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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그동안 망각되었던 해방 정국의 유교계의 동향을 최초로 복원하여, 구한말 의병전쟁부터 1960년대 민주화운동까지 면면히 이어진 유교 정치 이상의 연속성과 역동성을 보여준다. 지은이는 사료 발굴을 바탕으로 해방 정국의 좌우 유교 단체 참여자 조사와 분석 작업을 수행하여 유교 정치운동사의 연속성을 입증하고 있다.
이 책의 제목인 '군자들의 행진'은 마이클 왈쩌가 청교도주의를 17세기 영국 시민혁명을 이끈 급진 정치학의 기원으로 분석한 저술인 성자들의 혁명에 대응한 것으로, 유교 이상과 유교인의 분투가 한국 근현대 정치에 미친 영향을 강조하고자 붙여졌다.
유교인들이 엄혹했던 식민지 시기와 혼란으로 점철되었던 해방 정국 그리고 부정으로 얼룩졌던 독재정권 기간을 견뎌내고 저항했던 힘은 유교의 정치 이상을 실천하고자 하는 의무감, 곧 세속의 고난을 초월하여 천명으로서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해야 한다는 '군자'의 이상에서 연원했다.유교사 및 근현대사 서술에서 망각되었던 군자들의 행적을 복원한 이 책은, 유교가 어떻게 근대 정치 이념에 적응해 갔는가에 대한 해명이면서 동시에 유교 정치 이상과 유교인의 행위가 한국의 민주화에 기여했다는 주장에 대한 역사적 논증이다.
이 책의 제목인 '군자들의 행진'은 마이클 왈쩌가 청교도주의를 17세기 영국 시민혁명을 이끈 급진 정치학의 기원으로 분석한 저술인 성자들의 혁명에 대응한 것으로, 유교 이상과 유교인의 분투가 한국 근현대 정치에 미친 영향을 강조하고자 붙여졌다.
유교인들이 엄혹했던 식민지 시기와 혼란으로 점철되었던 해방 정국 그리고 부정으로 얼룩졌던 독재정권 기간을 견뎌내고 저항했던 힘은 유교의 정치 이상을 실천하고자 하는 의무감, 곧 세속의 고난을 초월하여 천명으로서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해야 한다는 '군자'의 이상에서 연원했다.유교사 및 근현대사 서술에서 망각되었던 군자들의 행적을 복원한 이 책은, 유교가 어떻게 근대 정치 이념에 적응해 갔는가에 대한 해명이면서 동시에 유교 정치 이상과 유교인의 행위가 한국의 민주화에 기여했다는 주장에 대한 역사적 논증이다.
목차
▣ 차례
머리말
1부 유교와 근대 정치
1장 교수단 데모의 유교적 설명
2장 유교 정치운동사 연구의 방법, 개념, 함의
1. 유교사 연구의 방법
2. 연구 설계와 주요 개념
3. 연구 주제와 함의
4. 연구 대상으로서의 유교: 정의
2부 민족의 위기와 유교인의 대응
3장 유교 전통과 조선의 위기
1. 조선 유교의 역사와 정치적 성격
2. 유교 주도 근대화의 전개와 결말
3. 정통 유림의 종교적 대결 의식과 의병운동
4. 유교 민족주의의 두 갈래
4장 일제하 유교계의 독립운동
1. 일제의 지배 논리와 유교계의 상황
2. 파리장서운동의 전개 과정과 성격
3. 정인보: 유교 개혁주의의 완성과 조선학
3부 해방 후 유교인의 건국운동과 통일운동
5장 해방 직후의 유교 단체와 통합 과정
1. 해방 전후 유교계의 상황
2. 해방 직후 등장한 유교 계열 단체: 개요
3. 유교 단체 통합과 신탁통치반대운동
6장 유도회의 유교 부흥과 임시정부봉대 활동
1. 유도회의 유교 부흥 활동과 갈등
2. 유도회 참여 세력 분석
3. 유교와 아나키즘의 연합: 유도회의 임시정부봉대운동
7장 유교계 좌파의 통일국가건설운동과 좌절
1. 대동회: 유교계 중도좌파의 통일운동
2. 전국유교연맹: 좌파 유교 단체
4부 유교인의 반독재·민주화운동
8장 유교 정치의 모색과 독재정권의 탄압
1. 해방 이후 유교 계열 지식인의 상황
2. 유교계의 시련
9장 마지막 불꽃: 유교와 4·19 혁명
1. 유교 계열 반독재 투쟁의 노선들
2. 4·19 혁명과 유교 계열 지식인의 참여
3. 군자들의 행진: 교수단 데모의 유교적 의미 세계
10장 유교에서 한학으로: 유교 정치의 종장
1. 4·19의 여운: 1960년대 유교계의 비판적 정치 참여
2. 유교 정치의 내면화: 1970년대 전후의 유교
3. 유교 보수화와 현대 유교의 위기
5부 반성과 전망
11장 군자의 정치학과 한국 민주주의
1. 근현대 유교 정치운동사 요약
2. 논쟁: 유교와 민주주의
3. 유교민주주의에서 ‘유교 시민사회’로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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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1부 유교와 근대 정치
1장 교수단 데모의 유교적 설명
2장 유교 정치운동사 연구의 방법, 개념, 함의
1. 유교사 연구의 방법
2. 연구 설계와 주요 개념
3. 연구 주제와 함의
4. 연구 대상으로서의 유교: 정의
2부 민족의 위기와 유교인의 대응
3장 유교 전통과 조선의 위기
1. 조선 유교의 역사와 정치적 성격
2. 유교 주도 근대화의 전개와 결말
3. 정통 유림의 종교적 대결 의식과 의병운동
4. 유교 민족주의의 두 갈래
4장 일제하 유교계의 독립운동
1. 일제의 지배 논리와 유교계의 상황
2. 파리장서운동의 전개 과정과 성격
3. 정인보: 유교 개혁주의의 완성과 조선학
3부 해방 후 유교인의 건국운동과 통일운동
5장 해방 직후의 유교 단체와 통합 과정
1. 해방 전후 유교계의 상황
2. 해방 직후 등장한 유교 계열 단체: 개요
3. 유교 단체 통합과 신탁통치반대운동
6장 유도회의 유교 부흥과 임시정부봉대 활동
1. 유도회의 유교 부흥 활동과 갈등
2. 유도회 참여 세력 분석
3. 유교와 아나키즘의 연합: 유도회의 임시정부봉대운동
7장 유교계 좌파의 통일국가건설운동과 좌절
1. 대동회: 유교계 중도좌파의 통일운동
2. 전국유교연맹: 좌파 유교 단체
4부 유교인의 반독재·민주화운동
8장 유교 정치의 모색과 독재정권의 탄압
1. 해방 이후 유교 계열 지식인의 상황
2. 유교계의 시련
9장 마지막 불꽃: 유교와 4·19 혁명
1. 유교 계열 반독재 투쟁의 노선들
2. 4·19 혁명과 유교 계열 지식인의 참여
3. 군자들의 행진: 교수단 데모의 유교적 의미 세계
10장 유교에서 한학으로: 유교 정치의 종장
1. 4·19의 여운: 1960년대 유교계의 비판적 정치 참여
2. 유교 정치의 내면화: 1970년대 전후의 유교
3. 유교 보수화와 현대 유교의 위기
5부 반성과 전망
11장 군자의 정치학과 한국 민주주의
1. 근현대 유교 정치운동사 요약
2. 논쟁: 유교와 민주주의
3. 유교민주주의에서 ‘유교 시민사회’로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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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지난 백년간 유림들은 기독교를 무부무군(無父無君)의 야만 종교로 비난했고 동학혁명을 ‘난’이라 일컬으며 ‘토벌’에 앞장섰다. 그런데 유림이 의병전쟁의 패배로 위축되어 있던 동안 이들이 무시하고 비판했던 두 종교가 독립운동을 주도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유림들은 자괴감에 빠졌다. 그날 밤부터 유림들은 상경자들 사이의 인적 네트워크를 최대한 이용하여 향후 유교계의 활동 방향에 대한 집합적 견해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 결과가 바로 ‘파리장서운동’이었다.”(192쪽)
“유도회는 김창숙을 중심으로 유교계 독립운동 관련자 및 후손이 중심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통합운동 초창기 주도 세력이었던 대동회 계열과 일제하 명륜학원 세력이 대부분 탈락하고, 해외 망명 독립운동가들과 무정부주의 독립운동 계열 인사 그리고 각 지역의 명망가와 유지들이 각각 중앙과 지방 조직의 핵심부를 구성했다. 이는 유교계 대표 단체로서 유도회가 그 정통성을 일제하의 독립운동 계승에 두었다는 것을 입증한다. 유교의 근대적 전환을 위해 유교의 민족화를 주창했던 김창숙의 구상은 총본부의 실무 조직 인선에서 잘 드러났다. 특히 감찰위원회를 대규모로 꾸리고 위원진을 독립운동 유림으로 채운 데에서 김창숙과 유도회가 당시 시급한 과제인 유교계의 친일 세력 청산에 진력을 다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346쪽)
“김창숙에게 뜻밖의 우호 세력이 등장했으니, 바로 이정규를 비롯한 아나키스트 세력이다. 파리장서를 상해에 전달하고 나서 김창숙은 이회영, 신채호 등 망명 유교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활동하면서 아나키스트 계열의 독립운동가들과 우호적 관계를 맺었다. 한편 해방 전 체포되어 국내에서 해방을 맞은 아나키스트들과 국내 활동 아나키스트들은 왕성한 활동력으로 해방 정국에서 그 세력을 키워가고 있었다. 그리고 임시정부 요인 자격으로 귀국한 이회영의 동생 이시영, 유교계를 대표하는 김창숙과 정인보 등과 접촉하면서 유교계 독립운동 세력과의 연합을 모색했다. 그리고 반탁운동 과정에서 공산주의 세력이라는 공동의 적을 확인하면서, 유교계와 아나키스트 사이의 이채로운 연합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 연합은 반탁운동 기간을 지나서도 유지되어 1960년대 초반까지 지속되었다.”(351쪽)
“전국유교연맹에는 김응섭, 최준, 이원일 같은 영남권 최고명문가 출신의 독립·민족운동가들, 이구영 회고록에 등장한 정준섭, 이영규 등 명륜학원 출신의 청년 유교인들, 이구영, 이원헌, 이석구(곧 이민수) 등 ‘사서연역회’ 출신의 뛰어난 젊은 한학자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다. 다시 말해, 당시 전국유교연맹은 비록 조직력에서는 우익 측의 통합 유도회총본부에 뒤처져 있었지만, 핵심 참여자 집단만을 놓고 보면 유도회총본부 김창숙의 카리스마에 충분히 도전할 수 있을 만큼의 명사들로 구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421쪽)
“4·25 교수단 데모의 기획과 주동에는 특히 김창숙 후원하의 유교 네트워크와 독립운동가들의 네트워크가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 네트워크의 대의 추구는 참여자들의 결속을 높였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운동의 도덕성을 고양시키고 사회적 영향을 확산시키는 기반이 되었다. 이들의 참여 동기와 실천 과정의 적극성을 이끌어낸 것은 유교적 가치였다. (······) 그윽한 분노와 도덕적 대의로 시위에 나선 ‘군자들의 행진’ 앞에서 군대와 경찰은 무력했다. 조선시대 이래 유교 정치의 이상이 현대사에 아로새겨진 순간이었다.”(504~505쪽)
“한국의 유교인들은 서구와 일본이라는 외세의 도전에 맞서는 데 치중하느라 내부적 개혁 과제에 집중할 여유를 갖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도 유교인들은 한 걸음 한 걸음 근대의 과제에 부딪혀 갔다. 위정척사론과 의병전쟁의 복고적 문명 인식은 파리장서운동 과정에서 근대적 민족 개념을 수용하며 극복되었다. 조선의 국가종교로서 지배 이데올로기로 기능하고 양반 중심의 위계적 사회관계를 정당화했던 유교의 사회 관념은 망명 유림들의 독립운동 참여와 혁신 유림의 사회운동 참여 과정에서 근대적 전환의 계기를 마련했다. 1919년 파리장서운동으로 결집했던 유교인의 민족운동은 해방 정국에서 자주독립국가 건설 운동으로 재생했고, 분단 이후에는 반독재·민주화 투쟁으로 이어졌다. 1960년 4·25 교수단 데모는 유교 정치운동사의 오랜 저력이 발휘된 상징적 사건으로서, 현대 민주주의 정치에 유교의 민본 정치 이상과 인의의 사회윤리가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 ‘군자들의 행진’이었다.”
“유도회는 김창숙을 중심으로 유교계 독립운동 관련자 및 후손이 중심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통합운동 초창기 주도 세력이었던 대동회 계열과 일제하 명륜학원 세력이 대부분 탈락하고, 해외 망명 독립운동가들과 무정부주의 독립운동 계열 인사 그리고 각 지역의 명망가와 유지들이 각각 중앙과 지방 조직의 핵심부를 구성했다. 이는 유교계 대표 단체로서 유도회가 그 정통성을 일제하의 독립운동 계승에 두었다는 것을 입증한다. 유교의 근대적 전환을 위해 유교의 민족화를 주창했던 김창숙의 구상은 총본부의 실무 조직 인선에서 잘 드러났다. 특히 감찰위원회를 대규모로 꾸리고 위원진을 독립운동 유림으로 채운 데에서 김창숙과 유도회가 당시 시급한 과제인 유교계의 친일 세력 청산에 진력을 다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346쪽)
“김창숙에게 뜻밖의 우호 세력이 등장했으니, 바로 이정규를 비롯한 아나키스트 세력이다. 파리장서를 상해에 전달하고 나서 김창숙은 이회영, 신채호 등 망명 유교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활동하면서 아나키스트 계열의 독립운동가들과 우호적 관계를 맺었다. 한편 해방 전 체포되어 국내에서 해방을 맞은 아나키스트들과 국내 활동 아나키스트들은 왕성한 활동력으로 해방 정국에서 그 세력을 키워가고 있었다. 그리고 임시정부 요인 자격으로 귀국한 이회영의 동생 이시영, 유교계를 대표하는 김창숙과 정인보 등과 접촉하면서 유교계 독립운동 세력과의 연합을 모색했다. 그리고 반탁운동 과정에서 공산주의 세력이라는 공동의 적을 확인하면서, 유교계와 아나키스트 사이의 이채로운 연합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 연합은 반탁운동 기간을 지나서도 유지되어 1960년대 초반까지 지속되었다.”(351쪽)
“전국유교연맹에는 김응섭, 최준, 이원일 같은 영남권 최고명문가 출신의 독립·민족운동가들, 이구영 회고록에 등장한 정준섭, 이영규 등 명륜학원 출신의 청년 유교인들, 이구영, 이원헌, 이석구(곧 이민수) 등 ‘사서연역회’ 출신의 뛰어난 젊은 한학자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다. 다시 말해, 당시 전국유교연맹은 비록 조직력에서는 우익 측의 통합 유도회총본부에 뒤처져 있었지만, 핵심 참여자 집단만을 놓고 보면 유도회총본부 김창숙의 카리스마에 충분히 도전할 수 있을 만큼의 명사들로 구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421쪽)
“4·25 교수단 데모의 기획과 주동에는 특히 김창숙 후원하의 유교 네트워크와 독립운동가들의 네트워크가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 네트워크의 대의 추구는 참여자들의 결속을 높였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운동의 도덕성을 고양시키고 사회적 영향을 확산시키는 기반이 되었다. 이들의 참여 동기와 실천 과정의 적극성을 이끌어낸 것은 유교적 가치였다. (······) 그윽한 분노와 도덕적 대의로 시위에 나선 ‘군자들의 행진’ 앞에서 군대와 경찰은 무력했다. 조선시대 이래 유교 정치의 이상이 현대사에 아로새겨진 순간이었다.”(504~505쪽)
“한국의 유교인들은 서구와 일본이라는 외세의 도전에 맞서는 데 치중하느라 내부적 개혁 과제에 집중할 여유를 갖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도 유교인들은 한 걸음 한 걸음 근대의 과제에 부딪혀 갔다. 위정척사론과 의병전쟁의 복고적 문명 인식은 파리장서운동 과정에서 근대적 민족 개념을 수용하며 극복되었다. 조선의 국가종교로서 지배 이데올로기로 기능하고 양반 중심의 위계적 사회관계를 정당화했던 유교의 사회 관념은 망명 유림들의 독립운동 참여와 혁신 유림의 사회운동 참여 과정에서 근대적 전환의 계기를 마련했다. 1919년 파리장서운동으로 결집했던 유교인의 민족운동은 해방 정국에서 자주독립국가 건설 운동으로 재생했고, 분단 이후에는 반독재·민주화 투쟁으로 이어졌다. 1960년 4·25 교수단 데모는 유교 정치운동사의 오랜 저력이 발휘된 상징적 사건으로서, 현대 민주주의 정치에 유교의 민본 정치 이상과 인의의 사회윤리가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 ‘군자들의 행진’이었다.”
---본문 중에서
출판사 리뷰
이 책은 그동안 망각되었던 해방 정국의 유교계의 동향을 최초로 복원하여, 구한말 의병전쟁부터 1960년대 민주화운동까지 면면히 이어진 유교 정치 이상의 연속성과 역동성을 보여준다. 지은이는 사료 발굴을 바탕으로 해방 정국의 좌우 유교 단체 참여자 조사와 분석 작업을 수행하여 유교 정치운동사의 연속성을 입증하고 있다. ‘전통과 근대’, ‘유교와 민주주의’ 등의 형이상학적 논전(論戰)의 수렁을 우회하여, 경험 수준에서 유교와 민주화운동의 관계에 대해 접근했다는 점은 이 책의 방법론적 성취이기도 하다.
이 책의 제목인 ‘군자들의 행진’은 마이클 왈쩌가 청교도주의를 17세기 영국 시민혁명을 이끈 급진 정치학의 기원으로 분석한 저술인 『성자들의 혁명』에 대응한 것으로, 유교 이상과 유교인의 분투가 한국 근현대 정치에 미친 영향을 강조하고자 붙여졌다. 유교인들이 엄혹했던 식민지 시기와 혼란으로 점철되었던 해방 정국 그리고 부정으로 얼룩졌던 독재정권 기간을 견뎌내고 저항했던 힘은 유교의 정치 이상을 실천하고자 하는 의무감, 곧 세속의 고난을 초월하여 천명으로서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해야 한다는 ‘군자’의 이상에서 연원했다. 유교사 및 근현대사 서술에서 망각되었던 군자들의 행적을 복원한 이 책은, 유교가 어떻게 근대 정치 이념에 적응해 갔는가에 대한 해명이면서 동시에 유교 정치 이상과 유교인의 행위가 한국의 민주화에 기여했다는 주장에 대한 역사적 논증이다.
4·19 혁명을 완성시킨 4·25 교수단 데모에 유교 네트워크가 있었다.
1960년 4·19 학생 시위를 혁명으로 완수하는 데에 결정적 기여를 한 것은 4월 25일의 재경 교수단 데모였다. 이들은 발포 책임자 처벌, 부정선거 무효 등을 외치던 기존의 소극적 주장에서 벗어나 최초로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했고, 이에 충격을 받은 이 대통령이 다음날 하야 약속을 하면서 건국 이후 최초의 시민 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런데 교수단 데모의 기획과 진행의 핵심에 유교 지식인의 네트워크가 작동하고 있었다는 것을 기존의 현대사 서술은 간과했다. 한국의 근현대사와 민주화운동사가 기독교와 사회주의라는 두 외래종의 신념 체계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관념이 상식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는 유교인 스스로 의병전쟁과 파리장서운동 이후의 현대 유교사를 쇠락의 시기로 부끄럽게 여겨 연구를 등한시했기 때문이다. 이 책은 4·25 교수단 데모를 주도한 이상은, 권오돈, 임창순, 이정규, 조윤제, 이희승, 한태수 등이 심산 김창숙을 정점으로 한 옛 유교계 독립운동과 해방 이후 유교계 건국운동 및 통일국가수립운동의 전통에 이어져 있다는 주장, 곧 유교계 정치운동의 연속성 논증을 실제 유교 중심의 근현대사 분석을 통해 학계와 독자들에게 최초로 선보인다.
구한말 의병전쟁과 독립운동 그리고 민주화운동의 연속성을 논증하다
유교는 조선 국망의 원인으로 지목되어 식민지 시기 내내 비판 받았고 해방 이후에는 변화를 거부하고 소멸되어 가는 전통 종교의 하나로 인식되었다. 그런데 이는 절반만큼만 사실이다. 국망 전후 일제의 침략에 맞서 가장 강력하게 저항했던 집단은 정통 유림 세력이었다. 일제의 이른바 ‘대토벌’에 의해 사상자만 수만에 이르는 참혹한 피해를 입었지만, 의병 학맥의 후예들과 개신 유림들은 1919년 파리장서운동을 통해 재집결하여 의기를 드높였다. 그리고 파리장서운동 생존자와 그 후예들은 김창숙과 정인보를 중심으로 유도회총본부로 결집하여 해방 정국에서 자주적 국가 건설을 위한 투쟁의 중추 세력으로 활약했다. 의암 류인석, 면우 곽종석, 지산 김복한 등 구한말 의병전쟁과 일제하 독립운동 참여 세력의 후손과 학파 유림들 대부분이 참여한 유도회총본부는 유교 정치 이상의 실현과 유교계의 근대적 전환을 위해 분투했다. 여기에는 중국 망명 독립운동 시기 이회영을 따랐던 아나키스트 세력들도 결합했다. 한편, 유교계의 청년 세력들은 대동회와 전국유교연맹을 각각 결성하여 좌파의 통일국가수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 책에는 구한말에서 해방 정국까지 유교계의 민족운동과 정치운동의 계통을 총괄 정리한 그림이 562~563쪽에 실려 있다. 첨부 자료 참조.) 이러한 유교계의 정치운동은 분단과 6·25전쟁을 거치며 중요 인물들의 사망과 납북으로 타격을 받았고, 이승만의 독재화에 김창숙 중심의 유교계가 저항한 까닭에 정권 차원의 탄압을 받으며 분열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유교계 지식인의 네트워크는 4·19혁명 전후에 다시 활성화되어 교수단 데모를 조직화하여 마침내 시민혁명을 완성시키는 데 기여했다. 이 네트워크는 해방 이후 김창숙에 의해 다져진 것이었다. 이들은 혁명 이후 정국에서 진보 정치운동의 전면에 나섰다가 탄압을 받아 고초를 겪었지만, 1965년 한일협정반대투쟁 시기 ‘재경유림단 성명’을 발표하는 등 유교 네트워크를 유지하며 이른바 ‘재야’ 민주화운동에 역사적 정통성을 부여하는 데 이바지했다.
유교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통해 유교민주주의론을 혁신하다
그동안 동서양의 많은 학자들이 유교와 근대, 또는 유교와 민주주의의 친화력 여부에 대해 치열한 찬반 논쟁을 벌였다. 그런데 이 논쟁은 처음부터 형이상학적 수준 너머로 발전되기 어려웠다. 찬반 당사자들은 처음에는 서로의 저의에 의심을 품었고 다음 단계에서는 경험의 차이가 논의의 진전을 가로막았다. 유교 문화권 국가의 불완전하거나 짧은 민주주의 역사는 경험적 차이를 완화시킬 유교와 민주주의의 관계에 대한 설득력 있는 이론 형성을 가로막았다. 그런데 ‘민주주의’ 일반 이론 대신 구체적 ‘민주화’에 주목했다면 훨씬 설득력 있는 경험적 논증이 가능하지 않을까? 한국 유교사는 이에 대한 확실한 논거를 제공한다. 가장 보수적이었던 유림 주도의 의병 세력은 이후 독립운동 과정에서 근대 민족주의에 눈을 뜨며 역설적으로 유교 혁신을 통해 근대적 전환을 이뤘고, 해방 이후 그 후예들은 근대적 정치 제도 하에서 민본의 이상을 민주주의로 전유하여 건국 사업에 능동적으로 참여했다. 이런 유교사의 저력에 맞물려, 사회 구성원이 유교적 가치와 언어에 익숙해 있던 1960년대까지 유교는 반독재·민주화운동에 필요한 인적·사상적 자원을 제공하는 데 상당한 기여를 했다. 근현대 유교 정치운동사 연구를 수행하면서 경험 수준에서 유교와 민주화운동의 관계에 대해 접근했다는 점이 이 책의 방법론적 성취이다.
한학자로만 알았던 이들, 사실은 불굴의 투사였다
일제강점기에 자리 잡기 시작한 근대 교육 체계에서 배제된 전통적 유교 지식인들은 차츰 한학(漢學)이라는 비정치적 영역에 강제로 갇히게 되었지만, 정인보와 조선학운동으로 대표되는 일제하 민족문화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민족주의 정치에 여전히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런 배경 하에서 성장한 청년 유교인들은 독립운동을 비롯한 여러 사상운동에 참여했고 그 연속선에서 해방 정국의 정치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이 책은 오늘 우리가 ‘한학자’ 또는 고전번역자로만 알고 있었던 지식인들이 사실은 유교계 정치운동의 적극 참여자였다는 것을 밝혀 독자들에게 알린다. 노론 가문 출신의 권오돈은 청년 시절부터 아나키즘 계열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불굴의 투사였고, 이민수(이석구)는 해방 전 이육사와 교유하고 해방 이후 사서연역회에 참여하던 중 전국유교연맹의 총책을 맡았던 인물이다. 오늘날 국학이나 유학 분야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의 서가에는 반드시 이들에 의해 번역된 유교 경전과 한국사 고전 서적이 꽂혀 있다. 지곡서당(이후 태동고전연구소로 개칭)에서 한학의 맥을 잇는 제자를 양성했던 임창순 역시 해방 정국과 민주화운동 시기의 지사로서 고초를 겪었고, 성낙훈은 약관에 신간회에 참여하고 해방 후 우파와 중도파 정치운동에 적극 가담했었다. 조규택은 임정 요인으로 해방 후 귀국하여 유교계의 임시정부봉대운동을 주도했던 조성환의 아들이었는데, 조봉암의 진보당에 참여해서 고초를 겪었다. 그 밖에 일제하 정인보, 김태준 등 유교 명사들의 영향하에 있던 청년 유림들의 다수도 좌우 정치운동에 참여했다. 1960년대 후반 이후 변화된 정세와 유교의 쇠락이라는 조건 때문에 이들은 한학이라는 비제도적 학문 영역으로 활동이 제약되었지만, 그 이전까지 유교 지식인들은 정치와 학문의 일체로서 유교 정치 이상을 현실화하고자 분투했음을 이 책은 특기하고 있다.
이 책의 제목인 ‘군자들의 행진’은 마이클 왈쩌가 청교도주의를 17세기 영국 시민혁명을 이끈 급진 정치학의 기원으로 분석한 저술인 『성자들의 혁명』에 대응한 것으로, 유교 이상과 유교인의 분투가 한국 근현대 정치에 미친 영향을 강조하고자 붙여졌다. 유교인들이 엄혹했던 식민지 시기와 혼란으로 점철되었던 해방 정국 그리고 부정으로 얼룩졌던 독재정권 기간을 견뎌내고 저항했던 힘은 유교의 정치 이상을 실천하고자 하는 의무감, 곧 세속의 고난을 초월하여 천명으로서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해야 한다는 ‘군자’의 이상에서 연원했다. 유교사 및 근현대사 서술에서 망각되었던 군자들의 행적을 복원한 이 책은, 유교가 어떻게 근대 정치 이념에 적응해 갔는가에 대한 해명이면서 동시에 유교 정치 이상과 유교인의 행위가 한국의 민주화에 기여했다는 주장에 대한 역사적 논증이다.
4·19 혁명을 완성시킨 4·25 교수단 데모에 유교 네트워크가 있었다.
1960년 4·19 학생 시위를 혁명으로 완수하는 데에 결정적 기여를 한 것은 4월 25일의 재경 교수단 데모였다. 이들은 발포 책임자 처벌, 부정선거 무효 등을 외치던 기존의 소극적 주장에서 벗어나 최초로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했고, 이에 충격을 받은 이 대통령이 다음날 하야 약속을 하면서 건국 이후 최초의 시민 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런데 교수단 데모의 기획과 진행의 핵심에 유교 지식인의 네트워크가 작동하고 있었다는 것을 기존의 현대사 서술은 간과했다. 한국의 근현대사와 민주화운동사가 기독교와 사회주의라는 두 외래종의 신념 체계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관념이 상식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는 유교인 스스로 의병전쟁과 파리장서운동 이후의 현대 유교사를 쇠락의 시기로 부끄럽게 여겨 연구를 등한시했기 때문이다. 이 책은 4·25 교수단 데모를 주도한 이상은, 권오돈, 임창순, 이정규, 조윤제, 이희승, 한태수 등이 심산 김창숙을 정점으로 한 옛 유교계 독립운동과 해방 이후 유교계 건국운동 및 통일국가수립운동의 전통에 이어져 있다는 주장, 곧 유교계 정치운동의 연속성 논증을 실제 유교 중심의 근현대사 분석을 통해 학계와 독자들에게 최초로 선보인다.
구한말 의병전쟁과 독립운동 그리고 민주화운동의 연속성을 논증하다
유교는 조선 국망의 원인으로 지목되어 식민지 시기 내내 비판 받았고 해방 이후에는 변화를 거부하고 소멸되어 가는 전통 종교의 하나로 인식되었다. 그런데 이는 절반만큼만 사실이다. 국망 전후 일제의 침략에 맞서 가장 강력하게 저항했던 집단은 정통 유림 세력이었다. 일제의 이른바 ‘대토벌’에 의해 사상자만 수만에 이르는 참혹한 피해를 입었지만, 의병 학맥의 후예들과 개신 유림들은 1919년 파리장서운동을 통해 재집결하여 의기를 드높였다. 그리고 파리장서운동 생존자와 그 후예들은 김창숙과 정인보를 중심으로 유도회총본부로 결집하여 해방 정국에서 자주적 국가 건설을 위한 투쟁의 중추 세력으로 활약했다. 의암 류인석, 면우 곽종석, 지산 김복한 등 구한말 의병전쟁과 일제하 독립운동 참여 세력의 후손과 학파 유림들 대부분이 참여한 유도회총본부는 유교 정치 이상의 실현과 유교계의 근대적 전환을 위해 분투했다. 여기에는 중국 망명 독립운동 시기 이회영을 따랐던 아나키스트 세력들도 결합했다. 한편, 유교계의 청년 세력들은 대동회와 전국유교연맹을 각각 결성하여 좌파의 통일국가수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 책에는 구한말에서 해방 정국까지 유교계의 민족운동과 정치운동의 계통을 총괄 정리한 그림이 562~563쪽에 실려 있다. 첨부 자료 참조.) 이러한 유교계의 정치운동은 분단과 6·25전쟁을 거치며 중요 인물들의 사망과 납북으로 타격을 받았고, 이승만의 독재화에 김창숙 중심의 유교계가 저항한 까닭에 정권 차원의 탄압을 받으며 분열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유교계 지식인의 네트워크는 4·19혁명 전후에 다시 활성화되어 교수단 데모를 조직화하여 마침내 시민혁명을 완성시키는 데 기여했다. 이 네트워크는 해방 이후 김창숙에 의해 다져진 것이었다. 이들은 혁명 이후 정국에서 진보 정치운동의 전면에 나섰다가 탄압을 받아 고초를 겪었지만, 1965년 한일협정반대투쟁 시기 ‘재경유림단 성명’을 발표하는 등 유교 네트워크를 유지하며 이른바 ‘재야’ 민주화운동에 역사적 정통성을 부여하는 데 이바지했다.
유교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통해 유교민주주의론을 혁신하다
그동안 동서양의 많은 학자들이 유교와 근대, 또는 유교와 민주주의의 친화력 여부에 대해 치열한 찬반 논쟁을 벌였다. 그런데 이 논쟁은 처음부터 형이상학적 수준 너머로 발전되기 어려웠다. 찬반 당사자들은 처음에는 서로의 저의에 의심을 품었고 다음 단계에서는 경험의 차이가 논의의 진전을 가로막았다. 유교 문화권 국가의 불완전하거나 짧은 민주주의 역사는 경험적 차이를 완화시킬 유교와 민주주의의 관계에 대한 설득력 있는 이론 형성을 가로막았다. 그런데 ‘민주주의’ 일반 이론 대신 구체적 ‘민주화’에 주목했다면 훨씬 설득력 있는 경험적 논증이 가능하지 않을까? 한국 유교사는 이에 대한 확실한 논거를 제공한다. 가장 보수적이었던 유림 주도의 의병 세력은 이후 독립운동 과정에서 근대 민족주의에 눈을 뜨며 역설적으로 유교 혁신을 통해 근대적 전환을 이뤘고, 해방 이후 그 후예들은 근대적 정치 제도 하에서 민본의 이상을 민주주의로 전유하여 건국 사업에 능동적으로 참여했다. 이런 유교사의 저력에 맞물려, 사회 구성원이 유교적 가치와 언어에 익숙해 있던 1960년대까지 유교는 반독재·민주화운동에 필요한 인적·사상적 자원을 제공하는 데 상당한 기여를 했다. 근현대 유교 정치운동사 연구를 수행하면서 경험 수준에서 유교와 민주화운동의 관계에 대해 접근했다는 점이 이 책의 방법론적 성취이다.
한학자로만 알았던 이들, 사실은 불굴의 투사였다
일제강점기에 자리 잡기 시작한 근대 교육 체계에서 배제된 전통적 유교 지식인들은 차츰 한학(漢學)이라는 비정치적 영역에 강제로 갇히게 되었지만, 정인보와 조선학운동으로 대표되는 일제하 민족문화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민족주의 정치에 여전히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런 배경 하에서 성장한 청년 유교인들은 독립운동을 비롯한 여러 사상운동에 참여했고 그 연속선에서 해방 정국의 정치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이 책은 오늘 우리가 ‘한학자’ 또는 고전번역자로만 알고 있었던 지식인들이 사실은 유교계 정치운동의 적극 참여자였다는 것을 밝혀 독자들에게 알린다. 노론 가문 출신의 권오돈은 청년 시절부터 아나키즘 계열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불굴의 투사였고, 이민수(이석구)는 해방 전 이육사와 교유하고 해방 이후 사서연역회에 참여하던 중 전국유교연맹의 총책을 맡았던 인물이다. 오늘날 국학이나 유학 분야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의 서가에는 반드시 이들에 의해 번역된 유교 경전과 한국사 고전 서적이 꽂혀 있다. 지곡서당(이후 태동고전연구소로 개칭)에서 한학의 맥을 잇는 제자를 양성했던 임창순 역시 해방 정국과 민주화운동 시기의 지사로서 고초를 겪었고, 성낙훈은 약관에 신간회에 참여하고 해방 후 우파와 중도파 정치운동에 적극 가담했었다. 조규택은 임정 요인으로 해방 후 귀국하여 유교계의 임시정부봉대운동을 주도했던 조성환의 아들이었는데, 조봉암의 진보당에 참여해서 고초를 겪었다. 그 밖에 일제하 정인보, 김태준 등 유교 명사들의 영향하에 있던 청년 유림들의 다수도 좌우 정치운동에 참여했다. 1960년대 후반 이후 변화된 정세와 유교의 쇠락이라는 조건 때문에 이들은 한학이라는 비제도적 학문 영역으로 활동이 제약되었지만, 그 이전까지 유교 지식인들은 정치와 학문의 일체로서 유교 정치 이상을 현실화하고자 분투했음을 이 책은 특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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