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러스 뉴턴 알렌
호러스 뉴턴 알렌 Horace Newton Allen
주한 미국 공사관 서기관 / 임기 1890년 ~ 1891년
신상정보
출생일 1858년 4월 23일 / 출생지 미국의 기 미국 오하이오주 델라웨어 / 사망일 1932년 12월 11일(74세) / 사망지 미국의 기 미국 오하이오주 톨레도에서 노환으로 사망 / 학력 웨슬리언 대학교 신학과 학사 / 마이애미 의과대학 학사 / 경력 장로교 선교사 / 외교관 / 외과 의사 / 배우자 프랜시스 앤 앨런(Frances Ann Allen) / 종교 개신교(장로회)
호러스 뉴턴 알렌(영어: Horace Newton Allen 호러스 뉴턴 앨런. 1858년 4월 23일 ~ 1932년 12월 11일)은 미국의 조선 주재 외교관, 장로교 선교사로, 한국어 이름은 안련(安連)이다. 1884년 9월에 입국함으로써 합법적인 절차를 거쳐 한국에 파송된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가 되었다.
1884년 12월 발생한 갑신정변때 중상을 입은 민영익을 치료하며 고종의 신임을 얻었다. 이후 조선 최초의 서양식 국립병원인 제중원에서 근무하며 서양의술을 가르쳤다. 외교관으로 변신한 후에는 주한 미국전권공사까지 역임했다. 조선의 의학과 문화발전 등 근대화에 기여한 바가 있기는 하나 금광 채굴권, 철도 부설권 등 이권사업에 개입하여 개인의 이익과 미국 국익에 앞장선 인물이란 평가도 있다.
생애 / 어린 시절
미국 오하이오주 델라웨어에서 출생하여 웨슬리언 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다. 대학생 시절 미국 전역을 휩쓴 제2차 각성운동의 영향으로 많은 대학생들이 선교현장으로 나아갔는데, 알렌도 이 영향으로 의료선교 봉사를 위해 신시내티에 있는 마이애미 의대를 다시 진학하여 1883년에 의사 면허를 취득했다. 졸업후 바로 결혼을 했으며, 같은해 25세 나이에 미국 장로교회 의료 선교사가 되어 중국 상하이에 파송되었다. 1883년 10월에 상하이에 도착했으나 이후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는 야후슈아말씀을 믿고 따른 질서를 중시하는 선교사의 삶자체로 발생하여 갈등하였다. 이에 동료들의 조언에 따라 미국 장로교 선교본부에 조선행을 요청하여 허락을 얻어냈다.
조선 입국
알렌은 선교사 자격으로 1884년 9월 14일 조선에 도착했다. 이로써 그는 합법적인 절차를 밟아서 내한한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가 되었다.그러나 신변안전을 위해서 선교사 신분을 감추고 '미국공사관 소속 의사'로 활동했다. 이는 미국 공사 루시어스 푸트의 조언에 따른 것으로, 같은해 7월에 고종이 개신교 선교회 사업에 대해 윤허한 바가 있지만, 이는 교육과 의료봉사 활동에 국한된 것이었고, 아직 선교의 자유가 완전히 보장된 상황이 아니였기 때문에 취한 불가피한 조치였다. 선교사로서의 알렌의 조선 입국은 한국 최초의 천주교 세례 교인인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은 지 100년 만에 벌어진 일이라는 점에서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사건이다.
서양 의술 전수
조선에 도착한 지 3개월 뒤인 12월 4일, 김옥균 등 개화파가 일으킨 갑신정변 때 우정국 낙성식 축하연에 참여하였던 민영익이 자객의 공격을 받아 전신에 중상을 입고 빈사 상태에 빠지는 일이 있었다. 독일인 묄렌도르프의 도움으로 민영익은 구출되었으나 당시 한의사들은 그를 제대로 치료하지 못했다. 이때 알렌이 외과수술을 통해 민영익을 치료한 후 회복시키며 서양의술의 장점을 알리게 되었다.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고종의 신임을 얻었으며, 이로 인해 왕실의 의사와 고종의 정치 고문이 되었다. 또한 고종의 명에 따라 한국 최초의 서양식 국립병원인 제중원의 설립을 주도한 후 이곳에서 환자를 돌보며 서양 의술을 가르치기도 했다. 1887년에 미국으로 돌아가지 전까지 제중원의 초대원장으로 근무 하였는데, 진료환자가 급중하여 의사이자 선교사인 스크랜턴의 도움을 받기도 하다가, 곧 추가로 파견된 헤론(Heron, J. H.) 선교사 등을 진료에 참여 시키기도 하였다.
그 밖의 활동
1887년 참찬관에 임명되어 주미 전권 공사 박정양의 고문으로 미국에 가서 청나라의 간섭을 규명하고 독립국 사신의 체면을 유지하게 하는 등 독립국으로서의 조선의 처지를 국무성에 밝혔다. 1890년 주한 미국 공사관 서기관이 되어 외교 활동을 했고, 총영사·대리 공사 등을 지냈다.
1892년 이래 <코리안 레포지토리>를 간행하고, 1897년 전차·전등 등에 관한 설치권을 미국에 넘겨 주었다. 1900년 영국 왕립 아시아 협회 조선 지부를 결성하여 회보를 발행하는 등 문화 발전에 공로가 있었다. 1902년부터 《한국 위보》를 간행했다. 1904년 고종으로부터 훈 1등과 태극 대수장을 받았고,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뒤 미국으로 다시 건너가 의사 생활을 하면서 남은 생애를 보냈다.
평가
한국의 의학에 많은 기여를 했다고는 하나, 식민주의적 한국의 이권침탈에 안내 역할을 한 정치적 인물이라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학계에서는 세브란스 병원의 설립자 “앨런이 ‘친한적 인물’이 결코 아니다”며 “그의 외교정책의 기본은 미국의 경제적 이익에만 있었다”는 지적이 있다. 알렌은 1885년 4월 제중원이 만들어진 이후 동료 선교사들과 불화를 겪으면서 선교활동에 환멸을 느끼고 미국의 외교관으로서의 역할을 시작했다고 한다.
1889년 선교사 자격으로 조선에 다시 입국한후 1890년에 주한 미국공사관 서기관으로 임명되어 외교활동을 시작했는데이때부터 이완용과 명성황후 등 조선정부를 상대로 로비를 벌여 1895년 운산금광채굴권 획득해 커미션을 받고 미국인 사업가에게 넘겼다. ‘노다지(no-touch)’라는 말을 만들어낸 운산금광에서는 40년간 총 900만 톤의 금광석이 채굴되어 5600만 달러의 수익을 미국에 안겨줬다. 또한 아관파천을 주선해 친미세력이 대거 등용된 뒤에는 1896년에 제임스 모스와 함께 경인철도부설권을 따냈다. 제임스 모스가 회사를 설립하였으나 자금부족으로 공사가 중단되면서 철도부설권을 일본의 경인철도 합자회사에 팔아버렸다.
실제로 앨런은 선교사로 조선에 입국한 초기부터 조선 광산의 매장량, 위치 등을 조사했다. 그 광산탐사 보고서를 토대로 평북지방의 운산금광이 노다지 금광인 것을 확인했고, 그 채굴권을 미국회사에 넘겨주도록 조선 왕실에 요청했다. 또한 미국인 회사들이 조선 관료와 민간인들과 마찰을 겪을 때마다 앨런은 자국민의 권리수호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 때문에 한미외교관계사 연구가인 손정숙은 앨런을 ‘미국적’인 미국 외교관이라고 평가했다. 또한, 하와이 이민자 모집 과정에서 사탕 수수 농장의 관리인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조선인들은 인내심이 많고, 부지런하며, 유순한 인종이라 그들이 갖고 있는 오랜 복종의 습성 때문에 지배하기가 쉽다. 조선인들은 중국인에 비하면 교육하기가 쉬운 족속이라.”고 저평가를 했다.
이어 친미파 세력들이 결집력을 상실하자 미국의 이권에 호의적이었던 친일파 세력들을 간접적으로 후원했고, 일본의 조선지배가 확실시 되었을 때에는 일본에 친미파 인사들의 명단을 넘겨주었고 이들에게 일본에 협력을 권고하였다는 점을 자부했다고 알려졌다. 이와 함께 1908년 세브란스의학교 졸업생 7명에게 주어진 의사면허 발급을 위해 세브란스 병원의 제4대 병원장이던 에비슨은 조선통감부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협조를 구했다. 이로 인해 이토 히로부미는 이들의 졸업식에 참석해 축사를 했다.
1884년에 입국하여 조선에 온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아이굿뉴스와 합동신학대학교 홈페이지에 게시된 자료에 의하면 독일인 '칼 귀츨라프' 루터교 선교사가 조선에 온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라고 한다. 출처 위키피디아
책소개
어제 밤, 서울에 거주하는 외국인에게는 아주 중대한 사건이 발생했다...(중략)..그는 죽어가는 빈사상태의 사람을 응급치료하러 묄렌도르프의 집으로 급히 와달라는 묄렌도르프의 적바림을 가지고 왔다고 했다..(중략)..민영익은 조선보빙사의 전권대신으로서...(중략)...민영익은 오른쪽 귀 측두골 동맥에서 오른쪽 눈두덩까지 칼자국이 나있었고..(중략)..만약 그가 몸을 피하지 아니했더라면 목이 달아났을 것이다.
출처: https://japan114.tistory.com/11083 [동방박사의 여행견문록(since 2010):티스토리]
책소개
이 책은 알렌이 한국 근대사에 미친 업적과 공헌을 발굴하여 분석하고, 재조명하고 있다. 선교사이면서도 외교관으로 활동한 알렌의 업적을 통해 근대 한국의 모습과 한미관계를 보다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을 것이다.
목차
Ⅰ. 알렌 입국시의 한국
Ⅱ. 한미회교관계형성과 한국의 미국이미지
Ⅲ. 알렌의 입국과 그 첫 사업
Ⅳ. 갑신정변과 알렌의 등장
Ⅴ. 의료선교의 시작
Ⅵ. 의료사업의 확대와 발전
Ⅶ. 알렌에 있어서의 의료와 선교의 문제
Ⅷ. 한국 자주를 위한 미국 외교관
Ⅸ. 미합중국 외교관 알렌과 한국
Ⅹ. 알렌, 한국을 떠나다
출처: https://japan114.tistory.com/15365 [동방박사의 여행견문록(since 2010):티스토리]
책소개
이 책의 구성을 보면, 먼저 알렌이 작성한 4편의 보고서 번역문이 수록되어 있다. 첫 번째는 1886년에 작성한 「제중원 일차년도 보고서」, 그다음은 1885년과 1886년에 작성한 「서울의 위생상태에 대한 의사 알렌의 보고서」이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는 1902년에 작성한 「미국공사 알렌의 세브란스병원 정초식 기념사」를 실었다. 4개의 보고서 뒤에는 저자가 쓴 알렌 보고서 해제와 보고서 원문을 실었다.
목차
병원에 관한 이야기 / 외래 환자 분류?/ 외래 환자에 대한 기록
입원 환자 분류?/ 입원 환자에 대한 기록?
서울의 위생 상태에 대한 의사 알렌의 보고서
서울의 위생 상태에 대한 의사 알렌의 보고서(1885) / 서울의 위생 상태에 대한 의사 알렌의 보고서(1886)
미국공사 알렌의 세브란스병원 정초식 기념사?
‘알렌의 의료보고서’ 바로 읽기?
알렌은 누구인가?/ 알렌을 둘러싼 논란?/ 알렌의 의료보고서에 나타난 구한말 의료상황?
Dr. H. N. Allen’s Medical Report
알렌은 1858년 미국의 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던 중에 북장로회 해외 선교부에 선교사로 자원했고, 의사가 되자 중국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중국에 도착한 알렌은 적응을 못하다가 막 개항한 이웃나라 조선에 선교와 의료 활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1884년에 제물포항에 도착하였다.
조선에 건너와 미국공사관의 의사로 활동하며 외국 거류민들의 건강을 돌보던 알렌은 갑신정변의 와중에서 민영익의 생명을 구하게 되고, 이를 계기로 1885년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광혜원(제중원)이 만들어지게 된다.
한편, 1887년 조선정부는 미국에 공사관을 설치하기로 하고, 알렌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렇게 해서 알렌은 외교관으로서의 경력을 시작했다. 그는 선교사직을 사임한 후 참찬관으로 조선의 관리들을 대동하고 미국으로 갔다. 1889년 조선으로 돌아온 알렌은 미국 선교부에서 부산에 선교 기지를 개척할 임무를 받고 다시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이후 제중원의 책임을 맡았다가 주한 미국공사 겸 총영사로 임명받아 외교관으로 전직했으나 선교사였던 만큼 현지 사정에 어두운 선교사들이 일으킨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앞장섰다. 1901년 주한 미국 특명전권공사로 임명받았으나 1903년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와 조선에 대한 정책을 두고 격론을 벌여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기 몇 달 전인 1905년 3월 미국공사에서 해임당했다. 이후 미국으로 돌아가 정착했으며 1932년 74세로 타계했다.
알렌을 둘러싼 논란
1876년 개항 이후 한국근대사에는 적지 않은 외국인이 등장하나, 알렌만큼 지속적으로 오랜 기간에 걸쳐 한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은 외국인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만큼 알렌은 다양한 활동을 통해 한국근대사에 기여한 바가 크다.
먼저 그는 조선에 온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였다. 또한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병원인 제중원을 세우고 서양의술을 광범위하게 시술했으며, 아울러 학생들을 뽑아 처음으로 서양의학 교육을 시작하기도 했다. 그런데 알렌이 의료선교사로서 실제 활동한 기간은 그의 재한기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지 않다. 대략 3년 정도 일한 알렌은 이후 외교관으로 전직하여 처음에는 조선 정부의 외교관으로 다음에는 미국의 외교관으로서 한국 근대사의 증언자이자 참여자가 된다. 알렌에 대한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평가는 다양한데, 부정적인 견해에 대해 반박해보면 다음과 같다.
1. 제중원 설립과 알렌의 역할
제중원 설립에 알렌이 기여한 바가 크지 않다는 주장이 있다. 당시 조선정부는 서양의학을 수용할 의도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알렌이 없었어도 어차피 제중원은 만들어졌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역사에는 실현되지 않은 수많은 가능성이 존재하지만 역사로 기록되는 것은 실제로 실현된 단 하나의 가능성이다. 제중원이라는 조선 최초의 병원이 설립되기까지 ‘갑신정변-민영익 자상-알렌의 수술-「병원건설안」 제출-제중원 설립’이라는 사실의 연쇄가 성립된다. 그리고 이 사실의 연쇄에서 알렌은 그 중심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알렌을 빼고는 제중원 설립을 설명하기 어렵다.
2. 제중원에서 알렌의 직위
알렌을 제중원의 원장으로 보는 입장과 제중원에 고용된 의사로 보는 입장이 대립된다. 일각에서는 알렌이 조선정부의 고용의사에 불과했으므로 제중원장이 될 수 없고 초기 제중원을 관할하던 통리교섭통사사무아문의 책임자 김윤식이 제중원장이라는 주장을 편다. 병원장은 병원의 본질적 기능인 의료 행위를 총괄적으로 책임지는 사람이다. 그것이 근대 이후 병원의 상식이다. 제중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병원이다. 따라서 그 병원 건물의 소유주가 아니라 의료 활동의 책임자 알렌을 그 병원의 원장으로 보는 것이 당연하고도 상식적이다.
3. 알렌은 조선의 이권을 팔아 넘겼나?
알렌이 운산금광의 채굴권을 비롯한 각종 이권을 미국에 넘겨 막대한 국부를 유출시켰다는 주장이 있다. 운산금광이나 경인철도 부설권에 알렌이 관여한 것은 사실이나 이들 이권을 미국에 주고자 했던 사람은 고종이었다. 알렌은 고종의 요청에 따라 광산채굴을 할 수 있는 업자를 찾아 조선정부에 소개시켜 준 것이다. 당시 고종이 보기에 미국은 강대국이었음에 불구하고 일본, 중국, 러시아와 달리 조선에 대한 욕심이 없었다. 따라서 미국의 힘을 빌린다면 다른 주변 국가의 침입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이러한 고종의 생각은 너무나 순진한 것이었다. 운산금광의 채굴권은 미국에 넘겼지만 양도받은 것은 미국 정부가 아니라 개인 사업자였다. 그 이후에도 전차, 전기, 도시 발전소, 상수도, 전화가설 등의 사업을 알렌을 통해 미국이 맡았다. 그런데 이러한 알렌의 활동을 조선의 이권을 팔아넘긴 것이라고 비난할 수 있을까? 철도와 같은 근대시설을 설치할 기술과 경험이 당시 조선에는 없었다. 따라서 불가피하게 이러한 사업을 외국인 업자에게 넘겨야 했다. 문제는 어느 나라 사업자들에게 맡길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이를 맡기 위해 각국 외교관들이 각축을 벌였을 것이고, 조선정부의 신임을 받던 알렌을 통해 상당수 사업이 미국인 업자들에게 돌아갔다. 알렌의 활동은 외교관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것들이었다.
알렌의 의료보고서에 나타난 구한말 의료상황
이 책에 실린 알렌의 의료보고서는 당시 조선의 의료상황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알렌은 본격적인 의료보고서를 작성하기 이전에 조선, 특히 그가 활동했던 서울의 지리적 환경과 기후에 대해 전반적으로 언급한다. 거기에 더해 집과 주거방식, 서울의 상하수도 상태, 음식 등 넓은 의미에서 건강과 관련된 환경적 요인들을 하나하나 기술한다. 알렌 보고서에는 당시 조선 사람들이 앓고 있던 질병에 대해서도 기술하고 있는데, 콜레라나 매독, 말라리아에 대한 기술, 다양한 질병에 대한 치료 경험들은 당시 조선 사람들이 앓던 질병의 양상을 잘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출처: https://japan114.tistory.com/15366 [동방박사의 여행견문록(since 2010):티스토리]
세브란스병원 알렌 기념관
제중원의 설립과 알렌
알렌은 1884년 12월4일 발생한 갑신정변 와중에 칼에 찔려 사경을 혜매고 있던 명성왕후의 조카 민영익을 치료하여 생명을 구했다. 이를 계기로 고종의 시의(侍醫)가 된 알렌은 병원 설립안을 제출하여 서양식 진료뿐아니라 조선의 젊은이들을 교육시켜 의사로 양성하고자 하였다.
알렌의 건의를 고종이 받아들여 1885년 4월10일 재동(헌법재판소)에 여성 취초의 서양식 병원인 제중원을 설립하게 되었다. 제중원은 조선정부와 미국 북장로회선교부가 동시에 책임을 맡고 있었는데 조선정부는 재정지원과 행정을, 선교부는 의사와 간호사를 파견하고 진료와 병원 운영응 담당했다. 1886년 3월29일에는 제중원의학교를 열어 서양의학교육을 시작하였다.
출처: https://japan114.tistory.com/4120 [동방박사의 여행견문록(since 2010):티스토리]
세브란스 역사기록화 전시 (1885~2017)
연세대학교는 창립 132주년과 합동 60주년을 맞아 5월
둘째 주에서 제중원 문을 연 4월 둘째 주로 변경하여 개최한다. 의료원에서는 이를 기념하고, 우리나라 의학발전과 국민건강 증진에 기여한 세브란스의 역사와 정체성의 보존 발전하기를 위한 역사기록화 전시회를 마련했다.
역사 기록화는 펜화 유화 두 가지 형태로 제작됐다. 역사적 건물을 기록한 펜화는 김영택화백이 맡았다.
유화는 김건배화백이 맡아 주요 사건과 정황을 구현했다. 한국최초의 선교사 알렌박사의 민영익치료, 에비슨 박사의 내한, 카네기홀에서 처음 만난 에비슨박사와 세브란스씨, 통감부에 의한 구한국 군대의 강제 해산중 부상당한 한국군인을 치료하는 세브란스 의료진과 학생들, 3.1운동 독립선언문을 해부학 실습실에 숨기는 세브란스의전 학생들 등 여러점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에비슨 박사의 초청으로 열린 언더우드 선교사의 토론토 강연은 훗날 세브란스와 연희의 두 주역이 만나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선교사의 소명의식을 갖고 있던 에비슨은 언더우드의 강연을 계기로 결심을 굳히고 한국에 선교사로 파송되어 제중원의 책임을 맡게 되었고, 언더우드와 함께 조선에서 좋은 동역자로 서로의 사업을 도우며 활동했다.
1915년 연희전문학교의 교장으로 선임된 언더우드가 이듬해인 1916년에 세상을 떠나자 에비슨은 세브란스와 연희 양교의 교장을 18년간 역임하며 두 학교 발전의 초석을 다졌다.
이후 에비슨은 양교를 합동하여 종합대학으로 발전시킬 계획을 세웠지만, 총독부의 방해로 실현되지 못했다.
이러한 구상은 에비슨이 세상을 떠난 이듬해인 1957년에 양교가 합동되어 연세대학교로 출범하면서 비로서 실현될 수 있었다.
작가 김건배
국내 정상급의 일러스트레이션 작가로 화단에 등단한 김건배 화백은 1994년 미국 이주후 인물의 역동적이고 사실적인 묘사를 맑고 투명한 색채로 표현하는 수채화 기법을 새로이 선보이며 주목을 받앗다.
미국 내 아트 페스티벌에서 20여 차례의 대상 수상과 많은 전시전에 초청된 김건배 화백은 철저한 고증 속에
우리나라 근대의학을 개척한 세브란스 130여년 역사를 작품을 통해 그려냈다.
1884 12.4
우정국 개원식에서 벌어진 갑신정변으로 명성왕후의 조카 민영익은 심한 자상을 입고 사경을 헤메게 되었다.
민영익은 치료를 위해 외교고문 이엇던 묄렌도프의 집으로 옮겨졌다.
그를 치료하러 온 여러명의 어의(한의사)들은 칼에 찔리고 베인 상처를 치료할 수 없었다.
이에 묄렌도르프는 미국공사관 소속의 의료선교사 알렌을 급히 불러 치료하게 했다.
민영익은 알렌의 지혈과 봉합 치료등 서양외과술로 생명을 건질수 있었다. 이를 계기로 왕실의 신임을 얻은 알렌은 근대식 병원 설립안을 올렸다. 이 제안이 수용되어 이듬해인 1885년 4월10일 한국 최초의 서양식병원 제중원 (濟衆院 )이 개원한다. 제중원에서 시작된 한국의 근대의학은 세브란스 병원을 통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82년 9.29.
토로토 대학교 의학부와 온타리오 약학교의 교수이자 토론토 시장의 주치의였던 에비슨은 자신이 다니던 교회에서 일본으로 파송된 선교사의 소식을 통해 선교사로서 막연한 소명의식을 갖고 있었다.
에비슨은 마침 1892년 9월 토론토를 방문한 언더우드를 초청해 강연을 들었다. 조선의 실상과 의료선교의 필요성을 연설하는 언더우드의 강연에 큰 감명을 받은 에비슨은 조선에 의료선교사로 갈 것을 결심했다.
에비슨은 자신이 소속된 캐나다 감리교회에 파송을 요청했으나 재정상의 이유로 받아들여 지지 않았다.
이에 에비슨은 미국 북장로회 선교본부에 지원하엿고, 마침 언더우드도 그를 조선에 파송할 적임자로 추천했다. 이에 따라 에비슨은 의료선교사로 조선 땅을 밟을수 있었다.
1893년. 6.16.
에비슨이 한국으로 출발한 즈음 아내는 만삭의 몸이었고, 셋째아들은 심한 폐렴과 중이염으로 매우 위중한 상태에 있었다. 당시 에비슨은 " 아이가 죽는다 해도 병치료를 위해 출발을 늦출 수 없다. "아이가 벤쿠버에 도착할때까지 살아 있으면 조선으로 갈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조선으로 가지 말라는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겠다."며 출발을 강행한다.
에비슨은 토론토에서 캐나다를 가로질러 벤쿠버에 도착한 후, 태평양을 건너는 여객선으로 일본 요코하마를 거쳐 1893년 6월 부산에 도착했다. 부산에 도착하고 일주일 후에 넷째 더글라스가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토론토대학교 의학부를 졸업하고 소아과 의사가 되어 세브란스에서 봉사했다.
1985년
1985년 내려진 단발령은 조선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당시
배재학당 학생으로 여의사 조지아나 E 화이팅의 한구어 선생이었던 이승만은 에비슨과 함게 조선과 서양의 차이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단발령이 내려지고 얼마후 이승만은 에비슨의 집에 찿아와 상투를 잘라달라고 요청했다. 이승만의 요청을 받은 에비슨은 이승만의 상투를 자르고 남은 머리를 다듬어 주었다.
이승만은 잘린 상투를 거즈에 싸서 들고 눈물을 흘리며 집으로 돌아갔다고한다.
1900.4.30.
1899년 3월 안식년으로 귀국한 에비슨은 이듬해 봄 뉴욕카네기홀에서 열리는 만국선교대회에서 조선의 선교에 대해 발표하였다. 에비슨은 "조선의 낙후된 의료환경을 극복하기 위해서 작은 진료소를 운영하고 있는 선교의사들이 함께 일할 수 있는 보다 큰 규모의 병원설립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이연설을 듣고 감동을 받은 세브란스 씨는 병원건축기금 1만달러를 기부했다. 에비슨이 감사를 표하자 세브란스씨는 " 받는당신보다 주는 저의 기쁨이 더욱 크다" 고 말했다. 세브란스씨의 기부로 한국 최초의 근대식 병원인 세브란스병원이 설립되었다.
1900.8
에비슨이 치료한 환자중에는 백정출신 박성춘이었다. 박성춘의 부탁으로 에비슨은 아들 박서양에게 의학을 가르쳤다. 결국1908년 세브란스병원의학교 제1회 졸업생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면허의사가 되었다. 그는 모교에 남앙 교육과 진료활동을 활발히 펼쳤다. 그는 자신의 신분에 대한 문제를 심은 학생들에게 '내 속에 있는 오백년 묵은 백정의 피를 보지말고 과학의 피를 보고 배우자! 라고 하였다.
그는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학교를 사직하고 북간도로 이주해 구세병원 을 개업하면서 독립운동에 나섰다. 그는 조선 동포를 진료하는 한편 독립운동단체 대한국민회의 군의(軍醫)로 활동하였다. 박서양으는 조선사회의 가장 낮은 신분 출신 이었지만 새로운 학문을 배워 지도자가 되었다. 뿐만아니라 그는 일신의 안위를 구하지 않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한 세브란스가 배출한 큰의사(大醫)였다.
1905~1910
1894년 9월 제중원을 넘겨받은 에비슨은 1895년 여름 콜레라가 유행하자 방역국장으로 활동했다.
콜레라 유행이 끝난 후 에비슨은 학생을 모아 제중원에서 의학교육을 다시 시작했다.의학교육을 위해 가장 절실히 필요했던 것은 한글로 된 의학교재였다. 이를위해 에비슨은 먼저 그레이의 해부학교과서를 조금식 번역해 교재로 활용했다. 1904년 제시w. 허트류가 합류하자 에비슨은 교육에 집중하였으며, 그 결과 1905년 약물학교과서를 펴낸 이후 해부학, 생리학을 비롯하여 산과, 외과 등 의학의 거의 모든분야의 교과서를 출판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일제가 한글교과서 사용을 금지하여 에비슨의 노력이 지속되지 못하였다.
1907
1907년 8월 통감부는 대한제국 군대의 강제 해산에 나섰다. 그 과정에서 구한국 군인과 일본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이때 부상당한 한국군인 50여명은 일본 병원에서의 치료를 거부하고 세브란스로 가기를 요청 하였다. 에베슨은 적십자대를 조직하여 부상당한 군인들을 병원으로 이송하여 치료에 전념했다.
갑자기 몰려든 부상병들을 돌볼 인력이부족해 의학생은 몰론이고 병원가족들까지 참여하였다. 이전까지는 남녀유별 관습에 따라 간호학생이 남자환자를 돌보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목숨이 위태로운 한국군 부상병들이 몰려들자 이러한 인습은 순식간 허물어져 간호학생들은 밤 새워 부상병들을 간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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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중원
광혜원 (제중원)
제중원(濟衆院)은 조선정부가 최초로 설립한 서양식병원이다. 본래 광헤원 (廣惠院)이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었으나, 같은해 4월26일 광혜원이라는 명칭이 취소되고 제중원 (濟衆院) 이라 명명되었다. 제중원의 운영권이 믹국 북장로교회 선교부로 이관된 이후에는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부가 조선 (서울,대구.광주, 평안남도 선천 등)에 설립한 병원은 어느곳에서나 제중원이라 불렸다.
설립 배경 및 설립과정
미 공사관 의사로 활동하던 선교사 알렌은 갑신정변 당시 부상을 입은 민영익을 치료 하게 되는데 다른 서양 문물들과 함께 서양 의료의 필요성에 대해 탐색하고 있던 조선 정부에게 아는 외과술을 통한 서양의학의 장점을 잘 보여준 사건이 되었다. 고종의 신임을 얻은 알렌은 고종에게 서양식 병원의 필요성에 대해 건의하게 되고 고종의 승인을 거쳐, 1885년 4월 갑신정변으로 역적이 된 홍영식 (洪英植)의 집에서 최초의 성양식 병원인 제중원(濟衆院)을 개원하게된다. 조선정부와 알렌은 이곳에 진찰실 수술실 대기실 등을 갖추었다.
제중원은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 , 오늘날의 외교부)소속으로 되었으며,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독판 (오늘날의 장관) 또는 협판 (오늘날 차관)이 제중원 당상 (濟衆院 堂上)이 되어 정부 파견관리로서의 직무를 수행 했고 알렌등 선교부의사들이 병원의 전반적인 운영을 맡았다. 이후 1886년 10, 11월경 제중원은 구리개 (지금의 을지로 입구 외환은행 본점 자리에서 명동성당 방향일대)로 자리를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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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 한국 현대 의학의 시원을 찾아서
「제중원」이라는 드라마를 계기로 한국 근대 의학의 탄생에 대해 관심이 높아졌다. 현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하얀 색의 가운을 입은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현대식 병원은 익숙한 광경이지만 불과 100년 전만 해도 서구 의학은 일반인들에게 신비로운 존재였다. 호환 마마가 가장 두렵던 시절, 서구의 의학은 어떤 과정을 거쳐 한국에 뿌리내렸고 어떻게 발전했을까. 연세대학교 동은 의학 박물관 관장 박형우 교수와 연세대학교 의사학과 박윤재 교수가 근대 의학사의 이모저모를 소개한다.
『사람을 구하는 집, 제중원』은 한국 근대 의학사에 관한 책이다. 연대기식으로 서술되는 딱딱한 방식에서 벗어나 재밌고 흥미있는 역사적 사건을 위주로 소개한다. 책에는 총 35가지의 사건을 중심으로 한국 근대 의학사가 기술된다. 제중원, 세브란스 병원의 건립 그리고 한국 최초의 의사, 의사 면허를 둘러싼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실렸다. 그 외에도 당시 의학이 전염병에 대처하는 모습이라든지 진료 모습 등 읽을거리가 풍부하다.
목차
1부 새로운 의학의 세기
1. 조선, 새로운 의학을 만나다
2. 제중원 탄생기
3. 개화기 청년 의학도
4. 정부, 제중원에서 손을 떼다
5. 광제원이냐 광혜원이냐
6. 세브란스, 병원을 세우다
7. 통감부와 대한의원
2부 의술을 배운다는 것
8. 한국 최초의 의사가 개업을 하지 않은 이유
9. 한국어로 만나는 『그레이 아나토미』
10. 의학교 졸업생, 군대 가다
11. 대의大醫의 길을 택한 최초의 면허의들
12. 의사 면허의 뒷이야기들
13. 의학교 들여다보기, 1945년까지
14. 의학교 들여다보기, 1945년부터
15. 보건 일꾼이 되는 법
3부 사람을 구하는 일, 진료
16. 제중원 의사 활약상
17. 제생의원의 변신
18. 활명수, 100년 전설의 기원
19. 의료 선교의 허와 실
20. 자혜라는 이름의 지배
21. 대장금에서 나이팅게일로
22. 이 해 박는 집
23. “병 안 나으면 돈 못 줘.”
4부 돌림병에 맞서다
24. 위생 경찰의 시대
25. 우두, 두창을 몰아내다
26. 호랑이가 살점을 뜯는 병
27. 소록도의 눈물
28. 크리스마스실의 그림자
29. 민족의 3대 독
5부 제중원의 아이들, 의사
30. 의학 박사, 논문 쓰다
31. 의사 단체 헤쳐 모이기
32. 인술과 이익 사이에서
33. 한의학의 부흥을 외치다
34. 독립을 꿈꾼 의사들
35. 최초의 사람들
저자 소개
출판사 리뷰
한국 근대 의학 35장면
한국 현대 의학의 시원을 찾아서
호환 마마가 가장 두렵던 시절, 우리 의학 이야기
신종 인플루엔자 또는 신종플루 A(H1N1)는 2009년 멕시코에서 발생해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세계보건기구(WHO)의 집계에 따르면 2010년 1월 10일 현재 전 세계 신종 플루 사망자 수는 1만 3554명에 이른다.(보건복지가족부 발표 국내 사망자수 1월 2일 현재 192명) 20세기 초 수천만 명의 사망자를 낳은 스페인 독감의 재래라는 발생 초기의 우려와는 달리 적은 수의 희생으로 일단락된 듯하다. 예상보다 적은 이 희생자 수는 백신 개발과 다국적 제약 회사가 얽힌 음모론의 밑불이 되고도 있지만, WHO와 각국 보건 당국 그리고 시민들의 자발적 방역 활동의 성과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다양한 방역 대책이 시행되었고 시민들은 집에서, 직장에서, 온갖 공공장소에서 손 씻기를 하고 마스크를 쓰는 등 자신의 몸을 지키는 데 적극적으로 나섰다. 우왕좌왕하는 정부와 반대로 시민들은 일사불란하게 예방 지침을 따랐던 것이다. 콜레라를 호환이라고, 천연두를 마마라고 부르며 전염병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했던 100년 전의 시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이 ‘위생’ 시민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이러한 새로운 인간의 탄생 배경에는 서양 의학이 있다. 한말 처음 들어온 서양 의학은 조선 왕조를 끊임없이 괴롭힌 전염병에 소독과 청결이라는 새로운 대책을 마련해 주었고 전통 의학인 한의학을 대체했다. 한국인의 세계관뿐만 아니라 신체를 둘러싼 자의식 전체를 송두리째 바꿔 버렸다. 의료라는 잣대로 볼 때 한국의 근대화는 서양 의학의 토착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에 (주)사이언스북스에서 펴낸 『사람을 구하는 집, 제중원: 조선, 새로운 의학을 만나다』는 잘 알려지지 않았고, 오랫동안 묻혀 있던 한국 근대 의학사 관련 사료들을 바탕으로 서양 의학의 한국 토착화를 추적한 책이다. 국내에서 근대 의학 관련 사료를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는 연세 대학교 동은 의학 박물관 관장 박형우 교수와 연세 대학교 의사학과 박윤재 교수가 공저자로 나서 근대 의학사의 이모저모, 심지어는 그 이면을 소개한다. 두 사람의 저자, 해부학자 박형우와 역사학자 박윤재는 18세기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서양 의학의 수용 과정을 정리함으로써 서양 의학이 어떻게 우리 삶 속에 들어왔는지, 현재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집중 해부하고 있다.
우리 두 사람은 제중원을 공부하면서 제중원이 생각보다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소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제중원을 단순히 족보쓰기 차원으로만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점도 알아 나갔다. 제중원은 한국 근대 의학의 아버지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 책이 한국 근대 의학의 역사를 호젓하게 음미하며 ‘산책’할 수 있는 길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본문에서
최근 화제 속에 방영 중인 SBS 드라마 「제중원」은 갑신정변의 와중에 명성황후의 조카 민영익을 극적으로 소생시킨 서양 선교사 알렌의 청으로 고종이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제중원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책의 저자인 동은 의학 박물관 박형우?박윤재 교수는 제중원을 소재로 한 이기원의 소설 『제중원』 출간과 이 소설을 대본으로 한 드라마 「제중원」 제작에 동참해 각각 의학적인 부분과 일반적인 역사학 부분의 고증 자문을 맡고 있다. 저자들은 드라마와 소설이 극적 전개 과정에서 버릴 수밖에 없었던 의학사의 실마리들을 사진 자료와 문헌 사료를 통해 소개하려 노력하고 있다. 저자들은 한국 근대 의학사의 여러 논쟁점들을 하나하나 짚어 나가며 의학사를 입체적으로 재구성해 간다. 세브란스 병원과 대한의원 사이의 서양 의학 기원 논쟁, 한의학과 서양 의학의 우월성 논쟁, 식민지 지배하의 의학의 위상, 의사 조직의 이합집산 등 드라마에서는 다뤄지지 않을 흥미진진한 쟁점들이 두 저자의 냉정한 필치 아래 되살아난다.
‘사람을 구하는 집’ 제중원에서 시작하는 한국 의학사 산책
18세기 말, 이 땅에는 새로운 의학의 세기가 열렸다. 1885년 설립된 한국 최초의 서양식 병원이자 근대식 병원이었던 제중원이 상징하듯 이 시기 한국은 서양 의학을 수용하면서 자신의 외모와 체질을 변화시켜 나갔다. 그 과정은 이전의 변화와는 차원이 다른 규모와 정도로 한국 사회를 바꾸었다. 아마 그 과정을 ‘근대화’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서양 의학에 콜레라 같은 급성 전염병에 맞서는 일정한 대응책이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검역이나 백신은 한의학에서 이루어지지 않던 새로운 방법이었다. 근대라는 시기를 거치면서 서양 의학은 한의학을 넘어 우리의 일상이 되었다. 2000년 일어난 의료 대란에 한국이 소용돌이칠 수?에 없었던 배경에는 한국인의 일상을 장악한 서양 의학이 있었다. 대란이 본격화되면서 나타난 상황, 즉 병원이 문 닫을지 모를 상황, 실제로 병원에서 의사를 만날 수 없게 된 상황은 공포 그 자체였다. 물속에 들어가서야 공기를 호흡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듯이 의료 대란을 거치면서 한국은 이미 일상이 되어 버린 서양 의학의 위력을 실감하게 되었다.
서양 의학 대 동양 의학
세계적으로 유래가 드문 의료의 이원화는 일제 강점기에 태동했다. 일제 강점기에 접어들면서 한의학은 어둠 속을 걷는 듯했다. 일본은 자신들이 먼저 수용한 서양 문명을 한국을 침략 지배하는 수단으로 사용했다. 일본이 먼저 서양 문명을 수용한 문명국임을 자처하는 가운데 한의학은 조선의 미개함을 보여 주는 상징 중의 하나였다. 일제 강점기 동안 전통 의학은 필요 이상 억압을 받았다. 당시 의학은 당연히 서양 의학이었고, 전통 의학은 이름 앞에 ‘한漢’을 붙인 한의학이 되었으며 한의사들도 의사가 아닌 의생으로 격하되었을 뿐더러 서양 의학을 배워야 했다. 한 한의사는 앞으로 다가올 한의학의 미래를 바라보며 “하늘을 쳐다봐도 별 하나 볼 수 없는 캄캄한 밤”이라고 했다.
장기무가 1936년 「조선일보」에 기고한 「한방의학 부흥책」은 그 캄캄한 밤하늘에 새로운 빛을 던지는 별이 되었다. 동시에 한의학의 부흥을 둘러싸고 많은 논자들이 논쟁을 벌이는 계기가 된다. 관립 의학교를 졸업한 서양 의사이기도 했던 장기무는 그의 저서 『동서의학신론』에서 한의학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한국의 전통 의학을 ‘한의(漢醫)’나 ‘한방(漢方)’이 아닌 ‘동의(東醫)’라고 불렀다. 한국 재래의 의술이 수천 년을 경과하면서 한국의 고유한 의술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한의학이 도태될 위기에 빠져 있다고 진단하면서 한의학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부흥을 도모하자고 했다.
경성 제국 대학 의학부 출신인 정근양은 「한방의학부흥문제에 대한 제언, 장기무 씨의 소론을 읽고」를 통해 당시 서양 의사들이 가진 일반적 견해를 피력했다. 그에 따르면 한의학을 별도의 교육 기관에서 가르칠 필요가 없었는데 의학은 하나이지, 둘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장기무나 세브란스 의학 전문 학교를 졸업한 방합신이 한의학의 부흥을 외쳤지만 정근양 외에 서양 의사 중 동서 의학 논쟁에 참여한 이는 적었다. 하지만 장기무나 방합신의 의미를 무시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가진 한의학에 대한 관심은 서양 의학에 대한 반성에서 생겼기 때문이다. 방합신은 환자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서양 의학의 한계를 느꼈고, 대안으로 한의학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광야의 의사들
동서 의학 논쟁에서 그들이 느꼈던 한계는 항생제가 발견되기 이전 서양 의학의 한계라고 할 수 있다. 서양 의학을 다시 바라보는 사람들이 서양 의학계 내부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의의는 적지 않다. 그것은 개항 이후 일방적으로 한국이 수용해야 했던 근대에 대한 반성이었기 때문이다.
일제의 일방적인 의료 정책에 비판의 메스를 들었던 한국인 의사들의 사례는 동서 의학 논쟁 외에도 삼일 병원 개원이나 에메틴 사건 등 여러 분야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일제의 억압이 무거워지면서 의사들은 “민족의 선구자가 되어 난국을 타개”하거나 “위생의 개량 발전과 서양 의학의 보급에 노력”하는, 독립 운동가와 계몽 운동가의 역할 사이에 놓이게 된다. 한국 최초의 면허 의사들 대부분은 소의(小醫)나 중의(中醫)를 넘어 나라를 구하는 ‘대의(大醫)’의 길을 택했다.
알렌이 의학 교육을 시작한 지 22년, 에비슨이 의학 교육을 시작한 지 10여 년 만인 1908년 6월 3일 오후 4시 제중원 의학교(세브란스 병원 의학교)의 첫 졸업생 7명이 배출되었다. 이들 중 김필순, 주현측, 신창희, 박서양이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1911년 말 중국으로 망명해 독립 운동을 펼친 김필순의 일대기는 2008년 8월 MBC 광복절 기념 특집 다큐멘터리 「광야의 의사들」에 소개된 바 있다. SBS에서 방송 중인 드라마「제중원」의 주인공인 박서양은 1917년경 학교를 사임하고 연변으로 망명해 병원을 열고 학교 및 교회를 세워 독립 운동을 전개했다.
이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바로 도산 안창호 선생이다. 안창호는 김필순과 의형제를 맺은 사이로 김필순이 그에게 보낸 편지 일부가 이 책에 실려 있다. 이 책에는 또한 알렌이 발행한 한국 최고(最古)의 근대 서양식 진단서(등록문화재 제445호)와 1885년 4월 10일부터 1886년 4월 10일까지, 제중원 의사 알렌과 헤론이 작성한 활동 보고서로서 19세기 후반 한국인들이 앓던 질병의 양상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인 제중원 1차년도 보고서(등록문화재 제447호) 등 문화재청의 의료 분야 근대 문화 유산으로 새롭게 등록된 동은 의학 박물관 소장 자료가 수록되어 있다.
출처: https://japan114.tistory.com/11233 [동방박사의 여행견문록(since 2010):티스토리]
책소개
목차
조선의 전통적인 의료 체계
국교확대 이전 서양의학과의 접촉
국교확대와 서양의학에 대한 괌심 고조
미국의 해외 전도
제2장 제중원의 설립
알렌의 입국과 갑신정변
병원설립안의 제출과 제중원의 개원
재동 제중원의 규모와 의학적 기능
제3장 알렌과 헤론 시기의 제중원
진료활동
의학교육
선교사
전도사업
제중원의 이전
제4장 에비슨 시기의 제중원
빈튼 시기의 제중원
에비슨 입국
제중원의 선교부 이관
제중원의 의료 활동과 운영
제중원의학교
전도
세브란스병원으로의 도약
제중원에 얽힌 일화
책 속으로
출판사 리뷰
개화기의 서양의학
전통적인 한의학이 지배하고 있던 우리나라에 서양의학이 도입된 것은 1876년 일본과의 국교확대를 시작으로 여러 나라들에게 문호를 개방한 이후였다. 그러나 서양의학을 수용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의료 선교사의 내한이었다. 1870년대 말부터 구체화되기 시작한 조선에 대한 미국의 기독교 선교는 각 교파별로 활발하게 준비되었고, 이들은 선교를 위한 수단으로 의료와 교육을 앞세웠다.
미국 북장로회는 1884년 의료선교사로 헤론, 알렌 등을 첫 선교사로 임명하여 조선선교를 시작했다. 이들은 조선에 거류하는 최초의 서양인 의사로서 대단한 환영을 받았다.
제중원의 설립 배경
알렌이 내한하고 3개월이 지난 1884년 12월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사건의 전말은 우정국 개설 축하 만찬이 열리고 있던 중 민비의 조카이며 당시 실력자였던 민영익이 자상을 입은 것이다. 이때 알렌이 왕진 요청을 받아 그를 치료했다. 민영익은 3개월 정도의 치료로 완쾌되었고, 이 일을 계기로 알렌은 자연스레 왕실과 가까워졌다.
알렌은 환자들의 치료 및 서양 의술의 전수를 위한 병원을 설립할 것을 조선정부에 공식적으로 제안한다. 역설적이게도 병원 건물로는 갑신정변에 참여했다가 정변 실패로 참살 당한 후 거의 폐허가 된 홍영식의 집이 선정됐다. 이 집은 환자 40명 가량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의 병원으로 개조됐다. 드디어 조선 정부와 미국 북장로회가 합작 운영하는 서양식 병원이 출범하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병원의 명칭을 '널리 은혜를 베푸는 집'이란 뜻의 "광혜원"이라 했다가, 얼마 뒤 '사람을 구제하는 집'이란 의미의 "제중원"으로 개칭했다.
제중원의 활동
갑오개혁이 한창이던 시기에, 여러 개혁 작업 진행에 필요한 재정이 턱없이 부족했던 조선정부가 제중원의 운영권을 미국 선교부에 완전히 넘김으로써 마침내 제중원은 민간병원의 성격을 갖게 되었다.
제중원 의사들은 전염병의 구료(救療) 사업에도 관여했는데, 1886년 콜레라가 창궐했을 때에는 다른 선교사들과 함께 열성적으로 방역활동을 펼치기도 했으며, 특히 종두 접종에 있어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여성 진료에 있어서도 부녀과를 설립하는 등 활발한 진료활동을 펼쳤다.
의학교육
1886년 3월 경쟁을 거쳐 학생을 선발하고 제중원 의학당을 개교했다. 이는 우리나라 의학교육의 효시였으며, 교수로는 알렌, 헤론 및 언더우드가 있었다. 이후 김필순, 홍석후, 홍종은 등 조선인 의학생들은 에비슨의 지도로 거의 전과목에 걸쳐 우리말로 된 의학교과서를 편찬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곳을 통해 배출된 졸업생들에게는 우리나라 최초의 의술 개업 인허장이 수여됐다. 즉 민간 차원에서 이루어진 의학교육에 국가적인 공인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세브란스병원 설립
에비슨은 제중원을 여러 교파가 참여하는 연합병원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는 이 일이 선교사들의 결집과 의료사업을 효율적으로 진행시키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1900년 뉴욕에서 열린 만국선교대회에 참석하여 '의료선교에서의 우의'라는 내용의 강연을 했고 이 연설에 감동한 클리블랜드의 부호 세브란스가 병원 건립기금으로 1만 달러를 희사했다.
그러나 병원 설립은 평양의 선교사들의 반대와 조선정부의 비협조 때문에 순탄하게 진행되지 않았다. 1903년 말에는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소문이 돌면서 건축자재 값이 폭등해 시공자가 계약을 포기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세브란스가 추가 비용을 기꺼이 부담하면서 문제는 해결되었고, 마침내 조선 최초의 현대식 종합병원이 문을 열었다. 병원 이름은 기증자 이름을 따서 '세브란스기념병원'으로 정해졌고 정식 개원식은 그 해 11월 16일 열렸다. 병원 이름은 바뀌었지만 민중들은 여전히 이 병원을 제중원이라고 불렀다. 건물과 위치가 바뀌었어도 제중원의 역할과 성격은 세브란스병원으로 계승되었던 것이다.
출처: https://japan114.tistory.com/11240 [동방박사의 여행견문록(since 2010):티스토리]
책소개
강성대국을 꿈꾼 고종의 시도, 제중원
제중원을 다룬 드라마가 공중파 방송에서 방영됨으로써 제중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이미 제중원을 다룬 책이 수 종 발간되었는데, 『제중원 이야기』는 고종의 기존 이미지를 재고하려는 시도와 함께 당시의 시대상황을 짐작하게 하는 다양한 사료를 실었다. 뿐만 아니라 이광수, 홍영식, 김윤식 등 흥미로운 인물을 차례로 다룸으로써 다양한 각도에서 개항기의 역사를 서술한다.
목차
들어가며 : 고종, 조선 근대화를 꿈꾸다
1장 알렌, ‘제중원 신화’를 창조하다
삼일천하, 갑신정변이 낳은 역사적 우연
민씨 가문의 황태자, 민영익
서양의 외과술로 살아나다
죽은 시계도 고친다는 서양 의술
* 부록
서양 의사의 눈에 비친 조선
2장 새 의학으로 새 나라를 만들자
실학자들, 새로운 의학을 고민하다
마마 귀신과 종두법의 싸움
전 세계를 공포에 몰아넣은 콜레라
저팬 타운에 서양식 병원이 등장하다
암행어사, 일본의 서양식 병원에 가다
혜민서ㆍ활인서를 과감히 혁파하다
조선은 왜 미국을 짝사랑했을까
서양의 것, 무엇을 먼저 받아들일 것인가
* 부록
춘원 이광수와 콜레라
한눈에 보는 지석영의 생애
조선 최초의 여행자들
3장 제중원, 조선 백성에게 첫선을 보이다
통리아문에서 방을 내걸다
보름 만에 바뀐 이름
역적의 집에 병원을 열다
1년 운영비는 3000원
제중원은 어떻게 운영되었을까
제중원, 구리개로 이사가다
제중원은 국립병원이다
* 부록
개화파의 자존심, 홍영식
새 시대 새로운 인재를 키우자
4장 제중원 사람들
마지막 대제학, 근대 국립병원의 원장을 맡다
제중원 주사들은 조선의 최신식 관리들이라네
푸른 눈의 선교 의사들
알렌, 악몽 같은 중국 생활을 뒤로 하고 조선에 정착하다
한국 장로교의 대부 언더우드
감리교 의료 선교사 스크랜턴
의대 수석 장학생 헤론
파워, 하디, 빈턴
명성을 뒤로하고 조선을 찾아온 에비슨
방거 부인 엘러스
명성황후가 신임한 여의사 호턴
* 부록
온건개화파의 상징 김윤식
호턴, 남사당놀이를 구경하다
에비슨이 들려주는 단발령 이야기
5장 신식 병원에서는 무슨 병을 고치나
키니네 열 알에 엽전 500푼이오
인기만발 금계랍
제중원의 여의사들
어의가 된 의료선교사들
콜레라를 막아라
* 부록
‘남녀칠세부동석’, 애국심에 무릎을 꿇다
6장. 제중원에 들고 났던 서양 의사들
스크랜튼과 알렌, 어색한 동거
간접선교냐 직접선교냐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뽑다
양놈들이 아이들을 팔아넘긴다
알렌, 선교사를 사직하고 제중원으로 복귀하다
새 의사를 둘러싼 각국의 움직임
* 부록
1885~1894년 미국 감리회의 의료 선교
기포드의 전도여행
개신교를 놀라게 한 평안도의 기적
7장. 조선인 양의사를 키우다
의학당, 문을 열다
최초의 의대생들은 누구였을까
그 의대생들은 어디로 갔을까
* 부록
의학도 이진호의 출세담
한국 최초의 의사, 서재필
박서양, 백정에서 의사로 다시 독립운동가로
제8장 조선 정부, 운영권을 넘기다
에비슨, 제중원을 정상 궤도에 올리다
위기에서 기회로
가난한 정부, 위협받는 국왕
모종의 교섭
근대화, 그 미완의 프로젝트
* 부록
외국인들이 본 1894년 조선
맺으며 : 옛 왕조, 가장 새 것을 추구하다
참고문헌
책 속으로
18명의 참석자는 일본인 요리사가 장만한 양식 요리상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었다. 다만 민영익과 묄렌도르프만이 기분이 좋은 편이었다. 특히 김옥균은 식사 중에도 여러 차례 들락날락하며 초조한 기색을 보였다.
--- p.22
알렌은 민영익의 생명을 구함으로써 왕실과 정부 관리들은 물론 백성들의 관심도 한 몸에 받게 되었다. 조선인들에게 서양 의술의 우수성을 확실하게 보여준 셈이다. (...) 서양 의술의 위력이 입증되면서 갑신정변 중에 부상을 입은 조선인들과 청나라 병사 등 많은 사람들이 알렌에게 몰려들었다. 어떤 이가 죽은 시계를 갖고 와서 고쳐달라고 조르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청나라 병사들은 알렌의 단골 환자들이었다. 청나라 병사들은 뼈가 부서지고 살이 찢겨 나간 상처에 막 죽인 개의 가죽을 감고 찜질하는 전통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그러나 사실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한 터였다. 알렌은 청나라 부상병들을 정성껏 치료해주었다. 효험을 본 병사들은 대놓고 알렌을 “예수 박사”라고 불렀다.
--- p.33
1885년 4월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문을 연 서양식 국립병원의 첫 이름은 광혜원廣惠院이었다. ‘널리 은혜를 베푸는 곳’이라는 뜻으로서, 개원 후인 4월 12일에 지어졌다. 이 이름은 조선 초기의 제생원濟生院이나 1882년에 폐지된 혜민서, 활인서와 같은 조선 시대 전통 의료 기관의 이름을 계승한 것이었다. (...)
그런데 그로부터 2주일 후인 4월 26일,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에서는 고종에게 ‘광혜원’을 ‘제중원’으로 개명하자고 했다. 고종은 이를 즉시 재가裁可하여 이때부터 병원의 이름은 제중원이 되었다. ‘제중’은 『논어論語』에 나오는 ‘박시제중博施濟衆’의 준말로, ‘널리 베풀어 백성을 구제한다’는 뜻이다. 광혜원이나 제중원이나 그 뜻에는 별 차이가 없는데, 굳이 이름을 바꾼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 p.99
알렌이 고종과 명성황후를 진료 목적으로 처음 만난 것은 제중원 개원 직전인 1885년 3월 27일이었다. 그들은 유사 천연두에서 막 회복된 상태였는데, 그 후유증으로 고종은 인후가, 명성황후는 귀가 부어 있었다. (...) 알렌이 명성황후를 비교적 가까이서 진료할 수 있게 된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명성황후가 병을 앓고 있었는데 그때도 환관 한 사람이 칸막이를 통해 천으로 감싼 명성황후의 팔을 내밀었다. 명성황후의 팔뚝은 모두 명주 천으로 싸여 있었고 다만 맥을 짚을 1.5센티미터 정도만 보일 뿐이었다. 그리고 명성황후의 혀를 칸막이에 뚫린 구멍으로 내밀었다. 양의洋醫도 한의韓醫처럼 양쪽 팔목의 진맥을 하고, 혀를 살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출판사 리뷰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시대를 들여다본다
그 끝이 ‘한일합방’이었기에 비운으로 기억되는 구한말. 그러나 사실 그 시기만큼 격동적이고 화려했던 시기도 없었다. 천민에서 국왕까지, 푸른 눈의 서양인에서 청나라와 일본까지. 신분제 사회가 흔들리고, 나라의 대문이 흔들리는 이야기들. 이 핵심에 바로 1885년에 탄생한 최초의 서양식 국립병원 제중원이 있다.
‘백성을 구제하는 집’이라는 뜻의 제중원의 이름을 지은 이는 바로 조선의 제26대 국왕 고종. 유약한 군주로 우리는 기억하지만, 사실 그는 아주 만만찮은 군주였다. 그의 ‘동도서기’론은 아주 견고한 신념이었고, 그는 그 신념을 실천에 옮길 의지도 있었으며, 노력도 기울였다.
역사책에서 접했던 그 많은 기관들의 이름들. 통리기문아문, 별기군, 기기창, 전환국, 박문국, 우정국, 육영공원, 연무공원 등 이 모든 것이 고종의 총체적 근대화 프로젝트의 일환이었다. 그 중 고종은 근대적 국립병원을 만들면서 그것을 ‘서양의 의학 기술’로 운영하고자 했다. 한 왕조의 마지막을 이끌던 왕이 ‘새것’을 끊임없이 원했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선교 의사 알렌의 이야기에서 시작한 제중원 속에는 새로운 세상을 세우고자 했던 한 나라의 꿈과 근대적 개인을 꿈꾸는 개인들의 열망이 가득하다.
모든 변화는 그곳에서 시작되었다!
한국 근대사의 핵심을 파악하는 코드, 제중원
제중원을 통해서 우리는 지난 역사 서술에서 빠뜨렸던 수많은 이야기들을 발견할 수 있다. 무엇보다 가장 드라마틱한 이야기는 이 제중원의 설립이 ‘3일 천하’로 끝난 갑신정변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는 것이다. 갑신정변으로 인해 민씨 가문의 황태자, 민영익이 자상을 입고, 이를 중국에서 병원을 실패하고 조선으로 도망치듯 와 있던 알렌이라는 서양 의사가 치료한 것이 바로 역사적 드라마의 시작이다. 급진개혁파의 정치적 혁명은 실패했으나, 그로 인해 조선인들의 삶을 뒤흔드는 서양 의학의 보급이 국가를 통해 가능하게 된, 필연 같은 우연들이 제중원을 통해 재발견된다.
또한 제중원을 통해서 우리는 당시 조선을 둘러싼 미국, 일본, 청국의 헤게모니 구도를 보다 다채롭게 이해할 수 있다. 제중원의 설립과 운영 과정, 그리고 이후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로의 운영권 이관 등을 통해, 당시 조선 정부가 미국에 가지고 있었던 ‘짝사랑’에 가까운 우호감, 조선의 근대화 정책의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청국의 횡포, 그리고 이 작은 병원 하나를 일본으로 넘겨주지 않고 보통의 조선인들을 위한 병원으로 두고자 했던 고종의 의지 등을 살펴볼 수 있다.
망국의 시대에서 격동의 시대로,
회색빛 구한말에 색채를 입히다
올해는 경술국치 100년이 되는 해이다. 이를 의식하기라도 한 듯, 출판계에는 『덕혜옹주』, 『고종 죽기로 결심하다』, 『세계로 떠난 조선의 지식인들』등이 출간되어, 그 100년의 시기를 새롭게 보려는 시도들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가진 반일감정은 유사 이래 계속되었던 침략이 그 원인이지만 역시 가장 큰 사건은 바로 일제 강점기에 겪은 민족적인 치욕일 것이다. 하지만 이 시기를 치욕적인 역사로만 기억하는 것은 과연 옳은 것일까? 이 책 『제중원 이야기』의 저자 김상태 교수는 ‘아니다’라고 단언한다. 이 시기에 우리가 새롭게 기억해야 할 것은 새로운 근대 국가를 만들어가려던 고종과 개화파 인사들을 비롯한 조선인들의 노력이다. 이 기간 동안 현재 우리가 이용하는 대부분의 근대적인 시스템들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 중심에 최초의 서양식 국립병원인 제중원이 있다.
병원은 어떻게 조선의 운명을 바꾸었을까?
의료라는 코드를 통해 개화기를 다시 읽다
『제중원 이야기』 속에는 그동안 제대로 연구되지 못했던 선교사들의 일기와 편지 등 여러 가지 사료를 통해 독자들을 그 시기의 생생한 현장으로 데려 간다.
서양 의학서들을 구해 읽던 조선 말기 지식인들의 노력, 사람의 살을 찢고 꿰맨 장면을 처음 본 조선인들이 받은 충격, 춘원 이광수의 아버지를 비롯하여 당시 전 세계를 공포에 몰아넣었던 콜레라 이야기, 말라리아 치료제로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금계랍(키니네)’ 등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뿐만 아니라 1883년 미국 대통령의 초청에 의해 미국을 방문하여 근대 문물을 직접 보고 보고 온 보빙사 일행 중 한 명인 최경석이 경기하는 서양 아이를 침으로 치료한 일, 제중원에 처음으로 배치된 5명의 의녀를 기생 출신이라는 이유로 희롱하거나, 청나라에 팔려가게 만든 일 등 그 시기의 사람들을 생생하게 관찰할 수 있는 수많은 에피소드들이 담겨 있다.
출처: https://japan114.tistory.com/11236 [동방박사의 여행견문록(since 2010):티스토리]
책소개
'제중원'을 조명한다!
프랑스의 저명한 사상가 푸코는 근대를 규율 권력이 사회 전반으로 확장되는 시기라고 밝힌다. 푸코가 대표적인 기관으로 꼽은 것이 학교, 군대 그리고 '병원'이었다. 비록 외세에 의해 강압적으로 근대로 전환되기는 했지만, 우리 사회가 근대로 전환하면서 생긴 것이 '병원'이다. 푸코의 논지처럼 병원을 감시와 훈육의 기제로 볼 수 있겠지만 당시 병원은 발전된 서양 의술을 사회 전반에 전파하는 등의 긍정적인 역할도 수행했다.
『제중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병원인 제중원의 역사를 탐구한 저술이다. 그간 서양의술이 한국에 전파되는 과정에 깊은 관심을 표명한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제중원의 모습을 재구성한다. 책은 연대기적 서술을 채택하여 제중원의 설립에서부터 알렌과 헤론 시기의 제중원, 에비슨 시기의 제중원을 차례로 탐구한다.
목차
제1장 서양 의학과의 접촉
조선의 전통적인 의료 체계
국교확대 이전 서양의학과의 접촉
국교확대와 서양의학에 대한 관심 고조
미국의 해외 기독교 전도
제2장 제중원의 설립
알렌의 입국과 갑신정변
병원 설립안 제출과 제중원의 개원
재동 제중원의 규모와 의학적 기능
제3장 알렌과 헤론 시기의 제중원
진료활동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 의학교육
제중원의 주사와 재정
선교사
전도사업
제중원의 이전
제4장 에비슨 시기의 제중원
빈턴 시기의 제중원
에비슨 입국
제중원의 선교부 이관
진료활동
에비슨에 의한 의학교육 재개
진료활동과 운영
전도사업
세브란스 병원으로의 도약
제중원 대지 및 건물의 반환
맺음말
부록[표]
제중원과 관련된 연표
주
찾아보기
책 속으로
--- p.33
병원에서 실제로 치료를 시작한 것은 4월 9일이다. 『앨런의 일기』 1885년 4월 10일자에 의하면 “병원은 어제(4월 9일) 개원했다. 외래환자는 20명이었다. 절단수술이 필요한 환자는 아직까지 수술에 동의하지 않고 있다”고 돼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광혜원이 ‘공식적으로 개원한 것’은 1885년 4월 10일이었다. 그동안 광혜원의 정확한 개원일에 관해 논란이 있었지만 「제중원 일차년도 보고서」「한국 선교계」 미국 공사의 「미국 국무성에 대한 보고」 등이 기록된 대로 1885년 4월 10일 특별한 의식 없이 개원한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무난할 것으로 보인다.
--- p.64
거기서 아기들의 심장과 눈을 잘라내 외국 관리와 선교사들의 요리상에 진미로 바쳐진다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병원 부근에는 커다란 소요가 있었다. 자기 아이를 데리고 가던 한 사람은 아기를 훔쳐가는 것으로 오인 받아 아무런 죄 없이 죽음을 당했다. 성난 군중들은 병원을 에워쌌다. 나의 가마꾼들은 나를 다시 병원에 데려다주기만 하면 죽게 될 것이라고 협박받았다. 내가 다음날 말을 타고 병원에 가겠다고 우긴 것이 아주 어리석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동양은 나에게 아주 낯선 곳이었다. 최소한 경험 면에서 볼 때도 나는 무척 어렸었다. 언더우즈는 나를 혼자 가게 내버려둘 수 없다 하여 나와 동행했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런 해도 입지 않았다. 아마 우리 가마꾼들이 우리들이 마술을 부린다는 이야기를 퍼뜨려, 그들은 우리와 싸우는 것이 아주 위험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모양이다.
출판사 리뷰
-이기원(드라마 「제중원」작가)
긴박했던 갑신정변의 와중에
민비의 조카인 민영익은 전신에 칼을 맞고 쓰러졌는데…….
조선 최초의 근대식 병원 제중원은 1884년 12월 4일 저녁 우정국 개설 축하 만찬에서 벌어진 갑신정변의 와중에 탄생하게 된다.
당시 급진개화파였던 우정국 총판 홍영식, 금릉위, 박영효, 김옥균, 서광범 등이 개화 정책 추진에 방해가 된다고 여긴 온건개화파 인사들을 제거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민비의 조카였던 민영익이 앞뜰에 나갔다가 전신에 자상을 입고 피투성이가 된 채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주조선 미국 공사 푸트와 조선해관 총세무사 파울 묄렌도르프가 민영익을 응급 치료했다. 묄렌도르프는 사태가 위급함을 느끼고 집으로 옮겼다.
조선 최고의 한의사 13명이 모여 민영익을 치료하기 위해 애썼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미국 공사 푸트는 조선 최초의 선교 의사 앨런을 급히 불렀다. 앨런은 밤 12시가 넘어서 묄렌도르프의 집에 도착했다. 당시의 긴박했던 순간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앨런도 환자를 살려낼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모든 걸 하나님께 맡기고 치료를 시작했다. 제일 먼저 찢어진 머리를 명주실로 봉합하고 다른 부위의 상처는 소독하고 붕대를 감았다. 그는 모두 27군데를 꿰매고 한 군데는 혈관을 경색시켜 잡아매고 심을 넣어 반창고를 붙인 다음 상처 난 곳마다 거즈와 붕대를 감았다. 이전까지 조선에서 이루어지던 그 어떤 한방 치료와도 구별되는 전혀 다른 형태의 의술이었다. 결국 앨런은 민영익을 3개월 정도 치료해서 완쾌시켰다.
앨런의 제안으로 조선 정부 근대식 병원을 설립하다
앨런은 민영익을 치료하면서 왕실과 친하게 지내게 됐다. 조선 사람들은 서양 의학에 관심이 많았다. 앨런은 조선 정부에 서양 의학을 시술하면 병원 설립을 건의했다. 그렇게 해서 갑신정변의 주모자로 처형당한 홍영식의 저택이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병원 건물로 내정됐다. 1885년 4월 10일 개원했다. 고종은 4월 12일 광혜원이란 공식 명칭을 하사했다. 널리 은혜를 베푸는 집이란 뜻이다. 광혜원의 개원은 한국 근대사의 중요한 한 쪽이다. 또한 의학사, 교회사, 근대 교육사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지닌 사건이었다.
광혜원은 4월 12일부터 26일까지 2주 동안 사용됐다. 정확한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광혜원은 제중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제중원은 사람을 구제하는 집이란 뜻이다. 제중원은 개원 후 1년 동안 1년 동안 발진티푸스를 포함한 전염성 질병에 걸린 외래 환자 19명을 치료했고 사실열에 시달리는 713명을 포함해 말라리아 환자 1,061명을 치료했다.
아기들의 심장과 눈을 잘라서 요리를 한다는 소문이 나다
제중원을 찾는 환자들도 많았고 고종의 신임도 컸다. 하지만 일반 시민 모두가 우호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반감의 대표적인 예로 ‘영아소동’이 흔히 거론된다.
영아소동은 1888년 6월 10일 서울에서 표면화돼 지방으로 확산됐다. 외국인 선교사들이 어린아이들을 납치해 삶아먹고 눈은 빼내 약이나 사진 자료로 사용한다는 것이 주 내용이었다. 심지어는 어린아이들을 외국으로 보내 노예로 팔고 있다는 것도 있었다. 소문은 민중을 분노시키기에 충분했고 일부 과격한 대중들의 폭력사태로 이어졌다.
조선 정부와 외국 공관들이 적극 나서 조속한 해결을 위해 노력했다. 곧 영아소동은 끝났다.
앨런-헤론-에비슨으로 이어지며 한국의학사의 씨앗이 되다
조선 정부는 갑오개혁을 단행하는 와중에 재정 부족으로 제중원의 운영권을 미국 선교부에 완전히 넘긴다. 그로써 마침내 제중원은 민간병원의 성격을 갖게 됐다.
제중원 의사들은 전염병의 구료(救療) 사업에도 관여했다. 1886년 콜레라가 창궐했을 때는 다른 선교사들과 함께 열성적으로 방역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특히 종두 접종에 있어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여성 진료에 있어서도 부녀과를 설립하는 등 활발한 진료활동을 펼쳤다.
1886년 3월 경쟁을 거쳐 학생을 선발하고 제중원 의학당을 개교했다. 이는 우리나라 의학교육의 효시였으며, 교수로는 알렌, 헤론 및 언더우드가 있었다. 이후 에비슨의 지도로 김필순, 홍석후, 홍종은 등 조선인 의학생들이 우리말로 된 의학교과서를 편찬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곳을 통해 배출된 졸업생들에게는 우리나라 최초의 의술 개업 인허장이 수여됐다. 즉 민간 차원에서 이루어진 의학교육에 국가적인 공인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에비슨은 제중원을 여러 교파가 참여하는 연합병원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는 이 일이 선교사들의 결집과 의료사업을 효율적으로 진행시키는 방법이라? 생각했다.
그는 1900년 뉴욕에서 열린 만국선교대회에 참석해 '의료선교에서의 우의'라는 내용의 강연을 했고 이 연설에 감동한 클리블랜드의 부호 세브란스가 병원 건립기금으로 1만 달러를 희사했다.
그러나 병원 설립은 평양의 선교사들의 반대와 조선정부의 비협조 때문에 순탄하게 진행되지 않았다.
1903년 말에는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소문이 돌면서 건축자재 값이 폭등해 시공자가 계약을 포기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세브란스가 추가 비용을 기꺼이 부담하면서 문제는 해결되었고, 마침내 조선 최초의 현대식 종합병원이 문을 열었다. 병원 이름은 기증자 이름을 따서 '세브란스기념병원'으로 정해졌고 정식 개원식은 그 해 11월 16일 열렸다. 병원 이름은 바뀌었지만 민중들은 여전히 이 병원을 제중원이라고 불렀다. 건물과 위치가 바뀌었어도 제중원의 역할과 성격은 세브란스병원으로 계승됐다.
출처: https://japan114.tistory.com/11235 [동방박사의 여행견문록(since 2010):티스토리]
소개
근대의학기관으로의 발전과정을 반추하다
이 책은 2015년 4월 연세의료원이 제중원 창립 기념 학술 심포지엄과 세미나에서 발표한 원고들을 수정·보완한 것이다. 1부는 제중원의 설립, 2부는 제중원 뿌리논쟁, 3부는 제중원 선교사들의 협력과 사회활동, 4부는 제중원·세브란스인들의 사상과 사회운동을 주제로 다루고 있다.
목차
제중원의 설립과 선교사들의 역할_ 최재건
제중원과 에비슨_ 이만열
2부 제중원 뿌리논쟁
제중원 뿌리논쟁의 경과와 쟁점_ 신규환
제중원의 ‘이중적 지위’와 그 변화_ 김도형
3부 제중원 선교사들의 협력과 사회활동
알렌과 에비슨의 방역활동_ 김영수
세브란스병원 건립을 둘러싼 선교사들의 갈등과 선교정책 수정_ 문백란
식민지 시기 기독교와 의학 지식 형성_ 김성연
4부 제중원·세브란스인들의 사상과 사회운동
에비슨의 사상_ 여인석
제중원의학교와 민간 기획의 국민 만들기_ 장규식
부록
제중원-세브란스 외국인 인물 약전
제중원-세브란스 한국인 인물 약전
제중원-세브란스 연표
출판사 리뷰
근대의학기관으로의 발전과정을 반추하다
이 책은 2015년 4월 연세의료원이 제중원 창립 기념 학술 심포지엄과 세미나에서 발표한 원고들을 수정·보완한 것이다. 1부는 제중원의 설립, 2부는 제중원 뿌리논쟁, 3부는 제중원 선교사들의 협력과 사회활동, 4부는 제중원·세브란스인들의 사상과 사회운동을 주제로 다루고 있다.
제중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병원이다. 당시 조선에서는 선교활동을 금지하였기 때문에 미국 북장로교회는 의료선교를 통해 선교활동을 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병원의 설립 목적도 선교에 있었다. 그리고 조선정부의 입장에서는 서양식 병원을 설립할 필요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정부와 미 선교부의 입장이 각각 반영되어 제중원이 설립되기에 이르렀다.
제중원은 처음에 ‘널리 은혜를 베푸는 집’이라는 뜻의 광혜원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하였으나, 약 열흘 만에 ‘사람을 구제하는 집’이라는 뜻의 제중원으로 바뀌었다. 이렇게 탄생한 제중원은 의료는 미 선교부가 맡고, 재정은 조선정부에서 담당하기로 하였으나 1892년경부터 조선정부의 재정 지원이 원만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제중원은 1894년 9월에 왕립병원에서 미 북장로교 선교부 소속으로 이관되었다. 이때 세브란스(Louis H. Severance)의 기부로 새 병원 건립에 착수하게 되었다. 선교회는 새로운 병원을 ‘새로 짓는 제중원’이라고 하면서 ‘세브란스기념병원’이라고 칭하였다.
해방 이후 의학사 분야의 연구를 주도한 김두종 교수는 그의 저서인 『한국의학사』에서 제중원이 근대의학사에서 차지하는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우리나라 서양의학은 왕립병원인 광혜원으로부터 시작되어 제중원을 거쳐 세브란스병원을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 제중원은 1895년 7월 이후로 왕실의 경영을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미국 북장로교회에서는 이관된 후에도 선교회의 의료사업으로서 제중원의 명칭을 그대로 존속하여 오다가, 1904년 9월 23일에 현 남대문 밖 도동에 세브란스병원이 되면서 그 이름을 바꾸게 되었다. …… 세브란스병원은 우리나라에 있어서 처음으로 완비된 현대식 병원이었다. 세브란스병원은 …… 우리나라의 서양의학의 발상지로서 서양문화를 직접으로 가져 오게 한 영예의 전통을 자랑할 수 있는 곳이다. 우리나라에 전해온 근세의학의 역사 중에 가장 광채 있는 페이지를 장식한 것도 세브란스병원이거니와, 우리 의학의 발전적 과정에 있어서 민족적 고난과 호흡을 같이 하게 된 것도 세브란스병원이다.
출처: https://japan114.tistory.com/11229 [동방박사의 여행견문록(since 2010):티스토리]
책소개
그 배경과 경과과정, 논점 그리고 미해결 과제를 정리하다
올해는 제중원이 창립된 지 130년이 되는 해다. 그런데 1885년에 세워진 이 기관이 지금 도 현재적 관심의 대상이 되어 때때로 언론에 등장한다. 그 이유는 이른바 ‘제중원 뿌리논쟁’ 때문이다. 제중원 뿌리논쟁은 그간 누구나 세브란스의 기원이라고 여기던 제중원을, 그것이 한때 조선 정부 소속 기관이었다는 이유를 들어, 서울대 의대가 자신들의 기원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 책은 1970년대 말에 시작되어 3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제중원 계승을 둘러싸고 벌인 ‘제중원 뿌리논쟁’의 경과와 쟁점을 역사적으로 정리하고 검토하였다. 서울대병원이 제중원을 자신들의 뿌리라고 주장하게 된 배경, 경과, 논점 등을 정리하였을 뿐만 아니라 관련 사료와 미해결과제 등을 제시하였다. 특히, 서울대병원 측의 주장을 하나씩 들면서 이에 대해 ‘검증’해 나가는 방식을 취하고 있어 독자들은 그동안 복잡한 모습으로 전개된 뿌리논쟁의 본질을 알게 될 것이다.
목차
제중원 뿌리논쟁의 경과
제1기 뿌리논쟁(1978~1998)
제2기 뿌리논쟁(1998~2008)
제3기 뿌리논쟁(2008~현재)
뿌리논쟁의 쟁점에 대한 검증
제중원은 누가 설립했나
제중원은 국립병원이었나
알렌은 고용된 의사였나
제중원의 운영권은 누구에게 계승되었나
제중원은 대한의원으로 통합되었나
서울대병원이 답해야 할 질문들
서울대병원은 ‘국가중앙병원’인가
서울대병원은 왜 일제의 유산을 기념하는가
서울대병원은 조선총독부의원을 계승하는가
서울대병원의 설립주체는 누구인가
닫는 글 | 가공의 ‘기원 만들기’를 넘어서
저자 소개
출판사 리뷰
1884년 12월 4일 오후 7시, 우정국 청사에서 개최된 우정국 개국 축하연회에서 명성황후의 조카인 민영익은 자객의 습격으로 심각한 자상을 입고 죽을 운명에 처했다. 당시 민영익은 미 공사관 소속 알렌의 치료를 받고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새로운 대민 의료기관이 필요했던 조선 정부와 고종의 신임을 얻은 알렌의 제안으로 1885년 4월 10일 재동에 ‘사람을 구하는 집’이라는 뜻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근대병원, 제중원이 건립되었다. 제중원은 알렌 등 의료선교사들과 조선 정부의 지원이 결합된 합자병원에서 독자적인 선교병원으로 전환하였고, 세브란스의 기부금으로 세브란스병원으로 성장·발전하였다.
우리나라 근대의학사의 ‘뿌리’인 제중원 계승을 둘러싼 ‘제중원 뿌리논쟁’
그 배경과 경과과정, 논점 그리고 미해결 과제를 정리하다
올해는 제중원이 창립된 지 130년이 되는 해다. 그런데 1885년에 세워진 이 기관이 지금 도 현재적 관심의 대상이 되어 때때로 언론에 등장한다. 그 이유는 이른바 ‘제중원 뿌리논쟁’ 때문이다. 제중원 뿌리논쟁은 그간 누구나 세브란스의 기원이라고 여기던 제중원을, 그것이 한때 조선 정부 소속 기관이었다는 이유를 들어, 서울대 의대가 자신들의 기원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 책은 1970년대 말에 시작되어 3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제중원 계승을 둘러싸고 벌인 ‘제중원 뿌리논쟁’의 경과와 쟁점을 역사적으로 정리하고 검토하였다. 서울대병원이 제중원을 자신들의 뿌리라고 주장하게 된 배경, 경과, 논점 등을 정리하였을 뿐만 아니라 관련 사료와 미해결과제 등을 제시하였다. 특히, 서울대병원 측의 주장을 하나씩 들면서 이에 대해 ‘검증’해 나가는 방식을 취하고 있어 독자들은 그동안 복잡한 모습으로 전개된 뿌리논쟁의 본질을 알게 될 것이다.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 부분은 1970년대 말에 처음 제기된 이래 현재까지 진행된 논쟁의 역사를 정리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간의 경과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기술했다. 제1기는 서울대 의대에 의해 논쟁이 처음 시작된 1978년에서 1998년, 제2기는 그 후 서울대병원이 대한의원 100주년 기념행사를 제중원 기념행사와 연결시켜 강행한 2008년까지, 제3기는 2008년 이후 오늘에 이르는 시기이다.
이 책의 두 번째 부분은 제중원 뿌리논쟁에서 쟁점이 되었으며, 현재도 논쟁 중인 사항들을 정리했다. 이 부분은 몇 가지 쟁점에 대한 연세대 측의 입장을 피력한 것이다. 그 내용은 크게 서울대병원과 제중원을 연결시키기 위해 만들어낸 국립병원설의 허구와 그 논리적·사실적 모순을 지적하는 부분, 그리고 제중원과 세브란스의 연속성을 부정하기 위해 서울대병원에서 제기하는 논점들을 사료에 근거해서 논박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출처: https://japan114.tistory.com/11237 [동방박사의 여행견문록(since 2010):티스토리]
서울 세브란스 역사관
연세대학교 의과대학과 세브란스병원의 역사
우리나라 서양의학의 본격적인 도입은 미국 북장로회 의료선교사 호러스 N. 알렌의 건의를 고종이 받아들여 1885년 4월10일 설립된 제중원을 통해 이루어졌다. 제중원은 재동에 있는 개화파 홍영식의 집 (현재 헌법재판소 구내)에서 개원 하였다. 제중원은 개원 첫 해에 10,460명의 환자를 진료하는 등 서양의학을 한국민에게 전파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알렌은 1886년 제중원에 의학교를 설립하고 학생 16명을 모집하여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서양의학교육을 시작하였다.1887년 초, 보다 많은 환자 치료를 위해 구리개 (현재 외환은행 본점 부근)로 이전 하였다. 1887년 알렌이 주미 한국 공사관의 서기관으로 임명되어 떠나면서, 제중원의 의료책임은 존W. 헤론. 캐드월러더C.빈튼 등의 의료 선교사들이 담당하였다. 1893년에는 캐나다 토론토 의과교수 였던 올리버R, 에비슨이 제중원의 책임을 맡았다. 에비슨은 조선정부로부터 제중원의 운영권을 이관 받았다.이로써 조선 정부와 미국 선교부가 공동으로 운영하는 제중원은 온전한 사립 선교병원으로 재탄생 하였다.
보다 나은 시설이 갖추어진 현대식 병원의 설립을 게획하고 있던 에비슨은 1900년 미국에서 만난 클리브랜드의 부호 루이스H. 세브란스에게서 병원 설립을 위한 기금 10,000불을 기부 받았다. 1904년 9월, 남대문 밖 복숭아골 (현재 연세재단 세브란스빌딩)에 새로지은 제중원은 기부자의 이름에 따라 세브란스병원으로 바뀌었다. 이후 세브란스병원의학교에서는 1908년 첫 졸업생 7명을 배출 하였는데 이들이 한국 최초의 면허의사였다. 1913년에는 한국에 들어온 각 선교부의 연합으로 학교와 병원을 운영하게되어, 학교명도 세브란스연합의학교가 되었다. 1917년에는 전문학교로 승격되어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가 되었다. 세브란스병원은 세브란스집안의 지속적인 기부와 선교부의 후원으로 기초의학교실, 치과 등의 건물을 새로 짓고, 경성부민들의 기부로 전염병 환자들을 따로 치료하기 위한 전염병실도 만들었다. 학교와 병원의 규모가 점점 커지게 되었다.
해방 이후 1947년에는 의과대학으로 승격되어 세브란스의과대학이 되었다. 한국전쟁 과정에서 서울역 앞에 있던 세브란스는 대부분 파괴 되었다. 전쟁 이후 임시 복구 하였으나 도시계획에 의해 부지를 가로지르는 퇴계로의 건설이 추진됨으로써 세브란스의 공간 문제는 더욱 심각하게 되었다. 마침 일제시기부터 제기 되었던 세브란스와 연희의 합동 논의가 본격화 되었다. 양교의 노력과 선교부의 지원으로 1957년 "연세대학교"가 탄생되었다. 이후 세브란스는 1962년 신촌에 병원과 학교를 세로 짓고 이전하여 "연세의료원"체제로 출범하여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다.
현재 원래 세브란스 부지의1/3정도가 남아 있으며 이곳에 연세재단 세브란스빌딩이 건축되었다.세브란스는 한국 근대의학의 모태로서 격동의 근현대사 속에서 국민들의 건강뿐만 아니라 김필순, 박서양, 이태준 등 많은 애국지사를 배출하는 등 여러면에서 우리사회에 큰 공헌을 해왔다.1957년 1월 "연세대학교" 의 탄생
1920년대부터 에비슨은 세브란스와 연희를 아우르는 종합대학교의 설치를 위해 동분서주 했고, 마침내 1957년 두 학교가 합동하여 연세 대학교가 탄생하였다.
학교와 병원 시설의 확충
1904년9월 세브란스 병원이 신축괸 이후, 루이스H, 세브란스의 후원으로 1913년 의학교 교사 및 외래 진찰소가 신축되었다. 하지만 세브란스는 항상 공간 부족에 시달렸다. 그런데 1920년대에 드러 다양한 후원이 이루어 지면서 여러 시설이 확충되었다.
1920 : 결핵병사 건립
1926 : 경성부민 기념 전염병실
1927 : 신병실 신축, 병리부검실 신축
1930년대 : 덩신병실 신축
1931년 : 치과 진료소 신축
1932년 : 대수술실 증설
1934년 : 기초과학 교실 신축
세브란스병원에서 에비슨의 수술장면 (에비슨, 허스트, 박서양)
서울역 세브란스병원 전경
세브란스병원 개원식 초청장
새로 짓는 제중원
1904년 9월23일 새 병원의 봉헌식을 올림으로써 입원실 규모가 40 병상인 한국 최초의 현대식 종합병원이 문을 열었다.
세브란스 병원본관
1885년 4월 개원한 한국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제중원(濟衆院) 은 의료선교사인 알렌 (1858~1932)건의를 받아들인 고종의 후원으로 설립되었다. 구리개 제중원 (현제 외환은행 본점 부근)
당나귀 타고 왕진가는 알렌
재동 제중원 (헌법재판소 구내)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및 세브란스 병원 약사
우리나라 서양의학의 본격적인 도입은 1885년 4월10일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알렌의 건의를 고종이 받아들여 설립된 왕립병원 광혜원 (王立病院 廣惠院)을 통해 이루어 졌다. 광헤원은 재동 (齋洞. 현 창덕여고 북편)
에 위치하였으며, 2주일 후 제중원 (濟衆院)으로 개칭 되었다. 제중원은 개원 첫 해에 19,000여명의 환자를 진료 하는등 서양의학을 한국민에 전파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으며, 보다 많은 환자 진료를 위해 1886년 가을 구리개 (현, 외환은행 본점 부근)로 이전 하였다. 알렌은 1886년 제중원 의학교 (醫學校)를 설치하고 학생 16명을 모집하여 우리나라엣 처음으로 의학교육을 시작하였다. 1887년 알렌이 주미 한국 공사관의 고문으로 취임하면서, 제중원의 업무는 헤론, 빈튼 등의 선교의사들이 담당 하였다. 1893년에는 카나다 토론토대학교수 였던 에비슨이 제중원의 운영을 담당하여, 당시 유행했던 콜레라 방역 및 치료사업에 큰 역할을 수행하는 한편 한글로 된교과서 편찬사업 등 의학교육에도 많은 관심을 쏱았다. 제중원은 1894년 정부의 재정난으로 인해미국 선교부에 이관되었다. 보다 나은 시설이 갖추어진 병원의 설립을 계획하고 있던 에비슨은 1900년 미국에서 만난 클리브랜드시의 부호 세브란스에게서 병원설립늘 위한 기금 10,000불을 기부 받아 1904년 남대문 밖 복숭아골 (현 연세재단 세브란스빌딩 위치)에 제중원을 새로 짓고, 기증자의 이름을 기리기 위해 세브란스병워능로 명명하였다.1908년에는 정식의학교육을 받았던 7명의 졸업생이 배출 되었으며, 이들은 정부로부터 의사면허 1번지에서 7번까지를 부여받았다. 의학교는 1909년 사립 세브란스의학교로 교명이 변경 되었으며 1917년 사립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가 되었다. 1934년에는 오긍선이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교장에 취임하였다.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는 942년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교명이 아사히의학전문학교 및 부속병원으로 변경되었으나. 1945년 해방과 더불어 교명이 환원되었고, 1947년에는 의과대학으로 승격되어 세브란스의과대학이 되었다. 1948년 연희대학교와 세브란스의과대학 교수 대표간의 합동이 결의되고, 1957년 두기관이 통합됨으로써 세브란스의과대학은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으로개칭 되엇다. 1962년에는 서울역 앞에 있던 교사 및 병원이 신촌으로 이전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현재 1978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원주분교의 설립이 인가되었고, 1982년 원주의과 대학으로 승격되었다. 현재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는 신촌 세브란스병원 이외에도 영동, 인천, 용인, 및 광주세브란스 병원 등의 분원이 있다.
현봉학 박사의 동상
동족상잔의 비극 속에서 피란민 9만2,000명 이상을 구해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를 지킨 흥남철수작전의 주역 현봉학 (1922~2007) 박사는 인류 역사상 최대 민산인 구출작전의 영웅이다. 현 박사는 세브란스의전 (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에서 임상병리학을 전공한 후 모교 교수로 재직하다 6.25전쟁때 통역장교로 참전했다. 미 제10군단장 아몬드 소장은 현 박사와 포니대령의 설득으로 군수물자 대신 피란민 전원을 태워 1950년 크리스마스의 기적을 만들어냈다. 현 박사의 이 같은 인간사랑의 정신을 기리는 데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 (연세대학교, 현봉학 박사를 추모하는 모임, 국가보훈처, 해병대사령부)과 많은 이가 힘을 모아 여기에 동상을 세운다. 2016년 12월9일 연세대데학교, 국가보훈처.
출처: https://japan114.tistory.com/4425 [동방박사의 여행견문록(since 2010):티스토리]
'07.기독교세계사(2024~) [해설서] > 1.한국기독교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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