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일본학 연구 (학부전공>책소개)/2.일본문화사상

도널드 리치의 일본 (2024) - 미학 경계인이 바라본 반세기

동방박사님 2024. 10. 30.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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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60년간 오직 일본을 사유한
도널드 리치의 일본론 20편

역사의 긴 복도를 되돌아보다

일본에는 일본에 오랫동안 거주하며 그들 나라에 대해 글을 써온 외국인의 계보가 있다. 도널드 리치도 그중 한 명으로,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60년 이상 일본에 살면서 외국인(특히 서양인)들이 일본을 바라보는 시선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가령 오즈 야스지로나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가 서양에 알려진 데에는 그의 영향력이 있었다. 영화평론가이자 큐레이터로서 그는 이 책에서 일본 영화뿐 아니라 도시와 사회, 사람, 정원, 음식, 다도에 관해서 심미적인 정취들을 꿰뚫으면서 일본의 ‘아름다움’을 탐구해나간다. 안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잘 모른다. “옆에서 보아야만 깊게 들여다볼 수 있다.”(E. M. 포스터) 저자 역시 경계인으로서 옆에서 일본을 오래 들여다봤다.

『도널드 리치의 일본 미학』은 도널드 리치가 1960년대부터 50여 년에 걸쳐 쓴 일본에 대한 산문 중에서 20편을 골라 번역한 것이다. 각각 일본의 형태, 일본 영화, 일본 문자, 파친코, 패션, 키스, 무너져가는 내면화, 텅 빈 공간과 시간의 추구, 일본인이 드러내는 친밀함의 이중성, 삶과 죽음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 등을 다룬다. 50년에 걸쳐 쓴 산문을 한 번에 보여주면 어떤 흐름이 읽힐까. 흐르는 시간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 일본적 특성이 드러난다. 즉 기본적인 전제는 그때나 지금이나 유효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전 시대의 아름다움은 대부분 화석화되었거나 혹은 통속화되었다. 그의 글 몇몇의 후반부가 회한의 감정을 담고 있는 이유다. 그렇더라도 “역사의 긴 복도를 되돌아보는 일은 가치가 있다”.

글은 자신이 음미하고 분석하는 대상을 얼마쯤 닮기 마련이다. 일본의 아름다움을 궁구하던 리치의 글은 깊이 있고 정갈하며 미적 경험 속으로 온전히 뛰어드는 글이다. 이 책은 관찰하고, 인식하고, 그것을 통해 일본을 이해한다. 일본의 겉모습에서 시작해 나선형으로 걸어가며 그 심부를 산책한다.
 
목차
옮긴이 서문_낭만주의자의 거울

1. 일본의 형태(1962)
2. 일본 영화에 대한 어떤 정의(1974)
3. 표지판과 문자(1974)
4. 파친코(1980/1986)
5. 패션의 용어(1981)
6. 일본의 키스(1983)
7. 일본을 말하다(1984)
8. 일본의 리듬(1984)
9. 워크맨, 망가, 사회(1985)
10. 무너져가는 문화적 내면화(1991)
11. 비움으로 채우는 공간(1992)
12. 친밀함 그리고 거리두기: 일본에서 외국인으로 산다는 것(1993)
13. 일본 영화에 등장하는 열차(1993)
14. 일본: 반세기의 변화(1994)
15. 일본과 이미지 산업(1996)
16. 일본의 자동차 문화에 대한 단상(2002)
17. 경계 넘나들기: 일본의 사례(2004)
18. 사회와 영화에서의 일본 여성(2005)
19. 일본 영화에 등장하는 삶과 죽음에 대한 단상(2006)
20. 일본 미학 소고(2007)

저자 소개
저 : 도널드 리치 (Donald Richie) 
1924년 미국 오하이오 리마 출생. 1947년 연합군 사령부의 군무원으로 일본에서 살기 시작했다. 컬럼비아대학에서 수학한 후 일본으로 돌아가 2013년 88세의 나이로 세상을 뜰 때까지 평생 대부분의 시간을 그곳에서 생활하며 일본 사회와 문화, 영화에 관해 통찰력 가득한 글을 남겼다. 오즈 야스지로와 구로사와 아키라를 영어권에 본격적으로 소개한 영화평론가로 잘 알려져 있으며, 여러 편의 실험영화를 직접 제작하기...

역 : 박경환 
2002년부터 20여 년간 중국과 일본에서 거주했다. 동아시아 삼국의 역사와 문화에 자연스레 깊은 관심을 가지면서 『일본의 굴레』 『도널드 리치의 일본 미학』 『부역자』 『사라진 일본』을 우리말로 옮겼다.

책 속으로
형식을 극히 중시하는 일본의 태도는 주로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에 반영되어 있다. 의례라는 것은 인간에 의해 변형되고, 윤리라는 것은 즉흥성에 의해 훼손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일본에서는 패턴을 눈에 보이는 형태로 만들고, 이름은 글로 써서 읽을 수 있을 때에만 기억된다. 귀로 듣는 것은 신뢰하기 어렵고 눈으로 보는 것이 확실하다. 일본은 명함과 온갖 광고의 나라다. 아마추어 화가들과 사진가들의 나라이기도 하다. 모두 그림을 그릴 줄 알고 사진을 찍을 줄 안다. 시각적 감각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아는 것이다. 마치 절대음감과도 같다.
--- p.18

일본의 전통 영화들을 보면 이들은 현실이란 겉으로 드러난 것이 전부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듯하다. 뒷면에 숨겨진 현실이라든가 가치 판단에 대한 고려가 느껴지지 않는다. 일본인은 개인으로서의 죄책감은 없으나 사회적 수치심은 갖고 있는 사람이라고들 하지 않던가. 이와 대조적으로 서양에서는 드러난 현실만이 유일한 현실이라고 믿지 않는다. 개인적 양심을 강조하고, 뒷면에서 배회하는 현실에 주목한다. 따라서 서양인들은 사회적 수치심을 거의 느끼지 않고 대신 개인적인 죄책감에 훨씬 민감하다.
--- p.29

이런 조그맣고 공허한 순간들은 오즈의 영화에 숨 쉴 공간을 제공하는 모공과도 같다. 그 공허함으로, 그 존중과 배려로 영화를 규정한다. 오즈의 이런 솜씨를, 일단 플롯의 전개가 끝나면 가차 없이 장면을 끝내버리는 보통의 감독들과 비교해보라. 마치 등장인물이 아니라 플롯 자체에만 관심이 있다는 듯한 태도가 아닌가. 이들은 그렇게 플롯만을 중시하다가 해당 장면의 가장 의미 있는 부분을 놓쳐버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 p.35

일본인들은 단어의 뉘앙스에 민감한 만큼 단어가 어떤 글씨체로 쓰였는지에 대해서도 민감하다. 서양에서는 출판업이나 인쇄업에 종사하지 않는 이상 누구도 글자의 다양한 폰트와 스타일이 주는 영향에 그다지 민감하지 않다. 뉴스의 헤드라인을 굵은 글씨로 쓴다거나 결혼 청첩장에는 화려하게 굴린 글씨체가 쓰인다는 것을 아는 정도일 뿐이다. 그리고 요즘에는 거의 모든 커뮤니케이션이 기계로 인쇄되었거나 화면에 타이핑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손글씨의 섬세한 뉘앙스에 둔감해져 있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서법이 여전히 중요한 위상을 차지한다.
--- pp.54~55

파친코는 다른 모든 주요한 몰입 활동들과 마찬가지로 겉보기의 모습이 전부가 아니다. 파친코의 진정한 목적은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거대하다. 그것은 바로 다름 아닌 소멸이다. 자기 소멸은 지극한 쾌락의 경지다. 이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그 상태가 무한히 계속된다. 여기 도달하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잘 맞는 기계를 찾아야 한다. 그런 기계는 나에게 맞춰 반응해주는 것 같은 조용한 벗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신과 기계 사이의 이런 말없는 교감은 당신을 망각으로 이끈다. 당신은 지금 하고 있는 행위를 반쯤만 의식하게 된다. 파친코 기계 앞에서 겉으로 행하는 행위의 목적은 의식하고 있지만, 동시에 진짜 이유는 기꺼이 망각해버린다. 파친코 업소에서 나올 때는 기운을 되찾은 새로운 모습으로 나온다.
--- p.68

다도의 마지막에 손님들이 고개 숙여 인사하고 집으로 돌아가듯, 영화가 끝나가면 의미들이 흘러왔다가 사라진다. 공간이 아닌 시간에 있어서 비어 있음의 풍부함이라고 할 만하다. 소멸의 불멸, 영원의 찰나. 사례는 넘쳐난다. 정성 들여 이어붙인 깨진 찻잔, 손을 타서 변색된 은빛 차항아리, 한순간을 영원히 박제하는 하이쿠. 모두 시간의 작용 그 자체로부터 만들어진 사물들이다.
--- p.143

이 모든 것은 이제 지나간 얘기다. 이키는 ‘쿨한 것’으로 변했고, 자연은 잊혔으며, 방법은 수단으로 전락했다. 그러므로 역사의 긴 복도를 되돌아보는 일은 가치가 있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던 세상, 아름다움의 특징들을 분류하던 세상, ‘미학’이라는 단어가 필요 없던 세상을 돌아보는 일은 가치가 있다.
--- p.332

출판사 리뷰
일본을 생각한다는 건 형식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나라의 모든 틀이 겉으로 드러나 있는 나라.’ 저자는 일본을 이렇게 규정한다. 바꿔 말해 “패턴화된 나라”라 할 수 있다. 일본을 경험해보면 알 수 있듯, 그들은 형식에 온 마음을 기울인다. 이 틀로 많은 것이 해석될 수 있다. 일본에는 전화를 거는 마땅한 방법, 차를 마시는 마땅한 방법, 돈을 빌리는 마땅한 방법이 있다. 즉 절대적인 형식이 존재하고 추구된다. 다른 나라라고 이런 게 없는 것은 아니나, 일본에서는 이것이 ‘행위의 예술’이 된다. 언어는 사회를 반영하기 마련인데, 일본어에서 관용구가 발달한 것도 이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들은 용서를 구할 때, 슬픔을 표현할 때, 화내거나 사랑을 표현할 때조차 쓰는 관용구가 있으며, 이는 패턴화되어 있다.

형식을 극히 중요시하다보니 일본인의 태도는 주로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에 반영되어 있다. 저자는 한 나라의 패턴에 입문하려면 공중에서 그곳을 내려다보라고 말한다. 잘 개간된 일본의 땅은 산과 산 사이로 논밭이 뱀처럼 구불구불 펼쳐지는데, 이는 독일의 말끔한 사각형이나 북미의 광활한 체스판과 크게 다르다. 저자는 여기서 자연을 본뜨는 일본인의 태도를 발견한다. 논밭이 이런 모양인 것은 산을 관찰하고 계곡을 따라 논밭을 일궜기 때문이며, 풍경이 펼쳐진 곡선을 따라 집을 만들고, 나무가 있으면 베지 않은 채 두고 오히려 지붕을 뚫었던 나라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연을 존중하는 마음인데, 일본인은 여기서 한발 더 나간다. 단지 자연스럽다고 해서 아름다운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자연엔 잠재성만 있어, 거기에 손을 대고 꾸며야 한다. 그러면 형태가 생겨나고 의미가 찾아진다.

일본인이 전통적으로 아름답다 여긴 홀로 선 바위나 한 줄기 대나무 가지를 보라. 도코노마에 놓인, 아무것에도 기대지 않고 균형 잡고 있는 한 줄기 나뭇가지를 보라. 여기서는 ‘정식으로 균형을 갖춘 것이 꼭 좋은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는 규칙’이 존재한다. 이 같은 비대칭의 절묘한 균형감은 일본 정원에서 볼 수 있다. 저자는 이러한 패턴과 형태, 형식과 디자인이 끊임없이 만들어져 일본을 규정한다고 본다. 사찰이든 기모노든 목수의 톱이든, 어디에나 패턴이 있다. 게다가 현대의 새로운 것들은 대개 옛것의 모양을 띠고 있다. 그리하여 일본인에게 사당을 제대로 짓는 방법은 오직 하나밖에 없고, 기모노의 허리끈인 오비를 제대로 짜는 방법도 오직 하나밖에 없다(다만 개성의 표출은 장식에서 허용되며, 무수한 창조는 바로 여기서 이뤄진다). 외국인 입장에서 일본 미학의 정수를 더 잘 느낄 수 있는 것은, 기능은 떼어놓은 채 사물을 관찰해 시각적 특성을 더 두드러지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 속에서 자연법칙을 따르는 디자인뿐 아니라 사회 규율까지 간파해낸다. 그가 일본을 “각각의 모듈로 이루어진 것들의 원조” “최초의 조립식 건물의 땅”이라고 말하는 까닭이다.

적게 보여줌으로써 더 많이 느끼도록

이 책에 실린 20편의 글 중 4편은 영화를 집중적으로 다룬다. 그중 「일본 영화에 대한 어떤 정의」는 서양 영화들과 달리 일본 영화에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가에 대한 하나의 틀을 제공해준다. 가장 큰 차이점은 뭘까? 저자에 따르면, 서양 영화는 스토리, 플롯, 액션을 중시하는 반면, 일본 영화는 ‘정취 중심의 사실주의’가 특징이다. 특히 일본 감독들은 공간을 제한해 정취를 만들어내곤 한다. 이를테면 도요타 시로의 「묵동기담?東綺譚」은 집 한 채 안에서 거의 모든 내용을 펼쳐 보인다. 한정된 공간을 도구로 사용해 간접적인 표현을 하는 것은 일본인의 성향으로, 여기서 모호하고도 심플한 이야기가 전개된다. 관객은 영화를 보며 그 집과 친숙해지고 그곳에 살고 있는 여인과도 친숙해지며, 거기에 사실적 디테일이 덧입혀지면서 그 영화만의 정취가 생겨난다.

이처럼 ‘적게’ 보여주는 방식은 고리키의 소설 「밤주막」을 영화화한 프랑스 작품과 일본 작품을 비교해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프랑스 영화는 캐릭터에 관심을 쏟아 시작부터 클로즈업 장면을 보여줬던 반면, 일본 영화가 보여준 것은 하숙집과 밭마당, 하늘, 인물의 캐릭터가 전부다. 후자처럼 적게 보여주면 어떤 효과가 발휘될까. 관객은 보이지 않는 것을 알고자 스스로 더 많이 생각하면서 영화에 다가간다. 가령 미조구치 겐지 감독은 영화의 정취를 만들기 위해 카메라가 멀찍이 떨어져서 인물의 행동을 롱테이크로 잡도록 한다. 그러면 관객은 장면이 주는 아름다움을 천천히 흡수하는 가운데 멀리 보이는 연인들에게 그 순간이 어떤 의미인지를 깨닫고, 마침내 그들이 느끼는 것과 같은 정취를 느낀다. 감독이 더 적게 보여줄수록 관객은 더 많이 느낀다.

저자는, 영화 예술이란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그 본질을 해치지 않는 방식으로 거기에 패턴을 부여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본다. 그런데 플롯 중심의 서양 영화들은 행위와 사건을 필요로 하기에 영화의 본질을 흐려놓을 때가 있다. 아쉽게도 현대의 일본 영화에서도 정취는 사라지고 있다. 오즈의 여러 영화가 전통적인 시간 활용법을 보여주며 섬세한 감정의 얽힘을 보여줬던 것과 달리, 요즘 일본인들은 오늘을 항상 내일을 기준으로 바라보고 경제관념이 우선하기에 그런 미덕은 사라졌다. 저자의 에세이는 미래 시점이 현재로 당겨져 지배적 가치가 될 때 삶과 예술은 시간을 잃어버리고 느낌을 잃어버린다는 점을 간파해내는데, 이런 회고적 느낌이 저자의 산문의 묘미다.

시간이 비어 있음의 풍부함

일본은 구조적으로 공백이 전체를 받치고 있는 나라다. 일찍이 바르트가 관찰했듯이, 도쿄의 중심은 텅 비어 있고, 그 비어 있음으로 인해 도시의 모든 움직임은 지탱되고 있었다. 도널드 리치 역시 족자 그림이든 현대의 광고든 거기엔 빈 공간이 왜 이리 많을까 하고 의문을 품었다. 하지만 일본인이 공백을 채우지 않는 이유는 공백이 이미 공백으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비어 있음에서 가득함을 보는 것은 창조적인 행위”라고 말한다. 즉 일본인은 비어 있음에 몰두해 생겨나는 가득함을 통해 발전해왔다. 이 개념을 뒷받침하는 사례는 많다. 아무것도 아닌 진흙은 넘쳐나지만 돈이 없다고? 그럼 중국이나 한국처럼 뛰어난 도자기를 만들어내면 된다. 집에 빈 공간은 많은데 가구가 없다고? 그럼 공간 자체의 미학을 살려 마間라는 개념을 만들어내면 된다. 일자리 없는 사무라이들의 시간이 남아돈다고? 그럼 행위를 의례화하고, 속세의 루틴을 고양시켜 다도를 만들어내면 된다.

아무것도 없는 무에서 뭔가가 생겨나는 이유는 필요하기 때문이다. 일본 정원사들은 주변의 돌과 나무만으로 빈 공간에 이상적인 무언가를 창조해낸다. 그들은 그것을 자연이라 부르지만, 저자는 그것을 ‘미학’이라 부른다. 무엇이든 의미가 부여되면 의미는 닫히고 암시는 침묵 속으로 꺼진다. 반면 비어 있고 열려 있다면 모든 가능성은 여전히 살아 있다. 이런 점은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에서도 볼 수 있다. 그의 영화 장면들은 곧잘 텅 비어 있다. 인물들은 아직 등장하지 않았거나 이미 화면에서 떠났다. 카메라는 어스름한 방에 놓인 꽃병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다. 그러면 관객은 러닝타임 동안 차차 키워온 감정으로 이 꽃병을 채운다. 흘러왔던 의미들은 영화가 끝나면 곧 사라진다. 저자는 이것을 “시간에 있어서 비어 있음의 풍부함”이라고 규정한다. 즉 “소멸의 불멸”인데, 도널드 킨도 소멸성이야말로 “가장 일본적인 특유의 미학적 이상”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일본은 대놓고 소멸성을 찬양한다. 그리고 채우기 위해서는 먼저 비어 있어야 한다. 만약 풍부한 비어 있음이 꽉 차버린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일본에도 많은 것이 꽉꽉 들어차기 시작했다. 게다가 넘쳐나는 시간은 더 이상 사색의 공간이 아니고 파친코나 가라오케로 죽여야 하는 시간이다. 왜 이리됐을까. 저자는 아마도 일본인의 “오랜 경쟁적인 성향 탓에 극히 실용적인 특징”이 발휘되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제 비움의 세계는 과잉으로 채워지면서 여백에서 생기던 창의성도 사라졌고, 방향은 자연스레 ‘소비’로 향하고 있다.

앞에 매달려 대롱거리는 친밀함

20세기 중반에 일본에 온 저자는 여느 서양인처럼 일본 문화를 알고 싶다는 충동에 빠져들었고 이방인으로서 ‘낯섦’을 느끼며 그곳에서 해방감을 누리기도 했다. 특히 비평가로서 좋았던 점은, 자기 고향에 대한 거리두기와 관대함이 생길 뿐 아니라 이방의 문화에 대해서도 친밀함과 거리두기의 조합으로 날카로운 시각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에 탐닉한다 해도 외국인은 늘 눈치를 받는다. 가령 택시 기사들은 이런 질문을 던진다. “어디에서 오셨어요? 그렇지만 고향은 자주 방문하시죠?”(자기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겠냐는 의미다.) 오랜 세월 정착한 외국인이라도 이런 질문과 시선을 받으면 거리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데, 하지만 일본인들이 이것은 의도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겉으로 늘 친절하고 친밀한데, 그것은 손님이 즐겁기를 바라는 진정한 욕구와, 면전에서 싫다고 말할 수 없는 문화, 그리고 상대로부터 이익을 얻기를 바라는 마음의 결과물이다.

혼자 외로이 있는 사람, 일본어를 잘 못하는 사람, 일본 문화가 생경한 사람이야말로 친밀감을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친밀감은 일본인의 태도를 보면 언제라도 누릴 수 있을 것처럼 앞에 매달려 대롱거리고 있다. 이때 저자는 알라스테어 레이드의 말을 떠올린다. 그는 “외국인이 치유 가능한 낭만주의자”라고 했다. 즉 그들은 세상 어디서든 자신이 집처럼 정착할 장소가 있으리라는 환상을 품고 있는데, 외국인이라는 특성 때문에 모든 만남에서 거리두기의 대상이 된다. 만약 외국인으로서 당신이 이 점을 유익하다고 여기지 못한다면 당신은 치유된 것이 아니다. 저자 역시 자신의 눈앞에서 대롱거리는 일본인의 친밀함을 바라보며, 외국인으로서 외롭고 높은 자리에 앉아 자신의 고향 오하이오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일본은 고집스레 저자를 자신들의 일부로 받아주지 않는데, 저자는 오히려 이것이 가장 좋은 자리라고 여긴다. 그 이유는 소속감보다 자유가 더 중요한 가치이며, 온 세상을 객지로 여길 줄 아는 이야말로 완벽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출처 : 예스24 <https://www.yes24.com/Product/Goods/1111344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