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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말이 하나의 다짐이 된 시대,
우리는 사회적 아픔과 부조리를 제대로 기억하고 있을까?
한국 사회의 민낯을 드러낸 열두 사건을 되짚어 보다!
2014년 세월호가 침몰해 304명의 탑승객이 숨졌을 때도, 2018년 하청업체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 씨가 기계에 끼어 숨지는 사고가 있었을 때도, 2020년 트랜스젠더로서 자신을 드러낸 변희수 하사가 강제 전역 이후 극단적 선택을 했을 때도 수많은 사람들이 읊었던 말이 있다. “잊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떠한 충격적인 일도 일상의 쳇바퀴를 굴리며 금세 잊어버린다. 그 결과는 고통의 무한 반복이다. 대개는 힘없는 개인이 떠안아야 할 고통이기에, 예견된 비극이나 다름없다.
『민낯들』은 우리가 잊지 않겠다고 수없이 다짐했던 열두 가지 사건을 담은 책이다. 故 변희수, 故 최진리, 故 최숙현, 故 김용균, 故 성북 네 모녀, 故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명의 문제적 죽음을 응시하고(1부), 코로나19 팬데믹, n번방 사건, 세월호 참사, 낙태죄 폐지, 박근혜 탄핵, 조국 사태 등 대형 재난 및 이슈를 되짚으며 한국 사회의 민낯을 폭로한다(2부).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선언만 돌림노래처럼 반복하면서 정작 놓친 질문은 무엇인지, 이 책은 진지하게 묻는다.
한국 사회의 민낯을 드러낸 열두 사건을 되짚어 보다!
2014년 세월호가 침몰해 304명의 탑승객이 숨졌을 때도, 2018년 하청업체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 씨가 기계에 끼어 숨지는 사고가 있었을 때도, 2020년 트랜스젠더로서 자신을 드러낸 변희수 하사가 강제 전역 이후 극단적 선택을 했을 때도 수많은 사람들이 읊었던 말이 있다. “잊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떠한 충격적인 일도 일상의 쳇바퀴를 굴리며 금세 잊어버린다. 그 결과는 고통의 무한 반복이다. 대개는 힘없는 개인이 떠안아야 할 고통이기에, 예견된 비극이나 다름없다.
『민낯들』은 우리가 잊지 않겠다고 수없이 다짐했던 열두 가지 사건을 담은 책이다. 故 변희수, 故 최진리, 故 최숙현, 故 김용균, 故 성북 네 모녀, 故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명의 문제적 죽음을 응시하고(1부), 코로나19 팬데믹, n번방 사건, 세월호 참사, 낙태죄 폐지, 박근혜 탄핵, 조국 사태 등 대형 재난 및 이슈를 되짚으며 한국 사회의 민낯을 폭로한다(2부).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선언만 돌림노래처럼 반복하면서 정작 놓친 질문은 무엇인지, 이 책은 진지하게 묻는다.
목차
프롤로그 - 여기를 보자는데 저기를 보는 사람들
1부, 말줄임표
죽음도 별수 없다
첫 번째 민낯, 살고 싶다는데도 별수 없다
― 성 소수자는 여기에 있다, 故 변희수
두 번째 민낯, 심장이 찢어져도 별수 없다
― 말이 칼이 될 때, 故 최진리
세 번째 민낯, 맞아도 별수 없다
― 때려 주는 선생이 진짜라는 이들에게, 故 최숙현
네 번째 민낯, 떨어져도, 끼여도, 깔려도 별수 없다
― 너는 나다, 故 김용균
다섯 번째 민낯, 일가족이 죽어도 별수 없다
― 가난이 죄책감이 되지 않기를, 故 성북 네 모녀
여섯 번째 민낯, 국가를 믿어도 별수 없다
― 내 몸이 증거다, 故 가습기 살균제 사망자 ○○○○명
2부, 도돌이표
우리는 망각에 익숙하다
일곱 번째 민낯, 우리는 더 날카로워질 것이다
― 모두 같은 배에 타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여덟 번째 민낯, 우리는 또 둔감해질 것이다
― 관대한 판결을 먹고 자랐다, n번방 사건
아홉 번째 민낯, 우리는 계속 수군댈 것이다
― 나는 출산의 도구가 아니다, 낙태죄 폐지
열 번째 민낯, 우리는 끝없이 먹먹할 것이다
― 기억과 책임 그리고 약속, 세월호 참사
열한 번째 민낯, 우리는 언제나 잊는다
― 망각에 맞서는 기억의 투쟁, 박근혜 대통령 탄핵
열두 번째 민낯, 우리는 역시나 순진하게 믿는다
― 공정하다는 착각, 조국 사태
에필로그 - 지금 여기는, 우리의 결과다
1부, 말줄임표
죽음도 별수 없다
첫 번째 민낯, 살고 싶다는데도 별수 없다
― 성 소수자는 여기에 있다, 故 변희수
두 번째 민낯, 심장이 찢어져도 별수 없다
― 말이 칼이 될 때, 故 최진리
세 번째 민낯, 맞아도 별수 없다
― 때려 주는 선생이 진짜라는 이들에게, 故 최숙현
네 번째 민낯, 떨어져도, 끼여도, 깔려도 별수 없다
― 너는 나다, 故 김용균
다섯 번째 민낯, 일가족이 죽어도 별수 없다
― 가난이 죄책감이 되지 않기를, 故 성북 네 모녀
여섯 번째 민낯, 국가를 믿어도 별수 없다
― 내 몸이 증거다, 故 가습기 살균제 사망자 ○○○○명
2부, 도돌이표
우리는 망각에 익숙하다
일곱 번째 민낯, 우리는 더 날카로워질 것이다
― 모두 같은 배에 타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여덟 번째 민낯, 우리는 또 둔감해질 것이다
― 관대한 판결을 먹고 자랐다, n번방 사건
아홉 번째 민낯, 우리는 계속 수군댈 것이다
― 나는 출산의 도구가 아니다, 낙태죄 폐지
열 번째 민낯, 우리는 끝없이 먹먹할 것이다
― 기억과 책임 그리고 약속, 세월호 참사
열한 번째 민낯, 우리는 언제나 잊는다
― 망각에 맞서는 기억의 투쟁, 박근혜 대통령 탄핵
열두 번째 민낯, 우리는 역시나 순진하게 믿는다
― 공정하다는 착각, 조국 사태
에필로그 - 지금 여기는, 우리의 결과다
책 속으로
발 딛고 서 있는 땅이 흔들리고 있는데, 땅의 성가신 일들이 창공의 고요함과 무탈함에 침범하는 것을 어떻게든 막겠다는 결의가 넘치는 세상이다. 이를테면 “내 집 대문 앞에 장애인 특수학교가 웬 말이냐”와 같은 현수막이 당당하게 붙어 있는 것처럼. 혐오가 표현의 자유처럼 포장된 곳에선 이동권을 보장하라며 지하철에서 시위하는 장애인에게 “출근 시간을 방해 말라!”면서 화를 내는 이들이 있을 수밖에 없다. 희망이 없는 여기를 보자는데, 절망을 외면하는 저기만 보기 때문이다.
---「프롤로그」중에서
사람들은 선수가 금메달을 거머쥘 때마다 환호했다. 언론은 수십 개의 특집 기사를 작성했고, 뉴스에는 선수의 초등학교 담임선생님까지 등장하여 훈훈한 이야기를 하기 바쁘다. 금메달리스트는 여러 곳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기업의 광고 모델이 되곤 한다. 한순간에 인생 역전의 주인공이 된 운동선수의 모습은 다른 선수들에겐 ‘지금의 부당함’을 참아야 하는 중요한 이유가 되어 버린다. 방황할 때 ‘때려 주는’ 스승이 참스승이라고 억지로 생각하면서 버티게 한다. 반복되다 보면 정말로 그런 줄 착각하고 더한 일에도 개의치 않는다. 금메달만 따면 ‘한 방에’ 인생이 달라질 테니까.
---「세 번째 민낯, 맞아도 별수 없다」중에서
사람이 기계 속으로 말려 들어가 몸이 분리되어 사망한다. 사람 몸이 레고 블록이 아니니, 실제 현장은 ‘분리’라는 단어로 온화하게 표현할 수준이 아닐 거다. 그런 일이, 조선 시대도 아니고 2018년도에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이자 와이파이가 안 터지는 곳이 없다는 국가에서 버젓이 발생했다. 지문으로 입출금을 하는 디지털 세상에, 기계가 사람의 위험을 감지하고 자동으로 멈추는 시스템 따위는 없었다. 끔찍한 건 이런 사고가 비일비재하다는 것이고, 이 사고는 좀 더 끔찍했기에 사회적 관심으로 이어졌을 뿐이다. 여기서 사회를 보는 두 갈래가 선명하게 구분된다. 누구는 이 상황을 그대로 내버려 둘 것인가 묻지만, 누구는 어쩔 수 없다면서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이 두 갈래는 그저 다양한 시선이라고 할 수 없다. 전자가 옳고, 후자는 틀렸다. 전자가 불가능한 사회, 후자를 유도하는 사회 모두 나쁜 사회다.
---「네 번째 민낯, 떨어져도, 끼여도, 깔려도 별수 없다」중에서
죽는 마당에 공과금이라니, 삶을 포기하는 순간까지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이웃으로서의 도리를 포기하지 않았던 셈이다. 세 모녀의 메모는 복지를,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인생 밑바닥까지 추락한 사람이라고 인정받는 사람들에게 밥 굶지 말라고 용돈 주는 정도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나 다름없었다. 서류만으로, 종이 위에 찍힌 몇 가지 숫자만으로 복지가 완성된다는 건 착각이라는 거다. 어떤 가난은 서류 몇 장으로, 단순한 숫자만으로 증명하기 힘들다. 송파구 세 모녀는 눈앞의 평범한 사람들이 실제로는 위태로운 상황일 수도 있음을, 시스템이 이들의 위기를 포착하지 못할 수도 있음을 깨닫게 했다.
---「다섯 번째 민낯, 일가족이 죽어도 별수 없다」중에서
언론에서는 “초유의”, “전례 없이” 등의 표현으로 묘사하면서 n번방 사건을 우주에서 온 악인들의 소행처럼 다루었지만, 우리는 독버섯이 땅에서 자랐음을 명심해야 한다. 그들이 특별히 악하게 태어나지 않았다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만, 보통의 세계에서는 마주할 수 없는 악마가 아니라 출석부에 흔히 등장하는 평범한 아무개라는 걸 받아들여야만 지금껏 우리 사회가 디지털 성범죄에 소극적으로 대응했다는 걸 인정할 수 있다. 한쪽을 변태라 취급하면, 역설적으로 다른 한쪽의 문제에는 둔감해진다. n번방을 만들고 운영한 이들은 물론이고 문을 열고 들어온 이들까지, 모두가 한국의 문화 속에서 성장했다. 특별한 DNA 구조를 지니지 않았다.
---「여덟 번째 민낯, 우리는 또 둔감해질 것이다」중에서
‘폭식투쟁’으로 알려진 이 사건은 여러모로 비판을 많이 받았다. 그들을 악마, 패륜 등으로 묘사한 글들이 쏟아졌다. 저들을 대한민국과 어울리지 않는 일부라고 말하고 싶은 것 같았다. 과연 그럴까? 내가 느낀 먹먹함은 단지 그들의 기행을 목격한 불편함이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추모한다는 것의 한계와 슬픔에 공감한다는 것의 미흡함을 다시 마주했기에 느껴지는 몸서리였다. 그들 위로 ‘우리’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추모의 감정을 학습하지 못한 설익은 모습들 말이다. ‘지하철 투신으로 출근길 혼란’이라는 표현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우리들 말이다. 학교에서 친구 누가 자살을 한들 ‘동요하지 말고 공부나 하라’는 소리를 들으며, 그냥 덮고 넘어가기에 급급했던 우리들 말이다. 죽은 사람 이야기가 몇 번 반복되면 ‘산 사람은 살아야되지 않냐’면서 추모를 지겨움의 프레임에 가두는 ‘구조적인’ 감정 상태로부터 누가 자유로운가. 폭식투쟁은 그 토양 위에서 자란 괴상한 나무였을 뿐이다.
---「열 번째 민낯, 우리는 끝없이 먹먹할 것이다」중에서
우리는 일곱 번 넘어져서 결국 다시 일어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껐다. 우리의 ‘정의’ 관념은 이런 적자생존의 법칙 위에서 빚어졌다. 사람들은 ‘정의’를 모두가 동등하게 실질적으로 평등한 권리를 누린다는 측면이 아니라, 노력의 크기에 따라 각자 도달하는 지점이 불가피하게 달라지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결과가 불평등해도 노력한 만큼이니 공정하다 여겼다. 자본주의의 성장과 함께 형태를 갖춘 근대 공교육은 ‘공정한 불평등’ 논리를 부단히 가르쳤다. 계급과 상관없이 누구나 학교를 다니니 기회는 평등해졌다고 포장했다. 그러니 시험 결과에 승복하라고 주술을 건다. “결과로 증명하라!”라는 말이 부유하는 세상에선, 결과를 의심하는 건 공정하지 않다고 여겨졌다. 조국 사태는 이 판이 깨진 게 아니다. 이 판의 정밀함, 견고함, 그리고 무서운 폭력성이 고스란히 드러난 일이었다. 불평등은 자본주의사회의 부작용 정도가 아니라, 매우 정교한 시스템이었던 것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매일 속고 있다.
---「프롤로그」중에서
사람들은 선수가 금메달을 거머쥘 때마다 환호했다. 언론은 수십 개의 특집 기사를 작성했고, 뉴스에는 선수의 초등학교 담임선생님까지 등장하여 훈훈한 이야기를 하기 바쁘다. 금메달리스트는 여러 곳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기업의 광고 모델이 되곤 한다. 한순간에 인생 역전의 주인공이 된 운동선수의 모습은 다른 선수들에겐 ‘지금의 부당함’을 참아야 하는 중요한 이유가 되어 버린다. 방황할 때 ‘때려 주는’ 스승이 참스승이라고 억지로 생각하면서 버티게 한다. 반복되다 보면 정말로 그런 줄 착각하고 더한 일에도 개의치 않는다. 금메달만 따면 ‘한 방에’ 인생이 달라질 테니까.
---「세 번째 민낯, 맞아도 별수 없다」중에서
사람이 기계 속으로 말려 들어가 몸이 분리되어 사망한다. 사람 몸이 레고 블록이 아니니, 실제 현장은 ‘분리’라는 단어로 온화하게 표현할 수준이 아닐 거다. 그런 일이, 조선 시대도 아니고 2018년도에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이자 와이파이가 안 터지는 곳이 없다는 국가에서 버젓이 발생했다. 지문으로 입출금을 하는 디지털 세상에, 기계가 사람의 위험을 감지하고 자동으로 멈추는 시스템 따위는 없었다. 끔찍한 건 이런 사고가 비일비재하다는 것이고, 이 사고는 좀 더 끔찍했기에 사회적 관심으로 이어졌을 뿐이다. 여기서 사회를 보는 두 갈래가 선명하게 구분된다. 누구는 이 상황을 그대로 내버려 둘 것인가 묻지만, 누구는 어쩔 수 없다면서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이 두 갈래는 그저 다양한 시선이라고 할 수 없다. 전자가 옳고, 후자는 틀렸다. 전자가 불가능한 사회, 후자를 유도하는 사회 모두 나쁜 사회다.
---「네 번째 민낯, 떨어져도, 끼여도, 깔려도 별수 없다」중에서
죽는 마당에 공과금이라니, 삶을 포기하는 순간까지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이웃으로서의 도리를 포기하지 않았던 셈이다. 세 모녀의 메모는 복지를,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인생 밑바닥까지 추락한 사람이라고 인정받는 사람들에게 밥 굶지 말라고 용돈 주는 정도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나 다름없었다. 서류만으로, 종이 위에 찍힌 몇 가지 숫자만으로 복지가 완성된다는 건 착각이라는 거다. 어떤 가난은 서류 몇 장으로, 단순한 숫자만으로 증명하기 힘들다. 송파구 세 모녀는 눈앞의 평범한 사람들이 실제로는 위태로운 상황일 수도 있음을, 시스템이 이들의 위기를 포착하지 못할 수도 있음을 깨닫게 했다.
---「다섯 번째 민낯, 일가족이 죽어도 별수 없다」중에서
언론에서는 “초유의”, “전례 없이” 등의 표현으로 묘사하면서 n번방 사건을 우주에서 온 악인들의 소행처럼 다루었지만, 우리는 독버섯이 땅에서 자랐음을 명심해야 한다. 그들이 특별히 악하게 태어나지 않았다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만, 보통의 세계에서는 마주할 수 없는 악마가 아니라 출석부에 흔히 등장하는 평범한 아무개라는 걸 받아들여야만 지금껏 우리 사회가 디지털 성범죄에 소극적으로 대응했다는 걸 인정할 수 있다. 한쪽을 변태라 취급하면, 역설적으로 다른 한쪽의 문제에는 둔감해진다. n번방을 만들고 운영한 이들은 물론이고 문을 열고 들어온 이들까지, 모두가 한국의 문화 속에서 성장했다. 특별한 DNA 구조를 지니지 않았다.
---「여덟 번째 민낯, 우리는 또 둔감해질 것이다」중에서
‘폭식투쟁’으로 알려진 이 사건은 여러모로 비판을 많이 받았다. 그들을 악마, 패륜 등으로 묘사한 글들이 쏟아졌다. 저들을 대한민국과 어울리지 않는 일부라고 말하고 싶은 것 같았다. 과연 그럴까? 내가 느낀 먹먹함은 단지 그들의 기행을 목격한 불편함이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추모한다는 것의 한계와 슬픔에 공감한다는 것의 미흡함을 다시 마주했기에 느껴지는 몸서리였다. 그들 위로 ‘우리’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추모의 감정을 학습하지 못한 설익은 모습들 말이다. ‘지하철 투신으로 출근길 혼란’이라는 표현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우리들 말이다. 학교에서 친구 누가 자살을 한들 ‘동요하지 말고 공부나 하라’는 소리를 들으며, 그냥 덮고 넘어가기에 급급했던 우리들 말이다. 죽은 사람 이야기가 몇 번 반복되면 ‘산 사람은 살아야되지 않냐’면서 추모를 지겨움의 프레임에 가두는 ‘구조적인’ 감정 상태로부터 누가 자유로운가. 폭식투쟁은 그 토양 위에서 자란 괴상한 나무였을 뿐이다.
---「열 번째 민낯, 우리는 끝없이 먹먹할 것이다」중에서
우리는 일곱 번 넘어져서 결국 다시 일어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껐다. 우리의 ‘정의’ 관념은 이런 적자생존의 법칙 위에서 빚어졌다. 사람들은 ‘정의’를 모두가 동등하게 실질적으로 평등한 권리를 누린다는 측면이 아니라, 노력의 크기에 따라 각자 도달하는 지점이 불가피하게 달라지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결과가 불평등해도 노력한 만큼이니 공정하다 여겼다. 자본주의의 성장과 함께 형태를 갖춘 근대 공교육은 ‘공정한 불평등’ 논리를 부단히 가르쳤다. 계급과 상관없이 누구나 학교를 다니니 기회는 평등해졌다고 포장했다. 그러니 시험 결과에 승복하라고 주술을 건다. “결과로 증명하라!”라는 말이 부유하는 세상에선, 결과를 의심하는 건 공정하지 않다고 여겨졌다. 조국 사태는 이 판이 깨진 게 아니다. 이 판의 정밀함, 견고함, 그리고 무서운 폭력성이 고스란히 드러난 일이었다. 불평등은 자본주의사회의 부작용 정도가 아니라, 매우 정교한 시스템이었던 것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매일 속고 있다.
---「열두 번째 민낯, 우리는 역시나 순진하게 믿는다」중에서
출판사 리뷰
“안타까운데…” “원망스러운데…”
사회는 변하지 않으니 어쩔 수 없다고?
틀렸다! 사회는 ‘더 나쁘게’ 변했다.
『민낯들』은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선언이 말뿐인 사회를 잠시 멈춰 세운다. 사회학자인 오찬호는 때마다 선언을 반복하면서 아픔을 소비하고 흘려버리는 우리의 민낯을 깊숙이 들여다본다. “사회가 원망스러운데, 딱 거기까지”이고, “안타까운데, 딱 거기까지”에 그치는 무신경함에 막막함과 좌절감이 교차하는 것을 느낀다. 이렇게 우물쭈물 아픔을 흘려보내는 사이, 거친 혐오와 편견의 언어가 파고드는 모습이 저자의 눈에 포착된다. “그것만 중요해?” “왜 나쁜 것만 말해?” “좀 긍정적인 이야기를 하면 안 될까?” “너만 힘들어? 유난 떨지 마.” “자기 업보지 뭐….” 사람들은 손쉽게 분노하고 언제 그랬냐는 듯 또 잊는다. 한 사건은 더 큰 다른 사건에 묻히고, 예전 사건은 따끈따끈한 최근의 사건에 가려 잊히기를 반복한다.
사회가 변하지 않으니, 연약한 개인들의 고함 소리는 번번이 벽에 가로막힌다. 故 변희수 하사의 황망한 죽음 이후에도 성 소수자는 여전히 자신의 성 정체성을 드러낼 수 없는 사회 속에서 생존을 고민해야 한다. 가수 故 최진리의 죽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인터넷 공간의 악플은 점점 더 악랄하게 진화해 가고 있다. 故 김용균 씨의 산재 사망 사고 이후에도 목숨을 맡긴 채 아슬아슬하게 일해야 하는 하청업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처지는 변함이 없다. 우리는 지나치게 쉽게 망각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지금은 실감이 나지 않겠지만 코로나19 팬데믹 사태가 끝나고 언젠가 마스크를 벗고 마음껏 숨 쉴 수 있는 때가 오면, 우리는 팬데믹에 대한 기억을 지워 갈 것이다. 사회의 약한 고리가 어떻게 무너졌으며, 혐오와 증오가 어떻게 일상화되었는지 깡그리 잊을 것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열두 사건은 우리 사회에 던져진 위기 신호나 다름없다. 이는 전근대적인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사회, 각자도생의 철학이 만연한 사회의 당연한 귀결이다. 암담한 것은 개인의 끝 모를 고통이 폭발 직전까지 누적된 상태인데도, 언젠가는 나아지리라는 흐뭇한 미래 전망을 전혀 할 수 없다는 점이다. 절망도 잦으면 보는 사람의 감각이 무뎌지는 걸까? 사람들의 반응도 단편적인 원망스러움과 안타까움을 내비치는 것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저자는 그 안타까움과 원망스러움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자고 이야기한다. 우리가 이 괴상한 일들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는다면 사회는 그저 제자리걸음인 수준에서 끝나지 않고, 자꾸만 뒷걸음질 치며 퇴행할 것이기 때문이다.
‘살아남는 법’이 부유하는 사회에서는
‘살아남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없다.
그 끝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1부 “말줄임표”는 여섯 가지 안타까운 죽음을 다룬다. 한 개인이 죽음으로 떠밀려 갈 때까지 사회가 아무런 관심도 가지지 않고 수수방관한 것이기에, 이들의 죽음은 지극히 사회적이다. 인간 존엄이 보장되지 않는 상황에서 고통스럽게 생을 이어가다 불현듯 사고를 당하거나 사망당한 이들은 ‘사회적 타살’의 피해자나 다름없다.
故 변희수. 정상과 비정상으로 사람을 구분 지으며 성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당연시 여기는 한국 사회의 희생자이다. 故 최진리. 인터넷의 익명성 뒤에 숨어 혐오 표현을 일삼는 악플러들에 의해 난도질당해 죽음으로 내몰린 것이나 다름없다. 故 김용균. 기업의 비용 절감을 위한 하청이라는 시스템 속에서 ‘정기적으로’ 발생하는 끔찍한 사고사의 피해자이다. 故 최숙현. 폐쇄적 체육계의 전형적인 폭력 사건에 휘말려, 그나마 존재하는 보호 장치도 소용없이 주변인들의 방관 속에 끝내 목숨을 잃게 되었다. 故 성북 네 모녀. 선별적 복지의 사각지대에서 발생한 벼랑 끝 죽음이다. 故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명. 현재까지 몇 명인지조차도 정확히 파악되지 않는 대(對)국민 살인사건의 무고한 피해자들로, 국가의 직무 유기와 기업의 오만함 속에서 스러진 목숨들이다.
1부의 부제는 “죽음도 별수 없다”이다. 어쩌다가 한국 사회는 죽음도 별수 없는 차갑고 냉혹한 얼굴을 하게 되었을까? 저자는 무고한 이들의 죽음에도 심드렁한 우리 앞에 피해자의 아픔을 꺼내 놓고, 그들의 고통이 개인 영역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끝없이 환기한다. “흔하기에, 이런 안타까운 죽음을 그저 별수 없는 세상의 한 조각 정도로 이해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구조가 이런 흔함을 상시적으로 등장시키고 있는지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이 책은 우리가 이들의 죽음에 모두 깊이 연루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인권의 사각지대를 찾는 시도를 어떻게든 폄하하려는 편협한 시각, 과격하고 무례한 언행을 멋있다고 여기는 착각,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말이 넘쳐 나는 사회로부터, 그 구조적인 문제로부터 아무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절망을 정확히 절망이라 명명하고 얼버무리지 않는
사회학자 오찬호의 날카로운 문제의식!
“‘여기’가 문제라면, ‘여기부터’ 시작해야 한다.”
2부 “도돌이표”에서는 지난 몇 년간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궜던 대형 재난 및 이슈 여섯 가지를 복기한다. 돌이켜 보자면 그전에도 유사한 사건은 많았으며, 사회적 파장이나 세부 내용은 천차만별일지라도 그때마다 비슷한 논란이 되풀이되었다. 온라인 성범죄는 n번방 사건이 처음이 아니고, 세월호 참사와 같은 대형 참사 역시 잊을 만하면 반복되었다. 전례 없는 공중보건 위기로 꼽히는 코로나19 팬데믹조차도 양극화되어 있는 한국 사회의 민낯을 일거에 드러낸 하나의 계기였을 뿐, 바이러스가 사회를 새로운 위기로 몰아넣은 것이 아니다. 차별과 혐오가 번성할 수밖에 없는 조건이 바이러스 강타 이전에 이미 구축되어 있었다는 뜻이다. 이 책에서 돌이켜 보는 사건들은 사회 곳곳에 잠복되어 있던 모순을 백일하에 드러낸 일종의 방아쇠인 셈이다.
저자는 그 방아쇠가 증폭시킨 모순이 무엇인지, 여섯 사건의 이면을 하나하나 들춰 낸다. 어떤 사건의 밑바닥에는 ‘살아남는 자’에게만 주목하고 ‘살아남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없는 냉혹한 사회의 모순이 은폐되어 있음을 보여 주고, 다른 사건의 뿌리에는 성차별적 시선이 굳건히 자리하고 있음을 지적하며, 또 다른 사건의 깊숙한 곳에는 불평등한 시스템의 무서운 폭력성이 도사리고 있음을 꼬집는다. 이들 사건은 순서대로 코로나19 팬데믹, 낙태죄 폐지, 조국 사태를 일컫지만, 그 자초지종을 정확히 따져 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언급된 모순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언제고 우리 앞에 다른 모습으로 찾아와 사회를 시끄럽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2부의 부제는 “우리는 망각에 익숙하다”이다. 저자가 사건의 외피가 아니라 그 안에 숨어 있는 구조적 모순과 부조리를 되씹고 반추하는 이유가 부제에 잘 나타나 있다. 부제가 지적하는 것처럼, 우리는 아무리 나쁜 뉴스도 비일상적인 불행도 쉽게 잊은 채 과오를 반복한다. 코로나19 팬데믹을 고통스럽게 통과하면서도 푸석해진 공동체에 대한 별다른 문제 제기 없이 서로에게 “더 날카로워질 것”이고, n번방 사건을 겪고서도 온라인 성범죄에 “또 둔감해질 것”이며, 낙태죄 폐지 이후에도 낙태를 두고서 “계속 수군댈 것”이며, 세월호 참사 이후에도 또 다른 참사를 되풀이하며 “끝없이 먹먹할 것”인 우리에게, 저자는 이렇게 당부한다.
“무너지지 말아야 한다. 이 사회는 사람이 만든 거고 그걸 바꾸는 것도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마주하기 싫어도 마주해야 변화가 가능하다. 일단 화들짝 놀라고, 아직도 이런 일이 있냐고 탄식하고, 피해자를 추모하고, 재발 방지를 모색하는 고민의 연속만이 사회를 움직인다.”
사회는 변하지 않으니 어쩔 수 없다고?
틀렸다! 사회는 ‘더 나쁘게’ 변했다.
『민낯들』은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선언이 말뿐인 사회를 잠시 멈춰 세운다. 사회학자인 오찬호는 때마다 선언을 반복하면서 아픔을 소비하고 흘려버리는 우리의 민낯을 깊숙이 들여다본다. “사회가 원망스러운데, 딱 거기까지”이고, “안타까운데, 딱 거기까지”에 그치는 무신경함에 막막함과 좌절감이 교차하는 것을 느낀다. 이렇게 우물쭈물 아픔을 흘려보내는 사이, 거친 혐오와 편견의 언어가 파고드는 모습이 저자의 눈에 포착된다. “그것만 중요해?” “왜 나쁜 것만 말해?” “좀 긍정적인 이야기를 하면 안 될까?” “너만 힘들어? 유난 떨지 마.” “자기 업보지 뭐….” 사람들은 손쉽게 분노하고 언제 그랬냐는 듯 또 잊는다. 한 사건은 더 큰 다른 사건에 묻히고, 예전 사건은 따끈따끈한 최근의 사건에 가려 잊히기를 반복한다.
사회가 변하지 않으니, 연약한 개인들의 고함 소리는 번번이 벽에 가로막힌다. 故 변희수 하사의 황망한 죽음 이후에도 성 소수자는 여전히 자신의 성 정체성을 드러낼 수 없는 사회 속에서 생존을 고민해야 한다. 가수 故 최진리의 죽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인터넷 공간의 악플은 점점 더 악랄하게 진화해 가고 있다. 故 김용균 씨의 산재 사망 사고 이후에도 목숨을 맡긴 채 아슬아슬하게 일해야 하는 하청업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처지는 변함이 없다. 우리는 지나치게 쉽게 망각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지금은 실감이 나지 않겠지만 코로나19 팬데믹 사태가 끝나고 언젠가 마스크를 벗고 마음껏 숨 쉴 수 있는 때가 오면, 우리는 팬데믹에 대한 기억을 지워 갈 것이다. 사회의 약한 고리가 어떻게 무너졌으며, 혐오와 증오가 어떻게 일상화되었는지 깡그리 잊을 것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열두 사건은 우리 사회에 던져진 위기 신호나 다름없다. 이는 전근대적인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사회, 각자도생의 철학이 만연한 사회의 당연한 귀결이다. 암담한 것은 개인의 끝 모를 고통이 폭발 직전까지 누적된 상태인데도, 언젠가는 나아지리라는 흐뭇한 미래 전망을 전혀 할 수 없다는 점이다. 절망도 잦으면 보는 사람의 감각이 무뎌지는 걸까? 사람들의 반응도 단편적인 원망스러움과 안타까움을 내비치는 것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저자는 그 안타까움과 원망스러움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자고 이야기한다. 우리가 이 괴상한 일들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는다면 사회는 그저 제자리걸음인 수준에서 끝나지 않고, 자꾸만 뒷걸음질 치며 퇴행할 것이기 때문이다.
‘살아남는 법’이 부유하는 사회에서는
‘살아남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없다.
그 끝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1부 “말줄임표”는 여섯 가지 안타까운 죽음을 다룬다. 한 개인이 죽음으로 떠밀려 갈 때까지 사회가 아무런 관심도 가지지 않고 수수방관한 것이기에, 이들의 죽음은 지극히 사회적이다. 인간 존엄이 보장되지 않는 상황에서 고통스럽게 생을 이어가다 불현듯 사고를 당하거나 사망당한 이들은 ‘사회적 타살’의 피해자나 다름없다.
故 변희수. 정상과 비정상으로 사람을 구분 지으며 성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당연시 여기는 한국 사회의 희생자이다. 故 최진리. 인터넷의 익명성 뒤에 숨어 혐오 표현을 일삼는 악플러들에 의해 난도질당해 죽음으로 내몰린 것이나 다름없다. 故 김용균. 기업의 비용 절감을 위한 하청이라는 시스템 속에서 ‘정기적으로’ 발생하는 끔찍한 사고사의 피해자이다. 故 최숙현. 폐쇄적 체육계의 전형적인 폭력 사건에 휘말려, 그나마 존재하는 보호 장치도 소용없이 주변인들의 방관 속에 끝내 목숨을 잃게 되었다. 故 성북 네 모녀. 선별적 복지의 사각지대에서 발생한 벼랑 끝 죽음이다. 故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명. 현재까지 몇 명인지조차도 정확히 파악되지 않는 대(對)국민 살인사건의 무고한 피해자들로, 국가의 직무 유기와 기업의 오만함 속에서 스러진 목숨들이다.
1부의 부제는 “죽음도 별수 없다”이다. 어쩌다가 한국 사회는 죽음도 별수 없는 차갑고 냉혹한 얼굴을 하게 되었을까? 저자는 무고한 이들의 죽음에도 심드렁한 우리 앞에 피해자의 아픔을 꺼내 놓고, 그들의 고통이 개인 영역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끝없이 환기한다. “흔하기에, 이런 안타까운 죽음을 그저 별수 없는 세상의 한 조각 정도로 이해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구조가 이런 흔함을 상시적으로 등장시키고 있는지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이 책은 우리가 이들의 죽음에 모두 깊이 연루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인권의 사각지대를 찾는 시도를 어떻게든 폄하하려는 편협한 시각, 과격하고 무례한 언행을 멋있다고 여기는 착각,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말이 넘쳐 나는 사회로부터, 그 구조적인 문제로부터 아무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절망을 정확히 절망이라 명명하고 얼버무리지 않는
사회학자 오찬호의 날카로운 문제의식!
“‘여기’가 문제라면, ‘여기부터’ 시작해야 한다.”
2부 “도돌이표”에서는 지난 몇 년간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궜던 대형 재난 및 이슈 여섯 가지를 복기한다. 돌이켜 보자면 그전에도 유사한 사건은 많았으며, 사회적 파장이나 세부 내용은 천차만별일지라도 그때마다 비슷한 논란이 되풀이되었다. 온라인 성범죄는 n번방 사건이 처음이 아니고, 세월호 참사와 같은 대형 참사 역시 잊을 만하면 반복되었다. 전례 없는 공중보건 위기로 꼽히는 코로나19 팬데믹조차도 양극화되어 있는 한국 사회의 민낯을 일거에 드러낸 하나의 계기였을 뿐, 바이러스가 사회를 새로운 위기로 몰아넣은 것이 아니다. 차별과 혐오가 번성할 수밖에 없는 조건이 바이러스 강타 이전에 이미 구축되어 있었다는 뜻이다. 이 책에서 돌이켜 보는 사건들은 사회 곳곳에 잠복되어 있던 모순을 백일하에 드러낸 일종의 방아쇠인 셈이다.
저자는 그 방아쇠가 증폭시킨 모순이 무엇인지, 여섯 사건의 이면을 하나하나 들춰 낸다. 어떤 사건의 밑바닥에는 ‘살아남는 자’에게만 주목하고 ‘살아남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없는 냉혹한 사회의 모순이 은폐되어 있음을 보여 주고, 다른 사건의 뿌리에는 성차별적 시선이 굳건히 자리하고 있음을 지적하며, 또 다른 사건의 깊숙한 곳에는 불평등한 시스템의 무서운 폭력성이 도사리고 있음을 꼬집는다. 이들 사건은 순서대로 코로나19 팬데믹, 낙태죄 폐지, 조국 사태를 일컫지만, 그 자초지종을 정확히 따져 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언급된 모순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언제고 우리 앞에 다른 모습으로 찾아와 사회를 시끄럽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2부의 부제는 “우리는 망각에 익숙하다”이다. 저자가 사건의 외피가 아니라 그 안에 숨어 있는 구조적 모순과 부조리를 되씹고 반추하는 이유가 부제에 잘 나타나 있다. 부제가 지적하는 것처럼, 우리는 아무리 나쁜 뉴스도 비일상적인 불행도 쉽게 잊은 채 과오를 반복한다. 코로나19 팬데믹을 고통스럽게 통과하면서도 푸석해진 공동체에 대한 별다른 문제 제기 없이 서로에게 “더 날카로워질 것”이고, n번방 사건을 겪고서도 온라인 성범죄에 “또 둔감해질 것”이며, 낙태죄 폐지 이후에도 낙태를 두고서 “계속 수군댈 것”이며, 세월호 참사 이후에도 또 다른 참사를 되풀이하며 “끝없이 먹먹할 것”인 우리에게, 저자는 이렇게 당부한다.
“무너지지 말아야 한다. 이 사회는 사람이 만든 거고 그걸 바꾸는 것도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마주하기 싫어도 마주해야 변화가 가능하다. 일단 화들짝 놀라고, 아직도 이런 일이 있냐고 탄식하고, 피해자를 추모하고, 재발 방지를 모색하는 고민의 연속만이 사회를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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