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카시마 탄광
나가사키항구에서 18.5km떨어진 이 섬은 미쓰비시 소유의 해저탄광이 있었던 곳이다. 나가사키에는 육지나 섬 지하로 굴을 파 들어가 바다밑 수백미터 아래까지 채굴하는 해저탄광이 여럿 발달해 있었다. 그중에서도 다카시마는 증기기관을 갗춘 일본 최초의 근대적탄광이자 해저탄광으로 널리 알려졌다.본래 감옥노동, 즉 발목 쇠사슬을 찬 죄수들의 노동력으로 개발돼 사측의 노무관리가 가혹하기로 도 유명했다. 1881년 미쓰비시광업이 인수한 이후에도 인권의 사각지대로 악명을 떨첬던 이곳에 조선인 노무자들이 대거 끌려와 막장에서 신음했다. 1944년 기준으로 조선인 광부및 그 가족의 숫자는 3,500명이나 됐다.
타카시마 탄광의시작 [일본측설명]
개국이 시작된이후, 외국증기선의 연료로 사용되며 석탄의 수요가 높아지자 사가번의 스코틀랜드 출신 상인 글로버와 함께 1868년 사가번 (담당 :마쓰바야시겐조)과 글로버는 타카시마 탄광의 공동경영 계약을 맺고 합병회사를 설립하여 탄광개발을 시작 하였습니다. 영국인 기술자 모리스를 초빙하여 일본 최초로 증기기관차에 의한 수직갱도인 타카시마 탄갱 (홋케이정갱)을 만들엇습니다. 타카시마 탄갱은 1881년부터 미쓰비시가 소유하게 되었고, 타카시마 탄갱의 석탄기술은 일본 근대탄광산업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자료관 옆 공원에 바다쪽을 향해 청동상이 하나 우뚝 서 있었다. 어떤 역사적 위인이기에 저렇게 큼지막한 전신상으로 건립되 있나 궁금했다. 알고보니 미쓰비시 창업자 이와사키 야타로 (1835~1885)의 동상이다.이와사키는 본래 신분이 낮은 하급 무사였지만 메이지유신의 기틀을 마련한 일본의 국민적인 영웅 사카모토료마 (1836~1867)의 동향출신 이었다. 이와사키는 메이지유신 실세들과의 유착관계로 미쓰비시 성장의 중요한 발판을 마련했다. 그가 죽은 뒤에 미쓰비시는 정부의 강력한 비호 속에 군수품 수송을 독점하고 해운업, 조선업, 중공업, 관산업에서 급속도로 몸집을 불리며 군수재벌로 발 돋움 했다. 동상으로 남은 이창업자는 회사의 성장에 수많은 조선인의 피와땀이 섞여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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