만 반면 2차 세계대전 때는 단 6일 만에 파리를 함락시킨 데서도 여실히 현실성을 입증해주고 있다. 그리고 원자폭탄이 태평양 전쟁을 종결시킨 것은 이러한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즉 적어도 2차 세계 대전이후에는 ‘주체의 죽음’이 문제가 아니라 기계가 주인인 시대에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식으로 문제가 바뀌었으며, 이 기계가 인간 세계를 어떻게 만들어왔으며, 더 궁극적으로 인간의 육체와 영혼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가 새로이 탐구되어야 한다. 핀천이 ‘인간의 죽음’을 예견한 ‘포스트모더니즘’ 소설가로 추앙받는 것은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역으로 핀천의 작품 세계를 하나의 작은 문학 사조로 가두는 결과밖에 낳지 않을 것이다. 즉 이제 인간 대 신이 문제가 아니라 인간 대 기계가 새로운 문학적·역사적 주제로 탐구되어야 하는데, 핀천의 이 작품이 열화와 같은 환영을 받은 것은 바로 그러한 아킬레스건을 정확하게 건드렸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 소설에서 주인공의 ‘물건’은 V2 로켓이 발사되면 발기하는데, 그것은 외설스럽기 보다는 차라리 아이폰의 울림에 몸만 아니라 마음까지 움찔움찔하는 현대의 우리의 초상을 정확히 예시하고 있는 점에서 너무나 ‘리얼리즘적’이지 않은가? 이 점에서 과학과 기술을 중심으로 현대의 인간학에 대한 저 멀리 데카르트부터 하이데거의 기술비판을 훌쩍 능가하는 이 소설은 ‘리얼리즘’에 갇혀 과학 기술에 대해서는 한 치도 접근하지 못한 채 부진을 거듭하고 있는 한국의 문학에 대해서도 많은 시사점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특히 역사와 자본주의에 대해 너무 진지하고 엄숙하기만 해 실제로는 아무런 ‘리얼한’ 분석도 제출하지 못하는 우리 지식계에 만약 자본주의가 역사의 법칙이 아니라 ‘음모’라면 어떨까, 그리고 역사는 민중의 역사가 아니라 신의 장난이라면 어떨까하고 한번쯤 상상해볼 것을 권하고 있다.
미국 문학계의 오래된 농담 하나.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은 실제로는 핀천이 샐린저라는 가명으로 발표한 또 다른 소설이다. 사진도 인터뷰도, 심지어 어디 사는지도 모르는 핀천. 하지만 이 ‘팩션’을 통해 자본주의의 진상을 사진보다 더 선명하게 보여주며, 어느 인터뷰보다 더 현대의 과학 기술의 속내를 더 잘 드러내며, 오늘날의 현대가 어디에 머물러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가장 잘 보여준다.
〈가디언〉지 선정 ‘세상에서 가장 끝내기 어려운 소설 10권 중의 하나. 하지만 가장 광범위한 열광적인 작가 팬덤과 ‘핀천 산업’이 번성하고 있는 작가.
몇 년 전에 핀천이 미국의 가장 인기 있는 TV물 중의 하나인 〈심슨네 가족들〉에 그의 신비주의를 표현하기 위해 얼굴에 종이 봉지를 씌운 채 목소리로 출현했는데, 마침 한 여대생이 그의 대표작 『중력의 무지개』를 들고 다니며 어려운 책을 읽는 유식함을 뽐내는 장면이 핀천 마음에 들어서였다고 한다(또는 아들이 이 프로를 워낙 좋아해서였다는 설도 있다). 대학생도 어려워하지만 반드시 끼고 다녀야만 ‘지식인’ 흉내를 낼 수 있는 이 책은 이처럼 고급문화와 대중문화 모두에서 열광적인 찬사를 받고 있는 보기 드문 작품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절규는 하늘을 가로질러온다.” 천 개의 입구와 천개의 출구를 동시에 가진 소설:
끝 간 데를 알 수 없는 무궁의 상상력과 2세기의 자본주의 역사를 아우르는 스펙터클하고 중후한 주제의식, 놀라운 역사적 상상력으로 가득 찬 이 소설을 읽는다면 결코 우리 시대에 대해 그리고 나에 대해 이전과 똑같이 생각할 수는 없게 될 것이다.
“절규는 하늘을 가로질러온다.” 1,500여 페이지에 이르는 이 소설은 이러한 문장과 함께 시작되는데, 이 한 문장에 이 긴 소설의 모든 것이 함축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절규는 말 그대로는 유럽 대륙 어딘가에서 영국을 향해 날아오는 독일군의 로켓 V2와 V3의 소리를 말한다. 그것은 언제, 어디서 날아오는지 모르지만 동시에 언제 어디서든지 날아올 수 있는 현대의 새로운 공포를 상징한다. 그것은 마치 어디에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지만 동시에 모든 곳에서 출몰할 수 있는 ‘모비딕’의 야성의 목소리와도 같다. 그리고 마치 에이헙 선장이 어떤 형이상학적인 원리에 의해 마술에 홀린 듯 모비딕을 추적할 운명을 타고 났듯이 이 소설의 주인공인 미군 중위 슬로스롭은 이 공포의 상징인 V2 로켓에 기묘하게 묶여 있다. 통상 인간을 살상하는 무기는 아무리 ‘첨단’이더라도 모두 인간이 조작하고, 인간이 인간을 보는 지근거리에서 작동되는데 나치가 개발한 이 V2와 V3 로켓만큼은 단지 버튼만 누를 뿐 어찌 보면 ‘사람’과는 무관한 최첨단 무기이다. 이렇게 볼 때 핀천이 2차 세계대전 때 독일 공군의 대공습마저 물리친 런던을 아연 소리 없는 죽음의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V2로켓을 주제로 삼은 이유를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이전까지의 죽음의 공포가 목전에서의 것이었다면 이제 인간의 공포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리고 ‘하늘을 가로질러 오는 것’이다. 마치 『모비딕』에서 포경선이 아무리 온갖 첨단 장비로 무장하고 있더라도 모비딕이라는 보이지 않는 공포 앞에서는 단지 일엽편주에 지나지 않듯 이제 첨단과학기술의 첨병 앞에 인간의 하늘마저 ‘공포’가 소리 없이 다가오는 또 다른 ‘황무지’일 뿐이다.
하지만 이 죽음의 공포가 소리 없이 다가오는 것을 유일하게 감지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인간이 있었으니 주인공 슬로스롭이 바로 그인데, 정작 황당한 것은 V2가 발사될 때는 그의 ‘물건’도 동시에 발기하는 기이한 현상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주인공이 이처럼 황당무계하게 된 이유를 유럽 전역을 가로지며 또 19세기부터의 자본주의 발달 과정에서 과학과 기술과 학문 그리고 산업과 대학 사이의 유착 과정을 추적하는, 그리고 그것의 정점으로서의 미국의 과학기술 문명의 뿌리를 탐구하는 과정이 이 소설의 중추를 구성한다. 물론 온갖 인물과 온갖 이야기가 사방에서 끊임없이 가지를 치고 뿌리를 내리고 있는 이 긴 소설을 몇 마디 말로 요약하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천 개의 입구와 천 개의 출구를 동시에 가진 소설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 이 소설을 독자들은 어느 문이나 열고 들어간 다음 어느 문이나 열고 나와도 좋을 것이다. 예를 들어 퓰리처상 자문위원들은 이 소설이 지나치게 ‘외설스럽다’고 본 반면 대학의 유명학자들은 ‘출간과 동시에 고전이 된 소설’이라고 극찬하고, 오늘도 인터넷에서는 온갖 팬덤들이 이 소설을 놓고 왈가왈부를 거듭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 소설이 진정 위대한 점은 무한한 상상력, 진정 끝 간 데를 알 수 없는 상상력이기 때문이다.
만약 자본주의는 음모이고, 과학은 ‘모비 딕’이고, 역사는 신의 장난이라면?
진정 하이데거의 기술 비판보다 훨씬 더 급진적인 현대 문명 비판서!
“언젠가 기계가 다 해주는 날이 오겠지. 정보 기계가. 넌 미래의 물결을 타고 있는 거야. 언젠가 기계가 다 해주는 날이.”
이 소설은 저 멀리 19세기의 아르헨티나의 혁명가들부터 러시아의 키르키스 평원의 KGB 요원까지 그리고 20세기 초 일본을 향해 가는 러시아의 발틱 함대부터 나미비아의 흑인 부족에 이르기까지 상상력의 역사적 ·공간적 포괄 범위에서 가히 광대무변의 극한을 달린다. 이 긴 역사와 지구 전역을 아우르는 온갖 사건들이 이 한 권의 역사 속에 밀도 있게 짜여 들어가 있는 것은 핀천의 ‘천재성’에는 한계가 없으며, 그의 상상력은 무한대임을 쉽게 알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정작 그처럼 무궁무진한 핀천의 상상력에 혀를 내두르게 되는 것은 그것이 바로 우리 시대의 핵심적인 문제를 정확하게 집어내는 데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현대 사회를 자본주의라고 하지만 사실 이 말은 너무도 추상적이며, 좀 더 구체적으로 규정하지 않으면 공허함을 벗어나지 못한다. 물론 진보적인 사람들은 바로 이 자본주의라는 추상적 개념을 즉각 계급, 잉여가치, 계급투쟁 등의 낯익은 구체적 개념으로 보충하려 하지만 잘 알려진 대로 20세기에 진보 진영은 ‘자본’에 처절하게 완패했으며, 자본주의는 온갖 ‘모순’과 ‘병폐’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멀쩡하게 지구 전역을 활보하고 있다.(왜 이러한 일이 벌어졌을까? 이와 관련해 실제로 2차 대전 이후 진보 진영은 ‘도구적 이성’ 이상의 진단을 내놓지 못했다면 하이데거는 훨씬 더 이전부터 기술적 사유에 의한 존재의 망각이라는 진단을 내놓은 바 있다. 하이데거가 나치에 참여한 것은 정말 그의 말대로 그러한 기술 지배의 극복에 대한 (헛된) 희망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전후에 그가 소련을 비롯한 어떤 ‘진보 세력’에도 기대를 걸지 않은 것은 기술의 지배가 그만큼 진보/보수의 동일한 뿌리이자 일용한 양식으로 점점 더 전일적인 지배력을 넓혀왔기 때문일 것이다. 라캉은 끈질기게 쓰여지기를 거부하는 것이 있다고 하는데, 아마 하이데거가 보기에는 현대 문명의 토대이자 기반 그리고 일상을 이루는 ‘기술’이 그처럼 끈질기게 쓰여지기를 거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기술 문명에 대한 통찰 면에서 하이데거는 다소 낭만적인 해법 말고는 가장 뛰어난 ‘자본주의 분석’을 보여준다고 말하면 너무 지나친 것일까?) 아무른 좌파는 도구적 이성 비판 이상으로 기술 문명 비판을 넘어서지 못했고 우파는 기술 숭배를 자본주의 비판의 가림막으로 철저하게 이용할 묘수를 발휘해 20세기 후반에 자본주의의 영광을 재현해왔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하여 스티브 잡스는 드디어 자본가로서는 처음으로 우상화의 대상까지 되는 지경에 이르지 않았는가?
그리하여 드디어 우리는 정확히 ‘과학과 기술이 단순히 우리 삶의 도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신념과 영혼까지’도 움직이는 시대에 살게 되었다. 이를 이 소설의 배경을 이루는 2차 세계대전과 관련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1차 세계대전의 경우 이전까지의 전쟁이 오직 군인만이 특정한 시공간에서 하던 데서 벗어나 군인과 민간인 가릴 것 없이 모두 총동원되는 ‘총력전’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다시 2차 세계대전과 함께 전쟁은 다시 탱크와 폭격기라는 기계가 모든 것을 순식간에 결정하는 ‘전격전(Blitzkrieg)’으로 바뀌었다. 이것은 전격전의 창시자인 구데리안 장군의 저서 『차렷 탱크!』라는 제목 속에 함축적으로 나타나 있다. 즉 (군부든 민간이든) 인간이 아니라 이제 기계가 전쟁을 대신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다시 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은 프랑스 근처에도 가보지 못하고 4년을 참호에서 소진하다 항복하고 만 반면 2차 세계대전 때는 단 6일 만에 파리를 함락시킨 데서도 여실히 현실성을 입증해주고 있다. 그리고 원자폭탄이 태평양 전쟁을 종결시킨 것은 이러한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즉 적어도 2차 세계 대전이후에는 ‘주체의 죽음’이 문제가 아니라 기계가 주인인 시대에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식으로 문제가 바뀌었으며, 이 기계가 인간 세계를 어떻게 만들어왔으며, 더 궁극적으로 인간의 육체와 영혼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가 새로이 탐구되어야 한다. 핀천이 ‘인간의 죽음’을 예견한 ‘포스트모더니즘’ 소설가로 추앙받는 것은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역으로 핀천의 작품 세계를 하나의 작은 문학 사조로 가두는 결과밖에 낳지 않을 것이다. 즉 이제 인간 대 신이 문제가 아니라 인간 대 기계가 새로운 문학적·역사적 주제로 탐구되어야 하는데, 핀천의 이 작품이 열화와 같은 환영을 받은 것은 바로 그러한 아킬레스건을 정확하게 건드렸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 소설에서 주인공의 ‘물건’은 V2 로켓이 발사되면 발기하는데, 그것은 외설스럽기 보다는 차라리 아이폰의 울림에 몸만 아니라 마음까지 움찔움찔하는 현대의 우리의 초상을 정확히 예시하고 있는 점에서 너무나 ‘리얼리즘적’이지 않은가? 이 점에서 과학과 기술을 중심으로 현대의 인간학에 대한 저 멀리 데카르트부터 하이데거의 기술비판을 훌쩍 능가하는 이 소설은 ‘리얼리즘’에 갇혀 과학 기술에 대해서는 한 치도 접근하지 못한 채 부진을 거듭하고 있는 한국의 문학에 대해서도 많은 시사점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특히 역사와 자본주의에 대해 너무 진지하고 엄숙하기만 해 실제로는 아무런 ‘리얼한’ 분석도 제출하지 못하는 우리 지식계에 만약 자본주의가 역사의 법칙이 아니라 ‘음모’라면 어떨까, 그리고 역사는 민중의 역사가 아니라 신의 장난이라면 어떨까하고 한번쯤 상상해볼 것을 권하고 있다.
추천평
핀천 덕에 미국 문학은 훨씬 더 넓고 강해졌다. 그는 현대적 인식의 가장자리에서 울리는 속삭임과 유령을 발견했으나 미국 문학의 물질적 감각, 즉흥적인 힘, 거리의 유머 역시 지켜냈다. 그의 작품은 지리적으로도 광대하고 중대한 주제를 다루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돈 드릴로(소설가)
돈 드릴로(소설가)
1973년 핀천이 『중력의 무지개』를 통해 예측한 전후 미 제국주의의 길은 오늘날까지도 그의 빼어난 선견지명을 보여준다. 그가 그때 가르치려 한 것들을 나는 이제야 배우고 있다.
제프리 유제니데스(소설가)
제프리 유제니데스(소설가)
『중력의 무지개』는 내게는 홀로 접할 수 있는 종교 의식과도 같은 것이다. 창조된 세상의 크기를 일깨우기 위해, 우리가 저 바깥까지 다다를 수 있는 한계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 글이 주는 치명적인 에너지를 느끼기 위해 이 책을 매년 다시 읽는다.
리차드 파워스(소설가)
리차드 파워스(소설가)
분명 토마스 핀천의 천재성에는 한계가 없다.
마이클 더다(문학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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