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역사문화기행 (2006~) <여행지>/5.서울역사박물관

11.청계천박물관 특별전

동방박사님 2018. 10. 19.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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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보호

세운상가만 단속하면 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세운상가 일대는 음란물의 유통에 있어 중추적인 공간 이었다, 단속은 1950년대, 60년대 미성년자 보호법, 외국간행물 수입, 배포에 관한 법률을 근거로 불량서적 단속에서 시작되었다. 70년대는 학생운동권, 용공사범들에 의한 불법서적과 음란서적의 단속이 "불량서적"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단속의 대상이 되었다. 세운상가는 "이곳을 찿을 때마다 청년들이 다가와 "비디오를 보고 가라"며 손을 잡아 그는 곳이었다."그리고 "헌책 사러들어온 중학생들에게도 도색잡지를 보여주는 몰지각한 어른들이 있는세상" 이기도 했다.



다시 세운, 기대되는 미래

1960년대에서 80년대까지 경제의 동력은 갖추었지만 문화에개한 이해와 국가적 인시고 뒤떨어졌던 그때. 우리에게는 청계천이 있었습니다. 세운상가 일대를 지나며 수집하고 목격했던 새로운 문화, 그에 대한 설렘이 현재의 대중문화를 만드는 믿거름이 되었습니다. 지금의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은 연결망으로 순식간에 대중문화가 전달되는 시대에 와 있습니다. 서양의 대중문화보다 그역사가 짧았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속도로 이룩한 것입니다. 청계천, 세운상가는 도심재생의 사업으로 다시, 세운상가로의 웅비 雄飛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또 어떤 동력을 장착하고 서울의 문화를 주도하게 될지 그 미래가 기대됩니다.


라디오의 시대

1960년대는 라디오의 시대였다. 라디오를 통해 흐르는 음악은 곧 유행이 되었고, 문화방송 mbc 1961. 동아방송DBS 1963.   라디오서울 RSB1964. 후에 동양라디오 TBC로 변경 등 민간 상업 라디오 방송사가 잇달아 설립됐다. 라디오 방송사는 음악프로그램 청취율 경쟁에 돌입했고 오락매체로서 라디오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음악방송DJj 이름으로 만들어진 편집음반들이 인기가 대단했다. 이글은 모두 빽으로 제작되었다. 










세운상가. 구름다리릏 찿는 사람들

1960년대부터 80년대 까지 독재정권에 의한 경제적발전과 그에 따른 문화적 발전이 이루어졌다. 급속한 경제발전 덕분에 대중문화 매체의 보급역시 신속하게 이루어졌고 전에 없는 빠른 발전을 이루게 된다. 1960년대 후반에는 라디오 보급을 시작으로 1970년대를 지나 80년대까지 대중문화에 대한 욕구는 크게 늘어났다. 특히 세운상가 주변은 기술력을 기반으로 한 미디어매체의 생산기지 였다. 특히 빽판, 비디오테이프, 외설잡지, 전자오락등의 복제와 유통에서는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주머니 가벼운 이들은 너나 할것 없이 구름다리를 찿아 나셨다. 






해적판

해적판은  저작권자의 허락없이 불법으로 복제되어 판매유통되는 음반이나 서적이나 테이프, 소프트웨어 등을 말한다. 그중 빽판은 특히 LP판을 한정하는 말로 은밀히 뒤에서 제작되어 "Back" 에서 기인 했다는 설과 반목해서 복사하여 해상도가 떨어져서 하얗게 되어 백 白판에서 나왔다는 설이 있다. 우리나라 해적판은 50년대부터 만들어 졌으며 80년대 최전성기를 맞이한다. 






긴급조치

1970년대 민주화운동이 거세게 일어나자 탄압하기 위한 조치로 긴급조치 제9호가 시행되었다. 학생, 노동운돈 등을 봉쇄하는 장치였지만 표면적으로는 "건전한 문화예술활동을 ㄱ켸속지우너하고 사회기강을 해치고 국민 정신을 좀먹는 저속하고 퇴폐적인 일부 대중예술을 과감히 정화하여, "건전한 국민정신과 사회기풍을 진작한다."고 피력하였다. 긴급조치 제9호가 시행 되면서 "무더기'로 금지곡이 양산 되었다. 풍기문란의 단속명분은 대중문화를 위축시켰지만 거꾸로 더 음성적인 시장을 탄탄하게 만들었다. 금지음바은 빽판으로 제작 되었고, 불량도서는 청계천에서 더 은밀히 거래되었다.








풍기문란

1960년대까지만 해도 아직 대중에 대한 인식은 크지 않았다. 대중문화가 존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대중의 문화를 '문화'라는 용어를 부여하면서까지 인식하지 못하였다. 1970,80년대 들어서 경제발전과 대중문화에 대한인식의 전환이 있을때마다 정권의 혹독한 탄압과 검열이 뒤따랐다. 이 시기 국가의 규제와 통제 정책은 상상을 초월해서 방송, 영화, 만화, 대중가요 등 여러 영역에서 행해진 강제적인 탄압은 매우 삼엄했다. 불량도서의 규제는 도색잡지의 음란 뿐 아니라 용공과 결합하여 그 범위가 매우 크고 집요한 탄압이 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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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운상가는 시내였지만 시내가 아닌 거 같았다.

 그곳에 가면 오히려 막후한 기분이 들었다

... 무었보다도 인상적인 풍경은

 "플레이보이"와" 허슬러"등 서양포르노 잡지의 표지를 붙여놓은 입간판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아저씨들 이었다. - 김봉석의 [ 안의 음란마귀] 중에서



오락실 -여명기

일본의 비디오게임이나 오락실용 기판을 카피하여 수출하고, 국내  전자시장의 한 축을 담당했었던 곳 역시 세운상가였다. 보통게임을 카피하여 원판이 1/4도 안되는 싼 판에 공급하였다. 1990년대까지도 지적재산권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였기에 별다른 단속도 없었다. 오락실에서 이용했던 대부분의 아케이드 게임 기판은 세운상가에서 만든 복제품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