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일본학 연구 (학부전공>책소개)/2.일본문화사상

도시를 거닐면 일본사가 보인다 (2024)

동방박사님 2024. 11. 30. 07:09
728x90

책소개
감상적인 여행기-평면적인 역사를 넘어
일본의 진면목을 읽는 색다른 시도이자,
일본을 제대로 알기 위한 필독서
일본사를 알아야 일본이 보인다

우리에게 일본은 문자 그대로 “가깝고도 먼 나라”다. 지리적으로도 이웃이고, 고대부터 이런저런 관계를 맺어왔기에 ‘가까운’ 나라이지만 근대 이후 쓰라린 경험을 하고 보니 ‘이웃’이란 감정이 쉽게 들지 않는 ‘먼’ 나라이기도 하다.

하지만 물리적으로 결코 뗄 수 없는 관계이니 국가 차원이나 사회적으로 일본을 제대로 아는 것은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 한 나라를 이해하는 지름길은 그 나라 역사를 아는 것이라 할 텐데 우리 독자 대부분은 일본을 잘 모른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막부’ 등 단편적인 사실이나 메이지유신 이후 근대사에 관한 관심이 고작이다.

이는 일본사를 흥미로우면서도 균형 잡히게 꿰어낸 통사(通史) 관련 서적이 많지 않다는 이유가 클 것이다.

일본 도시사를 연구해온 저자가 쓴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서 색다르고 값지다. 

감상적이고 표피적인 여행 에세이 수준을 뛰어넘으면서도 통사의 무미건조함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책의 일부 내용을 미리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목차
· 책을 내며
· 일본사 연표
· 일본 지도

고대: 도성제의 수용과 변용

01 아스카: 도왜인의 향기가 배어 있는 야마토 왕조의 도읍

1. 일본인의 마음의 고향
2. 아스카로의 천궁과 오하리다궁의 공간 변화
3. 7세기 동아시아의 국제정세와 아스카의 도시화
4. 아스카를 고대 도시로 볼 수 없을까?

02 후지와라경: 역사 속에 사라진 폐도

1. 7세기 동아시아의 정치 변동과 도성제 수용
2. 덴무의 새로운 국가 만들기와 후지와라경 조영
3. 도성제의 이상과 실제
4. 《주례》 〈고공기〉를 모델로 삼은 일본 최초의 도성

03 헤이조경·나라: 폐도의 위기를 넘어 ‘사원 도시’로 거듭난 ‘남도

1. 헤이조경으로의 천도
2. 일본적 도성의 건설과 도시 생활
3. 헤이조경의 불교사원과 ‘남도’의 성립
4. 고도의 관광 도시화

04 헤이안경·교토: 수많은 고난과 역경을 극복한 천년고도

1. 헤이안경의 건설과 도성의 공간 변화
2. 귀족과 서민의 도시 생활과 다양한 도시 문제의 발생
3. 오닌의 난과 교토의 공간 변화
4. 무사 세력의 득세와 교토의 위상 변화
5. 메이지 유신과 ‘역사 도시’ 교토의 탄생

중·근세: 무사의 등장과 조카마치의 성립

05 가마쿠라: 다채로운 매력을 가진 무가의 고향

1. 원정의 붕괴와 무가 정권의 등장
2. 가마쿠라 막부와 정이대장군
3. 도시의 변화와 가마쿠라 불교의 번성
4. 무가 도시의 흥망과 새로운 장소의 무늬

06 아즈치: 오다 노부나가와 최후를 함께한 비운의 성곽 도시

1. 센고쿠 다이묘의 산성에서 성곽 도시로
2. 오다 노부나가의 아즈치성과 ‘덴슈’의 탄생
3. ‘덴슈’에 관한 기록과 공간의 의의
4. 메이지 유신 이후 성곽과 덴슈의 운명

07 오사카: ‘천하의 부엌’에서 ‘위기의 도시’로

1. 도시의 상징과 오사카성
2. 오사카성의 축성과 개조
3. 오사카의 경제적 번영과 메이지 유신 직후의 위기
4. 산업 도시로의 전환과 세키 하지메의 ‘대오사카 도시계획’
5. 전후의 ‘오사카론’과 하시모토 도루의 ‘오사카도’ 구상

08 도쿄: 성곽 도시 ‘에도’에서 세계 유수의 메갈로폴리스로

1.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 입성과 성곽 건설
2. 참근 교대제 실시와 야마노테의 형성
3. 메이레키 대화재와 에도 개조
4. 메이지 유신 이후 도쿄의 공간 변화
5. 간토대지진과 도쿄의 확장
6. ‘글로벌 시티’로의 전환과 도시 공간의 초고층화

근대: 조카마치의 해체와 근대 도시의 형성

09 하기: ‘양이’와 ‘도막’운동의 진원지에서 위기의 지방 도시로

1.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2. 조카마치 하기의 성립과 요시다 쇼인의 쇼카손주쿠
3. 두 차례의 조슈 전쟁과 왕정복고 대호령
4. 메이지 유신 초기 지방제도 개편과 조카마치의 엇갈린 운명

10 가고시마: 메이지 유신의 영광과 비극을 함께 간직한 영욕의 고장

1. 삿초 동맹 사관
2. 사쓰마번의 성립과 해외 무역에 대한 관심
3. 막부 말기의 정치 변동과 사쓰마번의 부상
4. 세이난 전쟁과 가고시마의 근대화

11 요코하마: 서세동점의 위기에서 시작된 ‘개항장 도시’

1. 식민지화의 위기와 페리 제독의 방문
2. 요코하마 개항과 거류지 조성
3. 개항장에 남겨진 데지마의 유산
4. 요코하마의 변신과 ‘미나토미라이 21’ 사업

12 기타큐슈: 악명 높은 ‘공해 도시’에서 ‘친환경 도시’로

1. 기타큐슈의 과거와 현재
2. 일본의 산업화와 공업 도시 야하타의 등장
3. 기타큐슈 공업지대의 군수산업화와 제2차 세계대전
4. 100만 대도시 기타큐슈의 탄생과 위기

13 히로시마: 군사 도시, 그라운드 제로에서 ‘물의 도시’로

1. 평화 도시와 그라운드 제로
2. 원폭의 과녁이 된 이유
3. 그라운드 제로의 복구와 평화기념공원의 조성
4. 재건 사업의 종결과 ‘물의 도시’ 히로시마

저자 소개 
저 : 박진한 (Park Jin-Han) 
인천대학교 지역인문정보융합연구소 소장, 일본지역문화학과 교수. 연세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교토대학에서 역사문화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도시는 역사다』 (2011), 『제국 일본과 식민지 조선의 근대도시 형성』 (2013), 『인천, 100년의 시간을 걷다: 근대 유산과 함께하는 도시 탐사』 (2019) 등의 저서와 『쇼군, 천황, 국민- 에도시대부터 현재까지 일본의 역사』 (2012)의 번역서가 있다. ...

책 속으로
현재 천황가의 선조에 해당하는 야마토 왕조는 7세기 무렵 수·당의 통일 제국 수립과 신라의 한반도 통일이라는 동아시아 국제정세의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천황’이라는 칭호를 사용하는 군주의 주도로 중앙집권적인 국가체제를 수립하고자 노력했다. 

이 시기에 야마토 왕조의 도읍이 바로 아스카였다.
--- p.24

아스카로 천궁을 지시한 이는 592년 대왕의 지위에 오른 스이코 여왕이다. 

그녀가 아스카에 도유라궁을 짓고 천궁을 실시한 이후 이곳은 694년 일본 최초의 도성인 후지와라경藤原京으로 도읍을 옮기기까지 약 100년 동안 일본사의 주된 무대가 되었다.
--- p.27

제1차 견수사에 관한 《수서》의 기사로부터 3년이 지난 603년, 《일본서기》에 따르면 야마토 정권은 쇼토쿠 태자를 중심으로 ‘관위 12 계官位十二階’와 ‘17조 헌법’ 등을 제정하는 등 일련의 정치 개혁을 단행했다.
--- p.33

스이코 여왕의 천궁 이후 아스카 분지는 왕궁뿐만 아니라 소가 씨의 저택과 여러 불교사원이 늘어서 확실히 인근 농촌과 다른 풍경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나 소가노 우마코가 지은 호코사法興寺는 동서 약 220미터, 남북 약 330미터, 부지 면적만 7,000평방미터에 달하며 중앙의 거대한 목탑을 중심으로 세 개의 금당을 배치한 거대한 사찰이었다.
--- p.49

오아마 왕자는 후에 군주의 지위에 올라 덴무天武 천황이 되었다. 

덴무는 강력한 왕권국가를 만들기 위해 율령을 제정하고자 노력했다. 

중국식 도성을 도입하는 것 역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방안의 일환이었다.…

덴무의 사후 그의 유지를 받들어 율령을 반포하고 후지와라경 건설사업을 완수한 이는 다름 아닌 그의 부인 우노노사라라였다.
--- p.60

오아마 왕자는…중앙집권 정책을 더욱 강하게 밀어붙였다. 먼저 전제군주로서 자신의 위치를 강력하게 보이기 위해 ‘대왕大王’, 즉 오오키미를 대신해 새로운 호칭을 제정했다. 

새 군주 호는 한자로 ‘천황天皇’이라 적고 ‘스메라미코토’라고 읽었다.
--- p.62

천황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왕궁 주변으로 호족의 저택과 사원이 무계획적으로 들어선 아스카와 달리 새 도읍인 후지와라경에는 천황의 궁성을 중심으로 위계와 서열에 따라 왕족과 관인의 거주 공간을 배치했다. 

이 같은 공간 배치를 통해 도성은 천황이 지상세계의 주재자임을 과시하는 일종의 기념비적인 공간이 될 수 있었다.
--- p.66

궁전 건물은 천황의 공적인 정무 공간인 대극전과 조당원을 비롯해 궁 내 주요 대문은 초석 위에 기둥을 올리고 기와로 지붕을 잇는 외래 풍의 건축 양식을 사용했다.…

초석 위에 기둥을 올리고 기와를 얻는 건축 양식은 아스카 시기 불교사원을 조영하면서 도입되었는데 궁궐 건립에 사용한 것은 후지와라경이 최초였다.
--- p.69

후지와라경은 건설한 지 불과 16년 만에 새 도읍으로 천도하면서 그 운명을 다했다. 

새롭게 조영한 도성은 ‘헤이조경平城京’이라고 쓰고, ‘나라’에 세운 도읍이란 뜻에서 ‘나라노미야코’라고 읽었다.
--- p.79

헤이조경은 후지와라경과 마찬가지로 조방제의 원칙에 따라 조영되었다. 조방제는 율령제 아래서 조리제條里制와 함께 토지를 구획하는 제도를 말한다. 

조리제가 농민에게 나누어줄 농지를 일정하게 구획하기 위한 토지 구획 방식인 데 반해 조방제는 도성에 거주하는 관인과 주민에게 택지를 나누고 도로를 구분하는 일종의 도시 설계 방식이라 할 수 있다.
--- p.84

헤이조경을 도읍으로 삼았던 시기를 ‘나라 시대’라고 한다. 나라 시대는 후지와라경에서 헤이조경으로 도읍을 옮긴 710년부터 헤이안경으로 천도하는 794년까지를 말한다. 

이 시기 동안 헤이조경에서는 도다이사와 고후쿠사를 비롯해 여러 사찰이 들어서면서 화려한 불교문화가 꽃을 피웠다.
--- p.92

8세기 후반 새로이 천황에 즉위한 간무桓武는…비대해진 사원 세력을 정리하고 후지와라 씨와 같은 귀족들의 정치적인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천도를 선언한 것이다.…

결국 794년 지금의 교토에 해당하는 헤이안경으로 도읍을 옮기게 된다.
--- p.96

헤이안경으로 천도한 이후 헤이조경은 ‘남경南京’ 또는 ‘남도南都’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교토의 귀족들이 후지와라 가문의 씨족 신을 모신 가스가사春日社와 일족의 안녕을 비는 고후쿠사가 위치한 나라에 친밀감을 나타내고자 옛 지명인 헤이안경 대신 교토의 남쪽에 있다고 해서 ‘남경’, ‘남도’라는 이름으로 옛 헤이조경을 부른 것이다.
--- p.97

대외적인 평화와 안정을 바탕으로 헤이안경에 거주하는 관인 귀족은 우아한 궁정문화에 탐닉하는 대신 무예를 연마해 전투를 업으로 삼은 ‘쓰와모노兵’, 즉 무사 집단에 궁정의 경비와 저택의 호위를 맡겼다. 

이들은 조정의 정치 분쟁에 개입해 해결사 노릇을 자처하면서 상황과 섭관가를 제치고 점차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그리고 12세기 후반 마침내 무력을 기반으로 무사 정권을 수립하기에 이르렀다.
--- p.100

간무 천황은…오랫동안 권좌에서 밀려났던 덴지계의 후손에다가 외척마저 힘이 미약한 도왜인 계열이다 보니 조정 내에서 이렇다 할 만한 지지 세력을 기대하기 힘든 형편이었다.…

그가 던진 정치적 승부수가 바로 ‘천도’였다. 

덴무계 천황의 본거지인 헤이조경을 벗어나 새로운 곳으로 천도를 단행함으로써 국정을 쇄신하고 자신의 정치 기반을 닦으려 마음먹은 것이다.
--- p.108

간무 천황의 천도 이후, 헤이안경은 왕조국가의 도읍으로 오랫동안 번성을 구가했다. 

가마쿠라鎌倉에 무사 정권이 수립된 이후에도 도읍의 위상과 역할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 후계 계승을 둘러싸고 1467년에 시작한 무사 정권의 내란과 함께 커다란 위기를 맞게 되었다. 

싸움이 시작된 해의 연호를 따서 ‘오닌應仁의 난’--- p.1467~1477)이라 부르는 10여 년의 전란 속에 교토는 권력 분쟁의 주된 무대가 되었고 그로 인해 사실상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
--- p.132

오다 노부나가의 뒤를 이어 전국 통일에 성공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85년 조정의 최고 관직인 관백에 오르자, 교토로 상경해 그 이듬해부터 자신의 거처를 짓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저택에 ‘세상의 모든 즐거움을 모은 곳’이란 뜻에서 ‘취락제聚樂第’라는 이름을 붙였다.
--- p.141

17세기 중반 이후 상품 생산과 유통의 거점인 오사카, 거대 소비시장인 에도와 함께 문화와 전통의 중심지로 교토를 새롭게 인식하면서 서로 다른 문화와 개성을 가진 세 도시를 비교하는 삼도론三都論이 성황을 이루었다. 

장군의 슬하인 에도, 천하의 부엌인 오사카 그리고 화려한 궁중문화와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교토에 대한 관심은…
--- p.147

1868년…메이지 신정부는 천황을 국가적 통일의 중심에 두고 강력한 근대 국민국가를 건설하고자 노력했다. 

이를 위해 주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869년 천황의 도쿄 이주를 단행했다. 

메이지 신정부는 교토에 거주하던 귀족 역시 천황을 따라 도쿄로 이주할 것을 권유했다. 

하지만 헤이안경 이래 오랫동안 교토 생활에 익숙한 귀족들은 도쿄에서의 생활을 선호하지 않았다. 

그러자 신정부는 1870년 11월 20일 옛 무가와 귀족에게 도쿄 거주를 명하는 포고문을 발령했다
--- p.150

도쿄에서 전철로 한 시간 정도면 닿을 수 있는 가마쿠라鎌倉…를 부르는 또 하나의 이름은‘ 무가의 고향’이다. 다이라平 가문과 미나모토源 가문, 두 무사단의 오랜 싸움에서 승리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朝가 이곳에 막부를 세우면서 무사 정권을 수립한 곳이기 때문이다.
--- p.161

가마쿠라 막부와 운명을 함께했던 비운의 장소라는 역사에다 오랜 사찰과 신사가 만들어 내는 정숙하고 엄숙한 분위기, 바닷가 해변의 아름다운 풍광 이 세 가지가 한데 어울리며 가마쿠라는 오늘날 많은 관광객이 방문하는 인기 도시가 될 수 있었다.
--- p.162

1180년 10월 가마쿠라에 도착한 요리토모는 오쿠라에 거관을 짓고 그해 12월 12일 이곳으로 처소를 옮겼다. 

그러자 300여 명이 넘는 무사들이 집결해 그를 ‘가마쿠라의 주군’으로 추대하고 주변에 거처를 마련했다고 한다.…

이처럼 신사를 중심으로 주변에 거관과 가신단의 거처를 둔 공간 배치는 이후 여타 무가 정권에서 찾아볼 수 없는 가마쿠라만이 갖는 공간적인 특징이다.
--- p.169

가마쿠라 막부에서 시작한 무사 정권은 무로마치와 에도 막부로 이어져 1868년 메이지 유신에 의한 신정부 수립에 이르기까지 무려 700여 년간 계속되었다. 

요리토모의 가마쿠라 막부로부터 무사 정권이 시작된 만큼 가마쿠라는 ‘무가의 고향’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 p.173

가마쿠라가 상업 도시로 번성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이는 호조 야스토키였다. 

야스토키는 가마쿠라 해변에 선박이 정박할 수 있도록 인공적인 항만시설을 만들었다. 

아울러…간토 인근 지역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정비했다.…가마쿠라는 간토를 포함한 동국 일대의 상업 중심지로 거듭날 수 있었다.
--- p.178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화와 함께 도쿄, 요코하마 같은 대도시에 인구가 급증하자 가마쿠라에 새로운 전기가 찾아왔다. 특히나 1889년…요코스카선이 개통되면서 온난한 기후와 아름다운 해변 풍광을 가진 가마쿠라에 별장을 지으려는 부호들이 앞다투어 몰려들었다. 

그 결과 가마쿠라는 도쿄 인근의 고급 휴양지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 p.187

노부나가가 지향했던 통일의 꿈과 무가 도시의 건설사업은 그의 후계자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이어졌다. 

전국적인 상공업 도시로 발전하는 오사카와 인구 100만이 넘는 대도시로 성장한 에도는 히데요시와 이에야스가 앞선 아즈치의 축성 경험을 계승·보완해 건설한 조카마치였다. 

아즈치가 없었다면 오사카나 도쿄 역시 현재와 매우 다른 모습을 가진 도시가 되었을 것이다.
--- p.192

노부나가가 해발 198미터에 달하는 아즈치산 정상에 다시 큰 돌을 올려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약 34미터 높이의 7층 천수각을 지은 것은 이처럼 장대한 건축물을 건립할 수 있을 만큼의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과시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아즈치를 방문하는 상인이나 외부인들은 시가지에 들어서기 전부터 높이 솟은 덴슈를 바라보며 그곳에 거주하는 노부나가의 존재를 자연스럽게 인식했을 것이다.
--- p.203

메이지 유신 이후…근대적인 군대의 육성이 절실했던 메이지 신정부는 병제를 개편하는 가운데 병력 주둔지이자 군사시설로 성곽부지…에 대한 관리를 육군성에서 맡도록 했다. 

육군성은…1873년 에도성을 비롯해 41개 성곽을 보존하는 대신 144곳의 ‘폐성’을 결정하는 태정관령을 반포했다.
--- p.208

히데요시는 혼간사本願寺와의 전투로 폐허가 된 이곳에 성을 쌓고 각지의 상공인을 불러들여 훗날 오사카가 상공업 도시로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을 다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후 오사카는 전국적인 상업·유통의 중심지로 성장하며 경제적인 번영을 누린 덕에 ‘천하의 부엌’으로 불리게 되었다.
--- p.217

히데요시는 4년에 걸쳐 오사카성을 대대적으로 확장하는 공사를 벌였다.…

요도강을 끌어들여 조성한 삼중의 해자와 삼중의 성곽으로 겹겹이 둘러싸인 오사카성은 난공불락의 요새로 거듭날 수 있었다.

 4년에 걸친 오사카성의 대대적인 확장·보강 공사는 인생 말년에 어렵사리 얻은 늦둥이 히데요리를 보호하려는 아버지 히데요시의 염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 p.223

에도에서 소비하는 미곡과 각종 생필품은 기나이, 특히나 경제적으로 앞선 오사카에서 들여와야만 했다. 

에도 주민들은 오사카에서 싣고 온 물품을 ‘내려온 것’ , 즉 ‘구다리모노下りもの’라고 부르면서 질 좋은 상품으로 귀하게 여겼다.
--- p.230

관영 군수공장은 청일전쟁--- p.1894), 러일전쟁--- p.1904)의 거듭된 대외전쟁으로 규모를 확대하며 대포에 사용하는 강철이나 동을 제련하는 금속공업, 나사나 볼트를 제조하는 부품산업, 공작기계 등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후 군수산업은 오사카가 근대적인 산업 도시로 발전하는 데 중요한 디딤돌이 되었다.
--- p.240

황거를 중심으로 도쿄 중심가에서 표고가 높은 북서쪽을 ‘야마노테山の手’ , 바닷가에 접한 남동쪽의 저지대를 ‘시타마치下町’로 나누어 부른다.…

17세기 후반 당시 야마노테와 시타마치는 지형에 따른 구분이자 신분에 따른 거주지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 p.265

다이묘의 성곽 신축을 금지하고 개축 시에는 반드시 미리 막부에 신고하도록 지시하는 한편--- p.제6조), 다이묘가 일정 기간 에도에 머무르게 하는 ‘참근參勤’ 교대를 지시했다--- p.제9조). 막부는 상황에 따라 〈무가제법도〉의 내용을 조금씩 수정하며 다이묘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 p.275

메이레키 대화재 이후 막부는 화재를 방지하기 위해 도심에 있는 신사와 사원을 아사쿠사 일대로 이전시켰다.…사원들은 영험하기로 소문난 비불秘佛과 보물을 일반에게 공개하는 ‘가이초開帳’를 비롯해 스모 행사 등을 적극적으로 주최했다.…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자, 이곳의 사원은…토지의 일부를 아예 조닌에게 빌려주거나 건물을 지어 임대 사업을 벌였다.그 결과 신사와 사원 앞에 새로운 시가지가 형성되었다. 이로써 아사쿠사는 에도 인근에 자리한 ‘명소’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 p.285

메이지 천황은 8월 27일 즉위식을 거행하고 전국을 순행한 다음 마침내 도쿄에 입성했다. 

그리고 10월 13일 “에도성을 도쿄성으로 개칭하고 이를 황거로 삼는다”라는 포고를 내렸다. 

이로써 에도성은 더는 쇼군이 아닌 천황의 정식 거처가 되었다.
--- p.288

무가 저택의 사용처를 놓고 고심하던 신정부는 1869년 8월 나름의 해결책을 내놓았다…

뽕나무 숲과 차밭을 조성하라는 포고를 내린 것이다.…

현재 아오야마가쿠인대학교가 있는 아오야마를 비롯해 도쿄 시내에 총 100만여 평이 넘는 곳에 뽕나무와 차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오늘날 트렌디한 카페와 쇼핑가로 유명한 아오야마 일대가 뽕나무와 차밭이었다는 사실은 쉽게 상상이 가지 않는다.
--- p.291

긴자의 재건 사업은 영국인 기사인 토마스 제임스 워터스에게 위임했다.…

그는 전차와 같은 근대적인 교통수단이 왕래할 수 있을 정도로 넓은 가로를 정비한 다음 벽돌과 돌을 자재로 사용해 1층에 아케이드를 두는 영국의 조지안 주택 양식 2층 건물로 통일적인 경관을 가진 시가지를 건설했다.
--- p.295

외무대신으로 ‘임시 건설국’ 총재에 취임한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隆는 1886년 독일 출신의 건축가인 베크만에게 ‘관청집중계획’ 의 설계를 의뢰했다. 

 

베크만은 에도성 일대의 해자를 메워 옛 에도의 풍경을 일소하는 대신 지금의 긴자 일대를 중심으로 오스만 남작의 파리 대개조 사업에 버금갈 만한 수도 개조 사업을 제안했다.
--- p.298

당시 신문에서는 런던의 어느 상업지구에 와 있는 느낌이 든다고 해서 ‘작은 런던’이라고 불렀다. 

현재와 같은‘ 마루노우치’는 1920년대 말부터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우치구루와?郭, 즉 옛 에도성의 ‘내곽 안쪽’이라는 뜻을 담은 지명이었다. 

마루노우치는 1914년 이곳에 도쿄역이 들어서면서부터 일본의 상업 중심지로 본격적인 발전을 시작했다.…오늘날 일본의 ‘월 스트리트’로 불리고 있다.
--- p.299

세계유산 등재 과정에서 아베 총리가 자신의 선거구인 야마구치현을 배려하기 위해 하기 조카마치와 요시다 쇼인의 쇼카손주쿠를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 목록에 넣고,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 p.322

조슈번이 존왕양이 운동과 도막 운동의 중심에 설 수 있던 것은 단지 재정 개혁을 통해 얻은 수익금 때문만이 아니다. 다카스기 신사쿠를 비롯해 기도 다카요시,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과 같이 메이지 유신에 앞장섰던 인사들은 모두 조슈번 출신이다. 

그런데 이들은 요시다 쇼인의 쇼카손주쿠에서 함께 수학했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 p.329

일본 최초로 근대적인 제철소가 들어선 야하타, 야하타와 함께 제철·기계 산업이 번성한 공업 도시 도바타, 석탄, 철광석, 철강 제품 등의 수출입 항구인 와카마쓰, 고쿠라번의 조카마치이자 군사 요충지인 고쿠라, 간몬해협에 접한 특별 무역항 모지는 모두 기타큐슈 공업지대에 속한 도시들이다. 이들 5개 도시는 1963년 합병으로 현재의 기타큐슈시가 되었다.
--- p.404

환경 의식이 그다지 높지 않은 당시, 높은 굴뚝에서 뿜어낸 “불타오르는 화염”과 “자욱한 연기”는 “천하의 장관”인 제철소와 철의 도시 야하타를 상징하는 표상이었다.
--- p.412

출판사 리뷰
“역사는 유적을 따라 걷는 길”

이건 서구의 한 역사학자가 한 말인데 이 책을 보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어렵고 낯선 일본사를 도쿄, 오사카, 교토같이 친숙한 도시를 통해 살폈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일본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13곳의 도시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왕조 교체가 없었던 일본에서는 실권이 없는 천황을 대신해 여러 무사 정권이 권력을 잡았다. 

그리고 정권이 교체할 때마다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가 이동하며 새로운 도시가 등장했다.

 오늘날 일본을 대표하는 도시들은 모두 이렇게 만들어졌다. 

지은이는 고대, 중·근세, 근대의 큰 흐름 으로 갈래지어 개별 도시가 겪어온 역동적인 과거와 현재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를테면 정석적인 접근인데 ‘천황’이란 명칭의 유래(62쪽), 중국?조선과 달리 무사 정권이 지배했던 배경(100쪽) 등이 그런 류의 서술이다. 

그런가 하면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도련님》, 만화 《슬램덩크》가 각각 오사카와 가마쿠라의 설명에 끼어드는 등 읽는 재미도 각별하다.

고대~근대를 꿰는 13개 도시

제1부 고대 편에서는 천황과 공경 귀족 등의 지배층이 거주하던 역대 ‘도읍’을 살펴본다. 

일본인들에게 마음의 고향이라 불리는 ‘아스카’, 일본 최초의 도성인 ‘후지와라경’, 사슴공원과 도다이사로 유명한 ‘나라’, 천년의 역사를 가진 ‘교토’로 이어지는 도읍의 천도를 통해 천황 중심의 정치제도와 도성제에 입각한 도읍의 정비 과정을 꼼꼼히 정리해보았다.

고대 도읍에 이어 제2부 중·근세 편에서는 ‘무가’ 도시를 들여다본다. 

이웃한 한반도나 중국과 달리 일본에서는 12세기 후반 가마쿠라 막부가 성립한 이래 메이지 유신 직전까지 700여 년 동안 무사 지배가 계속되었다. 

무가 도시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가마쿠라, 오다 노부나가의 아즈치와 함께 도쿠가와 이에야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건립한 에도, 오사카가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동·서 지역의 대표 도시로 거듭나는 과정을 통해 무사 지배의 오랜 전통이 도시 공간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 살펴본다.

마지막으로 제3부 근대 편에서는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중요한 역사적 사건의 무대가 된 도시를 찾아간다. 

지금은 지방 중소 도시에 불과한 하기와 가고시마는 메이지 유신의 주역이라 할 수 있는 사쓰마번과 조슈번의 본거지이자 삿초동맹 이후 막부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도막운동의 중심지였다. 

이에 반해 요코하마, 기타큐슈, 히로시마는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 국민국가의 수립, 산업화, 제국주의 팽창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패전에 이르는 과정에서 수많은 위기를 넘기며 흥망성쇠를 경험한 도시들이다. 

개항 이후 여러 도시가 겪은 파란만장한 이야기는 일본이라는 단일한 국가 내러티브로 수렴되지 않는 다양한 근대의 모습을 확인하고 근대화의 양면성을 보여줄 것이다.

일본 ‘여행’의 친절한 길라잡이

가까운 사이일수록 자신의 관점에서 상대를 바라보면 오해를 사거나 의를 상하기 쉽다. 

그래서 가까울수록 서로의 다름을 인정해야 상대방의 본심과 속살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다. 

해외여행을 통해 직접 만난 일본의 도시는 한자와 가나로 쓴 간판, 에스컬레이터의 좌측통행 같은 것만 제외하면 서울, 부산 같은 우리나라의 대도시와 별 차이가 없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일본의 도시가 지나온 역동적인 역사를 이해하고 나서 거리를 나서면 도시 곳곳에 숨겨진 이야기와 매력이 하나둘 새롭게 눈에 들어올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책 머리에 연표와 지도를 삽입해 일본사의 전체 흐름과 각 도시의 위치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한 배려도 눈길을 끈다.

이 책은 일본 여행을 계획 중이거나 혹은 다녀온 이들이 단순한 관광객에 머물지 않고 도시의 역사와 문화를 깊이 이해하는 여행자가 되는 데 훌륭한 길라잡이가 될 것이다.

* 출처 : 예스24 <https://www.yes24.com/Product/Goods/1397799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