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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제2차 세계대전 때 대서양 전투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되는 덴마크 해협 해전과 비스마르크의 침몰로 막을 내린 추격전까지 9일간의 긴박한 과정을 설명한 책. 비스마르크의 건조 계획이 시작된 때부터 비스마르크가 주축이 된 라인위붕 작전이 전개된 배경, 독일과 영국 해군 간의 치열한 정보전, 바다와 공중에서 펼쳐진 공격 전개 양상과 마침내 두 나라 해군의 상징인 비스마르크와 후드가 침몰하기까지의 전황을 상세하게 서술한다. 또한 지은이는 이 전투에서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결국 바닷속으로 가라앉은 수천 명의 군인들에게도 초점을 맞춘다. 적군과 아군, 어느 쪽이 승리하든 그것은 이들의 희생에 기반해 있기 때문이다.
목차
프롤로그
시간, 속력, 거리와 방위에 관해
머리말
제1장 전함 비스마르크
제2장 독일의 대서양 전략
제3장 본국 함대
제4장 준비
제5장 발트해 통과
제6장 노르웨이에 머물다
제7장 뤼첸스의 한 수, 토비의 맞대응
제8장 덴마크 해협
제9장 새벽의 결투
제10장 후드 폭침
제11장 대서양으로
제12장 비스마르크 사냥
제13장 항공 공격
제14장 밤의 구축함
제15장 마지막 전투
시간, 속력, 거리와 방위에 관해
머리말
제1장 전함 비스마르크
제2장 독일의 대서양 전략
제3장 본국 함대
제4장 준비
제5장 발트해 통과
제6장 노르웨이에 머물다
제7장 뤼첸스의 한 수, 토비의 맞대응
제8장 덴마크 해협
제9장 새벽의 결투
제10장 후드 폭침
제11장 대서양으로
제12장 비스마르크 사냥
제13장 항공 공격
제14장 밤의 구축함
제15장 마지막 전투
책 속으로
1939년 성 밸런타인데이, 9번 선가대 주변에 세워진 플랫폼에 마련된 좌석에 선별된 내빈 다수가 앉았다. 많은 조선소 노동자들이 배경을 이루었다. 모두 합쳐 6만 명이 행사를 지켜보았다. 정오가 되자 독일 총통 아돌프 히틀러가 함부르크의 고급 호텔인 호텔 아틀란틱을 떠나 요트에 탑승했다. 히틀러를 태운 요트는 강을 건너 조선소에 도착했다. 나치 당·정·군 핵심 관계자들은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도착한 히틀러가 연단에 올랐고, 13시에 진수식이 시작되었다. 히틀러는 짧은 연설에서 전함 ‘F’에 위대한 독일 정치인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이름을 따서 명명할 것이라고 처음으로 밝혔다. 철혈 재상의 손녀 도로테 폰 뢰벤펠트-비스마르크가 히틀러와 나란히 섰다. 폰 뢰벤펠트-비스마르크 부인은 유명한 조부의 이름을 따서 이 전함을 비스마르크라 명명하고 절차에 따라 스파클링 와인 한 병을 함수에 부딪혀 깼다.
--- p.31~32
영국과 프랑스와의 해상전에 관해 말하자면, 독일 해군은 제한된 자원을 넓은 전선에 투입해야 하고 영국은 해상 교통로에 모든 자원을 의지해야 했다. 따라서 제1차 세계대전 때처럼 통상파괴전을 수행하면 의미 있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었다. 해군최고사령부는 이전 전쟁에서는 독일 주력함대가 북해 수역에 갇혀 있다시피 했으나, 이번 전쟁에서는 대형 함선이 대서양에서 작전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 p.44
패퍼드는 해군성 정보부가 전날 스톡홀름에서 데넘 대령이 보낸 전문을 토비에게 전해 왔다고 말했다. 독일 대형 함선 두 척이 카테가트 해협을 통과해 북서쪽을 향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브린드는 해도를 쳐다볼 필요도 없이 이 소식이 얼마나 중요한지 바로 파악했다. 사령관실의 문을 두들겼을 때 브린드는 두 함선의 정체와 목적지를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이미 생각해 둔 상태였다.
--- p.130
아무것도 없는 바다와 하늘을 보느라 지루해지던 뉴얼은 빈 수평선을 한 번 더 훑은 다음 19시 22분에 쌍안경을 무릎에 내려놓고 눈을 비볐다. 눈을 다시 뜨자 무엇인가가 보였다. 안개로 가득한 수평선에서 배 한 척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 뒤로 또 한 척이 보였다. 뉴얼은 즉시 당직장교를 불렀다. “방위, 녹색 하나 넷 공, 두 척입니다!” 함교의 승조원들은 뉴얼이 말한 물체를 보기 위해 서퍽의 우현 함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진저 뉴얼이 비스마르크를 포착한 것이다.
--- p.157
이제 양측 모두 서로를 포착했다. 아직 15해리(28km) 정도 떨어져 있었으므로 어느 쪽도 적함의 정체를 구체적으로 알 수 없었지만 최소한 영국 측은 자신들이 비스마르크와 프린츠 오이겐을 상대하고 있음을 알았다. 이와 대조적으로 적함 두 척의 등장은 독일군에게는 완전히 뜻밖의 상황이었다. 비스마르크보다 1.4해리(2.6km) 앞선 프린츠 오이겐에서는 영국 함선이 더 잘 보였는데, 처음에 브린크만 함장은 이들이 적 경순양함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05시 32분에 뤼첸스 제독에게 신호했을 때 함장은 적함 함종을 경순양함 추정으로 보고했다.
--- p.177
후드에서는 재앙의 전모가 바로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당시 후드 승조원 윌리엄 던다스 소위후보생은 이렇게 회상했다. “우리를 끝장낸 건 비스마르크의 다섯 번째 일제사격이었습니다. 파편이 비처럼 쏟아졌고 좌현에서 대량의 갈색 연기가 바람이 부는 쪽으로 흘러가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배 전체가 흔들리는 듯하더니 우현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 p.193
사실 비스마르크의 문제 중 타기는 가장 작은 것일 뿐이었다. 어뢰가 폭발하면서 좌현 키가 거의 싹둑 잘려 버려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동시에 우현 키가 폭발로 인해 앞쪽으로 휘어져 가운데 프로펠러에 끼어 버리는 바람에 키와 프로펠러가 꼼짝달싹하지 않았다. 생나제르의 드라이독에서나 고칠 수 있는 손상이었으나 그곳까지 갈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 p.268
자정 직전, 뤼첸스는 베를린으로 전문을 보냈다. 비스마르크와 승조원은 마지막 한 사람까지 싸울 것이며 “총통에 대한 믿음과 독일이 승리하리라는 굳은 신념”은 변함없다는 내용이었다. 여기에 린데만은 덜 비관적으로 들리는 다음 내용을 추가했다. “기관과 무장은 아직 이상 무. 하지만 배는 엔진으로만 조타할 수 없음.” 이제 독일 해군최고사령부는 진짜 심각한 문제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린데만은 지푸라기에 매달려 있었다. 새벽녘에 유보트와 공군이 호위망을 펴서 안전하게 항구에 도달하리라는 실낱같은 희망이었다.
--- p.279~280
전투가 시작된 지 45분도 지나지 않아 비스마르크는 떠다니는 고철 더미가 되었다. 놀랍게도 함의 상부 구조물은 무너지고 얽힌 강철 무더기로 변했고 갑판은 불길에 휩싸여 있었으나, 장갑 벨트가 적의 포탄에 입을 수 있는 최악의 손실만은 막아 주었다. 다시 말해 비스마르크는 싸울 수는 없었으나 계속 물 위에 떠 있을 수는 있었다. 영국군의 포탄은 비스마르크를 마구 때려 댔지만 격침할 수는 없어 보였다. 하지만 포탄은 계속 비스마르크를 타격했다. 1분마다 여러 발이 떨어졌다. 학살극이 계속 이어졌다.
--- p.293
라인위붕 작전 뒤 독일 해군은 대서양에서 수상함 작전을 피했고, 유보트에 의존해 영국 호송선단을 교란했다. 그러나 대서양 전투로 알려진 이 전투에서 큰 손실을 겪었음에도 영국의 생명이 달린 해상교통로는 단절되지 않았다. 미국의 참전과 호위함 및 비행기의 증가가 전황을 뒤집는 데 일조했고, 독일 해군은 결국 공세적 잠수함 작전을 취소해야 했다. 비스마르크의 자매함 티르피츠는 연합군에 잠재적 위협으로 남았고, 노르웨이 수역에서 티르피츠의 존재 때문에 본국 함대는 북극해 호송선단을 보호하기 위해 주력함들을 붙들어 두어야 했다. 티르피츠는 결국 1944년 11월에 트롬쇠 근해에서 영국 공군 랭커스터 폭격기에 격침되었다. 그때쯤 독일 해군의 전력은 소진된 상황이었고 연합군의 전쟁 노력에 심각한 위협을 가하기에는 수상함정, 유보트, 심지어 연료까지 부족했다. 결국 라인위붕 작전은 독일 해군이 마지막으로 크게 부른 백조의 노래였다.
--- p.31~32
영국과 프랑스와의 해상전에 관해 말하자면, 독일 해군은 제한된 자원을 넓은 전선에 투입해야 하고 영국은 해상 교통로에 모든 자원을 의지해야 했다. 따라서 제1차 세계대전 때처럼 통상파괴전을 수행하면 의미 있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었다. 해군최고사령부는 이전 전쟁에서는 독일 주력함대가 북해 수역에 갇혀 있다시피 했으나, 이번 전쟁에서는 대형 함선이 대서양에서 작전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 p.44
패퍼드는 해군성 정보부가 전날 스톡홀름에서 데넘 대령이 보낸 전문을 토비에게 전해 왔다고 말했다. 독일 대형 함선 두 척이 카테가트 해협을 통과해 북서쪽을 향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브린드는 해도를 쳐다볼 필요도 없이 이 소식이 얼마나 중요한지 바로 파악했다. 사령관실의 문을 두들겼을 때 브린드는 두 함선의 정체와 목적지를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이미 생각해 둔 상태였다.
--- p.130
아무것도 없는 바다와 하늘을 보느라 지루해지던 뉴얼은 빈 수평선을 한 번 더 훑은 다음 19시 22분에 쌍안경을 무릎에 내려놓고 눈을 비볐다. 눈을 다시 뜨자 무엇인가가 보였다. 안개로 가득한 수평선에서 배 한 척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 뒤로 또 한 척이 보였다. 뉴얼은 즉시 당직장교를 불렀다. “방위, 녹색 하나 넷 공, 두 척입니다!” 함교의 승조원들은 뉴얼이 말한 물체를 보기 위해 서퍽의 우현 함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진저 뉴얼이 비스마르크를 포착한 것이다.
--- p.157
이제 양측 모두 서로를 포착했다. 아직 15해리(28km) 정도 떨어져 있었으므로 어느 쪽도 적함의 정체를 구체적으로 알 수 없었지만 최소한 영국 측은 자신들이 비스마르크와 프린츠 오이겐을 상대하고 있음을 알았다. 이와 대조적으로 적함 두 척의 등장은 독일군에게는 완전히 뜻밖의 상황이었다. 비스마르크보다 1.4해리(2.6km) 앞선 프린츠 오이겐에서는 영국 함선이 더 잘 보였는데, 처음에 브린크만 함장은 이들이 적 경순양함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05시 32분에 뤼첸스 제독에게 신호했을 때 함장은 적함 함종을 경순양함 추정으로 보고했다.
--- p.177
후드에서는 재앙의 전모가 바로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당시 후드 승조원 윌리엄 던다스 소위후보생은 이렇게 회상했다. “우리를 끝장낸 건 비스마르크의 다섯 번째 일제사격이었습니다. 파편이 비처럼 쏟아졌고 좌현에서 대량의 갈색 연기가 바람이 부는 쪽으로 흘러가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배 전체가 흔들리는 듯하더니 우현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 p.193
사실 비스마르크의 문제 중 타기는 가장 작은 것일 뿐이었다. 어뢰가 폭발하면서 좌현 키가 거의 싹둑 잘려 버려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동시에 우현 키가 폭발로 인해 앞쪽으로 휘어져 가운데 프로펠러에 끼어 버리는 바람에 키와 프로펠러가 꼼짝달싹하지 않았다. 생나제르의 드라이독에서나 고칠 수 있는 손상이었으나 그곳까지 갈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 p.268
자정 직전, 뤼첸스는 베를린으로 전문을 보냈다. 비스마르크와 승조원은 마지막 한 사람까지 싸울 것이며 “총통에 대한 믿음과 독일이 승리하리라는 굳은 신념”은 변함없다는 내용이었다. 여기에 린데만은 덜 비관적으로 들리는 다음 내용을 추가했다. “기관과 무장은 아직 이상 무. 하지만 배는 엔진으로만 조타할 수 없음.” 이제 독일 해군최고사령부는 진짜 심각한 문제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린데만은 지푸라기에 매달려 있었다. 새벽녘에 유보트와 공군이 호위망을 펴서 안전하게 항구에 도달하리라는 실낱같은 희망이었다.
--- p.279~280
전투가 시작된 지 45분도 지나지 않아 비스마르크는 떠다니는 고철 더미가 되었다. 놀랍게도 함의 상부 구조물은 무너지고 얽힌 강철 무더기로 변했고 갑판은 불길에 휩싸여 있었으나, 장갑 벨트가 적의 포탄에 입을 수 있는 최악의 손실만은 막아 주었다. 다시 말해 비스마르크는 싸울 수는 없었으나 계속 물 위에 떠 있을 수는 있었다. 영국군의 포탄은 비스마르크를 마구 때려 댔지만 격침할 수는 없어 보였다. 하지만 포탄은 계속 비스마르크를 타격했다. 1분마다 여러 발이 떨어졌다. 학살극이 계속 이어졌다.
--- p.293
라인위붕 작전 뒤 독일 해군은 대서양에서 수상함 작전을 피했고, 유보트에 의존해 영국 호송선단을 교란했다. 그러나 대서양 전투로 알려진 이 전투에서 큰 손실을 겪었음에도 영국의 생명이 달린 해상교통로는 단절되지 않았다. 미국의 참전과 호위함 및 비행기의 증가가 전황을 뒤집는 데 일조했고, 독일 해군은 결국 공세적 잠수함 작전을 취소해야 했다. 비스마르크의 자매함 티르피츠는 연합군에 잠재적 위협으로 남았고, 노르웨이 수역에서 티르피츠의 존재 때문에 본국 함대는 북극해 호송선단을 보호하기 위해 주력함들을 붙들어 두어야 했다. 티르피츠는 결국 1944년 11월에 트롬쇠 근해에서 영국 공군 랭커스터 폭격기에 격침되었다. 그때쯤 독일 해군의 전력은 소진된 상황이었고 연합군의 전쟁 노력에 심각한 위협을 가하기에는 수상함정, 유보트, 심지어 연료까지 부족했다. 결국 라인위붕 작전은 독일 해군이 마지막으로 크게 부른 백조의 노래였다.
--- p.301
출판사 리뷰
사상 최대의 해전으로 불리는 대서양 전투, 그 한가운데에서 벌어진 비스마르크 추격전
단 9일 동안 덴마크 해협과 북대서양에서 전개된 치열한 공방전,
3,500명 이상의 승조원이 목숨을 잃고, 독일과 영국의 두 강철 전함이
4,700여 미터 해저로 침몰한 비극적 결말까지
해전사에 극적인 싸움으로 기록된 비스마르크 추격전의 전모를 밝힌다
1939년 독일 해군(크릭스마리네)은 잠수함 유보트를 앞세워 영국과 미국의 호송선단을 공격하여 영국을 궁지로 몰고 갔지만 수상함은 영국 해군(로열 네이비)과 미 해군 연합군을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했다. 1930년대 중반부터 현대적 전함의 건조 계획을 세운 독일은 길고도 복잡한 건조 과정을 거쳐 마침내 1939년, 위대한 정치인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이름을 딴 ‘비스마르크’ 전함의 진수식을 갖는다. 비록 영국이나 미국의 전함에 비해 월등히 크거나 화력이 우세하지는 않았지만, 비스마르크는 결코 만만히 볼 수 없는 전함이었다. 당시 조건에서 최대한 크게 제작했을뿐더러 방어력과 화력, 속력의 세 요소가 거의 완벽한 균형을 이루었다.
섬나라인 영국은 대서양을 통해 미국과 캐나다에서 물자를 수송받았다. 대서양을 횡단해 물자를 나르는 호송선단은 거대한 컨베이어 벨트나 다름 없었다. 만약 이곳이 단절된다면 영국은 고립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점을 잘 아는 독일은 유보트로 공격해 영국의 물자 수송을 교란했다. 1940~1941년 초에 함선으로 통상파괴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자 독일 해군은 신예 전함 비스마르크를 중심으로 이 컨베이어 벨트에 복구 불가능한 타격을 입히고, 더 나아가 북대서양 해역에서 일시적으로 제해권을 획득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작전을 구상한다. 이른바 ‘라인위붕 작전’이다.
1941년 5월 18일, 비스마르크와 프린츠 오이겐은 고텐하펜(현재 폴란드 그디니아)을 출발했다. 통상적인 훈련을 시행하는 척하며 덴마크와 스웨덴 사이를 지나 노르웨이 베르겐까지 나아간 후 대서양으로 진출할 계획이었다. 스카게라크 해협을 무사히 통과할 무렵, 노르웨이 해안에 있던 한 청년이 독일 함선들을 목격했다. 레지스탕스 조직의 일원이었던 그는 즉각 이 상황을 보고했고, 얼마 후 영국 해군성에 정보가 들어갔다. 비스마르크 추격전의 시작이었다.
군사 전문가이자 역사학자인 작가가
객관적 시각으로 쓴 논픽션
서구에서는 대서양 전투와 비스마르크의 마지막 항해에 대한 책이 많이 출간되었지만 대부분 현대적 해군 전술이나 기술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이해하기 어려운 책이 많았다. 또는 추측이나 클리셰로 역사적 사실을 흐리거나 과거의 시각을 답습하곤 했다. 전직 해군 장교이자 해양 및 해군 역사 전문 작가인 지은이는 비스마르크 추격전의 전모를 전문적 시각으로 서술하면서도 일반인도 알기 쉽도록 설명하고, 곳곳에 지도를 배치해 독자의 이해를 도왔다. 또 이 전투에 참가한 양측 군인들의 이야기를 담아 전쟁의 인간적 측면을 놓치지 않았다. 우리나라에는 대서양 전투나 비스마르크 추격전과 관련한 책이 거의 없는 실정이다. 이 책은 대서양 전투라는 해전에 그리고 비스마르크 침몰이라는 극적 사건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최적의 입문서가 될 것이다.
단 9일 동안 덴마크 해협과 북대서양에서 전개된 치열한 공방전,
3,500명 이상의 승조원이 목숨을 잃고, 독일과 영국의 두 강철 전함이
4,700여 미터 해저로 침몰한 비극적 결말까지
해전사에 극적인 싸움으로 기록된 비스마르크 추격전의 전모를 밝힌다
1939년 독일 해군(크릭스마리네)은 잠수함 유보트를 앞세워 영국과 미국의 호송선단을 공격하여 영국을 궁지로 몰고 갔지만 수상함은 영국 해군(로열 네이비)과 미 해군 연합군을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했다. 1930년대 중반부터 현대적 전함의 건조 계획을 세운 독일은 길고도 복잡한 건조 과정을 거쳐 마침내 1939년, 위대한 정치인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이름을 딴 ‘비스마르크’ 전함의 진수식을 갖는다. 비록 영국이나 미국의 전함에 비해 월등히 크거나 화력이 우세하지는 않았지만, 비스마르크는 결코 만만히 볼 수 없는 전함이었다. 당시 조건에서 최대한 크게 제작했을뿐더러 방어력과 화력, 속력의 세 요소가 거의 완벽한 균형을 이루었다.
섬나라인 영국은 대서양을 통해 미국과 캐나다에서 물자를 수송받았다. 대서양을 횡단해 물자를 나르는 호송선단은 거대한 컨베이어 벨트나 다름 없었다. 만약 이곳이 단절된다면 영국은 고립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점을 잘 아는 독일은 유보트로 공격해 영국의 물자 수송을 교란했다. 1940~1941년 초에 함선으로 통상파괴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자 독일 해군은 신예 전함 비스마르크를 중심으로 이 컨베이어 벨트에 복구 불가능한 타격을 입히고, 더 나아가 북대서양 해역에서 일시적으로 제해권을 획득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작전을 구상한다. 이른바 ‘라인위붕 작전’이다.
1941년 5월 18일, 비스마르크와 프린츠 오이겐은 고텐하펜(현재 폴란드 그디니아)을 출발했다. 통상적인 훈련을 시행하는 척하며 덴마크와 스웨덴 사이를 지나 노르웨이 베르겐까지 나아간 후 대서양으로 진출할 계획이었다. 스카게라크 해협을 무사히 통과할 무렵, 노르웨이 해안에 있던 한 청년이 독일 함선들을 목격했다. 레지스탕스 조직의 일원이었던 그는 즉각 이 상황을 보고했고, 얼마 후 영국 해군성에 정보가 들어갔다. 비스마르크 추격전의 시작이었다.
군사 전문가이자 역사학자인 작가가
객관적 시각으로 쓴 논픽션
서구에서는 대서양 전투와 비스마르크의 마지막 항해에 대한 책이 많이 출간되었지만 대부분 현대적 해군 전술이나 기술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이해하기 어려운 책이 많았다. 또는 추측이나 클리셰로 역사적 사실을 흐리거나 과거의 시각을 답습하곤 했다. 전직 해군 장교이자 해양 및 해군 역사 전문 작가인 지은이는 비스마르크 추격전의 전모를 전문적 시각으로 서술하면서도 일반인도 알기 쉽도록 설명하고, 곳곳에 지도를 배치해 독자의 이해를 도왔다. 또 이 전투에 참가한 양측 군인들의 이야기를 담아 전쟁의 인간적 측면을 놓치지 않았다. 우리나라에는 대서양 전투나 비스마르크 추격전과 관련한 책이 거의 없는 실정이다. 이 책은 대서양 전투라는 해전에 그리고 비스마르크 침몰이라는 극적 사건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최적의 입문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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