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전쟁연구 (박사전공>책소개)/2.1.2차 세계대전사

왜 1차 세계대전은 끝나지 않았는가

동방박사님 2022. 4. 1. 0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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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파이낸셜타임스] [BBC 히스토리 매거진] 2016 올해의 책
[타임스 리터러리 서플리먼트] 2016 최고의 책
오늘의 세계를 결정지은 파국의 시대를 새롭게 조명한 문제작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세계에 주목한 첫 전쟁사

2018년 11월 11일은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한 지 100년 되는 날이다. 1,000만 명의 전사자와 2,000만 명의 부상자를 낳은 사상 최악의 ‘대전’은 과연 독일이 정전협정에 서명한 100년 전 그날 종지부를 찍었을까? 주목받는 소장 역사학자 로버트 거워스 교수는 『왜 제1차 세계대전은 끝나지 않았는가』에서 대전 종식 이후 안정과 평화가 아니라 새로운 폭력의 논리와 혼돈이 전후 유럽 대륙을 빨아들였음을 밝힌다. 특히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 불가리아 등 패전국이 직면한 전후 세계에 초점을 맞춰 ‘끝나지 않은 제1차 세계대전’의 참혹한 유산을 세밀하게 파고든다. 이 책은 또 한 번의 파괴적인 세계대전과 냉전, 피비린내 나는 민족 분쟁이 100년 전 유럽의 파국적 상황에서 비롯되었음을 규명한 심층 보고서다.

 

목차

서문

1부 패배
1 봄의 기차 여행 | 2 러시아 혁명 | 3 브레스트리토프스크 | 4 승리의 맛 | 5 전세의 역전

2부 혁명과 반혁명
6 끝없는 전쟁 | 7 러시아 내전 | 8 민주주의의 외관상 승리 | 9 급진화 | 10 볼셰비즘에 대한 공포와 파시즘의 부상

3부 제국의 붕괴
11 판도라의 상자: 파리와 제국의 문제 | 12 중동부 유럽의 재발명 | 13 패자는 비참하도다 | 14 피우메 | 15 스미르나에서 로잔까지

에필로그 ‘전후’와 20세기 중반 유럽의 위기
자료 목록(지도 목록, 도판 목록)

참고문헌
감사의 글
옮긴이의 말
찾아보기

 

 

저자 소개 

저 : 로버트 거워스 (Robert Gerwarth)
 
더블린 유니버시티 칼리지의 현대사 교수이자 같은 대학의 전쟁 연구 센터 소장이다. 1976년 독일 베를린에서 태어나 훔볼트 대학에서 역사학과 정치학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옥스퍼드 대학에서 유럽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영국 학사원British Academy 박사후과정 펠로십을 거쳐 프린스턴 대학, 하버드 대학, 네덜란드 국립 전쟁 연구소NIOD에서도 펠로십을 받아 연구했다. 그는 방대한 분량의 사료를 철저하게 조사...
 
역 : 최파일
 
서울대학교에서 언론정보학과 서양사학을 전공했다. 역사책 읽기 모임 ‘헤로도토스 클럽’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역사 분야를 중심으로 해외의 좋은 책들을 기획, 번역하고 있다. 축구와 셜록 홈스의 열렬한 팬이며, 제1차 세계대전 문학에도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 옮긴 책으로 『백년전쟁 1337~1453』 『마오의 대기근』 『내추럴 히스토리』 『제1차세계대전』 『인류의 대항해』 『시계와 문명』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 ...
 

책 속으로

유럽의 패전 육상 제국들과 대전 이후 그곳들이 어떤 모습을 띠게 되었는지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이 책은 전시 프로파간다의 프리즘이나, 중동부 유럽 신생 국가들을 정당화하기 위해 그들이 승계한 이전 제국들을 악마화해야 했던 1918년의 관점을 통해서 흔히 묘사되어온 국가들을 다룬다. 이러한 독해는 서구의 일부 역사가들로 하여금 1차 세계대전을 민주적 연합국 진영 대 독재적인 중부 세력 간의 장대한 대결로 (가장 독재적인 제국이었던 제정 러시아가 3국 협상의 한 축이었다는 사실을 무시하면서) 그릴 수 있게 했다. 그러나 더 근래에는 오스만, 호엔촐레른, 합스부르크 제국을 연구하는 점점 더 많은 학자들이, 중부 세력이 단순하게 악당 국가이자 시대착오적인 ‘민족의 감옥’이었다는 검은 전설을 반박하고 있다.
_서문, 21~22쪽

악명 높은 헝가리 민병대장이자 호르티 호위대의 임시 수장이었던 팔 프로너이 남작은 회상했다. “이럴 때면 나는 뒤틀린 마르크스 이데올로기에 취한 이 광신적 인간 짐승들한테 50대의 매질을 추가로 지시했다.” 프로너이와 다른 우파 민병대장들에게 비인간화되고(‘인간 짐승’) 비민족화된(‘볼셰비키’) 적은 아무런 가책 없이 고문하고 죽여도 되는 존재였으니, 이런 행위들은 거룩한 대의에 의해 그 필요성이 요청되고 정당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거룩한 대의란 사회주의적 심연과 영토 분할의 위협을 받는 국가의 구원이었다.
_9. 급진화, 190쪽

자유주의적 부르주아들은 파시스트들을 정부에 참여시킴으로써 파시즘을 길들일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한편, 반파시스트 정당들 대다수는 파시즘이 일단 부르주아 국가의 무장 경비대로서의 역할에 실패하면 이내 흐지부지될 운명인 한시적 운동에 불과하다는 견해를 품었다. 이러한 착각들은 ‘로마 진군’ 이후에도 만연했다. 사실 무솔리니는 처음부터 의회 민주정을 폐지하고 독재를 수립하려 했고, 1925년에 결국 목표를 달성했다.
_10. 볼셰비즘에 대한 공포와 파시즘의 부상, 220~221쪽

베르사유에 대한 초점은 파리강화회의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좁혀왔고, 가장 많은 것이 걸려 있던 당시 최대의 쟁점을 다소간 주변화해왔다. 최대 쟁점이란 이전까지 육상 제국들에 의해 지배되어온 하나의 대륙 전체를 다수의 ‘민족국가들’로 구성된 대륙으로 전환시키는 일이었다. 이 쟁점은 갈등의 최종 국면에 가서야 비로소 1차 세계대전의 중심이 되었다. 영국이나 프랑스 어느 쪽도 1914년에 ‘국가들의 유럽’을 창출하겠다는 목표를 갖고 전쟁에 나서지는 않았으며, 1918년 초부터 비로소 육상제국들의 해체가 명시적 전쟁 목표가 되었다.
_11. 판도라의 상자: 파리와 제국의 문제, 233~234쪽

유럽 패전국들에서 파리강화조약들에 느끼는 원한은 패전의 굴욕감으로만 부채질되지 않았다. 윌슨의 민족자결 개념이 분명히 협상 세력의 우방으로 간주된 민족들(폴란드인, 체코인, 남슬라브인, 루마니아인, 그리스인)에만 적용되고, 적으로 간주된 민족(오스트리아인, 독일인, 헝가리인, 불가리아인, 터키인)에는 적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강화 조약은 위선적이라고 느껴졌다. 설상가상으로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종족 구성이 복잡한 영토들에 민족자결 원칙의 적용은 좋게 봐야 순진한 처방이었고, 실질적으로는 1차 세계대전의 폭력을 다수의 국경 분쟁과 내전으로 이전하도록 부추긴 셈이었다. 보헤미아의 체코인과 독일인 간의 적대처럼 옛 적대 관계에 테셴의 체코인과 폴란드인 간의 투쟁 같은 새로운 민족적 대립이 합세하자 중유럽의 종족적 경쟁 관계는 폭력적으로 변모했다.
_13. 패자는 비참하도다, 284~285쪽
--- 본문 중에서
 

출판사 리뷰

“이 전쟁은 폭력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승전국뿐 아니라 패전국 관점에서 파고든 최초의 제1차 세계대전사

전후 패전국 전역에 감돈 분열과 대립의 양상은 이제껏 어떤 책도 상세히 다루지 않은 내용으로, 이 책이 다루는 핵심 주제다. 혁명과 반혁명이 거듭되고, 해체된 패전 제국의 폐허에서 생성 중인 국가들이 내전과 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면서, 1918년 대전의 공식적 종식과 1923년 7월 터키 국경선을 확정한 로잔 조약 사이 전후 유럽은 지구상에서 가장 폭력적인 공간이 되었다. 저자는 17세기 30년전쟁 이래로 유럽 대륙이 이 시기보다 더 치명적이고 뒤죽박죽이었던 적은 없었다고 말한다.
폭력의 지속은 그리스-터키 전쟁처럼 국가 간 영토 전쟁의 형태를 띨 때도 있었고, 러시아, 핀란드, 헝가리, 불가리아, 독일 일부 지역처럼 사회 혁명, 즉 내전의 형태를 띠기도 했으며, 발트 3국 등의 경우처럼 민족 혁명, 즉 독립 전쟁의 형태를 띠기도 했다. 어떤 형태를 띠었든, 공산주의자부터 민족주의자, 농민에서 노동자, 좌파부터 우파까지, 다양한 계층과 정파가 충돌한 무력시위에는 어김없이 잔혹한 보복과 테러가 뒤따랐다. 그러나 경제적 정치적 위기 국면에서, 전후 동유럽과 중유럽에 세워진 민주 정부는 사회 소요를 제어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극단적인 정당은 안정과 질서를 갈구하는 사람들의 표심을 확보해나갔다.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에서 벗어나 공정하게 본
전후 유럽의 참상

기존의 역사가들은 동유럽과 중유럽이 문명화되고 평화적인 서구에 비해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다는 오리엔탈리즘적인 시각에서 대전 이후 세계를 조망했다. 하지만 서유럽 못지않게 패전국 지역에서도 다양한 정치 실험이 다양한 양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새롭게 대두된 이데올로기인 민족주의의 영향으로 민족국가 수립을 위한 정파가 생겨났고, 농민과 노동자 편에 선 혁명 세력이 세력을 규합했다. 한때 오스트리아에서는 무력 쿠데타보다는 대중 시위를 통한 의사 표현으로 대단히 평화롭게 혁명이 진행되어 오스트리아 공화국이 탄생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유독 전후 서유럽 이외의 패전국 지역이 폭력적 격변을 겪은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러시아에서 불어닥친 볼셰비즘에 대한 공포를 주요 원인으로 지목한다. 책의 2부는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불가리아 그리고 승전국이었으나 패전국과 같은 혼란상에 직면한 이탈리아 등지에서 볼셰비키 혁명과 그에 반대하는 혁명이 거듭되면서 혼돈으로 빠져드는 모습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헝가리에서는 급진 공산당 정권에 대항하여 이전의 지주계급이 농민과 있을 법하지 않은 동맹을 형성하게 되었고, 불가리아에서는 농민당 지도자 스탐볼리스키가 반대파에 의해 잔혹하게 살해되자 농민-공산주의자-무정부주의자가 연합해 봉기를 일으켰으나 처참하게 진압되었다.

히틀러와 무솔리니를 세계사의 한가운데로 불러낸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세계를 조명하다

제2차 세계대전의 원흉인 히틀러를 만든 것은 이러한 항구적인 위기의 체험이었다. 1918년의 패전은 29세의 참전병 히틀러에게 씻을 수 없는 굴욕으로 남았다. 1917년과 1920년 사이에 무려 27차례의 폭력적 정권 교체를 경험한 유럽의 아수라장 같은 현실 속에서 히틀러는 사회주의에서 극우로 전향한다. 국제주의와 민주적 평등주의보다 극렬 민족주의와 ‘질서 잡힌’ 권위주의에 투신함으로써 패전으로 겪은 정신적 붕괴를 극복했던 것이다.
히틀러가 극우 진영 지도자의 모범으로 따른 무솔리니 또한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정치 상황에서 질서와 규율을 앞세운 반민주적인 프로파간다로 권력을 장악해갔다. 오늘날 역사가들은 당시 이탈리아 군대가 무솔리니의 파시즘 준군사 조직을 쉽사리 물리칠 수 있었으리라고 판단한다. 그렇다면 어째서 무솔리니가 독재를 수립하는 데 별다른 어려움을 겪지 않았을까? 저자는 당대 사회 엘리트들이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다고 지적한다. 파시스트들을 주류 정치에 편입시켜 길들일 수 있다고 봤거나, 파시즘을 곧 흐지부지될 한시적 운동에 불과하다고 오판했다는 것이다. 독일의 자유주의적 언론인 하리 케슬러 백작이 일기에 쓴 대로, “무솔리니의 쿠데타는 혼란과 전쟁이 재개되는 시대의 도래”를 알렸다.

20세기를 폭력과 갈등으로 물들인
새로운 폭력의 논리

저자에 따르면,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의 목표가 바뀌었다. 더 이상 특정 영토를 획득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계급의 적’이나 ‘민족의 적’과 같은 ‘이질적인 분자’를 일소한 동질적 민족 공동체를 수립하는 것이 전쟁 목표가 된 것이다. 한 헝가리의 민병대장은 “나는 뒤틀린 마르크스 이데올로기에 취한 이 광신적 인간 짐승들한테 50대의 매질을 추가로 지시했다”고 회상했는데, 그에게 비인간화되고(‘인간 짐승’) 비민족화된(‘볼셰비키’) 적은 아무런 가책 없이 고문하고 죽여도 되는 존재였다. 이제 적은 비인간화된, 살려둘 가치가 없는 범죄자가 되었다. 극단적 폭력을 통해 내부의 적을 발본색원하는 것은 패전의 폐허에서 국가를 다시 수립하기 위해 정당한 행위로 간주되었다.
그러한 ‘내부 폭력’은 공산주의자나 사회주의자 등 전복 세력이 후방전선에서 ‘배신’했기 때문에 패배했다는 패전국의 군부와 보수 세력의 믿음을 부채질했다. 이 배반의 서사는 음모론으로 발전해 독일 패배의 주요 원인으로 부각되었고, 이는 전간기 독일 우익의 신념의 주춧돌이 되었다. 특히 히틀러와 무솔리니 정권의 내부 분열에 대한 강박은 전체주의, 인종주의와 결합해 체계적인 대규모 민간인 학살을 낳았다. 제2차 세계대전뿐 아니라 유고내전에서 또한 그러한 ‘종족 청소’는 대단한 위력을 발휘했으니, 100년이 지난 지금도 제1차 세계대전 전후 시기의 유산은 건재하다.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민족 분쟁의 기원,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와 밸푸어 선언

전후 세계는 민주주의에 더 안전한 곳이 될 것이라는 우드로 윌슨의 낙관적인 예견과는 반대로 1918년 유럽에 수립된 대부분은 민주정은 권위주의 정권으로 교체되었다. 그렇게 된 데에는 패전국들이 위선적이라고 느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도 원인이 있었다. 윌슨의 민족자결 개념은 승전국의 우방으로 간주된 민족(폴란드인, 체코인, 남슬라브인, 루마니아인, 그리스인)에게만 적용되고, 적으로 간주된 민족(오스트리아인, 독일인, 헝가리인, 불가이라인, 터키인)에는 적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종족 구성이 복잡한 영토들에 민족자결 원칙을 적용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순진한 구상이었고, 실질적으로는 대전의 폭력을 다수의 국경 분쟁과 내전으로 옮긴 것에 지나지 않았다.
1917년 밸푸어 선언 또한 승전국의 일방적인 영토 재편의 일환으로,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중동 문제의 근원이다.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의 민족적 고향을 만들어주겠다는 밸푸어 선언은 영국 정부를 상대로 한 시오니스트 정치인이 벌인 오랜 로비의 결과였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인구의 압도적 다수는 아랍인이었고, 팔레스타인 거주 유대인의 대다수는 독립국가를 요구하지 않았다. 그 대신 많은 이가 오스만 제국 내 유대인 자치권을 지지했다. 게다가 밸푸어 선언 이전에 체결된 사이크스-피코 협정에서 영국 정부는 아랍인들의 독립을 약속하기까지 했다. 전쟁 기간 동안의 약속들은 단지 현지 주민의 지지를 동원하기 위한 단기적인 방편으로 의도된 것에 불과했고, 이런 전시 전략의 결과는 오늘날까지도 중동을 괴롭히고 있다.
 

추천평

숨 막히는 파노라마, 권위 있는 서술. 소멸해간 제국들과 부상한 민족국가들의 잔혹사. 유럽의 20세기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 문제작.
- 〈타임스 리터러리 서플리먼트〉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새로운 폭력의 논리’가 유럽을 지배했고, 그것이 앞선 제국주의적 야욕과 대전의 경험보다 파시즘을 조장하는 데 더 큰 영향력을 발휘했음을 밝힌다.
- 〈선데이타임스〉

구체적 현장을 세밀히 살펴 제1차 세계대전의 살육이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1918년 말에 종결된 것과 달리 중유럽과 동유럽에서는 결코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 〈파이낸셜타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