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선언과 만세운동의 시작
1919년 3월1일 2시 민족대표들은 태화관에 모였다. 독립선언서를 참석자에게 배부하고, 최린은 종로경찰서에 독립선언서를 보내 태화관에 자신들이 있다는 것을 알렸다. 이내 종로경찰서 경찰들이 들이닥쳤다.
한용운은 자리에서 일어나 간단한 연설을 한 뒤 만세삼청을 한뒤 경무총감부로 연행되었다. 민족대표들은 독립선언식과 독립선언서의 배포, 독립통지서를 전달 함으로써 3.1운동의 도화선 역할을 하였다. 같은시각 학생들과 시민들은 탑골공원에 모여 있었고, 정재용이 팔각정에 올라 독립선언서를 낭독 하였다. 참석자들은 독립만세를 외치기 시작하였고 정문을 통해 종로로 뒤쳐나와 동서방향으로 나뉘어 행진을 시작하였다. 거리의 시민들이 합세하여 그 인원은 수천명으로 늘어 났다.서대문, 서소문, 종각 부근 등지를 돌다가 오후 4시경에는 일본인 거리인 본정통으로 집결하였지만 일제에 의해 해산되었다. 그날 저녁에도 대한문 앞, 마포, 연희 전문학교 부근에서 시위가 있었으며, 자정이 넘은 시간에도 종각에서 종로경찰서로 4백여명의 사람들이 행진을 하다가 제지당하는 등 시위는 게속 되었다.
남대문정거장에 모임 학생들
고종의 인산일인 3월3일 강기덕, 김원벽, 한위건은 5일에 남대문정거장 앞에서 만세운동을 하기로 하였다. 4일 오전에는 각 전문학교 및 중등학교 대표자들을 불러 참여를 요청하였고, 일부 학생들은 통고문을 400매정도 제작해 배포하엿다. 3월5일 오전9시 남대문정거장에는 5~6천 명의 학생들이 모여 걷기도 힘든상황이었다. 강기덕과 김원벽은 인력거를 타고 "조선독립"이라 적은 깃발을 펼치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이끌었고, 참석자들도 만세를 부르며 대행진을 시작하였다.경찰은 남대문에서 행렬을 지지하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학생들은 저지선을 뚫고 두 행렬로 나뉘어 행진하다가 모신각에서 다시합세하여 시위를 진행 하였다. 그러나 경찰과 군인에 의하여 강제로 해산되었는데, 이과정에서 대한문에서의 발포등 일제의 무력진압으로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 하였다. 100명이 검거되엇고 그중에는 많은 여학생이 포함되어 있었다.
독립선언서 1950.3.17. 문화홍보사
문화홍보사에서 발행하여 판매하였던 독립선언서이다. 독립선언서의 본문 전체와 " 운동 당시의 동지 48인"의 초상이 수록되어 있다.
손병희 선생 유품 /천도교 중앙도서관 자료실
손병희 선생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병세가 악화되어 1920년 10월30일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이후 동대문 밖 상춘원에 머물며 치료할때 작성하였다. 선생은 끝내 1922년 5월19일 서거하였다.
하숙생, 격문을 만들다.
사립 국어보급학교의 학생 채순병은 3월2일 아침[조선독립신문]을 읽고 조선이 독립되었다고 생각하였지만 4일 아직 독립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엇고, 길에서 만난 사람을 통해 3월5일 9시 남대문 밖에 모여 만세를 부른다늠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또 다른 사람에게 거사장소는 의주통이나 남산이라는 말을 들었다
재차 남대문 밖에서 모이는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그는 장못된 정보를 듣고 다른장소에 모이는 사람이 없도록 격문을 만들기도 하였다. 안국동69번지 박태병의 집에서 같이 하숙하는 경성고등 보통학교 학생 최강윤 중동학교 학생 김종현 과 함께 백지400매와 칠필3자루, 탄산지를 사용하여 3월5일 오전 8시30분까지 남대문역 앞으로 태극기를 가지고 모이라" 는 내용의 격문을 등사하여 배포하였다
독립운동에 관한건 (제6보)
1919.3.5./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 /일본방위청 방위연구소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3.1운동의 정황을 작성한 일일 보고문이다,3.1운동이 발생하자 각 도의 경무부장에게 해당지역의 만세운동 정황을 매일 전보로 보고받아 작성 하였다. 문서 구성은 크게"경성"과'지방" 부무느로 이루어졌으며, 해당일 몇 시까지의 정황인지 자세하게 덧붙였다.
일제 주요감시대상 인물카드. 국사편찬위원회 /등록문화재730호
정석도 신문조서/ 1919.3.8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국사편찬위원회
3월5일 시위에 참여한 중앙학교 1학년 정석도를 신문한내용을 기록한 문서이다. 신문조서에 따르면 정석도은 동창생들과 4일 밤에 격문을 보고 택그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5알 아침에 그것을 버리라고 써진 쪽지를 받아 태국기는 버리고 나가서 만세를 부르다 체포되었다.
태극기 1919년경/대한불교조계종 진관사/ 등록문화재 458
2009년 진관사 칠성각을 복원하고자 해체하는 도중에 발견되었다. 일장기위에 덧그려졌다는 점이 특징이다. 국내네서 발행된 지하신문인[조선독립신문][자유신종보]와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발행한[독립신문]등과 함께 발견되어 독립운동 당시에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또한 3.1운동 이후 민족대표인 한용운과 백용성을 대신해 불교계 독립운동을 주도한 백초월이 태극기와 신문을 숨겼던 것으로 보인다.
다시 불붙은 시위, 빠르게 번지다.
3월 5일 이후 서울에서는 긴장된 나날이 계속되고 있었다. 지하신문과 격문이 나돌고, 상범들은 문을 닫았으며 회사의 노동자들은 파업에 돌입하였다. 경찰들은 가책수사를 실시 하였으며, 일본군은 병력을 추가로 배치하고 야포 중대를 시내로 행군하게 하는등 강압적인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22일 남대문 정거장 뒤 봉래정에서 열린 노동자대회를 계기로 23일부터 다시 서울의 시위가 불 붙었다. 오후8시 동대문 근처, 동소문안, 용산 원정 등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같은시간 외곽의 고양군 동묘리 돈암리 청량리, 왕십리, 마포, 양화진 등
열두 곳에서도 사람들이 모여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들은 대부분 노동자와 상인들 이었고 시내와 외곽에서 동시에 기습적으로 진행하였다. 이 시위는 27일 까지 진행되었는데 고양, 시흥, 장단, 개성, 수원, 강화 등 경기도 지역으로 빠르게 전파되었다.
전보 1919.3.28 /일본방위청 방위연구소
조선독립 소요사론 1921/야오아기 츠나타로
조선독립 운동 비화 1925.치바료
한국의사례 1921. 정한경
한국의봉기 . 기독교인이 한 역활
전국으로 번진 만세운동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3.1운동 당시 전국에서 1,542회 만세운동이 있었고 2,023,098명이 참여하였다. 이는 당시 인구 1,700만명 중 1/8이 넘는 숫자였다.만세운동은 도시와 농촌을 가리지 않았고 누구나 조직하고 참여할 수 있었다. 처음 민족대표33인을 미롯한 지식인과 종교인 등이 주도적으로 게획한 3.1운동은 학생들이 이어갔다. 이후 서울과 평양을 비롯한 9개 도시에서 인근도시로 전파되었다. 그 과정에서 상인들은 상점의 문을 닫는 것으로 노동자들은 파업하는 것으로 참여하였다. 그 과정에서 상인들은 상점의 문을 닫는 것으로 노동자들은 파업하는 것으로 참여 하였다. 만세운동은 점차 전국의 농촌과 산간 벽지까지 확산되었고 농민들이 대거 참여 하였다.일제의 강압적인 무력진압 앞에 초기 비폭력 만세운동의 노선은 지켜질 수 없었고, 일부는 무력투쟁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만세운동은 국내에 머므르지 않고 국외까지 번져나가 간도, 연해주, 미국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다시 만세운동이 일어 났다.
소요 열람지도
1919년 3월1일 조선총독부가 3.1운동의 영향으로 전국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의 규모를 지도로 표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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