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이언트 캔틸레버크레인
지금도 가동되고 있는 일본 최초의 전동크레인 . 자이언트캔틸레버 크레인은 조선업의 형성기였던 미스비시 합자회사 시대에 조선소 공장 설비의 전자화에 맞춰 동형으로는 일본에서 최초로 건설된 전동크레인 입니다.
이 크레인은 영국 애필비사가 제조한 것으로 전동 모터로 구동되는 당시로써 최신식 크레인 이었습니다.
원동기와 보일러 등의 대형기계를 선박에 싣거나 내리는 데 사용하기위해 1909년에 조선소의 기계공장 부근의 아쿠노우라 안벽에 설치되었습니다. 이후 자이언트 캔틸레버 크레인 1961년에 공장 확보공사로 인해 해체된후 미즈노우라 안벽 (현재의위치)으로 이전 되었습니다. 지금도 가동되고 있는 이 크레인은 기계공장에서 제조한 증기 원동기와 대형 선박용 플로펠라의 선적용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미쓰비시는 어떤기업인가?
1부
에도 막부 시절인 1835년 도사번 (지금의 시코쿠지방 고치현)에서 출생한 하급무사 출신 이와사키 야타로가 1870년 배 세척을 가지고 해상무역에 손을 대면서 기업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1873년 회사명을 "미쓰비시상회로 내 걸면서 미쓰비시라는 상호가 처음 등장하게 된다. 미쓰비시는 이와사키가의 문장이었던 3개의 마름 (*바늘꽃과의1년생) 에서 따온 것이다. 야타로는 이른바 "사가의 난"이 발생 했을때 정부를 도와 반란군을 진압하는등 메이지유신으로 정권을 잡은 인사들과 긴밀히 접촉하여 기업을 성장 시켰다. 그는 막부정권을 무너 뜨리고 (대정봉환 :大政奉還 - 1867년 에도막부가 천황에게 국가통치권을 넘겨준사건)을 성사시킨 일본의 국민적 영웅 사카모토료마의 사업을 승계한 데다 일세를 풍미하였던 후쿠나와유키치 (1835~1901)와도 밀접한 관계를 이어갔다. 야타로는 18974~1884년에 걸처 후쿠시마, 아오모리, 오카야마 등 여러곳의 광산을 개발 했는데 그 중심이 된 것이 훗날 조선인 강제동원으로 악명을 떨치게 되는 다카시마 탄광이었다.
2부
이타로는 미쓰비시 재벌이 완성되기 전에 1885년 위암으로 사망 했지만 그 이전에 미쓰비시가 성장할 수 있는 기초를 확고하게 다져 놓았다. 그가 죽은 뒤 동생 야노스케가 사장직으로 물려받아 일류재벌로 발돋움시켰다. 야노스케는1887년 정부 소유 나가사키 조선소를 불하받은 데 이어 미쓰비시조선, 미쓰비시제지, 미쓰비시상사, 미쓰비시광업, 미쓰비시은행, 미쓰비시전기, 등을 차례로 설립하며 그룹을 부흥시켰다. 야노스케의 뒤를 이어 야타로의 장남 히사야가 미쓰비시 총수를 맡았다. 야타로의 사위들은 미쓰비시 성장에 두고두고 도움이 됐는데, 맏사위와 넷째사위가 총리를 역임했고 둘째사위는 교토지사를 지냈다. 이들은 미쓰비시와 민정당 등 정계를 연결하는 파이프 역활을 했다. 야노스케 또한 일본 정계의 거물 교토쇼시로 (1838~1897)의 딸과 결혼해 혼인으로 막강한 인맥을 구축하는데 일조 했다. 이래저래 미쓰비시 집안은 정경유착의 대명사로 일컬어 질수 밖에 없었다.
3부
미쓰비시 그룹은 미쓰비시합자회사를 지주회사 (주식 소유에 의해 기업을 지배하는 회사로 재벌 본사들이 대부분 지주회사 역활을 한다) 로 개편시쿄 산하회사를 총괄관리하는 콘쩨른 형태를 갖추면서 크게 성장했다. 1930년 들어 산하회사 120개사, 자본금 9억엔에 달하는 초대형 재벌의 면모를 갖추게 됐다. 정부의 강력한 지원속에 사세를 확장한 미쓰비시는 특히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기간 중 군수산업으로 급성장 했다. 나가사키 조선소를 모태로 1934년 탄생한 미쓰비시중공업에서 당시 최대의 전함으로 일컬어졌던 6만 9,000톤급 무사시호, 진주만 폭격과 가미가제 자살공격으로 맹위를 덜쳤던 제로센 전투기 등을 만들어 일본군군주의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다.
4부
그 발판에 수많은 조선인들의 육노동이 있었다. 일본학자 및 시민 운동가 들이 2006년 발간한 "전쟁 책임 연구"에 따르면 미쓰비시 작업장에 끌려간 조선인은 총 10만명에 달했다. 이중 1만명 이상이 나가사키의 조선소와 병기공장, 제강공장, 탄광에 동원 되었다. 일본 패망뒤 연합군 총 사령부는 전쟁에 적극 협력한 책임 등을 물어 군수재벌을 해체하면서 미쓰비시도 작느회사로 뿔뿔히 해체했다. 1946년 9월 조사때 미쓰비시 재벌기업 76개회사의 총 자본금은 27억 350만엔으로 자본규모에서 미쓰이 재벌과 얀대 산맥을 이루고 있었다. 그무렵 미쓰비시 총수인 이와사키 고야느 "나라를 위해서 였다. 그런데 패전 했기 때문에 그 명령에 따라 해체할 수밖에 없단 말인가. 자발적인 해체는 나의 신념으로 할 수 없다. 미쓰비시는 국가의 명령에 따라 당연히 국민으로서 해야할 의무를 다 했기 때문에 돌이켜보아도 한 점 부끄러울 것이 없다" 며 강력히 반발했다.
5부
결국 해제조치가 단행돼 미쓰비시 중공업은 동일본 중공업, 중일본 중공업, 서일본중공업 등 3개 회사로 분할됐다. 미쓰비시상사는 무려 120개사로 세분화 됐다. 그러나 미쓰비시 그룹은 제2차세계대전 종결을 위한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이 1952년 발효된 이후 단계적으로 재결합 했다. 미쓰비시 중공업도 1964년 재통합 했다.현재 미쓰비시그룸의 중핵은 니쓰비시 중공업과 미쓰비시 UFJ은행. 미쓰비시 상사다. 이중 미쓰비시 중공업은 차량과 선박, 각종 터빈, 발전기 등을 제조하는 세계적인 기업으로 중후장대 산업의 간판으로 통한다. 종업원수가 계열사를 합처 총 6만 2,000명이며 전체 매출은 4조 4,000억엔이다 (2008년기준)한편 역사왜곡으로 유멱한 "새로운역사릏 만드는 모임 (약칭 새역모) 측에 막대한 후원금을 주는등 과거사 문제에 아무 반성이 없는 대표적인 우파기업으로 꼽힌다.
6부
조선인 강제동원 문제와 관련해서는 1944년 일본 나고야의 미쓰비시중공업 산하 군용항공기 (정찰기) 공장에 근로정신대로 끌려갔던 할머니 7명이 2009년 후생연금 탈퇴수당 명목으로 1인당 고작99엔씩을 받은 사건이 널리 알려져 있다. 엄밀히 말하면 99엔 지급의 주체는 일본 정부지만 이를 미쓰이 중공업과 분리해 생각하는 건 별 의미가 없다. 야총에 할머니들이 후생연금 가입 여부에 대한 확인을 일본정부에 요청한 이유가 미쓰비시중공과 분리해 생각하는건 별 의미가 없다. 애초에 할머니들이 후생연금 가입여부에 대한 확인을 일본정부에 요청한 이유가 미쓰비시중공업의 은폐 때문이었다. 미쓰비시중공업 사업체에 근무했다는 지극히 단순하고 명백한 사실마저 기업측은 한사코 부인하며 자료를 감춰왔다. 할머니들이 1998년 확인 요청을 한 때부터 무려12년이 지난 2009년 9월7일에야 일본 후생 노동성 산하 사회보험청은 이들의 미쓰비시중공업 근무사실을 공식 인정 했다. 후생노동성은 후생연금 중도탈퇴에 따른 수당을 1940년대 당시의 화폐액수 그대로 계산해 피해자 들에게 99엔을 지급했지만 미쓰비시중공업은 단돈 1엔도 내놓은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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