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 은이성지
은이는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살던 "숨은 이들의 마을"이라는 뜻이다. 바로 이웃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가 자라난 골배마실 교우촌이 있으며, 문수봉 넘어 남서쪽에는 한덕골 교우촌과 미리내교유촌이 자리잡고 있었다. 은이교우촌이 언제 형성되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1846년 48세로 포도청에 곤장을 맞고 교수형으로 순교한 충청도 출신의 한이형(1799~1846 : 라우렌시오) 성인기록에 보면 21세때(1819년) 혼인한 뒤 곧바로 은이마을로 이주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후 그는 은이 교우촌의 회장을 지냈다.
은이와 골매마실은 두 차례에 걸쳐 박해를 받게 되었다. 1839년의 기해박해로 김제준이 골배마살에서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어 순교하였으며, 1846년의 병오박해 때는 공소회장인 한이형이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김제준 성인의 시신은 순교 후 이곳 어디에 안장되었다고 하나 지금은 찿을 길이 없다. 김대건 신부가 조부 김택현을 따라 솔뫼에서 이사와 15세 때 마카오로 떠나기 전까지 수년 동안의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골배 마을에 이웃한 은이마을은 김 신부가 서품을 받고 귀국한 뒤 공소를 차린 곳이다.
은이 공소는 1836년 4월, 조선 최초의 선교사 프랑스인 모방 신부가 소년 김대건에게 "안드레아"라는 세례명으로 세례성사와 첫 영성체를 주고 신학생으로 선발한 곳이다. 또 사제서품울 받고 귀국한 김대건 신부가 1845년 연말까지 약 2개월간 서울일대에서 교구장 페레올 주교를 보좌하여 활동하다가, 1846년 초부터 페레올 주교의 배려로 은이로 가서 부활 대축제일까지 약4개월동안 기거하면서 사역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시기 김대건 신부는 서울과 경기 지방의 은석골, 텃골, 사리틔, 검은정이, 먹뱅이(먹리) 한덕골 , 미리네, 한터, 삼막골, 고초골, 용바위, 단내 등지에 흩어져 있는 교우들을 찿아 성사를 베풀고 사목활동을 전개하였다.
은이 마을은 한이형(라우렌시오) 성인이 체포된 곳이기도 하다. 대들보에 매달아 심하게 매질을 하였고 다리를 묶고 두 발 사이에 깨진 사기그릇의 작은 조각들을 끼우고 다리에 굵은 밧줄을 감고는 앞뒤로 번갈아 가며 잡아당겨 톱질을 하여 살을 으스러트렸다. 한이형이 이 참혹한 형벌을 참을성 있게 견디어 내자 포졸들은 감화를 받아 다른 신자 들에게 "당신들도 정말 천주교인이 되려거든 한이형처럼 돼야한다"고 말하였다. 이런 고문을 치른후 포졸들에 의해 서울로 압송되어 9월20일에 48세의 나이로 교수형을 선고받아 순교하였다.
김대건 신부가 1845년 8월17일 사제 서품을 받은 상해 김가항 성당을 은이성지에 복원하였다.
<한국 천주교 성지와 사적지 서울관구 415를 참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