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대한민국명소 (2006~) <여행지>/4.인천시 관광

인천 영종역사관

동방박사님 2022. 8. 30.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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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 자연도(현재: 영종도)의 삶

자연도는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는 중국과의 무역 거점이자 조운수로 (漕運水路)의 역할을 수행하여 송의 사신과 상인들을 접대하던 객관 '경원정'이 있었다. 다라서 자연도에 주둔하던 수군과 말 목장 관리인, 소금을 생산하여 수익을 얻던 주민까지 적지 않은 수의 주민들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도한 고려시대 무신정권 이후 조선초기까지 유배지로 쓰였다.

당시 섬 주민들은 주로 막집(幕室)이나 초가집에 거주했다. 그러나 조선초, 고려말부터 이어진 왜구의 침략으로 섬 주민을 육지로 이주시켜 섬을 비우고, 국영 말 목장을 설치하는 정책에 다라 적은 수의 주민들만이 살게 되었다. 수군(水軍) 목자(牧子) 염부(鹽夫)등의 집이 30여 호였다는 기록이 세종실리지에 전한다.

 

 

병인양요

고종 3년 (1866년) 대원군이 일으킨 천주교도 및 외국선교사에 대한 박해사건에 대항하여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에 침범한 사건으로 서구 열강이 무력으로 조선을 침입한 최초의 사건이다.

대원군은 병인년 (1866년) 정월에 천주교 급압령을 내려 조선인 천주교고 8천여 명을 학살하는 병인박해를 일으켰다. 이를 계기로 프랑스의 로즈제독이 전함을 이끌고 일으킨 사건이 병인 양요이다. 이 사건 이후 흥선대원군은 쇄국정책을 더욱 강화하는 한편, 천주교 박해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으며, 구미열강은 조선을 청구의 종속국이 아닌 독립국으로 인식하게 되어, 종래의 한 청 관계를 재검토하기에 이르렀다.

영종 첨사의 항의 사건

1866년 영종첨사 심영규가 1차 침입당시 물치도(작약도)에 정박한 프랑스 군함 페르레스호에 사정을  물으려 했으나 저지당한 사건이다.

 

영종을 지킨 신효철

오페르트는 도굴 사건 이후 프랑스제독 알리망 명의의 친서를 영종첨사 신효철에게 전하면서 이를 대원군에게 전달해 줄 것을 요구했으나 신효철은 도굴행위가 인륜도덕상 용납할 수 없는 폐륜적 만행이라고 규탄하며 친서 전달을 거부했다.

이에 오페르트 일당이 영종도에 상륙하여 민가를 돌아다니며 백성들을 위협하고 가축을 약탈하자 영종첨사 신효철이 수비병 1백여 명을 이글고 이들과 교전을 벌였다. 오페르드 일당은 사망 2명, 부상 2~3명을 내고 도주했다. 조정에서는 오페르트를 물리친 공으로 신효철을 내직으로 영전시켰고, 영종도 백성들은 그해 6울 '신효철 영세불망비'를 세워 그의 공을 기렸다.

 

윤요호 사건, 그리고 개항

영종진 앞바다는 조선의 수도 한양의 관문으로 인천 개항을 전후하여 프랑스, 미국, 일본함대가 반드시 거쳐야 할 곳이었다. 1866년 프랑스함대가 강화도를 침략한 병인양요, 1871년 미국함대의 내침인 신미양요 때 그들의 배가 정박하였던 곳이 영종도 앞바다였다. 1875년 일본의 계획적 도발인 윤요호 사건과 이로 인하여 조선을 강제로 개항시킨 강화도 조약의 체결과도 깊은 관련이 있는 곳이다 

 

오페르트의 저서

금단의 나라 조선기행 

19세기말 독일 상인 오페르트의 금단의 나라 조선 기행은 조선의 정치, 문화 역사. 사회. 지리 등 전반의 자료들을 채집해 잘간한 역사 기행서이다.

 

신미양요와 영종진

신미양요는 고종 8년(1871년) 미국군함이 통상조약을 요구하며 강화도를 공격한 사건이다. 1866년 7월 통상을 요구하던 미국상선 제너럴셔먼 호를 불태운 사건이 일어 났다. 이후 1871년 미국 아시아함대 사령과 로저스가 함대를 이끌고 덕진진과 광성보를 점령했고, 이 전투에서 조선은 중군 (中軍) 어재연등 53명이 전사하는 등 심한 피해를 입었다. 이에 대원군은 전국에 척화비를 세우고 결사항전을 준비했으며, 군사 행동을 감행하려던 미국 측은 불림함을 깨닫고 물러났다. 이 사건의 결과 조선의 쇄국정책 및 배외의식의 더욱 견고해졌다.

 

영종방어사의 보고 내용

1871년 4월8일 영종방어사 이병숙은 영종도 앞바다에서 이양선이 바닷물의 깊이를 재고 있음을 관측하여 상부에 보고하였다. 이때 조선에서도 인천읍 관리 김진성과 통역과 등 3인을 콜로라도호에 승선시켜 충동를 예방하기 위한 교섭을 진행 하였으나, 미군 측에서 이를 품계가 낮다는 이유로 교섭을 거부 했으며, 광성보 전투와 초지진, 덕진진 전투로 이어졌다.

 

오페르트의 남연군묘 도굴 사건

고종 5년 (1868년) 독일계 모험상인 오페르트가 충청도 덕산에 있는 남연군(대원군의 아버지) 무덤을 도굴하려디 실패한 국제적인 도굴 사건이다. 1866년 2차에 걸쳐 조선에 대한 통상 요구를 하다가 실패한  러시아 군병이라 자칭하며 덕산 가동에 있는 남연군의 무덤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이 사건은 비록 미수에 그쳤지만. 국민 사이에 더할 수 없는 악감정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대원군의 쇄국정책과 천주교 탄압을 더욱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영종도의 피해 상황

일본 측의 보고서에 다르면 윤요호 사건으로 조선군 여러명이 전사하고 부상을 입었으며 일부는 포로가 되었다. 영종진을 점령한 일본군은 다수의 대포를 비롯하여 총, 창검, 군복, 병서, 기장, 악기 등 병기와 군수품을 노획하고 조선군 포로들에게 윤요호로 운반하게 하였다 그들은 퇴각에 앞서 성 안에 불을 질러 곤아와 민가를 완전히 불태웠다. 

 

조선 조정의 수습과정

경기감사의 보고로 영종진이 함락된 상황을 알게된 조정에서는 소수의 적들에게 관청이 불타고 관인까지 잃었을 뿐 아니라, 단 한 명의 목도 베지 못한 것은 해괴한 일이라고 하여 전투 전에 도주한 첨사 이민덕을 파면하는 동시에 의금부로 하여금 죄를 묻도록 하였다. 조정에서는 이민덕에게 장 1백 대의 태형을 내린다음 귀양을 보내고, 사망한 백성들과 병졸들에게는 후한 장례 비용을, 부상자에게는 약을 내리는 휼전 (恤典)을 베풀었다.   

 

윤요호 사건의 진상

윤요호사건은 1875년 9월20일 일본군함 윤요호가 강화도에 들어와 측량을 구실로 조선정부의 동태를 살피다 조선군과 전투를 벌인 사건이다. 일본 측은 이 사건이 우발적인 충돌이라고 주장했으나 서울대학교 이태진교수가 일본 방위자료연구소 자료실에서 이노우에 함장의 최초보고서를 발견함으로써 계획된 사건임이 밝혀졌다. 일본 측이 사건의 핵심으로 주장하고 있는 국기게양 역시 허구이며, 윤요호사건은 '조일수호조규'로 시작되는 조선의 식민지화 정책의 사전 포석의 하나였다.

 

영종진 재건

 고종12년(1875년) 윤요호 사건으로 영종진은 일시 폐쇄되어 인천 도호부 관할 아래 놓였으나 수도방위의 요충지로 다시 부각되어 같은 해10월 영종상업고등학교 자리로 옮겨져 다시 설치되었다. 이후 고종 32년 을미개혁 (1895년)으로 혁파 되기 가지 약 20년간 수도 해안  방위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 했다.

 

근대화로 이행

강제 개항 이후 일본은 영종에 대한 토지수탈을 본격화하였으며, 영종의 주민들은 3.1운동 이후 항일 운동을 본격화 했다. 그러나 일본은 지속적인 수탈을 이어가 영종의 개간한 땅은 몰론 개간하지 않은 땅 까지 차지했다. 또한 영종은 김홍직내각이 추진한 을미개혁으로 근대화 개혁을 거치며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수많은 변화를 겪어야만 했다.

   

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