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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으로 저항하다 (2023) - 냉소주의의 시대, 저항의 감각을 키우는 철학 수업

동방박사님 2024. 4. 8.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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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철학’의 이미지에 갇힌 철학을 탈환하려는 야심 찬 시도

철학자의 이름과 철학사를 몰라도 철학에 입문할 수 있을까? 아감벤, 푸코, 데리다 등 현대 철학자들의 저작을 일본어로 번역해온 철학자 다카쿠와 가즈미가 철학의 문에 들어서는 색다른 길을 제시한다. 저자는 철학사를 익히고 철학자들의 저작을 읽는 것과 철학 그 자체를 신중하게 구분하며, 모든 철학의 뿌리에 있는 ‘저항’을 중심으로 철학을 다시 정의한다. 저자에 따르면 철학이란 개념을 통해 세계에 대한 인식을 갱신하는 지적인 저항이다. 즉 생활이나 경험 속에서 건져 올린 어떤 개념을 통해 세계를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눈으로 보고 그 세계를 지배하는 우월한 힘에 맞서는 것이 철학이다. 그러한 인식 전환의 계기가 되었다면 ‘바다의 물고기’도, ‘주식主食’이라는 흔한 단어도 철학 개념이 될 수 있다.

다분히 의도적으로 ‘좁은 의미의 철학자’의 이름을 거의 언급하지 않는 저자는 그 대신 영화 〈흔들리는 대지〉와 〈스파르타쿠스〉, 소설 『캉디드』와 『제5도살장』, 역사적 인물인 가야노 시게루와 마틴 루서 킹의 이야기를 통해 철학이 탄생하는 순간을 보여준다. ‘전태일 같은 이를 철학자로 보지 않는다면 나는 철학을 떠나겠다’라고 마음먹었던 철학자 고병권은 다카쿠와 가즈미가 열어놓은 문으로 들어가 철학을 탈환하고 싶다고 말한다. 저항의 계기가 차곡차곡 쌓여도 냉소와 환멸만이 가득한 시대에 이렇게 되찾은 철학이 변화의 동력이 되기를 바라는 저자의 야심이 깃든 이색 철학 입문서이다.

목차

들어가며
철학의 이미지에 겁먹지 마라 | 모든 것이 철학으로 보이는 경험 | 철학은 철학사가 아니다 | 철학자는 세습되지 않는다 | 철학은 고매한 이념을 논하는 행위만은 아니다 | 철학은 고민이 아닐뿐더러 고민을 해결해주지도 않는다

1장 철학을 정의하다
철학의 정의 | 개념 - 일관성 있는 단어 혹은 표현 | 당장 개념을 정의할 필요는 없다 | 개념이라고 모순이 없는 것은 아니다 | 개념을 운운하는 것 - 창조·폐기·왜곡·전용 등에 관하여 | 개념의 긴장감이 미치는 곳, 세계 | ‘엘리먼트’에 관하여 - 와인과 물고기 | 시간은 금이다 | 인식 - 머리로 세계를 보면 어떻게 보일까 | 관점의 갱신 - 전승이 아닌 행위 | 지성 - 사람은 누구나 평등하게 머리가 좋다 | 저항 - 말을 듣지 않거나 들을 수 없는 것 | 저항에는 ‘좋고 나쁨’이 존재하지 않는다

2장 예속된 자의 저항
〈흔들리는 대지〉와 〈스파르타쿠스〉 | 〈흔들리는 대지〉 | 〈흔들리는 대지〉의 줄거리 | 토니의 연애 | “바다의 물고기는 먹는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 | 시칠리아 속담 | 철학자의 탄생 | 속담의 전용 | 저항이 실패하더라도 | 푸코와 〈흔들리는 대지〉 | 봉기는 쓸모없는가 | 〈스파르타쿠스〉 | 〈스파르타쿠스〉의 줄거리 | 인텔리 노예 안토니누스 | 시칠리아 출신 | “내가 스파르타쿠스다” | 커크 더글러스의 의도 | 안토니누스의 기지 | 원형 연판장이 발명되는 순간

3장 주식主食을 빼앗긴다는 것
가야노 시게루 | 소년 시게루의 경험 | 동정에 관하여 | 여성이라는 소수자 | 다수자와 소수자 | 감정 이입의 중요성 | 연어는 아이누의 주식 | 주식론 | 서서히 정립된 ‘주식’이라는 개념 | 시에페 | 소수민족과의 교류 | 댐 건설 반대 운동 | 감정 이입의 강요 | 주식론의 계승

4장 운명론에 저항하다
『캉디드』와 『제5도살장』 | 계몽사상가 볼테르 | 『캉디드』 | 낙관론 | 신의론 | 충족 이유율 | 팡글로스에 의한 최선설 | 신의론을 깎아내리다 | 리스본대지진 | 대지진 이전의 볼테르 | 「리스본의 재앙에 관한 시」 | 철학 개념의 폐기 | 커트 보니것과 볼테르 | 커트 보니것의 경험 | 드레스덴 폭격 | SF소설 『제5도살장』 | “그런 것이다” | 서두의 몇 가지 예 | 끝부분의 몇 가지 예 | 불편한 농담 | 최선설과 운명론을 부정하다 | 그런 것일 리가 없다 | 20세기의 볼테르?

5장 지금이 그 시간
마틴 루서 킹과 커트 보니것 | 흑인 민권 운동의 시작 | 「버밍햄 교도소에서 온 편지」 | 편지는 즉각적인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 시의적절하지 않은 운동 | 신화적 시간 개념 | 「편지」 전체를 지배하는 시간론 | 워싱턴대행진 연설과 비교하면 | 신중하게 고려된 속도 | 토크니즘 | 토큰(대용화폐) | 워싱턴대행진 연설 - 수표에 관하여 | 반드시 지켜지는 약속? | 바울을 대신하는 킹 목사 | 바울에 대한 명시적 언급 | 1957년의 설명 | 바울의 설명 | 킹 목사의 해명과 고통 | 구제되어야 하는 현재 | 지금이 바로 그 시간 | 종말은 왔는가

마치며
주요 참고자료 일람
옮긴이의 말

저자 소개 

1972년생. 게이오기주쿠대학 이공학부 외국어?종합교육교실 교수. 전공은 이탈리아·프랑스 현대사상 및 정치철학. 지은 책으로 『아감벤의 이름을 빌려』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조르조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 『내전』, 『왕국과 영광』, 『산문의 이데아』, 『사고의 잠재력』, 미셸 푸코의 『안전?영토?인구』, 자크 데리다의 『사형 1』, 이브-알랭 부아?로잘린드 E. 크라우스의 『비정형: 사용자 안내서』(공역) ...
 
역 : 노수경
 
일본어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브래디 미카코의 『아이들의 계급투쟁』, 강상중의 『한반도와 일본의 미래』, 『떠오른 국가와 버려진 국민』, 『만년의 집』, 『위험하지 않은 몰락』, 『나를 지키며 일하는 법』, 『구원의 미술관』 등이 있다.

책 속으로

철학은 철학사와 다르다
철학은 철학사와 같은 것이 아닙니다. […] 마치 ‘배움의 패키지’처럼 되어버린 철학사는 철학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무슨 활동을 했는지를 기록한 ‘정사正史’에 지나지 않습니다. […] 대학은 정사를 배우고 가르쳐 ‘철학하는 마음’을 전승하는 데 적합한 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 무언가 전해진다고는 해도 철학은 본래 그 철학자 한 사람에게만 국한된 것입니다. […] 철학이라는 행위는 역시 그때그때 타인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으로 이루어집니다. 다른 사람의 철학을 참고할 때조차도, 그 사람의 철학에 아무리 깊은 영향을 받더라도 다른 사람의 철학을 잇는 것은 아닙니다. ‘철학한다’는 행위에서는 전에 있던 것을 다음 세대로 전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는 아닙니다.
--- p.8~12

개념과 철학의 세계
개념이라는 일관성 있는 말을 사고의 장에 던져놓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살펴보는 것이 모순 없는 세상을 준비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그 행위에 의해 그때까지 숨어 있던 모순이 눈에 확 들어올 수도 있습니다. […] 중요한 것은 개념을 고집스럽게 사용하는 것, 일관성을 완고하게 주장하는 것, 그리고 논의의 결과가 어디로 흘러가는지를 끝까지 지켜보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 감각적인 표현이 되긴 하겠지만, 어떤 일관성 있는 개념에 의해 그 세계 전체에 순식간에 긴장감이 생긴다, 이런 이미지로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이 긴장감이 미치는 범위가 그 철학의 ‘세계’라 하겠습니다.
--- p.27~29

저항은 성패로 가치를 헤아릴 수 없다
저는 시위에 가끔 참가하는데요. 대체 시위를 하러 가는 데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시위에 가도 대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습니다. […] 효과라는 측면에서 볼 때 정치 참여로서는 투표 쪽이 훨씬 더 정공법이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위에 가는 것을 부정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시위에 가는 것은 그 효과를 따져가며 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 맞을 때 “아파”라고 말했다면 그것은 이미 저항입니다. 그 자체는 아무 의미도 없다고 여겨지기도 할 테고, 애초에 효과를 전혀 예상할 수 없는 경우도 많습니다. […] 철학이라는 저항은 세계를 실제로 변혁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 이기기도 하지만 아주 많이 집니다. 그러나 이기든 지든 이 철학이라는 행위에 의해 그 순간 ‘세계를 보는 방식’은 이미 변하고 있습니다.
--- p.45~48

철학 개념이 된 물고기
평소 별 생각 없이 사용하던 그다지 특이할 것 없는 비유에까지 생각이 미칩니다. 바로 ‘여자/남자’에 겹쳐 사용하던 ‘물고기/잡는 사람’이라는 비유 말입니다. 여기서 잡힌 물고기를 자신들에, 잡는 사람을 중간 상인에 대응시켜 전용한 것이지요. 그러자 자본가에 의한 무산 계급 착취라는, 세상의 새로운 이미지가 갑자기 눈앞에 펼쳐집니다. 여자로 보이던 그물 속 물고기가 자기 자신으로 보이는 충격! […] 마르크스주의 같은 것은 전혀 모르는 채로 경제의 냉혹한 구조를 깨닫고 문득 물고기의 비유를 건져냅니다. 그 비유가 자기들의 곤궁한 상황을 드러내는 말로 사용되자마자 세계는 투쟁의 무대로 변합니다. […] 토니는 ‘물고기’를 개념으로 만들어 세계의 지배적인 인식을 뒤흔들었습니다. 토니는 철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 p.64~66

다수자와 소수자
어떤 사회 시스템이 작동할 때 그 안에서 구조상 의식하지 못한 채 자주 이익을 얻는 쪽이 다수자입니다. 지배 이데올로기에 올라탄 ‘보통 사람’, 이런 구조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 쪽이 바로 다수자입니다. 반면에 어떤 ‘색이 칠해진 존재’가 소수자입니다. 예를 들어 남성과 여성은 거의 수가 같지만 여성이 소수자인 것은 분명합니다. 노동자와 자본가의 경우라면, 수로는 노동자가 많지만 노동자가 소수자입니다. 다수자와 소수자는 ‘표식이 있음/없음’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표식이 있음/없음’은 언어학 용어인데요, 굳이 설명하거나 형용할 필요가 있는 것에는 ‘표식’을 붙이고 그럴 필요가 없는 자명하고 당연한 ‘보통’의 것에는 표식을 붙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 우리는 자신의 어딘가에 반드시 붙어 있는 어떤 표식을 통해 다른 누군가에게도 표식이 있음을 인식하거나 상상할 수 있으며, 그렇게 상상해야만 합니다.
--- p.104~106

주식主食을 빼앗긴다는 것
연어의 특권적 지위, 즉 주식으로서의 지위는 흔들림 없는 것이었습니다. […] ‘연어’를 아이누어로 말하면 ‘주식’이라는 말과 똑같다는 것입니다. […] 아이누의 언어문화를 참조할 때 연어잡이가 금지되었다는 것은 정말로 주식이, 그러니까 ‘밥’이 금지되었다는 뜻입니다. […] 주식을 축으로 하여 세계의 이미지를 단번에 새로 만들어내는 것은 분명 철학적 저항의 몸짓입니다. ‘주식’이라는 조금도 특별하지 않은 말을 개념으로 삼아 거기에 일관성을 부여하여 ‘세상은 우리 쪽에서 보면 주식을 금지당한 세계로 인식되는데, 같은 관점을 당신들에게 제공한다면 대체 당신들에게 세계는 어떻게 보일까?’라는 질문을 단숨에 던진 것입니다. 여기에서 소수자는 이미 다수자의 동정을 사려고 하지 않습니다. 소수자는 다수자에게 감정 이입을 정중하게 강요합니다. 감각과 인식의 측면에서도 소수자는 주식 금지라는 이미지를 가져와 다수자를 호되게 꾸짖습니다.
--- p.112~125

커트 보니것, 운명론에 저항하다
“그런 것이다”는 정말 심한 일, 비극적인 일이 일어났을 때 등장합니다. […] 이 체념은 저릿저릿하게 스며들어 공유되기도 하지만, 이미 끝나버려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의 사건에 대한 지나친 냉철함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 여기서 도출할 수 있는 보니것의 사상은 운명론이자 체념이며 자유의지의 부정일까요? […] 만일 우리가 트랄파마도어 행성인처럼 타임 슬립으로 과거로도 미래로도 갈 수 있다면 운명론을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자유의지를 부정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런 일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운명론에 절대로 굴복할 수 없습니다. 요컨대 “운명론에 굴복하여 ‘그런 것이다’라고 시치미를 떼고 있다니 그것이야말로 트랄파마도어 행성인이라도 되지 않으면 가능할 리가 없잖아!”라는 것입니다. […] 경험한 것의 ‘말할 수 없음’에 이야기를 부여하면서, 동시에 운명론에 대항하여 커다란 ‘No’를 들이미는 방정식을 풀기 위해서 커트 보니것에게는 SF라는 장치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것입니다.
--- p.166~170

마틴 루서 킹의 철학, 지금이 바로 그 시간
‘즉시’가 아니라면, 그러니까 조금이라도 ‘속도’라는 것이 상정된다면 지연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 문제의 핵심에 무한 연기라는 현상이 있는 이상, 문제의 해결에 연기라는 수단을 사용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시간이 해결해줄 리 없습니다. 여기에서 제기되는 것이 「편지」에서 설명한 ‘창조적으로 사용해야 할’ 시간, ‘지금’이라는 시간입니다. […] 종말을 스스로의 힘으로 도래하게 한다는 이미지 자체가 ‘시간이 없다, 지금밖에 없다, 지금이 그 시간이다’라는 자신들의 절박한 시간 구상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었습니다. […] ‘반복되는 지연에 의해 존속되는 사회적 부정이 있을 때 종말을 구체적으로 설정하여 지금의 시간 감각을 바꾸는’ 행위는 그것이 꼭 정치적인 성공으로 귀결되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세계를 보는 방식 자체에 결정적인 갱신을 강제하여 결코 완전히 부정될 수 없는 무엇인가로 분명히 남았을 것입니다.
--- p.190~209

출판사 리뷰

“사람은 봉기한다. 이는 하나의 사실이다”
저항을 전면에 내세운 철학 입문서


철학 입문서라고 하면 대개 고대부터 현대까지 철학자들의 사상을 연대기적으로 정리한 책을 떠올린다. 저자는 철학사를 따라가며 공부하는 것, 철학자들의 저작을 정독하는 것은 모두 가치 있는 일이지만 그 자체가 곧 철학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또 철학은 무엇이 아닐까. 철학은 세습되거나 계승되는 것이 아니며, 진·선·미 같은 고매한 이념을 논하는 행위만도 아니다. 최근에는 ‘위로’나 ‘처방’ 같은 말과도 곧잘 짝을 이루지만 철학은 고민이 아닐뿐더러 고민을 해결해주지도 않는다. 이와 같이 저자는 ‘철학이 아닌 것’을 하나씩 배제한 뒤 “어떤 경로를 거쳐서든 철학하는 마음이라는 불꽃이 날아오기만 한다면 누구든 철학을 할 수 있습니다. (…) 철학이란 일부의 지적 엘리트가 독점하고 있는 행위가 아니라, 말하자면 지극히 민주적인 행위, 지식의 서민에게도 열려 있는 자유로운 행위입니다”(13쪽)라며 전형적인 철학 입문서와는 다른 길을 갈 것임을 예고한다.

저자는 철학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철학이란 개념을 운운하는 것으로 세계에 관한 인식을 갱신하는 지적인 저항이다.”(23쪽) 그런 다음 이 정의에 등장하는 ‘개념’, ‘운운’, ‘세계’, ‘갱신’, ‘인식’, ‘지성’, ‘저항’ 등의 어휘를 차례로 설명한다. 요약하자면 하나의 세계 안에서 일관성 있게 쓰이고 그 세계에 일순간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개념을 통해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 인식을 통째로 바꾸는 것, 그 달라진 눈과 머리로 권력의 통제나 개입, 폭압에 맞서 저항하는 것이 철학이다. 이때의 개념은 물고기나 와인이 될 수도 있고, 누군가의 빈자리나 식당 앞에서 맞닥뜨린 문턱, 폐관된 공공 도서관 같은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저항은 시위나 집회, 파업 같은 강력한 행동일 수도 있지만, 움직이지 않거나 병에 걸리는 것일 수도 있다.

저항이 성공했는가 실패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사람은 봉기한다. 이는 하나의 사실이다”(71쪽)라는 미셸 푸코의 말처럼 “사람은 그냥 저항”(67쪽)한다. 이기든 지든, 쓸모가 있든 없든 그 저항에 의해 세계를 보는 방식이 이미 변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 책은 저항하는 이들에게 튄 철학의 불꽃을 전하는 방식으로 철학의 문을 연다. 그 불을 받아 스스로 키우는 사람은 누구라도 철학자가 될 수 있다.

‘바다의 물고기’도 철학 개념이 될 수 있을까
철학사와 철학자의 이름 없이 철학을 말하기


1장에서 자신의 언어로 철학을 새롭게 정의한 저자는 2장부터 영화와 소설, 인물 이야기에서 그 정의에 어울리는 철학자와 철학 개념을 건져 올린다. 루키노 비스콘티의 영화 〈흔들리는 대지〉에서 잡은 물고기를 매번 헐값에 중간 상인에게 빼앗기던 토니는 어느 날 문득 그물에 잡힌 물고기의 운명이 중간 상인이 짜놓은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와 같다는 것을 깨닫는다. 여성을 사냥감 취급하듯 쓰이던 농담인 “바다의 물고기는 먹는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라는 말 속의 ‘물고기’가 불현듯 자기 자신으로 보이는 인식의 전환이 찾아온 것이다. 그물을 찢지 않으면 평생 먹이 취급을 당할 뿐임을 간파한 토니는 위험을 무릅쓰고 자기 사업을 시작한다. 자본가, 무산 계급, 착취 같은 잘 다듬어진 용어 없이도 ‘물고기’를 개념으로 삼아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을 뒤흔드는 것, 이것이 바로 저자가 말하는 철학이다.

저자는 또한 볼테르의 『캉디드』와 커트 보니것의 『제5도살장』을 연결하여 운명론에 저항하는 철학의 힘을 보여준다. ‘신이 창조한 세계에 왜 악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 ‘악에도 선을 실현하려는 신의 뜻이 깃들어 있다, 세계는 무수한 가능성 가운데 최선의 상태로 존재한다’라고 답하는 신의론 혹은 최선설이 지배하던 시기에 볼테르는 이를 우스꽝스럽게 비트는 소설 『캉디드』를 발표한다. 리스본대지진 같은 재앙을 ‘최선’이나 ‘필연’ 같은 말로 설명하는 철학이라면 차라리 폐기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철학 개념의 유해성을 끈질기게 반어적으로 보여주는 이런 행동은 철학자의 이름을 참칭한 타락한 자들로부터 진정한 의미의 철학을 탈환하려는 행위라고 간주해도 좋을 것입니다. - 152쪽

리스본대지진에 버금가는 재앙인 드레스덴 폭격을 겪은 커트 보니것은 그 체험을 기초로 쓴 소설 『제5도살장』에서 마치 운명론에 굴복하는 듯한 “그런 것이다So it goes”라는 표현을 반복해서 사용하지만, 타임 슬립이라는 SF적 장치를 도입해 이를 ‘그런 것일 리가 없다’라는 메시지로 뒤집는다. 위기의 시대마다 인간을 사로잡는 운명론에 저항한 볼테르와 커트 보니것은 철학자로 부르기에 손색이 없다.
미국에서 흑인 민권 운동이 한창이던 시기, 마틴 루서 킹은 “기다려라. 인종 통합은 신중하게 고려된 속도로 이루어져야 한다. 언젠가 적절한 시점이 되면 차별은 시정될 것이다”라는 이야기를 수없이 들어야 했다. 문제 해결을 끊임없이 지연시키는 이와 같은 ‘신화적 시간 개념’에 맞서 킹 목사는 바울의 종말론을 참조하여 맹렬한 긴급성을 지닌 ‘지금’이라는 시간 개념을 세운다. ‘시간이 문제가 되는 현장에서는 시간이 해결 방법이 될 수 없다. 종말을 설정하여 기다리는 시간을 폐기하자, 우리에게는 창조적으로 사용해야 할 지금이라는 시간이 있을 뿐이다’라는 킹 목사의 시간론은 ‘언젠가’에 저항하는 철학이었다. 이 밖에도 저자는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스파르타쿠스〉, 아이누 문화 연구자 가야노 시게루의 삶과 글에서 한계 상황에 처한 인간이 문득 개념 하나를 집어 들어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맞서는 순간, 즉 철학이 탄생하는 순간을 날카롭게 포착해낸다.

냉소주의에 맞서는 철학자의 실천
저항과 연대라는 일상의 윤리 감각을 회복하기 위한 철학적 훈련의 장


이 책의 저자 다카쿠와 가즈미는 ‘번역 기계’라는 별명으로도 불릴 만큼 현대 프랑스·이탈리아 철학자들의 수많은 저작을 일본어로 번역하고, 학술 논문을 쓰거나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하는 전문 연구자로 활동해왔다. 그런 그가 왜 이런 독특한 형식의 철학 입문서를 썼을까. 책을 마치며 쓴 글에서 저자의 생각을 짐작해볼 수 있다.

이 책에서 저항을 전면에 내세운 데는 당연하게도 시대적인 배경이 있습니다. […] 코로나든 원전 재가동이든 문제는 자연에서 비롯한 재난 그 자체보다는 이를 기회로 삼아 무질서를 만들어 자리보전을 획책하는 체제입니다. 그 체제는 특히 최근 몇 년 동안 특별히 계기가 되는 재난 없이도 사람이 해서는 안 될 다양한 일을 종횡무진 전개했습니다. […] 최근 몇 년간, 차근차근 논의를 만들어가는 것보다 거짓말이나 궤변, 변명으로 상황을 넘기는 것을 현실주의적이라 평가하는 냉소주의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자리 잡은 듯합니다. […] 중요한 것은 그러한 경향에 끈질기게 “아니오!”라고 말하며 기본적인 윤리 감각에 숨을 불어 넣는 일입니다. - 213~216쪽

재난 상황을 틈타 이익을 취하고, 힘을 키우고, 약자를 억압하는 정치권력의 전횡에 냉소와 환멸, 무력감을 보일 뿐인 사람들에게 철학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 책은 저자의 이런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단순하지만 정교하게 구상된 실천적 철학 입문서이다. 저자는 모든 철학의 뿌리에 있는 저항의 면모를 드러내는 한편으로, 연대를 우직하게 긍정하는 일에도 비중을 두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어부, 반란 노예 등의 ‘철학자’들에게 ‘철학의 불꽃’이 튄 순간은 모두 억압당하고 차별받는 자들이 함께 있는 때였다. 억압당하고 차별받는 사람이 저항하는 존재로 거듭날 때 그 옆에는 반드시 함께 서는 사람이 있다는 것, 저항자와 연대하는 일은 결코 어렵지 않다는 것. 저자는 이런 일상의 윤리 감각을 회복하는 일에 철학이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랐다. 철학 입문자에게 저자가 마지막으로 전하는 말은 냉소를 걷어내고 저항하고 연대하자는 것이다.

복잡한 이야기는 나중에 해도 충분합니다. 내가 맞았다면 “아프다”라고 말하고, “아프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옆에 서는 것. 실제로 항상 그렇게 할 수 있는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만, 적어도 원칙은 이것뿐입니다. 이 책이 그 원칙 위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는 역할을 조금이나마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216쪽

추천평

철학자는 예전의 나로서는 감히 받을 수 없는 이름이었지만 지금의 나로서는 도무지 받고 싶지 않은 이름이다. 철학 종사자들을 만나면서 내가 생각한 철학은 철학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나는 전태일의 ‘바보회’를 현대사의 중요한 철학적 사건으로 규정한다. 내게 전태일은 철학자이고 그가 말한 ‘바보’는 개념이다. 그런데 철학 종사자들 사이에서 전태일 같은 이는 철학자가 아니므로 나는 철학자를 떠나려고 했다. 다카쿠와 가즈미는 이런 나를 다시 철학으로 끌어들인다. 이 책에 등장하는 철학자들은 좁은 의미의 철학에 종사했던 사람들이 아니며, 개념들도 ‘바다의 물고기’처럼 좁은 의미의 철학 개념을 닮지 않았다. 이 책에 따르면 철학이란 세계에 대한 인식을 갱신하는 지적인 저항이다. 그런데 이 책은 또한 철학에 대한 인식을 갱신하고 있다. 좋은 철학 입문서, 다시 말해 철학으로 들어가는 정말 좋은 문이 열렸다. 이 문으로 들어가 철학을 탈환하고 싶다.
- 고병권 (철학자, 노들장애인야학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