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전쟁교훈여행 (2010~) <여행지>/3.한국다크투어

제주4.3평화기념관 전시실 (1)

동방박사님 2023. 3. 31. 08:14
728x90

제주4.3평화기념관

4.3의 역사를 담는 그릇을 모티브로 디자인 된 기념관은 4.3의 역사적 진실을 시간의 흐름을 따라 구성한 살설 전시실과 평화.인권 민주주의를 주제로 연중 전시가 개최되는 기획전시실, 개가지료실과 아카이브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역사의 동굴로 가다

제주도는 아름다운 섬이다.세계에서 유일하게 유네스코 자연과학 분야에서 3관왕을 달성할 정도로 보기드문 풍광을 자랑한다. 하지만 그 찬란한 풍광 이면에 한과 눈물로 점철된 역사가 있다.  제주인들은 70여 년 전, 해방공간에서 남북 분단을 막으려고 온몸으로 나섰다가 참혹한 희생을 치렀다. 이 비극적인 사건은 반세기동안 '없었던 역사' 처럼 그 진실이 은폐됐다. 바다로 둘러싸인 고립된 섬 제주도는 한때  거대한 감옥이자 학살터였지만, 그 후 오랫동안 역사의 진실을 말할수 없는 금단의 섬이기도 했다.

 그러나 억압 속에서도 진실을 밝히려는 제주사람들의 기억투쟁은 계속됐다. 제주시 봉개동에 자리 잡은 제주4.3 평화공원은 그 투쟁의 결정체이다. 공원의 핵심시설인 제주4.3평화공원은 그 투쟁의 결정체이다. 공원의 핵심시설인 제주4.3평화기념관은 오랫동안 금기시되어온 4.3을 담은 진실의 그릇이다. 지하 1층에 마련된 상설전시실은 4.3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게 꾸며졌다.

미주하는 백비

첫 맛남은 역사의 동굴에서 시작된다. 1층 진입부의 경사진 긴 터널은 제주섬에 지천으로 널린 용암동굴을 옮겨놓았다. 화산섬인 제주도에는 동굴이 많다. 4.3당시 수많은 제주인들이 살기위해 산으로 오르거나 동굴로 숨어들었다가 토벌대에 발각되어 죽임을 당했다. 이 공간을 통해 우리는 70여년전 4.3의 역사 속으로 들어갔다. 이어서 만나는 '백비' 아무런 글자도 새겾지 않은 비석이 누워있다. 백비는 흰 비석이 아니라 빈 비석을 뜻한다. 4.3의 바른 이름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봉기,항쟁.폭동.사태.사건' 등으로 다양하게 불려온 제주4.3은 아직까지도 올바른 역사적 이름으로 얻지 못하고 있다. 분단의 시대를 넘어 남과 북이 하나가 되는 통일의 그 날, 진정한 4.3의 이름을 새길 수 있으리라."

독립운동가 판결문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의 구좌면 위원장을 역임했던 문도배에 대한 일제 때 판결문, 문도배는 항일 투쟁과 관련 3년 형을 선고 받아 옥고를 치렀다.

고문치사 발생

젊은이 3명 희생 : 1948년 3월 경찰에 연행되었던 학생과 청년 등 3명이 고문치사로 잇따라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6월 조천지서에서 조천중학원2학년 학생 김용철이, 14일에는 모슬포지서에서 양은하가 29일에는 시청에 의해 박행구가 희생되었다. 

들통난 은폐조작 : 김용철 학생은 꺼꾸로 메달린 채 곤봉으로 매질을 당하다 숨졌다. 경찰은 지병에 의한 사망으로 둘러댓지만 검시결과 고문사실이 밝혀졌다. 양은하는 머리채가 천장에 매달린 채 고문 당하다 숨졌다.

'제주 4.3 사건' 이란

"1947년 3월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독선거, 단독 정부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재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경찰 탄압에 저항... 단선. 단정 반대"

무장대는 부장봉기가 경찰의 탄압에 대한 저항임을 주장했다. '탄압이면 항쟁이다"라는 삐라의 구호가 이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 조국 통일독립과 완전한 민족해방"이라는 구호를 통해 남한만의 단독선거와 단독정부를 반대한다는 뜻을 밝혔다.

미 군정의 초기 대응

제주, 5.10 선거를 거부하다

선거 기록 탈취, 돌 쌓아 도로 차단

무장대는 5.10 단독선거를 반대하기 위해 여러 곳에서 선거 기록을 강제로 빼앗거나 불태웠다. 전화선과 송전선을 끊어버렸고 토벌대의 출동을 지연시키기 위해 돌을 쌓아 도로를 막기도 했다.

학살극 끝난 줄 알았건만

처절했던 피난생활

학살을 피해 한라산으로

중산간마을 주민들은 토벌대 명령에 따라 해변마을로 소개했지만 토벌대의 학살극이 그치지 않자 다시 한라산으로 피신했다. 당초 소개작전의 목적은 무장대와 일반주민을 분리시킨다는 것이어쓴데, 토벌대의 무분별한 행동은 오히려 주민들을 분리시킨다는 것이었는데, 토벌대의 무분별한 행동은 오히려 주민들을 산쪽으로 쫓아낸는 결과를 빚었다.

얼어죽고, 굶어죽고

남편이 이어디론가 사라져 '도피자 가족'이 된 부인은 늙은 시부모와 어린자식의 손을 잡고 눈 닾힌 한라산으로 향했다. 토벌대의 총부리에서는 벗어났지만 피난생활은 너무나 처절했다. 겨울철 한라산에는 살을 에는 추위만 있을뿐 먹을 것을 구하기 어려웠다. 많은 피난민들이 굶어죽고, 얼어 죽었다.  

다랑쉬굴의 비극

다랑쉬굴의 유해는 발견 당시부터 4.3참극의 상징이 되었다. 그 희생은 저항도 못하는 주민들을 무참히 살해한 초토화작전의 실상이었고, 캄캄한 굴속에 갇혔다가 40여 년만에 햇빚을 보았지만 허무하게 화장된 것은 진실을 은페하고 외면 하려고 했던 당시대의 현 주소였다.

안장에서 화장으로

사건의 실체가 알려진 뒤 유족과 도민 여론은 "양지바른 곳에 안장 하자" 는 것이었다. 그러나 얼마후 화장으로 결정되었고, 유해는 1992년 5월15일에 불에 태워져 바다에  뿌려졌으며, 다라위골은 봉쇄되었다. 

발굴 당시의 다랑쉬굴 재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