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역사문화기행 (2006~) <여행지>/5.서울역사박물관

2.개천의 역사

동방박사님 2018. 10. 19. 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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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개천정비

1405년 한양으로 재천도한 태종은 1411년 개거도감 (開渠都監. 1412년 개천도감읋 개칭)을 설치하여 하천 양변에 돌 축대를 쌓고 얕은 곳을 파내려 다리를 선설하도록 했다. 이 물길을 여는 개천공사는 이후 하천의 이름으로도 쓰였다. 개천 정비는 마무리된 후 개천(開天) 북쪽 대로에 시전행랑(市展行廊)을 짓는 공사가 시작 되었다.


세종, 명당수이자 하수로

 세종때인 1444년 개천의 용도를 둘러싸고 논란이 벌어졌다. 이선로李善老가 풍수설을 내새워 명당수인 개천에 더러운 것을 버리지 못하도곡 건의하자. 어효첨漁孝瞻은 개천에 더러운 것을 버릴수 있게 해야 도성 안이 깨끗해진다고 반박했다. 세종은 백성의 편의가 우선이라며 개천의 용도를 하수도로 정했다.


영조, 경진준천 英祖庚辰濬川

영조는 개천 범람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1760년 대대적인 준설공사 [경진준천]에 착수했다.

담당기관으로 준천사를 신설하고 20만명의 인원과 돈35,000꿰미, 살23,000석의 거액을 투입하여 57일만에 공사를 완료했다.개천바닥에는 평평한 돌을 묻어 준설의 기준점으로 삼았다. 준천은 탕평, 균역과 함게 영조의 가장 큰 치적으로 꼽힌다.








백운동천 白雲洞川

백운동천 白雲洞川은 창의문 기슭의 백운동 계곡에서 발원한 물길이다. 개천의 지류중 길이가 가장 길어 개천의 발원지로 삼고있다. 이 물길에는 신교(新橋). 자수궁교(慈壽宮橋). 금천교, 종침교, 송기교 등의 다리가 있다.


웃대 : 진경과 풍류의 명승지

웃대 또는 상촌上村 이란 백운동천과 옥류동천 주변을 포함하는 광통교 윗쪽 상류일대를 말한다. 이 지역은 관청거리인 육조거리와 가까워 서리,녹사등 아전들이 많이 살았다. 웃대의 북쪽, 개천의 발원지와 가까운 곳은 산세가 수려하고 물이 맑아 시인 묵객들이 자주 모였다. 조선 후기에는 특히 중인 계층의 문학이 활발하였는데, 웃대는 이들의 주된 창작 무대였다. 또한 인왕산 일대는 우리산천의 아름다움을 독자적인 화풍으로 담아낸 겸재 정선이 살았던 곳으로 진경산수( 眞景山水) 화풍의 산실 이기도 했다.


중촌 : 백성의 삶을 품은 저잣거리

광통교에서 효경교에 이르는 개천 구간의 남북 지역을 중촌中村 이라 했다. 이일대는 시전행랑市廛行廊과

의금부, 포도청, 도화서, 헤민서 등의 관청들이 밀집해 있었다. 조선후기 개천변은  상업이 발달하고 온갖 문물이 넘쳐나는 활기찬 곳 이었다.시전 상인들과 뒷골목 색주가 色酒家, 세시歲時, 역관 ,화원, 악공 산원算員율사등 기술직 중인들이 모여 살았다. 이로 인해 이지역은 양반 문화와 구별되는 중인 문화의 산실 이었고 조선말기에는 개화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상업의 중심, 운종가 시전과 개천변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 들었다 흩어진다하여 운종가 라 부른 종로일대는 시전전행랑이 설치되어 한양사람들이 일상생활용품을 공급하던 상업의 중심지였다.운종가 중심에 있는 종루 양옆에는 여섯 곳의  큰 시전인 육의전이 있었는데 비단을 취급했던 면전을 비롯하여 면주전 (명주), 면포전(무명).저포전 (모시).지전 (종이)

어물전(생선) 등이었다. 운종가와 이웃한 개천변에는 시전의 상품을 제작해 파는 수공업자들이 모여 사는 동네가 있었는데, 주로 생산되는 상품과 직업에 따라 관자동, 입정동과 같은 지명이 생겼다.


거리 좌우에 늘어서 있는 천간 집에 온갖 물화 산처럼 쌓여 헤아리기 어렵네

비단가게에 싱싱한 생선 도탑게 살쪘으니 갈치. 노아 준치. 쏘가리. 숭어. 붕어. 잉어이네

쌀가게에 쌓인 쌀 반과산 같으니 운자같은 흰밥에 술빛 잔에 가득하네

행상과 좌고 헬 수 없이 많아 자질구레한 물건도 갗추지 않은 것 없네.





개화의 선구자들, 광통교 육교시사

1876년 육교시사가 결성된 뒤 중인문학의 중심지는 중촌으로 이동했다. '육교" 오간수문에서 서쪽으로 6번째 다리인 광통교 廣通橋의 별칭이다. 기술직 중인들의 중심이었던 육교시사는 세계에 관한 새로운 정보를 나누면서 시대의 변화를 모색한 모임이었다. 주요 동인은  강위. 백춘배. 김석준. 배전. 김재옥. 지운영. 변위 등이었다. 대부분 의관. 역관이었던 육교시사 동인들은 직업 특성상 조선말기 사영세력이 밀려오는 상황에서 발 빠른 행보를 보여주었다. 개화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시무상소를 올리거나 직접 우두법을 도입하는 등 북학파와 개화파를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했다. 








아랫대와 성저십리: 아랫사람들이 사는 마을

조선왕조 정부는 동쪽이 낮은 한양의 지형을 고려하여 동대문 주병에 군영을 여러군데 배치했고, 성 밖 들판에는 말목장을 두었다. 효경교에서 오간수문에 이르는 개천 하류 양안지역인 아랫대 또는 하촌下村 에는 이런 이유로 군병 軍兵들이 많이 살았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후 말 목장이 대부분 페쇄되자. 그 자리는 도성민의 부식거리를 공급하기위한 채소밭으로 개간되었다. 병자호란이후 극심한 재정난으로 군병들이 충분한 급료를 주지 못하게 된 정부는 군병들의 상업 활동을 허용했다. 이로 인해 군병 軍兵과 상인 商人이 일체화하는 현상이 일어 났고 아랫대의 배오개는 동대문 밖에서 생산된 채소들이 거래되는 큰 시장으로 발전했다.


훈련원과 배추밭, 왕십리 목마장

동대문 오간순 주변에는 무과시험과 군사훈련을 주관하는 훈련원訓鍊院을 비롯하여 훈련도감의 부속관청인 하도감下都監과 염초청焰硝廳 그리고 어영청御營廳  장용영壯勇營 등 군사시성이 밀집해 있었다. 군병들은 생계를 위해 채소를 재배하거나 각종 수공업품을 만들어 팔기도 했다. 훈련원 주변에서 생산된 배추와 왕십리 일대의 미나리 등이 특히 유명하여 '동부채 칠패어 東部菜 : 동대문의 채소, 남대문의 생선" 이라는 말이 생겨났디. 조선전기 동대문 밖 뚝섬과 살곷이 벌에는 전국최대 규모의 말 목장들이 있었으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점차 도성에 공급할 채소를 재배하는 근교 농업지로 변하였다. 현재 마장동馬場洞 자양동紫陽洞

등의 지명에 말 목장의 유래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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