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책소개
혁명과 예술이 발원하고, 음울과 환희가 뒤엉킨 거대 도시 파리가 부서지고 피어난 기록
거대하고도 낭만적인 도시 파리의 심리지리학적psychogeography 지침서
거대하고도 낭만적인 도시 파리의 심리지리학적psychogeography 지침서
목차
제1장
순찰로 _09
경계의 심리지리학_ 17
옛 파리, 구역들_ 35
센강 오른쪽: 팔레루아얄, 카루젤, 튀일리생토노레, 부르스, 레 알,
상티에, 마레, 그랑 불바르
센강 왼쪽: 카르티에라탱, 오데옹, 생쉴피스, 생제르맹데프레, 포부르 생제르맹
새로운 파리
1. 포부르_ 177
센강 오른쪽: 샹젤리제, 포부르 생토노레, 포부르 생탕투안,
포팽쿠르와 포부르 뒤 탕플, 포부르 생마르탱과 포부르 생드니,
포부르 푸아소니에르와 포부르 몽마르트르,
생조르주와 누벨아테네, 유럽, 몽소 평야
센강 왼쪽: 포부르 생마르셀, 포부르 생자크, 몽파르나스
2. 마을_277
센강 왼쪽: 보지라르와 그르넬, 플레장스, 당페르로슈로와 14구,
13구 뷔토카유, 이탈리아 구역
센강 오른쪽: 파시와 오퇴유, 바티뇰, 클리시, 몽마르트르, 클리냥쿠르, 구트도르,
라 샤펠과 라 빌레트, 뷔트쇼몽, 벨빌, 메닐몽탕, 샤론, 베르시
제2장
혁명의 파리_ 365
제3장
혼잡한 풍경의 파리 거닐기_ 509
플라뇌르_ 517
아름다운 이미지_ 555
감사의 말_630
찾아보기_ 631
순찰로 _09
경계의 심리지리학_ 17
옛 파리, 구역들_ 35
센강 오른쪽: 팔레루아얄, 카루젤, 튀일리생토노레, 부르스, 레 알,
상티에, 마레, 그랑 불바르
센강 왼쪽: 카르티에라탱, 오데옹, 생쉴피스, 생제르맹데프레, 포부르 생제르맹
새로운 파리
1. 포부르_ 177
센강 오른쪽: 샹젤리제, 포부르 생토노레, 포부르 생탕투안,
포팽쿠르와 포부르 뒤 탕플, 포부르 생마르탱과 포부르 생드니,
포부르 푸아소니에르와 포부르 몽마르트르,
생조르주와 누벨아테네, 유럽, 몽소 평야
센강 왼쪽: 포부르 생마르셀, 포부르 생자크, 몽파르나스
2. 마을_277
센강 왼쪽: 보지라르와 그르넬, 플레장스, 당페르로슈로와 14구,
13구 뷔토카유, 이탈리아 구역
센강 오른쪽: 파시와 오퇴유, 바티뇰, 클리시, 몽마르트르, 클리냥쿠르, 구트도르,
라 샤펠과 라 빌레트, 뷔트쇼몽, 벨빌, 메닐몽탕, 샤론, 베르시
제2장
혁명의 파리_ 365
제3장
혼잡한 풍경의 파리 거닐기_ 509
플라뇌르_ 517
아름다운 이미지_ 555
감사의 말_630
찾아보기_ 631
책 속으로
파리의 중세 시기 두 성곽1 가운데 가장 오래된 성곽은 필리프 오귀스트 시대인 1200년경에 세워진 것으로 센강 왼쪽에 그 유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성곽은 강 왼쪽의 생트준비에브 언덕 북쪽 비탈 위에서 라탱 구역 ‘소르본 대학가’의 경계를 둘러싼다. 유적이라 함은 센강 양쪽에 퍼져 있는 옛 석재들, 고고학의 유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지도 위에 분명히 표시되어 있고, 거닐면서 느낄 수 있고, 눈에 띄고, 여전히 생생한 도시의 건축물을 지칭한다. 오래전 성곽은 센강에서 시작해 현재 프랑스 학술원이 자리한 넬의 망루까지 이어졌다.
--- p.28
프랑수아 비용의 시대 이래 젊은이들의 구역이었던 라탱은 좋았던 옛 시절에 대한 향수 그 이상을 의미한다. 물론 이런 감정을 불편해할 사람도 있겠지만 1850년과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사이에 라탱 구역에 있던 카페들이 갖고 있던 유쾌함, 다양성, 풍성함을 어떻게 아쉬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비록 그 구역의 카페들의 외관을 대로변에 있는 환상적인 카페들의 모습과 절대 비교할 수 없지만, 분위기는 비슷했다. 어떤 카페들은 상당히 정치적이었다. 발레스는 『르 바슐리에Le Bachelier』에서 1850년 카페 보트 유니베르셀에는 “이른바 6월 봉기 참가자, 둘랑스 감옥의 죄수, 생메리 폭동의 주모자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라고 묘사했다.
--- p.151
그로부터 한 세기 후, 빅토르 푸르넬에게 있어 샹젤리제는 “즐거운 가락이 물결을 이루는 파리의 중심으로, 여름이면 사람들로 넘쳤다. 에투알의 원형 교차로에서 콩코르드 광장까지 가는 발걸음마다 곳곳에서 연가, 짧은 형식의 노래, 잘 알려진 아리아, 오페라의 서곡 등이 폭죽처럼 울려 퍼졌다”.
--- p.193
1914년 이후 몽파르나스는 모딜리아니, 중절모를 쓴 파스킨, 키키, 피카소와 제임스 조이스, 브라사이와 만 레이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이런 영광과 순수함을 다시는 되찾지 못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이 모든 것이 1920년대에 언급되었다는 사실을 그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성공의 결과로서 한 구역이 파괴되는 것을 지켜본 사람은, 앞에서 보았듯이 1924년에 브르통과 아라공이 “몽마르트르와 몽파르나스가 싫어서” 그들의 근거지를 한물간 오페라 통행로의 카페 세르타로 옮기게 된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 p.271
어떤 이들에게 구트도르(앙리 4세가 좋아했던 백포도주 이름이다) 구역은 몽마르트르의 일부분이다. 그 이유는 구트도르가 최근 조성된 바르베스 대로를 제외하고는 끊기지 않고 언덕 동쪽을 따라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지형 차이가 뚜렷한 두 구역을 하나로 묶는 충분한 이유가 될 수는 없다. 두 구역은 그 조성 방식도 다르다. 몽마르트르의 거리는 언덕의 등고선과 평행해서 이 거리들을 연결하려면 노래 가사1에도 나오듯 가난한 사람들에게 힘들기로 유명한 계단을 조성해야 했다. 구트도르의 거리들은 대개 십자형으로 교차한다. 그 결과 거리의 경사는 한층 완만하고, 평면과 단면은 훨씬 다양하고, 모퉁이는 급격하게 휜다. 가로지르는 건물들은 높고 낮은 거리를 따라 서 있고, 안마당은 길고 좁다.
--- p.324
전염병은 죽음에 있어 사회적 불평등을 절실히 느끼게 해주었다. 쥘 자냉은 “제일 먼저 그리고 오로지 하층민만 죽음으로 내모는 이 전염병은 반세기 전부터 전파된 평등의 신념에 대한 피비린내 나는 기막힌 반박이다”라고 주장했다. 증오가 거리에 넘쳤다. 부르주아들은 가난한 자들이 재앙을 불러왔고 확산시켰다고 비난했다.
--- p.415
도시의 밤을 처음 홀로 탐험한 선구자들의 후예로는 빌리에, 위스망스, 아폴리네르, 브르통 등이 있다. 이들 가운데 어떤 이는 루소보다 레티프를 뽑을 것이고, 어떤 이는 초현실주의 소리를 들은 사람 가운데 네르발을 넣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어둡고 정적에 싸인, 그리고 여전히 자연의 감성이 밴 파리에서 1830년대에는 또 다른 구역이 새롭게 떠올랐다.
--- p.525
『악의 꽃』을 헌정받은, 가장 신랄한 비평가 중 한 명이었던 테오필 고티에는 이렇게 정리했다. “「올랭피아」는 어떤 관점으로도 설명할 수 없다. 침대 위에 누운 깡마른 모델 역시 어떤 관점으로도 설명할 수 없다. 피부색은 칙칙하고 형편없이 묘사되었다. 명암 대비는 상대적으로 변화가 많은 광택의 번짐으로 표현되었다. 종이로 싼 꽃다발을 들고 있는 흑인 하녀와 침대에 더러운 발자국을 남긴 검은 고양이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무엇을 의미하는가?” 고티에는 공쿠르 형제와 아주 가까웠다.
--- p.28
프랑수아 비용의 시대 이래 젊은이들의 구역이었던 라탱은 좋았던 옛 시절에 대한 향수 그 이상을 의미한다. 물론 이런 감정을 불편해할 사람도 있겠지만 1850년과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사이에 라탱 구역에 있던 카페들이 갖고 있던 유쾌함, 다양성, 풍성함을 어떻게 아쉬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비록 그 구역의 카페들의 외관을 대로변에 있는 환상적인 카페들의 모습과 절대 비교할 수 없지만, 분위기는 비슷했다. 어떤 카페들은 상당히 정치적이었다. 발레스는 『르 바슐리에Le Bachelier』에서 1850년 카페 보트 유니베르셀에는 “이른바 6월 봉기 참가자, 둘랑스 감옥의 죄수, 생메리 폭동의 주모자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라고 묘사했다.
--- p.151
그로부터 한 세기 후, 빅토르 푸르넬에게 있어 샹젤리제는 “즐거운 가락이 물결을 이루는 파리의 중심으로, 여름이면 사람들로 넘쳤다. 에투알의 원형 교차로에서 콩코르드 광장까지 가는 발걸음마다 곳곳에서 연가, 짧은 형식의 노래, 잘 알려진 아리아, 오페라의 서곡 등이 폭죽처럼 울려 퍼졌다”.
--- p.193
1914년 이후 몽파르나스는 모딜리아니, 중절모를 쓴 파스킨, 키키, 피카소와 제임스 조이스, 브라사이와 만 레이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이런 영광과 순수함을 다시는 되찾지 못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이 모든 것이 1920년대에 언급되었다는 사실을 그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성공의 결과로서 한 구역이 파괴되는 것을 지켜본 사람은, 앞에서 보았듯이 1924년에 브르통과 아라공이 “몽마르트르와 몽파르나스가 싫어서” 그들의 근거지를 한물간 오페라 통행로의 카페 세르타로 옮기게 된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 p.271
어떤 이들에게 구트도르(앙리 4세가 좋아했던 백포도주 이름이다) 구역은 몽마르트르의 일부분이다. 그 이유는 구트도르가 최근 조성된 바르베스 대로를 제외하고는 끊기지 않고 언덕 동쪽을 따라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지형 차이가 뚜렷한 두 구역을 하나로 묶는 충분한 이유가 될 수는 없다. 두 구역은 그 조성 방식도 다르다. 몽마르트르의 거리는 언덕의 등고선과 평행해서 이 거리들을 연결하려면 노래 가사1에도 나오듯 가난한 사람들에게 힘들기로 유명한 계단을 조성해야 했다. 구트도르의 거리들은 대개 십자형으로 교차한다. 그 결과 거리의 경사는 한층 완만하고, 평면과 단면은 훨씬 다양하고, 모퉁이는 급격하게 휜다. 가로지르는 건물들은 높고 낮은 거리를 따라 서 있고, 안마당은 길고 좁다.
--- p.324
전염병은 죽음에 있어 사회적 불평등을 절실히 느끼게 해주었다. 쥘 자냉은 “제일 먼저 그리고 오로지 하층민만 죽음으로 내모는 이 전염병은 반세기 전부터 전파된 평등의 신념에 대한 피비린내 나는 기막힌 반박이다”라고 주장했다. 증오가 거리에 넘쳤다. 부르주아들은 가난한 자들이 재앙을 불러왔고 확산시켰다고 비난했다.
--- p.415
도시의 밤을 처음 홀로 탐험한 선구자들의 후예로는 빌리에, 위스망스, 아폴리네르, 브르통 등이 있다. 이들 가운데 어떤 이는 루소보다 레티프를 뽑을 것이고, 어떤 이는 초현실주의 소리를 들은 사람 가운데 네르발을 넣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어둡고 정적에 싸인, 그리고 여전히 자연의 감성이 밴 파리에서 1830년대에는 또 다른 구역이 새롭게 떠올랐다.
--- p.525
『악의 꽃』을 헌정받은, 가장 신랄한 비평가 중 한 명이었던 테오필 고티에는 이렇게 정리했다. “「올랭피아」는 어떤 관점으로도 설명할 수 없다. 침대 위에 누운 깡마른 모델 역시 어떤 관점으로도 설명할 수 없다. 피부색은 칙칙하고 형편없이 묘사되었다. 명암 대비는 상대적으로 변화가 많은 광택의 번짐으로 표현되었다. 종이로 싼 꽃다발을 들고 있는 흑인 하녀와 침대에 더러운 발자국을 남긴 검은 고양이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무엇을 의미하는가?” 고티에는 공쿠르 형제와 아주 가까웠다.
--- p.585
출판사 리뷰
수많은 예술인이 사랑한 도시의 장엄한 성장기
발자크, 보들레르, 졸라, 드가 등 많은 예술인이 경도된 도시 파리. 그렇기에 파리는 도시이기 이전에 독자적인 중력을 갖는 하나의 행성 같다. 다양한 성벽을, 대로를, 정원을, 광장을 품고 또 버리며 현재의 경계를 구축하게 된 파리는 그 과정에서 자유와 혁명의 정신을, 행동하는 군중과 사색하는 개인을 길러냈다. 책을 통해 우리는 상점이 늘어선 샹젤리제와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몽마르트르, 마레 등 익히 알려진 현재의 파리를 배반하고 과거 에방질 구역의 불결한 오물 위를 걷거나 전제 군주 타도를 외치는 구호 곁을 지나게 된다. 우리는 그곳에서 귀족이자 병사이자 시민이며, 시인이자 화가이자 산책자가 된다.
행동적이고도 정신적인 이 도시가 군주에 의해, 사상가에 의해, 시민에 의해 부서지고 피어난 장대한 역사를 한 권에 담았다. 루이 14세 때 건설된 대로에 자리 잡은 파리는 각이 다소 무딘 사각 형태로, 당시에도 인구 밀도가 높은 중세의 도시였다. 과거의 파리는 빅토르 위고가 ‘위험’ ‘어두움’ ‘음산함’이란 단어로 표현한 것처럼 현대의 우리가 아는 화려한 미감의 도시와는 사뭇 다른 곳이었다. 좁고 오래된 거리들이 뒤엉키고 도시의 오물이 도시의 다른 한편에 버려지던 그곳이 걷는 것만으로도 최상의 관광이 되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로를 갖게 된 과정을 담은 기록은 그 자체로 한 개인의 성장기만큼이나 생동적이다.
샤를 5세부터 앙리 4세, 루이 14세 등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왕들의 흔적은 권력의 모습으로 현재 파리 곳곳에 뚜렷이 남아 있다. 저자인 에리크 아장은 그 흔적을 문학작품과 회화, 사진을 통해 뒤쫓는다. 상티에 구역의 클레리 거리와 아부키르 거리는 샤를 5세 시대에 만든 성곽 길을 따라 조성되어 있으며, 루아얄 거리(현재 비라그) 끝의 루아얄 정자와 파크루아얄 거리 끝의 렌 정자는 “파리에서 여러 해를 보내며 진정한 파리 사람으로 지낼 것”이라며 파리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 앙리 4세의 의지로 만들어졌다. 에티엔마르셀 거리가 시작되는 지점의 두 건물 역시 루이 14세 시대 건축물이 지닌 규칙적인 리듬과 비율을 뛰어나게 재현했다.
자유, 평등, 박애의 정신이 태어난 곳인 만큼 권력의 흔적만큼이나 봉기의 흔적도 분명히 남아 있다. “1827년 11월 며칠간 밤의 바리케이드와 1871년 파리 코뮌 70일간 대낮의 바리케이드 사이에 50년이 흐르는 동안 파리에서 일어난 시위, 폭동, 급습, 봉기, 반란의 목록은 너무 길어서 유럽의 어떤 수도도 파리에 필적하지 못한다. 파리의 모든 구역에서 일어난 반란은 산업혁명, 사장과 노동자의 새로운 관계, 성실한 동시에 위험한 노동자들의 외곽 이주, 파리를 “전략적으로 정비한” 대규모 공사의 전개와 맞물린다. 반란이 있을 때마다 똑같은 거리와 구역들의 이름이 시대를 가로질러 끊임없이 되풀이되지만 단절과 가속을 거치며 혁명의 파리 중심은 천천히 북쪽과 동쪽으로 옮겨갔다. 이런 변화의 단절과 가속은, 현재는 부정적인 시선으로 평가받는 옛 개념인 계급투쟁이라는 흔적을 파리의 지도에 남겼다.“(407)
도시가 커진다는 뜻은 사람도 돈도 그만큼 많이 흘러들어온다는 것을 뜻한다. 동시에 인구와 자본의 팽창은 곧 갈등의 확대를 뜻한다. 파리가 커지면서 길 찾기는 더 어려워졌고, 18세기 말 쇼데를로 드 라클로는 “나는 이 큰 도시의 모든 주민이 길을 찾고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각자 자신이 가고자 하는 곳으로 갈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있도록 말이다”고 말하며 거리에 지번을 매기는 체계를 고안했다. 그러나 이 같은 ‘평등한 방식의 도시 정비’에 불만을 품는 집단이 있었으니 이른바 민중과 엄격히 구분되길 바랐던 브루주아지였다. 그들은 마차가 드나드는 귀족의 화려한 건물이 평민들의 초라한 상점 다음에야 등록될 것을 우려하며, 지번 매기기가 오랫동안 주의를 기울여 행해놓은 계급 구분에 평등의 분위기를 각인시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모습을 볼 때 독자는 과거 파리에서 우리가 사는 도시의 현존을 발견할 수 있다.
『가디언』은 이 책에 대해 “집 안에서 훌륭한 지도와 함께 볼 수 있는, 관광객들이 성가시게 하지 않는 지역들을 돌아다니며 여행할 수 있는 책”이라고 평했다. 외젠 아제의 사진, 오노레 도미에, 피에르 보나르의 석판화 등 다양한 예술가의 도판과 파리의 모든 대로와 구역, 작은 마을을 소외됨 없이 챙기는 저자의 신중함이 낳은 묵직한 볼륨은 소장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파리를 가장 자세히, 동시에 가장 쉽게 알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길이 여기에 있다.
발자크, 보들레르, 졸라, 드가 등 많은 예술인이 경도된 도시 파리. 그렇기에 파리는 도시이기 이전에 독자적인 중력을 갖는 하나의 행성 같다. 다양한 성벽을, 대로를, 정원을, 광장을 품고 또 버리며 현재의 경계를 구축하게 된 파리는 그 과정에서 자유와 혁명의 정신을, 행동하는 군중과 사색하는 개인을 길러냈다. 책을 통해 우리는 상점이 늘어선 샹젤리제와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몽마르트르, 마레 등 익히 알려진 현재의 파리를 배반하고 과거 에방질 구역의 불결한 오물 위를 걷거나 전제 군주 타도를 외치는 구호 곁을 지나게 된다. 우리는 그곳에서 귀족이자 병사이자 시민이며, 시인이자 화가이자 산책자가 된다.
행동적이고도 정신적인 이 도시가 군주에 의해, 사상가에 의해, 시민에 의해 부서지고 피어난 장대한 역사를 한 권에 담았다. 루이 14세 때 건설된 대로에 자리 잡은 파리는 각이 다소 무딘 사각 형태로, 당시에도 인구 밀도가 높은 중세의 도시였다. 과거의 파리는 빅토르 위고가 ‘위험’ ‘어두움’ ‘음산함’이란 단어로 표현한 것처럼 현대의 우리가 아는 화려한 미감의 도시와는 사뭇 다른 곳이었다. 좁고 오래된 거리들이 뒤엉키고 도시의 오물이 도시의 다른 한편에 버려지던 그곳이 걷는 것만으로도 최상의 관광이 되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로를 갖게 된 과정을 담은 기록은 그 자체로 한 개인의 성장기만큼이나 생동적이다.
샤를 5세부터 앙리 4세, 루이 14세 등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왕들의 흔적은 권력의 모습으로 현재 파리 곳곳에 뚜렷이 남아 있다. 저자인 에리크 아장은 그 흔적을 문학작품과 회화, 사진을 통해 뒤쫓는다. 상티에 구역의 클레리 거리와 아부키르 거리는 샤를 5세 시대에 만든 성곽 길을 따라 조성되어 있으며, 루아얄 거리(현재 비라그) 끝의 루아얄 정자와 파크루아얄 거리 끝의 렌 정자는 “파리에서 여러 해를 보내며 진정한 파리 사람으로 지낼 것”이라며 파리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 앙리 4세의 의지로 만들어졌다. 에티엔마르셀 거리가 시작되는 지점의 두 건물 역시 루이 14세 시대 건축물이 지닌 규칙적인 리듬과 비율을 뛰어나게 재현했다.
자유, 평등, 박애의 정신이 태어난 곳인 만큼 권력의 흔적만큼이나 봉기의 흔적도 분명히 남아 있다. “1827년 11월 며칠간 밤의 바리케이드와 1871년 파리 코뮌 70일간 대낮의 바리케이드 사이에 50년이 흐르는 동안 파리에서 일어난 시위, 폭동, 급습, 봉기, 반란의 목록은 너무 길어서 유럽의 어떤 수도도 파리에 필적하지 못한다. 파리의 모든 구역에서 일어난 반란은 산업혁명, 사장과 노동자의 새로운 관계, 성실한 동시에 위험한 노동자들의 외곽 이주, 파리를 “전략적으로 정비한” 대규모 공사의 전개와 맞물린다. 반란이 있을 때마다 똑같은 거리와 구역들의 이름이 시대를 가로질러 끊임없이 되풀이되지만 단절과 가속을 거치며 혁명의 파리 중심은 천천히 북쪽과 동쪽으로 옮겨갔다. 이런 변화의 단절과 가속은, 현재는 부정적인 시선으로 평가받는 옛 개념인 계급투쟁이라는 흔적을 파리의 지도에 남겼다.“(407)
도시가 커진다는 뜻은 사람도 돈도 그만큼 많이 흘러들어온다는 것을 뜻한다. 동시에 인구와 자본의 팽창은 곧 갈등의 확대를 뜻한다. 파리가 커지면서 길 찾기는 더 어려워졌고, 18세기 말 쇼데를로 드 라클로는 “나는 이 큰 도시의 모든 주민이 길을 찾고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각자 자신이 가고자 하는 곳으로 갈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있도록 말이다”고 말하며 거리에 지번을 매기는 체계를 고안했다. 그러나 이 같은 ‘평등한 방식의 도시 정비’에 불만을 품는 집단이 있었으니 이른바 민중과 엄격히 구분되길 바랐던 브루주아지였다. 그들은 마차가 드나드는 귀족의 화려한 건물이 평민들의 초라한 상점 다음에야 등록될 것을 우려하며, 지번 매기기가 오랫동안 주의를 기울여 행해놓은 계급 구분에 평등의 분위기를 각인시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모습을 볼 때 독자는 과거 파리에서 우리가 사는 도시의 현존을 발견할 수 있다.
『가디언』은 이 책에 대해 “집 안에서 훌륭한 지도와 함께 볼 수 있는, 관광객들이 성가시게 하지 않는 지역들을 돌아다니며 여행할 수 있는 책”이라고 평했다. 외젠 아제의 사진, 오노레 도미에, 피에르 보나르의 석판화 등 다양한 예술가의 도판과 파리의 모든 대로와 구역, 작은 마을을 소외됨 없이 챙기는 저자의 신중함이 낳은 묵직한 볼륨은 소장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파리를 가장 자세히, 동시에 가장 쉽게 알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길이 여기에 있다.
추천평
수도를 활보하는 아장은 19세기와 20세기의 예쑬적, 정치적 반란을 극적으로 표현해낸다.
- 북포럼
- 북포럼
아장은 발자크, 위고, 보들레르, 카프카가 특정 장소에 대해 말한 것을 인용하고 한때 바리케이드가 세워지고 도둑들이 술 마시던 곳을 가리키며 파리의 거리를 터벅터벅 걸어다닌다.
- 파이낸셜타임스
- 파이낸셜타임스
거부할 수 없는 책. 도시의 분쟁과 정치적 태도의 역사에 대한 아장의 자세한 설명은 독자를 사로잡는다.
- 퍼블리셔스위클리
- 퍼블리셔스위클리
'27.세계국가의 이해 (독서>책소개) > 2.영국역사문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산업혁명 1760-1830 (2020) (1) | 2024.07.10 |
---|---|
18세기 영국 산업혁명 강의(2022) (0) | 2024.07.10 |
영국 해군 지배력의 역사 (2010) (0) | 2024.05.05 |
나의 영국 인문 기행 (2019) (0) | 2024.01.10 |
옥스퍼드 초엘리트 - 영국을 지배하는 이너서클의 습관, 약점, 그리고 악행 (2024) (0) | 2023.12.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