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공과 개통
1897년 3월 22일 대한제국은 주한미국전권공사 겸 기업가인 제임스 모스(James R. Morse)에게 사업을 맡겨 기공하였다. 미국이 기공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대한제국 정부가 '국내철도규칙’(1896. 7. 15)을 반포하면서 철도규격을 표준궤로 채택하였는데, 미국 철도가 표준궤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은 사업권을 가져오기 위해 대한제국 정부 조직이 매우 불안정하여 조만간에 나라로서 지위를 상실할 것이라고(경술국치) 대놓고 소문을 만들어냈는데, 이것이 미국의 대한반도 투자를 크게 위축시켰다. 그리고 1898년에 자금난을 겪어 공사가 잠시 중단되었던 것을 당해 5월 10일에 일본의 '경인철도합자회사'가 양도받아[5] 1899(광무 3)년 9월 18일에 완공시킨다(철도의 날). 당시 일본의 철로는 협궤였기 때문에 협궤로 바꾸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이미 표준궤로 공사가 진행중이었고 대륙과 연결이 용이하단 이점 덕에 협궤논의는 무산되고 계속해서 표준궤로 공사가 진행되었다.
당시 노선은 제물포 - 축현- 우각동 - 부평 - 소사 - 오류동 - 노량진이었다. 이후 한강철교 완공과 함께 용산을 지나 경성까지 가는 노선이 완공되었다.
개통 당시 길이는 33.2km, 최고 속도는 30km/h였다. 모갈 증기기관차가 운행하였다. 노량진까지 소요시간은 1시간 40분으로, 표정속도는 19.8km/h였다. 당시 운임은 상등석 1원 50전, 중등석 80전, 하등석 40전이었다. 쌀 한 가마니가 4원 정도 하던 시절이었으므로 현재 물가로 환산하면 상등석이 60,000원, 중등석은 32,000원, 하등석은 16,000원 정도가 된다고 할 수 있다. 현재 인천 - 노량진 구간 소요시간은 완행열차로 58분, 동인천 - 노량진 구간 소요시간은 급행열차로 약 43분, 특급열차로 38분이고 운임은 현금으로 2,350원으로 소요시간은 특급 기준 40%정도로, 운임은 하등석 기준 11%정도로 감소한 셈이다.
급하게 지어졌기 때문에 선형이 매우 좋지 못했고, 그래서 개통 10년도 못 된 1907년과 1908년 사이에 대규모 개량공사가 진행되었다. 이 개량공사를 통해 현재의 주안 - 동인천 구간 선형이 크게 변경되었다. 미카형 증기기관차가 미국에서 직수입 혹은 일본을 통해 간접 공수되어 투입되었으며, 8.15 광복과 6.25 전쟁 이후인 1970년대까지 지속적으로 운행되었다.
일제강점기
개화기 경인선은 명목상 사철이지만 사실상 국유철도로 기능했는데 한일합방조약 이후 조선총독부 철도국이 설치되고 정식으로 일본의 국유철도가 되었다. 1904년 경부선 개통으로 경인선은 실질적으로 경부선 지선이 되었지만 조선 수위도시 서울과 외항 인천을 연결하는 노선으로써 그 당시부터 수송량이 많았다. 이 때문에 일제는 1928년에 복선화 계획을 세웠으나 재정 부족으로 차일피일 미뤄지다가, 결국 일제가 전시체제에 돌입함에 따라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일제강점기에도 현재처럼 선택정차 운영이 비효율적인 것으로 판단해 모든 역을 필수정차역으로 운영했다.
해방 이후 - 1974년
1945년 해방으로 일제가 한반도에서 쫓겨난 이후에도 경인선은 해방 이전과 다를 바 없는 운영을 보였으며, 미군정에 의해 운영되다가 정부 수립후 교통부가 관할하고, 1963년에 대한민국 철도청이 출범하면서 철도청이 경인선을 관할했다. 6.25 전쟁으로 경인선도 조선인민군에 의해 파괴되는 피해를 입었다. 정전협정이 체결된 후 한국 정부는 일제가 이루지 못한 경인선 복선화에 나섰고, 부족한 재정 상황에서도 공사를 추진해 1965년에 구로 - 인천 구간 복선화를 완료했다. 이 시기에 증기기관차 - 객차 편성을 대신해 일본에서 니가타 디젤동차를 도입하여 운행시간 단축을 이뤄내기도 하였다. 1960년대에도 모든 열차가 모든 역에 정차했다.
수도권 전철 1호선
1974년 서울 지하철 1호선 개통과 동시에 전철화를 하여 직결된 수도권 전철 1호선에 편입되었다. 이후로 일반열차는 비정기적 관광열차 외에는 운행하지 않으며 통근형 전동차가 운행 중이다. 기록상 일반열차의 마지막 운행일은 1974년 8월 14일이다. 초기에 중장년층 이상 연령대에서 주로 기억하는 '식빵' 이라는 별명을 가진 초저항 전동차가 전철화 직후 주로 운행했다.이후 통행량의 급격한 증가로 인해 1999년에 구로 - 부평 구간이 2복선화되었고, 2002년에 부평 - 주안, 2005년에 주안 - 동인천 구간이 2복선화되었다. 초저항과 한국철도공사 1000호대 전동차는 2020년에 모두 퇴역되었으며, 현재는 한국철도공사 31x000호대 전동차와 서울교통공사 1000호대 전동차가 투입되어 운행 중이다. 자세한 내용은 수도권 전철 1호선, 수도권 전철 1호선/급행, 수도권 전철 1호선/운행 계통 문서를 참고하면 더 쉽게 이해할 수있다 [출처: 나무위키]
중화민국(대만) 본적을 가진 재한 화교들이 집중적으로 거주하고 있는 인천의 차이나타운이다. 인천항 개항 당시 청의 조계지로 지정되었던 데에서 기인한다.과거에는 노후화된 분위기에 중화권적인 조형물이 듬성듬성 설치되어 있는 주거지와 상업 지역이 밀집해 있던 곳이지만 대대적인 정비사업 이후로 매우 깔끔해졌고 인천의 대표적인 관광 지역이 되었다.무엇보다 여기가 인천항 개항 당시 도심이었고, 서구 문화가 유입되는 곳, 일본인과 화교들이 거주하던 곳이다. 근대식 공원, 최초로 건설된 세관 등이 이 지역 부근에 있었다. 당시 공화춘이 있던 지역으로 짜장면이 발생한 지역으로 명성이 있다.최근에는 재한화교 거주지, 인천화교소·중산중고등학교, 중화요리점, 만두집, 도교 사원, 불교 사찰, 공묘, 중화감리교회, 짜장면 박물관, 화교 역사관, 한중 문화관 등 중화권과 관련된 곳 외에도 개화기 시절 건설된 천주교 인천교구 주교좌 답동성당, 대한성공회 내동성당, 구 선교사 자택 등 서양식 건물, 적산가옥 등 일본식 건물이 남아있다.북성동에 위치해 있다.
인천 중구 도심 지역은 외국인이 많은 동네이고 재한화교의 비율이 높다. 이는 재한화교와 같이 지역 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해 차이나타운 개발을 했다.처음에는 성공적이지만은 않았지만 도심 재개발 이후 인근 동화마을의 인지도가 높아지면서, 관광객 수가 늘어 성공하게 되었다. 특히 차이나타운의 경우 관광상품화가 되면서 짜장면의 개발지, 전례지로 하려는 인천시 자체의 노력, 재한화교의 노력 및 일부 귀국 등으로 인해 중화 요리가 유명하다. 주변에 맛있는 만두 가게, 월병 가게 등이 있다.
한국에서 과거 재한화교가 많이 살았던 차이나타운이다. 오늘날의 차이나타운은 재한화교 거주지, 인천화교소·중산중고등학교, 중화요리점, 만두집, 도교 사원, 불교 사찰, 공묘, 중국인 교회인 중화감리교회, 짜장면 박물관, 화교 역사관, 한중문화관 등 중화권과 관련된 곳이 많아 이국적인 관광지로 유명하다.그리고 차이나타운에는 짜장면, 짬뽕 대신 다른 중화요리를 판매하는 가게도 있고, 월병, 만두 등을 팔기도 한다. 실제로 일부 지역 주민들은 차이나타운 외 인근 중국집을 찾기도 하는데 인근 지역 쪽도 재한화교가 운영하는 곳들이 많다. 실제로 차이나타운에 와서 다른 중화 요리를 찾기도 한다.2020년에는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가 대대적으로 확산되면서 인천 차이나타운 역사상 유례없는 불황에 시달리고는 했다.
다른 원도심 내 재래시장들과 비슷하게, 사스나 메르스 때도 이 정도 불황은 아니었는데 상황이 심각하다며 해당 구역 상인들은 그야말로 사업이 쉽지 않다고 언급했다. 상당수는 휴업 중이고 일부 가게는 폐업도 고려했었다.게다가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온상처럼 혹은 중화인민공화국이나 중국 공산당과 연관되었다는 오해를 받아 제노포비아와 인종차별의 피해자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 냉전 시기에 쓰이는 중공이라는 단어가 다시 쓰일 정도였다. 특히 화교 역사, 양안관계를 모르는 한국인들의 오해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인천 차이나타운 거주민들은 한국 여권과 중화민국 여권을 보유하는 이중국적자나 한국 여권과 중화민국 여권 중 하나만 갖는 단일국적자의 비중이 높으며, 중화민국과 관계가 깊고 중화인민공화국, 중국 공산당은 아무 관계가 없다.그리고 거리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오성홍기가 아닌 중화민국의 청천백일만지홍기가 다수 눈에 띌 정도인데다 간체자 간판이 하나도 없고 정체자 간판만 있다. 이러한 광경이 목격되고 하면서 이제는 오해가 풀려서 중화민국 출신의 한국 화교를 중국 공산당과 엮는 사람은 없다.2022년 4월 이후 거리두기가 해제되면서 시작되면서 인천 차이나타운도 소생하고 있다. 특히 수도권 전철 수인선의 개통으로 그간 인천에 오기 힘들던 용인, 성남, 수원, 화성, 오산 등 경기 남부 지역 사람들까지 찾게 되어 더욱이 활기를 띄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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