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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중세 여성의 정체성을 탐구하다
여성, 타자에서 주체로
저자는 이 책에서 중세의 남성과 여성 간의 관계가 다양한 형태로 표출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부 여성과 수녀원은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순응하며 그 협력자로서 남성우월적 가족주의 문화를 형성하는 데 일조했으나, 이러한 지배권에 도전하며 이를 부정하는 주체가 되고자 했던 여성들도 있었다. 이들은 훈육과 감시의 권력을 비판하고, 가부장적 관습과 전통을 변화시키고자 투쟁했다.
지금까지의 젠더사 연구는 남녀의 사회적 관계를 가해자·피해자 관계로 파악하며 남성을 가부장제의 집단적 수익자로 분류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최근들어 가부장제가 여성과 남성 모두를 억압하는 기제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남성중심의 억압적 성 담론은 남녀를 막론하고 피지배 계급 모두를 지배 계급의 헤게모니에 순종적으로 만드는 정책의 일환이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남성과 여성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서로 다른 성이 없이는 파악될 수 없다고 말한다. 따라서 남성의 역사와 여성의 역사는 대칭적 관계가 아닌 상호보완적 관계를 갖지만, 역사가들에 의해 '씌어지는' 역사에서는 종종 이런 사실이 간과된다. 이 책은 그럿듯 승자의 편에서 남성적 역사에 면죄부를 부여하던 기존 역사 서술의 불공정성을 밝히고자 집필되었다.
여성, 타자에서 주체로
저자는 이 책에서 중세의 남성과 여성 간의 관계가 다양한 형태로 표출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부 여성과 수녀원은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순응하며 그 협력자로서 남성우월적 가족주의 문화를 형성하는 데 일조했으나, 이러한 지배권에 도전하며 이를 부정하는 주체가 되고자 했던 여성들도 있었다. 이들은 훈육과 감시의 권력을 비판하고, 가부장적 관습과 전통을 변화시키고자 투쟁했다.
지금까지의 젠더사 연구는 남녀의 사회적 관계를 가해자·피해자 관계로 파악하며 남성을 가부장제의 집단적 수익자로 분류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최근들어 가부장제가 여성과 남성 모두를 억압하는 기제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남성중심의 억압적 성 담론은 남녀를 막론하고 피지배 계급 모두를 지배 계급의 헤게모니에 순종적으로 만드는 정책의 일환이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남성과 여성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서로 다른 성이 없이는 파악될 수 없다고 말한다. 따라서 남성의 역사와 여성의 역사는 대칭적 관계가 아닌 상호보완적 관계를 갖지만, 역사가들에 의해 '씌어지는' 역사에서는 종종 이런 사실이 간과된다. 이 책은 그럿듯 승자의 편에서 남성적 역사에 면죄부를 부여하던 기존 역사 서술의 불공정성을 밝히고자 집필되었다.
목차
머리말 - 중세여성의 정체성을 탐구하다
들어가는 말 - 여성, 역사의 타자에서 주체로
Ⅰ 시선
1 중세 교회의 여성관
2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여성관
3 참회고행지침서와 여성의 몸
4 로마네스크ㆍ고딕 예술과 여성 이미지
5 아퀴나스의 여성관
Ⅱ 일탈
6 청빈의 이상을 꿈꾼 이단 여성들
7 신심 깊은 여인들의 역할거부운동
8 장원을 통치한 귀족 여인들
9 남자 옷을 입은 성녀
10 남장 성녀 힐데군트와 젠더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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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 여성, 역사의 타자에서 주체로
Ⅰ 시선
1 중세 교회의 여성관
2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여성관
3 참회고행지침서와 여성의 몸
4 로마네스크ㆍ고딕 예술과 여성 이미지
5 아퀴나스의 여성관
Ⅱ 일탈
6 청빈의 이상을 꿈꾼 이단 여성들
7 신심 깊은 여인들의 역할거부운동
8 장원을 통치한 귀족 여인들
9 남자 옷을 입은 성녀
10 남장 성녀 힐데군트와 젠더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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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다시 쓰는 중세 여성의 역사
“여자여, 너의 물레로 돌아가 앉아라.
너는 이런 장소에서 말할 권리가 없다!”
1207년 남부 프랑스 파미에에서 벌어진 종교 논쟁에서, 수세에 몰린 한 가톨릭 사제는 명확한 논리와 도전적인 목소리로 ‘이단’ 카타리파를 변호하는 푸아 가문의 귀부인 에스클라르몽드에게 이렇게 외치고 말았다. 이 일화는 여성이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거나 사회적 관념에 도전적인 입장을 취하고자 할 때, 중세의 남성 사회가 어떻게 대처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중세사회에서 여성이 스스로 목소리를 내기란 이처럼 쉽지 않았다. 중세의 성직자들은 여성은 본성적으로 열등한 존재이므로 남성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보았다.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주의적 시각과 대조되는 이러한 부정적인 중세의 여성관은 기독교가 중세유럽 사회의 지배담론으로 굳어지면서 더욱 확산되었다. 그렇다면 중세는 여성에게 정말로 ‘암흑의 시대’였을까.
『중세유럽 여성의 발견』의 저자인 중세사학자 차용구 교수(중앙대 역사학과)는 남성의 관점에서 기록된 기존의 역사 서술과 다른 시각에서 중세 여성의 역사를 바라보고자 했다. 그 동안 발표한 중세여성사 관련 논문 10편을 엮은 이 책은 중세의 남성과 여성 간 관계가 획일적인 지배와 피지배 관계가 아닌 다양한 형태로 표출되었음을 지적한다. 여성의 순종을 미덕으로 칭송하는 가부장제 사회의 외피 아래, 남녀의 동질성과 상호보완성을 인정하는 목소리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시선: 위험한 이브의 딸 혹은 동반자 마리아
제1부 ‘시선’에서는 비판적 사료 분석을 통해 여성을 향한 중세사회의 시선을 여러 각도에서 다루고 있다. 1장에서 교회 문헌을 중심으로 중세의 여성관을 살폈고, 2장과 5장에서는 교부 철학자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여성관을 면밀히 분석했다. 저자는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부정적 여성관을 답습하면서도 여성이 남성과 평등한 ‘동반자적 조력자’가 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음을 지적한다.
3장에서 분석한 ‘참회고행지침서’는 사랑과 성, 결혼과 이혼, 생리현상 등 중세인의 일상을 담고 있는 사료다. 특히 여성 관련 참회규정을 통해 중세 사회는 여성의 몸을 엄격한 감시와 통제의 대상으로 보았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 그럼에도 여성들이 때로는 교회에, 때로는 민간요법과 주술행위에 의지해서라도 스스로 삶을 개척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4장에서는 중세 사회의 여성관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 다양한 도상학적 사례를 제시한다. ‘아담을 유혹하여 원죄를 범하게 한 이브의 딸’이라는 위험한 이미지가 덧씌웠던 이브적 여성관은 여성을 더 왜소하고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도상적 불평등’의 형태로 중세 초기 로마네스크 예술작품에 시각화되기도 했다. 그러나 부정적인 이브적 여성관은 여성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아진 중세 후기로 갈수록 마리아적 여성관으로 변화하게 된다. 마침내 고딕 예술에서는 예수의 동반자로 격상된 마리아가 교회 자체를 상징하기에 이른다.
일탈: 거부를 통해 자유를 추구하다
제2부 ‘일탈’에는 남성중심사회의 억압적인 시선에서 벗어나 자유를 꿈꾼 여성들이 등장한다. 중세는 여성의 자의식이 태동하고 성장한 시대였다. 가부장제의 협력자로서 남성우월적 가족주의 문화를 형성하는 데 앞장선 여성과 수녀원도 있었던 반면, ‘열등한 성’이기 때문에 받아야 했던 억압에 저항했던 담대한 여인들도 있었다.
6장에서는 종교적인 자유를 누리고자 했던 ‘이단’ 여성들을 조명했다. ‘도시의 자유로운 공기’를 향유하면서 제한적이나마 여성이 사회·경제적인 자유를 얻게 된 11세기 이래, 일부 여성들은 세속적인 기성교단과 대조되는 청빈의 이상과 금욕적인 교리를 내세운 카타리파, 발도파와 같은 신흥교단에 적극 참여하여 종교적 소명을 실현하고자 했다. 이단 여성들은 기성교회의 세속화, 권위주의라는 공동의 문제 해결을 위해 남성과 폭넓게 연대하면서 남녀 평등적 공동체를 구성하고자 했다. 이러한 ‘이단’ 교단들은 여성에게 사제권을 주고 교리를 강론하게 하거나 신분을 가리지 않고 입회를 허락하면서 기성교단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일부 신심 깊은 종교적 여성들은 사회적으로 기대되는 여성으로서의 역할을 거부하기에 이르렀다. 7장에서 이러한 ‘역할거부운동’을 다룬다. 중세여성이 수도공동체에 입회하는 것은 일상의 구속과 강요로부터 해방을 뜻했다. 이들은 강요된 결혼을 거부하거나 합의이혼을 통해 청빈한 사도적 삶을 추구했으며, 억압적인 부권적 관습의 울타리를 벗어나 다른 자매들과의 연대를 통해 보호받고자 했다. 그러나 ‘굳건한 믿음을 가진 용감한 여성들’의 종교적 삶은 당대인들에게 ‘일탈’과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다.
여성 군주의 모습이 인장? 새겨지다
한편, 8장에서는 프랑스 남부의 군소귀족인 긴느-아르드르 가문의 사례를 중심으로 중세 귀부인들의 정치적 활약상을 알아보았다. 여성의 재산권이 인정되면서, 토지를 소유한 일부 귀족여성들은 공적인 업무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 긴느-아르드르 가문의 부인들은 장원의 운영을 책임졌으며, 특히 십자군 원정이나 마상경기시합 등으로 남편이 장기 부재할 경우에는 영지를 직접 통치하기도 했다. 여성 군주의 모습을 새긴 인장이나 주화가 만들어진 것도 이 무렵이었다. 비록 재산권 행사는 제한적이었으나, 과부산과 봉토 상속권은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정치적 권력을 누릴 수 있게 해준 바탕이었다.
명망가 출신 며느리들은 결혼을 통해 가문을 둘러싼 정치적 연결망을 촘촘하게 연결해주는 존재였다. 따라서 정략결혼의 대상인 동시에, 그에 상응하는 권위가 이들에게 주어졌던 것이다. 이들은 남성의 파트너가 되어 체제를 수호하는 데 기여했던 여성들이다.
남자 옷을 입은 여인들
마지막으로 9장과 10장에서는 독일 출신의 성녀로 공경 받는 ‘요셉’ 힐데군트 전승에 주목한다. 힐데군트의 남장 또한 일종의 ‘일탈’로 간주될 수 있다. 남자 차림을 하고 수도생활을 했던 ‘남장 성녀’들은 나약한 여성성을 극복하고 모험심·강인함·인내와 같은 남성적 덕목을 갖추었다는 점에서 중세인들에게 칭송받았다. 시토 교단은 남성 못지않은 용기를 가지고 삶의 역정을 극복한 새로운 여성상을 제시하려는 의도에서 여러 편의 힐데군트 전기를 집필하게 했다. 저자는 힐데군트는 중세사회의 남성우월적 지배담론이 만들어낸 존재였다고 지적한다. 평범했던 한 여인은 생존을 위해 남자 옷을 입어야 했고, 그녀는 이미지화된 전승 속에서 여행, 교육, 정치, 종교와 같은 남성적 공간에 진입하기 위해 ‘더 우월한’ 성으로 변장해야 했다.
사료의 행간에 숨어 있는 여성의 목소리
저자는 오늘날 여성사 연구가 의미 있는 성과를 축적해가고 있지만, 여성들의 경험과 삶을 기록한 사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한계를 극복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남아 있는 사료들도 대부분 가부장적 사고에 친숙한 남성들이 기록한 것이며, 삶의 궤적을 비교적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통계자료조차도 남성의 생활양식에 근거한 경우가 많다. 따라서 인용될 사료가 어떻게 기록되었는지 상세히 검토하고 행간을 읽어내는 비판적 사료 분석이 필요할 것이다.
비록 이 책이 분석한 사료들도 남성 성직자들의 관점에서 기록한 것이 대부분이지만, 그럼에도 저자는 그 행간에서 남성 중심적 지배권에 도전하고 이를 부정하는 주체가 되고자 했던 중세여성들을 ‘발견’해낸다. 이 담대한 여인들의 행적을 통해 독자들은 ‘남성의 역사’만이 아닌 중세의 역사를 새롭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여자여, 너의 물레로 돌아가 앉아라.
너는 이런 장소에서 말할 권리가 없다!”
1207년 남부 프랑스 파미에에서 벌어진 종교 논쟁에서, 수세에 몰린 한 가톨릭 사제는 명확한 논리와 도전적인 목소리로 ‘이단’ 카타리파를 변호하는 푸아 가문의 귀부인 에스클라르몽드에게 이렇게 외치고 말았다. 이 일화는 여성이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거나 사회적 관념에 도전적인 입장을 취하고자 할 때, 중세의 남성 사회가 어떻게 대처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중세사회에서 여성이 스스로 목소리를 내기란 이처럼 쉽지 않았다. 중세의 성직자들은 여성은 본성적으로 열등한 존재이므로 남성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보았다.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주의적 시각과 대조되는 이러한 부정적인 중세의 여성관은 기독교가 중세유럽 사회의 지배담론으로 굳어지면서 더욱 확산되었다. 그렇다면 중세는 여성에게 정말로 ‘암흑의 시대’였을까.
『중세유럽 여성의 발견』의 저자인 중세사학자 차용구 교수(중앙대 역사학과)는 남성의 관점에서 기록된 기존의 역사 서술과 다른 시각에서 중세 여성의 역사를 바라보고자 했다. 그 동안 발표한 중세여성사 관련 논문 10편을 엮은 이 책은 중세의 남성과 여성 간 관계가 획일적인 지배와 피지배 관계가 아닌 다양한 형태로 표출되었음을 지적한다. 여성의 순종을 미덕으로 칭송하는 가부장제 사회의 외피 아래, 남녀의 동질성과 상호보완성을 인정하는 목소리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시선: 위험한 이브의 딸 혹은 동반자 마리아
제1부 ‘시선’에서는 비판적 사료 분석을 통해 여성을 향한 중세사회의 시선을 여러 각도에서 다루고 있다. 1장에서 교회 문헌을 중심으로 중세의 여성관을 살폈고, 2장과 5장에서는 교부 철학자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여성관을 면밀히 분석했다. 저자는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부정적 여성관을 답습하면서도 여성이 남성과 평등한 ‘동반자적 조력자’가 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음을 지적한다.
3장에서 분석한 ‘참회고행지침서’는 사랑과 성, 결혼과 이혼, 생리현상 등 중세인의 일상을 담고 있는 사료다. 특히 여성 관련 참회규정을 통해 중세 사회는 여성의 몸을 엄격한 감시와 통제의 대상으로 보았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 그럼에도 여성들이 때로는 교회에, 때로는 민간요법과 주술행위에 의지해서라도 스스로 삶을 개척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4장에서는 중세 사회의 여성관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 다양한 도상학적 사례를 제시한다. ‘아담을 유혹하여 원죄를 범하게 한 이브의 딸’이라는 위험한 이미지가 덧씌웠던 이브적 여성관은 여성을 더 왜소하고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도상적 불평등’의 형태로 중세 초기 로마네스크 예술작품에 시각화되기도 했다. 그러나 부정적인 이브적 여성관은 여성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아진 중세 후기로 갈수록 마리아적 여성관으로 변화하게 된다. 마침내 고딕 예술에서는 예수의 동반자로 격상된 마리아가 교회 자체를 상징하기에 이른다.
일탈: 거부를 통해 자유를 추구하다
제2부 ‘일탈’에는 남성중심사회의 억압적인 시선에서 벗어나 자유를 꿈꾼 여성들이 등장한다. 중세는 여성의 자의식이 태동하고 성장한 시대였다. 가부장제의 협력자로서 남성우월적 가족주의 문화를 형성하는 데 앞장선 여성과 수녀원도 있었던 반면, ‘열등한 성’이기 때문에 받아야 했던 억압에 저항했던 담대한 여인들도 있었다.
6장에서는 종교적인 자유를 누리고자 했던 ‘이단’ 여성들을 조명했다. ‘도시의 자유로운 공기’를 향유하면서 제한적이나마 여성이 사회·경제적인 자유를 얻게 된 11세기 이래, 일부 여성들은 세속적인 기성교단과 대조되는 청빈의 이상과 금욕적인 교리를 내세운 카타리파, 발도파와 같은 신흥교단에 적극 참여하여 종교적 소명을 실현하고자 했다. 이단 여성들은 기성교회의 세속화, 권위주의라는 공동의 문제 해결을 위해 남성과 폭넓게 연대하면서 남녀 평등적 공동체를 구성하고자 했다. 이러한 ‘이단’ 교단들은 여성에게 사제권을 주고 교리를 강론하게 하거나 신분을 가리지 않고 입회를 허락하면서 기성교단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일부 신심 깊은 종교적 여성들은 사회적으로 기대되는 여성으로서의 역할을 거부하기에 이르렀다. 7장에서 이러한 ‘역할거부운동’을 다룬다. 중세여성이 수도공동체에 입회하는 것은 일상의 구속과 강요로부터 해방을 뜻했다. 이들은 강요된 결혼을 거부하거나 합의이혼을 통해 청빈한 사도적 삶을 추구했으며, 억압적인 부권적 관습의 울타리를 벗어나 다른 자매들과의 연대를 통해 보호받고자 했다. 그러나 ‘굳건한 믿음을 가진 용감한 여성들’의 종교적 삶은 당대인들에게 ‘일탈’과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다.
여성 군주의 모습이 인장? 새겨지다
한편, 8장에서는 프랑스 남부의 군소귀족인 긴느-아르드르 가문의 사례를 중심으로 중세 귀부인들의 정치적 활약상을 알아보았다. 여성의 재산권이 인정되면서, 토지를 소유한 일부 귀족여성들은 공적인 업무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 긴느-아르드르 가문의 부인들은 장원의 운영을 책임졌으며, 특히 십자군 원정이나 마상경기시합 등으로 남편이 장기 부재할 경우에는 영지를 직접 통치하기도 했다. 여성 군주의 모습을 새긴 인장이나 주화가 만들어진 것도 이 무렵이었다. 비록 재산권 행사는 제한적이었으나, 과부산과 봉토 상속권은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정치적 권력을 누릴 수 있게 해준 바탕이었다.
명망가 출신 며느리들은 결혼을 통해 가문을 둘러싼 정치적 연결망을 촘촘하게 연결해주는 존재였다. 따라서 정략결혼의 대상인 동시에, 그에 상응하는 권위가 이들에게 주어졌던 것이다. 이들은 남성의 파트너가 되어 체제를 수호하는 데 기여했던 여성들이다.
남자 옷을 입은 여인들
마지막으로 9장과 10장에서는 독일 출신의 성녀로 공경 받는 ‘요셉’ 힐데군트 전승에 주목한다. 힐데군트의 남장 또한 일종의 ‘일탈’로 간주될 수 있다. 남자 차림을 하고 수도생활을 했던 ‘남장 성녀’들은 나약한 여성성을 극복하고 모험심·강인함·인내와 같은 남성적 덕목을 갖추었다는 점에서 중세인들에게 칭송받았다. 시토 교단은 남성 못지않은 용기를 가지고 삶의 역정을 극복한 새로운 여성상을 제시하려는 의도에서 여러 편의 힐데군트 전기를 집필하게 했다. 저자는 힐데군트는 중세사회의 남성우월적 지배담론이 만들어낸 존재였다고 지적한다. 평범했던 한 여인은 생존을 위해 남자 옷을 입어야 했고, 그녀는 이미지화된 전승 속에서 여행, 교육, 정치, 종교와 같은 남성적 공간에 진입하기 위해 ‘더 우월한’ 성으로 변장해야 했다.
사료의 행간에 숨어 있는 여성의 목소리
저자는 오늘날 여성사 연구가 의미 있는 성과를 축적해가고 있지만, 여성들의 경험과 삶을 기록한 사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한계를 극복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남아 있는 사료들도 대부분 가부장적 사고에 친숙한 남성들이 기록한 것이며, 삶의 궤적을 비교적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통계자료조차도 남성의 생활양식에 근거한 경우가 많다. 따라서 인용될 사료가 어떻게 기록되었는지 상세히 검토하고 행간을 읽어내는 비판적 사료 분석이 필요할 것이다.
비록 이 책이 분석한 사료들도 남성 성직자들의 관점에서 기록한 것이 대부분이지만, 그럼에도 저자는 그 행간에서 남성 중심적 지배권에 도전하고 이를 부정하는 주체가 되고자 했던 중세여성들을 ‘발견’해낸다. 이 담대한 여인들의 행적을 통해 독자들은 ‘남성의 역사’만이 아닌 중세의 역사를 새롭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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