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저메인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1839년 ~ 1866년 9월 5일)는 개신교 성직자로서는 처음으로 한반도에서 순교의 피를 흘린 선교사다. 한국 이름은 최난헌(崔蘭軒)이다.영국 웨일즈 출신이며 선교차 내한하였으나 제너럴셔먼호 사건에 엮여서 순교하고 말았다. 기독교 출신 역사가들의 주장에 의하면 토마스 선교사가 나누어준 성경을 읽고 많은 이들이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한다.
생애 / 어린 시절
웨일스 라예다에서 로버트 토마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토마스의 아버지 로버트 토마스 목사는 영국 회중교회의 사역자였다. 런던 대학교 뉴칼리지에서 대학과정과 신학과정을 마치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목회보다는 선교에 뜻을 두고 부인과 함께 런던 선교회(London Missionary Society, 倫敦傳道會)의 파송을 받고 1963년에 중국 청나라로 떠났다. 그러나 상하이에 도착후 부인 케더린은 동료 선교사의 사망 소식에 충격을 받고 유산한 뒤 사망하고 말았다. 아내를 잃은 슬픔에 빠져 있던중에 런던선교회 중국 지부장인 뮤어헤드의 사립학교 엥글로-차이니즈라는 학교의 교장을 맡아줄 것을 요청받았으나 거절했다. 지도부와도 뜻이 맞지 않아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산둥성 지푸로 가서 세관에 취직했다.
조선 선교
세관에서 일을 하던 중에 선교에 대한 열정이 다시 살아났는데, 이는 산둥에 주재하고 있던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소속 알렉산더 윌리엄슨의 영향 때문이었다. 또한 박해를 피해 산동성으로 피난 온 조선 천주교인을 만나 조선의 사정을 듣게 되었고 조선에 대한 선교의 뜻을 품게 되었다. 1865년, 조선으로 가는 배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세관에 사표를 낸 후 윌리엄슨이 제공한 여러권의 한문성경을 가지고 배에 승선했다.
1865년 가을에 황해도 연안에 도착한 토머스는 한문성경을 나누어주며 선교도 하고 천주교 신자들도 만나 한국어도 열심히 배웠다.[5] 약 두달 반 정도가 흐른 어느날 심한 폭풍에 휩쓸려 타고 온 배가 만주 해안으로 표류하게 되었고, 부득히 북경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북경에서는 런던 선교회 산하 학교에서 학장 서리로 일하게 되었는데, 이 당시 그의 관심은 온통 조선 선교에 있었다고 한다.
순교
병인박해로 프랑스 신부 9명이 순교하자 이를 항의하러 조선으로 떠나는 프랑스 함대에 통역관으로 합류하기로 했다. 그러나 프랑스 함대는 때마침 베트남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하자 계획이 무산되었다. 그 대신에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 호에 항해사 겸 통역으로 탑승하여 1866년 8월 9일에 다시 조선으로 향했다. 제너럴셔먼 호는 8월 14일에 충남 서해안에 도착하였다.
제너럴셔먼호는 8월 하순에 대동강으로 진입하며 통상을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했다. 조선 관리들은 서양과의 교역이 국법으로 금지된 것이므로 불가하니 돌아갈 것을 통보하였다. 그러나, 제너럴셔먼 호는 이에 불응한 후 대동강을 계속 거술러 올라가며 수로를 탐사하고 불법으로 평양시민들에게 선교를 하였다. 이런 서양인들의 행위를 조선 관리 이현익(李玄益)이 제지하자 그를 붙잡아 감금해 버렸다. 이 사실을 알게된 평양성 관민(官民)들이 크게 격분하여 강변으로 몰려들어 돌을 던지며 항의했다. 제너럴셔먼 호는 소총과 대포를 마구 쏘아 관민들을 죽거나 다치게 했고 사태가 점점 악화되었다.
8월 21일 경부터 큰 비가 계속 내려 대동강 수위가 높았으나 비가 그치고 수심이 얕아지자 제너럴셔먼 호는 9월 5일 모래톱에 좌초되고 말았다.이에 평안도 관찰사 박규수는 철산부사(鐵山府事) 백낙연(白樂淵) 등과 상의하여 화공전을 펼쳐 제너럴셔먼 호를 불태워 격침시켰다. 이로인해 승무원 23명 중 상당수가 불 타 죽었고 일부는 물에 뛰어들어 강변으로 헤엄쳐 나왔으나 관군의 칼과 총에 맞아 죽었다. 이때 통역관이었던 토마스 선교사는 조선 관군에 잡혀 강변으로 나왔으나 성난 관민들이 달려들며 휘두르는 몽둥이와 칼에 맞아 순교했다
순교의 영향
토마스 선교사는 개신교 선교사로서는 1832년에 조선 땅을 밟았던 카를 귀츨라프(Karl Gutxlaff)에 이어 두번째로 내한한 선교사였다. 그러나 개인 자격이 아니라 런던 선교회 소속 선교사로서 내한하였으므로 그에게는 개신교 선교사로서 최초라는 영예가 있다. 짧은 기간이지만 한문 성경을 배포하며 선교를 하였으며 끝내는 순교하였다. 일부 기독교 출신 역사가들의 주장이기는 하나 그의 순교의 피는 헛되지 않았다고 한다.
강변으로 올라온 토마스 선교사는 품에 있던 성경책을 대중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자신에게 칼을 휘두른 박춘권에게도 성경 한권을 나누어준 뒤 사망했다고 한다. 박춘권은 얼떨결에 받아들고 와서는 훗날 성경을 읽다가 개종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아울러 그 때에 토머스 선교사가 나누어준 성경을 읽고 개종한 기독교인들이 상당수가 존재한다고 한다.출처 위키피디아
약력
1840년 9월 7일 영국 웨일즈라드노주 라야다에서 회중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남
1857 ~ 1863년 5월 런던대학 뉴칼리지에서 학업
1863년 6월4일 고향인 하노버 교회에서 목사안수(24세)
1863년 8월 런던선교회 파송선교사로 아내와 함께 중국 상해 도착. 아내 캐롤라인 유산과 감염으로 사망
1865년 1 ~ 8월 청나라 해상세관 통역으로 근무
1865년 9월 세관 사임. 1차 한국 방문, 13일 서해안 도착, 두달 반동안 스코틀랜드 바이블 협회의 에이전트로 성경을 판매하며 포교.
1865년 10월 27일 태풍을 만나 Yung Chung이라는 곳으로 떠내려 감
1865년 10월 30일 연평도로 다시 돌아옴
1865년 11월 11일 조선을 떠남. 태풍만나 구사일생. 만주 거쳐 북경으로 돌아감
1866년 8월 9일 제너럴 셔먼호 동승, 2차 한국여행
1866년 9월 5일 경 '제너럴 셔먼호 사건'의 와중에 순교.(27세)
책소개
웨일스 출신 저자가 토마스 선교사의 고향 웨일스에서
중국과 조선 사역, 순교를 통한 조선의 부흥까지 추적한 대역사의 드라마!
제너럴셔먼호가 불길에 휩싸였을 때, 그 긴박한 순간에도 토마스 선교사는 성경책을 품고 배에서 나왔다. 그를 향해 창을 겨누는 병사에게 ‘야소!(예수)’를 외치며 성경책을 건넸고, 그는 곧 죽음을 맞았다. 1866년 9월 5일, 스물일곱의 젊은 나이에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 그러나 그의 죽음은 조선 땅에 복음을 심는 한 알의 밀알이 되었다.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를 한 청년의 무모한 도전으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그가 죽은 이후 조선에는 개신교 선교사들이 활발하게 들어올 수 있도록 문이 열리는 계기가 마련되었고, 기적과 같은 부흥이 일어나는 단초가 되었다. 따라서 저자는 그의 순교가 주님의 지상명령을 이루기 위한 순수한 열정이었고, 그가 순교한 지 150주년이 된 지금, 전 세계로 선교사를 파송하는 한국 교회의 성장을 바라볼 때 그가 전한 성경책, 그가 흘린 피가 얼마나 귀한 한 알의 밀알이 되었는지 이야기한다.
영국 웨일스 출신으로 미국에서 교편생활을 하던 저자는 토마스 선교사의 일대기를 추적하기 위하여 미국과 영국 웨일스 등을 오가며 관련 인물들을 만나고, 오래된 귀한 자료들을 수집한 끝에 이 책을 써냈다. 저자는 이 책에서 한 선교사가 자신의 소명에 순종하여 순교하기까지의 개인의 헌신을 주된 시각으로 다루고 있다.
그동안 토마스 선교사에 대한 연구가 국내의 여러 학자, 목회자들에 의해 다양하게 이루어졌지만, 이 책은 선교사를 파송한 나라의 시각에서 바라본 당시 중국과 한국의 선교 상황에 대해 다루고 있고,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를 재조명한다는 점에서 특별히 주목할 만하다.
목차
추천사. 150년 전 토마스 선교사가 남긴 거룩한 열정… 이상규 교수
추천사. 토마스 선교사님께 진 은혜의 빚을 생각하며… 김성주 회장
추천사. 웨일스 시골교회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기적… 유재연 목사
이 책이 나오기까지. 고향 웨일스에서 아내와 함께 토마스 선교사를 만나다… 스티븐 프라이스 박사
저자 서문. 이 사람은 전설이 될 만합니다
Chapter 1. 웨일스의 소년
상하이에서 온 편지
토마스 선교사의 아버지, 로버트 토마스
부흥의 불길이 일어난 라야더에서 태어난 토마스
한적했던 하노버교회의 부흥
Chapter 2. 선교사를 꿈꾸며
외국어 공부에 열심인 목사관의 둘째 아들
몸 고치는 일보다 마음 고치는 일을 하기 위해
온들에서 만난 두 인연
런던대학교 뉴칼리지에 입학하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별
제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고 싶습니다
Chapter 3. 상하이로 가다
두 달 사이에 결혼식, 목사 안수, 중국 선교사 파송까지
낯선 상하이에서
사랑하는 아내를 떠나보내고
상하이 지부장 뮤어헤드와의 갈등
런던선교회를 사임하고 즈푸로
Chapter 4. 조선을 향해
조선과 가까운 즈푸
처음 밟은 조선 땅
첫 조선 선교 여행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런던선교회 선교사로 재임명되어
Chapter 5. 제너럴셔먼호를 타고
위험한 조선
다시 조선을 향해
즈푸 항에 나타난 제너럴셔먼호
백령도 두문진에서 대동강으로
서양 배를 구경 나온 조선 사람들
점점 긴박해지는 대치 상황
제너럴셔먼호의 최후
Chapter 6. 순교자의 피
토마스가 떠난 후에
동양의 웨일스, 평양의 부흥
웨일스에서 일어난 부흥의 역사
순교자의 피는 교회를 세우는 씨앗이요
저자 후기: 성령 하나님께 나의 작은 헌신을 바치며
부록 1: 토마스 선교사의 생애와 역사 연표
부록 2: 토마스 선교사 순교 후 평양 대부흥의 열매들
책 속으로
토마스를 죽인 그 병사는 토마스 옆에 떨어진 책을 주워들었다. 그는 그것이 성경인 줄도 모르고 집에 돌아와 가족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오늘 서양사람 하나를 죽였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점이 있다. 내가 그를 찌르려고 할 때 그는 두 손을 마주잡고 무슨 말을 한 후에 웃으면서 책 한 권을 내밀며 받으라고 권했다. 결국 그를 죽이기는 했지만, 그 책을 받지 않을 수가 없어서 가지고 왔다.”
제너럴셔먼호는 완전히 불태워졌고, 토마스 선교사의 시신은 평양 근처 대동강변에 묻혔다.
1928년 《도마스 목사전》을 쓴 오문환 장로는 당시 이 광경을 목격했던 한 청년으로부터 토마스의 죽음의 순간에 대해 전해 듣고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토마스는 죽기 전에 홀로 뱃머리에서 용감하게도 ‘야소(예수)’를 외치고 남은 성경을 뿌렸다.”
---「제너럴셔먼호의 최후」중에서
복음에 헌신했던 토마스의 생애는 짧았지만 눈부셨다. 토마스가 살아 있는 동안 그의 헌신은 미미해 보였을지 몰라도, 그가 떠난 후에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에게 놀라운 영향을 미쳤다. 1932년에 세워진 토마스 선교사 기념 예배당에는 스코틀랜드 성서공회가 기부한 주춧돌이 세워졌는데, 거기에는 이러한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를 세우는 씨앗이요. 씨앗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은 조선인들의 마음속 깊이 심어졌다. 하나님께서는 조선 땅을 구원하시기 위해 토마스를 택하셨다. 토마스가 조선에 부르심을 받았던 것처럼, 이제는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조선의 제자들이 온 세계를 향하여 그 뒤를 따르고 있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를 세우는 씨앗이요」중에서
이 책을 쓰는 동안 정말 많은 일이 일어났다. 토마스 선교사의 생애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는 독자라면 이 책이 분명 흥미진진하리라 생각된다.
하노버 사택은 토마스 선교사의 부모님이 37년간 목회를 하고 은퇴할 때까지 계속 살았던 집이다. 토마스 선교사가 태어난 지 176년이 지난 지금, 나는 남편 스티브와 함께 토마스 선교사가 어린 시절을 보낸 바로 그 옛집에서 살고 있다. 우리는 토마스 가족들이 식사를 했던 그 부엌에서 식사를 하고, 토마스의 아버지인 로버트 토마스 목사가 설교를 준비하며 기도하던 작은 서재에서 책을 읽는다.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중략)
지난 주일에는 10여 명의 한국 청년들이 우리 집 마당을 거닐며 성경을 읽고 하나님을 찬양했다. 또한 60여 명의 웨일스인과 한국인들이 함께 모여 하노버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이 모든 것은 조선에 건너가 복음을 전파했던 토마스 선교사 같은 분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토마스 선교사가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 땅에 심어 놓은 씨앗이 자라 오늘의 한국과 웨일스에서 열매를 맺고 있는 것이다.
출판사 리뷰
“순교자의 피는 교회를 세우는 씨앗이요 씨앗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토마스 선교사 기념 예배당에 있는 주춧돌에는 이러한 문구가 쓰여 있다. 영국에서 중국으로, 그리고 한국으로 부지런히 움직인 토마스 선교사의 목적은 단 하나였다. 학창 시절부터 그를 사로잡았던 것은 오직 그리스도를 전하겠다는 소명이었다. 그는 목회자였던 아버지와 그의 주변에 있던 영적 스승들에게서 그리스도를 향한 뜨거운 사랑을 배웠고, 그 열정은 낯선 땅, 아직 문호가 개방되지 않았고 종교적 박해가 심했던 조선 땅으로 그를 인도했다.
그는 스물일곱의 나이에 그 열정을 다 나누지 못하고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했다. 그러나 그가 죽기 전까지 조선 땅에 뿌렸던 성경은 이후 많은 이들을 복음화시켰고, 제너럴셔먼호 사건 이후 미국과의 문호가 개방되면서 선교사들이 합법적으로 조선에 들어올 수 있게 되었다. 이로 인해 언더우드, 새뮤얼 모펫 등의 선교사들이 조선 복음화를 위해 들어왔고, 이후 교회가 세워지고 평양 대부흥이 일어나는 기초가 마련되었다. 토마스 선교사의 무모하리만치 뜨거운 열정이 조선의 복음화를 위해 나서게 했고, 그로 인해 조선의 수많은 성도들은 전 세계 기독교사에 길이 남을 평양 대부흥의 역사를 일구어 낼 수 있었다.
◎ 영국인 작가가 재조명한 조선 땅의 선교 복음화, 부흥의 발자취
영국 출신으로 미국에 살던 스텔라 프라이스와 그의 남편 스티븐 프라이스는 고향 웨일스를 찾았다가 우연한 기회에 웨일스 흘라노버에 있는 한 교회를 방문하게 된다. 이들은 이 교회에서 한국 지도와 토마스 선교사의 사진을 보았고, 머나먼 동양의 복음화를 위해 떠났다가 그곳에서 순교한 한 젊은 선교사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스텔라 프라이스는 토마스 선교사의 삶에 대해 더 깊이 알고 싶어 그의 삶을 추적하여 이 책을 쓰게 되었고, 지금은 토마스 선교사가 어린 시절을 보낸 하노버 사택을 구입하여 그곳에서 살면서 남편과 함께 엠마오 길 사역에 전념하고 있다.
미국에서 인정받는 의사였던 스티븐 프라이스 박사는 토마스 선교사의 이야기를 알게 된 후, 토마스 선교사의 발자취를 따라 중국과 북한에 의료 선교를 가게 되었고, 이후 북한 선교와 세계 선교에 헌신하는 삶을 선택했다.
전 세계로 선교사를 파송하는 오늘의 대한민국 선교 사역의 시작이, 동양의 작은 나라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피를 흘린 순교 신앙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다시금 되새기게 될 것이다.
추천사
토마스 선교사 기념 예배당에 세워진 주춧돌에는 아래의 문구가 쓰여 있습니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를 세우는 씨앗이요 씨앗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토마스 선교사는 실로 조선 땅과 한국 교회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이 땅에 떨어뜨린 한 알의 밀알이었습니다. 이후 주기철, 손양원 목사로 이어진 순교의 맥은 이 땅에 선교 역사상 가장 놀라운 복음의 열매들을 맺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볼 수 있는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행전’의 소중한 기록인 이 책이 한국 교회와 성도들에게 순교 신앙을 회복하는 데 소중한 도구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주승중 목사(주안장로교회 담임목사, 순교자 주기철 목사 친손자)
외국인의 시각에서 1860년대의 정세와 조선의 현실, 그리고 선교 사역과 토마스 목사의 순교를 추적한 감동적인 내용의 책이 웨일스 후손에 의해 집필되었다는 것은 토마스 목사 순교 150주년을 기념하는 한국 교회와 성도들에게 값진 선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해 험지를 마다하지 않고 자기 생애를 헌신한 토마스 목사가 남긴 거룩한 열정은 오늘 우리들을 위한 소중한 유산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이 널리 읽히고 사랑받는 애장서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이상규 교수(고신대학교 교수, 한국장로교신학회 회장)
토마스 선교사님이 순교하면서 건네주신 성경책이 우리나라 기독교 부흥의 밀알이 되어 평양 대부흥 운동이 일어났고, 평양에서 은혜받은 성도들이 각자의 고향에 돌아가 전도에 힘쓸 때 저의 외할머니도 전도를 받으셨습니다. 저는 어머니에게 우리나라 최초의 순교자이신 토마스 선교사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늘 은혜의 빚을 느끼며 살았습니다. 이 책을 통해 스물일곱의 짧은 생을 온전히 헌신한 토마스 선교사님을 다시 만나며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김성주 회장(성주그룹 회장, 대한적십자사 총재)
제가 2013년 하노버교회 부임을 위해 처음 웨일스에 도착했을 때의 그 감격과 흥분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하노버교회는 20여 년 동안 담임목회자 없이 적은 수의 교우들이 교회를 지켜 오고 있었습니다. 저희들의 도착은 오랜 기도의 응답이며 150년 전 토마스 선교사가 순교의 피로 조선 땅에 뿌렸던 복음의 씨앗이 맺은 열매였습니다. 하노버교회에서 스텔라, 스티븐 부부를 만난 건 저희에게 큰 축복이었습니다. 특별히 스텔라가 쓴 토마스 전기를 받아 들고는 감격에 겨웠습니다. 한국 독자에게도 이 귀한 책을 소개하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
―유재연 목사(하노버교회 담임목사, 바울선교회 소속 선교사)
책소개
1928년에 나온 『토마스 목사전』은 시중에서 구할 수 없는 데다 국한문 혼용체로 쓰여 있어서 오늘날의 독자들이 읽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이와 관련, 이자익목사기념사업회는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의 역사를 복원하는 것이 한국교회가 초기교회의 순수한 신앙적 열정을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믿음 아래 『토마스 목사전』을 현대어로 번역하여 재발간하기로 했다. 이번에 재발간된 책에는 토마스 선교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을 위해 1928년에 나온 원본도 함께 수록하였다.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 역사가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는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큰 감동을 벋고 신앙의 각오를 새롭게 다지게 될 것이다.
목차
축하의 글 / 김흥수
『토마스 목사전』 번역 및 영인본 발행에 즈음하여 / 문성모
번역에 즈음하여 / 남 청
머리말 / 오문환
서 론
ㆍ조선의 큰 운동
ㆍ토마스 목사는 누구?
선교사 이전 시대
ㆍ18세기의 부흥운동
ㆍ라이아더의 고고성
ㆍ뉴대학의 학적부
ㆍ선교사 선임과 출범
중국 선교사 시대
ㆍ문호개방기의 동양 정세
ㆍ상해 상륙과 한구 여행
ㆍ애처 별세와 북경 여행
ㆍ선교사 사면과 성서공회 종사
제1차 조선 전도여행 시대
ㆍ1865년 이전의 조선 기독교
ㆍ제1차 전도여행의 동기와 출범
ㆍ북경 귀환과 그의 서신
ㆍ선교사 재임과 대리교장 취임
ㆍ박규수 씨 회견과 제2차 여행계획
제2차 조선 전도여행 시대
ㆍ대원군의 사교금령(邪敎禁令)
ㆍ제2차 여행의 등정
ㆍ제너럴셔먼호 지부(즈푸) 출범
ㆍ8월 20일 보산에 닻을 내림
ㆍ석호정, 만경대에 상륙 전도
ㆍ봉황진 진박과 양란 개시
ㆍ백기 게양과 성경 분급
ㆍ최후 기도와 순교
결론
“토마스 목사의 공은 산같이 높고 강같이 길구나!”
부록
1. ‘토마스’가 ‘최란헌’인가
2. 토마스 목사 순교기념회의 유래와 그 사업계획
인명 찾아보기
지명 찾아보기
주제 찾아보기
『도마스 牧師傳』 영인본
책소개
27세의 젊은 선교사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는 1866년 9월 5일, 조선 땅에 최초로 복음을 전하러 온 선교사라는 긍지를 가지고 대동강 쑥섬 모래사장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영국 웨일스 회중 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넘치는 재기와 열정으로 살아온 그의 생은 이로써 땅에 묻히고 말았지만, 그가 꿈꾸었던 비전은 사그라진 것이 아니었다. 그는 닥쳐온 난관과 자기 약점을 부수고 뛰어넘으며 오로지 복음을 위해 자신의 젊음을 헌신하였다. 그는 시대보다 앞서간 의지의 표명으로 오해를 사는 한편, 타고난 인간적인 약점으로 여느 젊은이들처럼 고통과 번민을 겪으면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자 자신이 할 수 있는 바를 다하였다. 죽음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품에 있던 성경을 건넨 그의 일화는 유명하다. 뿐만 아니라 그는 제너럴셔먼호가 불길에 휩싸인 긴박한 상황에서도 성경과 기독교 서적, 전도지들을 힘껏 배 밖으로 던지면서 ‘야소!(예수)’라고 외쳤다. 훗날 평양 대동문 안에서 교회를 열었을 때 토마스에게 얻은 성경을 가지고 온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렇게 그는 한 알의 밀알이 되어 풍성한 열매로 한국 교회사에 영원히 남게 되었다. 명분이나 언변이 아닌 그의 눈물과 몸과 영혼으로 그의 죽음은 영광으로 남게 되었다. 저자는 토마스 목사의 고향 웨일즈에서 사역하면서 모은 충실한 고증 문헌과 화보를 첨부하여 그의 짧았지만 귀한 삶을 생생하게 재현해냈다. 평양 대부흥 100주년을 맞아 이 땅의 부흥을 기도하며 준비하고 있는 한국교회가 이 책을 통해 토마스 선교사의 헌신과 그 열매를 마음에 품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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