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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이 집이 있었기에 천도교가 있고
천도교가 있었기에 대한민국이 있었다!”
1921년 4월 5일 준공 기념식을 가진 천도교중앙대교당 100년을 맞으며, 그 안에서 있었던 종교행사는 물론이고, 한국 근현대사에서 중요한 수많은 회의, 행사, 기념식 등의 역사를 연보 형식으로 정리했다. ‘천도교중앙대교당’과 삼위일체를 이루었던 ‘천도교중앙총부 본관’ ‘수운출세백년기념관’의 세 건물 이야기를 담고 있다. 천도교중앙대교당 등 세 건축물은 건립 당시부터 천도교의 종교행사(시일식, 기념식)는 물론이고 일반 사회 대중들에게 공개되어 있어서, 각종 민족적 행사들이 개최되었던 민족운동의 산실이기도 하다. 또한 이 건축물을 기반으로 ‘어린이날’이 창시되고, ‘개벽’을 비롯한 잡지, 천도교청년당의 신문화운동, 개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특히, 이 대교당을 건립하기 위해 모금한 성금으로 3.1운동이 기획-실행되었고, 잔여 자금은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의 밑거름이 되었다.
천도교가 있었기에 대한민국이 있었다!”
1921년 4월 5일 준공 기념식을 가진 천도교중앙대교당 100년을 맞으며, 그 안에서 있었던 종교행사는 물론이고, 한국 근현대사에서 중요한 수많은 회의, 행사, 기념식 등의 역사를 연보 형식으로 정리했다. ‘천도교중앙대교당’과 삼위일체를 이루었던 ‘천도교중앙총부 본관’ ‘수운출세백년기념관’의 세 건물 이야기를 담고 있다. 천도교중앙대교당 등 세 건축물은 건립 당시부터 천도교의 종교행사(시일식, 기념식)는 물론이고 일반 사회 대중들에게 공개되어 있어서, 각종 민족적 행사들이 개최되었던 민족운동의 산실이기도 하다. 또한 이 건축물을 기반으로 ‘어린이날’이 창시되고, ‘개벽’을 비롯한 잡지, 천도교청년당의 신문화운동, 개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특히, 이 대교당을 건립하기 위해 모금한 성금으로 3.1운동이 기획-실행되었고, 잔여 자금은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의 밑거름이 되었다.
목차
머리말
총론
1920년대 : 1918년~1921년 / 1922년 / 1923년 / 1924년 / 1925년
1926년 / 1927년 / 1928년 / 1929년
1930년대 : 1930년 / 1931년 / 1932년 / 1933년 / 1934년
1935년 / 1936년 / 1937년 / 1938년 / 1939년
1940년대 : 1940년 / 1941년 / 1942년 / 1943년 / 1944년
1945년 / 1946년 / 1947년 / 1948년 / 1949년
1950년대 : 1950년 / 1951년 / 1952년 / 1953년 / 1954년
1955년 / 1956년 / 1957년 / 1958년 / 1959년
1960년대 : 1960년 / 1961년 / 1962년 / 1963년 / 1964년
1965년 / 1966년 / 1967년 / 1968년 / 1969년
1970년대 : 1970년 / 1971년 / 1972년 / 1973년 / 1974년
1975년 / 1976년 / 1977년 / 1978년 / 1979년
1980년대 : 1980년 / 1981년 / 1982년 / 1983년 / 1984년
1985년 / 1986년 / 1987년 / 1988년 / 1989년
1990년대 : 1990년 / 1991년 / 1992년 / 1993년 / 1994년
1995년 / 1996년 / 1997년 / 1998년 / 1999년
2000년대 : 2000년 / 2001년 / 2002년 / 2003년 / 2004년
2005년 / 2006년 / 2007년 / 2008년 / 2009년
2010년대 : 2010년 / 2011년 / 2012년 / 2013년 / 2014년
2015년 / 2016년 / 2017년 / 2018년 / 2019년
2020년대 : 2020년 / 2021년
후기1
후기2
부록 : 결혼식 및 기타행사
총론
1920년대 : 1918년~1921년 / 1922년 / 1923년 / 1924년 / 1925년
1926년 / 1927년 / 1928년 / 1929년
1930년대 : 1930년 / 1931년 / 1932년 / 1933년 / 1934년
1935년 / 1936년 / 1937년 / 1938년 / 1939년
1940년대 : 1940년 / 1941년 / 1942년 / 1943년 / 1944년
1945년 / 1946년 / 1947년 / 1948년 / 1949년
1950년대 : 1950년 / 1951년 / 1952년 / 1953년 / 1954년
1955년 / 1956년 / 1957년 / 1958년 / 1959년
1960년대 : 1960년 / 1961년 / 1962년 / 1963년 / 1964년
1965년 / 1966년 / 1967년 / 1968년 / 1969년
1970년대 : 1970년 / 1971년 / 1972년 / 1973년 / 1974년
1975년 / 1976년 / 1977년 / 1978년 / 1979년
1980년대 : 1980년 / 1981년 / 1982년 / 1983년 / 1984년
1985년 / 1986년 / 1987년 / 1988년 / 1989년
1990년대 : 1990년 / 1991년 / 1992년 / 1993년 / 1994년
1995년 / 1996년 / 1997년 / 1998년 / 1999년
2000년대 : 2000년 / 2001년 / 2002년 / 2003년 / 2004년
2005년 / 2006년 / 2007년 / 2008년 / 2009년
2010년대 : 2010년 / 2011년 / 2012년 / 2013년 / 2014년
2015년 / 2016년 / 2017년 / 2018년 / 2019년
2020년대 : 2020년 / 2021년
후기1
후기2
부록 : 결혼식 및 기타행사
책 속으로
2021년은 천도교의 상징적인 유형건축물로 서울 종로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는 중앙대교당이 건축된 지 100년이 된다. 중앙대교당은 100년 세월 동안 천도교회의 시일예식과 기념식 및 종교의식뿐 아니라 일반 사회단체의 각종 집회와 결혼식장 등의 공간으로 사용하여 우리나라 근대사 요람(搖籃)이었다.
한편 1924년에 건축된 대신사출세백년기념관도 강연회를 비롯한 음악회, 무용발표회 등의 예술 공연과 문화관, 체육관, 학교, 극장 등의 집회공간으로 사용되어 왔다. 중앙대교당은 종로의 중앙기독교청년회관과 함께 1920년과 1930년대 민족운동 관련 단체의 단골 집회공간이었기 때문에 집회가 있을 때는 군중이 모여들어 언제나 일제의 감시대상이 되었던 장소이다.
--- p.8
천도교중앙총부는 1918년 4월 5일 천일기념일을 기하여 의암성사를 비롯한 140여명의 교역자들이 참석한 부구총회(部區總會)를 개최하고 교당건축을 협의하였다. 이 총회에서는 교당을 신축하여 시천교보다 발전을 기하고, 신축 자금은 전국 교인들의 성금으로 충당할 것을 만장일치로 결의하였다.12 이에 따라 전국 교인들에게 호당 10원 이상을 성금으로 낼 것을 종령(宗令)으로 반포하여 모금을 시작하였다. 1918년 8월부터 12월까지 전국 각 교구에서 모금하여 중앙총부에 납부한 금액은 8만 6천여 원에 달하였다.
--- p.15
어려운 난관을 극복하고 중앙대교당과 본관의 건축이 진행되어 결국 1920년 12월에 완공되고 이듬해 2월 28일에는 송현동에 있던 중앙총부를 비롯한 교회월보사, 청년회, 개벽사 등이 경운동 신축 중앙총부 본관 건물로 이전하였다.24 그런데 중앙대교당이 낙성된 정확한 일자는 찾을 수가 없는데도 낙성일자가 1921년 2월 28일로 알려진 것은 이때 중앙총부의 이전 일자를 중앙대교당의 낙성일로 잘못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3월 10일의 대신사 순도 대기도식을 송현동 성화실에서 봉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3월부터 본관건물은 사용이 가능했지만 중앙대교당은 내부공사와 주변 정리가 끝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중앙대교당에서의 최초 행사는 4월 5일 제62회 천일기념식으로 이날 전국 각지에서 4천여 명이 운집한 것으로 보아 기념식과 준공식을 겸하여 거행한 것으로 보인다.
--- p.19
1921-04-05-11:00 [중앙대교당] ▷천일기념식◁ 중앙총부는 제62회 천일기념식을 11시에 4천여 명이 모여 신축교당에서 거행하다. 집례 정광조의 정중한 식사와 강사 오지영의 기념 취지 설명으로 미증유의 성황을 이루다. 식후에 청년회 주최 강연(이돈화)이 진행되고, 20시에는 영남루(嶺南樓)라는 주제로 소인극을 하다.
--- p.32
1922-05-01-19:30 [중앙대교당] ▷천도교소년회 제1주년 기념 어린이의 날 행사◁ 천도교 소년회 1주년 기념식에 즈음하여 ‘어린이의 날’ 행사를 중앙대교당에서 거행하다. 기념식 후 음악 무도 등의 연주로 일반 청중의 환영을 받는 등 대성황을 이루다. 기념식에 앞서 천도교소년회 위원회에서는 소년보호운동을 사회적으로 선전하기 위하여 3종(부형에게, 소년에게, 일반에게)의 선전문을 자동차 2대로 대대적으로 살포하다.
--- p.44
1931-02-15-14:00 [기념관] ▷신간회본부 기념식◁ 신간회본부 제4주년 기념식을 기념관에서 개최하다. 기념식은 신간회 회원과 사회 각계 유지 등 150여명이 참석하여 집행위원장 김병로 사회로 거행되다. 종로서에서는 길야(吉野) 고등계 주임을 비롯한 다수 사복형사가 임석하여 감시하다. 그런데 개회 직전, 경찰이 금지한 투쟁사보고를 식순에 넣은 것이 말썽이 되어 개회가 1시간이 지연되다.
기념식은 결국 3시에 개회하였는데 김병로는 식사에서 신간회 해소론을 배격하자고 역설하다. 이어서 축사에서 주용한은 “신간회는 조선 전체의 마음을 모은 것이니 끝까지 나가야 된다”고 하다가 임석경찰로부터 금지당하다. 또 기념식에 들어온 축전(10통)과 축문(20통)을 낭독하던 중 5통의 내용이 불온하다 하여 압수당하고 나머지만 낭독하다. 이어 이주현의 감상담을 듣고 하오4시에 폐식하다. 이날 하오8시에 개최하려던 기념강연회와 음악회는 경찰의 금지로 중지되다.
--- p.188
1945-12-24-11:00 [중앙대교당] ▷제48회 인일기념식(임정요인 참석)◁ 인일기념식을 김구주석과 임정요인, 권동진 오세창 및 교인 7백여명이 참석하여 정광조 집례, 이연숙 경전봉독, 오상준 기념사로 봉행하다. 한순회씨는 “오늘은 3세교주 의암 선생의 승통 47번째의 경축기념일이다. 기미 3월 1일 의암성사가 33인과 더불어 조선민족을 대표하여 세계에 조선 독립을 선언한 후 의암 선생의 숙망은 오늘에야 달성되었다.”는 기념사를 하다. (중략)
김구 주석이 “나는 어렸을 적에 해월-수운의 오기-선생의 용담유사에 왜(倭)는 불구대천의 원수라는 구절을 읽고 크게 감동되어 그것을 마음의 신조로 지켜 오늘에 이르렀다. 하늘(天)도 무심치 않아 왜는 망했으니 제국주의가 우리 땅에 다시 야만적 행위를 하지 못하게 해월, 의암 선생의 유지를 본받아 도덕의 기초위에 문화가 높은 새 국가를 건설하자” 답사를 하고, 조소앙, 홍진(洪震), 김원봉 씨도 답사를 하다.
--- p.300
1979-03-24-17:00 [중앙대교당] ▷어린이운동 선구자 추모식◁ 색동회(회장 정인섭)는 오후5시 중앙대교당에서 어린이운동 선구자 19인에 대한 추모식을 갖고 유족들에게 추모패를 증정하다. 강소천(姜小泉) 고한승(高漢承) 김기전(金起田) 마해송(馬海松) 박흥민(朴興珉) 방정환(方定煥) 연성흠(延星欽) 이응창(李應昌) 이정호(李定鎬) 임인수(林仁洙) 장무쇠(張茂釗) 조철호(趙喆鎬) 진장섭(秦長燮) 최계락(崔啓洛) 최병화(崔秉和) 최영주(崔泳柱) 한정동(韓晶東) 홍난파(洪蘭坡) 황광은(黃光恩) 등.
--- p.489
2003-03-11-19:00 [중앙대교당] ▷‘양심수 박경순에게 희망을’ 행사◁ 민가협은 양심수 석방을 위한 작은 문하제인 “박경순에게 희망을”이라는 행사를 중앙대교당에서 개최하다. 민주당 신기남 의원 등 23명은 「양심수사면촉구결의안」을 발의, 최근 사회적 인권 문제로 부각되고 있는 양심수들의 석방과 사문을 촉구했다. 우리나라에는 국제엠네스티에서 양심수로 선정한 26인과 인권 관련 시민사회단체에서 발표한 60여 명이 감옥에 있다.
--- p.643
2015-06-14-14:00 [중앙대교당] ▷6.15공동선언 15주년 민족통일대회◁ 6.15공동선언 15돌을 맞아 전국에서 3,500여명이 모여 「민족통일대회」를 중앙대교당 경내 광장에서 개최하다.
식전에 민족종교협의회의 기천문, 100명의 율동노래를 공연하고, 기념식은 민족종교협의회장 한양원의 인사말, 남측준비위원회 상임의장 이창복의 기조연설, 한국여성단체 의장 김금옥과 민노총위원장 한상균 및 광복 70돌 서울준비위 대표 조헌정 연설에 이어 예술유랑단과 노래패 우리나라, 가수 안치환, 6.15합창단의 문화공연, 평화통일과 세계평화를 기원하는 「남북 해외공동선언문」을 낭독하다. 대회 후에 경운동에서 서울역까지 시가행진을 하며 퍼퍼먼스를 진행하다.
앞서 6.15남측준비위원회는 4월 3일 프레스센터에서 개최한 발기인대회에서 박남수 교령이 명예상임대표, 동민회상임의장 고윤지가 공동대표, 동민회 사무총장 고시형이 대외협력위원장으로 선임되다.
한편 1924년에 건축된 대신사출세백년기념관도 강연회를 비롯한 음악회, 무용발표회 등의 예술 공연과 문화관, 체육관, 학교, 극장 등의 집회공간으로 사용되어 왔다. 중앙대교당은 종로의 중앙기독교청년회관과 함께 1920년과 1930년대 민족운동 관련 단체의 단골 집회공간이었기 때문에 집회가 있을 때는 군중이 모여들어 언제나 일제의 감시대상이 되었던 장소이다.
--- p.8
천도교중앙총부는 1918년 4월 5일 천일기념일을 기하여 의암성사를 비롯한 140여명의 교역자들이 참석한 부구총회(部區總會)를 개최하고 교당건축을 협의하였다. 이 총회에서는 교당을 신축하여 시천교보다 발전을 기하고, 신축 자금은 전국 교인들의 성금으로 충당할 것을 만장일치로 결의하였다.12 이에 따라 전국 교인들에게 호당 10원 이상을 성금으로 낼 것을 종령(宗令)으로 반포하여 모금을 시작하였다. 1918년 8월부터 12월까지 전국 각 교구에서 모금하여 중앙총부에 납부한 금액은 8만 6천여 원에 달하였다.
--- p.15
어려운 난관을 극복하고 중앙대교당과 본관의 건축이 진행되어 결국 1920년 12월에 완공되고 이듬해 2월 28일에는 송현동에 있던 중앙총부를 비롯한 교회월보사, 청년회, 개벽사 등이 경운동 신축 중앙총부 본관 건물로 이전하였다.24 그런데 중앙대교당이 낙성된 정확한 일자는 찾을 수가 없는데도 낙성일자가 1921년 2월 28일로 알려진 것은 이때 중앙총부의 이전 일자를 중앙대교당의 낙성일로 잘못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3월 10일의 대신사 순도 대기도식을 송현동 성화실에서 봉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3월부터 본관건물은 사용이 가능했지만 중앙대교당은 내부공사와 주변 정리가 끝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중앙대교당에서의 최초 행사는 4월 5일 제62회 천일기념식으로 이날 전국 각지에서 4천여 명이 운집한 것으로 보아 기념식과 준공식을 겸하여 거행한 것으로 보인다.
--- p.19
1921-04-05-11:00 [중앙대교당] ▷천일기념식◁ 중앙총부는 제62회 천일기념식을 11시에 4천여 명이 모여 신축교당에서 거행하다. 집례 정광조의 정중한 식사와 강사 오지영의 기념 취지 설명으로 미증유의 성황을 이루다. 식후에 청년회 주최 강연(이돈화)이 진행되고, 20시에는 영남루(嶺南樓)라는 주제로 소인극을 하다.
--- p.32
1922-05-01-19:30 [중앙대교당] ▷천도교소년회 제1주년 기념 어린이의 날 행사◁ 천도교 소년회 1주년 기념식에 즈음하여 ‘어린이의 날’ 행사를 중앙대교당에서 거행하다. 기념식 후 음악 무도 등의 연주로 일반 청중의 환영을 받는 등 대성황을 이루다. 기념식에 앞서 천도교소년회 위원회에서는 소년보호운동을 사회적으로 선전하기 위하여 3종(부형에게, 소년에게, 일반에게)의 선전문을 자동차 2대로 대대적으로 살포하다.
--- p.44
1931-02-15-14:00 [기념관] ▷신간회본부 기념식◁ 신간회본부 제4주년 기념식을 기념관에서 개최하다. 기념식은 신간회 회원과 사회 각계 유지 등 150여명이 참석하여 집행위원장 김병로 사회로 거행되다. 종로서에서는 길야(吉野) 고등계 주임을 비롯한 다수 사복형사가 임석하여 감시하다. 그런데 개회 직전, 경찰이 금지한 투쟁사보고를 식순에 넣은 것이 말썽이 되어 개회가 1시간이 지연되다.
기념식은 결국 3시에 개회하였는데 김병로는 식사에서 신간회 해소론을 배격하자고 역설하다. 이어서 축사에서 주용한은 “신간회는 조선 전체의 마음을 모은 것이니 끝까지 나가야 된다”고 하다가 임석경찰로부터 금지당하다. 또 기념식에 들어온 축전(10통)과 축문(20통)을 낭독하던 중 5통의 내용이 불온하다 하여 압수당하고 나머지만 낭독하다. 이어 이주현의 감상담을 듣고 하오4시에 폐식하다. 이날 하오8시에 개최하려던 기념강연회와 음악회는 경찰의 금지로 중지되다.
--- p.188
1945-12-24-11:00 [중앙대교당] ▷제48회 인일기념식(임정요인 참석)◁ 인일기념식을 김구주석과 임정요인, 권동진 오세창 및 교인 7백여명이 참석하여 정광조 집례, 이연숙 경전봉독, 오상준 기념사로 봉행하다. 한순회씨는 “오늘은 3세교주 의암 선생의 승통 47번째의 경축기념일이다. 기미 3월 1일 의암성사가 33인과 더불어 조선민족을 대표하여 세계에 조선 독립을 선언한 후 의암 선생의 숙망은 오늘에야 달성되었다.”는 기념사를 하다. (중략)
김구 주석이 “나는 어렸을 적에 해월-수운의 오기-선생의 용담유사에 왜(倭)는 불구대천의 원수라는 구절을 읽고 크게 감동되어 그것을 마음의 신조로 지켜 오늘에 이르렀다. 하늘(天)도 무심치 않아 왜는 망했으니 제국주의가 우리 땅에 다시 야만적 행위를 하지 못하게 해월, 의암 선생의 유지를 본받아 도덕의 기초위에 문화가 높은 새 국가를 건설하자” 답사를 하고, 조소앙, 홍진(洪震), 김원봉 씨도 답사를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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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03-24-17:00 [중앙대교당] ▷어린이운동 선구자 추모식◁ 색동회(회장 정인섭)는 오후5시 중앙대교당에서 어린이운동 선구자 19인에 대한 추모식을 갖고 유족들에게 추모패를 증정하다. 강소천(姜小泉) 고한승(高漢承) 김기전(金起田) 마해송(馬海松) 박흥민(朴興珉) 방정환(方定煥) 연성흠(延星欽) 이응창(李應昌) 이정호(李定鎬) 임인수(林仁洙) 장무쇠(張茂釗) 조철호(趙喆鎬) 진장섭(秦長燮) 최계락(崔啓洛) 최병화(崔秉和) 최영주(崔泳柱) 한정동(韓晶東) 홍난파(洪蘭坡) 황광은(黃光恩) 등.
--- p.489
2003-03-11-19:00 [중앙대교당] ▷‘양심수 박경순에게 희망을’ 행사◁ 민가협은 양심수 석방을 위한 작은 문하제인 “박경순에게 희망을”이라는 행사를 중앙대교당에서 개최하다. 민주당 신기남 의원 등 23명은 「양심수사면촉구결의안」을 발의, 최근 사회적 인권 문제로 부각되고 있는 양심수들의 석방과 사문을 촉구했다. 우리나라에는 국제엠네스티에서 양심수로 선정한 26인과 인권 관련 시민사회단체에서 발표한 60여 명이 감옥에 있다.
--- p.643
2015-06-14-14:00 [중앙대교당] ▷6.15공동선언 15주년 민족통일대회◁ 6.15공동선언 15돌을 맞아 전국에서 3,500여명이 모여 「민족통일대회」를 중앙대교당 경내 광장에서 개최하다.
식전에 민족종교협의회의 기천문, 100명의 율동노래를 공연하고, 기념식은 민족종교협의회장 한양원의 인사말, 남측준비위원회 상임의장 이창복의 기조연설, 한국여성단체 의장 김금옥과 민노총위원장 한상균 및 광복 70돌 서울준비위 대표 조헌정 연설에 이어 예술유랑단과 노래패 우리나라, 가수 안치환, 6.15합창단의 문화공연, 평화통일과 세계평화를 기원하는 「남북 해외공동선언문」을 낭독하다. 대회 후에 경운동에서 서울역까지 시가행진을 하며 퍼퍼먼스를 진행하다.
앞서 6.15남측준비위원회는 4월 3일 프레스센터에서 개최한 발기인대회에서 박남수 교령이 명예상임대표, 동민회상임의장 고윤지가 공동대표, 동민회 사무총장 고시형이 대외협력위원장으로 선임되다.
--- p.788
출판사 리뷰
해방 공간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천도교중앙대교당을 방문한 김구 선생과 요인들은 “이 대교당이 있었기에 3.1운동이 있었고, 3.1운동이 있었기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었으며, 임시정부가 있었기에 오늘날 광복의 조국, 대한민국이 있습니다.”라고 설파하였다. 이는 3.1운동을 주도적으로 기획하고 인적?물적 역량을 대부분 기여했던 천도교의 역할을 말할 뿐만 아니라, 구체적으로 이 천도교중앙대교당의 건축 성금의 많은 부분이 3.1운동과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자금으로 유입되었던 사실을 반영한다.
천도교중앙대교당은 1920년 말에 완공되어 사용하기 시작했으나, 공식적인 준공 기념식은 1921년 4월 5일 천일기념일(동학 창도주 수운 최제우 선생이 1860년 4월 5일 동학을 창도한 기념일)에 진행되었다. 천도교중앙대교당은 한국 자생 종교로서 한국 근현대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련을 맺으며 성장 발전해 온 천도교의 대표적인 종교 건축물이다.
특히 이 대교당은 창도 이래로 ‘동비(東匪)’나 ‘동학당(東學黨)’ 등으로 지목되며, 정학(正學, =儒學)을 어지럽히는 이단이자, 조정을 전복하려는 불온 세력으로 금기시되어 온 동학이 ‘천도교’라는 근대적 종교 명칭으로 천하에 그 존재를 알리고, ‘종교 자유’라는 세계 공법(公法)에 기대어 동학의 종교적, 사회적, 정치적 자유를 확보하고 기정사실화하기 위한 노력의 산물이기도 하다.
천도교중앙대교당은 당시, 내부에 기둥이 없이[無柱建築] 통으로 지어진 건물로서 조선 최대의 건축물이었다. 그러므로 천도교의 종교의식은 물론이고 당시 활발했던 각종 사회단체의 창립식, 기념식, 강연회나 문화공연 등이 활발하게 열렸던, ‘민족적 활동 공간’이기도 하였다. 이는 동학-천도교가 처음부터 보국안민과 민족개벽, 사회개벽, 정신개벽을 표방한 점과도 상통한다. 당시 천도교는 이러한 시대적 과제를 천도교 독단적인 과제가 아니라, 민족적-전 인류적 과제로 제창하였고, 이를 당대 민중(인민, 민족)과 더불어 함께하는 것을 추구하였다.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소파 방정환 선생을 중심으로 최초의 어린이날(1922)이 열린 이래로 일제강점기 내내 어린이를 위한 동화구연과 문화공연, 학생(고보, 전문)들의 강연회, 웅변대회나 청년단체 회합, 일반 사회단체의 중요 회의나, 형평사, 신간회 등의 민중운동, 민족운동 단체들의 대회와 정치사회 활동 등이 열려서 이곳은 항상 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당대 최고의 핫 플레이스였다.
그런 만큼 이 천도교중앙대교당은 수시로 일제 당국의 봉쇄조치나 압수수색이 이루어지는 단골장소이기도 했다. 6.10만세운동(1926)이나 무인멸왜기도(1938), 개벽지 압수 등이 대표적이며, 일제강점기 말기, 만주사변과 ‘태평양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일제 당국에 징발되어 관공서나 군사 시설로 사용되기까지 하였다.
해방공간에서도 이 천도교중앙대교당은 좌익과 우익을 가리지 않고 수많은 사회단체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전개하는 단골장소였으며, 특히 김구, 이승만, 김원봉 등 당대의 내로라하는 정치인사들이 모두 이 중앙대교당을 방문하여 천도교의 주요 종교행사에 축사를 하고, 또한 민족의 운명과 동조(同調)해 온 천도교의 위대한 역사에 대하여 찬사와 사의를 아끼지 않았다.
공동 편저자 중 한 사람인 박길수는 천도교중앙대교당의 역사적, 종교적 의의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중앙대교당이 천도교의 창도 목적인 보국안민 포덕천하, 그리고 다시 개벽의 산실로 국내는 물론 전 세계 사람들의 뇌리에 기억될 수 있도록 해 나가는 일입니다. 천도교중앙대교당이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지 100년! 지금-여기에서 천도교중앙대교당은 동학 창도 이래 순도순국하신 스승님과 선열들, 선배 개벽꾼들의 비원과 희망, 역사적 영광과 상처를 모두 안고 새로운 백년 역사, 만년 개벽을 향한 고비원주의 날갯짓을 시작합니다.
그렇게 하는 데는 물적인 공간뿐만 아니라 그것을 운용하고 이용하며 활용하여 포덕과 수도, 개벽운동을 지속하는 ‘사람’이 더욱 중요합니다. 스승님과 선열, 선배들의 바람과 마음과 희망을 담아 이를 미래로 이어가려는 천도교인은 물론이고, 천도교중앙대교당을 중심으로 한 한국 근현대사와 동학-천도교의 사상과 철학, 다시개벽의 미래를 공부하고 맞이하러 찾아오는 발길이, 이 세기말적인 코로나 사태 이후에 비로소 활발하게 될 것으로, 알고, 믿고, 기쁘게 느껴 마지않습니다. 크게 절하며 한울님께 고합니다.”
천도교중앙대교당은 1920년 말에 완공되어 사용하기 시작했으나, 공식적인 준공 기념식은 1921년 4월 5일 천일기념일(동학 창도주 수운 최제우 선생이 1860년 4월 5일 동학을 창도한 기념일)에 진행되었다. 천도교중앙대교당은 한국 자생 종교로서 한국 근현대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련을 맺으며 성장 발전해 온 천도교의 대표적인 종교 건축물이다.
특히 이 대교당은 창도 이래로 ‘동비(東匪)’나 ‘동학당(東學黨)’ 등으로 지목되며, 정학(正學, =儒學)을 어지럽히는 이단이자, 조정을 전복하려는 불온 세력으로 금기시되어 온 동학이 ‘천도교’라는 근대적 종교 명칭으로 천하에 그 존재를 알리고, ‘종교 자유’라는 세계 공법(公法)에 기대어 동학의 종교적, 사회적, 정치적 자유를 확보하고 기정사실화하기 위한 노력의 산물이기도 하다.
천도교중앙대교당은 당시, 내부에 기둥이 없이[無柱建築] 통으로 지어진 건물로서 조선 최대의 건축물이었다. 그러므로 천도교의 종교의식은 물론이고 당시 활발했던 각종 사회단체의 창립식, 기념식, 강연회나 문화공연 등이 활발하게 열렸던, ‘민족적 활동 공간’이기도 하였다. 이는 동학-천도교가 처음부터 보국안민과 민족개벽, 사회개벽, 정신개벽을 표방한 점과도 상통한다. 당시 천도교는 이러한 시대적 과제를 천도교 독단적인 과제가 아니라, 민족적-전 인류적 과제로 제창하였고, 이를 당대 민중(인민, 민족)과 더불어 함께하는 것을 추구하였다.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소파 방정환 선생을 중심으로 최초의 어린이날(1922)이 열린 이래로 일제강점기 내내 어린이를 위한 동화구연과 문화공연, 학생(고보, 전문)들의 강연회, 웅변대회나 청년단체 회합, 일반 사회단체의 중요 회의나, 형평사, 신간회 등의 민중운동, 민족운동 단체들의 대회와 정치사회 활동 등이 열려서 이곳은 항상 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당대 최고의 핫 플레이스였다.
그런 만큼 이 천도교중앙대교당은 수시로 일제 당국의 봉쇄조치나 압수수색이 이루어지는 단골장소이기도 했다. 6.10만세운동(1926)이나 무인멸왜기도(1938), 개벽지 압수 등이 대표적이며, 일제강점기 말기, 만주사변과 ‘태평양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일제 당국에 징발되어 관공서나 군사 시설로 사용되기까지 하였다.
해방공간에서도 이 천도교중앙대교당은 좌익과 우익을 가리지 않고 수많은 사회단체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전개하는 단골장소였으며, 특히 김구, 이승만, 김원봉 등 당대의 내로라하는 정치인사들이 모두 이 중앙대교당을 방문하여 천도교의 주요 종교행사에 축사를 하고, 또한 민족의 운명과 동조(同調)해 온 천도교의 위대한 역사에 대하여 찬사와 사의를 아끼지 않았다.
공동 편저자 중 한 사람인 박길수는 천도교중앙대교당의 역사적, 종교적 의의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중앙대교당이 천도교의 창도 목적인 보국안민 포덕천하, 그리고 다시 개벽의 산실로 국내는 물론 전 세계 사람들의 뇌리에 기억될 수 있도록 해 나가는 일입니다. 천도교중앙대교당이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지 100년! 지금-여기에서 천도교중앙대교당은 동학 창도 이래 순도순국하신 스승님과 선열들, 선배 개벽꾼들의 비원과 희망, 역사적 영광과 상처를 모두 안고 새로운 백년 역사, 만년 개벽을 향한 고비원주의 날갯짓을 시작합니다.
그렇게 하는 데는 물적인 공간뿐만 아니라 그것을 운용하고 이용하며 활용하여 포덕과 수도, 개벽운동을 지속하는 ‘사람’이 더욱 중요합니다. 스승님과 선열, 선배들의 바람과 마음과 희망을 담아 이를 미래로 이어가려는 천도교인은 물론이고, 천도교중앙대교당을 중심으로 한 한국 근현대사와 동학-천도교의 사상과 철학, 다시개벽의 미래를 공부하고 맞이하러 찾아오는 발길이, 이 세기말적인 코로나 사태 이후에 비로소 활발하게 될 것으로, 알고, 믿고, 기쁘게 느껴 마지않습니다. 크게 절하며 한울님께 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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