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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지 마라 생명이다 : 다시 김교신을 만나다

동방박사님 2021. 12. 24. 0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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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2016년 지금, 한국 땅의 현실에서
김교신을 ‘만나는’ 책!


이 책은 김교신이라는 한국 현대사가 배출한 정신적 거인의 어깨에 올라 바라본 21세기 한국 사회의 모습이다. 《김교신 전집》에 기대어 한국 사회와 우리 주변을 살펴보려는 시도다. 정치, 사회 문제는 물론 우리 일상의 자잘한 국면들을 김교신의 눈으로 짚어보자는 것이다. 현직 대통령에 대한 비판도 서슴지 않는다. 저자는 김교신의 성서연구와 신앙생활을 통해 주변을 비추어 보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백 교수의 글에서 우리는 김교신이 우리에게 저 멀리 히말라야의 거봉 같은 높고도 동떨어진 존재가 아니라, 우리 곁에 다가와 다정하게 말을 건네는 길동무(페이스메이커)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엄혹한 일제강점기에 김교신 같은 이가 없었다면 우리 현대사는 얼마나 빈약해졌을까?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올곧게 실천했던 김교신이 없었다면 한국 기독교는 얼마나 초라해졌을까. 그 시절에 김교신 같은 반듯한 거인이, 아니 페이스메이커가 존재했다는 사실이 감사할 따름이다. 우리는 그저 어린이처럼 김교신이 내주는 어깨에 기대어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 된다. 독자들도 백 교수와 함께 김교신을 페이스메이커 삼아 인생길을 달려보는 건 어떨까.

목차

이 책을 펼친 독자들에게/ 다시, 김교신을 만나다
서문/ 1927년으로부터 온 편지
추천의 글/ 김교신, 인생길의 페이스메이커 _박상익

1장 삶을 건네주고 건네받고

‘위대한’ 인간의 품성에 대하여
김교신의 교육정신
줄탁동시(?啄同時)
온유한 자가 차지하는 땅
부모-되기
‘닮지 못한’ 세대를 탄식하다
김교신이 우치무라에게서 배운 것
‘무교회’도 늙으면…
영원히 청년의 영으로
페이스메이커
그침의 신앙
존재의 원칙, 나(우리)대로!

2장 거짓에 저항하는 삶

버텨라, 버티자
망해도, 살아내기
을(乙)의 지형학
모기의 ‘도(道)’
선한 싸움
이 돌들로도…
‘염려’없는 노동
비진리가 진리를 대하는 태도
구체적이고 보편적인 사랑
화(和)의 영이여, 오소서!

3장 산 신앙의 고백으로

‘푸러리’와 성서 번역
‘졸업’하고 ‘시작’해야 하는 것들
기도의 자살(自殺)
김교신의 ‘냉수’ 신앙
부활의 믿음으로
안식일의 혁명성
모남과 눈물, 신앙의 회오리
여호와를 아는 사람
김교신의 그리스도‘론’
도(道)는 ‘평범하고 밝다’
단순, 용감한 신앙의 선택

4장 스스로, 함께 사는 생명

생명의 법칙
스스로 그러한 삶
응시의 윤리
대가가 지불되지 않은 쌀알
우리의 가정에 천국을 투사(投射)시키라
하나님의 뜻, 사랑
권위 나눔, 소유 나눔
친구됨
율법의 완성, 은혜
바톤터치, 그리고 하루씩
 

저자 소개

저 : 백소영
 
‘지천명’의 나이 오십이 되면 하늘의 뜻을 헤아릴 수 있는 ‘존재의 깊이’에 도달할 줄 알았건만, 여전히 엄마로 교수로 동동거리며 일상의 관계들을 이어가고 있다. 피하지 않고 마주한 모든 관계와 씨름하는 동안 샘물처럼 길어올린 신앙적, 신학적 성찰들을 토대로 공동체 윤리를 모색 중이다. 이화여자대학교(BA. MA)와 미국 보스턴대학교(Th. D.)에서 기독교 사회윤리학을 공부했다. <기독교와 세계> <현대문화와...
 

출판사 리뷰

다시, 김교신을 만나다

이 책은 김교신에 ‘관한’ 책이 아닙니다. 그를 ‘만나는’ 책입니다. 김교신이 누구냐고요? 책을 열고 ‘한 꼭지씩’ 그를 만나보면 아시게 될 거예요. 하지만 너무 궁금해서 조금만이라도 그를 소개해 달라고 하신다면, 알려드릴게요. 아주 살짝만요. 김교신(1901-1945)은 일제강점기를 살아낸 우리나라의 기독 신앙인이에요. 나라는 주권을 잃고 백성은 생명의 위협을 당하던 그 절박했던 시절에, 여러 모습을 한 기독교인들이 많이 있었죠. 오직 ‘영적’으로만 신앙을 지키고 정치적으로는 ‘친일’을 한 사람들, 신앙의 이름으로 민족운동과 독립투쟁을 전개했던 사람들, 사회계몽을 하며 ‘일단’은 삶의 질을 높이는데 주력했던 사람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김교신은 조금 ‘특별’해요. 그는 소위 “조선산 기독교”를 주창했거든요.

그동안 ‘무無교회자’라고 소개된 까닭에 ‘교회를 없애자는 사람’인가보다 싶어 많은 신앙인들이 그를 ‘만나기’ 꺼려했어요. 또한 ‘무교회’라고 하면 일본의 우치무라 간조로부터 시작된 까닭에 반일감정이 앞서 더욱 김교신을 멀리했죠. 하지만 본문을 읽으시면 차차 아시게 되겠지만, 김교신의 무無교회는 ‘교회를 없애자’는 주장이 아니에요. 생명의 말씀인 기독교를 선물로 받은 것은 감격이요 은혜이나, 서양의 토양에서 자란 ‘제도교회의 패키지’를 포장지도 안 풀고 그 껍질과 폐해까지 ‘무조건’ 받지는 말자는 주장이에요. 비본질적인 포장지는 풀고 복음의 알맹이를 소중하게 챙겨 이를 한국 땅에서 제대로 살려내자는 입장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래서 “조선산 기독교”라는 겁니다. 하여 ‘성서’를 너무 사랑하고 ‘조선’을 그만큼 사랑해서 「성서조선」이라는 성서연구잡지를 1927년부터 1942년까지(모두 158호) 성실하게 출간했어요. 저의 이 글모음은, 김교신이 쓰고 엮은 「성서조선」과 그의 일기를 찬찬히 읽으며 ‘사람’ 김교신을 만나고, 그의 신앙고백과 인생의 가치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 이야기를 담은 책입니다. 김교신을 ‘다시’ 만나기 위해서요.

우선은 저부터 그를 ‘다시’ 만났습니다. 《김교신 전집》을 다시 읽게 된 2014년 겨울부터 한 주에 조금씩 그의 글을 읽어 내려가며, 이번에는 사상대신 ‘사람’ 김교신을 만났습니다. 그의 글에서 드러나고 행간에 숨어 있는 그의 일상의 땀과 고통과 눈물을 만났고, 그럼에도 그치지 않았던 소망과 사랑을 만났습니다. 생명을 지켜내려고 반反생명적인 세상을 향해 대든 그의 고집스런 싸움도 대면했습니다. 무엇보다 지금 여기의 제 삶의 자리에서 제 삶의 숙제들과 씨름하며 그를 만났습니다. 저 역시 개인의 고민과 시대의 숙제와 세상의 악함과 약함으로 인해, 일상의 땀과 고통과 눈물을 경험하고 있는 중이니까요. 저 역시 소망과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려 사투에 가까운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한중간이니까요. 하여, 이 책에는 저의 이야기, 그리고 우리 시절, 우리가 사는 세상의 이야기도 만날 수 있습니다. 김교신을 만난 제가 다시 용기를 얻고 소망을 품고 사랑으로 살아내고자 다짐했던 이야기들도 만나실 겁니다.

그런 욕심을 가지고 여러분이 김교신을 친숙하게 만나게 하고파서 제가 풀어낸 내용 안에서는 언어의 선택도 ‘과감’하게 사용해 보았습니다. ‘무려’ 1901년생인 김교신을 오늘날 젊은 청(소)년들과 만나게 하려면 그 정도는 감수해야할 것 같아서요. 하여 요즘 시절의 ‘핫’한 언어표현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절친, 돌직구, 웃프다, 깨알, 갑질, 금수저, 흙수저, 수퍼-울트라-파워, 헬조선, 탈조선, 의느님, 오징어… 그러니 너무 겁먹지 말고 김교신을 만나러 오셔도 됩니다.

너무 서둘러 읽지 마세요. 차 한 잔의 여유가 생길 때, 문득 걸음을 멈추고 한적한 공원에서 십 여분 정도 따사로운 햇살을 받고 싶을 때, 혹은 반복되는 일상의 힘겨움에 울컥 눈물이 나고 속이 상할 때, 다 포기하고 싶어질 만큼 힘이 빠져 하루를 버텨내기가 힘들 때 … 그럴 때마다 한 꼭지씩 그렇게 천천히 읽어보세요. 마치 퍼즐조각의 한 조각 한 조각처럼, 그렇게 읽다보면 어느덧 그의 생애와 주요한 사건들, 그리고 핵심적인 신앙고백의 내용들이 어느 정도 큰 그림으로 맞춰질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바라기는 여러분의 생애와 사건들도 의미 있는 퍼즐 조각처럼 맞춰지기를 기도해요.

그래서 책 제목을 《버리지 마라, 생명이다》라고 붙였어요. 제도권 밖, 주변으로 밀려난 사람들에 대한 관심, 작고 미약한 생명을 보듬으려는 김교신의 생애와 주장이 그러했고, 힘없는 어른이지만 누군가의 선생이고 엄마이고 어른인 저 역시 그런 마음으로 살고자 다짐하며 이 글을 썼기 때문이에요. 생명을 버리지 않는 세상, 벼랑 끝으로 내몰린 생명들을 찾아와 품고 챙기고 보살피는 삶, 스스로 피어나는 생명의 토양을 만들고 서로가 함께 아름다운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공동체를 그리면서요.

추천의 글 - 박상익/우석대학교 교수

이 책은 김교신이라는 한국 현대사가 배출한 정신적 거인의 어깨에 올라 바라본 21세기 한국 사회의 모습이다. 《김교신 전집》에 기대어 한국 사회와 우리 주변을 살펴보려는 시도다. 정치, 사회 문제는 물론 우리 일상의 자잘한 국면들을 김교신의 눈으로 짚어보자는 것이다. 현직 대통령에 대한 비판도 서슴지 않는다. 저자는 김교신의 성서연구와 신앙생활을 통해 주변을 비추어 보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백 교수의 글에서 우리는 김교신이 우리에게 저 멀리 히말라야의 거봉 같은 높고도 동떨어진 존재가 아니라, 우리 곁에 다가와 다정하게 말을 건네는 길동무(페이스메이커)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엄혹한 일제강점기에 김교신 같은 이가 없었다면 우리 현대사는 얼마나 빈약해졌을까?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올곧게 실천했던 김교신이 없었다면 한국 기독교는 얼마나 초라해졌을까. 그 시절에 김교신 같은 반듯한 거인이, 아니 페이스메이커가 존재했다는 사실이 감사할 따름이다. 우리는 그저 어린이처럼 김교신이 내주는 어깨에 기대어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 된다. 독자들도 백 교수와 함께 김교신을 페이스메이커 삼아 인생길을 달려보는 건 어떨까.

2016년 지금, 한국 땅의 현실에서
김교신을 ‘만나는’ 책!


2016년 5월, ‘김교신’이라고 쓰니 갑자기 말문이 막힌다. 무엇 때문에 그 철저했던 “시 대의 단독자”를 이 헬조선의 각박한 2016년 5월에 다시 끌어내야 하는가? 아무래도 그 이유는 하나뿐이다. 그것은 참말이 그리운 시절, 참말이 듣기 힘든 시절, 구호와 선전이 공해를 이루는 시절, 거짓이 버젓이 참이 되고 참이 공공연하게 거짓이 되는 시절, 이 고약한 시절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참된 이유는 시절 때문이다. 목이 마르니까 샘을 찾는 거다. 빛이 그리우니까 눈을 뜨는 거다. 참말이 그리우니까 참말을 찾는 거다.

일제 강점기를 살아낸 우리나라의 기독 신앙인, 김교신(1901-1945). 나라는 주권을 잃고 백성은 생명의 위협을 당하던 그 절박했던 시절에, 여러 모습을 한 기독교인들 중에서도 특별했던 인물이다. 그의 “조선산 기독교”는 ‘전적 신앙’과 ‘한국적 종교심’ 그리고 ‘역사의식’으로 균형 잡혀 있었다. 당시 ‘영적’ 신앙을 빌미로 정치적으로는 ‘친일’을 하며 교회 몸뚱이를 불려간 사람들, 신앙을 이데올로기화하여 근대화나 민족운동의 동인으로 수단시했던 사람들, 사회계몽을 통해 외형적 삶의 질을 높이는 데에만 주력했던 사람들과 차별화되는 신앙 행보이다.

이른바 조선의 지식인으로써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투쟁하지 않으면 인간 대접을 받기도 힘들었던 1930년대의 정신 풍토에서 김교신은 특이한 존재였다. 민족의 해방을 지상의 목표로 세우고 그렇게들 살아가는 틈바구니 속에서 외로이 “인간의 해방”을 고집하던 그는 200명이 크게 초과하지 않는 독자들을 상대로 15년 동안 월간지 [성서조선]을 발행하여 온 인물이다.

“조선을 알고 조선을 먹고 조선을 숨 쉬다가 그 흙으로 돌아간 김교신, “함석헌의 ‘조선 역사 수난의 5백년’ 교정을 보다가 인쇄소 공원들 곁에서 눈물을 씻던” 김교신, “한 발 앞서 얼굴을 보여 주시면 힘이 되겠다”는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손기정의 영원한 스승이었던 김교신, “1942년 「성서조선」 사건으로 1년여의 투옥 생활을 마친 후, 고향 근처인 흥남에서 한 질소비료공장의 계장으로 근무하던 당시, 전염병 발진티푸스가 돌던 시절, 밤낮없이 투병하는 노동자들을 돌보다가 감염 되어” 45세의 나이에 하직한 김교신, 그는 어떻게 초월 신앙과 참여적 삶을 책임적으로 살아낼 수 있었을까? 왜 구태여 “다시 김교신이 그리운 시절”인가? 방법론의 난무가 인간을 시들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든, 경제든, 사회든 교육이든 심지어 종교까지 전략가가 가장 귀한 대우를 받는 상황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숱한 법들이 골목과 골목을 누비고 그 법의 망을 뚫는 또 다른 ‘법’들이 시궁창과 시궁창 사이를 드나들게 되었다. 방법들의 무도회는 교회 안에서도 활개를 친다. 교인 수 늘리는 법, 전도하는 법, 목회에 성공하는 법, 교세를 확장하는 법….

김교신이 그리운 것은 오늘 거짓의 횡포가 너무 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거짓은 또 다른 거짓을 낳고 그러니 서로 믿을 수 없고, 믿을 수 없으니 만사를 거짓으로 처리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사람들은 자기 자신도 속이고 만다. 청천 하늘 눈부신 태양 아래서 거인이 된 거짓은 자기 눈을 가리고 역사의 바퀴를 역회전 시킨다. 거기에서 우리는 증오의 신이 모닥불을 피우고 있는 것을 본다. 연기는 퍼져 나가 눈먼 사람들을 알 수 없는 증오의 소용돌이 속에 몰아넣는다.

이 까마득한 절망의 심연에서 희망의 피리를 불어 줄 이는 어디 있는가? 모든 것이 죽었을 때 살았다고 소리치는 “새벽의 사람”은 어디 있는가? 성공! 성공! 모두가 성공을 목표로 삼아 남의 어깨를 무자비하게 밟고 올라서는데 “성공은 너희나 가져가라 나는 이 장난이나 칠란다!” 하고 주섬주섬 보따리 싸며 뒤틀린 사회의 궤도에서 스스로 이탈하는 이는 어디 있는가?

그리워라! 김교신, 그대는 외토리였고 그래서 기껏 친구를 삼는다는 게 한센인이었고 200여명이 넘지 못하는 독자들과 서신을 교환하듯 잡지를 내었고 이해 관게가 없는 일, 곧 무용한 일에만 흥분하였으니….

시대가 각박할수록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여유”다. 밤이 깜깜할수록 요구되는 것은 “빛”이다. 답답할수록 요구되는 것은 몸부림이 아니라 “웃음”이다. 누가 알고 있었으라! 두꺼운 땅거죽을 뚫고 연하디 연한 새싹이 솟아오를 줄을. 누가 알았으랴 산천초목이 얼어붙은 겨울의 추위를 견디고 연약한 개구릴 서너 마리가 기어 다니리라는 것을….

작년 늦은 가을 이래로 새로운 기도터가 생겼었다. 층암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가느다란 폭포 밑에 작은 담(潭)을 형성한 곳에 평탄한 반석 하나 담 속에 솟아나서 한 사람이 꿇어앉아서 기도하기에는 하늘이 만든 성전이다.
이 반상에서 혹은 가늘게 혹은 크게 기구(祈求)하며 또한 찬송하고 보면 전후좌우로 엉금엉금 기어오는 것은 담 속에서 암색에 적응하여 보호색을 이룬 개구리들이다. 산중에 대변사가 생겼다는 표정으로 신래(新來)의 객에 접근하는 친구 와군들. 때로는 5-6마리, 때로는 7-8마리
늦은 가을도 지나서 담상에 엷은 얼음이 붙기 시작함에 따라서 와군들의 기동이 일부일 완만하여지다가, 나중에 두꺼운 얼음이 투명을 가리운 후로는 기도와 찬송의 음파가 저들의 이막(耳膜)에 닿는지 안 닿는지 알 길이 없었다. 이렇게 격조(隔阻)하기 무릇 수개월여.
봄비가 쏟아지던 날 새벽, 이 바위틈의 빙괴(氷塊)도 드디어 풀리는 날이 왔다. 오래간만에 친구 와군들의 안부를 살피고자 담 속을 구부려 찾앗더니 오호라, 개구리의 시체 두세 마리 담 꼬리에 부유하고 있지 않은가! 짐작컨대 지난겨울의 비상한 혹한에 작은 담수의 밑바닥까지 얼어서 이런 참사가 생긴 모양이다. 예년에는 얼지 않았던 데까지 얼어붙은 까닭인 듯, 동사한 개구리 시체를 모아 매장하여 주고 보니, 담저(潭底)에 아직 두어 마리 기어 다닌다. 아, 전멸은 면했나 보다!

이것은 그의 「성서조선」으로 하여금 최후의 진통과 함께, 한 떨기 촛불이었다가 겨울 밤 하늘의 영원한 샛별이게 만든 마지막 권두언인 “조와弔蛙” 전문이다. 이 글로 인해 김교신, 함석헌 일행 12명이 전국 독자와 함께 검속(檢束)된 유명란 “성서조선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그것도 그럴 것이, 밤은 낮을 용납할 수 없으며 어둠은 빛을 미워하기 때문이다. 몇 마리 개구리의 시체를 묻어 준 것이 죄였을까? 아니다. 죄라면 개구리가 모두 숨어든 오;로움 위에 걸터 앉아 자기의 소리가 그들의 귀청을 울리는지 아니 울리는지도 모르면서 기조한 것이 죄 아니겠는가.

누가 이 황량한 역사의 무덤 위에 앉아 홀로 찬송하고 기도할 것인가? 누가 버티고 앉아 이 어둠을 견뎌 내 줄 것인가? 그리하여 문득 봄비 쏟아지는 날 죽은 개구리와 산 개구리를 따뜻한 손으로 맞이해 줄 것인가.

이 책은 김교신이 쓰고 엮은 「성서조선」과 그의 일기를 찬찬히 읽으며 ‘사람’ 김교신을 만나고, 그의 신앙고백과 인생의 가치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 이야기를 담았다. 거의 한 세기 전에 “한 세기 후의 동지”를 기다리고 그리워했던 사람 김교신에게, 기꺼이 동지 되기를 응답하는 21세기 친구들을 기다리며, 초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