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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화유산 나들이

동방박사님 2021. 12. 30.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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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인문학 깨알 상식을 엮은 『인문 여행 길잡이』에 이어, 두 번째 책 『우리 문화유산 나들이』는 고조선 이래 오천 년 역사를 대표하는 서울·강화·공주·부여·경주·제주 지역의 대표 문화유산을 정리한 것으로, 우리 문화유적을 답사하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하였다.

서울은 한강을 중심으로 한성백제 이래 이천 년 동안 우리나라의 주요 역사는 물론 조선시대와 근현대 역사를 모두 간직하고 있으며, 도시 전체가 문화유적의 보고로 노천 박물관이다. 강화는 한반도 역사의 축소판으로서 고조선 청동기시대 유적, 고려의 몽골 침입과 천도, 조선의 몽진과 개항기 아픈 근대사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외국 문물이 육지로 드나들던 관문으로 불교, 유교, 기독교 유적도 함께 볼 수 있으며 강화도 북단 바다는 NLL이 지나가는 북한 땅을 마주한 곳이다.

공주·부여는 웅진과 사비 시대의 빛나는 문화유산이 남아있어 잃어버린 백제 역사를 찾아볼 수 있다. 경주는 우리 민족 문화사의 황금기였던 통일신라의 독창적인 문화를 지니고 있으며 그 찬란한 예술적 신비감은 동양의 그리스라 불릴 만큼 손색이 없다. 제주는 독자적인 해상왕국인 탐라국의 역사를 이루었고, 육지와 다른 독특한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으며, 아름다운 바다와 화산섬의 자연 경관은 우리나라 최고라 하겠다. 더 많은 지역을 싣지 못한 아쉬움이 크지만, 다음을 기약하면서 이 책이 독자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2021년 11월 수서 대모산 자락에서, 성도용 씀

목차

머리말

1장 조선의 법궁 ‘경복궁’과 5대 궁궐

조선의 건국
한양의 기본계획
조선의 5대 궁궐 건축 기원起源
조선의 으뜸 궁궐, 경복궁

2장 세계문화유산 ‘조선 왕릉’을 찾아서

조상숭배
조선의 상례
왕릉
능호, 묘호
왕릉 비사

3장 한양도성 순성길

한양도성
한양도성 순성길

4장 강화도 한반도 역사의 축소판 : 오천 년 역사

강화도 한반도 역사의 축소판 오천 년 역사
강화도의 명칭과 군사 요충지
강화도의 역사와 문화유적 개요
종교문화 유적
박물관과 특산물 등

5장 잃어버린 백제 역사를 찾아서

잃어버린 백제 역사를 찾아서
백제의 상고사, 부여
한성 도읍기(BC 18~AD 475)
웅진 도읍기(475~538)
사비 도읍기(538~660)

6장 천년고도 경주를 찾아서

천년고도 경주를 찾아서
신라의 건국
신라의 발전과 멸망
신라의 제도
신라의 문화 발전
신라의 문화유적

7장 관광과 힐링의 보고 제주도를 찾아서

천년의 역사 탐라
지형과 지질
전설과 문화 풍속
의·식·주 문화
삼다도, 삼무도
세계 유산
주요관광지
 

저자 소개

저 : 성도용
 
정년퇴직 후 인문학 공부를 시작하고 문화답사와 해설을 진행하면서,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즐거운 문화답사”를 위해 고민한 흔적을 정리하였습니다. 이 책이 인문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에게 작은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학력 금호중학교 대전공업 고등전문학교 한양대학교 토목공학과 학사 대전대학교 대학원 토목공학과 석사 경원대학교(가천대학교) 일반대학원 행정학과(지역개발 전공) 박사 주요경력 ...
 

책 속으로

조선의 건국

가. 고려 말 나라의 상황

원나라의 80년 지배로 친원親元 및 권문 세력의 부정과 불교의 부패로 나라가 쇠락하고, 원나라 홍건적 난으로 공민왕이 안동까지 피난을 가고, 왜구는 해안가 및 내륙까지 약탈하여 나라가 어지러웠다. 최영, 이성계 등은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을 격퇴하여 신흥 무인 세력으로 자리 잡고, 성리학을 공부한 신진사대부는 개혁 정책을 주장하여, 공민왕의 개혁 정책은 친원파 숙청과 반원 정책 및 쌍성총관부 영토회복까지 하였다.

노국대장공주와 신돈이 죽고 공민왕의 암살로 혼돈시대에 접어들었다. 명나라는 철령 이북 땅을 요구하여 최영은 요동 정벌을 주장하나 이성계가 위화도회군으로 정권을 잡고 최영 장군을 죽인다. 최영 장군은 죽으며 ‘내 무덤에 풀이 나지 않을 것이다’ 예언하고 ‘황금을 돌’ 같이 보며 살아, 백성들은 자신을 왜적들로부터 지켜준 장수와 깨끗한 청백리로서 존경한다. 그의 죽음에 대한 백성들의 한스러운 안타까움이 더해져 최영을 신으로 만들어, 결국 이성계는 살아서 왕이 되었지만, 최영은 죽어서 신이 되어 무당들이 가장 받드는 인물이 되었다.

나. 조선의 건국

이성계는 정도전 등의 신진사대부와 함께 토지 제도 개혁 시행으로 민심을 얻었다. 이색, 정몽주 등은 고려 왕조를 유지하면서 개혁을 주장하다가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인 이방원 세력에 의해 제거되었다. 이성계는 왕위에 올라 새 왕조를 고조선을 계승한다는 뜻에서 ‘조선’朝鮮이라고 하여 1392년 7월 17일 개경 수창궁에서 건국하였다.(‘제헌절’ 기원)

이성계는 본명이고 등극 후 이단李旦으로 이름을 고쳤다. 고려 이의방 동생 이인 후손이며 전주이씨 이한의 22세다. 4대조(목조) 이안은 전주 향리로 별감과 기생문제로 싸워, 170여 호를 이끌고 삼척으로 도망갔다 다시 함경도 동북면 의주(원산)에 정착하여 원나라 벼슬을 받았다. 전주에는 전주이씨 시조인 이한 묘 ‘조경단’이 있고, 삼척에는 백우금관百牛金棺 전설이 있는 5대조 양무 장군의 ‘준경묘’와 부인 ‘영경묘’가 있으며, 4대조 목조 ‘덕릉’ 등 선대왕릉은 함경도에 있다.

다. 한양 천도

개경은 이성계를 반대하는 전통세력의 기반이 강하게 남아있고,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지덕地德이 쇠하고 새 왕조에 불길하여, 천도 후보지로 총 7개소를 검토하여 계룡대(신도안)에 착공하였다. 그러나 하륜이 물길이 없고 풍수가 불길하다 하고 무악毋岳(지금의 연희동 일대-이후 연희궁 건설)은 좁아, 이성계가 지금의 한양으로 결정하였다.

한양은 ‘형세도 왕도가 될 만하고 조운이 통하며 전국에서 거리도 균등하니 백성들에게도 편리한 바가 있으리라.’하며 1394년(태조 3년) 10월 28일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 입성하여, 고려 이궁離宮, 行宮에 머물며 종묘, 궁궐, 도성 순으로 건설하였다. 서울 정도定都 600년을 기념해 1994년 10월 28일 ‘서울 시민의 날’을 제정하고, 남산골 한옥마을에는 정도定都 1000년에 개봉할 문물 600점을 타임캡슐에 담아 매장하였다.

라. 한양漢陽, 한성漢城, 경성京城, 서울

한양은 한수漢水의 북쪽陽(산의 남쪽 지역)을 의미하는 풍수지리적 지명이던 이곳에 우리나라 역사에 처음 등장한 것은 백제를 세운 온조왕 때 위례성慰禮城 또는 한성, 통일신라는 한산주, 고려는 주로 남경南京 또는 한양부 라고 불렀다. 조선은 한성부漢城府로, 일제는 1910년 경기도 소속의 경성부京城府로, 미 군정은 1946년 8월 15일 서울특별 자유시로, 대한민국은 1949년 11월 지방자치법이 공포되면서 수도首都를 서울특별시로 정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서울’이라는 말의 유래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신라 국호를 서라벌徐羅伐, 또는 서벌徐伐, 사라斯羅, 사로斯盧라고 했고, 이후 이것이 도읍의 이름으로 바뀌게 되어 백제 말기의 수도인 부여扶餘를 ‘소부리’所夫里라고 불렀던 점에서, 삼국시대 수도首都의 보통 명사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영조 때 백과사전인 ‘증보문헌비고’에도 ‘후인들이 모든 서울徐蔚을 일컬어 서벌이라고 했다가 후에 변하여 서울로 했다’라고 하며, 이러한 이름들은 수도京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고 그것이 오늘날의 서울이라는 말로 변하게 되었다.

*왕십리往十里 유래 : 무학대사가 조선 팔도를 다니다가 왕십리에 와서 풍수를 보고 있었다. 그때 밭에서 소로 쟁기질을 하던 농부가 있었는데, 소를 보고 “미련한 소야, 십 리를 남겨 놓고 여기서 자리를 잡으면 어떻게 하느냐.”라고 성을 냈다는 이야기는 임진왜란 이후 야사에 나오며 고려 때 이미 ‘왕심리’라 불렀다. ‘무학봉’無學峰은 신당동 및 도선동 뒷산으로 서울에 도읍을 정할 때 무학대사가 올라서서 지형을 살펴봤다고도 하고, 혹은 舞鶴峰으로 학이 와서 춤을 추었다고 전하는 말도 있다 : 舞鶴 女高
--- 「1장 조선의 법궁 ‘경복궁’과 5대 궁궐」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