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목사(선교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직책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 / 후임자 왕길지(G.Engel)
개인정보
출생이름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한국명 원두우 / 출생 1859년 7월 19일 / 영국의 기 영국 런던 / 사망 1916년 10월 12일(57세) / 미국의 기 미국 뉴저지주 애틀랜틱 시티 / 국적 미국의 기 미국 / 교파 장로교 / 배우자 릴리어스 호턴 언더우드 / 가족 원한경(아들) / 학력 뉴브런즈윅 신학교 / 모교 뉴욕 대학교, 뉴브런즈윅 신학교
사목표어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사도 바울)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영어: Horace Grant Underwood, 1859년 7월 19일 ~ 1916년 10월 12일)는 미국의 장로교 선교사이다. 언더우드 선교사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한국어 이름은 원두우(元杜尤)이다.
생애 / 선교사 파송
1859년 7월 19일에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서 13세가 되던 해에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1881년 뉴욕 대학교를 졸업하였으며, 같은 해부터 1884년까지 뉴브런스위크신학교에서 공부하였다. 1883년 11월 장로교 목사가 되었고 1년간 인도 선교를 위해서 의학 공부를 하면서 실력을 쌓았으며, 1884년 7월 28일 조선 최초의 장로교 선교사로 임명되었다.[출처 필요]
하지만 조선은 개화파들이 일으킨 정변인 갑신정변으로 사회가 혼란하였기 때문에 일본에 잠시 체류해야 했다. 1884년 12월에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하여 다음해 1월에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하였다.일본에 머무는 동안 조선 기독교인으로서 마가 복음서를 번역한 문서선교사인 이수정(李樹廷)에게서 한국어를 배우면서 조선에서의 개신교 선교를 준비하였다.
입국과 선교
1885년 4월 2일에 부산항을 통해 입국했으며, 같은달 5일에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와 함께 제물포항에 도착하였다. 조선 정부에서 선교활동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중원에서 물리와 화학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었다. 그는 조선어 문법책을 영어로 집필하였다. 그 후 성서 번역 위원회 초대 위원장, 대한기독교서회 회장, 한국 기독교 교육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한편 현 경신중고등학교인 예수교학당, 서울 구세학당, 현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를 설립하였다. 또한 교회 연합 운동을 지도하는 등 한국의 종교·문화·언어·정치·사회 등 여러 분야에 많은 일을 남겼다.
개신교 선교사로서의 업적은 교회 설립과 전도 여행이었다. 1887년에 조선인 교우들의 참여로 조선 장로교 교회사에서 첫 장로교 교회인 정동교회(현재 새문안교회)를 설립하였고, 1900년도 초 개신교 양평동교회를 설립하였다. 전도가 활발한 지역이었던 북한 지역에서의 전도 여행을 3차례나 하였다. 학생 시절에 피어선 박사에게 영향을 받았던 인연으로 후에 피어선기념성경학원(현재 평택대학교)에서 교장을 1912년부터 1916년까지 역임하였다. 성서 번역에도 공헌하였는데 1887년에 상임 성서위원회 위원 자격으로 아펜젤러와 함께 마가 복음서의 한글판을 번역·출간하였다. 또한 원두우는 뛰어난 복음주의 설교가이기도 했다. 기독교 사상에 연재 되는 원두우 설교 집에 따르면 예수의 부활, 기독교인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알기 쉽게 말했다.
2014년 기독교사상에 연재된 이야기에 따르면, 원두우는 일제에 의해 반일 인사로 여겨질 만큼 한국민중과 연대하는 선교사였다. 그는 라디오 방송으로 "참고 견딘다면 해방의 날이 올 것입니다."라고 연설하기도 했으며, 친일 성향의 선교사나 일제와 갈등을 겪기도 했다.
사망과 사후
건강 악화로 미국으로 돌아가 1916년 10월 12일 미국 뉴저지주의 휴양 도시인 애틀랜틱 시티의 병원에서 사망하였다. 시신은 조선으로 옮겨져 양화진 외인 묘지에 안장되었다. 사후에도 언더우드 가문은 조선에 남아 3대에 걸쳐서 의료 선교와 한남대학교의 설립으로 교육 발전에 기여하였고, 특히 4대손인 원한광(Horace Horton Underwood Jr.)은 1980년에 광주민중항쟁을 해외에 알려서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에 의해 강제 추방을 당하였다. 출처 위키피디아
언더우드 가계도
1.원일한 가족 : 1939년부터 1984년까지 선교사로 활동하였고, 그공로로 모란 훈장을 수여 받았다. 2차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 참전 하였으며, 4.19학생혁명 시기에는 연세대학교 총장서리를 맡기도 하였다.
2.원요한가족 : 1947년 한국으로 돌아와 1933년까지 청주와 광주에서 선교활동을 하였으며, 한국전쟁중에는 구호활동을에 종사하였다.
3.원재한가족 : 1843년부터 1946년까지 미 해군에서 군목으로 시무하고, 평생 뉴욕의 농촌교회 목사로 활동 하였다.
출처: https://japan114.tistory.com/4127 [동방박사의 여행견문록(since 2010):티스토리]
책소개
1885년 4월 5일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제물포항에 발을 디딘 것으로 본격적으로 시작된 한국 개신교회가 이제 130여 년의 역사를 지닌 커다란 나무가 되었다. 이 책은 그 한국 개신교의 시작에 대한 희귀하고 소중한 증언이다. 릴리어스 호턴 언더우드 여사는 언더우드 선교사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본 목격자로서 누구보다도 친밀하고 생생하게 그의 생애를 그려 낸다. 아울러 당시 한국의 풍속과 정치적 상황 속에서 기독교가 어떻게 한국 사회에 뿌리를 내리며 복음으로 이 나라를 변화시켜 갔는지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그래서 한민족이 처음 복음을 접했을 때 얼마나 갈급해하며 복음을 흡수했는지, 얼마나 기쁨과 열정으로 가득했는지가 언더우드의 헌신적인 선교 이야기에 한데 엮여 가슴 뜨겁게 펼쳐진다.
무엇보다 이 책은 구한말 격동기를 지나는 한반도의 긴박한 상황에서 언더우드가 어떻게 교파나 인종, 시간, 장소 같은 좁은 테두리에 얽매이지 않고 한국을 위해 애써 분투하며 일했는지 구체적으로 보여 준다. 그래서 복음 전도, 성경 번역, 사전 편찬, 신문 발행, 대학 설립 등 다방면에서 수많은 업적을 남긴 언더우드의 전 생애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 바로 사랑임을 분명하게 역설하며 우리에게 도전을 준다.
이 땅에 최초로 온 선교사로서 언더우드가 아펜젤러와 함께 제물포항에 발을 디딘 지 130여 년이 되는 이때, 이 책은 한국 백성을 위해 자기 목숨을 기꺼이 내놓은 벽안의 선교사 이야기를 통해 한국 교회가 반드시 회복해야 할 첫 마음, 첫사랑이 어떤 것인지 깨우쳐 줄 것이다.
목차
역자 서문
서문
1. 혈통과 교육
2. 선교사 훈련
3. 중요한 시작
4. 기억할 만한 여행
5. 문법학자이자 사전편찬자
6. 바쁜 휴가
7. 다시 한국의 집으로
8. 한국에서의 운명의 날들
9. 순회 선교사
10. 옹호자-화평케 하는 자-대사
11. 넓어지는 강
12. 어둠과 빛
13. 일본의 보호국
14. 연합의 전조
15. 열성적인 지방여행
16. 유럽에서의 휴식
17. 미국에서의 한국 홍보 활동
18. 선교지의 분할
19. 심각한 부상
20. 축복의 소나기
21. 미국 대표단
22. 1914-1915년
23. “여정을 마치고 본향으로”
책소개
언더우드가 남긴 발자취를 따라가다
하나님의 충실한 종 언더우드 선교사의
사명, 사랑, 순종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오후, 굳게 닫혀 있던 ‘은둔의 나라’ 조선에 첫발을 내딛었던 언더우드 선교사. 험한 길임을 알고도 주님이 맡기신 사명 하나를 바라보며 병마와 온갖 시험을 이겨 낸 믿음의 용사. 그가 사명을 끝내고 하나님께로 부르심을 받은지 100년이 되는 오늘, 말씀 위에 굳게 서서 주의 일을 감당했던 증거들을 따라가 본다.
목차
저자 서문 _ 언더우드 생애 속으로 들어가면서
1부
조선 땅을 처음 밟다
1. 제물포에 부는 바람
2. 아름다운 신앙 가족
3. 새로운 세계 미국으로
4. 내가 간다, 조선으로!
언더우드를 만나 변화된 한국의 인물들 : 김규식
2부
언더우드의 불타는 조선 사랑
5. 제중원에서 시작한 선교 활동
6. 고아의 아버지가 되어
7. 한국에 심은 교육 나무
8. 이 땅에 새문안교회를
9. 한국어 속으로 뛰어들다
10. 한국어 성경 편찬
언더우드를 만나 변화된 한국의 인물들 : 안창호
3부
전국 방방곡곡 복음 전도 여행
11. 신혼여행, 그 머나먼 길
12. 땅 끝까지 복음을 들고
13. 조선 여인들의 만남의 광장
14. 찬송을 사랑한 선교사
15. 시련의 바람 속에서
언더우드를 만나 변화된 한국의 인물들 : 이승만
4부
조선의 독립과 복음화를 위해
16. 교회 개척과 YMCA
17. 조선 왕실과 함께한 시간
18. 기억이 머무는 곳에
19. 병마와 싸우며 버텨낸 순간들
20. 한국에 대학을 세우는 꿈
21. 아, 나의 사랑 한국이여
언더우드를 만나 변화된 한국의 인물들 : 서경조
나가면서 _ 언더우드의 별세 이후
감수자의 글 _ 언더우드의 생애와 선교 정신
부록 _ 언더우드 연보
책 속으로
--- p.9
언더우드 선교사는 오직 주님이 가라는 대로 가고, 한국 사람을 주님의 제자로 만드는 일에 일생을 걸었습니다. 전파한 복음이 한국 땅에 뿌리내리도록 보육원, 학교, 병원을 설립하고, YMCA를 통해 인재를 양성했으며, 한국 문화와 한글을 연구하여 한영사전과 영한사전을 출판했습니다. 또한, 찬송가 편찬으로 비로소 한국 사람들 입에서 찬송가가 흘러나오게 했습니다. 그는 한국의 정치, 외교, 문화 등 선교 외적인 일에도 큰 업적을 이루었습니다. 그와 함께한 한국 사람 중에는 역사상 기억될 인물들이 많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그 당시 세계 열방보다 약소국이었던 조선 땅에 새로운 문명과 가치를 심어 주고 비전을 준 위대한 주님의 사람이었습니다.
--- p.19
‘내가 선교사로서의 꿈을 이루려는 나라가 바로 눈앞에 있다.’ 언더우드는 입을 굳게 닫고 지난날을 회상했다. 1884년 12월 16일 미국의 서쪽 끝 샌프란시스코에서 일본행 기선을 타고 한 달 넘게 태평양을 건너왔다. 세상에 태어나서 그렇게 큰 바다와 오랜 항해는 처음이었다. 기선은 언더우드가 26세 되던 해인 1885년 1월 25일 일본 도쿄 옆의 요코하마 항구에 도착했다. 언더우드는 일본에 먼저 와 있던 선교사의 집에 잠시 머물렀다. 당시 조선은 *갑신정변이라는 사건이 일어나 매우 불안한 상황이었다. 그래 서 외국인은 쉽게 조선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언더우드는 일본에서 조 선으로 들어갈 날을 기다리는 동안 선교 사업에 필요한 훈련을 받으며, 일본에 와 있던 미국 선원들을 위한 전도 집회를 여는 등 선교 활동을 꾸준히 했다. 그럴 때 미국 감리교에서 조선으로 파송한 아펜젤러 선교사를 만났다. 그도 조선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던 중이었다.
--- p.29
언더우드는 구세군 교회에서 하는 길거리 전도 사업에도 적극 참여했다. 언더우드는 전도하면서 인종, 계급, 출신, 교파 등으로 차별하며 파벌을 지어 대립하는 단체를 하나로 연합하는 운동을 했다. “여러분은 예수 안에서 모두 한 형제자매입니다.” 언더우드는 나누어진 교회가 서로 연합해야 한다고 항상 주장했다. 이런 언더우드의 교회 연합 정신은 한국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언더우드는 일반 백성들뿐만 아니라 임금에서부터 천민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친구요 형제라고 말했다. 언더우드는 여러 갈래로 갈라진 교단의 벽을 걷어 버리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바로 외증조부 와우 목사의 교회 통합 정신이 그대로 언더우드에게 이어진 것이다.
--- p.56
언더우드 선교사는 제중원에서 환자들을 돌보다가 떠돌이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은 대부분 부모가 없는 아이들이었다. “부모 없이 아무렇게나 내쳐진 저 아이들을 어떡하나. 저 아이들도 하나님이 사랑하는 생명들인데.” 언더우드는 제중원에서 일하면 서 아이들과 가까이하는 동안 그 들이 얼마나 인간 취급도 못 받으며 불쌍하게 사는지 알게 되었다. “그래, 저 아이들을 내가 돌봐야겠구나. 이런 것이 선교 아닌가.” 언더우드는 조선에 들어온 그해 말, 고아원 설립을 추진했다. 당시 까다롭던 조선 관리들이 고아원에는 별다른 생각이 없었는지 의외로 허가를 쉽게 내 주었다. “됐다. 이건 하나님의 은혜다.” 언더우드는 고아들을 불러 모아 그들을 돌봐 주고 가르쳤다. 고아원 원장은 조선인이었지만 실제 운영은 언더우드가 맡아 했다. 언더우드는 고아원과 배움터 역할을 하는 *구세학당을 경영하면서 선교사와 선교사 부인들의 힘을 빌었다.
--- p.83~84
언더우드는 학당 일에 열심을 다하며 교회 구역마다 초등학교를 세웠다. 언더우드의 노력으로 세워진 학교는 겨자씨 같은 작은 시작이었지만, 시간이 가면서 점점 커다란 나무처럼 성장해 갔다. 언더우드를 비롯하여 그와 비슷한 때에 활동한 다른 외국 선교사들도 학교를 세우기 시작했다. 그래서 1902년에는 장로교선교회에 속한 학교가 63개, 학생이 천여 명 생겨났고, 1909년에는 학교가 589개, 학생이 이만 이천 명에 이르렀다. 언더우드는 교육 선교를 위해 힘썼지만 앞으로 한국을 복음화하기 위해선 좀 더 적극적인 선교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 이젠 신학교를 세울 때가 된 거야.’ 언더우드는 전에 자신과 뜻을 같이하던 헐버트 목사에게 언젠가 꼭 한국에 대학교와 신학교를 설립하겠다는 희망을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말처럼 학당에 신학반을 개설해서 앞으로 한국 선교의 지도자가 될 인재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평양에 세워진 장로회신학교에까지 가서 강의를 했다.
--- p.96
언더우드가 경신학교 대학부 초대 교장으로 취임한 이후에도 총독부는 학교 설립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고, 일본은 대학 설립을 방해하기 위해 별의별 교묘한 방법을 총동원했다. 그 하나의 예가 한국에 대학을 두는 법령을 만들어 놓지 않은 일이었다. 언더우드는 할 수 없이 전문학교령에 의해 경신학교 대학부를 연희전문학교로 인가를 받아 세울 수밖에 없었다. 연희전문학교는 해방 후 1946년 연희대학교로 승격했고, 1957년 세브란스 의과대학과 합병하여 지금의 연세대학교로 자리 잡았다. 일제 당국은 언더우드가 세운 대학을 따가운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그들은 언더우드를 늘 감시하고 있었다.
출판사 리뷰
우리는 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언더우드는 한국 기독교 100년에 빛나는 가장 대표적인 선교사이자, 기독교 역사에 영원히 남을 위대한 선교사이다. 이 책에는 1885년 26세의 나이에 조선에 첫발을 내디딘 그가 1916년, 57세의 나이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까지, 30여 년간 한국 선교에 목숨을 걸고 평생을 바친 언더우드 선교사의 일대기를 담았다. 또한, 그의 어린 시절과 그가 한국 선교에 대한 소명을 받기까지의 과정도 흥미진진하게 그려져 있다. 그의 일대기를 따라가다 보면, 그가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했고 한국을 사랑했는지, 얼마나 불꽃같은 열정으로 복음을 위해 그의 생애를 불살랐는지, 감동과 경이로움을 느끼게 된다.
언더우드는 복음 전파뿐 아니라 한국의 정치, 문화, 교육 등 한국 사회 전반에 수많은 놀라운 업적을 남겼다. 그는 한국 최초의 조직교회인 새문안교회를 세우고, 성경을 번역 보급하여 말씀 중심의 신앙을 세워나갔으며, 최초의 보육원과 학교를 세웠을 뿐 아니라, 오늘의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를 세웠으며, 문서선교와 인재 육성에도 힘쓰는 등 한국 사회를 위한 지대하고 전반적인 영향을 끼쳤다. 더구나 그의 위대한 한국 사랑은 그에게서 끝나지 않고 그의 후손들까지 이어져 4대에 걸친 한국 사랑의 모습을 지금도 보여주고 있다.
이 책에는 언더우드가 영향을 주었던 한국의 대표적인 인물들의 에피소드도 실려 있는데, 김규식, 안창호, 이승만, 서경조 등이다. 언더우드가 얼마나 한국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 책은 동화 작가 이희갑 작가의 친근하고 생동감 있는 글로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단숨에 읽힐 만큼 쉽고 재미있게 쓰였으면서도, 철저한 역사 자료와 고증을 거쳐 정확하고 자세한 역사적 정보까지 놓치지 않았다. 따라서 각 주일학교와 청장년에 이르기까지 온 교회와 학교가 함께 읽고 선교의 정신을 배우며 선교의 비전을 키울 수 있는 책으로 추천할 만하다.
[이 책의 특징]
1. 한국을 찾은 첫 선교사 언더우드의 삶과 신앙을 생생하게 다룸.
2. 새문안교회를 시작한 언더우드 선교사 역사관에 보관된 귀중한 자료와 감수를 거쳐 집필.
3.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는 일러스트 수록.
4. 한국의 초기 선교 상황을 폭넓은 연령대가 읽을 수 있도록 집필.
추천평
- 이상학 (새문안교회 담임 목사)
험지 한국을 찾아와 선교한 언더우드 선교사님의 용기와 개척정신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한국 땅을 밟은 그분의 일생은 ‘오직 주님, 오직 말씀, 오직 선교’였습니다. … 많은 이들이 이 책을 읽고 개화기의 한국 땅에 와서 복음을 전하며 평생 한국을 사랑했던 언더우드 선교사님과 다른 많은 선교사님의 삶을 가슴속에 담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불어 더욱 많은 한국의 젊은이들이 그분들처럼 전 세계로 나가 복음을 전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 피터 언더우드 (언더우드 선교사의 증손자, IRC 대표이사, 미국 조지아주 한국 사무소장)
언더우드 선교사가 한국 사회와 기독교 전파에 이바지한 업적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많고 다양합니다. 한국 개신교 전파 130여 년이 되는 이때 출간된 이 한 권의 책이, 언더우드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잘 알리게 되리라고 기대합니다.
- 윤경로 (새문안교회 공로 장로, (사)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이사장)
한국 교회가 초기부터 널리 확장되고 놀랍게 성장한 역사에는, 개척자이자 하나의 밀알이 된 언더우드 선교사가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언더우드 선교사의 이러한 선교 정신은 오늘의 한국 교회에 더욱 요구된다고 생각합니다.
- 서정민 (일본 명치학원대학 교수, 동 대학 그리스도교연구소장)
출처: https://japan114.tistory.com/11275 [동방박사의 여행견문록(since 2010):티스토리]
책소개
전체 내용은 3부로, 단순한 시대별 구분이지만 일관된 관점을 가지고 썼을 뿐만 아니라 비교적 긴 시기를 두고 언더우드 가족이 써온, 시의성 강한 논문, 논설, 수필, 보고 등을 여과 없이 번역 정리한 자료집으로서 초기 한국교회 선교현장에서 활동한 언더우드 가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번역서이다.
목차
2부 언더우드 3세의 활동 초기
3부 언더우드 2세의 연희전문학교 교장 재직 시기
출처: https://japan114.tistory.com/5903 [동방박사의 여행견문록(since 2010):티스토리]
언더우드家 기념관
연희전문학교 3대 교장 원한경 박사는 1927년 연희교정 서편 언덕에 집을 지었습니다.
이 사택은 연희 교육과 기독교 선교의 요람이 되었다.
1974년 원일한 박사가 사택을 연세대학교에 기증하였고, 2003년 이곳을 "언더우드家기념관" 으로이름하여 대를 이은 소명과 유덕을 기르고 있다.
(예비하신 길을 묻고 찿는 기도와 수고를 아끼지 않은 언더우드 가문의 지혜와 헌신으로부터 배워, "도전과 창조, 소통과 공감, 나눔과 배려.섬김과 존경"이라는 가치를 나누어 가지는 미래의 리더 실천하는 연세인)
출처: https://japan114.tistory.com/4129 [동방박사의 여행견문록(since 2010):티스토리]
한국 기독교 100주년 기념탑
기독교에서 가장 큰 절기라 하면 성탄절과 부활절을 꼽을 수 있다. 특히 한국 기독교에서 부활절은 여러 면에서 큰 의미가 있다. 그것은 한국 최초의 선교사가 부활절에 제물포항을 통해 이땅에 발을 들여놓았기 때문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인천은 한국근대사에서 한국의 관문이요, 수도 서울의 해상로로서 개항과 더불어 내외국인의 출입처가 되었던 곳이며, 한국기독교사에서도 중요한 의미가 있는 지역이다. 문호개방과 선교윤허가 떨어진 후 인천을 통해 한국선교의 개척자들이 속속 내한하였다. 1884년 6월 미감리회의 메클레이 목사가 인천을 통해 입국, 그리고 무엇보다도 1885년 4월 부활절, 한국 최초의 복음선교사 언더우드의 아펜젤러가 제물포를 통해 입국했다.
당시 일본에 가 있던 이수정의 요청으로 미국교회는 아펜젤러 목사와 언더우드 목사를 초대선교사로 파송하였다. 그들은 일본에 들렀다가 이수정이 번역한 한글성경을 가슴속에 품고 1885년 4월 5일 부활절에 이 부두에 상륙하였다. 독신이었던 언더우드, 부인과 함께 온 아펜젤러, 과연 누가 먼저 제물포땅에 발을 디뎠는지는 확실치 않다. 혹자는 두사람이 함께 손을 잡고 동시에 뛰어 내렸다고 하지만 정확한 근거는 없다. 상륙하자마자 아펜젤러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부활주일에 여기에 왔습니다" 이 날에 죽음의 철장을 부수신 주님께서 이 백성을 얽매고 있는 줄을 끊으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녀들이 얻는 빛과 자유를 누리게 하소서" 라고.
이를 시작으로 인천과 서울에는 여러 개의 교회가 서기 시작하였고 이것이 한국기독교의 중요한 초석이 되었다. 한국교회는 1984년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사업을 전개하면서 인천교회를 비롯한 성도들의 헌금과 기동에 힘입어 이곳에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탑을 세웠으며 탑문은 전택부 장로님이 짓고 홍덕신 장로님이 쓰셨다.
인천 앞바다 해안도로 바로 옆인 중구 항동5-2에 위치한 이 탑은 1986년 3월 30일 부활절에 제막식을 거행하였다. 주변은 약200평의 대지가 기념공원으로 조성되었고 50평의 탑 면적 위에 17m의 높이로 축조되었다. 한국교회 전통적인 종형태를 본뜬 세 개의 탑신이 하늘을 향한 형상이며 탑신 각면에는 당시 우리 한국민중들의 조각이 조각되어 있다. 탑 중앙에는 아펜젤러 부부와 언더우드를 상징하는 3인의 청동조각상이 세워져 있으며 기단에서는 세선교사가 드린 기도문이 한글과 영문으로 새겨져 있다.
출처: https://japan114.tistory.com/2423 [동방박사의 여행견문록(since 2010):티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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