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교의 한국전래
기독교 일파인 경교가 7세기에 중국에 전래되어 국가의보호를 받으며 크게 유행하였다. 당시 당과 빈번한 문화적 교류를 가졌던 통일신라에 경교가 전래되었을 가능성이 제게 되었다. 특히 경교의 유물인 "돌십자기'와 "십자가 무늬장식" "마리아상"이 발견됨에다라 통일신라 (8~9세기)에 이미 기독교가 한반도에 전래 되었슴을 알수 있다
네스토리우스파(Nestorianism) 또는 경교(景敎)
네스토리우스파(Nestorianism) 또는 경교(景敎)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네스토리우스(?년 ∼ 451?년)를 시조로 하는 기독교의 일파를 말한다. 아시리아 동방교회로 소급된다.
교의
그리스도의 위격은 하나가 아니며, 신격과 인격이라는 두 개의 성격으로 분리 구별된다고 보았다(이성설二性說). 이것은 구세주(그리스도)의 신격은 예수의 복음서에 깃들고 인격은 사라진 육신 안에 있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 경우 인성으로써 예수를 낳은 성모 마리아에게는 하느님의 어머니(테오토코스, Θεοτοκος)라는 호칭을 사용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고, 결국 431년 에페소스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판정된 네스토리우스는 면직 파문되어 리비아로 추방되었다.
역사 / 개요
그리스도론 논쟁
알렉산드리아 학파 출신의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키릴로스와 안티오키아 학파 출신의 콘스탄티누폴리스 총대주교 네스토리우스 사이의 갈등에서 시작되었다. 네스토리우스는 그때까지 고대 교부(敎父)들이 마리아에 대해 사용하던 칭호 테오도코스(Θεοτοκος : 테오스 곧 하느님θεος을 낳은 자τοκος)를 부정하고, 마리아는 크리스토토코스(Χριστοτόκος : 크리스토스 곧 그리스도 Χριστος을 낳은 자 τοκος)라고 주장하였다. 그 이유는 예수는 신성과 인성이라는 두 개의 위격(휘포스타시스, υποστασις)이지만, 마리아는 어디까지나 인간적 위격(인격)을 낳았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반면 키릴로스는 그리스도의 본성(피시스, φυσις)은 신성과 인성으로 구별되지만 위격로서는 유일하다(위격적 연합, Hypostatic Union, ένωσις καθ΄ υπόστασιν)며 반박했다.
에페소 공의회
네스토리우스는 에페소 또는 에베소 공의회에 참석을 거부했고, 네스토리우스가 에페소 공의회에서 파문된 뒤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는 498년에 크테시폰 셀레우키아(Seleucia)에 새로운 총대주교를 세웠다. 7세기 중기까지 페르시아 일대의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 곧 경교에 대해서는 《시일토 연대기》에 상세하게 나와있다. 현재는 이라크 북부의 아시리아 지역에 산재하고 있으며 미국과 호주 이민자를 중심으로 신도가 존재하고 있다.
가톨릭으로의 복귀
네스토리우스파 교회인 아시리아 동방교회(정교회와는 별개의 계통)의 일부는 1553년에 가톨릭교회로 돌아와(Sulaqa) 칼데아 전례 가톨릭 교회(동방귀일교회, 동방전례 가톨릭 교회의 하나)라 불리게 되었다. 아시리아 동방교회와 칼데아 가톨릭교회는 현재도 서아시아의 아시리아(현재 이라크 북부)에서 활동하고 있다.
1990년 10월 18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동방 기독교 교계의 동방 가톨릭교회들을 위한 교회법전인 《동방 교회들의 교회법전》(Codex Canonum Ecclesiarum Orientalium; CCEO)을 교령으로 선포하였다.
동방 기독교
7~8세기경 중국에 전래된 경교의 전례(성지주일을 묘사한 것)
이 부분의 본문은 대진사입니다.
네스토리우스의 신학은 424년경부터 이집트, 시리아, 팔레스티나 지방 및 인도까지도 전파되었다.
경교라 불리다
당 태종 때인 7세기에는 중국 대륙에도 전래되었다. 페르시아인 경교 사제인 「아라본」(阿羅本) 등에 의해 전래된 네스토리우스교는 경교(景敎)라 불렸고, 경교 교회를 페르시아 교회라는 뜻인 파사사(波斯寺)라고도 불렀다. 경교라는 이름은 중국어로 빛의 신앙이라는 의미가 있으며, 당 현종(玄宗) 때에는 경교 교회인 파사사는 대진사(大秦寺)라 개칭하고, 각지에 교회를 건립하여 교세를 제법 떨쳤다고 전해진다.
탄압으로 소멸하다
초기 당 조정은 황족을 포함한 지배계급에 북방 유목민족(선비, 흉노)요소가 농후하였고 경교, 불교 등의 비(非)중화종교에 대해서도 너그러움을 보였으며 그들의 신앙은 너그러움과 보호를 받으며 2백 년 동안 번성하였다. 그러나 당 말기 왕조를 전통적인 중화 왕조의 위치를 굳건히 하게 된 뒤 탄압으로 소멸하였다(참고: 회창의 폐불).
원나라 시대
몽골 제국의 원(元) 왕조 치하에서는 경교가 허락되어 기독교 신자와 교회가 증가하였고 그때는 복음을 따르는 무리라는 뜻의 예르게운(야리가온)이라 불리었다. 몽골 제국을 구성하게 될 몇몇 북방 유목민들에게도 포교되어 칭기즈 칸 계통의 일부 가계나 이들과 사돈 관계에 있는 몽골 제국의 정치적 중추를 구성하는 일족으로서 경교를 열심히 믿는 유목 집단이 많았다. 그래서 전 시대에 일시 중국 본토에서도 부활하게 됐다. 다만, 몽골 제국이 붕괴된 뒤, 제국의 중추를 구성하고 있던 여러 유목 집단은 서쪽에서는 이슬람과 터키계 언어를 수용하여 튀르크(터키인)을 자칭하게 되고, 동방에서는 티베트 불교를 신앙해 몽골어 계통의 언어를 유지한 몽골을 자칭하는 세력과 오이라트를 칭하는 세력의 양대 세력으로 나뉘며,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 곧 경교를 믿던 유목 집단은 그 사이에서 매몰, 소멸하고 말았다.
한반도 전래설
한반도에서는 당(唐)과 빈번한 문화적 교류를 가졌던 남북국 시대인 8~9세기 경 발해와 신라에 경교가 전래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주장은 '돌십자가', '십자무늬장식' 등 경교와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의 발견에 근거하고 있다. 출처 위키백과
대진경교유행중국비
대진경교유행중국비 (大秦景敎流行中國碑)는 중국 당 (唐) 건중 (建中) 2년 (781년)에 장안 서녕방 (西寧坊)의 대진사 (大秦寺)에 세워진 경교 (景敎) 의 중국전래를 전하는 비석이다. 명대에 재발견되어시안 비림 박물관으로 옮겨 보관되어있다.
출처: https://japan114.tistory.com/2838 [동방박사의 여행견문록(since 2010):티스토리]
개요
431년에 에페소스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몰려 금지당한 네스토리우스파는 이후 서아시아・중앙아시아로 전파되었다. 그 무렵 당 왕조는 서방으로 국위를 떨치고 있었고, 정관(貞觀) 9년(635년)에 아라본(阿羅本)이라는 이름의 선교사가 처음 경교를 중국에 전했다. 이후 악 150년간 당 왕조의 보호를 받으며 경교는 융성했고 당 건중 2년(781년)에 중앙아시아의 투카라 국 발흐 출신으로 당 왕조에 중용되어 광록대부(光祿大夫)・삭방절도부사(朔方節度副使)・시전중감(試殿中監)이 된 이사(伊斯, 이드즈두브지드Izadbuzid?)라는 자가 자금을 대어 이 기념비를 장안 서녕방의 대진사에 세우게 되었다.비석에는 경교의 교의와 중국으로의 전래사가 담겨졌다. 그러나 9세기 무렵 즉위한 무종(武宗)은 도교(道教)을 숭상하면서 불교 등 외래 종교를 탄압했고(회창폐불) 경교도 함께 탄압을 받아 많은 대진사가 파괴되었다. 그 무렵에 비석도 땅 속에 파묻히게 된 것으로 보인다.
비석의 시리아 문자
비석은 검은색 석회석으로 높이는 귀부(龜趺)를 제외하고 약 270cm, 폭 평균 약 100cm, 두께 약 28cm이다. 제액(題額)에는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教流行中國碑)」라 쓰여 있고 그 상부에 십자가가 음각되어 있다. 비문은 32행으로 행마다 62자씩 약 1900자가 새겨져 있다. 서역인 승려 경정(景淨, 서역명은 아담)이 찬(撰)하고 글씨는 여수암(呂秀巖)이라는 사람이 쓴 것으로 격조가 높다. 한자 외에 당시 전도에 쓰였던 에스트란게로(Estrangelo)라 불리는 시리아 문자로 경교 승려 70인의 이름을 새기고 그에 상응하는 한자명도 기록하였다.
비문
비문 내용은 『대정신수대장경』외교부(外教部)에 실려있다. 《전당문》(全唐文)에도 수록되어 있으나 탈자가 많다.[2] 기독교의 교의를 서술한 뒤 아라본이 경교를 전했을 때 당 태종이 감격하고 재상 방현령(房玄齡)과 위징(魏徵)을 시켜 이 종교를 황궁에서 맞아들이게 하고, 경교 경전의 중국어 번역을 허가하고 선교를 권장했으며, 3년 뒤인 정관 12년(638년) 7월에 조칙을 내려 수도 장안에 경교 사원(당시에는 파사사)을 짓고 21명의 승려를 제도시켰고, 현종(玄宗)이나 당의 명장 곽자의(郭子儀)가 경교를 비호한 사실 등을 기록하였다. 또한 경교가 중국에 전래된 후 상당히 유행하여 "교회가 온 성에 가득했고 집집마다 다광명정대한 복으로 풍성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비문의 지은이인 경정은 페르시아 사람으로 장안 서명사(西明寺)의 승려 반야삼장(般若三藏)과 친교가 있었고(반야삼장은 북인도인) 소그드어판 《이취경》(理趣經)을 함께 번역하기도 했다. 일본의 승려 구카이(空海)가 당에 들어갔을 때도 서명사에서 반야삼장에서 배운 적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독교의 창조주이기도 한 야훼는 비문에서 아라파(阿羅訶, 시리아어 음사)로 표기되어 있다.
800년 뒤인 명 왕조 천계(天啓) 3년(1623년) 또는 천계 5년(1625년)에야 비석은 발굴되었다. 양마약(陽瑪諾)이라는 이름으로 저장성(浙江省) 항저우 부(杭州府)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선교사 임마누엘 디아즈(Emmanuel Diaz)가 쓴 《당경교비송정전》(唐景教碑頌正詮) 서문에 비석의 발굴 시기를 「대명천계3년(大明天啓三年)」이라 되어 있다. 당시 포르투갈의 예수회 선교사였던 알바르도 세메도(Álvaro Semedo, 중국명 노덕소魯德照)의 《중국 통사》(The History of China)에 발굴 당시의 상황이 기술되어 있다. 중국식 이름을 노덕소(魯德照)라고 하는 세메도는 천계 8년(1628년) 연구차 시안(西安)을 방문했다.
비석이 발굴된 것은 당 왕조의 도읍지였뎐 시안에서 서남쪽으로 150리 떨어진 주지 현의 대진사라는 불교 사찰이었다. 발굴 뒤 불교 사찰인 금승사(金勝寺)로 옮겨진 비석은 한동안 방치되어 있었다. 헬러(Heller)의 《시안부(西安府)의 네스토리우스교 비석》(Das Nestorianische Denkmal in Singan fu)이나 코르디에(Cordier)의 《중국 서적사》(Bibliotheca Sinica), 청(清) 왕조의 고증학자 양영이 지은 《경교비문기사고정》(景教碑文紀事攷正), 윌리(Wylie))의 《시안부의 네스토리우스교 비석》(The Nestorian Tablet of Se-gan Foo) 등이 있으며, 상하이(上海)에 있던 예수회 선교사 아브레(Havret)가 비문을 번역하였다.
출토된 뒤 30년 동안 3개 국어로 번역된 8종의 비문의 서양어역이 나왔고, 곧장 유럽에 소개되었다. 그러나 1860년대에 이 지방에서 일어난 이슬람 교도의 소란으로 금승사가 그만 불타면서 경내에 비석을 보관하기 위해 지었던 비정(碑亭)도 소실되었다. 그 뒤 서안 비림(碑林, 지금의 시안비림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일본에서는 불교학자 구와바라 지쓰조(桑原隲蔵)와 사에키 요시로(佐伯好郎)가 비문을 연구하였다.
경교비의 모조비
일본 교토 대학(京都大学)과 고야 산(高野山) 오우인(奧院)에 1911년(메이지 44년)에 경교비의 모조품이 세워졌는데, 아일랜드의 불교연구자 골든(Gordon) 여사가 자금을 내어 세우게 되었다고 한다. 골든 여사는 1917년에 한국의 금강산 장안사에도 경교비의 모조비를 세우는데 자금을 출자했다.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에 이 모조비의 탁본이 소장 전시되어 있다.
책소개
중요한 내용들은 보충하여 설명하면서 중복되는 내용들은 간략하게 줄이는 요령을 살려서 진술하였다.
목차
서문
제1장 서론
연구의 주제 · 연구 범위의 한계 · 핵심적 논의의 요점 · 어휘의 정의와 해석 · 연구 과정과 연구 내용의 개관 · 전제된 연구의 가정 사항
제2장 경교 선교사역의 역사적 배경의 고증
두 교회의 관계: 동방세계와 서방세계 · 고대 중국 · 기독교 선교 현장의 문화적 배경 · 당나라의 경교 사역
제3장 경교 선교단의 복음 전파
경교 기념비 · 경교 선교단의 특성 · 경교 선교사들의 선교 방법들 · 돈황 석굴의 기록물들 · 경교 선교활동의 요약
제4장 경교 선교사역의 지속적 영향력
중국의 경교 선교에 가해진 박해와 결과 · 경교의 발자취 · 기독교적 영향의 증거
제5장 결론
연구 결과의 정리 · 앞으로의 연구를 위한 제안
부록
참고문헌
출판사 리뷰
경교비가 발견된 지 30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고 진품이라는 사실은 확실하게 입증되었다. 경교비에 관한 문헌을 계속해서 발굴하며 더 많은 연구를 해서 경교비의 외부적 또 내부적 문제들에 관한 탐구를 하는 일이 남아 있다. 결과적으로 현재까지 역사적, 신학적으로 연구 완료된 내용을 포함한 전체적 평가가 반드시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제5장 결론 중에서
소개
본서는 기본적으로 경교 연구를 위한 텍스트로 사용되기 원했기 때문에 주해보다는 경교 문헌의 번역에 주안점을 두었다. 그래서 누구나 쉽게 내용을 파악하고 정리할 수 있도록 내용을 장·절로 구분하였으며 가급적 본문 해석을 직역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부족한 한문 실력으로 인하여 본문 해석이 쉽지는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귀한 한학자들을 만나게 해주시고 그분들의 도움을 받아 해석을 마무리 짓게 하셨고, 이에 『경교경의』라는 제목으로 출간하게 되었다. 이에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무한한 영광을 올려 드린다.
서기 645년 풍운의 꿈을 안고 ‘발흐’에서부터 당나라까지 온 알로펜과 선교단 일행은 매우 어려운 조건하에서도 당나라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갖은 수고를 아끼지 않았고, 결국에는 당나라 전역에 복음이 충만하게 퍼져 나갔다. 이에 이웃 국가인 한반도와 발해까지에도 복음이 전달 되었을 것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동안 경교에 대한 오해로 인하여 신학자들이나 기독교인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천년이 지나도록 아직도 진흙속에 묻혀 있는 것이 경교도들의 행적이다. 이에 필자는 필자의 학위논문에서 경교신학은 동시대의 서방기독교보다도 도리어 개혁주의 신학에 가까운 신학 체계를 갖고 있었다고 주장한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도 경교에 대한 오해가 종식되지 않고 있는 것은 궁극적으로 경교 문헌에 대한 해석이 이루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라 생각되었다.
이에 필자는 『경교경의』를 통하여 경교도들이 어떤 신학 체계를 갖고 있었는지에 대해 논의의 문을 열고자 한다. 그리함으로서 서방기독교와는 다른 또 하나의 기독교, 동방기독교가 어떻게 복음을 전달해 왔는지를 찾아감으로써 주 예수님의 승천 이후로 양 갈래로 나아간 동방기독교와 서방기독교가 만나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초석이 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이 책은 다소 주의를 가지고 보아야 필요성도 있다. 그중에서도 독자는 경교도들이 격의(格義)를 사용하여 복음을 전했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즉 불교나 유교 도교의 어휘나 개념을 차용하여 기독교를 전했기 때문에 단순히 용어만 본다면 마치 경교도들이 ‘유·불·도’에 습합 되었다는 오해를 할 수 있다. 그러나 당대(唐代)에는 이방인의 종교가 당나라에 전해지는 과정에서 격의를 사용한 것은 일반적이었다. 불교 역시 불교의 개념을 전달하기 위해 도교의 옷을 입었는데 이것을 ‘격의불교’라 한다. 그런데 이러한 ‘격의(格義)’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면 자칫 경교가 ‘유·불·도’에 습합 되었다는 오해를 할 수도 있다.
둘째는 경교도들이 의도한 선교전략이 있었다는 점이다. 경교도들은 단순히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나의 학위논문 김영일, “당대 경교의 신학과 선교전략을 통해 본 내면적 토착화의 조건에 관한 연구”, 철학박사 학위논문, 광신대학교, 2022.
에서 언급하였다시피 경교도들은 유불도를 배척한 것이 아니라 기독교로 해석하고 포섭하고자 하는 변증법을 사용하였다. 이것은 마치 로마에서 교부들이 헬라철학을 기독교화 시키려고 시도했던 노력들과 유사한 것이었다.
셋째로 이 책에 내용의 구분을 위해 붙혀놓은 장·절은 필자가 임의로 붙힌 것이라는 것을 말해둔다. 따라서 이러한 장·절 구분은 완벽한 것이 아니며, 이후에 더 좋은 분리 방법이 나온다면 더 좋은 텍스트를 발간하여 많은 사람에게 더 유용한 텍스트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이 텍스트를 해석 하는데 있어서 윙 샤오쥔의 『경교전적해석』과 황정욱의 『예루살렘에서 장안까지』 그리고 오세종의 『경교비문 역해』를 주 참고문헌으로 활용하였다. 또한 도움을 주신 한학자 김덕중 선생님과 이 작업을 위해 수시로 돕고 협력하는 사랑하는 아내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이 책이 경교를 연구하는 사람들이나 알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경교에 대한 이해에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흑수(黑水) 달천에서
목차
2. 序聽迷詩所經 31
3.一神論 두루마리 80
4. 宣元至本經 155
5. 大秦景敎大聖通眞歸法讚 164
6. 志玄安樂經 168
7. 三威蒙度贊 192
8. 尊 經 200
참고문헌 205
출판사 리뷰
김영일 박사의 본서 『경교 경의』는 「대진경교유행중국비」에 새겨진 ‘대진경교유행중국비성병서,’ 641년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서경미시소경,’ 비슷한 시기의 교리서 ‘일신론,’ 8세기 초(717) 문서 ‘선원지본경,’ 720년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찬송문 ‘대진경교대성통진귀법찬,’ 8세기말-9세기 초에 집필된 것으로 보이는 ‘지현안락경,’ 800년 경에 만들어져 찬송으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삼위몽도찬,’ ‘삼위몽도찬’보다 약 100년 뒤에 작성된 문서 ‘존경’을 모은 원전 모음집이다. 즉, 경교의 대표 문헌 여덟 가지의 원전인 한문 본문을 싣고, 그 본문에 대한 한국어 번역을 실은 책으로,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주요한 경교 문헌을 모두를 모아 편집한 책이다.
경교는 동아시아에 전래된 첫 기독교라는 역사적인 의의를 갖고 있지만, 신앙 공동체가 사멸해서 더는 존재하지 않는 과거의 기독교라는 현실, 중국 문화 및 종교와 혼합된 기독교라는 오명, 고대 한문 용어 해독의 난제 등이 얽혀, 한국 학계와 교계에는 여전히 생소하다. 그러나 여러 선구적 학자들의 노력으로, 그 실체가 현재는 많이 밝혀졌다. 김영일 박사는 최근에 경교에 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저자는 기독교 신학 이해, 고대 중국어를 해독하는 한학 실력, 동양종교 전반에 대한 풍성한 지식을 바탕으로, 경교 문헌에 대한 기존 연구자들의 업적을 충실히 활용하면서도, 과거의 문헌 해석의 한계와 오류를 교정하여 새롭게 해석한 경교 문헌 모음집 『경교 경의』를 내어놓음으로써, 한국 교계와 학계에 경교 연구에 필수적인 문헌을 선물했다.
책소개
목차
제2장 경교의 역사 : 예루살렘에서 長安까지
제3장 景敎 문헌
제4장 경교 유물
제5장 동방 그리스도교의 금욕주의 전통
제6장 결론
책소개
1,300여 년 전 예수의 복음이 중국 대륙에 들어와 이후 한반도 신라의 땅끝까지 전해지는 과정 가운데, 하나님께서 계획하시는 모든 일들은 우리가 도무지 헤아릴 수 없는 그분의 섭리 속에 진행되고 있음을 깊이 깨닫게 된다.
목차
역자의 말_3
총서(總序)_7
보서(補序)_12
편자서(編者序)_18
도론(導論)_30
현존 경교 사본 목록(現存 景教 寫本 目錄)_102
경교연구 참고문헌(景敎硏究 參考文獻)_104
편집 범례(編輯 凡例)_109
제1부 경교 경전(景敎 經典)
제1장 대진경교유행중국비송병서(大秦景敎流行中國碑頌並序) _경정 술(景淨 述), 여수암 서(呂秀巖 書)113
소 개114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教流行中國碑)120
제2장 서청미시소경(序聽迷詩所經)169
소 개170
서청미시소경 1권(序聽迷詩所經一卷)175
제3장 일신론(一神論)207
소 개208
일신론(一神論)212
제4장 대진경교대성통진귀법찬(大秦景敎大聖通眞歸法讚)_색원(索元)291
소 개292
대진경교대성통진귀법찬(大秦景教大聖通眞歸法讚)29
제5장 대진경교선원본경, 돈황본(大秦景敎宣元本經, 敦煌本)대진경교선원지본경, 경당판(大秦景敎宣元至本經, 經幢版)합교(合校)301
소 개302
대진경교선원본경, 돈황본(大秦景敎宣元本經, 敦煌本)315
대진경교선원지본경, 경당판(大秦景敎宣元至本經, 經幢版) 합교(合校)315
제6장 지현안락경(志玄安樂經)349
소 개350
지현안락경(志玄安樂經)355
제7장 대진경교삼위몽도찬(大秦景敎三威蒙度讚), 존경(尊經)383
소 개384
경교삼위몽도찬(景敎三威蒙度讚)393
존경(尊經)400
책소개
1,300여 년 전 예수의 복음이 중국 대륙에 들어와 이후 한반도 신라의 땅끝까지 전해지는 과정 가운데, 하나님께서 계획하시는 모든 일들은 우리가 도무지 헤아릴 수 없는 그분의 섭리 속에 진행되고 있음을 깊이 깨닫게 된다.
목차
제2부 경교도 묘지명(景敎徒 墓誌銘)
제1장 당고좌무위병조참군상기도위영무군화부군공신도지명(唐故左武衛兵曺參軍上騎都尉靈武郡花府君公神道誌銘)당고안씨부인묘지명(唐故安氏夫人墓志銘)_문간(文簡)9
소 개10
당고좌무위병조참군상기도위영무군화부군공신도지명 (唐故左武衛兵曺參軍上騎都尉靈武郡花府君公神道誌銘)18
당고안씨부인묘지명(唐故安氏夫人墓誌銘)29
제3부 경교비 주술(景敎碑 注述)
제1장 당경교비송정전(唐景教碑頌正詮), 독경교비서후(讀景教碑書後)37
소 개38
당경교비송정전(唐景教碑頌正詮)43
서(序)46
경교유행중국비송병서(景教流行中國碑頌幷序)54
경교유행중국비송정전(景教流行中國碑頌正詮)69
독경교비서후(讀景教碑書後)222
제2장 경교비문기사고정(景教碑文紀事考正)_양영지(楊榮鋕)231
소 개232
경교비문기사고정 권1(景教碑文紀事考正卷一)235
책 속으로
--- p.28
‘바람의 德’이란 것이 무엇인가? 가로되: 영성의 닻이요, 게으른 의지에 대한 채찍이라. 사람이 공에 대한 보답을 얻지 못한다면, 그 뜻이 쉽게 훼손될 것이요, 손발이 해이해져 피곤해지니, 일을 중지하고 앞으로 나아가지 않게 된다. 오로지 ‘望德’만이 그 뜻을 견고히 유지할 수 있으며, 어려움을 만나도 떠나지 않으리니, 가령 상인이 이익을 추구하되 어려움을 피하지 않고; 군대가 상급을 바라며 죽음을 무릅써도 두려워하지 않고; 하인이 보답을 바라고 그 땀과 수고를 아까워하지 않으며; 농부가 수확을 바라고 그 굳은살 박힘을 마다하지 않는 것과 같다. 사도 바울이 말하였다: 내가 선함으로 원수를 대적하고, 선함으로 德의 길을 달렸으니, 주께서 의의 면류관을 예비하셨고, 내가 이미 세상 떠나기를 바랐으나, 주께서 내게 머리를 더하셨다. 그레고리 성인이 이를 해석하여 말하였다: 성도는 일반인에 비하여 일함에 많은 수고와 노력을 하나니, 몸과 얼굴에 땀이 가득 차면, 수건으로 닦아 내고는, 다시 그 일에 매진하며, 일에 대한 보답을 기대한다. 성도의 수고로움은 전에 일한 것보다 고달프지만, 그 수고의 보답을 그리워하여, 곧 분발하여 일을 끝내고자 한다. 이것이 ‘望德’의 이로움이다.
--- p.172
代宗이 즉위한 원년은, 우리 주 강림 후 764년이 되는 해이다. 강림하여 탄생하신 시간이, 우리 주 성탄의 날인 것이다. 代宗은 매번 성탄의 날에, 특별한 향료를 부지런히 준비하여, 거룩한 성전으로 보내고, 주님의 보우하심에 감사하며, 백성을 다스리는 공력을 얻을 수 있었으니, 수라상을 준비하라 명하고, 사제들에게 보내어, 그 융숭한 정을 드러내었음을 말하고 있다. 또한 하나님의 아름다운 이로움이 백성을 돕고, 만물의 품격을 널리 생겨나게 하니, 代宗이 하늘을 체험하여 교화를 행하고, 백성에게 복을 하사하여, 그들을 양육하였음을 말하고 있다. ‘亭毒’의 의미는 《老子》에서 볼 수 있다.
출판사 리뷰
본 역서는 景敎 연구자 및 기독교 역사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 순수한 학술적 목적에서 하나의 중요한 기초 자료로서 제공될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가 중국 당나라 때에 이미 景敎라는 모습으로 전래되어 활발한 선교활동을 펼쳤고, 후에 원대(元代)까지 교세가 활발히 확장되었던 사실을 오늘날 새롭게 인지하면서, 이 책이 중국 전래 초기 기독교의 면모를 여러 문헌과 사적들을 통해 이해하는 귀한 통로와 수단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책소개
1,300여 년 전 예수의 복음이 중국 대륙에 들어와 이후 한반도 신라의 땅끝까지 전해지는 과정 가운데, 하나님께서 계획하시는 모든 일들은 우리가 도무지 헤아릴 수 없는 그분의 섭리 속에 진행되고 있음을 깊이 깨닫게 된다.
목차
제3부 경교비 주술(景敎碑 注述)
제2장 경교비문기사고정(景教碑文紀事考正)_양영지(楊榮鋕)
경교비문기사고정 권2(景教碑文紀事考正卷二)7
경교비문기사고정 권3(景教碑文紀事考正卷三)170
책 속으로
--- p.60
‘信’이란, 일을 세우는 근본이요, 길흉의 원천이며, 성패의 중추이고; 스스로 나오는 의지요, 스스로 긍지를 느끼는 氣인 것이다. 믿음이 바르면, 뜻이 바르고; 믿음이 바르지 못하면, 뜻이 바르지 못하다. 그것이 우리들의 심신, 생명, 생사, 화복의 중대한 일에 관계되는 것은, 비교할 바가 없다. 예를 들어 顏回와 曾參이 공자를 독실하게 믿었으므로, 거의 성인의 영역에 충분히 들어갈 수 있었고; 陳相이 許行을 굳게 믿었는데, 곧 위선으로 이끌어 가기에 이르렀으니, 그러므로 사람의 일생의 결말은, 모두 여기에서 결정되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을 독실하게 믿으면, 마지막에 하늘에서 빛나고, 하나님 곁에 있게 될 것이며; 이단을 굳게 믿으면, 종국에 마귀와 동반자가 되어, 영원히 가혹한 형벌을 받게 되는 것이다.
--- p.170
大施主 金紫光祿大夫이며, 북방 節度副使이자, 試殿中監으로서, 자색 袈裟를 하사받은 사제 伊斯는, 사람됨이 온화하여 은혜 베풀기를 좋아하고, 경교의 道를 따라 부지런히 잘 행하였다. 멀리 王舍之城으로부터 마침내 중국에 왔고 … (王舍’는, 인도의 옛성의 이름이다. 성에는 신·구가 있는데, 옛성은 ‘萍莎王舊城’이라 하고, 새로운 성은 ‘阿闍世王’이 지은 것으로서, 화상 法顯이 일찍이 여기에 왔었다. 신·구 두 성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으며, 지금은 이미 촌락으로 변모했다! 이 성은 부처가 열반하고 1년 후, 여러 큰 제자들이 이곳에 모였으므로, 세칭 ‘거룩한 성’이라 불렸고, 동인도에 위치해 있으니, 지금의 ‘바라나’땅이다.)
출판사 리뷰
본 역서는 景敎 연구자 및 기독교 역사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 순수한 학술적 목적에서 하나의 중요한 기초 자료로서 제공될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가 중국 당나라 때에 이미 景敎라는 모습으로 전래되어 활발한 선교활동을 펼쳤고, 후에 원대(元代)까지 교세가 활발히 확장되었던 사실을 오늘날 새롭게 인지하면서, 이 책이 중국 전래 초기 기독교의 면모를 여러 문헌과 사적들을 통해 이해하는 귀한 통로와 수단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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