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조선시대사 이해 (독서>책소개)/4.조선역사문화

우리가 알아야 할 교과서 밖 조선의 역사

동방박사님 2022. 6. 15. 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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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우리가 몰랐던, 우리가 알아야 할
교과서 밖 조선의 만인만상


우리가 알아야 할 『교과서 밖 조선의 역사』는 이제까지 교과서로만 배웠던 활자 속 조선이 아닌,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이들이 가득한 ‘진짜 조선’을 보여준다. 저자가 엄선한 스물다섯 가지 이야기는 ‘유교가 지배한 조선’ ‘남존여비와 사대주의에 찌든 조선’이라는 편견을 깨부수는 흥미로운 이야기로 가득하다. 조선 시대에는 능력을 인정받은 여자 선비도 있었고, 억울한 사정을 한글로 풀어내 소송에서 이긴 여인도 있었다. 타국의 첩보 문서를 훔쳐 오던 조선판 비밀 요원 역관과 선교하랴 염탐하랴 바빴던 서양 선교사를 보며, 격동하던 시대 국가 간의 치열한 정보 전쟁도 엿볼 수 있다. 중국과 일본을 사로잡은 조선 의학의 보물 『동의보감』, 현대 못지않게 의약이 분업화된 18세기 서울, 역병으로부터 아이들을 구한 선각자 지석영 선생 이야기는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바꾼 코로나의 시대, K-방역의 역사가 유구함을 보여준다.

이 책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임금은 조선 후기 성군으로 유명한 정조인데, 신하들에게 술을 먹이며 즐거워하던 짓궂은 일면과 함께, 홍삼으로 부의 흐름을 바꾼 사업가의 모습도 엿볼 수 있다. 각 장 끝머리에 덧붙인 ‘서양 역사 톺아보기’는 조선과 동시대 서양을 비교해볼 수 있는 유용한 자료다. 교과서 밖으로 뛰어나간,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스물다섯 모습의 조선을 돌아보며 대한민국의 현재와 미래를 가늠해보자.

 

목차

프롤로그

01. 조선 시대 여성은 남성처럼 계급장을 달았다?
흉배를 착용한 조선 여성 이야기
02. 조선 팔도에 일본인 노비가 돌아다녔다?
노예무역이 성행하던 일본의 민낯 이야기
03. 왕대비에게 소송을 건 간 큰 남자가 있었다?
안순왕후와 오계손 이야기
04.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한 천하장사 내시가 있었다?
울릉군 임우 이야기
05. 조선판 SKY캐슬이 있었다?
양반 사대부와 《영문록》 이야기
06. 조선 시대에 능력을 인정받은 여자 선비가 있었다?
불행으로 삶을 마감한 김운 이야기
07. 중국과 일본을 사로잡은 조선의 의학서가 있었다?
동아시아의 보물 《동의보감》 이야기
08. 18세기 서울은 의약이 분업화된 도시였다?
의약의 진보가 펼쳐진 르네상스 조선 이야기
09. 부의 흐름을 바꾼 조선판 반도체는 홍삼이었다?
홍삼 무역 이야기
10. 조선 22대 임금 정조는 악덕 군주였다?
약골 정약용과 술꾼 오태증 이야기
11. 유학 군주 정조는 사실 불교 신자였다?
정조와 수원 용주사 이야기
12. 조선 후기에는 흑화한 엘리트가 있었다?
세도정치의 옹호자가 된 김이익 이야기
13. 첩보 문서를 훔쳐 오던 조선판 비밀 요원이 있었다?
조선 역관 이야기
14. 100만 조회 수를 기록한 유튜브 화제작이 《훈민정음》이다?
시대와 함께 변화한 우리글 이야기
15. 베트남에서 유명 인사가 된 조선인이 있었다?
베트남 문인과 조선 선비의 기이한 만남 이야기
16. 조선 사신은 왜 그들의 옷소매를 잡아당겼을까?
베트남 사신을 만난 조선 사신 이야기
17. 성모마리아상을 조선에 가져온 선비가 있었다?
예수회 신부를 만난 조선 선비 이야기
18. 1772년 조선 최초의 서양 악기 연주회가 열렸다?
홍대용과 구라철사금 이야기
19. 서양 선교사의 또 다른 임무는 염탐이었다?
프랑스 신부 부베 이야기
20. 조선 시대에 수레가 없었다는 건 거짓말이다?
수레 마차 이야기
21. 조선 왕가에는 애틋한 우애를 보여준 남매가 있었다?
효명세자와 명온공주 이야기
22. 한글이 조선 여인의 한을 풀어주었다?
조선 시대 한글 소송 이야기
23. 조선 후기에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이 나타났다?
외사관과 괴수 이야기
24. 구한말 사진관을 개업한 전문직 여성이 있었다?
여성 사진사 이홍경 이야기
25. 역병으로부터 어린아이를 구한 선각자가 있었다?
18세기 실학자와 지석영 이야기

참고문헌

 

 

저자 소개

저 : 장수찬
 
파묻혀 있던 역사의 한 페이지를 발굴해 박진감 넘치는 이야기로 생생하게 되살려내는 역사 커뮤니케이터. 한국외국어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정보기록학을 연구하고 있다. 고서와 고문서를 수집하고 그 안에 담긴 사연을 추적한 《보물탐뎡: 어느 고서수집가의 비밀노트》를 비롯해 《장수찬의 역사툰》 《교과서 밖 조선의 역사》를 출간했다. 옥당에서 사서를 편수하던 수찬(修撰)처럼 청반(淸班)의 이름을 얻길 ...
 

책 속으로

나라든 사람이든, 삶에 여유가 생기면 과거를 뒤돌아보기 마련입니다. 그 과거에서 위로를 받기도 하고, 반성하기도 하며, 교훈을 얻기도 합니다. 5,000년 우리 역사에서 많은 나라가 일어나고 쓰러졌지만, 결국에는 문치가 흥성했던 조선 시대의 기록 문화만이 대다수 남아 있습니다. 그 모든 기록이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든 것입니다. 이것은 엄연한 역사의 진실입니다. 조선 시대를 기록한 이야기를 모르면 우리 한국인의 미래도, 대한민국의 미래도 알 수 없습니다. 과거의 역사는 곧 미래의 거울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절실함으로 《교과서 밖 조선의 역사》가 기획되었습니다. 흥미롭고 기이한 이야기를 통해 바로 앞 시대를 살펴보고, 뒷날의 미래를 대비하자는 것이죠. 제가 준비한 스물다섯 개의 시선은 이 책을 읽는 독자 여러분께서 조선을 이해하는 데 좋은 길잡이가 될 것입니다.
--- 「프롤로그」 중에서

《동의보감》이 완성된 17세기 이후 우리나라 한의학은 최전성기를 맞이했습니다. 중국에도 《동의보감》이 수출되었는데요. 1763년 중국에서 자체적으로 출판된 이후 20여 차례나 반복해서 출간될 정도로 인기가 높았습니다. 1766년의 중국판 서문은 《동의보감》을 ‘천하가 함께 가져야 할 보물’이라고까지 높이 평가했어요. 이웃 나라 일본에서도 《동의보감》은 최첨단 의학 지식으로 인식되었습니다. 1662년에는 일본 관리가 조선으로 와서 《동의보감》을 수입해 갑니다. 그리고 미나모토 모토미치가 《동의보감》을 개정하여 《정정동의보감》을 만들기도 했고요. 한·중·일 세 나라에서는 《동의보감》을 토대로 한 처방이 만병통치로 여겨진 겁니다.
--- 「07. 중국과 일본을 사로잡은 조선의 의학서가 있었다?」 중에서

18세기 후반 서울과 지방의 의료 편차는 의외로 적었습니다. 서울에는 의약이 분업화되어 지금의 전문의처럼 각기 강점이 있는 치료 분야에 따라 전문 의원이 널려 있었고, 지방 역시 의원 숫자가 부족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약재 처방만을 담당하는 약의(藥醫), 침을 놓는 침의(鍼醫), 종기를 치료하는 종의(腫醫), 어린아이를 치료하는 소아의(小兒醫), 여인을 치료하는 부인의(婦人醫), 천연두를 치료하는 두의(痘醫), 눈병을 보는 안의(眼醫) 등 지금과 별반 차이가 없을 정도로 다양했어요. 또 약을 짓는 모습도 재미있습니다. 양반 사대부가 직접 발로 뛰며 산지에서 약재를 구해오거나, 인근 약국을 찾아가 상품으로 판매되는 약재를 구입하기도 했습니다. 약값은 그때그때 지불한 것이 아니라, 봉급날과 같이 경제적인 여유가 생길 때마다 현금으로 한꺼번에 계산했다는 것도 확인됩니다.
--- 「08. 18세기 서울은 의약이 분업화된 도시였다?」 중에서

정조는 물에 삶아 익히는 숙삼(熟參)과 수증기로 찌는 홍삼의 두 방법을 시험해본 뒤, 홍삼이 제조법도 편리하고 유통기한도 더 오래간다는 것을 알게 되자 즉시 홍삼 제조를 명령합니다. 홍삼을 수출하기 위해 제도까지 고쳤는데, 중국으로 가는 사신과 역관이 청나라와 무역할 때 결제통화로 은화 말고 홍삼도 쓸 수 있도록 허락했습니다. 그 대신 가져가는 홍삼에 대해 부가세를 걷고선 이를 국고에다 충당했어요. 그리고 이런 세세한 법적 규정을 ‘삼포절목(蔘包節目)’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결과는 어땠을까요? 당시 조선에서 홍삼 한 근의 가격은 은 100냥으로, 쌀로 환산하면 60~80석에 달했다고 합니다. 청나라에서는 몇 배 더 비싼 가격에 거래되었고요. 홍삼 한 근이 청나라에서 매매되는 최소 가격이 1,100냥에서 최대 2,300냥에 달할 때도 있었다고 하니까요. 홍삼을 제조한 개성상인의 마진만 해도 150배가 넘었으니 정말 대단한 효자 상품입니다. 오늘날 반도체보다 훨씬 높은 영업이익률을 기록한 셈이죠.
--- 「09. 부의 흐름을 바꾼 조선판 반도체는 홍삼이었다?」 중에서

조선 22대 왕 정조는 모범생 이미지와 다르게 술과 담배를 즐기던 군주였습니다. 선대왕이자 할아버지인 영조는 금주령을 내릴 정도로 술에 부정적이었지만, 손자는 할아버지와 달리 금주령을 풀어주었어요. 정약용은 이런 쾌락 군주 정조에게 된통 걸려서 옥필통(玉筆筒)에 든 소주를 단숨에 마신 적이 있습니다. 그는 1783년 생원시에 합격한 후 성균관에서 공부했는데요. 정조가 그를 어여삐 여겨 중희당(重熙堂)으로 부르고는 소주를 옥필통에 가득 부어 주었습니다. 무려 주상 전하가 친히 제조하고 하사하는 술인 삼중소주(三重燒酒)를 말이죠. 정조가 정약용에게 억지로 마시게 한 삼중소주는 세 번이나 증류해서 만든 술로, 무려 70도가 넘는 독한 소주였다고 합니다. 임금이 술을 하사하거나 음식을 내려주는 것은 무척 영광스러운 일이었지만, 정약용은 이때의 충격이 컸는지 유배 생활을 할 때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 이 일화를 언급하며 절대로 술을 마시지 말라고 했답니다.
--- 「10. 조선 22대 임금 정조는 악덕 군주였다?」 중에서

조선에는 장현(張炫, 1613~?)이란 다재다능한 인물이 있었는데요. 그는 통역관 출신으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을 적부터 세자와 대군을 보살폈습니다. 두 왕족을 보호하기 위해 절치부심한 통역관 장현은 청나라 인사들에게 접근해 친분을 나누고 거대한 인맥을 구축했는데, 그가 만든 인적 네트워크는 결과적으로 청나라의 정세를 탐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참고로 장현은 그 유명한 장희빈의 당숙이기도 해요. 장현은 막대한 은화를 소비하면서 청나라의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청나라 관리를 매수하여 궁궐 깊숙이 숨겨둔 내각 문서를 총총히 훔쳐오기도 합니다. 조선에서는 제조가 금지된 홍이포(紅夷砲, 서양 대포) 25문을 몰래 들여오려는 시도도 했습니다. 장현이 사실상 조선의 비밀 요원이었음이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 「13. 첩보 문서를 훔쳐 오던 조선판 비밀 요원이 있었다?」 중에서

1686년 루이 14세는 프랑스에서 가장 똑똑하고 우수한 신부 다섯 명을 중국으로 파견합니다. 이들은 모두 파리에 있는 루이대왕학교(리세 루이르그랑)의 교수였으며 수학을 전공한 예수회 신부였어요. 당시 중국 황제였던 강희제가 수학과 천문학에 관심이 지대하다는 사실을 알고 보낸 전략적 파견이었습니다. 파견에 앞서 프랑스 왕립아카데미는 이들 신부에게 35개의 은밀한 과제를 부여했습니다. 중국의 과학과 수학의 수준, 중국인의 식재료, 여행과 운송 수단, 결혼 및 장례 등의 관습, 재산 상속에 관한 법, 여성의 사회적 지위, 가축의 형상, 중국 예술품의 제작 기법, 수공업을 비롯한 공방 체제에 관한 것 등을 조사하라고 말이죠. 총 35개 조항의 질의서 마지막 항목은 중국의 주변 국가에 관한 조사 요구였으며, 여기에는 조선왕국 ‘코레(Coree)’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라는 내용도 있었습니다.
--- 「19. 서양 선교사의 또 다른 임무는 염탐이었다?」 중에서

장씨 성을 쓰는 평범한 여인이었던 장 소사는 고향을 떠나 김유복이라는 사람에게 시집갔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유산 정리를 하다가 약간의 농토가 있다는 것을 그제야 알게 됩니다. 유산은 친딸인 장 소사와 사위인 김유복에게 상속되었고, 그 대가로 아버지 제사를 도맡았어요.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던 장 소사 부부에게 풍파가 닥칩니다. 고씨 성을 쓰는 사람이 나타나 토지소유권을 주장하고 나섰기 때문입니다. 장 소사는 한글로 구구절절한 심정을 표현하며 감정에 의지한 호소를 시작합니다. 차근차근 계단을 올라가듯이 소송을 진행했더니, 마침내 상부 관청인 상주 목사에게까지 하소연할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사연을 들은 목사는 판결을 내립니다. “소장의 내용과 같다면 지극히 통분하고 미워해야 할 일이니, 각별 히 살펴 땅을 빼앗지 못하도록 할 것이다.”
--- 「22. 한글이 조선 여인의 한을 풀어주었다?」 중에서

1921년 경성부(서울). 어느 양반댁 젊은 규수가 하얀 모시옷을 입고 사진관에 들어옵니다. 중년의 여성이 정중한 인사를 올리며 맞이하더니 규수를 의자에 앉힙니다. 이리저리 규수의 옷매무새를 살펴보고는 사진기로 발걸음을 옮기고 능숙한 솜씨로 기기를 조작하네요. 규수는 안심이라도 하듯,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습니다. 그녀가 사진을 찍은 곳은 서울 북촌 인사동에 소재한 ‘경성 사진관’이었습니다. 양반가의 규수가 이곳에서 사진을 찍은 이유는 바로 여성 사진사가 운영하는 여성 전용 사진관이었기 때문입니다. 일제강점기에도 조선 시대를 관통했던 남녀유별의 풍속은 엄연히 존재했습니다. 남성 사진사 앞에서 사진 찍기를 꺼리던 여인도 꽤 많았고요. 하지만 여성이라고 해서 사진 찍고 싶은 욕구가 없을 리 없습니다. 수요는 폭발했고 그 수요에 따라 여성 사진사가 등장했습니다.
--- 「24. 구한말 사진관을 개업한 전문직 여성이 있었다?」 중에서
 

출판사 리뷰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교과서 밖 ‘진짜 조선’을 보여주는 길잡이


정조 임금이라 하면 무엇이 생각나는가? 비극적으로 죽은 사도세자의 아들, 조선 후기 중흥 군주, 문체반정 등등 교과서에서 배운 내용이 줄줄이 떠오를 것이다. 그런데 실제 살아 숨 쉬던 정조 이산은 이런 근엄한 왕으로서의 모습만 있었을까? 우리가 알아야 할 《교과서 밖 조선의 역사》에는 ‘술과 담배를 즐기던 쾌락 군주’라는 정조의 또 다른 일면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그 유명한 다산 정약용에게 70도가 넘는 독한 소주를 옥필통에 가득 부어 마시게 한 일화를 보면, 근엄한 군주와 충신이라고만 알고 있던 두 사람도 울고 웃으며 한 시대를 살아간 인간임을 느낄 수 있다. 교과서의 딱딱한 활자로는 알 수 없었던 인간적인 면모이자 신분을 뛰어넘는 우정이다.
한편으로 정조는 사농공상이라 하여 상업을 천시했던 조선에서 사업 수단을 제대로 발휘한 임금이었다. 제조법도 편리하고 유통기한도 긴 ‘홍삼’을 개발한 뒤 중국에 수출하기 위해 관련 제도까지 고친 것이다. 덕분에 오늘날 반도체보다 훨씬 높은 영업이익률을 기록했다니,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태어났으면 대단한 사업가가 되셨을 듯하다. 교과서만으론 제대로 와 닿지 않았던 ‘중흥 군주 정조’의 모습이다.
공식 역사에는 기록되지 않은 여성의 이야기도 《교과서 밖 조선의 역사》는 생생하게 되살려 낸다. 억울하게 빼앗길 뻔한 아버지의 유산을 절절한 한글 소장으로 되찾은 장 소사, 시댁 선영을 지키기 위해 유려한 한글로 호소한 윤씨 부인 등은 이름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현대의 눈으로 보기에도 대단한 분들이다. 이처럼 《교과서 밖 조선의 역사》는 활자 속 박제된 인물이 아닌, 우리와 다름없는 ‘진짜 인간’이 살아간 조선을 생생히 보여준다.

조선이란 과거의 거울로
현재의 대한민국을 보다


코로나19로 전 세계가 팬데믹에 빠진 지금, K-방역의 우수성이 새삼 각광받고 있다. 이처럼 우수한 대한민국 의학의 뿌리는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중국과 일본에도 소개되어 ‘천하가 함께 가져야 할 보물’이라 평가받은 허준의 《동의보감》과 전 세계에 수출된 한국산 코로나 진단키트가 교차되니, ‘과거의 역사는 미래의 거울’이란 익숙한 말이 제대로 실감난다. 의약이 이미 분업화되고 서울과 지방의 의료 편차도 의외로 적었던 18세기 조선의 실정은 지방의 의료 인프라가 갈수록 부족해지는 현대 대한민국이 오히려 배워야 할 점이다.
한중일 삼국의 역학관계가 갈수록 복잡해지고, 미국과 중국의 갈등이 심상찮은 이때 반면교사로 삼을 만한 과거의 정보 전쟁도 흥미롭다. 타국과의 외교에서 꼭 필요한 역관이 첩보 문서를 훔쳐 오는 등 조선판 비밀 요원으로 활약했고, 서양 선교사들이 종교만 전한 게 아니라 각국의 실정까지 염탐했던 생생한 기록을 보며 ‘정보’와 ‘인재 활용’의 중요성을 실감할 수 있다. 중인이란 신분의 한계로 알아낸 정보를 실제 정책에 적용할 수 없었던 조선 역관과는 달리, 고급 인력으로 구성된 서양 선교사들은 첩보 활동을 착실히 수행했고 이는 서양 열강과 조선의 국력 차이로 이어졌다. 역관이란 인재를 제대로 활용했으면 일제 강점으로 이어진 조선의 운명도 달라졌을지 모른다. 이처럼 《교과서 밖 조선의 역사》가 하나하나 짚어주는 과거 역사를 거울삼아 현재 대한민국을 성찰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