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 太祖 / 대한제국 추존황제
태조 (太祖)
제1대 조선 국왕 / 재위 1392년 7월 17일 ~ 1398년 9월 5일 (음력) / 즉위식 개경 수창궁 / 전임 -후임 정종 / 조선국 태상왕 / 재위 1398년 9월 5일 ~ 1408년 5월 24일 (음력) / 전임 최초의 태상왕 / 후임 태상왕 태종
이름
휘 성계(成桂) → 단(旦) / 별호 자 : 중결(仲潔) · 군진(君晋) / 호 : 송헌(松軒) · 송헌거사(松軒居士) / 묘호 태조(太祖) / 시호 성문신무정의광덕고황제(聖文神武正義光德高皇帝) / 존호 지인계운응천조통광훈영명(至仁啓運應天肇統光勳永命) / 능호 건원릉(健元陵) /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로 197 / 봉호 화령백(和寧伯)
신상정보
출생일 1335년 11월 4일 (양력) / 출생지 고려 동북면 화령군 영흥 흑석리 / 사망일 1408년 6월 27일(72세) (양력) / 사망지 조선 한성부 창덕궁 광연루 별전 / 왕조 조선 / 가문 전주 이씨 / 부친 환조 / 모친 의혜왕후 최씨 / 배우자 신의왕후 한씨 · 신덕왕후 강씨 / 자녀 8남 5녀
종교
불교
서명
군사 경력
복무 고려군 / 복무기간 1356년 ~ 1392년 / 근무 고려 도평의사사 / 최종계급 삼군도총제사(三軍都摠制使) / 지휘 고려 삼군도총제부
주요 참전
이성계의 참전목록
태조(太祖, 1335년 11월 4일(음력 10월 11일) ~ 1408년 6월 27일(음력 5월 24일))는 고려 말 무신이자 정치가이며, 조선을 건국한 초대 국왕(재위 : 1392년 8월 13일(음력 7월 17일) ~ 1398년 10월 22일(음력 9월 5일))이자 대한제국의 추존 황제이다.
성(姓)은 이(李), 본관은 전주(全州), 휘는 단(旦), 초명은 성계(成桂), 초자는 중결(仲潔), 자는 군진(君晉), 호는 송헌(松軒), 또는 송헌거사(松軒居士)다. 아버지는 여진족]인 이자춘이였는데, 몽골식 이름이 울루스부카(Улус Буха, 吾魯思不花)였다.
개요
1335년(충숙왕 후4년) 고려 동북면 화령에서 출생하였다.
고려 장수이며 공민왕과 우왕 시대에 홍건적과 왜구 토벌에서 영웅적 공로를 쌓아 입지를 다졌다. 1388년(우왕 14년) 철령 이북 영토 문제를 두고 명나라와 갈등이 빚어지자, 이에 대한 타개책으로 우왕은 명나라 요동 정벌을 명한다.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로서 요동 정벌을 위하여 북진하다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정권을 장악하였고, 공양왕에게서 선위 형식으로 개경 수창궁에서 즉위함으로써 조선을 개국하였다.
조선을 개국한 후에 '단(旦)'으로 개명하였다. 정도전과 조준을 비롯한 혁명파 신진사대부들과 전제 개혁을 비롯한 각종 사회 개혁을 단행한 끝에 조선을 개국했고, 한양으로 천도해 왕조 기틀을 다졌다.
묘호는 태조(太祖)이며, 시호는 강헌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4]이다. 이후 존호를 더해 대한제국 때 명나라에서 내린 시호 강헌(康獻)을 삭제하고 고황제(高皇帝)로 추존하여 정식 시호는 태조지인계운응천조통광훈영명성문신무정의광덕고황제(太祖至仁啓運應天肇統廣勳永命聖文神武正義光德高皇帝)이다. 재위 기간은 6년 2개월이며, 퇴위 후 태상왕이 되었다.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내에 있는 건원릉(健元陵)에 안장되었다.
가계
이성계의 고조부인 이안사는 전주에서 삼척으로 이주하여 간도 지방에서 기반을 마련하였고, 몽고군이 쳐들어왔을 때 조씨와 함께 항복하여 다루가치가 되었다. 이후 증조부 이행리, 조부 이춘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이를 세습하였고, 실록에는 풍속을 바로잡고 개혁을 추진하여 백성들의 환영을 받았다고 한다.
고려 충숙왕 복위 3년(1335년) 10월 27일 동북면 화령에서 태어났다.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은 원의 쌍성총관부 만호였다. 어느 날 당시 쌍성총관부 만호 이자춘이 꿈을 꾸었는데, 꿈 속에서 하늘에서 오색 구름을 타고 선녀가 내려왔다. 그 선녀는 이자춘에게 절을 하고 "천계에서 그대에게 내리는 것이니, 장차 이것을 동쪽 나라를 측량할 때 쓰십시오."라며 소매 속에서 침척(바느질에 사용하는 자)을 꺼내 바쳤다. 이자춘이 그 자를 받은 뒤에 부인 최씨는 임신하였고, 이후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이성계 또한 어릴 때 꿈 속에서 신인(神人)이 나타나 금으로 된 자 즉 금척(金尺)을 주면서 "이 금척(金尺)으로 삼한 강토를 헤아려 보아라"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훗날 장성하여 진안 마이산에 들르게 된 이성계는 기이한 경험을 하게 되는데, 산의 풍광이 어릴 적 꿈 속에서 신인(神人)이 나타나 금척(金尺)을 주었던 곳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신인(神人)이 금척(金尺)을 주었던 내용과 마이산의 풍광을 읊은 내용이 태조 2년(1393년) '몽금척(夢金尺)'이라는 악장과 '금척무(金尺舞)'라는 춤으로 만들어진다.
전쟁 영웅
신궁(神弓)
이성계는 특히 활을 잘 쏘았다. 황산대첩(荒山大捷)에서 이성계는 15~16세 가량의 아기발도(阿其拔都 : 아기 장수)라는 왜구 소년장수의 활약으로 고전했다. 이성계가 화살로 아기발도의 투구 꼭지를 맞추자 투구가 기울어졌다. 당황한 아기발도가 이를 바로 잡으려고 하자, 이성계는 또 다시 투구 꼭지로 화살을 날렸고 투구가 완전히 벗겨졌다. 아기발도 이마가 드러나자 이지란이 화살로 맞추어 죽여버렸다.
또한 황상(黃裳)과의 대결도 유명하다. 황상은 공민왕을 도와 기철을 숙청하고 홍건적에게서 개경을 탈환하여 1등 공신에 오른 인물이다. 또한 예전에 원나라 순제 앞에서 활로는 세계 최강이라는 몽골 궁수를 모두 이겨 버린 적이 있었다. 원나라 순제가 놀라 "팔이 어떻게 생겼길래 활을 잘 쏘냐?"며 황상의 팔을 직접 만져볼 정도였다.
대결의 결과는 50발까지는 둘이 막상막하였으나, 50발이 넘어가자 황상의 활이 빗나가기 시작했다.
유년기
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태어날 때부터 우뚝한 콧마루와 임금다운 얼굴로서, 신체는 영특하고 준수하며, 지략과 용맹은 월등하게 뛰어났다고 한다.
어린 시절 고향인 화령에서 태어났으며 성장했다. 북방 민족들이 매를 구하러 주로 내려왔는데, 흔히 말하길 "이성계와 같이 걸출한 매를 얻고 싶다"라고 하였다.
고려의 무신 가문 출신인 이성계는 어릴 때부터 영웅의 기질을 타고나서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며, 용맹하여 수많은 전쟁터에서 전공을 세웠다. 특히 활을 잘 쏘아서 '신궁(神弓)'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천하의 명궁으로 알려졌다. 궁술과 전장에서의 그의 활약상에 관해서는 여러 영웅담이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으며 이성계는 30여년 동안 전장에 나아가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는데, 다만 군왕과 군인역에서 은퇴후 자신의 아들인 이방원과의 싸움인 '조사의의 난'에서는 크게 패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성계의 군대가 전장에 나아갈 때는 대라(大螺)를 부는 특유의 의식이 있었는데, 적들이 멀리서 그 소리만 듣고도 바로 이성계가 왔다는걸 알았다고 한다.
원나라와 홍건적 격퇴
고려 공민왕 5년(1356년) 유인우가 이끄는 고려군이 원의 쌍성총관부를 공격할 때 공민왕은 원나라에 부역하던 조씨와 이씨에게 조상의 죄를 씻을 기회를 준다고 하여 공민왕에 투항하여 아버지 이자춘과 함께 공을 세웠고, 5년 뒤에 이자춘이 죽자 아버지의 벼슬을 이어받아 금오위상장군(金吾衛上將軍) · 동북면상만호(東北面上萬戶)가 되었다.
1361년(공민왕 10년) 음력 10월에 독로강만호(禿魯江萬戶) 박의(樸儀)의 반란을 평정하였으며, 같은 달에 다시 압록강의 결빙을 이용하여 홍건적이 2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의 영내에 침입하여 삽시간에 수도가 함락되자 이성계는 휘하의 고려인 및 여진족으로 구성된 강력한 친병 조직 2,000명을 거느리고 수도 탈환 작전에 참가하였다. 또한 이들 대부분은 기병이였다. 개인 병력으로만 수많은 전장에서 단련된 수천의 기병을 거느린 이성계의 군사력은 위협적이였다. 이성계는 유린청(遊麟靑), 횡운골(橫雲鶻), 추풍오(追風烏), 발전자(發電赭), 용등자(龍騰紫), 응상백(凝霜白), 사자황(獅子黃), 현표(玄豹) 등 '팔준(八駿)'이라 불리는 여덟 마리 애마를 타고 다녔다.
1362년(공민왕 11년) 심양행성승상(審陽行省丞相)을 자처한 원 장수 나하추가 수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함경도 홍원 지방으로 쳐들어와 기세를 올리자, 고려에서는 이성계를 동북면 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 삼아 적을 막게 하였다. 여러 차례의 격전 끝에 마침내 함흥 평야에서 원 군대를 격퇴시켜 명성을 크게 떨쳤다. 적장인 나하추마저 이성계의 뛰어난 용맹과 탁월한 군사적 재능에 감탄하며 깊이 존경할 정도였다.
1364년(공민왕 13년) 원나라의 기황후가 최유를 시켜 원의 군사를 이끌고 공민왕을 몰아내고 덕흥군을 세우려고 압록강을 넘어 침입하자 최영 등과 함께 이를 막았고, 이 직후 함주를 침공한 여진족 김삼선·김삼개(金三介) 형제를 격퇴하여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임명되었으며, 1370년(공민왕 19년) 원의 동녕부를 원정하여 국토를 확장하였다. 이성계는 군대를 이끌고 압록강을 사흘에 걸쳐 도강한 후, 진군하여 요동성을 점령한다.
조선 건국 및 즉위
황산대첩
고려 충정왕 시기부터 우왕 시기까지 왜구의 침입이 각지에서 빈번하였다. 특히 우왕 시기의 왜구는 규모도 커지고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우왕 6년(1380년) 진포 해전으로 퇴로가 차단된 왜구는 육지에 있던 왜구들과 합세하여 큰 세력을 이루게 되니, 아지발도가 이끄는 왜구의 대규모 군단이 내륙으로 들어와 옥천, 금산, 상주, 선산, 성주, 함양 등을 미친듯이 휘젓고 다니며 노략질하다가 마침내 지리산 운봉에서 진을 치고 북상을 준비하였다. 이에 고려 조정에서는 이성계를 도순찰사(都巡察使)로 임명하고, 변안열은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삼아 드디어 이성계와 변안열이 출전하게 되었다. 운봉에 도착한 이성계는 운봉을 넘다가 길 오른쪽의 험한 길을 보고 "적이 반드시 이 길로 우리를 갑자기 습격하려 올 것이니, 우리도 이 길로 들어가야 한다"라고 말하고는 험한 곳에 들어갔는데, 과연 이성계의 예측대로 왜구가 습격해 왔다.
아지발도는 고려군이 토벌에 나선 것을 알았지만 자신의 힘만을 믿고 교만을 부리다가 이성계와 그의 의형제 이지란이 쏜 화살에 맞아 죽었다. 이에 왜구의 기세는 크게 꺾여져서 물러났다. 당시 이성계는 이지란과 논의해 먼저 이성계가 아지발도의 투구끈을 2차례 활로 쏘아 맞히어 벗긴 뒤, 이후 이지란이 아지발도의 이마를 향해 활을 쏘아 죽였다고 한다. 이에 왜구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고, 고려군의 공격은 더욱 맹렬해져서 왜구의 정예부대가 모두 죽었다. 기록에 따르면 "죽임을 당하는 왜구의 곡성이 마치 만 마리의 소의 울음소리 같았고, 냇물이 모두 그들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라고 한다. 이 전투를 '황산대첩(荒山大捷)'이라고 한다. 이때 이색, 김구용, 권근이 시를 지어 승리를 하례하였다.
신진사대부와 연대
눈부신 전공에 비해 중앙 정치에서 영향력이 부족했던 이성계는 성리학을 수용하여 고려를 개혁하고자 했으나 정치 권력을 가질 수 없었던 신진사대부와 연대하여 손을 잡게 되었다. 이성계는 정몽주의 능력을 인정해 모든 전쟁터마다 반드시 그를 데려갔다고 기록되어 있어서 정몽주는 이성계의 장자방이나 제갈량 같은 역할을 맡았음을 알 수 있다. 또 정몽주를 통해 뒷날 조선 왕조의 설계자로 불리는 정도전이 함주 막사의 그를 수시로 방문하여 그와 정사와 현안을 논했으며, 개국 과정에서 모든 일을 함께 하였고 개혁과 개국의 이념을 제시했다. 이성계는 정몽주와 정도전을 통해 이색, 우현보, 권근, 성석린, 설장수, 이숭인 등의 인사들과 친분을 형성해 나갔다.또한 친명 세력이자 원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신진사대부에 대한 압력과 위협에서 이들을 지켜주고 보호함으로써 신진사대부와 결속력을 다져나가게 되었다. 한편 최영, 조민수와도 깊은 친분 관계를 유지하였고, 최영이 임견미, 염흥방 등의 부패권문세족 세력들을 숙청할 때는 그를 적극적으로 도왔다.
대학연의
안변책
1383년 8월, 이성계는 동북면에 침입한 호발도에게 승리한 이후 우왕에게 변경을 편안하게 할 책(安邊之策)을 제시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는 새 왕조를 개창한 인물이 개국 이전에 가졌던 정치적 견해를 보여 주는 중요한 자료이며 당시 유명한 무장으로서 내용이 충실한 정책 건의를 한 사람은 이성계 이외에는 없다. 물론 단편적으로 건의한 바는 있었다. 하지만 비교적 풍부한 사실과 주요한 사회 문제를 문장화해서 제시했던 경우는 드물다. 또한 내용 전반이 군사 문제의 원인을 사회 구조적 모순과 도탄에 빠진 민생으로 지목하여 이후 그가 신진사대부와 함께 체제 개혁을 추진한 것을 이해하는 중요한 연결 고리로, <맹자>의 표현이 인용되어 있어 정몽주의 영향도 확인할 수 있다.
왜구와의 싸움에 대비해 상시 군사 훈련을 시행할 것
사적으로 백성을 착취하는 군벌과 호족을 엄단해 군량을 확보할 것
토지 제도 붕괴로 무너진 군제와 유랑하는 백성을 보호할 것
유능하고 공정한 인물을 수령으로 선발해 지방을 통치할 것
요동 정벌 반대와 위화도 회군
요동 정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388년(우왕 14년) 2월 명나라는 철령 이북의 땅의 소유권을 주장하였다. 본래는 원나라의 쌍성총관부가 있던 지역이니, 이제는 원을 계승한 명나라의 땅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철령위라는 관청을 설치하고 관리를 파견했다.
1388년 4월, 최영과 우왕은 이 기회에 요동을 공격해서 명나라의 야심을 꺾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성계는 요동 정벌을 반대하면서 그 이유로 4가지를 들었다.
소(小)로서 대(大)를 거역하는 것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공격하는 것).
농번기인 여름철에 군대를 동원하는 것.
온 나라의 군대를 동원하여 북쪽으로 원정하러 간 사이 왜구가 그 틈을 노릴 소지가 있는 것.
곧 여름철이라 비가 자주 내리므로 아교가 녹아 활이 녹고 군사들은 질병을 앓게 될 것.
이것이 이른바 '4불가론'이다. 현대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이성계의 반대를 타당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이성계 개인의 뜻이라기보다, 그와 정치적으로 결합한 신진 사대부들을 비롯한 여러 요동 출정 반대 세력의 뜻이기도 했다. 실제로 하륜은 요동 공격에 반대하여 최영이 양주로 유배하였고, 권근은 격문 작성을 거부하였고 이숭인은 최영의 측근들에게 공격받아 축출되는 등 조선 건국에 반대한 사대부들도 모두 우왕과 최영의 요동 공격에 반발하였다. 우왕과 최영이 반대하자 이성계는 전열 정비 이후 가을 재출정을 제안했으나 그것을 무시하고 요동 정벌이 단행되었다. 공요군은 병력 5만, 최영이 8도 도통사로 총지휘관이 되고, 이성계는 우군도통사, 조민수는 좌군도통사로 임명되었다.
5월에 고려군은 압록강 어귀의 작은 섬 위화도에 이르렀다. 이후 위화도에서 14일을 체류했다. 장맛비가 계속 내렸으므로 회군을 청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마침내 좌군도통사 조민수를 설득하여 회군하였다. 위화도 회군 직전 이성계, 심덕부, 이지란이 서로 의형제를 맺고 회군을 결의한 기록화인 장수군도가 새로 발견되었다. 여기서 그는 평양부터 위화도까지 19일의 진군 기간을 거쳤고, 이후 위화도에서 14일을 체류한 반면, 정작 회군 때는 개성까지 9일 밖에 걸리지 않은 점을 들어 장마와 군량 문제는 구실에 불과하고, 이성계 자신이 권력을 잡기 위한 철저한 계획적인 일이라는 말이 있다.
회군한 이성계와 조민수는 최영과의 두 차례의 혈전 끝에 개경을 점령했고, 이후 회군 장수들의 요구였던 최영의 딸인 영비 최씨 폐위를 끝까지 거부한 우왕을 폐위하고, 이후 이색과 조민수 등 사전 옹호 세력에 의해 옹립된 9세의 창왕을 잠시 받들면서 개혁을 강행하였다. 1년 후 조준, 정몽주, 정도전, 심덕부 등과 함께 흥국사에 모여 우왕과 창왕이 왕씨가 아니라 신돈의 아들, 손자라는 조작된 논리를 이용해 창왕을 폐위했고 공양왕을 옹립한 이후 비로소 전제 개혁을 단행했다. 최영을 제거하여 군사적 실권을 장악하고 한 명실상부한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위화도 회군은 이성계의 신흥 무인세력과 신진 사대부가 결합하여 이인임과 조민수를 필두로 하는 고려 권문 세족과 구세력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이자, 조선 왕조가 개창의 단초를 이룬 사건이다. 그의 위화도 회군에는 정도전, 조준, 남은, 윤소종 등 급진 신진 사대부의 적극적인 도움과 회군에 찬동한 이색, 최영 심문에 참여한 정몽주, 최영과 우왕의 요동 공격에 반대하여 투옥되기까지 했던 하륜 등의 협조로 내부 반발을 억제할 수 있었으며, 조준과 정몽주가 고려 구 세력의 대표 최영을 심문하였다. 개경을 장악한 이성계와 사대부는 최영을 축출했고 이 해 12월 개경으로 압송해 처형했다.
토지 개혁과 과전법 시행
포은 정몽주 (1337-1392)
역성 혁명과 온건 개혁의 방법 차이로 정적이 된다.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 이후 삼군도총제사(三軍都摠制使)가 되어 조준, 정도전 등과 함께 전면적인 사전(私田) 개혁에 나섰으며[25] 대농장 소유와 불법 겸병으로 국고를 고갈시키고 극심한 양극화를 부른 고려 귀족 기득권의 저항에도 굴하지 않고 사전을 혁파해 고려 말 사회 혼란을 해소한 뒤, 신흥세력의 기반을 굳건히 하고 중앙 집권과 관료제, 근세적 토지 소유 관계의 기초를 닦았다.
원 간섭기 권문 세족과 불교 사원은 대토지를 점유하고 불법 겸병을 이용해 사전으로 농장을 경영하여 국가 경제를 파괴했다. 고려의 조세 수입을 지탱했던 공전 수조지는 감소하고 국가 재정은 고갈되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전제 개혁은 불가피했다. 위화도 회군 이후 우왕 때에 정치 일선에서 배제되었던 신진 사대부도 속속 정계에 복귀하여 본격적인 개혁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정몽주 등은 회군 이후 정치적 활동이 활발해진 인물 중 하나였다.
하지만 신진 사대부 사이에는 사회의 모순에 대한 개혁의 방향을 둘러싸고 분열과 대립이 발생했다. 최초의 분열은 위화도 회군 직후 전제 개혁논의를 둘러싸고 벌어졌다. 이색, 권근 등과 이인임의 인척 이숭인과 하륜 등은 사전 혁파에 반대하며 일전일주론을 주장했고, 조준, 윤소종, 정도전 등은 전면적인 사전 혁파를 비롯한 정치, 사회, 법과 제도 전반 개혁을 주장했으며 정몽주는 중립을 지켰다. 전제 개혁을 비롯한 각종 사회 개혁에 대한 정몽주의 정치적 입장은 이성계, 정도전과 가까웠으나, 이색이나 이숭인 등과의 개인적 관계가 그에게 중립을 지키도록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공양왕 옹립에 이르기까지 급진파와 정치적 행보를 함께 했던 정몽주가 반대 세력으로 돌아서자, 이성계는 조준으로 하여금 과전법을 제정하도록 했고 토지 개혁을 관철시켰다. 창왕을 폐위한 이후 겨우 양전을 시행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토지 개혁을 둘러싼 고려 농장주들의 극심한 저항을 그대로 보여 준다.
비록 농민에게 토지를 직접 분배한다는 정도전의 계구수전론은 실현되지 못했으나 개경 거리 한복판에서 고려의 모든 공사 전적(토지대장)을 소각하고 시행한 조준의 사전 혁파와 과전법 시행은 고려 말 재정 고갈을 해소하였다. 그러나 과전법은 근본적으로 구 고려 권문세족으로부터 급진 신진 사대부로부터의 부의 이동이였고, 이것이 가장 큰 목표였지, 농민들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는 것은 중도포기하고 도외시한 중대한 결함이 있었다. 왜냐하면 우왕과 창왕 및 그들을 둘러싼 이인임 계열 외척 귀족들과 사전주, 농장주들의 반대와 저항이 극심했으며 이성계의 힘으로도 고려 기득권의 반발을 모두 무마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공양왕 옹립까지 모든 정치적 갈등의 근본에는 이 토지 개혁이 있었다. 전제 개혁 논의를 기점으로 이색, 정몽주 등 온건 개혁파는 고려 왕조를 보존하여 고려 귀족 연합체를 유지하고 점진적인 개혁을 추진하려 하였고, 반면 정도전과 조준 등 급진 개혁파는 고려 왕조를 부정하고 관료제 사회 수립과 전면적인 사회 개혁, 왕조 교체를 주장했다.
역성혁명파의 유배와 정몽주의 최후
1392년(공양왕 4년) 정몽주는 명나라에 갔다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하기 위해 황주로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중에 낙마하여 큰 부상을 당하자, 정몽주와 공양왕은 이성계가 없는 틈에 대간을 움직여 역성혁명파의 핵심 인물 정도전, 남은, 조준 등과 그들의 측근 윤소종, 남재, 조박 등을 탄핵하여 유배를 보냈다. 황주에서 이 소식을 접한 이성계는 불편한 몸에도 불구하고 개경으로 향했다. 공양왕 즉위 이후로 고려의 군권은 이성계를 비롯하여 조준과 정도전 등에게 집중되었기에 최후의 수단으로 군권을 동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30] 이후 형률을 다스리는 사람은 엄벌주의적 주장으로, '김진양 등의 인물들을 참수형으로 벌해야 한다'라며 주장했지만, 태조는 "김진양은 정몽주가 부추겨서 행동 한 것이기 때문에 함부로 형벌을 내리지 못한다" 라며 온정주의적 주장을 하였는데, 그럼에도 형벌을 내리는 사람이 여전히 태형을 내리는 것을 제안하자 "이미 이들을 용서하였으니 곤장을 칠 필요 역시 없다"라고 하여 진양 등의 인물은 형벌을 면하게 된다.
이성계는 군권으로 정몽주를 굴복시킬 수 있는 상황이었고, 건국 과정에서 도평의사사의 인준과 공양왕의 선위를 받아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방원은 정몽주를 제거하기로 결정하고 그를 만나 정자에 둘러 앉아 시조를 한 수 지어 정몽주의 마음을 확인했다. 이 시조가 그 유명한 '하여가'와 '단심가'다. '하여가'는 이방원이 지은 시조로, 내용은 이렇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 칡이 엵혀진들 그 어떠리, 우리도 이 같이 얽혀 천년만년 살고지고
라는 시조 한 수를 남겨 같이 새 나라, 왕조를 세우는 데에 같이 이루어 보자는 이방원의 뜻이었고, 그리고 '단심가'는 정몽주가 지은 시조로 내용은 이렇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라는 시조를 내어 정몽주 자신은 자신의 몸이 백번 천번 죽어도 고려의 왕만을 섬긴다는 것이 정몽주의 뜻이었다. 그래서 이방원은 정몽주가 있는 한 역성혁명을 이룰 수가 없다고 판단이 되자 자신의 수하 조영규와 고여 등을 시켜 밤중에 집에 돌아가는 정몽주를 쫓아가 선죽교에서 제거하였다.
정몽주가 살해되자 고려 조정은 다시 이성계 일파가 득세하였다. 정몽주의 측근들인 온건 개혁파들을 대거 축출하여 유배를 보냈고, 정몽주에 의해 탄핵되었던 이성계 일파의 급진개혁파들이 정계에 속속 복직하여 세력을 결집하였다. 이후 나머지 온건개혁파들에 대한 척결이 이루어졌고, 정도전이 정계에 복귀하면서 사실상 역성혁명이 구체화되어 1392년 7월에 정도전, 남은, 조준, 배극렴 등은 공양왕을 왕위에서 폐위시키고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할 것을 결정한다. 여기서 민개는 혼자 기뻐하지 않은 표정을 짓고, 고개를 숙여 말하지 않아 남은이 목을 쳐 죽이려 하였지만 태조는 의리 상 죽일 수 없다며, 민개를 살렸다.
선양 형식으로 조선 개국
그들은 이를 위해 정비 안씨를 찾아가 공양왕의 폐위와 이성계의 옹위를 명령하는 교지를 요청하였고, 정비가 이를 수용함으로써 공양왕이 비로소 정식으로 폐위되고 이성계가 신하들의 계속된 추대와 간청으로 이성계는 마침내 1392년 7월 17일, 수창궁에 나아가 왕위를 계승하여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였다. 이로써 고려 왕조는 왕건이 개국한 지 475년 만에 제34대 공양왕을 끝으로 하여 멸망하였다. 처음에는 민심의 동요를 염려하여 국호는 그대로 고려로 두었으나, 1393년 3월 27일(음력 2월 15일) 조선(朝鮮)이라 고쳤다. 한편 명나라에 책봉을 청하는 사신을 보냈지만 명나라 홍무제는 그를 정식 국왕으로 봉하지 않고 권지고려국사라는 직책을 내린다.
포용 정책과 고려 구신들의 출사
태조는 개국 이후에 개국공신 52명에 이어 재위 2년부터 재위 6년까지 모두 22차례에 걸쳐 도합 1,400여명의 개국원종공신을 포상하였고, 이는 새 왕조의 안정에 크게 공헌했다고 인정받고 있다.
또한 태조 즉위 교서에서 조선 개국에 반대했다고 지목된 56명 중 사망한 8명을 제외한 48명 중 32명이 태조, 정종, 태종 대에 다시 출사하였다. 개국 이후 태조는 고려 구신들을 원종공신으로 포상하거나 적절한 관직에 임명해 회유했으며, 특히 권근, 하륜 등 이색 문하 온건개혁파는 새로운 왕조에 적응해 다양한 직임에서 각종 문물 정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아래 표는 태조의 즉위 교서에 명시된 개국 반대 세력 56명 중 태조, 정종, 태종 대 다시 출사한 사례를 일부분만 제시한 것이다.
성명 시기 활동 내용
설장수 태조 3년 사역원 제조 / 강회백 태조 2년 참판승추부사 / 조호 태조 2년 노비변정도감에 소송 / 이내 정종 2년 2차 왕자의 난 좌명 공신 / 김묘 태종 6년 지사간 / 김첨 태조 6년 친종호군 / 유향 태종 1년 경기우도 안렴사 / 이작 태종 14년 대간 / 안노생 정종 1년 좌 간의 / 권홍 태종 2년 딸이 태종 후궁으로 간택 / 유정현 태종 3년 승녕부 윤 / 안원 태종 1년 우군 동지총제 / 성석용 태조 6년 개성 유후 / 정희 미출사 아들 정초가 세종 대 출사
한양 천도와 조선 선포
새 왕조를 연 태조는 즉위 한 달 만에 수도를 옮길 결심을 했다. 백성의 생활이 채 안정되기도 전에 큰 역사를 벌임은 옳지 않다는 천도 반대론을 물리치고 재위 3년(1394년) 8월 태조는 마침내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설치하여 새 수도의 도시 계획을 구상, 천도를 명령했다.
처음 후보지로 지목된 곳은 계룡산이었으나 하륜이 계룡산은 땅이 좁고 토지가 비옥하지 않으며 금강과도 멀리 떨어져 있다는 이유를 들어 천도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고 계룡산 대신 하륜이 거론한 무악(지금의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신촌 일대)은 "예로부터 제왕은 모두 남면하여 나라를 다스려왔고, 동향했다는 말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는 정도전의 반대로 중지되었다. 다음날, 태조는 왕사 무학, 정도전, 하륜 등과 함께 새 도읍지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 곳은 바로 고려의 남경 터였다.
태조는 직접 한양으로의 천도를 결정했다. 새 도읍지 한양이 '조운이 잘 통하고 사방의 이수도 고르니 사람들에게 편리하다.'는 이유였다. 정궁(正宮) 터로 하륜이 오늘날 신촌에 해당하는 무악을, 정도전이 오늘날 경복궁 터를 지정하였으며 정도전의 견해가 채택되었다. 태조는 종묘와 사직, 법궁을 비롯한 한성 도시 계획 전반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였다.
신도 궁궐 조성 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설치하고, 청성백(靑城伯) 심덕부(沈德符)와 좌복야(左僕射) 김주(金湊), 전 정당 문학 이염(李恬), 중추원 학사 이직(李稷)을 판사(判事)로 임명하였다.
— 태조실록 6권, 태조 3년 9월 1일 무술 1번째기사 : 신도 궁궐 조성 도감을 설치하고 담당 관리를 임명하다
판문하부사 권중화(權仲和) · 판삼사사 정도전 · 청성백 심덕부 · 참찬 문하부사 김주 · 좌복야 남은 · 중추원 학사 이직 등을 한양에 보내서 종묘 · 사직 · 궁궐 · 시장 · 도로의 터를 정하게 하였다. 권중화 등은 전조 숙왕(肅王) 시대에 경영했던 궁궐 옛터가 너무 좁다 하고, 다시 그 남쪽에 해방(亥方)의 산을 주맥으로 하고 임좌병향(壬座丙向)이 평탄하고 넓으며, 여러 산맥이 굽어 들어와서 지세가 좋으므로 〈여기를 궁궐터로 정하고〉, 또 그 동편 2리쯤 되는 곳에 감방(坎方)의 산을 주맥으로 하고 임좌병향에 종묘의 터를 정하고서 도면을 그려서 바치었다.
— 태조실록 6권, 태조 3년 9월 9일 병오 2번째기사 : 정도전 등에게 한양의 종묘·사직·궁궐·시장 등의 터를 정하게 하다
판삼사사 정도전 등은 한양으로부터 돌아왔으나, 청성백(靑城伯) 심덕부(沈德符)와 참찬문하부사 김주(金湊)는 남아서 〈궁궐과 기타 도시의〉 경영을 관리하였다.
— 태조실록 6권, 태조 3년 9월 23일 경신 1번째기사 : 한양에서 정도전 등은 돌아오고, 심덕부와 김주는 남아 관리하다
한양으로 천도
10월 태조는 각 관청당 2명씩만 남겨두고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개경을 출발, 한양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새 수도의 이름을 한성부로 고쳤다. 12월부터 본격적인 역사에 들어갔다. 이는 왕씨의 본거지인 개경을 버리고 한양(漢陽)으로 천도하여 도성을 신축하는 등으로 국가의 새로운 면모를 갖추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재위 4년(1395년)에는 도성축조도감이라는 관청을 설치, 성을 쌓기 위한 기초측량을 하게 했다. 총책임자는 정도전을 임명했다. 태조 5년(1396년) 쌓기 시작한 한양 성곽은 1년여 만에 완성되었다.
제도 정비와 법전 편찬 등 국가 기틀 수립
태조는 관제(官制)를 비롯한 국가 전반 시설을 정비하고 정도전과 좌시중 조준 등으로 하여금 《조선경국전》,《경제육전》 등을 찬집(纂輯)하게 하여 반포하였다. 태조 대 정치는 도평의사사를 중심으로 국왕의 권력이 우위에 있으면서 재상들과 논의하여 정책을 시행하는 체제로, 이는 고려 말 7~80여명에 이르는 인원으로 운영하던 도평의사사를 공신들 및 관료들의 합좌 기구로 정리하여, 의정부와 육조 체제로 이행하는 과도기의 정치 방식이었으며 태조의 왕권은 도평의사사에 직접 국왕의 명령을 하달하는 등 강력한 것이었다.[55] 또한 기존 도평의사사에서 막대한 권한을 가진 채로 국왕과의 정치적 의사 소통 및 권력을 독점한 내재추를 혁파했다. 그리고 동서대비원ㆍ혜민국 등 고려 시대에 있던 사회제도를 계승하였다.
사병 혁파와 왕자의 난
태조에게는 정비인 신의왕후 한씨 소생의 여섯 왕자와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 소생의 두 왕자가 있었는데, 신덕왕후 소생 두 왕자 중 장남 이방번은 고려 공양왕의 조카사위였기 때문에 차남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했다. 한편 조선 개국에 공이 컸던 신의왕후 소생 다섯째 아들인 이방원은 불만이 컸다. 태조는 즉위 이후 군권분장정책에 따라 왕자들과 종친을 절제사로 임명하고 군권을 분할했는데, 태조는 정도전을 내세워 이들이 가진 사병을 혁파하고자 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방원은 정도전 일파가 세자를 조종하여 자신들을 해치려 한다는 조작된 명분을 내세워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도전을 비롯한 관료들과 신덕왕후 소생 왕자들, 공주의 남편 흥안군을 살해하였다.
퇴위
태조는 이 사건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또 이미 실권도 모두 잃어, 왕위를 둘째 아들 방과에게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방과가 정종으로 즉위하고 아우 방원은 왕세제로 책봉되었다. 1400년에는 왕위계승을 두고 넷째 아들인 방간과 다섯째 아들인 방원이 대립하여 제2차 왕자의 난이 발발하였다. 두 차례의 왕자의 난을 통해 방원이 태종으로 즉위하였다.
태종은 즉위하자 성석린을 보내 태조를 서울로 모셔 왔다. 그러나 이성계는 자신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죽이고, 자신을 사실상 폐위한 이방원을 매우 증오해 1402년(태종 2년)에 다시 함경도로 들어간 채 돌아오지 않으므로 태종이 차사(差使)를 보내어 돌아오기를 권유하니, 차사마저 돌려보내지 않고 활에 화살을 넣고 족족 오는 차사마다 죽였다는 야사가 있어 함흥차사란 말이 생겨났다. 그곳에서 이성계는 '조사의의 난'을 부추겨 아들 이방원을 쳤지만 실패로 돌아갔고, 뒤에 태종 이방원의 아내인 '원경왕후 민씨'의 천거로 무학대사가 차사로 가서 겨우 서울로 오게 하였는데 오면서도 두 차례에 걸쳐 이방원을 살해할려고 했지만 실패하고 결국 체념해 이방원을 인정하고 용서했다는 야사가 있다.
1401년 한성부로 돌아온 태조는 태상왕으로 7년을 더 살며 염불삼매로 조용한 나날을 보내다가 1408년 음력 5월 24일에 지병으로 있던 중풍이 악화되어 창덕궁 광연루 별전에서 74세로 승하하였다.
묘호 및 시호
새로운 왕조의 개창자로서 묘호를 태조(太祖), 존시(尊諡)는 강헌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이다.
광무 원년(1898년)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에 의해 개국시조로서 고황제(高皇帝)로 추존되었다. 동시에 명에서 내린 시호인 '강헌'을 삭제하고 지인계운응천조통광훈영명성문신무정의광덕고황제(至仁啓運應天肇統廣勳永命聖文神武正義光德高皇帝)라 하였다.
능원
태조의 건원릉
생전에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곁에 묻히고자 하였으나, 아들 태종에 의해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현재의 경기도 구리시)의 동구릉 터에 최초로 안장되었다. 능호는 건원릉(健元陵)이다. 태종은 부왕이 수시로 찾기 위해 마련한 신덕왕후의 능을 바로 도성 밖으로 이장하고, 능의 석물과 문인, 무인석은 청계천 광통교 교량의 난간과 받침돌로 훼철해버렸으며, 신덕왕후를 후궁으로 격하시켰다. 태조는 신덕왕후의 무덤이 태종에 의해 훼철된 뒤, 태종에게 자신을 선산이 있는 함흥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으나, 태종은 왕조의 개창자이기도 한 아버지의 무덤을 한양과 멀리 떨어진 함흥에 묻는 대신 한양 근교의 양주에 모시고, 함흥의 흙과 억새풀을 가져다 무덤을 덮었다고 한다.
가족관계
조선의 초대 국왕 /대한제국의 추존 황제 / 태조대왕太祖大王 / 태조 고황제太祖 高皇帝 출생 1335년 11월 4일 (음력 10월 11일)/고려 고려 동북면 화령부 사제 / 사망 1408년 6월 27일 (음력 5월 24일) (72세) / 조선 조선 한성부 창덕궁 광연루
[Sources Wikipedia]
소개
역사학자 이덕일이 소개하는 「이덕일의 역사특강」제2권 『부자의 길, 이성계와 이방원』. 사생을 함께 했던 동지 정도전을 제거하고 골욕상쟁의 비극을 겪으며 천륜의 부자지간에서 라이벌이 된 이성계와 이방원 부자의 엇갈린 선택의 역사를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한 책이다.
태조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은 조선 개국에 큰 공을 세웠다. 그는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죽임으로써 개국 반대 세력을 모두 제거했고, 왕대비 안씨를 압박해 공양왕을 폐위시켜 이성계를 왕위에 올렸다. 그럼에도 태조는 이방원을 배제하고 막내 방석을 세자로 책봉했는데 왜 그런 선택을 한 것일까.
왕이 되고 싶은 이방원에게 방석을 지지한 개국공신 정도전은 눈엣가시였다. 방원은 정도전이 태조가 위독하다 속이고 왕자들을 궁중으로 불러 죽이려 했다는 트집을 잡아 정도전 일파와 세자 방석을 살해했다. 그러나 이방원은 바로 왕위에 오르지 않고 방과를 세자로 삼았는데 그 숨겨진 계획은 무엇일까. 조선의 운명을 좌지우지 했던 부자의 싸움으로 조선 왕조 500년의 기틀을 다지게 된 내막을 만나본다.
목차
운명의 날 | 이색의 변심과 정도전의 위기 | 세자 책봉 문제로 엇갈리는 운명 | 이방원의 눈물
1장_이성계 일가의 등장
하늘의 명을 받다
무학대사와의 만남
고려 조정에 첫선을 보이다
최고의 활 솜씨로 무명을 떨치다
고려의 계속되는 내우외환
승승장구하는 이성계
무너지는 군사제도, 몰락하는 고려 사회
말 위의 사람 이성계, 서재의 사람 정도전
군신 관계를 넘어서 동지로
2장_고려 500년, 최후의 날
혼란에 빠진 원나라와 공민왕의 북강회수운동
공민왕 시해 사건
명 사신 채빈 암살과 친원파의 승리
명나라의 횡포와 요동정벌
이인임의 몰락
최영, 사전 혁파의 중요성을 깨닫다
비참한 말로로 치닫는 우왕의 운명
3장_이성계, 새 왕조를 열다
요동정벌과 사불가론
위화도 회군을 단행하다
요동치는 정세 속, 과전법이 반포되다
정몽주의 반격
이방원의 등장
고려의 마지막 임금, 이성계
4장_이방원, 아버지를 몰아내다
무리한 세자 책봉이 불러온 위기의 씨앗
친명에서 반명으로, 다시 불거지는 요동정벌론
왕자의 난과 정도전의 처단
이성계의 분노
5장_엇갈리는 부자의 길
아버지를 달래는 이방원
깊어가는 이성계의 딜레마
반 태종 봉기에 가담한 이성계
측근도 가리지 않는 피의 숙청
종부법을 제정하다
사대부들의 반발
6장_새로운 시대의 시작
악역의 눈물
폭군과 성군 사이
하늘이 시켜서 한 일이다
어긋나는 양녕과의 관계
양녕을 폐위하다
아직도 남은 악역들
세종 르네상스를 잉태하다
■ 연표 | 태조 이성계의 일생
태종 이방원의 일생
천륜을 저버리고 역사의 라이벌이 된 부자의 엇갈린 운명!
고려 말의 혼란을 극복하고 조선을 개창한 이성계,
그리고 개국 동지 정도전과 개국시조 이성계에게 칼을 겨누어야 했던 이방원,
권력을 둘러싼 그들의 엇갈린 선택과 조선 초기 파란의 역사를 새로운 시각으로 조망한다.
무자비한 피의 군주인가, 악역을 자처한 성군인가?
조선의 운명을 좌지우지했던 부자의 엇갈린 선택,
그 파란의 역사!
역사학자 이덕일이 《정도전과 그의 시대》에 이은 역사특강 두 번째 책《부자의 길, 이성계와 이방원》을 출간했다. 이 책에서 그는 사생을 함께했던 동지 정도전을 제거하고 골육상쟁의 비극을 겪으며 천륜이라 불리는 부자지간에서 역사의 라이벌이 된 이성계ㆍ이방원 부자의 파란의 역사를 새로운 시각으로 조망한다.
이성계의 조선 개창과 깊어가는 부자의 갈등
만 스물한 살 때인 공민왕 5년(1356)에 고려 조정에 첫선을 보인 이성계는 독로강만호 박의 일당의 반란 같은 내우와 북쪽의 홍건적, 남쪽의 왜구 침략 같은 외환을 극복하면서 혁혁한 무공을 쌓아 무장으로 이름을 날린다. 그리고 정도전과의 만남을 통해 새 왕조 개창의 꿈을 현실화할 동력을 얻게 된다. 정도전의 토지 개혁을 통한 개국 프로그램은 이성계의 군사력과 결합하면서 기존 체제를 뒤엎는 혁명 이론이 되었고, 이성계의 군사력은 혁명 무력으로 전환되었다.
1388년의 위화도 회군은 고려 왕조를 존속시킬 것인가, 새 왕조를 열 것인가를 둘러싸고 고려를 운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었다. 정몽주, 이색 등의 온건개혁파와 조준, 정도전 등의 역성혁명파는 나라의 운명을 두고 치열한 싸움을 벌였고, 정몽주의 거센 공격으로 귀양에 처해진 정도전이 사형 위기에 몰리는 상황에까지 치닫는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바로 이방원이었다. 그는 이성계에게 정몽주를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성계가 거절하자 스스로 악역을 맡아 정몽주를 제거해 일거에 판세를 바꾸었다. 이 일격으로 반 역성혁명파는 무너졌고, 정도전은 사형의 위기에서 벗어났다. 정몽주 제거 직후 고려는 무너졌고, 조선이 개창되었다.
그러나 이성계는 막내 방석을 후사로 선택했고, 개국에 가장 공이 큰 방원을 소외시켰다. 정도전은 이성계가 그런 선택을 내리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고, 결국 이 선택이 정도전의 운명을 비극으로 몰고 간다.
태조 7년(1398) 8월 26일은 이성계, 이방원, 정도전 모두에게 운명의 날이었다. 바로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난 날이다. 이 난으로 정도전, 남은 등의 요동정벌파는 물론 세자 방석과 방번, 그리고 경순공주의 남편 이제마저 비명횡사하지만, 사실상 방원이 칼을 겨눈 대상은 부친 이성계였다.
이방원은 일단 형인 방과를 세자로 내세워 이성계의 분노를 누그러뜨릴 시간을 번다. 태조는 쿠데타 발생 10여 일 후인 9월 5일 왕위에서 물러났다. 그나마 이복형제들을 죽인 방원이 아니라 쿠데타에 가담하지 않은 방과가 왕위에 오른 것을 위안 삼았다. 하지만 졸지에 어린 두 아들과 사위를 저승으로 보내고, 막내 공주는 사찰로 보내야 했던 이성계의 슬픔은 숨길 수 없었다. 게다가 왕자의 난은 1차로 끝나지 않았다. 정종 2년(1400) 1월 28일, 이번에는 동복형제들끼리 칼부림이 벌어진 2차 왕자의 난이 발생했고, 여기서도 이방원이 승리를 거둔다.
이방원은 돌아선 이성계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노력했다. 방원을 도운 공신들을 처벌하라는 이성계의 요구에 그들을 지방으로 유배 보내기도 했고, 정도전과 남은의 당여黨與를 용서하여 그들의 가족들에게까지 화가 미치는 것을 방지해 잠시나마 이성계의 분노를 누그러뜨리기도 했다. 그러나 방원이 왕자의 난 직후 형 방과에게 사양한 세자 자리와 임금 자리를 정종 2년(1400) 정종의 양위 형식으로 물려받게 되면서, 이성계는 다시 싸늘하게 돌아서고 만다. 그리고 방간을 불러올리라는 이성계의 요구를 방원이 거절하자 결국 이성계가 반 태종 봉기에 가담하면서 둘의 갈등은 최고조에 다다른다.
천명을 받은 이성계, 천명을 만든 이방원
이성계를 추대한 역성혁명파는 이성계가 천명을 받았다는 여러 일화를 남겼다. 그래야 조선 개창이 하늘의 뜻으로 합리화되기 때문이다. 세종대왕이 《용비어천가》를 만든 것은 새로 만든 훈민정음을 시험해보려는 뜻도 있었지만, 조선 건국을 정당화하기 위한 의도도 강했다. 그래서 《용비어천가》에는 천명에 관한 이야기가 여러 번 나온다. 《용비어천가》 1장은 “해동 육룡이 나르샤 일마다 천복이시니 고성이 동부하시니”라는 노래다. 해동 육룡은 이성계의 4대조 조상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와 태조 이성계, 태종 이방원을 뜻한다. 《용비어천가》 83장은 금척에 대한 노래다. “군위君位를 보배라 할새 큰 명命을 알리려고 바다 위에 금탑이 솟게 하시니 / 자〔尺〕로서 제도가 생길새 인정仁政을 맡기시려고 하늘 위에서 금척을 내리시니.” 이성계가 하늘에서 내린 금척을 받고 왕이 되었다는 뜻이다.
정도전은 《삼봉집》 <몽금척> 서문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전하께서 잠저(즉위 전의 집)에 계실 때 꿈에 신인神人이 금척을 받들고 하늘에서 내려와 “경 시중(경복흥)은 맑은 덕이 있지만 장차 늙어서 혼미해질 것이고, 최삼사(최영)는 곧다는 이름이 있지만 너무 융통성이 없다”라고 말하고, 전하에게 “문무를 겸한 자질이 있고 덕과 지식도 있으니 백성들의 신망이 속했다”라고 말하면서 금척을 주었다. - 《삼봉집》 <몽금척>
또한 고려 말과 조선 초의 문신이었던 권근은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신도비명에 “예전부터 고려 서운관에 전하던 비기 《구변진단지도》에 ‘나무를 세워 아들을 얻는다’라는 말이 있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나무를 세워 아들을 얻는다’라는 말은 한자로 ‘건목득자建木得子’라고 한다. 목자득국木子得國과 마찬가지 이야기인데, 목자木子는 ‘이李’ 자를 파자破字한 것으로, 이 이야기 역시 이씨가 개국한다는 뜻이다. 이 밖에도 이성계가 천명을 받았음을 보여주는 증거들이 여럿 전해진다.
개국시조 아버지에 이어 조선의 군주가 되고 싶었던 이방원은 스스로 천명을 만들기로 했다. 방원이 천명을 만들기로 했다는 말은 결국 부친에게 칼을 겨눈다는 뜻이다. 실제로 세자 방석 형제와 정도전 등을 죽인 것은 부왕에게 칼을 겨눈 것이었다. 개국시조가 자신 대신 동생을 선택했고, 그래서 방원은 부왕과 대립하면서 스스로 새 나라를 만들어야 했다. 그는 자신의 행위가 천명에 따른 것임을 입증해야 했다. 그래야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방원이 즉위 후 행했던 수많은 일은 여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는 공신을 숙청해 올바른 정치가 이루어지게 하고, 종부법을 제정해 천인들의 아픔을 달래주며 자신에게 내린 천명의 당위성을 입증하려 했다. 이성계와 정도전의 토지 개혁에 이방원의 공신 숙청, 종부법 등이 더해져 조선은 보다 완벽한 나라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500년 조선 왕조의 기틀을 다지다
권력은 국왕 한 사람에게만 속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방원은 집권 후 권력 분배를 단호하게 거부했으며, 개혁의 칼날을 내부로 겨누었다. 그렇게 시작된 공신 숙청은 처남은 물론이고, 측근 중의 측근 이숙번에 이르기까지 거침없이 진행되었다. 조선은 태종의 피의 숙청으로 비로소 법이 지배하는 법의 나라가 되어갔다. 고관들은 더 이상 법 외의 횡포를 자행할 생각을 못하게 되었다. 그러면 바로 대간에서 탄핵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태종이 피의 숙청을 통해 얻은 가장 큰 성과였다.
그리고 태종은 조선이 개창되면서 개혁되지 못한 노비제도 개혁에도 앞장섰다. 태종은 수많은 사대부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종부법을 제정해 모친의 신분 때문에 눈물 흘리던 수많은 천인들을 구제하고, 양인 수 증가로 국가 재정도 튼튼하게 했다.
태종은 권력의 냉혹함을 누구보다 잘 아는 군주였다. 또한 군주로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았던 군주였다. 하늘이 자신에게 천명을 내렸다면 그것은 악역을 하라고 내린 천명이라고 생각했던 군주였다. 태종은 누구나 걷기 싫어하는 악역이 자신의 역할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갔다. 그러는 과정에서 부친에게 칼을 겨누었고, 부인과 원수가 되었으며, 맏아들도 버렸다. 태종은 “이 또한 하늘이 시켜서 한 일이지, 내가 즐거워서 한 일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악역을 합리화했다.
하지만 그 누구 못지않게 성군이 되기를 바랐던 군주가 태종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태종은 세종 못지않은 성군의 자질을 갖고 있었다. 또한 태평성대를 만들려고 누구보다 노력했던 군주였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의 치세 동안 백성들은 태평성대였다.
태종처럼 파란만장하고 복잡다단했던 삶을 산 군주를 찾기도 쉽지 않다. 정몽주를 격살해 개국의 전기를 마련하고, 왕자의 난을 일으켜 부왕을 쫓아냈으며, 네 처남을 비롯한 공신들을 가혹하게 숙청해 법이 지배하는 나라를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온갖 비난과 저주를 들어야 했다. 그러나 태종의 이런 악역을 통해 신생 조선 왕실은 반석 위에 서게 되었다. 태종의 죽음과 함께 피로 얼룩졌던 한 시대가 막을 내렸다. 그런 토대 위에서 세종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문화의 시대가 만개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세종 르네상스는 태종이 뿌린 피를 거름 삼아 피어난 꽃이다.
출처: https://japan114.tistory.com/8434 [동방박사의 여행견문록 since 2010:티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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