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브란스 역사기록화 전시 (1885~2017)
연세대학교는 창립 132주년과 합동 60주년을 맞아 5월
둘째 주에서 제중원 문을 연 4월 둘째 주로 변경하여 개최한다. 의료원에서는 이를 기념하고, 우리나라 의학발전과 국민건강 증진에 기여한 세브란스의 역사와 정체성의 보존 발전하기를 위한 역사기록화 전시회를 마련했다.
역사 기록화는 펜화 유화 두 가지 형태로 제작됐다. 역사적 건물을 기록한 펜화는 김영택화백이 맡았다.
유화는 김건배화백이 맡아 주요 사건과 정황을 구현했다. 한국최초의 선교사 알렌박사의 민영익치료, 에비슨 박사의 내한, 카네기홀에서 처음 만난 에비슨박사와 세브란스씨, 통감부에 의한 구한국 군대의 강제 해산중 부상당한 한국군인을 치료하는 세브란스 의료진과 학생들, 3.1운동 독립선언문을 해부학 실습실에 숨기는 세브란스의전 학생들 등 여러점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에비슨 박사의 초청으로 열린 언더우드 선교사의 토론토 강연은 훗날 세브란스와 연희의 두 주역이 만나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선교사의 소명의식을 갖고 있던 에비슨은 언더우드의 강연을 계기로 결심을 굳히고 한국에 선교사로 파송되어 제중원의 책임을 맡게 되었고, 언더우드와 함께 조선에서 좋은 동역자로 서로의 사업을 도우며 활동했다.
1915년 연희전문학교의 교장으로 선임된 언더우드가 이듬해인 1916년에 세상을 떠나자 에비슨은 세브란스와 연희 양교의 교장을 18년간 역임하며 두 학교 발전의 초석을 다졌다.
이후 에비슨은 양교를 합동하여 종합대학으로 발전시킬 계획을 세웠지만, 총독부의 방해로 실현되지 못했다.
이러한 구상은 에비슨이 세상을 떠난 이듬해인 1957년에 양교가 합동되어 연세대학교로 출범하면서 비로서 실현될 수 있었다.
작가 김건배
국내 정상급의 일러스트레이션 작가로 화단에 등단한 김건배 화백은 1994년 미국 이주후 인물의 역동적이고 사실적인 묘사를 맑고 투명한 색채로 표현하는 수채화 기법을 새로이 선보이며 주목을 받앗다.
미국 내 아트 페스티벌에서 20여 차례의 대상 수상과 많은 전시전에 초청된 김건배 화백은 철저한 고증 속에
우리나라 근대의학을 개척한 세브란스 130여년 역사를 작품을 통해 그려냈다.
1884 12.4
우정국 개원식에서 벌어진 갑신정변으로 명성왕후의 조카 민영익은 심한 자상을 입고 사경을 헤메게 되었다.
민영익은 치료를 위해 외교고문 이엇던 묄렌도프의 집으로 옮겨졌다.
그를 치료하러 온 여러명의 어의(한의사)들은 칼에 찔리고 베인 상처를 치료할 수 없었다.
이에 묄렌도르프는 미국공사관 소속의 의료선교사 알렌을 급히 불러 치료하게 했다.
민영익은 알렌의 지혈과 봉합 치료등 서양외과술로 생명을 건질수 있었다. 이를 계기로 왕실의 신임을 얻은 알렌은 근대식 병원 설립안을 올렸다. 이 제안이 수용되어 이듬해인 1885년 4월10일 한국 최초의 서양식병원 제중원 (濟衆院 )이 개원한다. 제중원에서 시작된 한국의 근대의학은 세브란스 병원을 통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82년 9.29.
토로토 대학교 의학부와 온타리오 약학교의 교수이자 토론토 시장의 주치의였던 에비슨은 자신이 다니던 교회에서 일본으로 파송된 선교사의 소식을 통해 선교사로서 막연한 소명의식을 갖고 있었다.
에비슨은 마침 1892년 9월 토론토를 방문한 언더우드를 초청해 강연을 들었다. 조선의 실상과 의료선교의 필요성을 연설하는 언더우드의 강연에 큰 감명을 받은 에비슨은 조선에 의료선교사로 갈 것을 결심했다.
에비슨은 자신이 소속된 캐나다 감리교회에 파송을 요청했으나 재정상의 이유로 받아들여 지지 않았다.
이에 에비슨은 미국 북장로회 선교본부에 지원하엿고, 마침 언더우드도 그를 조선에 파송할 적임자로 추천했다. 이에 따라 에비슨은 의료선교사로 조선 땅을 밟을수 있었다.
1893년. 6.16.
에비슨이 한국으로 출발한 즈음 아내는 만삭의 몸이었고, 셋째아들은 심한 폐렴과 중이염으로 매우 위중한 상태에 있었다. 당시 에비슨은 " 아이가 죽는다 해도 병치료를 위해 출발을 늦출 수 없다. "아이가 벤쿠버에 도착할때까지 살아 있으면 조선으로 갈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조선으로 가지 말라는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겠다."며 출발을 강행한다.
에비슨은 토론토에서 캐나다를 가로질러 벤쿠버에 도착한 후, 태평양을 건너는 여객선으로 일본 요코하마를 거쳐 1893년 6월 부산에 도착했다. 부산에 도착하고 일주일 후에 넷째 더글라스가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토론토대학교 의학부를 졸업하고 소아과 의사가 되어 세브란스에서 봉사했다.
1985년
1985년 내려진 단발령은 조선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당시
배재학당 학생으로 여의사 조지아나 E 화이팅의 한구어 선생이었던 이승만은 에비슨과 함게 조선과 서양의 차이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단발령이 내려지고 얼마후 이승만은 에비슨의 집에 찿아와 상투를 잘라달라고 요청했다. 이승만의 요청을 받은 에비슨은 이승만의 상투를 자르고 남은 머리를 다듬어 주었다.
이승만은 잘린 상투를 거즈에 싸서 들고 눈물을 흘리며 집으로 돌아갔다고한다.
1900.4.30.
1899년 3월 안식년으로 귀국한 에비슨은 이듬해 봄 뉴욕카네기홀에서 열리는 만국선교대회에서 조선의 선교에 대해 발표하였다. 에비슨은 "조선의 낙후된 의료환경을 극복하기 위해서 작은 진료소를 운영하고 있는 선교의사들이 함께 일할 수 있는 보다 큰 규모의 병원설립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이연설을 듣고 감동을 받은 세브란스 씨는 병원건축기금 1만달러를 기부했다. 에비슨이 감사를 표하자 세브란스씨는 " 받는당신보다 주는 저의 기쁨이 더욱 크다" 고 말했다. 세브란스씨의 기부로 한국 최초의 근대식 병원인 세브란스병원이 설립되었다.
1900.8
에비슨이 치료한 환자중에는 백정출신 박성춘이었다. 박성춘의 부탁으로 에비슨은 아들 박서양에게 의학을 가르쳤다. 결국1908년 세브란스병원의학교 제1회 졸업생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면허의사가 되었다. 그는 모교에 남앙 교육과 진료활동을 활발히 펼쳤다. 그는 자신의 신분에 대한 문제를 심은 학생들에게 '내 속에 있는 오백년 묵은 백정의 피를 보지말고 과학의 피를 보고 배우자! 라고 하였다.
그는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학교를 사직하고 북간도로 이주해 구세병원 을 개업하면서 독립운동에 나섰다. 그는 조선 동포를 진료하는 한편 독립운동단체 대한국민회의 군의(軍醫)로 활동하였다. 박서양으는 조선사회의 가장 낮은 신분 출신 이었지만 새로운 학문을 배워 지도자가 되었다. 뿐만아니라 그는 일신의 안위를 구하지 않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한 세브란스가 배출한 큰의사(大醫)였다.
1905~1910
1894년 9월 제중원을 넘겨받은 에비슨은 1895년 여름 콜레라가 유행하자 방역국장으로 활동했다.
콜레라 유행이 끝난 후 에비슨은 학생을 모아 제중원에서 의학교육을 다시 시작했다.의학교육을 위해 가장 절실히 필요했던 것은 한글로 된 의학교재였다. 이를위해 에비슨은 먼저 그레이의 해부학교과서를 조금식 번역해 교재로 활용했다. 1904년 제시w. 허트류가 합류하자 에비슨은 교육에 집중하였으며, 그 결과 1905년 약물학교과서를 펴낸 이후 해부학, 생리학을 비롯하여 산과, 외과 등 의학의 거의 모든분야의 교과서를 출판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일제가 한글교과서 사용을 금지하여 에비슨의 노력이 지속되지 못하였다.
1907
1907년 8월 통감부는 대한제국 군대의 강제 해산에 나섰다. 그 과정에서 구한국 군인과 일본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이때 부상당한 한국군인 50여명은 일본 병원에서의 치료를 거부하고 세브란스로 가기를 요청 하였다. 에베슨은 적십자대를 조직하여 부상당한 군인들을 병원으로 이송하여 치료에 전념했다.
갑자기 몰려든 부상병들을 돌볼 인력이부족해 의학생은 몰론이고 병원가족들까지 참여하였다. 이전까지는 남녀유별 관습에 따라 간호학생이 남자환자를 돌보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목숨이 위태로운 한국군 부상병들이 몰려들자 이러한 인습은 순식간 허물어져 간호학생들은 밤 새워 부상병들을 간호했다.
'13.기독교 문화유산 (2016~) <답사지> > 1.서울지역'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브란스 명예의전당 (0) | 2018.08.17 |
---|---|
세브란스 알렌과 제중원 (0) | 2018.08.17 |
연세역사의 뜰 (제중원) (0) | 2018.08.17 |
종로구 서촌지역답사 (0) | 2018.04.04 |
감리교신학대학교 (0) | 2017.12.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