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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우제비츠 전쟁론 완성하기 (2024) - 계몽주의 이성이 아닌 모방적 이성으로 본 전쟁론

동방박사님 2024. 4. 6.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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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클라우제비츠 전쟁론 완성하기』는 비평가이자 인류학자인 르네 지라르가 19세기의 고전 『전쟁론』에 담긴 ‘전쟁의 속성’을 오늘날의 맥락에서 재규명하기 위해 브누아 샹트르와 나눈 대담집이다. 전쟁에 대한 클라우제비츠의 개념은 오늘날의 폭력을 설명할 수 있는 열쇠이면서, 그 자체로 지라르 사상을 이해하는 지름길이다. 특히 폭력과 욕망의 관계에 대한 지라르의 사상과 자연스럽게 들어맞는다. 지라르는 전쟁을 ‘합리적인 인간의 정치적 행위’라기보다는 ‘모방적 인간의 경쟁 행위’라고 단정한다.

지라르의 대담은 나폴레옹 전쟁에서부터 오늘날의 핵전쟁까지 현대전을 아우른다. 『전쟁론』은 유럽의 전쟁이 모방적으로 번져나가던 시기에 출간되었다. 전쟁이 극단에 이르렀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지금 우리에게 제기된 문제다. 지금은 제도로서의 전쟁은 사라졌고 전 국민이 참여하는 총력전과 전선이 따로 없는 테러리즘의 시대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니아 침공은 9·11테러에서도 보았던 새로운 폭력의 시대를 예시한다. 이 책은 전 세계가 파멸을 향해 점점 더 빨리 나아가고 있다는 메시지를 담은 새 시대의 묵시록이다.

지라르가 주장하는 종말은 역설적으로 희망을 담고 있다. 『클라우제비츠 전쟁론 완성하기』는 지라르가 계몽주의적 이성이 아닌 모방적 이성을 도구로 폭력을 분석하고, 기독교 정신과 횔덜린 등의 선인을 통해 새로운 윤리를 규명하고자 하는 철학적 작업이라고 부를 수 있다. 

목차

모방적 이성으로 전쟁을 보다 | 김진식

머리말: 새로운 폭력의 시대│브누아 샹트르
서론: 클라우제비츠 완성하기│르네 지라르

1장 극단으로 치닫기
2장 클라우제비츠와 헤겔
3장 결투와 상호성
4장 결투와 성스러움
5장 횔덜린의 슬픔
6장 클라우제비츠와 나폴레옹
7장 프랑스와 독일
8장 교황과 황제

에필로그: 위험 시대
브누아 샹트르에게 보낸 르네 지라르의 편지│그라세판 증보

저자 소개

저 : 르네 지라르 (Rene Girard)
 
문학평론가이자 사회인류학자인 르네 지라르는 1923년 남프랑스 아비뇽에서 태어나 1947년 파리 고문서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인디애나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했다. 인디애나대학 프랑스어 강사를 시작으로 듀크대학·존스 홉킨스대학·뉴욕주립대학·스탠퍼드대학 등에서 정교수·석좌교수 등을 지내며 프랑스의 역사·문화·문학·사상에 관한 강의를 했다. 이런 까닭에 그는 프랑스보다 미국에서 더 널리 알려져 있고, 저서 역시 미국에서...

저 : 브누아 샹트르 (Benoit Chantre)

브누아 샹트르는 프랑스의 문학평론가이자 극작가, 수필가다. 앙리 베르그송, 르네 지라르, 에마뉘엘 레비나스, 샤를 페기 등의 작품을 중점으로 연구하고 있다. 르네 지라르와 함께 2005년 프랑스에서 만든 르네 지라르 연구학회 ARM(Association Recherches Mimetiques)의 회장을 맡고 있다.
 
역 : 김진식
 
울산대학 프랑스학과 명예교수. 서울대학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저서로 《르네 지라르에 의지한 경제논리비판》(2005), 《알베르 카뮈와 통일성의 미학》(2005), 《르네 지라르》(2018), 《모방이론으로 본 시장경제》(2020)가 있다. 역서로 《폭력과 성스러움》(1993), 《희생양》(1998), 《알베르 카뮈: 부조리와 반항의 정신 1·2》(2000), 《나는...

책 속으로

지금 우리가 정치학보다는 인류학이 더 유효한 도구가 되는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고 확신하게 된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우리의 해석을 근원적으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계몽주의적인 합리적 인간은 더 생각해서는 안 되고, 결국 폭력의 근원을 고찰해 예전과는 전혀 다른 유형의 합리성을 만들어내야 할 것입니다.
--- p.87

그러나 모든 의미에서 아주 사소한 차이로도 극단으로 치닫기가 촉발될 수 있습니다. ‘공격하는 사람은 항상 이미 공격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경쟁 관계를 한 번도 대칭적인 것으로 느끼지 않을까요? 왜냐하면 사람들은 항상 자신이 먼저 공격하고도 상대방이 먼저 공격했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 p.123

헤겔은 전쟁을 영웅적이고 이성적으로 사적 이익을 극복하는 자기희생으로 보는 데 반해, 클라우제비츠는 더 강력한 거래라고 보는 아주 냉정한 태도를 갖고 있습니다.
--- p.148

클라우제비츠는 그러므로 군인의 영웅주의를 자기 극복이 아니라 모방이 고조된 것으로 봅니다.
--- p.149

클라우제비츠 덕분에 헤겔의 신정론에 의혹을 제기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군요. 특히, 정신이 인간의 열정에 작용해 자신의 목적에 봉사하게 만든다는 주장에 대한 의혹 말입니다.
--- p.150

역사가 폭력적으로 되풀이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이성은 폭력에 저항하지 못하고 폭력을 정당화하면서 길을 열어줍니다.
--- p.157

평화는 오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전쟁은 정확히 말해서, 싸우는 사람들 사이에만 존재하는 ‘아무것도 아닌 것’과 그들의 ‘동일성’ 자체에서 자양분을 얻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폭력을 최종 ‘논리’로 여기는 전쟁의 황혼기인 엄청난 적대감의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 pp.171~172

집단이 군중이 될 때 군중은 모방으로 다시 하나가 됩니다. 대체 작용이 개입하면서 군중의 폭력은 점차 소수 집단을 향하다가 가장 소수인 인물에게 집중됩니다. 마침내 혼란의 원인을 찾아냈다고 믿는 군중은 이때부터 모두의 적이 된 한 사람에게 달려들어 린치를 가하게 됩니다.
--- p.194

오늘날 자주 발발하는 테러의 의미가 무엇인지 클라우제비츠를 통해서 깊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그것은 히틀러와 스탈린의 의미에서 총력전의 확대입니다.
--- p.201

왜냐하면 이것이 전쟁의 두 시대를 가르기 때문인데, 반대의 시대와 적대의 시대가 그것입니다. 극단으로 치닫는 결투는 모든 전쟁 규범을 무너뜨리면서 오늘날과 같은 예측 불가능한 세계적 폭력의 시대의 문을 열었습니다.
--- p.220

끝에 다가갈수록 기원으로 되돌아가는 것이고, 역사가 최악으로 다가갈수록 고대종교와의 대화는 더 절실해지는 것 같습니다.
--- p.221

타인과 우리를 연결하는 것은 모방인데, 우리의 유사성은 점점 커져서 결국 우리 모두가 유사성에 빠져버리고 말 것입니다. 레비나스의 표현대로 우리는 모두 ‘똑같은 것’ 안에 있습니다. 전쟁이 바로 존재의 법칙이라는 말입니다.
--- p.256

원시사회에서 폭력은 신과 ‘가까이 있는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이런 신이 더는 나타나지 않는데, 이제는 더 이상 희생양이라는 배출구 없는 폭력이 한번 분출되면 상승작용만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 p.261

폭력 발생의 중심에 모방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우리는 그러므로 긍정적 모방의 가능성은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 p.273

우리는 오늘날 묵시록 구절들을 무의미한 것으로 보기보다는, 인간에 의한 자연 오염이라는 초현대적 문제와 함께 뜻밖의 의미를 확보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입니다.
--- p.281

저는 당신의 말을 뒤집어서, 폭력적이고 공격적인 형태로 오늘날 종교가 되돌아온 것은 바로 우리가 종교를 멀리 떼어놓았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언급하는 합리주의는 진정한 거리두기가 아니고, 우리 눈앞에서 무너지고 있는 제방일 뿐입니다. 합리주의는 먼 훗날에서 보면 우리의 마지막 신화가 되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한때 신을 믿었던 것처럼 이성을 믿었습니다.(…) 새로운 합리성은 묵시록적인 이성, 즉 신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이성입니다.
--- p.291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것은 자신이 모델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항상 타인들 앞에서 자신을 지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것은 스스로가 타인으로부터 모방받지 않기 위해 모든 것을 하는 것입니다. 니체가 두려워한 신의 죽음은 바로 그리스도의 물러섬인데 그 덕분에 우리는 신의 새로운 얼굴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 p.296

합법적이고 건강한 정치 행위가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정치는 부정적인 차이소멸이 증가하는 것을 억제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종말의 시간으로 들어서는 최악의 사태를 막아야 하는 것은 그 어느 때보다 우리 각자가 해야 할 일입니다. 오늘날 세상은 최악인 동시에 최고의 세상입니다. 오늘날 세상이 많은 희생자를 죽였다고 말하지만, 동시에 그 어느 때보다 많은 희생자를 구했다고도 말하는 세상입니다. 오늘날 세상은 모든 것을 증가시킵니다.
--- p.310

클라우제비츠는 어쩌면 최초의 현대 작가 가운데 한 명, 특히 위대한 르상티망, 즉 원한의 작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게 적의 관점에서 쓰였기에 나폴레옹 전쟁에 대한 클라우제비츠의 설명은 다른 사람들의 설명보다 더 공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원한의 관점은 종종 이른바 ‘역사적 객관성’보다 더 사실적인 분석을 제공해줍니다.
--- pp.348~349

극도로 불안정한 우주의 중심에는 폭력이 화해로 변하는 ‘친밀한 중개’가 될 기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환기해야 하는 것은 모방적 욕망의 메타포가 아니라 역사적 운동으로서 낭만주의입니다. 선생님에게 그런 것은 프랑스와 독일 관계의 양면성과 같은 것 같습니다.
--- p.352

먼저 정치적 사례부터 살펴봅시다. 1958년 콜롱베에 있던 드골의 사저에서 진행된 드골과 아데나워 회담에서 특히 아름다운 것은, 유럽이 죄를 범한 그곳에서 어떤 식으로든 용서받기를 원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전례 없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서로를 너무 모방한 두 나라의 폐허 위에서 과도한 모방이 최악의 사태를 불러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는데, 이는 정말 예외적인 순간입니다.
--- p.376

교황은 이성이 너무 지나치게 믿음과 투쟁하면 믿음은 이성에 반대하는 더 불안한 신앙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위험을 주장하면서 편협한 합리주의의 위험을 경고할 수 있을 뿐입니다.
--- p.420

그렇지만 저는 이성과 신앙의 대화가 합리적 대화가 되기를 바라는 교황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가 기도하는 신학적 이성은 합리주의와 신앙 절대주의의 신비를 벗겨내야 합니다.
--- p.433

그 어느 때보다 자기 세계를 파괴할 수 있게 된 오늘날 인간이야말로 자기몰락의 당사자들이다. 기독교 차원의 전형적인 도덕적 비난뿐 아니라 인류학적으로도 피할 수 없게 확인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잠자는 우리 의식을 깨워야 한다. 안심시키려는 마음은 언제나 최악의 결과를 낳는다.
--- p.448

출판사 리뷰

총력전과 테러리즘의 모습으로 드러난 새로운 폭력,
세계의 파멸을 예고하는 새 시대의 묵시록

■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을 완성한다는 것

클라우제비츠는 18~19세기에 살았던 프로이센의 군인이자 전략가, 사상가다. 프랑스가 프랑스혁명을 치른 뒤 나폴레옹 전쟁이 유럽 전역을 휩쓸던 시대에 프로이센은 이에 맞서서 싸웠다. 클라우제비츠는 직접 나폴레옹 전쟁에 참전하고 나폴레옹군의 포로가 되기도 했다. 30대 중반부터는 프로이센 육군사관학교의 교장으로 재직했다. 그때부터 전쟁에 대한 방대한 연구를 시작했지만 콜레라에 걸려 책을 완성하지 못하고 사망했다. 그의 유고를 아내 마리 폰 클라우제비츠가 출판한 것이 『전쟁론』이다. 전쟁철학, 국제정치학, 군사학을 아우르며 전법을 학문적으로 정리한 이 책은 『손자병법』과 함께 시대를 초월한 군사전략서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르네 지라르는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이 미완이라고 본다. 전쟁의 속성에 대한 중요한 직감을 클라우제비츠가 끝까지 관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클라우제비츠가 전쟁은 ‘극단으로 치닫기’라는 주장에서 돌아서면서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연속’이라는 주장으로 물러선 것을 말한다. 지라르는 그 이유를 ‘계몽주의 이성’ 때문이라고 본다. 지라르는 ‘모방적 욕망’에 따라 움직이는 교전국들이 점점 더 극단으로 치닫는 대규모 결투를 펼치는 것이 바로 전쟁이라는 사실을 전하려고 한다. 이 책은 클라우제비츠가 얼핏 본 것을 르네 지라르가 집요하게 파고들어 오늘날 세계의 비극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대담집이다.

■ 극단으로 치닫는 전쟁,
쌍둥이들의 인정사정없는 결투

인류가 화해하지 못하고 아직도 전쟁에 뛰어들고 있는 것을 계몽주의 이성으로는 만족스럽게 설명할 수 없다. 지라르는 ‘모방적 이성’으로 전쟁에 대해 고찰한다. 그에 따르면 인류의 동일성이 전쟁의 원인이다. 동일성 때문에 경쟁이 발생하고, 경쟁은 쟁점을 무화하면서 상대방을 이기는 것만 중시하게 한다. 전쟁은 “쌍둥이들의 인정사정없는 결투”가 되는 것이다.

“교전국들은 모두 상대방을 자신의 법으로 삼는다. 여기서 상호행위가 나오는데, 개념상으로 이 상호행위는 극단에까지 이르게 된다.”(59쪽)

르네 지라르의 욕망이론에 의하면, 모방적 경쟁은 상대방의 욕망을 소유해 자신의 존재를 상승시키도록 한다. 욕망은 전염성을 가지며 경쟁자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모델이자 장애물이 된다. 한 쌍의 짝패가 된 이들은 스스로를 파괴할 때까지 경쟁적으로 결투한다. 클라우제비츠가 예상한 극단으로 치닫는 ‘절대전쟁’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모방적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클라우제비츠는 때로는 나폴레옹이라는 모델에 사로잡히지만 또 때로는 정반대로 나폴레옹을 증오하게 됩니다.”(332쪽)

지라르가 꼽은 짝패 갈등의 좋은 사례는 클라우제비츠와 나폴레옹이다. 클라우제비츠의 생각은 언제나 나폴레옹에 대응하는 것이었고, “클라우제비츠에게 나폴레옹은 모델-장애물”이다. 이외에도 이 책에는 시기, 선망, 질투를 낳는 모방적 관계의 예시가 여럿 등장한다. 대표적으로 프리드리히 대왕과 볼테르의 관계가 있다. 제르멘 드 스탈 부인을 통해서는 프랑스와 독일의 모방적 관계에 대해 분석한다. 19세기 초 프랑스 고전주의와 독일 낭만주의 문학에 대한 대담에서는 모방에 대한 직관이 솟아난다.

■ 자멸할 위험에 처한
‘희생양 없는 문명’

르네 지라르는 사회 구성원들끼리의 갈등을 해소하거나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인류가 취해온 방식이 ‘희생양’을 만드는 것이라고 말해왔다. 희생제도는 폭력의 방향을 하나의 대상으로 돌려 공동체 전체를 보호하려는 문화적 장치다. 이때 사람들은 희생을 정당화하면서도 희생물에게 사회통합의 임무를 부여하며 성화한다.

“교전국들은 모두 ‘스스로가 희생양이라는 명분으로’ 숱한 희생양을 만들어내고 있다.”(52쪽)

그러나 오늘날은 희생양과 희생제도를 없앤 사회다. 지라르에 의하면 예수가 희생제도에 의해 무고한 죽음을 당하면서 희생제도 자체를 폭로하고 파괴했다. 그렇게 종교의 신비를 벗겨낸 것이 기독교다. 이 탈신비화는 절대적으로 좋은 것이지만 상대적으론 나쁜 결과를 낳았다고 지라르는 말한다. 이제는 더 이상 제3자를 통해 화해할 수 없게 된 적대자들은 서로를 더욱 강력하게 비난한다. 언제나 그들보다 우리가 더 희생자라고 말함으로써 적을 섬멸할 권리를 정당화하는 것이다. 지라르는 희생제도가 없어진 오늘날 문명은 폭력의 물결을 막는 둑을 허문 것처럼 가장 취약하고 자멸할 위험에 처해 있음을 지적한다.

“희생양을 갖는다는 것은 희생양을 가졌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희생양을 가졌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영원히 희생양을 갖지 못하고서 해결책도 없이 모방적 갈등에 노출되는 것이다.”(77쪽)

■ 총력전과 테러리즘,
현대전의 두 가지 모습

희생양이 없어진 시대의 전쟁은 온 국민을 동원하는 ‘총력전’이거나 전선이 따로 없는 ‘테러리즘’이다. 자신의 의지를 실현하기 위해 서로에게 점점 더 잔인하게 폭력을 가하다가 폭력 자체에 몰두하게 된다. 지라르는 이런 성격을 띤 현대전이 프랑스혁명에서부터 시작됐다고 본다. 귀족정에서 민주정이 되면서 전쟁은 대중의 문제가 되었다. 또한 이념적으로 변한 전쟁은 다른 쪽이 파국에 이르러 완전히 패배했을 때만 끝날 수 있다. 이데올로기 전쟁은 고전적인 국가 사이의 전쟁을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절대 예측할 수 없는 ‘무차별적’ 폭력으로 바꾸어놓은 것이다.

클라우제비츠가 『전쟁론』에서 예감한 테러의 징후를 바탕으로 지라르는 오늘날 자주 발발하는 테러의 의미가 무엇인지 파고든다. 테러리즘의 기원은 혁명전쟁에서 찾을 수 있다. 테러는 상대방 공격에 대한 방어라는 명분에서 힘을 얻는다. 언제나 자신이 벌이는 일은 공격에 대한 대응이라고 정당화하는 것이다. 지라르는 현재의 테러가 과거 서구 제국들이 행했던 정복의 재연인데, 중간에 미국을 만나면서 더 위험해졌다고 본다. 극단으로 치닫기가 과거에는 나폴레옹주의나 범게르만주의를 사용했던 것처럼 오늘날에는 이슬람주의를 사용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 과도한 폭력을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
거리두기와 물러섬

지라르가 보기에 종교는 평화의 엔진 역할을 한다. 하지만 계몽주의적 편견은 인간의 종교성을 배제한다. 계몽주의가 아닌 새로운 이성을 강조하는 지라르는 오히려 공관복음과 서간문에 많이 들어 있는 묵시록에 집중한다. 폭력은 오늘날 모든 지역에서 분출되며 묵시록이 예고하는 재앙을 유발하고 있다고 말한다. 전쟁을 완전히 불법으로 낙인찍으면 역설적으로 전쟁이 도처로 번져나간다. 갈등을 지연하는 것은 갈등을 더 결정적으로 만드는 결과를 낳는다. “호전주의와 평화주의가 모방적 짝패”인 것이다.

종말을 주장하는 지라르는 “위험이 커가는 곳에 우리를 구원하는 힘도 커가고 있다”며 역설적인 희망을 이야기한다. 전쟁과 결투의 또 다른 논리를 깊이 생각하게 되고,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저항의 윤리를 규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그리스도를 비롯한 기독교 정신과 횔덜린을 비롯한 선인들을 통해 그 길을 제시한다. 지라르는 대상과 일정한 ‘거리두기’를 권한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이 신과 합당한 거리를 두게 했던 존재이며, 횔덜린은 그리스도에게서 물러섬을 모방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지라르에 의하면 우리는 거리를 둘 때 상호성과 동질성을 보게 된다. 이것이 상대와 나의 차이를 믿고 상대에게 더 강하게 대응하는 것, 즉 극단으로 치닫기를 멈추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