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대한민국 현대사 (독서>책소개)/1.해방전후.미군정

장흥자서전 (2025) - 전격 교체된 대한민국 초대 헌병사령관

동방박사님 2025. 1. 15.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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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초대 헌병사령관의 증언으로
재조명되는 김구 암살 사건!
“긴밀히 진행된 친일파들의 ‘6월 공세’”

이 책은 대한민국 초대 헌병사령관 장흥 장군이 퇴역 후 자필로 남긴 국한문 혼용 자서전을 언해한 것이다. 

그동안 자서전의 존재나 일부 내용만 신문에 소개되었으나, 광복 80주년을 맞이하여 가족들의 결심으로 책 전권이 세상의 빛을보게 되다.

장흥은 백범 선생 서거 후 처음으로 숙청된 공직자였다. 

살인자 안두희를 수사해야 할 헌병사령관 자리를, 총참모장 채병덕의 요청으로 헌병에 몸을 숨긴 친일파 전봉덕에게 내어주어야 했다.

백범 김구 선생의 측근으로, 암살 음모 세력의 본진에서 그들의 움직임을 어렴풋이나마 지켜볼 수 있었던 인물의 자서전이라는 점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

 비록수집하고 기록한 자료가 6·25 전쟁 당시 폭격으로 소실되어기억만으로 기술된 책이기는 하지만, 

이 책이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광복 후 좌우 갈등이 극으로 치닫던 정국 속에, 곳곳에 뿌리내린 친일파들이 독립운동 세력을 어떻게 와해시켰는지, 장흥은 1949년 6월 몰아친 친일파의 ‘6월 공세’를 담담한 어조로 들려준다.


목차
해제(한홍구)
전봉덕을 지워버린 ≪월간 조선≫의 장흥 자서전
백범 암살 이후의 권력 암투
최악의 빌런 신성모와 88구락부
친일 경찰의 헌병으로의 피신
국회 프락치 사건은 남로당 아닌 김구 지지 세력 제거
신성모: 반역 수준의 무능과 무책임
『(전격 교체된 대한민국 초대 헌병사령관) 장흥 자서전』 발간의 의미

[과거의 거울로 미래를 비추다]

서언

1부 나의 회고: 망명 시절

1. 장씨의 기원
2. 문중의 정황
3. 동네 정황
4. 동네 청년 정황
5. 내 가정의 정황
6. 망명한 동기
7. 망명 초기 정황
8. 중국에 거주하는 교포 정황
9. 군대에 투신한 전후
10. 사관학교 생도 시절
11. 황포사관학교 졸업 후
12. 고급군관단에 재입교하여 훈련을 마친 후
13. 헌병부 대장직을 사임한 후
14. 결혼 문제
15. 중·일 양국 전쟁 전후의 경위
16. 천진사변 경위
17. 중일전쟁의 선포
18. 종군 작전 중 가족을 상해로 보내다
19. 김구 주석께서 저격당하신 사건
20. 한구와 장사를 함락당한 후의 상황
21. 그리웠던 아내와, 생후 처음 보는 장녀 한옥을 만나다
22. 한인 사병 탈출 사건
23. 적군이 투항 선언을 선포한 후 행동
24. 중국공산당의 시말
25. 군대 내의 공산당 활동 정황
26. 광동성 공산당 폭동과 한인 학생들
27. 공산당 토벌부터 선전포고까지
28. 대일항전 중 공산당의 성장
29. 국공전쟁의 결과
30. 대공전쟁의 패인은 무엇인가?
31. 중국이 반공전쟁에서 실패한 이유
32. 모든 실패는 정신 전선의 붕괴에 기인한다

2부 나의 회고: 환국 후

1. 귀국 후 행적
2. 이승만의 남한 공산화 저지
3. 대한민국 국군 첫 헌병사령관으로 취임, 전봉덕의 등장
4. 소위 국회 ‘프락치’ 사건과 나와의 관계
5. 백범 김구 암살의 전말
6. 암살 조사자가 된 흉악한 친일분자 전봉덕
7. 이승만 대통령과 김구 선생의 관계
8. 6·25 전쟁 전의 국제 정세
9. 6·25 전쟁 전의 군 간부 정황
10. 6·25 전쟁 당시 정황
11. 6·25 전쟁 당시 정계 동향
12. 6·25 전쟁 시의 정계 요인들의 말로
13. 군에서 퇴역한 과정
14. 결론

부록 1
가보에 기입된 나의 약력 사본
우석 장흥 장군 행장
전역하는 날 홀로 읊어봄
태상경파 종문회 취지문

부록 2 : 흩어진 기록을 수집했다.
추도문(김구)
추모사(이시영)
조사(이범석)
기술
진술
이력서
상례 및 제례에 관한 준칙
유묵 전시 당시 작성한 계획서 서론
약력
유적 비문 초안

아버님을 기리며(장석위)
자서전 원문

저자 소개 
저 : 장흥 (張興)
1903년 1월 20일, 고양군 원당면 성사리에서 태어났다. 

1925년에 상해로 건너가 한국청년동맹회에 가입, 활동했다. 여운형의 추천으로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했으며, 졸업 후 중국군에 입대했다.

 중국군 헌병사령부 경무처 상위(上尉), 헌병 제8단 제2영 소교영장(少校營長), 중교영장(中校營長) 등으로 복무하며 독립운동가들의 신변을 보호하는 활동을 했다. 

광복 후에는 광복군 참모로 전임되어 교포들을 안전하게 ...

해설 : 한홍구 (韓洪九) 
한국 현대사학자, 혹은 현재사학자. 

1959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워싱턴 대학교(University of Washington)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평화박물관 상임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 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국정원 과거사위원회) 민간위원을 역임했다. ‘

걸어 다니는 한국 현대사’라 불리는 이 시대 대표적인 역...

책 속으로
우리 국민은 점차적으로 만주와 러시아 연해주로 내쫓고 그들이 정착한 후 그들을 보호한다는 미명하에 만주 지역 내에 소위 수비대를 파견하여 무뢰한 한인(韓人)들을 앞잡이로 내세우고 중국인의 토지, 재산을 강점 혹은 몰수시켜 중·한 양 국민 간에 원수로 상대하는 현실을 조성했다. 

한·중 양국의 전통적인 우의를 파괴하는 데 경주하는 동시에 한 발 더 나아가 이른바 일본, 조선, 만주 공동체라는 구호를 내걸고 만주를 병탄하려는 야욕이 갈수록 노골화되어 가는 곳마다 고의적으로 갖은 수단과 방법을 써서 사건을 만들어 확대시킨 후 군대를 파견하여 무력 충돌을 조성하는 것이 일관적인 통례이다.
--- p.57

이 딱따구리 외교라 함은 딱따구리가 이 나무 저 나무 앉는 데마다 쪼아 흠집을 내는 것같이 일본인은 가는 곳마다 무슨 트집을 잡든지 반드시 중대한 사고를 연출하여 처음에는 외교적으로 교섭하는 것처럼 하다가 자기네 소기의 목적대로 달성치 못하면 최종에 가서는 군대를 동원하여 강행하는 실례가 부지기수였다. 

이런 악독한 정책을 실행하는 데 있어서는 언제나 자기네 군인과 민간인은 뒤에다 모셔놓고 반드시 무뢰한 한인(韓人)을 앞에 내세우는 것이 일관적으로 취하는 악랄한 계책이었다.
--- p.58

나는 그 당시 수복된 감주에서 부흥 사업에 전력을 경주하면서 적군의 패망을 손꼽아 기대하던 중 동월 9일 자정에 당지 총상회(總商會) 증(曾) 씨의 초청을 받아 한창 취흥을 누리던 중 별안간 시가 중에서 폭죽을 울리며 만세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나는 무슨 폭동이나 일어난 줄로 오인하고 그 자리에서 부대로 전화를 걸어 물었더니 숙직 장교의 대답이 적군이 투항을 선포하였다 

하여 시민들이 열광적으로 환호하면서 시가행진을 하는 중이라 한다. 

이 말을 들은 나는 꿈인지 생시인지 너무나 기쁨이 넘치어 곧장 집으로 달려와서 처자를 부둥켜안고 30년 동안 그리웠던 고국산천을 보게 되었고, 

부모님과 형제들도 만날 수 있게 된 기쁨으로 참으로 미칠 지경이었다.
--- p.74

이 광대한 지역 내에 치안책을 맡고 또 7~8년이나 적군이 점령하였던 이 땅에 선발대로 진주하게 됨에 민중들의 환영은 물론이고 

나의 과거를 회고하건대 일본 헌병 경찰들 폭정하에서 견디다 못하여 망명 생활을 하던 신분으로서 이자들의 무장을 해제하는 책임자가 되고 보니 

그 통쾌한 심정이야말로 형언할 수 없으나 오직 우리 국민과 나의 친지, 친족들 앞서 이런 현실을 보여주지 못함이 심히 유감이었다.
--- p.75

주민들의 환영 오찬 초대를 받고 오후 4시경에 서울로 돌아오는 도중이었다. 

서대문 거리를 지나노라니 거리가 뒤숭숭하고 백범 선생 계신 저택 앞에는 인산인해에 곡성이 천지를 진동하였다. 

마침 길가에 우리 헌병 차량이 즐비하게 세워져 있고 순찰과장 김병삼(金炳三) 대위가 경비하고 있기에 즉시 하차하여 곡절을 물으니 

백범 선생님께서 흉악한 안두희(安斗熙) 놈에게 저격을 당하시어 절명하셨다 하기에 범인은 어찌 되었느냐고 물으니 현장에서 체포하여 헌병사령부로 데려가 수감하였다 한다.
--- p.102~103

사건의 주모자를 분석한다면 단체로서는 한민당이 새로 조직한 ‘88구락부’, 서북청년회이고 개인으로서는 국방장관 신성모라고 지적할 수 있다. 

왜냐하면 백범 선생님이 저격당하신 후에 한민당 당무회의에서는 백범 선생을 나라의 역적으로 규정하여 신문에까지 발표하였고 흉악한 안두희 놈을 민국의 충신이라 하여 석방운동을 전개하였다.
--- p.109

백범 선생께서 돌아가신 후에 사회적 여론이 구구하여 심지어 이 대통령께서 시킨 것이라고 유언비어가 있었으나 실질적으로 아부하여 진급한 친일분자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생명을 공고히 하려는 비극에서 빚어진 사실이고,

절대로 이 대통령께서 교사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과거 그 두 분의 역사적 행적에서 증명할 수 있는 것이다.
--- p.113

출판사 리뷰
김구 선생의 측근, 장흥이 기록한 역사의 순간들!

그리고 선생님! 단 한 가지 부끄럽고 죄송하고 통분한 것이 있습니다. 

해방한 지 이제 겨우 20년 남짓밖에 안 되었는데 어느 결엔지 독립정신, 독립사상 등 독립 두 자 붙은 것이면 사람이고 노선이고 모두 다 멸시받고 구박받는 세대가 된 그것입니다. 선생님, 이 나라 이 세대가 왜 이같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된 것 생각하면 그때 진작 돌아가신 것 오히려 선생님께는 다행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다시 한편 생각하니 만일 선생님이 더 오래 계셨다면 감히 독립정신, 독립 노선을 업신여기는 세대가 될 수 있을 것입니까? _?추도문: 1968년 6월 22일 백범 선생 19주기?, 191~192쪽

현재 한국은 극심한 역사전쟁에 시달리고 있다. 뉴라이트 관련 인사가 독립기념관, 국사편찬위원회, 동북아역사재단, 진실화해위원회를 비롯해 정부 각 기관의 장으로 기용되면서 친일파들의 명예 회복을 위한 기도가 점점 노골화되는 형국이다. 

“김구 테러리스트”라는 말이 버젓이 활개를 치고, 김구 선생의 증손자 김용만 위원의 말처럼 국가보훈부에서는 “안중근, 이봉창, 윤봉길 의사 의거, 봉오동·청산리대첩 등 대표적인 독립운동을 제외하고, 

김활란, 김성수 등 대표적인 친일 인사들이 활동했던 사건을 선정”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책은 1925년 상해로 망명해 황포군관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중화민국 국군에 입대해 독립군들의 신변 보호에 힘썼으며, 광복 후에는 교포들의 무사 귀국을 위해 활동했고, 

귀국해서는 대한민국 국군으로 평생을 조국에 바친 한 인물의 자서전이다. 대한민국 초대 헌병사령관 장흥은 자신이 경험하거나 지근거리에서 전해 들은 역사적 순간을 기록으로 남겼다. 

독립운동가이자 김구의 측근으로서 이렇게 상세한 자서전을 남긴 사례는 드물다. 

게다가 김구 선생 암살 사건 이후 그것을 모의한 세력에 의해 헌병사령관 자리에서 전격 교체된 인물이 남긴 자서전이라는 점만으로도 이 책은 큰 가치를 지닌다.

신성모-채병덕-전봉덕, 88구락부, 한민당... 흉악한 친일파 무리들의 계획적인 음모!

1949년 6월 27일 백범 김구 선생이 암살된 다음 날, 장흥은 신성모의 명함에 면직 문구가 적힌 인사명령장을 받고 경질되었다고 한다. 

신성모의 명령으로 그를 대신해 헌병사령관 자리를 차지한 인물은, 채병덕의 도움으로 반민특위의 칼날을 피해 헌병에 몸을 숨긴 일제 고등경찰 출신 전봉덕이었다.
장흥은 이 자서전에서 백범 선생 암살의 배후로 한민당이 새로 구성한 88구락부, 서북청년회, 국방장관 신성모를 지목한다. 

백범 선생을 원수같이 여기던 친일파 집합단체가 각 요직을 점유하려는 음모를 꾀해 안두희를 교사하여 이런 비극을 조작해 냈다는 것이다. 

그는 암살 사건 이후 그 공로로 대가를 받은 이들을 다음과 같이 적기도 했다.

정보국장 백선엽은 이 사건을 한독당 자가지란으로 조작해 낸 공로로서 육군 준장으로 승진하여 육군 제5사단장으로 영전하였고, 

서북청년회 회장 문봉재(文鳳才: 문봉제(文鳳濟)를 오기한 것이다)는 치안국장으로 있다가 교통부장관까지 영전하였고, 

범인 안 군은 사건 직후에 석방되어 원계급인 육군 중위로서 육군 소령으로 약진하여 다시 군에 복귀하였다가 국회에서 문제화되어 

국방장관 신성모와 참모총장 채병덕 양 군에게 책임을 추궁하게 되므로 인하여 부득이 다시 군에서 추방하는 동시에 군용 장유공장(醬油工場)을 경영케 해주어 생활을 보호하여 주었다. _110쪽

장흥이 자서전에서 여러 번 강조한 “흉악한 친일파 무리들의 음모”는 80여 년이 지난 현재에도 계속 진행 중이다. 이 책의 출간을 계기로 역사에 반하는 무도한 역사전쟁이 종식의 길로 나아갈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흩어진 퍼즐을 맞춰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다!

역사학자 한홍구 교수는 책 속에 흩어진 조각들을 하나하나 맞춰 이 자서전의 가치를 찾아냈다.

신성모를 정점으로 한 친일·반공 세력이 백범 김구를 중심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 청산을 주장하는 공동의 적을 향해 똘똘 뭉쳐 싸워 ‘승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_11쪽

자서전 본문을 통해 6월 공세의 흐름을 읽을 수 있지만, 항목을 달리하다 보니 개별 사건으로만 인식될 수도 있다. 한홍구 교수는 그 틈을 메우며 각 사건이 어떻게 큰 흐름을 이루어 한국 현대사를 왜곡시켰는지 「해제」를 통해 집중 조명한다.

1949년 6월에 집중적으로 진행된 ‘6월 공세’는 

① 반민특위에 대한 공격, 

② 국회 프락치 사건,

③ 백범 김구 암살 등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는데, 

 

그중 

① 반민특위에 대한 공격은 서울시경국장 김태선의 지휘하에 반민특위의 집중적인 조사 대상이 된 친일 경찰이 담당했고, 

② 국회 프락치 사건은 일제 고등경찰 출신 헌병부사령관 전봉덕이, 

③ 백범 김구 암살은 만주군 출신 포병사령관 장은산이 담당했다. 

이 모든 공작의 정점에는 국방장관 신성모가 있었다. _18쪽

그는 6월 공세뿐 아니라 자서전에 담긴 다른 단서도 찾아내 역사의 빈칸을 채워나간다.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에서 전봉덕의 행적을 추적하면서 풀지 못한 숙제의 하나는 전봉덕은 헌병사령관을 지낸 뒤 신성모가 국무총리서리를 겸하게 되자 국무총리 비서실장에 올랐다.

 처음에는 이 경력이 연속된 것으로 알았으나 기록을 자세히 검토해 보니 전봉덕이 헌병사령관을 그만둔 것은 1949년 11월 27일이고, 국무총리 비서실장이 된 것은 1950년 4월 27일로 5개월의 공백이 있었다.

필자는 국회 프락치 사건과 백범 암살의 실행에서 결정적인 공을 세운 전봉덕이 왜 군에서 밀려나 5개월간 야인 생활을 하게 되었는지 몹시 궁금했는데, 

그 의문이 이 책을 통해 깨끗이 풀려버렸다. _10쪽

독립운동가가 직접 기술한 몇 안 되는 기록 중 하나인 이 책이 김구 선생 암살 사건을 다시 공론의 장에 올리는 역할뿐 아니라, 역사의 빈칸을 채우는 사료로서 오롯이 자리매김하기를 바란다.

* 출처 : 예스24 <https://www.yes24.com/Product/Goods/1413121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