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영 미술관
지난 세기는"서화에서 미술로 전환기"였다. 안타깝게도 서양미술이 도래하던 시기가 일제강점기가 겹쳐 미술을 주체적으로 수용하지 못한데서 비롯된 여러가지 문제가 지금 우리 미술계 구석구석에 남아있다. 어느사회분양와 마찬가지로, 지난세기 우리미술계는 맥락을 살필 겨를 없이 서둘러 서양미술과 발맞춰 나가기에 혼신의 힘을 다 기울였다.새로운 것을 쫓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현실과 표현 - 우성 김종영
에술의 목표는 통찰이며 감정의 본질적 생명의 이해이다. 그러나 모든 이해는 추상화를 필요로 한다.
문자에 의한 언어의 추상화는 이 특수한 주제에는 적용이 되지 않는다. 언어는 생명력과 감각성에 대한 우리의 관념을 전달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혼란 시키고 변질 시킨다. 그러나 상징화를 수반하지 않고는 이해란 것이 있을 수 없고 추상화를 수반하지 않는 상징화도 있을 수 없다. 실재에 관한 모든 것은 그것을 표현하고 전달하기 위해서는 실존에서 추상화하지 않으년 안 된다. 실재를 그대로 전달하려는 노력은 무의미한 것이다. 경험 자체가지도 그렇게는 되지 않는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서 조형에술의 사상의 소재를 알고 기법의 이해를 촉진시킨다. 언어를 통해서 에술에 관한 모든 지식을 넓힌다. 한 시대의 에술을 이해하고 그의 정신적 활동에 관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에 관한 저슬이 있어야한다.
지난 세기는 '서화에서 미술로의 전환기"였다. 안타깝게도 서양미술이 도래하던 시기가 일제강점기와 겹쳐 미술을 주체적으로 수용하지 못한대서 비롯한 여러 문제가 지금도 우리미술계 구석구석에 남아있다. 어는 사회분야와 마찬가지로, 지난 세기 우리 미술게는 맥락을 살필 겨를 없이 서둘러 서양미술과 발맞춰 나가기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 새로운 것을 쫓기에 혈안이 되었다.
우성又誠 김종영선생 (1915~1982)은 이와같은 세태와 등지고 시대의 과업인 동양과 서양 어느쪽에도 치우침 없이 우리의; 입장에서 서양미술을 주체적으로 수용하여 세계 속의 한국미술을 성취하였다. 선생이 소명의식을 갖고 시대의과업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어려서부터 가학家學으로 익힌 한학漢學과 함께 선비라 불린 선생의 고결한 성품에서 비롯되었다. 서두름이란 일절 없었고, 동양과 서양의 미술을 궤뚫어 살폈다.
선생이기에에 완당과 세잔느를 비교하여 시공을 초월해 인류 보편의 진정한 예술가상을 찿아낼 수 있었다. 선생은 그리는 이의 뜻을 중시한 선비들의 그림 그리는 전통과 서양미술의 추상화를 동격으로 살펴 작가의
뜻을 중히하고 소박함과 자연 스러움을 추구하는 "불각不刻 의 미"라는 이십세기 미술사에 길이 남을 예술론을 완성하고 작업에 매진 하였다. 선생은 '한국추상 조가의 선구자'로서 진정한 선각자였다. 선생의 아호우성 又誠이 의미하는 바와 같이 선생은 일생을 "성실하고 또 성실"하게 에술가의 삶을 살았다.
여전히 서양미술을 추종하고, 작품의 금전적 가치를 최수선시 하는현 세테를 보노라면 선생의 삶과 에술의 지향점은 이 시대 우리도 깊이 간직해야 한다. 선생을 살피고 또 살펴야 될 이유이다.
박춘호 김종영미술관 학예실장
김종영의 자각상
김종영은 약 100여점 정도의 많은 양의 자화상을 남겼다. 수채물감으로 그림 구상적인 표현부터 매직이나 붓 등 간편한 재료로 추상적으로 그려낸 그림까지 그 기법과 재료에 제한을 두지 않고 제작했다. 그런데 비해 김종영은 자각상을 단 3점 남겼다. 김종영은 조각가인데, 그가 스스로 그린 자화상이 백여점이나 되는 것과 비교하면 정작 자신의 얼굴을 조각한 3점의 자각상은 매우 귀하다 할 수 있겠다.
예술가들은 자신의 모습이 담긴 작품을 통해 끊임없이 스스로를 되돌아 보고 부단히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의지를 드러낸다고 한다. 김종영 또한 자화상을 그리고 자각상을 조각하는 시간을 통해 당시의 상황과 관련된 스스로의 다짐과 수양을 반복하는 자기성찰의 시간을 가졌다.
전시되어 있는 이 자각상은 1964년에 만들어진 작품이다. 김종영이 남긴 자각상 3점중 첫번재로 제작된 작품으로 다른 2점의 자각상에 비해 비교적 구체적인 형태의 표현으로 제작되었다. 후에 2점의 자각상은 점점 추상적 표현이 강하게 반영된 형태로 제작된다. 이작품을 제작한 시기는 김종영이 우리나이로 50세가 된 해로, 김종영이 에술가로서 본격적으로 도약하려 했던 중요한 시점이었다. 작품의 형태 역시 깊이 고뇌하고 있는 표정으로 제작하여 김종영이 가졌던 에술가로서의 성찰, 앞으로 나아갈 성과의 미래에대한 고민이 작품으로 해석되고 있다.
전시된 김종영의<새>는 한국조각사에서 "최초의추상조각작품"이다.
이 작품은 김종영이 1953년 "제2회 국전 (대한민국 미술대전)에 직접 출품하여 세상에 알려졌다.스스로 브랑쿠시의 작품 <새>와 동일한 제목를 붙여 출품한 사실을 보아, 김종영은 당시 브랑쿠시의 작품을 토대로 형태를 단순화시키는 추상작업을 연구하였음을 직접 밝힌 셈이다.
김종영의<새>는 작품에서 새와 머리라 할 수 있는 부분의 형태가 브랑쿠시의 <새>의 상승하는 듯 한 날렵한 느낌의 형태와는정반대이다. 작품의 형태가 위로 뻗어 오르다가 원형의 마개모양으로 마무리된다.
브랑쿠시의 작품은 그대로 뾰쪽이 하늘을 향해 있다.)
브랑쿠시의 작품이 날아가기 직전의 극적인 순간의 새 형상을 연상시킨다면 김종영의 작품은 균형 잡혀안정적으로 앉아 있는 편안한 모습이 연상된다.
김종영의 조각품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정적이고 차분한 특징이 <새>를 통해서 드러나고 있다. 서양의 미술을 기초하여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명확한 작품의 차이가 보이는 이유는 김종영은 서구 미술을 수용하였지만 본인 만의 특징으로 변형하여 새로운 추상조각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김종영의 이런 태도는 어린시절 아버지의 지도로 익힌 서예의 학습법인 "임서臨書"라는 학습법에서 비롯된 것이다. "임서'란 글씨의 본을 보고 따라 서보면서 서체를 익히는 서예의 학습법을 말한다.
명작을따라해보되, 그것을 완벽히 습득하여 내 것으로 만든 후에야 비로서 본인의 개성으로 더 발전시킨다는데 중요한 의미가 있다. 김종영은 서예를 배우듯, 서양 미술을 수용하여 완벽히자신의 것으로 발전 시켰다. 그렇기 때문에 김종영의 <새> 작품은 김종영의 작품 중에서도 최고의 명자긍로 손 꼽힌다.
이 작품의 원제는 <가족> 이다.
하나의 덩어리 속에 여러 인체가 결집된 형태를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다. 마치 여러인체가 중심을 향해 머리를 맞대고 빙 둘러서 서 있는 모양을 하고 있다. 작품제목과 형태적 해석이 명쾌하게 연관된 작품으로, 대부분의 작품에 제목을 붙이지 않았던 김종영의 조각 중에서는 드문 경우라 할 수 있다.
김종영의 조각과 드로잉은 대부분 단일 인물을 대상으로 하기보다는 군상 (2인이상)이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다.군상이 대상이 되는 경우에는 으레"가족" 이거나 "엄마와 아기"가 모델이었다. 일제시대를 거쳐 6.15동란등 전쟁과 이별의 고통을 겪은 시대를 지나 온 깁동영에게 가족은 그 무었보다도 소중한 대상이 되었다.
1965년 50세
김종영이 50세가 되던해.
그는 1월1일
일기장에 새로운 결심을 남긴다.
"어언가 오십이 되었다.
지금까지의 제작 생활을
실험 과정이었다고 하면
이제부터는종합을 해야 할것이다.
오십이란 나이는 결코 헛된 세월은
아닐 것이고 목표에 한걸음
가까워지는 셈이 될 것이다"
1965년 이응노, 권옥연, 김창렬,
박서보 등과 함께 한국 대표로
"제8회 상파울로 비엔날레'에
작품을 출품하였다.
1976년 62세
1976년 대한민국에술원의 회워으로 선출되었으며,
1978년에는 대한민국 에술원상을 수상한다.
전설ㅣ 1958ㅣ 철
이 작품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철용접조각이 도입되던 시기에 제작된 작품으로 철조각의 정수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작품의 우수성을 인정받아 교과서에도 다수 실린 한국 추상조각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우리나라에 철을 재료로 하는 조각기법은 6..25전쟁이후 도입되었다. 이 시기에 철조각을 시도했던 작가는 매우 극소수에 불과하였다. 그만큼 당시로서는 실험적이고 획기적인 작업방법이었다.
김종여의 이 작품은 제작 후에 서울 대학교에서 전시되었고 그 후에는 서울대하교 조소과 학과장실에 보관. 전시되었다. 학교를 오가는 미술학도들에게 좋은 귀감이 되었던 작품이다. 이후 평창동에 김종영 미술관이 개관하면서 이관되어 지금은 김종영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전설>이란 제목은 그의 오랜 친구이자 동료교수였던 박갑성 선생이 지어준 것이다.
작품의 전체 형태가 김종영 생가 별가의 대문체와 닮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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