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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한국 고대사의 오류를 하나씩 교정한 밀도 높은 고증서
한국 고대사에는 고유명사의 문자 판독을 비롯해 음가(音價)와 용어·개념에 대한 오류를 비롯해 여전히 교정되지 않은 오류가 적지 않다. 이 책에서는 이러한 사안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많은 이들이 추종한다고 따라갈 일은 아니므로 당연하다고 믿었던 사안에 대하여 수많은 의문을 제기하고 그 답을 밝혔다.
가령 ‘철의 왕국’은 가야가 아니라 신라임을 입증했고, ‘6가야’도 만들어진 역사임을 논증했다. 호류사 금당 벽화를 그린 이는 고구려 승려 담징이 아니라 백제계 인물임을 밝혔다. 이는 대표적인 역사 왜곡 사례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의문에 대한 논의가 중첩되다 보니 본서는 밀도 높은 고증으로 넘친다.
특히 지난 세기에 소실된 중국 지린시 박물관 소장 부여 여인 도용(陶俑)과 몽촌토성 무문비, 산청 구형왕과 왕비 영정, 문경 당교(唐橋) 등은 필자의 저서 외에는 다시 접할 수 없는 직접 촬영한 사진 자료를 포함하였다. 이들은 모두 접할 수 없거나 옛 모습이 사라진 유물과 유적이다.
한국 고대사에는 고유명사의 문자 판독을 비롯해 음가(音價)와 용어·개념에 대한 오류를 비롯해 여전히 교정되지 않은 오류가 적지 않다. 이 책에서는 이러한 사안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많은 이들이 추종한다고 따라갈 일은 아니므로 당연하다고 믿었던 사안에 대하여 수많은 의문을 제기하고 그 답을 밝혔다.
가령 ‘철의 왕국’은 가야가 아니라 신라임을 입증했고, ‘6가야’도 만들어진 역사임을 논증했다. 호류사 금당 벽화를 그린 이는 고구려 승려 담징이 아니라 백제계 인물임을 밝혔다. 이는 대표적인 역사 왜곡 사례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의문에 대한 논의가 중첩되다 보니 본서는 밀도 높은 고증으로 넘친다.
특히 지난 세기에 소실된 중국 지린시 박물관 소장 부여 여인 도용(陶俑)과 몽촌토성 무문비, 산청 구형왕과 왕비 영정, 문경 당교(唐橋) 등은 필자의 저서 외에는 다시 접할 수 없는 직접 촬영한 사진 자료를 포함하였다. 이들은 모두 접할 수 없거나 옛 모습이 사라진 유물과 유적이다.
목차
머리말
Ⅰ. 시대 구분론
1. 언제까지가 혈연과 지연 공동체인 고대인가?
Ⅱ. ‘고조선’론
2. ‘단군’의 뜻과 국호 ‘고조선’
3. 기자조선은 만들어진 역사인가?
4. 위만을 통해 본 조선의 정체성
5. 위만 정권의 성격과 왕험성 위치 문제 …
6. 한사군의 소재지와 존속 기간
7. 3개의 조선 국호 문제
Ⅲ. 부여
8. 부여는 몇 개인가?
9. 미궁 속의 부여 왕성 소재지
Ⅳ. 고구려
10. 고구려 건국자의 부여 출원설은 근거 있는가?
11. 고구려의 도성과 천도
12. 평양성은 대성산성인가?
13. 고구려 왕릉에 대한 논의
14. 어느 무덤이 광개토왕릉인가?
15. 광개토왕 대에 무단강(牧丹江) 유역까지 진출했는가?
16. 「광개토왕릉비문」에 광개토왕 부·조(父祖)가 보이지 않은 이유?
17. 「광개토왕릉비문」에 보이는 주적主敵은?
18. 「광개토왕릉비문」에서 발견한 질서관은?
19. 「광개토왕릉비문」의 신묘년辛卯年 조 논의
20. 고구려는 과연 내분으로 한강 유역을 상실했는가?
21. 천리장성을 축조한 목적은?
22. 고구려어와 신라어는 같았을까, 달랐을까?
Ⅴ. 백제
23. 백제 건국자들은 어디서 왔는가?
24. 백제의 첫 근거지와 부여 유물
25. 한성 도읍기 왕성
26. 근초고왕 대의 정복, 어디까지인가?
27. 욕나(谷那 ) 산은 어디에 소재했는가?
28. 제의 요서경략은 ‘설’인가? ‘사실’인가?
29. 국내 전방후원분에는 누가 묻혔나?
30. 녕왕의 계보와 출생담
31. 녕왕과 무령왕릉 부장품에 대한 재해석
32. 누가 동성왕을 살해했는가?
33. 사비도성 그리고 서나성의 존재
34. 사비성 도읍기는 2개의 도성 체제였는가?
35. 궁남지는 어디에 소재했는가?
36. 쌍릉의 피장자는 누구인가?
37. 대항해의 산물, 없는 게 없는 글로벌 백제
38. 백제인들은 면직물 옷을 입었다!
39. ‘정림사지’ 오층탑은 백제탑인가, 백제계 탑인가?
40. 「창왕사리감 명문」에서 발견한 공주 이름
41. 「창왕사리감 명문」을 통해 얻게 된 백제 기년법
42. 글자와 용어를 바르게 사용하고 있는가?
43. 담징은 일본 호류사 금당 벽화를 그렸는가?
44. 백제는 언제까지 존재했는가?
45. 백제 문화 콘텐츠 검증
Ⅵ. 신라 … 295
46. 잡종강세의 고대국가
47. 백색 숭상과 저녁 혼례 전통
48. ‘철의 왕국’은 가야가 아닌 신라
49. 신라와 바다 그리고 대항해
50. 신라는 어떻게 황초령과 마운령까지 진출할 수 있었는가?
51. 천기를 알았다는 선덕여왕 이야기의 진실
52. 낭비성은 어디에 소재했는가?
53. 신라는 불완전한 통일을 했는가?
54. 「낭혜화상비문」 쟁점 구절의 재해석
Ⅶ. 가라와 임나 제국
55. 사국시대는 가능한가?
56. 전북가야는 역사서의 어떤 나라인가?
Ⅷ. 발해
57. 신라와 발해의 대치는 남북국시대인가?
Ⅸ. 후백제와 고려
58. 후백제사의 역사적 의미
59. 견훤이 아니고 진훤인 이유?
60. 진훤 왕의 출생지와 출생 설화
61. 역사서에서 포토샵 된 인물들
62. 미륵사 ‘개탑(開塔)’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63. 후백제는 국력이 약해서 망했는가?
64. 진훤의 아버지 아자개가 왕건에게 귀부한 까닭은?
65. 진훤 왕이 고려로 간 까닭은?
Ⅰ. 시대 구분론
1. 언제까지가 혈연과 지연 공동체인 고대인가?
Ⅱ. ‘고조선’론
2. ‘단군’의 뜻과 국호 ‘고조선’
3. 기자조선은 만들어진 역사인가?
4. 위만을 통해 본 조선의 정체성
5. 위만 정권의 성격과 왕험성 위치 문제 …
6. 한사군의 소재지와 존속 기간
7. 3개의 조선 국호 문제
Ⅲ. 부여
8. 부여는 몇 개인가?
9. 미궁 속의 부여 왕성 소재지
Ⅳ. 고구려
10. 고구려 건국자의 부여 출원설은 근거 있는가?
11. 고구려의 도성과 천도
12. 평양성은 대성산성인가?
13. 고구려 왕릉에 대한 논의
14. 어느 무덤이 광개토왕릉인가?
15. 광개토왕 대에 무단강(牧丹江) 유역까지 진출했는가?
16. 「광개토왕릉비문」에 광개토왕 부·조(父祖)가 보이지 않은 이유?
17. 「광개토왕릉비문」에 보이는 주적主敵은?
18. 「광개토왕릉비문」에서 발견한 질서관은?
19. 「광개토왕릉비문」의 신묘년辛卯年 조 논의
20. 고구려는 과연 내분으로 한강 유역을 상실했는가?
21. 천리장성을 축조한 목적은?
22. 고구려어와 신라어는 같았을까, 달랐을까?
Ⅴ. 백제
23. 백제 건국자들은 어디서 왔는가?
24. 백제의 첫 근거지와 부여 유물
25. 한성 도읍기 왕성
26. 근초고왕 대의 정복, 어디까지인가?
27. 욕나(谷那 ) 산은 어디에 소재했는가?
28. 제의 요서경략은 ‘설’인가? ‘사실’인가?
29. 국내 전방후원분에는 누가 묻혔나?
30. 녕왕의 계보와 출생담
31. 녕왕과 무령왕릉 부장품에 대한 재해석
32. 누가 동성왕을 살해했는가?
33. 사비도성 그리고 서나성의 존재
34. 사비성 도읍기는 2개의 도성 체제였는가?
35. 궁남지는 어디에 소재했는가?
36. 쌍릉의 피장자는 누구인가?
37. 대항해의 산물, 없는 게 없는 글로벌 백제
38. 백제인들은 면직물 옷을 입었다!
39. ‘정림사지’ 오층탑은 백제탑인가, 백제계 탑인가?
40. 「창왕사리감 명문」에서 발견한 공주 이름
41. 「창왕사리감 명문」을 통해 얻게 된 백제 기년법
42. 글자와 용어를 바르게 사용하고 있는가?
43. 담징은 일본 호류사 금당 벽화를 그렸는가?
44. 백제는 언제까지 존재했는가?
45. 백제 문화 콘텐츠 검증
Ⅵ. 신라 … 295
46. 잡종강세의 고대국가
47. 백색 숭상과 저녁 혼례 전통
48. ‘철의 왕국’은 가야가 아닌 신라
49. 신라와 바다 그리고 대항해
50. 신라는 어떻게 황초령과 마운령까지 진출할 수 있었는가?
51. 천기를 알았다는 선덕여왕 이야기의 진실
52. 낭비성은 어디에 소재했는가?
53. 신라는 불완전한 통일을 했는가?
54. 「낭혜화상비문」 쟁점 구절의 재해석
Ⅶ. 가라와 임나 제국
55. 사국시대는 가능한가?
56. 전북가야는 역사서의 어떤 나라인가?
Ⅷ. 발해
57. 신라와 발해의 대치는 남북국시대인가?
Ⅸ. 후백제와 고려
58. 후백제사의 역사적 의미
59. 견훤이 아니고 진훤인 이유?
60. 진훤 왕의 출생지와 출생 설화
61. 역사서에서 포토샵 된 인물들
62. 미륵사 ‘개탑(開塔)’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63. 후백제는 국력이 약해서 망했는가?
64. 진훤의 아버지 아자개가 왕건에게 귀부한 까닭은?
65. 진훤 왕이 고려로 간 까닭은?
출판사 리뷰
무엇이 한국 고대사 연구의 쟁점과 과제인가?
근대역사학이 도입된 이래 시대구분에 관한 논의는 적지 않게 제기되어 왔었다. 학계 연구 성과의 지표인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서는 중세를 고려부터로 설정했다. 여전히 왕조 사적 시대구분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반증한다. 필자는 전통 시대 역사를 주도했던 지배층 배출 수단의 획기적 모멘트를 958년(고려 광종 9)부터 시행된 과거제에서 찾았다. 이에 따라 오로지 혈통에만 기반한 사회는 막을 내리기 시작했다고 본다. 통치 거점도 상시적 전란으로 인한 고지대 산성에서 평지 읍성으로 전환되었다. 그런데 국가의 생존과 권위에 필요한 테크놀로지(technology)였기에 우대받았던 기술직은 그 위상이 떨어졌다. 문치(文治)라는 휘황한 빛에 가려진 어두운 그늘이었다
본서는 신화만 전하는 왕검조선부터 후삼국기까지를 대상으로 했다. 필자가 설정한 고대라는 시간적 범주에 속해서였다. 이 기간에 조선-부여 한(韓)을 축으로 한 숱한 정치체가 명멸하였다. 발해의 부여 ‘유속(遺俗)’ 계승 천명과 후백제의 마한 계승 선언도 계통적으로 이와 연결된 것이다. 그리고 이들 역사에 대해서는 수년 전에 출간한 거작(巨作) 『분석 고대 한국사』에서 소상히 살펴본 바 있다. 그러면 본서의 출간 동기를 밝히고자 한다. 먼저 한국 고대사에서 아직도 오류가 교정되지 않아서였다. 고유명사의 문자 판독을 비롯해 음가(音價)와 용어·개념에 대한 오류가 넘쳤다. 일례로 『삼국사기』 정덕본의 백제 ‘아신왕(阿莘王)’ 판각은, ‘아화왕(阿華王)’ 오각(誤刻)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바로잡지 않고 있다. 그리고 「미륵사지 서탑 사리봉안기」에 적힌 ‘沙택 積德’을 ‘사택적덕’으로 읽거나, 심지어는 ‘沙宅積德’으로 변형시키기도 했다. 이체자로 적힌 ‘ ’을 ‘택’으로 읽는 데서 그치지 않고 ‘宅’으로 변조까지 한 것이다. AI 시대라는 최첨단 21세기에 빚어진 일이라니? 소름 끼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흐름으로 말미암아 멀쩡히 ‘진훤’으로 읽어 왔던 甄萱을, ‘견훤’으로 왜곡시킨 것이다.
옛말에 ‘삼인성호(三人成虎)’라고 했으니, 여러 사람이 말하면 거짓말도 참말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모기도 모이면 천둥소리 난다”라는 속담이 있듯이, 다중이 요란하게 밀어붙이면 목소리가 커져 옳은 것처럼 비친다. 이러한 사례가 적지 않았기에 ‘그렇지 않다’는 증언 차원에서 언급하였다. 한자음을 잘못 읽는 것은 물론이요, ‘백제부흥운동’ 등을 비롯한 역사 용어에 대해서도 오용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혹자는 이미 굳어진 것이니까 그냥 넘어가자고 한다. 그러나 뭐가 잘못되었는지 알고는 넘어가야 하지 않을까?
본서에서 이와 같은 사안에 대해 숱한 의문을 제기하였다. 많은 이들이 추종한다고 따라갈 일은 아니므로 확인을 해 보았다. 일례로 발해와 통일신라가 공존한 기간을 ‘남북국시대’로 일컫고 있다. 그러나 시대구분 용어로서 ‘남북국시대’는, 단순히 남과 북 두 개 국가의 병존이라는 의미가 아니었다. 중국의 남북조시대를 상기시키는 시대구분으로서의 ‘남북국시대’는, 앞서 존재했던 통일국가의 분열이 빚은 두 개 정권의 공존을 전제해야 하고, 또 통일을 이루려는 각자의 의지가 분명하고, 결국에는 하나로 통일되어야만 유효하다. 그러나 한국사에서의 ‘남북국시대’는 이에 해당하지 않았다. 단순히 방향을 가리키는 남과 북을 사용한 데 의미를 둔다면, 기록에 보이는 고구려와 낙랑, 고구려와 왜도 남북국이 된다. 고려 김부식도 여진의 금을 북조로 일컬었다. 오히려 소위 후삼국시대가 ‘남북국시대’에 해당한다. 하나의 국가가 분열되어 태동한 두 개 정권인 데다가, 서로를 남과 북으로 일컬었듯이 동질감이 존재했고, 또 상대를 통합의 대상으로 여겼으며 종국에는 통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신라는 상징성만 존재한 중국 춘추시대 주실(周室)에 견주어졌다. 진훤이나 왕건 모두 신라를 주실로 일컬었고, 신라로부터 선양(禪讓) 받을 주체로 간주했었다. 실제 왕건은 경순왕에게서 천년왕국 신라를 선양 받았다. 외양만 보고 ‘남북국시대’ 운운할 게 아니라 냉정하게 검증하는 작업이 선결되었어야 한다. 빛 좋은 개살구에 현혹되는 우(愚)를 범해서는 안 될 것 같다.
이렇듯 본서에는 당연하다고 믿었던 사안에 대한 수많은 의문을 제기하였다. 가령 ‘철의 왕국’은 가야가 아니라 신라임을 입증했고, ‘6가야’도 만들어진 역사임을 논증했다. 호류사 금당 벽화를 그린 이는 고구려 승려 담징이 아니라 백제계 인물임을 밝혔다. 이는 대표적인 역사 왜곡 사례에 해당한다. 그뿐만 아니라 필자의 논지는 대체로 한반도 내 낙랑군의 존속기간을 비롯해 고구려 천리장성 축조 배경 등 소위 정설이나 통설과 대척점에 서 있다. 특히 신라군이 당군을 대파한 ‘買肖城’을 ‘매소성’으로 읽는다며 큰 발견이라도 한 양 환호하는 이들이 많았다. 이는 매소성이 아니라 ‘매생성(買省城)’이 맞으므로 오류를 분명히 밝힐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논의가 중첩되다 보니 본서는 밀도 높은 고증으로 넘친다. 전문가들이나 읽을 수 있는 연구서가 되었다. 게다가 워낙 압축된 내용이었기에 사전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는 난해할 수밖에 없다.
특히 지난 세기에 소실된 중국 지린시 박물관 소장 부여 여인 도용(陶俑)과 몽촌토성 무문비, 산청 구형왕과 왕비 영정, 문경 당교(唐橋) 등은 필자의 저서 외에는 다시 접할 수 없는 직접 촬영한 사진 자료를 포함하였다. 이들은 모두 접할 수 없거나 옛 모습이 사라진 유물과 유적이기 때문이다.
근대역사학이 도입된 이래 시대구분에 관한 논의는 적지 않게 제기되어 왔었다. 학계 연구 성과의 지표인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서는 중세를 고려부터로 설정했다. 여전히 왕조 사적 시대구분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반증한다. 필자는 전통 시대 역사를 주도했던 지배층 배출 수단의 획기적 모멘트를 958년(고려 광종 9)부터 시행된 과거제에서 찾았다. 이에 따라 오로지 혈통에만 기반한 사회는 막을 내리기 시작했다고 본다. 통치 거점도 상시적 전란으로 인한 고지대 산성에서 평지 읍성으로 전환되었다. 그런데 국가의 생존과 권위에 필요한 테크놀로지(technology)였기에 우대받았던 기술직은 그 위상이 떨어졌다. 문치(文治)라는 휘황한 빛에 가려진 어두운 그늘이었다
본서는 신화만 전하는 왕검조선부터 후삼국기까지를 대상으로 했다. 필자가 설정한 고대라는 시간적 범주에 속해서였다. 이 기간에 조선-부여 한(韓)을 축으로 한 숱한 정치체가 명멸하였다. 발해의 부여 ‘유속(遺俗)’ 계승 천명과 후백제의 마한 계승 선언도 계통적으로 이와 연결된 것이다. 그리고 이들 역사에 대해서는 수년 전에 출간한 거작(巨作) 『분석 고대 한국사』에서 소상히 살펴본 바 있다. 그러면 본서의 출간 동기를 밝히고자 한다. 먼저 한국 고대사에서 아직도 오류가 교정되지 않아서였다. 고유명사의 문자 판독을 비롯해 음가(音價)와 용어·개념에 대한 오류가 넘쳤다. 일례로 『삼국사기』 정덕본의 백제 ‘아신왕(阿莘王)’ 판각은, ‘아화왕(阿華王)’ 오각(誤刻)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바로잡지 않고 있다. 그리고 「미륵사지 서탑 사리봉안기」에 적힌 ‘沙택 積德’을 ‘사택적덕’으로 읽거나, 심지어는 ‘沙宅積德’으로 변형시키기도 했다. 이체자로 적힌 ‘ ’을 ‘택’으로 읽는 데서 그치지 않고 ‘宅’으로 변조까지 한 것이다. AI 시대라는 최첨단 21세기에 빚어진 일이라니? 소름 끼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흐름으로 말미암아 멀쩡히 ‘진훤’으로 읽어 왔던 甄萱을, ‘견훤’으로 왜곡시킨 것이다.
옛말에 ‘삼인성호(三人成虎)’라고 했으니, 여러 사람이 말하면 거짓말도 참말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모기도 모이면 천둥소리 난다”라는 속담이 있듯이, 다중이 요란하게 밀어붙이면 목소리가 커져 옳은 것처럼 비친다. 이러한 사례가 적지 않았기에 ‘그렇지 않다’는 증언 차원에서 언급하였다. 한자음을 잘못 읽는 것은 물론이요, ‘백제부흥운동’ 등을 비롯한 역사 용어에 대해서도 오용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혹자는 이미 굳어진 것이니까 그냥 넘어가자고 한다. 그러나 뭐가 잘못되었는지 알고는 넘어가야 하지 않을까?
본서에서 이와 같은 사안에 대해 숱한 의문을 제기하였다. 많은 이들이 추종한다고 따라갈 일은 아니므로 확인을 해 보았다. 일례로 발해와 통일신라가 공존한 기간을 ‘남북국시대’로 일컫고 있다. 그러나 시대구분 용어로서 ‘남북국시대’는, 단순히 남과 북 두 개 국가의 병존이라는 의미가 아니었다. 중국의 남북조시대를 상기시키는 시대구분으로서의 ‘남북국시대’는, 앞서 존재했던 통일국가의 분열이 빚은 두 개 정권의 공존을 전제해야 하고, 또 통일을 이루려는 각자의 의지가 분명하고, 결국에는 하나로 통일되어야만 유효하다. 그러나 한국사에서의 ‘남북국시대’는 이에 해당하지 않았다. 단순히 방향을 가리키는 남과 북을 사용한 데 의미를 둔다면, 기록에 보이는 고구려와 낙랑, 고구려와 왜도 남북국이 된다. 고려 김부식도 여진의 금을 북조로 일컬었다. 오히려 소위 후삼국시대가 ‘남북국시대’에 해당한다. 하나의 국가가 분열되어 태동한 두 개 정권인 데다가, 서로를 남과 북으로 일컬었듯이 동질감이 존재했고, 또 상대를 통합의 대상으로 여겼으며 종국에는 통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신라는 상징성만 존재한 중국 춘추시대 주실(周室)에 견주어졌다. 진훤이나 왕건 모두 신라를 주실로 일컬었고, 신라로부터 선양(禪讓) 받을 주체로 간주했었다. 실제 왕건은 경순왕에게서 천년왕국 신라를 선양 받았다. 외양만 보고 ‘남북국시대’ 운운할 게 아니라 냉정하게 검증하는 작업이 선결되었어야 한다. 빛 좋은 개살구에 현혹되는 우(愚)를 범해서는 안 될 것 같다.
이렇듯 본서에는 당연하다고 믿었던 사안에 대한 수많은 의문을 제기하였다. 가령 ‘철의 왕국’은 가야가 아니라 신라임을 입증했고, ‘6가야’도 만들어진 역사임을 논증했다. 호류사 금당 벽화를 그린 이는 고구려 승려 담징이 아니라 백제계 인물임을 밝혔다. 이는 대표적인 역사 왜곡 사례에 해당한다. 그뿐만 아니라 필자의 논지는 대체로 한반도 내 낙랑군의 존속기간을 비롯해 고구려 천리장성 축조 배경 등 소위 정설이나 통설과 대척점에 서 있다. 특히 신라군이 당군을 대파한 ‘買肖城’을 ‘매소성’으로 읽는다며 큰 발견이라도 한 양 환호하는 이들이 많았다. 이는 매소성이 아니라 ‘매생성(買省城)’이 맞으므로 오류를 분명히 밝힐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논의가 중첩되다 보니 본서는 밀도 높은 고증으로 넘친다. 전문가들이나 읽을 수 있는 연구서가 되었다. 게다가 워낙 압축된 내용이었기에 사전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는 난해할 수밖에 없다.
특히 지난 세기에 소실된 중국 지린시 박물관 소장 부여 여인 도용(陶俑)과 몽촌토성 무문비, 산청 구형왕과 왕비 영정, 문경 당교(唐橋) 등은 필자의 저서 외에는 다시 접할 수 없는 직접 촬영한 사진 자료를 포함하였다. 이들은 모두 접할 수 없거나 옛 모습이 사라진 유물과 유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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