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 광복과 해외동포의 귀환
1945년 8월15일 한국인들은 식민통치의 억압에서 벗어났다. 해방을 맞은 서울 시민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만세를 부르며 환호했고, 식민도시 "경성'으로 격하되었던 서울은 원래의 이름과 위상을 되찿았다. 하지만 새나라를 건설하는 길은 무척 험난했다.냉전 체제는 한국인을 분열시키는 힘으로 작용했다.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38선을 경계로 한반도는 남북으로 나뉘었고, 결국 1948년8월15일 통일을 이루지 못한 채 남한 단독으로 대한민국정부를 수립했다. 해방직후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인구이동의 거센 물결이 여러 차례 서울을 휩쓸고 지나갔다. 일본인들이 빠져나갔으나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해외에 나가있던 사람들이 전재동포(戰災同胞)가 되어 서울로 밀려 들었고 이북에서 내려온 월남민들 도한 서울로 모여들어 정착했다. 1945년 8.15 광복후 3년간 귀국한 해외동포와 월남한 사람들의 수는 250만명에 달했다.
천변풍경, 전통과 근대의 공존
1930년대에 들어 서양과 일본에서 들어온 다양한 문물들이 관광, 상업, 교통, 유홍문화 전반을 크게 바꿨고 '모던보이" "모던걸" 들이 거리를 활보했다. 청계천변에 살았던 박태원은 1936년 잡지 조광朝光에 소설 [천변풍경]을 연재했다. 그가 이 소설을 연재하던 무렵 청계천 변에는 빨래터, 한약국 포목전 등 조선시대 이래의
전통적 시설들과 이발소, 하숙집, 카페, 식당 등 근대적 시설들이 공존하고 있었다. 전통과 근대는 이들 시설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의식안에도 공존했다. 1930년대의 청게천변은 전통과 근대가 공존하면서 교차하는 공간이었고, 천변 사람들은 이변화에 혼란을 느끼면서도 점차 근대적 생활양식에 익숙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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