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준하
장준하 (張俊河)
대한민국 제1공화국의 문교부 국민정신계몽 담당관 / 임기 1950년 3월 2일 - 1953년 4월 30일 / 대한민국 제2공화국의 국토건설단 기획부장 / 임기 1960년 11월 28일 - 1961년 5월 20일 / 대한민국 제2공화국의 국토건설단 단장 / 임기 1961년 5월 20일 - 1961년 12월 18일
이름
별명 가명 김신철(金信鐵)
신상정보
출생일 1918년 8월 27일(호적으로는 1915년, 일본군명부 기록으로는 1918년 7월 20일) / 출생지 일제 강점기 평안북도 의주군 고성면 연하동 / 사망일 1975년 8월 17일(56세) / 사망지 대한민국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도평리 약사봉 / 학력 대관보통학교 졸업 / 숭실중학교 전학 / 신성중학교 졸업 / 도요대학 예과 철학과 중퇴 / 일본신학교 중퇴 / 한신대학교 학사 / 경력 신민당 당무위원 겸 최고위원 / 국민당 상임고문 겸 최고위원 / 정당 무소속 / 배우자 김희숙 / 자녀 슬하 3남 2녀 / 종교 개신교 (장로회) / 웹사이트 장준하 기념사업회
군사 경력
복무 일본 육군 / 국민혁명군 /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 / 복무기간 1944년 1월 ~ 1944년 7월 7일(일본 육군) / 1944년 8월 ~ 1945년 2월(국민혁명군) / 1945년 2월 20일 ~ 1945년 11월 23일(광복군) / 최종계급 국민혁명군 준위 / 한국 광복군 대위 / 주요 참전 중일 전쟁 /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장준하(張俊河, 1918년 8월 27일~1975년 8월 17일)는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의 정치가, 종교인, 언론인, 사회운동가이다.
주요 이력
본관은 안동으로, 일제강점기에 교육 활동을 하였고, 일본군에 학도병으로 자원입대 하여, 1944년 1월 제65사단 7991부대에 배치되었으나 그해 7월 장쑤성 쉬저우에서 탈출, 중국 중앙군관학교에서 훈련을 받고 국민혁명군준위가 되었다.
1945년 중국 쓰촨성 충칭의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찾아가 1945년 2월부터 한국광복군 소위로 복무하였다. 한국광복군으로 재직 중 미국 CIA의 전신인 전략첩보대(OSS)에서 활동하면서 3개월간 국내 진공작전에 가담하여, 국내 밀파 특수공작원으로 대기하던 중 8.15 광복을 맞이하였다. 1945년 11월 임정 귀국 제1진으로 귀국, 이후 김구의 비서로 있다가 이범석의 민족청년단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제1공화국에서 공무원에 채용되어 서기관으로 임용되었고, 1950년 문교부 국민정신계몽 담당관, 1952년 문교부 국민사상연구원 기획과장, 서무과장, 사무국장 등을 지내고 《사상계》를 창간하였으며, 1956년 동인문학상을 제정하였다. 《사상계》는 당시 자유당 정권을 규탄하며 4·19 혁명의 단초가 되었으며, 혁명 이후 제2공화국에서 장면 내각의 문교부 대학교육심의회 의원, 국토건설단 기획부장, 국토건설단장 등을 지냈다.
5·16 쿠데타 이후 한일회담 반대운동, 베트남 전쟁 파병반대운동에 가담했다. 6대 대선에서 윤보선의 지지 유세 중 박정희의 친일파,남로당 경력을 문제 삼았다가 선거법 위반으로 옥고를 치렀고[3], 이후 신민당과 윤보선과 함께 국민당에서 활동했다. 1967년부터는 7대 국회의원을 지내 국방위에서 활동하였다. 1974년 대통령 긴급조치 1호 위반 혐의로 기소돼 징역 15년과 자격정지 15년 선고에 대해 2013년 1월 24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1975년 박정희 정권에 대항하는 모종의 거사를 준비 도중, 8월 17일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의문의 최후를 맞았다.
가명으론 김신철(金信鐵)을 썼으며, 일본식 창씨개명 이름은 '하리야스 슌가'(張安俊河)이다.
생애 / 어린 시절
출생과 가계
1915년 평안북도 의주군 고성면 연하동에서 장로교 목사이던 장석인(張錫仁)과 김경문(金京文)의 5남 1녀 중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으며 3살 즈음에 삭주군으로 이사와서 해방 후 월남할 때까지 삭주에서 거주한 그는 어려서 형이 요절한 관계로 인하여 사실상의 장남이 되었으므로, 할아버지 장윤희(張潤熙)는 그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고 한다. 이후 동생으로 장익하, 장명하(張明河)와 장창하(張昌河), 여동생 장영하(張英河) 등이 태어났다. 할아버지 장윤희는 일찍 개명한 개화 인사로서, 기독교 사상을 받아들여 개신교장로가 되었다. 학문이 뛰어난 지식인이었던 할아버지는 한학에 밝아, 중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으며, 한의사와 한학자로 활동하였다. 또한 고향 의주에 양성학교(陽成學校)라는 사립학교를 세우고 교사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장윤희는 상투를 틀지 않았다 하며 과거를 보기 위해 주자학을 공부하였으며, 신학문의 영향으로 기독교인이 되어, 가족까지 전도하여 기독교 가정을 이룩했다. 이후 깊은 신앙심으로 아들을 개신교 목사로 길러냈으며, 이는 아들 장석인과 손자 장준하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장준하는 기독교 루수 집안이었지만 후에 아내가 된 김희숙을 따라 천주교로 개종하게 된다.
아버지 장석인은 지식인으로 기독교 학교인 신성중학교를 졸업한 뒤 1926년 평양의 숭실전문학교 입학하여 1930년에 졸업하였다. 그 후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일명 평양신학교)를 졸업하여 장로교 목사안수를 받았고, 숭실중학교의 교사로 부임하였다. 목사 안수를 받았던 아버지 장석인은 숭실학교 교목 외에도 후에 원동교회(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와 연희동교회(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그리고 감천중앙교회(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 내의 가정교회)등에서 담임목사로, 장로교신학대학의 강사를 지내기도 했다.
유년기
1920년 아버지 장석인이 독립운동에 가담했다가 일본 경찰의 추적을 받으면서 의주군을 떠나 삭주군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교육자이기도 했던 아버지 장석인은 자신의 사재를 들여 대관유치원을 세우기도 했다. 훗날 리영희가 이 대관유치원을 다녔다고 한다.
13살이 되던 해에 그는 삭주 대관보통학교 5학년에 들어갔다. 1933년 삭주(朔州) 대관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아버지 장석인이 교사로 근무하던 평양부 숭실중학교에 재학하였다.
그 후 아버지 장석인이 선천(宣川) 신성중학교의 교목이 되자 장준하는 아버지를 따라 선천 신성중학교로 전학하였다. 1937년 신성중학교 교장 장이욱이 수양동우회 사건 관련자로 검거되자, 이에 장준하는 학생대표를 동원하여 교장 석방을 위한 동맹시위 운동을 전개했다가 유치장에 갇히기도 했다. 아버지 장석인은 기독교인의 양심으로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신성중학교 교사를 사퇴했으며 전도사로 목회하였다.
교사생활과 도일 유학
장준하는 1938년 3월 신성중학교를 졸업한 후 숭실전문학교를 거쳐 부친처럼 개신교 목사가 될 계획이었으나 숭실전문학교가 신사참배 거부운동으로 폐쇄당하자, 1938년 평안북도 정주에 있던 신안소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3년 동안 교사로서 활동하였다. 그 뒤 친구인 마라톤 선수 김익준의 권유로 일본 유학을 결심하게 되고 교사를 그만두고 일본에 유학하였다.
1940년 일본으로 건너간 장준하는 1941년 4월 도요 대학 철학과 예과를 거쳐 1942년 4월 장로교 계통인 일본신학교에 입학했다. 장준하가 입학할 무렵 전택부, 문익환, 김관석, 박봉랑 등이 같은 학교에 있었다. 일본신학교 재학 중 장준하는 선배 박영출 목사가 담임하는 숭덕교회(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의 위원으로도 활동했다.
1943년 11월 장준하는 신안소학교 시절 제자이자, 같은 마을에 살던 김준덕과 노선삼의 맏딸인 김희숙과 결혼하였다. 김희숙의 집은 부친 김준덕의 중국 망명으로 조선총독부의 주목을 받았고, 김희숙은 이러한 사정을 장준하에게 알렸다. 결혼을 하는 것이 김희숙을 보호하는 길이라 확신하게 된 장준하는 김희숙의 편지를 받고 바로 귀국하여 김희숙과 결혼하였다. 결혼식은 1944년 1월 5일에 올렸다.
청년기
일본군 입대와 탈출
1943년, 일본군 입대를 거부하고 노동어용령으로 끌려가는 친구 최기일을 기차역까지 마중나가 전송했다.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 그는 김창정(金昌禎) 등 소수의 친구들과 함께 최기일을 전송했다.
일제 강점기 당시 그는 일제에 의해 강제징집된 것으로 알려졌었다. 그러나 고향 친구 최기일은 자원 입대.라고 진술하였다. 최기일은 장준하의 일군 입대를 열심히 만류하였으나 그는 듣지 않고 학도병에 자원하여 입대했다.
후일 최기일에 의하면 '그는 어떤 뜻을 품었는지 일본군에 입대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회고하였다. 장준하 역시 자신이 자원 입대했다고 밝혔다. 자원 입대한 이유를 그는 자신의 자서전 《돌베개》에서 밝혔다. '도쿄의 일본신학교에 다녔던 장선생은 ‘우리 집안의 불행을 내 한몸으로 대신하고자 이른바 그 지원에 나를 맡겨 버렸다’고 회고했다. 그의 부친은 일본의 신사참배를 거부한 개신교 목사로 왜정의 요시찰 인물이었다. 학병을 기피하면 자신의 약혼자가 정신대에 끌려가는 등 가족과 주변에 가할 탄압 때문에 학병에 지원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또한, 학병으로 지원한 다음 중국에만 파견되면 일군을 탈출하고 중경 임시정부에 편입되기를 바랬기 때문이다. 그는 스스로 이를 환상이라 표현할 정도로 어려운 일이 었으나, 그것만 믿고 지원했다.
탈출과 이동
1944년 1월 20일 일본 육군에 학도병으로 입소하여 훈련을 받고 평양주둔 제30사단 치중대에서 치중병으로 복무하였다.
2월 17일 중지나 주둔 일본군 제65사단 치중대(센(専) 7991부대)에 배속 되었고, 같은 해 7월 7일 중국 장쑤성(江蘇省) 쉬저우(徐州)에서 탈영하였다.
1944년 7월에 경비가 허술한 틈을 타 소수의 동지들과 함께 쉬저우 시내에서 일본군을 탈영, 중국 팔로군에서 김준엽, 노능서 등 역시 일본군을 탈출한 조선인 청년들을 만나 함께 걸어서 안후이성 임천까지 걸어갔다. 일본군에게 발각될 염려가 있었으므로 차량을 이용하지 못하고 걸어서 갔다. 탈영하면서 수배를 피해 민간인 복장을 갖추고 충칭까지 향했다. 이때 하늘의 별을 보고 성경에 나오는 돌베개를 생각하며, 나라를 잃은 부끄러운 선조들의 모습을 보고 반성하며 후손에게 부끄럽지 않은 선조들이 되자고 다짐했다. 후일 그의 자서전 돌베개는 이때 떠올린 야곱의 돌베개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라 한다.
탈영후 만난 김준엽과 평생 우정을 나눈다. 군입대 전 장준하는 목사 지망생으로 니혼신학교에, 김준엽은 게이오기주쿠대학 문학부 예과에 재학중이었다. 그들은 도쿄 유학생이었지만 서로 알고 지내는 사이는 아니었다. 다만 최기일은 이 둘과 서로 알고 지내던 사이었는데 최기일은 김준엽과 신의주고보와 게이오기주쿠 대학 동창이었고, 장준하와는 삭주군 대관동에서 어린시절부터 같이 살아온 고향친구였다. 하지만 그들은 일제의 학병 요구에 가장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방식을 선택했다는 점에서 같았다. 두 사람은 마치 합의라도 한 듯이 '숨거나 피하지 않고 학병에 응하되 곧 탈영하여 광복군에 합류한다'는 방침을 미리 굳히고 떠났던 것이다. 1944년 3월 29일 새벽, 김준엽이 탈영을 했고, 1944년 7월 7일 장준하가 탈영했다.
"갑자기 마을 사람들이 왁자지껄 하는 소리가 들렸다. 마당으로 뛰어나가 보니 일본군복 차림의 청년들이 있었는데, 그 지성적인 얼굴과 느낌으로 대번 나는 나와 같은 한국의 학병일 것으로 단정했다. 한국분들이시죠?" 그렇다는 대답을 듣자마자 와락 달려들어 그들을 차례로 꽉 끌어안았다. 나는 이때처럼 감격에 차고 희열에 넘친 일은 없었다. (중략) 나와 장준하 형과의 만남은 이때가 처음인데 이로부터 그와 나는 친형제 이상으로 가깝게 지냈으며, 그가 1975년 8월에 별세할 때까지 연인처럼 일생고락을 함께 하게 된다. - 김준엽 회고록, <장정> 1권, 249쪽"
충칭 도착과 광복군 입대
1944년 시안에서 탈출한 장준하, 김준엽 등 50명이 노하구에 도착하자 이 정보를 입수한 김원봉은 장준하와 일행을 광복군 제1지대로 받아들이려 했으나 거절당했다. 김원봉은 사람을 보내 장준하 일행이 떠나는 것을 막으려 했다. 탈영하여 노하구까지 왔던 이들이 충칭으로 떠나려 하자 제1지대의 한 중대장을 통해 이들의 이탈을 막으려 노력했다. 설득의 내용은 '노하구에 계속 머물러서 제1지대를 보강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장준하 등은 거절했다. 장준하는 이를 두고 '청년동지 50명을 결속시켜 노하구의 기반을 확고히 하겠다는 야심인데, 이것은 실상 임정의 김약산의 속셈이었다. 이 대장이라는 사람을 통해 김약산은 그의 독자적인 세력을 확장 구축해 보려고 공작을 편 것이다. 라고 했다.
김원봉을 공산주의자라고 확신했던 장준하는 그가 충칭까지 비행기편을 주선해준다는 약속조차 의심했다. '우리에게 애호와 지나친 친절을 베풀고, 헛된 약속으로 비행기편까지 알선해주겠다는 허풍은 전부 그들의 수작.'이라 했다.
김원봉의 영입 제의를 거절하고 일행들과 함께 걸어서 안후이성 임천에 도착, 중국 중앙군관학교 임천분교(臨川分校)의 한국광복군 간부 훈련반에 들어갔다. 이때 〈등불〉을 발행했다. 1944년 8월 중국 중앙군관학교 임천군관학교(분교)에서 3개월간 군사교육을 받았고, 1944년 12월 중국 중앙군 준위로 임관되었다. 그 뒤 장준하와 김준엽 등은 무사히 쓰촨성 충칭에 도착하였다.
광복군 활동
그 후 1945년에 쓰촨성 충칭(重慶)으로 가 1945년 1월 31일 중경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도착하였다. 한편 김원봉은 장준하 등을 끌어들이려고 노력하였는데, 뒷날 장준하는 조선민족혁명당의 김원봉 계열이 심지어 미인계를 쓰기도 하였다고 비판하였다.이어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부의 파벌 다툼에 염증을 느끼고 이를 비판하기도 했다. 임시정부의 고착화된 파벌다툼에 염증을 느낀 그는 임정 요인들의 분열상을 규탄하며 다시 일본군으로 돌아가 임정을 폭격하겠다며 요인들을 비판하였다. 한편 그는 김구의 만류로 김원봉 비판을 그만두기도 했다.
1945년 2월 20일 충칭(重慶)에서 광복군에 편입하여 광복군 장교로 임관, 광복군 소위가 되어 충칭 토교대(土橋隊)에 거주하였다. 그는 친구인 김준엽 등과 함께 임정 요인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의 회고담을 듣기도 했다. 또한 여기서 등불3·4·5호를 발간하였다.
이후 1945년 11월까지 충칭에 체류하다 귀국하였다. 장준하는 1945년 4월 29일 18명과 함께 서안에 있던 광복군 제2지대에 배속되어 활동하던 중, 이승만, 김구, 이범석 등의 주도하에 한국 광복군과 미국 육군의 합동훈련 협정이 체결되면서 미군 전략첩보대(OSS) 대원이 되어 3개월간 국내 진공작전에 가담했다. 5월 1일 광복군 육군 중위로 진급, 이후 중국 시안(西安)에서 미국 육군 군사교육을 받고 국내 밀파 특수공작원으로 대기하였다.
신익희와 갈등
한편 임정 요인 중 광복군이나 탈출 청년을 빼가 세력을 구축하려던 신익희와 갈등하였다. 신익희는 임정이 연립내각으로 발족할 때 신익희는 한국청년당의 대표로 입각 하였다. 장준하는 '그러나 그 청년당은 사실 1인 1당의 고독한 당이어서 신내무부장이 외로웠던 것은 사실이다.'라고 증언하였다.
장준하 등 일본군 탈영병들이 광복군으로 편입되어 이동해갔으나 신익희는 이들 청년들을 자신의 측근으로 영입하려 노력했다. 신익희는 일본군이나 학도병을 탈출하여 임정으로 찾아오는 젊은이들 외에, 광복군 훈련장에도 직접 방문하여 청년들 중 일부를 포섭하려 노력했다. 장준하는 자신의 자서전 돌베개에 이를 기록하였다.
장준하에 의하면 '우리가 일단 임정을 떠나 토교에 와 있는데도 신익희 내무부장은 우리 대원을 한둘씩 불러내어가곤 했다. 한두 차례 불리어 간 동지가 있었을 때 우리는 그 의도를 알 수가 있었지만, 그것이 상당히 은밀한 계획으로 진행되는 것임을 나중에야 알았다. 왜냐하면 불리어 갔다온 대원들이 왜 불려갔는지를 똑똑히 말해주지 않고 그저 어물어물해버렸기 때문이다. 여러 차례 다녀온 대원들이 늘고 그 횟수가 늘어 마침내는 수십 명이 되자, 그들은 마침내 우리로부터 이탈해, 다시 임정에 되돌아갈 것을 정식으로 제의하기 시작했다.간다는 이유는 임정 내무부 관할로 '경위대'라는 것이 새로 조직되는데, 그 경위대원이 되기 위해서라고 했다.' 한다.
장준하 등은 경위대원이 되려고 다시 임정으로 가겠다는 동지들을 붙잡았으나 실패했다. '우리들 전체는 그동안 같이 고생해온 정을 호소, 몇 번이나 말렸으나 그들은 이미 신 내무부장관과 관계가 깊어진 듯 끝내 고집을 부렸고 마침내는 가고 말았다.'한다. 신익희의 유창한 달변에 매료당한 젊은이들은 신익희를 따라 충칭으로 갔다.
동지들이 신익희를 따라 가자 장준하는 분노했다. 장준하는 일단 그들을 보내놓고 밤새워 등사를 전단했다. 등사를 전단한 내용은 신익희 내무부장을 비롯한 기타 정당의 정당인들을 규탄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것을 등불 잡지의 호외 형식으로 만들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장준하외 20명은 그것을 안고 몽둥이까지 하나씩 들고 임정을 향해서 출동했다. 젊은이들이 몽둥이를 들고 자신을 찾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신익희는 피신했다. 임정 청사에 닿은 장준하 일행은 '경위대를 해체하라', '젊은이는 전선에 나가 죽게 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고 신익희를 찾았다. 그러나 신익희는 어느새 재빠르게 사라져버렸다. 결국 이들은 규탄대상을 놓치고 말았다.
광복 이후
해방과 귀국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 선언을 하는 바람에 모든 군사작전이 백지화되었다. 광복 직후 그는 광복군 대위로 진급했다.
앞서 8월 14일 이범석, 장준하, 김준엽, 노능서 등은 서울로 향하는 미군기에 편승해 서해 상공을 날았으나 미국과 일본의 방해로 회항했다. 장준하 일행은 다시 중국 시안으로 되돌아갔다가, 그해 11월 23일 임시정부 주석 김구 등 임정요인들과 함께 비행기를 타고 경기도 김포군 김포공항에 내렸다. 이후 그는 김구의 비서로 정치, 사회활동을 시작하였다.
1945년 9월 초순 광복군 장교인 장준하는 중국 서안에서 박정희를 만났다는 주장이 있다. 장준하의 측근인 이철우의 증언에 따르면 장준하는 박정희를 질타했다고 한다.
“ 박정희는 전형적인 일본식 군대 방침을 독립군에게 강요했다. 이에 장준하 선생이 ‘너 뭐야’하고는 반말로 욕을 했대요. 그랬더니 이 사람이 나와서는 경례를 딱 붙이더랍니다. 하도 화가 나서 아무 생각없이 모자를 휙 벗겨서 땅에다 밟고는 ‘너는 독립군 모자를 쓸 자격이 없어, 독립군 훈련을 일본식으로 해?’ 하고 야단을 쳤답니다. 그랬더니 고개를 푹 꺾고서 ‘잘못했습니다’라는 말을 하는데 일본말로 하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더 깜짝 놀라서 상부에 보고를 했답니다. 일본 군대 출신들이 피난민 대열에 끼어 있다가 광복군에 들어왔는데, 이 사람들이 일본군의 밀정일지 모르니 전부 제거하자는 안을 내놓았습니다. ... 장준하 선생이 그 사람이 박정희였다는 것을 어떻게 기억하냐면, 잘못했다는 말을 일본말로 했다는 것, 딱 한가지예요.
5·16 군사정변 후에 박정희가 장준하를 만나자고 청해 왔어요. 그런데도 장준하 선생은 ‘내가 왜 군대 반란을 일으킨 놈을 만나느냐’면서 만나지 않았는데 신문에 난 박정희를 보니 낯익은 얼굴이더랍니다. 그래서 함석헌 선생 등 몇사람을 사상계 사무실로 불러서 ‘이 사람은 내가 옛날 만주에서 만나본 일본군이다. 행적을 알아보자.’고 발언을 한 겁니다. 이 이야기가 박정희에게 들어갔고, 그것이 개인적으로 장준하를 싫어하게 된 이유 중의 하나였답니다.
— 백기완, 《한국현대사의 라이벌》(역사비평사, 1991) 211~212페이지
장준하와 박정희가 해방 전에 구면이었다는 이들에 따르면, 장준하는 이때 일본군 장교라는 과거를 별로 참회하지 않고 행동하는 박정희에게 일본이 패망하기까지 자진해서 일군을 탈출하지 않은 점, 일본이 패전하지 않았다면 일군 장교로서 여전히 한국 독립투사를 학살했을 것이라는 점, 유난스럽게 기회주의적인 자세 등을 들어 크게 면박을 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언론인 조갑제와 장준하의 아들 장호권 등은 이러한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조갑제에 의하면 장준하와 박정희는 이 무렵 만난 적이 없다고 하며, 장호권은 프레시안과의 인터뷰에서 장준하와 박정희는 전혀 모르는 사이라고 강하게 말했다.
“ 장준하와 박정희는 전혀 모르는 사이다. 장준하가 일본군에서 탈출할때, '일본군 장교로 나라를 배신하고 광복군을 때려잡는 장교들이 있다'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장준하가 박정희라는 존재를 알게 된 것은 남로당사건 때였다. ”
— “《고성국의 정치in》故장준하 선생 장자,장호권씨 "박근혜 용서는 하겠다. 그러나 잊지는 말자"”. 프레시안. 2010년 10월 25일.
광복 직후
광복 직후 김원봉 일파는 장준하 등과 새로 일본군 출신 탈영, 전역자 등을 다시 영입하려 했으나, 장준하는 김원봉의 영입 노력을 거절하였다. 뒷날 장준하는 '그가 미인계를 써서 현혹시키려 했다.'고 비판하였다.
이때 김원봉은 자원 징집 또는 강제 징집으로 일본군으로 입대, 일본군에서 탈출한 한인을 적극 영입하려 하였는데, 장준하는 그의 책 돌베개에서 그가 일본군 출신 한인들에게 임시정부와 광복군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고 이소민 등을 파견하여 인척인 일본군 소위 출신 황용주 등을 끌어들이려 한다고 보았다.장준하는 김원봉 등이 계략을 써서 일본군 출신 한인에게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광복군에 대한 불신임을 조장한다 하여 이소민 등에 대한 자료를 이청천에게 보고하였다.이청천은 광복군을 직접 사열하였다.
광복군 일부의 횡포가 계속되자 김원봉은 이를 이용하려 했다.임정과 광복군에 대한 불신작용을 일본군 출신 부대에 가했다.45년 10월 7일 충칭의 광복군 사령관 이청천이 상하이로 왔는데 일본군 출신 부대는 사령관 이청천에 대한 사열을 거부하였다. 장준하 등은 그들 가운데 모 장교, 모 장교 등을 직접 찾아다니면서 이 문제에 대한 의논을 시작했다. 후일 장준하는 이를 두고 '의논을 시작했지만 실은 회유작전이었다.'고 하였다.
장준하는 김원봉의 계획을 '간계'라고 평하였다. 장준하 등은 김원봉의 계획을 알려주고 그 대리인노릇을 했던 책임자 황모와 이소민에 대한 자료를 주어 그들을 불신임시켰다.설득은 주효했고 이청천이 직접 사열을 받게 되었다.
해방 정국 활동
해방후, 11월 임시정부 환국 제1진에 포함하여 귀국하여 김구의 비서로 활동하였다. 이때 그는 이승만의 측근인 윤치영의 공보비서로 있던 최기일과 함께 이승만과 김구의 합작과 연대를 위해 노력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1946년 김구가 비상국민회의를 소집하자 참여, 비상국민회의 서기에 선출되었고, 2월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이 개원되자 2월 26일 그는 민주의원 비서로 선출되었다.
1946년 4월 26일 그는 우사 김규식이 설립한 한국청년단에 가입하여 활동한다. 김규식은 장준하를 한국청년단 조사부장에 임명했다. 그러나 장준하는 경교장을 나오면서 한국청년단에서도 탈퇴하게 된다.
이후 장준하는 이승만의 측근이었던 윤치영의 비서로 있는 고향친구 최기일과 접촉, 이승만과 김구 양자의 협력과 협조를 위해 노력하였으나 이들의 노력은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1946년 여름 귀국한 광복군의 이범석은 장준하를 찾아 자신을 도와줄 것을 거듭 부탁했다. 장준하는 고민하였고 임시정부 주석 김구에게 사실대로 말하고 양해를 구하자, 김구는 그를 보내주었다. 김구의 경교장을 나와 1947년 12월 이범석의 조선민족청년단에 참가, 중앙훈련소의 교무처장직을 맡았다. 그러나 장준하는 곧 족청을 떠나고 말았다.
관료, 언론 활동
정부 수립 직후
이후 1946년부터 1947년 2년간 이승만의 공보비서가 된 친구 최기일과 만나 이승만과 김구 사이의 의견 일치와 합작을 위해 상의, 노력하였으나 장덕수의 암살 사건을 계기로 이승만-김구의 합작은 실패하고 만다. 합작 실패 이후 그는 김구, 김규식의 남북협상에는 참여하지 않고 정부수립을 지지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이후 장준하는 당분간 별다른 정치적 활동을 취하지 않고 있었다.
1949년 1월 도서출판 한길사를 설립했다.출판활동을 하던 그는 1949년 2월 한국신학대학에 편입학, 같은해 6월에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학사)하였다. 이후 언론 활동에도 참여하여 동아일보 등에 사설이나 칼럼을 발표하기도 했다.
제1공화국 관료 활동
이범석의 곁을 떠난 장준하는 6·25 전쟁 전 이승만 정부에서 공무원으로 임용되었다. 1950년 3월 대한민국 행정부 행정서기관(4급)에 임관되어, 문교부 국민정신계몽 담당관이 되었다.
1952년 3월 문교부 산하 국민사상연구원 기획과장이 되었고, 이후 국민사상연구원 서무과장, 사무국장 등을 역임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불가피성을 인식한 그는 사상적, 이념적인 정당성을 획득하는 길만이 북한을 이기는 길이라 확신하고 국민 계몽을 위한 칼럼, 강연활동 등을 하였다.
1952년 12월 사상계 12월호 (4호)까지 발간 후, 전쟁 중 자금 조달이 여의치 않자 재정문제로 일시적으로 발행을 중단하였다. 그 후 1953년 4월 문교부 국민사상연구원을 사퇴, 짧은 공무원 생활에서 퇴직하였다. 1953년 4월에는 잡지사상계를 창간하여 활동하였다. 1952년 휴전으로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그는 한국 전쟁에서 휴전이 된 것을 긍정적으로 해석했다.
"6·25가 일어났다. 당연히 받을 채찍이 땅에 임한 것이다. 그러나 하늘은 무심치 않아 그래도 이 백성을 공산역도( 共産逆盜 )들의 손아귀에 아주 넣지는 않은 것이다."
휴전이 되자 그는 서울로 상경하였다.
언론 활동
1953년 9월 사상계 1953년 9월호를 끝으로 부산시대를 마감, 서울 종로 한청빌딩에 사무실을 입주하고 사상계를 계속 발행하였다.
1956년 '동인문학상'을 제정하여 제1회를 발표하였다. 동인문학상은 소설가 김동인을 추모하여 만든 김동인 문학상이었다.동인문학상을 통해 장준하는 선우휘, 오상원, 손창섭, 이범선, 서기원, 남정현, 전광용, 이호철, 송병수, 김승옥, 최인호, 이청준 등의 문인들을 발굴했다.
1957년 10월 10일, 최남선이 "내선일체", "황국문화 선양" 따위 구호를 외치면서 일제로부터 직위나 금전적인 혜택을 받아 누리다 향년 68세로 사망하자, 발행인인 장준하는 서둘러 육당의 하세(下世)기념 특집을 냈고 그를 옹호하는 글을 사상계에 게재하기도 하였다.
사상계 편집위원회는 뜻을 문화의 소장(消長)과 민족의 명운에 두는 모든 인사와 더불어 충심으로 고 육당 최남선 선생을 애도하고 그 출중한 인격과 생전에 남기신 업적의 위대성을 명감(銘感)하여 이를 영세에 전하고자 선생이 서거하신 이 해 1957년 송년호를 육당 기념호로 삼아 재천(在天)의 영전에 드리나이다.
— 장준하, 최남선 헌정사
한 때 선생의 지조에 대한 세간의 오해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선생의 본의가 어디까지나 이 민족의 운명과 이 나라 문화의 소장에 있었음은 오늘날 이미 사실로서 밝혀진 바요, 항간에 떠도는 요동부녀(妖童浮女)들의 억설과는 전면 그 궤를 달리하는 것이다. 사람을 사(赦)하는 법이 없고 인재를 자기 눈동자 같이 아낄 줄 모르고 사물을 널리 생각하지 못하는 옳지 못한 풍조 때문에 우리는 해방된 후에도 선생에게 영광을 돌린 일이 없고 그 노고를 치하한 일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욕된 일이 적지 아니하였다. 이것은 실로 온 민족의 이름으로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 장준하, 권두언
1958년 8월 사상계에 올린 칼럼들 중, 함석헌의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글로 함석헌과 함께 연행되었다가 풀려났다. 1958년 9월 소설가 김동인(金東仁)을 추모하는 동인문학상을 제정하여, 매년 신인 소설가들을 선발하여 수여하였다. 1959년 2월 2.4 보안법 파동 관련, 그는 백지권두언으로 자유당 정권에 항거하였다.
1958년, 1959년 그는 이승만정권의 독재를 비판적인 입장의 칼럼을 발표하며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을 규탄했다.
1960년 3월 3·15부정선거를 자행한 자유당에 대해 자신의 사상계 권두언에서 집권 자유당의 횡포를 신랄하게 규탄했다. 4·19 혁명을 거쳐, 5월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중앙집행위원에 피임되었다. 이후 유네스코 홍보분과위원장을 역임했다.
제2공화국 관료 생활
1960년 4·19 혁명 이후, 7월 장면(張勉) 내각이 출범한다. 이후 그는 국무총리 장면의 후원으로 국제문제연구소를 조직, 민주당 정권의 연구비 지원을 받고 경제정책 연구 개발을 하였다. 국무총리 장면은 여러번 그에게 사람을 보내 자신을 도와줄 것을 요청했다.
장준하는 자신을 도와달라는 장면의 거듭된 부탁을 받아 입각한다. 장면 정권의 실력자인 재무장관이자 사상계 동인이던 김영선(金永善)의 지원으로 사상계사의 부채를 청산하기도 했다. 1960년 10월 장면내각의 문교부 대학교육심의회의원, 1961년 1월 대한민국 국토건설단 기획부장에 발탁되었다. 그 뒤 국토건설단 단장을 맡기도 했다.
국토건설단의 기획부장으로 있으면서 그는 사실상의 국토건설단의 운영을 책임, 총괄, 지휘하였다. 또한 대졸 미취직 청년들의 국가관과 사회관 교육을 위해 함석헌, 주요한, 박순천 등을 강사로 초빙하여 학생들의 심성수련과 교육을 담당하였고, 장준하 자신도 국토건설단 강사로서 정신교육을 맡았다.
정치 활동
5·16 군사 정변 전후
1961년 5월 16일 박정희·장도영·김종필 등에 의해 5·16 군사 쿠데타가 발생하자 《사상계》지 권두언은 쿠데타 지지 성명을 발표했다.
사상계 5·16 관련 성명서
절정에 달한 국정의 문란, 고질화한 부패, 마비 상태에 빠진 사회적 기강 등 누란의 위기에서 민족적 활로를 타개하기 위하여 최후 수단으로 일어난 것이 다름 아닌 5·16군사혁명이다.
4·19혁명이 입헌정치와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민주주의 혁명이었다면, 5·16혁명은 부패와 무능과 무질서와 공산주의의 책동을 타파하고 국가의 진로를 바로잡으려는 민족주의적 군사혁명이다.
따라서 5·16혁명은 우리들이 육성하고 개화(開花)시켜야 할 민주주의의 이념에 비추어 볼 때는 불행한 일이요,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으나, 위급한 민족적 현실에서 볼 때는 불가피한 일이다.
— 1961년 6월, 《사상계》 권두언
윤보선 대통령이 5·16을 추인하면서 5월 20일 장면 내각은 총사퇴를 하였고, 제2공화국 붕괴 이후 장준하는 주로 언론활동에 종사하였다. 군정 초기에 장준하는 군사정변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후에 박정희가 민간정부로 이양하지 않고 집권을 추진하게 되자, 장준하는 이에 대한 반발로 노선을 바꾸어 박정희를 비판하는 입장에 서게 된다. 군정에서 그가 태완선에게 1천만 환을 빌린 것을 물고 늘어져 그를 부패 언론인으로 규정, 정치활동 금지대상자로 묶어버리자 그는 군사정변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게 된다.
강원용 목사의 증언에 따르면 그 뒤 사상계가 경영난에 빠지자 강원용을 찾아 인수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강원용으로부터 거절당하였다. 그 뒤 조선일보 출신 언론인 부완혁에게 사상계를 넘겼으나, 그 후에 부완혁과 갈등하게 되었다. 1962년 필리핀에서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했다.
5·16 군사쿠데타 지지와 철회
군정에 대해 지지를 표명하였으나 장준하는 곧 군정과 충돌을 겪게 된다. 1961년 7월호에 장준하의 권두언 〈긴급을 요하는 혁명 과업 완수와 민주 정치에로의 복귀〉, 함석헌의 글 〈5·16을 어떻게 볼까〉가 나간 뒤 장준하는 군사정권에 불려간다.
5·16 직후인 《사상계》 1961년 6월호 권두언은 “4·19 혁명이 입헌 정치와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민주주의 혁명이었다면, 5·16 혁명은 부패와 무능과 무질서와 공산주의의 책동을 타파하고 국가의 진로를 바로 잡으려는 민족주의적 군사혁명이다”라고 하며 5·16 쿠데타를 사실상 지지했다.
다만 《사상계》 권두언은 1955년부터 50년대 말까지 장준하의 이름으로 쓰여졌고, 그 이후 장준하 외의 사람이 대필했을 경우에는 필자를 무기명으로 하여 밝히지 않았다. 문제의 1961년 6월호 권두언과 편집후기는 무기명으로 되어 있어, 이것이 장준하의 글인지 쿠데타 세력의 압박에 의해 다른 사람이 대필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발행인 장준하의 책임을 면죄할 수는 없으며, 《사상계》 1961년 6월호는 권두언 뿐 아니라 박정희와 장도영의 사진 화보를 싣기까지 했다. 장준하 평전을 쓴 김삼웅은 《사상계》 1961년 6월호는 사상계 정신을 가장 크게 훼손했다고 비판했다. 이후 7월호에서 함석헌의 〈5·16을 어떻게 볼까〉라는 군사혁명을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글을 실었지만 《사상계》는 그 이후에도 상당기간 동안 쿠데타의 불가피성을 인정했다.
장준하가 이같이 5·16 군사 정변을 "민족주의적 군사혁명"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은 이유는 5·16으로 등장한 군사정권이 친미(親美) 노선을 걸을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사실 장준하는 적극적인 친미주의자였다. 후에 그가 모든 통일은 다 좋다고 말한 것과는 달리 장준하는 이 당시만 해도 반공을 최우선에 두고 있었으며, '친미'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때문에 장준하는 극도의 혼란으로 치닫던 장면 정권을 일거에 무너뜨리고 반공논리로 무장한 채 등장한 군사정권에 지지를 보내게 된 것이다.또 여기에 미국이 군사정권을 지지한 것이 장준하가 군정을 지지한 주요한 동기로 작용했다.
장준하는 군정 초기에 군정 세력과 미국 세력간의 만남을 주선하기도 했다. 이는 장준하는 쿠데타의 주역들과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도모하기 위한 파티였었다. 당시 군정 세력은 군 내에서 비주류 세력이었기 때문에 미국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는데 장준하는 이들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파티를 열었다.1961년 7월 초 창경원에서 열린 이 파티에는 미국 측에서는 버거 대사와 하비브 정치참사관이 참석하고 군정 세력에서는 장도영 일파만이 참석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파티에 박정희 계열 인사들은 참석하지 않았고, 이는 나중에 장도영과의 관련설이 나오는 원인이 되었다.
박정희를 비롯한 쿠데타 주역들은 대부분 군대 내 소외된 비주류세력이었고 따라서 미국 특히 현지 관계자들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다. 미국이 쿠데타를 현실로 인정했지만 쿠데타 직후에도 양자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그래서 미국통인 장준하는 사상계사의 이름으로 7월 초에 창경원 파티를 통해 양측의 핵심 인사들을 초청하여 관계 개선을 시도하기도 했다. 또 일부 인사들(이정환, 박동묘)을 쿠데타 주체들에게 추천하기도 했다.
필화 사건 전후
김종필
조속한 민정 이양을 촉구하는 함석헌의 글이 실린 《사상계》 7월호가 나가고 4,5일 뒤, 퇴근시간이 되어갈 무렵 사상계사에 군인 둘이 나타났다. 그들은 혁명군에서 나왔다면서 다음날 아침 7시까지 사장과 편집 책임자를 모시러 오겠으니 그 시각까지 나와 있어 달라는 용건을 전했다.다음날 장준하는 편집 책임자인 취재부장 고성훈과 함께 지정한 시각인 아침 7시에 회사로 나갔다. 검정 지프차 하나가 먼저 와 기다리고 있고 다른 군인 2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지프차는 장준하와 고성훈을 싣고 가 남산 밑 회현동 어딘가에 있는 허름한 2층 집의 한 방에다 내려놓았다.
20분뒤 김종필이 나타났고[54] 김종필은 《사상계》 7월호에 실린 함석헌의 5·16 군사정변을 우회적으로 비판한 칼럼을 문제 삼았다.
“ 정신분열자 같은 영감쟁이의 이 따위 글을 도대체 무슨 저의로 여기에 실었소? 성스러운 혁명 과업 수행에서 당신은 우리 군사혁명을 모독하자는 거요? 이걸 싣게 된 경위와 목적을 말하시오. ”
— 김종필
“ 이 글은 내가 직접 함 선생께 부탁해서 내손으로 받아다 내가 읽어 보고 실은 것이오. ”
— 장준하
장준하는 말을 계속했다.
“ 여러분은 이 글을 좋지 않게 보는 모양이오만 내 나름으로는 이 글이야말로 군사혁명을 일으킨 여러분을 위하고 혁명 과업을 수행하는 데 있어 가장 시의에 맞는 충언이라고 확신하여 실은 것이외다. 좋은 약은 입에 쓴 법으로, 당장은 다소 거슬리는 데가 있을지 모르지만 내 확신이 틀리지 않는 한 여러분을 위하고 나라의 장래를 위하는 충정이 들어 있는 글인 것만은 틀림없소. 지금 우리나라의 모든 언론 기관이 혁명 과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잘한다는 말 이외의 다른 말들은 일체 하고 있지 않소.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아무래도 나라의 향방이 옳은 길로 걸어가는 것 같지가 않고, 또한 뜻있는 여러 사람들이 말로는 못하지만 생각은 나와 같기 때문에 충고로 이 글을 실은 겁니다. 나와 함 선생 외에는 이런 시기에 이런 충고를 할 사람이 없소. ”
— 장준하
장준하의 말에 김종필은 앞으로 밀어놓았던 책을 급히 집어다 빨간 줄 투성이가 된 문제의 글과 권두언을 펴 여기저기 한줄씩 읽어주며 장준하에게 들이댔다. 그는 이것은 무슨 소리이며 이것도 충고냐는 식으로 윽박질러 물었고, 이에 장준하는 항의했다.
“ 왜 남의 글을 그런 대목만 부분적으로 떼어서 문제 삼으십니까? 전체를 가지고 말 하시오."
— 장준하
“ 어디 잡지를 읽는 사람들이 앞뒤를 다 읽고 맞추어 해석해요? 대부분이 이런 자극적인 부분의 문구들에 의해 현혹되기 마련 아니오? ”
— 김종필
그러나 김종필은 그가 장도영과 같은 고향이라는 점을 문제 삼았다. 그러나 장준하는 장도영과의 관련을 부인하였다.
“ 장도영과 나는 같은 평북 출신이긴 하지만 그 사람은 용천 출신이고 나는 삭주가 고향이외다. 일본군에 잠깐 같이 있었기 때문에 서로 알고는 있지만 그 사람과 무관할 뿐 아니라 그 사람의 지난 행적을 그다지 좋게 보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 사람과 나를 연관시키는 것은 나를 모독하는 것입니다. ”
— 장준하
장준하의 대답에 김종필은 흥미를 느껴 계속 꼬치꼬치 캐물었고, 장준하는 숨길 것이 없고 해서 자신이 평소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장도영에 대한 추억을 진술하였다.
장준하와 장도영은 중국 서주에서 같이 있었다. 그곳에서 한인 탈영 사건이 자주 일어나자 학도병들에 대한 감시와 핍박이 심했다. 그때 장도영은 일본도를 빼들고 탈주하는 자는 자기가 먼저 처단하겠다고 설치다가 장준하와 충돌했다. 그리고 탈출이 어려운 쓰카다 부대로 같이 옮겨가서는 장준하가 벌인 '잔반 거부 운동'으로 두 사람은 반목한다. 성이 같고 고향이 이웃해 있다고 해서 서로 호흡이 맞는 것도 아니었다. 같은 서북인 출신이라 하지만 장준하로서는 장도영의 이름을 들어 그 당으로 모니 참을 수가 없었다.
— 장준하의 진술 정리
김종필이 장준하와 장도영의 사이를 의심할 만한 이유는 또 하나 있었다. 이 무렵에 사상계사에서 사상문고 100권 출간 기념 리셉션을 창경궁(昌慶宮)의 수정궁(水晶宮)에서 열었던 것이었다. 당시 사상계의 국제적인 명성 때문에 그날이 7월 4일 미국 독립 기념일인데도 미국 대사가 직접 참석하고 내외 귀빈이 수도 없이 모였는데 쿠데타 군부에서도 장도영 최고회의 의장 이하 그 일파가 모두 왕림했다. 그때 박정희와 김종필 쪽에서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그리고 7월 5일 장도영 일파는 모두 체포되었다.
1961년 7월 중순, 장준하가 남산에 다녀온 지 2주 후 서울시청에 자리잡고 있던 군사정권의 부정축재자 처리위원회에서 출두 명령이 날아왔다. 처리위원회를 방문하자 육군 소령은 그에게 반말을 하며 모욕적으로 추궁하였다.
“ 너 김영선이한테서 돈 얼마나 받았어? ”
“ 김영선이가 네게 돈 줬잖아? 그게 얼마냔 말이다! ”
김영선은 장준하를 어떻게든 자기들 정부의 일에 참여시키고자 설득하던 중 장준하의 빚 이야기를 듣게 되고 그것을 재무부 장관인 자기가 책임을 지고 융통해주겠다고 하였다. 내각의 총리 장면이 도시락을 싸가지고 출근할 만큼 가난한 정부의 재무부장관 김영선은 사상계사의 빚 3천만 환을 해결해 주겠다고 호언해 놓았으나 다음날 사람을 시켜 보내온 것은 1천만 환이었다.김영선의 의도는 '우선 이 돈으로 급한 불부터 먼저 끄고 나머지는 또 어떻게 주선해 보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영선은 돈을 더 구해 보내지 않았고 장준하도 더 이상 채근해 조르지 않았다. 그러나 돈을 받았으므로 장준하는 사실대로 대답하였다. 그러나 육군 소령의 반말 추궁은 계속되었다.
*장준하 : 당신 그 어투는 좀 고치시오. 엊그제 김종필 씨를 만났는데 그분도 당신 같은 그런 어투는 쓰지 않았소. 그런데 여기서는 왜 다르오?
소령 : 뭐라구? 잔말 말고 어서 묻는 말에 대답 못해?
장준하 : 하리다. 받은 건 사실이고 1천만 환이오.
소령 : 그것뿐이야? 더 있을 텐데? 똑바로 대. 이것들 모조리 죽여버린다.
소령은 부하들에게 "사상계사에 가서 문서, 장부 모두 압수해 오라."고 지시했고 그 뒤 민간인 조사관에게 넘겼다. 김영선도 심문 끝에 장준하에게 1천만 환을 준 것을 발설하였다. 이 돈이 김영선이 어디에서 어떻게 만들어 보내준 돈인가는 모르지만 장준하는 본래 남의 돈을 거저 얻어 쓰고 안 갚는 그런 위인이 아니므로 1천만 환에 대한 차용 담보로 자기가 살던 집의 문서를 갖다주었었다.
민간인 조사관에게 넘겨진 장준하는 쓰라는 대로 경위의 진술서를 쓰고 나왔다. 그러나 그날 실제로 군부에서 사상계사에 나와 장부를 입수해 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장준하는 그 일로 인해 네 차례나 더 불려갔다. 시청의 부정축재처리위원회에 한번 더 불려가고 혁명검찰부와 혁명재판소, 그리고 서울지방국세청에 각각 한 차례씩 불려다녔다. 그 돈 1천만 환을 1961년 연말까지 갚기로 하고 겨우 불려가는 일이 끝났다. 그러나 그때 장준하는 타임, 라이프의 빚이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는 등 태산 같은 빚더미에 올라앉아 있었다. 가산 차압을 당해 사는 집이 넘어갔으며, 1962년 3월 빚을 청산한다.영선에게 1천만 환을 받으면서 그에게 갖다 준 집문서는 다시 되찾지 못한 채 그대로 집이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정치정화법과 야당화
1962년 장준하가 서울 성동세무서에 1천만 환의 돈을 갚자, 1962년 3월 16일 군정에 의해 정치활동정화법이 발표되었다. 그런데 장준하가 이 정치정화법에 걸려 정치 활동을 금지당했다. 정치와 상관없는 그가 정치정화법에 걸린 것은 '부패 언론인'에 포함되었기 때문이었다. 김영선에게서 받은 돈 1천만 환 때문에 집이 넘어가고 했는데도 그도 정치행위 금지자 4,734명 속에 들게 된 것이었다.
정치에 뛰어들 생각을 못해본 장준하로서는 정치정화법이 무슨 상관이냐 싶겠지만 그가 부패 언론인으로 지탄의 대상이 되어 정정법에 묶였다는 사실이 신문에 나자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인 것은 사상계의 독자였다. 그리하여 판매 부수가 눈에 띄게 떨어졌다. 부패 언론인 딱지는 장준하에게 치욕적인 멍에였는데 그게 사실이 아니라고 누가 독자들에게 해명해줄 것이며 또 해명한들 한번 난 소문인데 쉽게 생각을 바꿀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후 그는 윤보선을 정치적으로 지지하였다.
그해 8월 필리핀으로 가서 막사이사이 상(賞)을 받고 귀국하였다.
제3공화국
한일회담 반대와 박정희 비판
1963년 군사정권이 출범하면서 장준하는 윤보선, 장택상, 함석헌, 계훈제 등과 함께 야당 활동에 뛰어든다.
윤보선, 장택상, 박순천 등이 박정희 정부의 한일회담을 '대일굴욕외교'로 규정하고 한일회담 반대운동을 벌이자 장준하도 이들의 활동에 동참한다. 이후 1964년 3월 장준하와 《사상계》는 한일회담 반대시위의 선봉에 섰다. 윤보선, 장택상을 중심으로 대일굴욕외교 반대투쟁위원회가 설치되자 1964년 3월부터 그는 대일굴욕외교 반대투쟁위원회의 초청연사로 전국을 순회 강연하며 70여 회의 연설을 통해 박정희, 김종필 등과 한일회담 주체세력을 비판하였다.
대선에서 장준하는 일본 제국주의 군대에 있었던 사람이 대통령이 되는 것을 참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66] 장준하는 박정희 정권의 한일 협정을 일본 제국주의 군인 출신이 침략자이며 전범자 집단인 일본 자민당과 매국협상을 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1964년 4월호를 긴급 임시증간호로 내놓았다. '한일회담의 제문제'는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이 나라 지식층의 의사를 비판적으로 담아낸 한일회담 반대진영의 교과서가 됐다. 이어서 1965년 7월에 '신(新) 을사조약의 해부'를 또다시 긴급 증간호로 발행해 한일회담 반대진영의 이론적 교두보가 됐다.박정희 정권은 ‘사상계’를 ‘반품작전’으로 되돌리는가 하면, 1965년에는 두 차례에 걸쳐 물샐틈없는 세무사찰을 자행해 ‘사상계’를 고사상태로 몰아갔다.
1966년 사카린 밀수 사건이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집권층과 삼성의 이병철 사이에 유착이 있었다는 정보가 새어 나왔고, 야당과 대학생들이 전국적인 규탄대회를 열었다. 1966년 10월15일 대구시 수성천에서 열린 민중당 주최 '특정재벌 밀수진상 폭로 및 규탄 국민대회' 시국 강연 연사로 참석했다. 장준하는 규탄대회에서 재벌총수와 정부 고위층 사이에 오간 내용을 폭로하면서 “우리나라 밀수 왕초는 바로 박정희”라고 비판하였다.이어 "존슨 대통령이 방한하는 것은 박정희 씨가 잘났다고 보러 오는 것이 아니라 한국청년의 피가 더 필요해서 오는 것"이라는 발언도 주목을 받게 됐다.
장준하는 박정희와 재벌들을 신랄하게 비판하다가, 박정희 밀수왕초 발언 등이 문제되어 10월 26일에 구속되자 "행정수반으로서 특정재벌 밀수에 관한 책임을 져야 한다"며 "정치자금 수수 운운한 것은 드러난 사실에 따라 자기의 주관대로 말한 것"이라고 하면서 12월 24일에 박정희를 증인으로 신청했으나 서울형사지방법원 10단독 안우만 판사는 이를 기각하였다. 한 달간 수감됐다가 1966년 12월 30일 보증금 5만원과 자택으로 주거를 제한하는 조건으로 보석을 허가받아 석방되었다. 그 뒤 1967년 2월 20일 열린 결심공판에서 정명래 검사는 "정치적 발언이라고 하더라도 국가원수를 모독한 것은 언론의 자유 한계를 벗어난 것"이라며 징역2년을 구형하였고2월 28일에 "정치인의 정치적 발언이라고 해도 실정법에 저촉되면 규제받아 마땅하다"면서 "피고인의 연설 내용은 그 진실을 입증할 수 있는 구체적인 증거가 없어 범의를 인정할 수 있다"며 징역 6월을 선고했지만 보석을 유지했다.
야당 단결 및 후보단일화 운동
1967년 선거 때는 박정희가 동남아와 미국을 다녀오더니 청년들을 베트남에 팔아먹을 것을 구상했다는 이야기를 하다가 구속되었다.
1967년 3월 그는 야당의 후보 단일화를 위해 4자회담(백낙준-윤보선-유진오-이범석)을 주선하였으나, 각 정당 대선후보 간의 이견으로, 의견 조율에 실패했다. 그러나 야당 통합을 추진하여 신민당에 입당하였고 신민당 중앙당 당무위원, 신민당 서울특별시 제4지구당 위원장 등을 지냈다. 1967년 신민당 공천으로 국회의원 총선거에 출마하여 당선, 국회의원을 지내기도 하였다. 선거 유세에서 “박정희씨는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일본군 장교가 되어 우리 광복군에게 총부리를 겨눴다. 박정희씨는 과거 남로당 군사조직책으로 남한에서 지하조직 활동을 한 사람으로 자기 목숨을 구하기 위해 조직원을 팔아 희생시켰다” 라고 박정희를 비판하였다. 1971년 장준하는 자신의 학병 탈출과 광복군 참여시절을 회고하면서 자서전 ‘돌베개’를 편집하였다. ‘돌베개’를 내면서 저술의 이유로 ‘현대사의 증언’임을 밝히면서 “광복군 출신이라고 떠들고 다니는 일부 인사들이 광복군 모자 하나를 얻어 쓰고 기실 과연 어떤 일을 했는가 하는 것도 역사 앞에 밝히고자 함”이라고 밝혔다. 1967년 4월 야당 대통령 선거운동 중 선거법 위반으로 한달간 투옥되기도 하였다. 1971년 출판사 사상사를 설립, 자서전 돌베개를 출판하였다.
6대 대선-베트남전 반대와 소설 광복군에 격분
윤보선
(63년 대선 이후 그는 정치적으로 윤보선을 지지하였다.)
6대 대선 유세기간 중 장준하는 윤보선을 지지했다.윤보선은 선거 유세 중에 월남전 파병을 미국의 '청부 전쟁'이라고 비판했고, 이어 윤보선을 지지하던 장준하는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일본군 장교가 되어 우리 독립 광복군에 총부리를 겨누었다"라면서 박정희의 친일 경력 의혹을 쟁점으로 꺼냈다.윤보선과 장준하는 박정희의 월남파병 강행은 국익의 이름으로 젊은이들의 피를 파는 매국행위이며, 국민적 여론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기만술이라며 비판을 가한다.
또, 장준하는 "우리나라 청년들을 남베트남에 팔아먹고 피를 판 돈으로 정권을 유지하고 있다"라며 베트남 파병을 비판했다. 서중석에 의하면 당시 윤보선과 장준하만 베트남 파병을 맹렬히 비난했다 한다.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그는 윤보선을 지지하여, 지지 유세를 다니던 중 친일파 발언이 문제가 되어 1967년 4월 그는 대통령 선거운동 중 선거법위반으로구속되어 3개월간 투옥당하였다. 1967년 7월에 석방되었다. 석방된 뒤에도 그는 월남전에 한국군 파병을 반대하였다.
광복군 출신인 장준하는 1967년 대선에 맞추어 나온 소설 광복군(저자 박영만)에 격분한다. 친일파 박정희 대통령을 비밀광복군으로 둔갑시켰기 때문이었다. 1967년 당시에 야당 대통령 후보 윤보선을 지지하며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줄기차게 비판한다. 고상만의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 책에도 언급돼 있다. ‘지금 현재 일각에서 박정희 후보가 광복군이라고 하면서 써놓은 책이 있는데 이것은 전부 다 거짓말이다. 내가 광복군이기 때문에 정확히 안다. 그는 당시에 만주에서 일본군 장교로 있었다’ 이같은 언급에 대해서 당시 중앙정보부가 중요상황 보고로 장준하의 발언을 다 일일이 기록했다.
만군ㆍ일본군 출신들이 중국(만주)에서 해방과 함께 광복군에 편입된 사연을 일본군을 탈출하여 광복군이 된 장준하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우리를 더욱 슬프게 한 것은 새로운 사실이었다. 일본이 항복하기 직전까지 통역이 아니면 일선 지구를 돌아다니는 아편 장사나 일군 위안소의 포주들까지도 하루 아침에 광복군 모자 하나씩을 얻어 쓰고 독립운동가, 망명가, 혁명가를 자처하는 목불인견의 꼴이었다. 뿐만 아니라 같은 타국에 있는 동포 재산을 이런 자일수록 앞장서 몰수하기가 일쑤였고, 광복군도 1,2,3 지대로 나뉘어 대립을 보이고 있었다.(……)이런 상태에서 과거를 불문하고 독립운동자의 이름을 마구 나눠주었던 것이다. 아무나 들어오면 귀히 맞아들여(?) 광복군 모자를 하나씩 씌워주었다.》
1967년 11월 국회에 등원하여 의정활동을 시작하였고, 국회 의정활동기간 중 장준하는 국회 경제과학분과 위원회 위원과 국회 국방분과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의정활동을 하게 되면서 1968년 1월 1일 사상계(思想界) 발행인직을 일시적으로 부완혁에게 위임하였다.
제4공화국
국민당 창당에 참여
1970년 2월경부터 그는 새로운 정치세력의 규합을 위해 신당 결성 운동을 추진한다. 1970년 윤보선 등 민주당 구파 인사들이 신민당을 탈당할 때 장준하 역시 신민당을 탈당, 한동안 무소속 의원으로 활동하였다. 1971년 1월 6일 윤보선, 박기출 등과 함께 국민당(國民黨) 창당에 참여한다. 1971년 대선을 앞두고 신민당 대통령 후보자에 김대중이 선출되자 반발한 윤보선은 신민당을 탈당하여 박기출·장준하와 함께 국민당을 창당하게 된 것이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윤보선과 함께 민족주의를 표방하면서 국민의 당을 만들고 청년학생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주 게 되었다. 71년의 대선에서 윤보선은 대통령 후보로 나섰다. 그러나 후보직을 사퇴하는 대신 다른 정치인에게 양보하기로 했다. 당시 범야권에서는 야당 후보 단일화라는 이름으로 야당 인사들은 그에게 후보 단일화를 위한 후보자 용퇴를 계속 요청하였다. 장준하는 열심히 윤보선을 지지하였고 지원 유세를 다녔다.
한편 국민당의 총재였던 윤보선은 장준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한때 진보당에 참여했던 박기출을 대통령 후보로 지명[80] 하였다. 한때 장준하는 국민당의 대안으로도 설정되었지만 그가 한때 김구의 비서였다가 이범석의 족청을 거쳐 장면에 의해 발탁된 인사였다는 점 역시 윤보선이 장준하를 탐탁지 않게 보는 하나의 이유였다. 그러나 윤보선의 부정적인 시각에 관계없이 장준하는 열심히 윤보선을 도왔다. 그러나 국민당은 10월 유신 이후 강제로 해산당하였다.
10월 유신 전후
1972년 민주수호국민협의회에 참가하였다. 1972년 7월 4일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자, 장준하는 '모든 통일은 선(善)'이라며 환영하였다.
민족주의자의 길
모든 통일은 좋은가? 그렇다. 통일 이상의 지상명령은 없다. 통일로 갈라진 민족이 하나가 되는 것이며, 그것이 민족사의 전진이라면 당연히 모든 가치있는 것들은 그 속에서 실현되어야 한다. 공산주의는 물론 민주주의, 평등, 자유, 번영, 복지 이 모든 것에 이르기까지 통일과 대립되는 개념인 동 안은 진정한 실체를 획득할 수 없다. 모든 진리, 모든 도덕, 모든 선이 통일과 대립되는 것 일 때에는 그것이 거짓 명분이지 진실은 아니다.
한반도 주변 열강, 미·소·일·중의 요구에 따라 남북한이 평화 공존으로 동결되고 그 이상의 통일을 향한 노력을 사실상 포기한다면 민족 분단은 더욱 항구화하고 통일과는 반대쪽으로 치달리게 될 것이다. 민족 통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민중이 할 일이다. 통일은 감상적 갈망이기도 하지만 우리들 하루하루의 생활과 직결된 것이다.
모든 통일은 좋은가. 그렇다. 통일 이상의 지상 명령은 없다.
7·4 남북공동성명의 숨겨진 배경도 감시해야 한다며 경계하였고 실제로 7·4 남북공동성명은 북한에 굴욕적인 회담으로 드러났다.[출처 필요] 그러나 그는 박정희의 남북회담 대표직은 거절했다. 박정희는 그에게 계속 남북회담 대표직을 맡아줄 것을 제의하고, 국가공로상, 연금 지급을 제의하였으나 거절했다.
1973년 2월 장준하는 민주통일당 창당에 참여, 최고위원에 뽑혔다. 1973년, 긴급조치가 기본권 탄압이라며 비판하고 개헌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혐의로 기소돼 징역 15년에 자격정지 15년을 선고받았다. 3월 제9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민주통일당 공천을 받고, 통일당 후보로 총선에 출마했으나 낙선하였다.
출소와 병원 입원
1973년 12월 24일 YMCA회관에서 전격적으로 개헌청원운동본부를 발족시켜 ‘헌법개정 백만인 서명운동’을 벌였다. 이로 인해서 1974년 4월 대통령 긴급조치 제1호 위반혐의로 구속되었으며, "헌법개정을 빙자하여 국론을 분열시키고 사회의 불안을 조성"했다는 죄목으로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형을 선고받았으나, 그해 12월 심장협심증과 간경화 증세 악화로 인한 형집행정지로 출감하였다.
고혈압과 협심증 등으로 10개월 20일 만에 출감 한 그는 종로구 견지동에 있는 조광현내과 203호실에 입원하였다.
“ 죽어서야 나올 줄 알았는데 학생들을 놔두고 혼자 나오니 가슴이 아프다. ”
출감 직후 부인 김희숙과 가족 외에 김옥길 등이 교도소에 방문했고, 입원 후에는 함석헌의 방문을 받았다.
생애 말기
모종의 거사 시도
1975년 4월 민주통일당을 탈당하였다. 사망일인 1975년 8월 17일을 며칠 앞두고 30년 넘게 보관해 온 중경(충칭)임시정부의 태극기를 대학 박물관에 기증하는가 하면, 아내와 갑자기 천주교식 혼례의식을 치르고, 백범 묘소와 망우리에 있는 부모의 묘소를 찾아 참배했다. 뭔가 중대한 일을 앞둔 사람처럼 신변 정리를 서둘렀다는 얘기다.
장준하는 1975년 들어 평소 잘 만나지 않던 김대중과 만나고, 함석헌·홍남순과 접촉하며 8월 15일, 광복절 30주년을 맞아 모종의 거사를 계획했다. 마침 김영삼이 동남아 여행중이라 그가 귀국한 뒤인 8월 20일로 계획은 연기되었다. 장준하의 아들 장호권은 이 당시 ‘무엇인가 어마어마한 일’이 계획되고 있었으며, 장준하가 “박정희를 깨는 것은 민중의 힘으로 역부족이니 게릴라전으로라도 박을 제거해야 한다. 군부 쪽에도 상당한 연계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고 증언한다. 또한 1976년 4월에 자신이 테러를 당했을 때 주한 미 대사 하비브가 찾아와 “당신 아버지가 이루고자 했던 일이 이뤄질 터이니 몸조심하고 기다려라”고 했다고 한다.
이런 정황으로 볼 때, 장준하는 재야와 야당 전체를 아우르고 군부 일부가 동조하는 어떤 거사를 계획중이었으며, 여러 가지 증언으로 미루어 8월 20일경으로 예정된 것은 확실해 보인다. 또한 장준하는 국회의원 재직 시절 사적인 인연이 있던 김재규와 만났는데, 당시 2군단장이던 김재규는 장준하의 국방위 의정활동과 청렴상에 감동하여 장준하의 죽음 이후 박선호를 시켜 가족들을 돌봐주었다. 1976년 말, 김재규는 장호권을 남산으로 불러 “부친의 사망사건은 언젠가 진실이 밝혀질 것”이라고 말해주고, 10·26 3개월 전에는 미국에 나가 있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미국행을 권유했다. 2005년 11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장호권은 장준하의 계획에 포함되었던 군내 동조 세력이 김재규 등이며, 10·26도 장준하의 영향을 입은 것이 확실하다고 주장하였다.
최후
장준하 의문사 사건.
박정희정권의 감시가 더욱 심해지던 1975년 8월 17일, 장준하는 유신정권에 저항하는 거사와 관련해 당시 비밀리에 김대중 등 다른 야당 인사들과의 연락을 돕고 있던 자신의 측근 임춘원을 집으로 초대해 아침식사를 했다. 식사를 마치고 장준하는 호림산악회 회원 약 40여명과 함께 경기도 포천 이동면의 약사계곡 입구에 도착하여 약사봉에 올랐다. 그리고 이날 오후 약사봉에서 약사계곡 방향으로 뻗은 절벽 아래에서 김용환 및 호림산악회 회원들에 의해 사체로 발견되었다. 이날 형식적인 사고 조사와 시신 수습이 이뤄진 이후, 시신은 유족들에게 인계되었다.
임춘원은 1960년대 서울 종로에서 상아탑학원을 설립해 운영하며 큰 재산을 모은 재력가로 장준하의 사상계 출판을 남몰래 재정적으로 도와주다가 박정희 정권의 탄압을 받아 고초를 겪고 장준하의 측근이 된 인물이었다. 그의 증언에 의하면 장준하는 천주교에 입교하였다는 말과 임시정부 태극기 등을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에 기증했다는 말을 하였고, 며칠전 망우리에 있는 부모의 산소에 다녀왔다며 벌초로 갈라진 자신의 손바닥을 펴보이며 보여주기도 하였다. 하지만 벌초로 생긴 이 손바닥의 상처는 나중에 경찰에 의해 장준하가 산에서 추락하는 도중 소나무 가지를 붙잡아 생긴 것이라며 그의 추락사를 뒷받침하는 증거로 왜곡되어 발표되었다.
"나는 8월이 다가오면 가슴이 설레인다. 8월에는 광복절이 있고 선생께서는 조국 광복이 있던 8월달을 그렇게 좋아하셨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선생은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도평3리 험준한 약사골 한켠에서 비통하게 떠나셨다. 선생이 떠나시던 그 날, 선생은 아침에 나를 집으로 불러 아침식사를 함께 했다. 그 날 따라 날씨가 몹시 더웠다. 부채도 잘 부치지 않는 선생의 사모님은 이상한 선풍기를 갖다 놓고 돌렸는데, 덜그럭 덜그럭 하는 소리마저 나서 더 더운 것 같았다. 선생은 나에게 손을 펴보이면서 엊그제 망우리 산소를 다녀오셨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손바닥이 갈라져 있는 모습을 펴 보이셨다. 그런데 그 며칠 뒷날, 선생께서 등산을 하다가 실족하여 산에서 떨어질 때 소나무를 붙잡아서 손바닥이 갈라졌다고 하는 왜곡된 언론보도를 보고, 나는 그들의 허무맹랑한 보도에 항의하다가 또다시 붙잡혀 가서 일주일동안 남대문 경찰서에 갇혀 있었던 기억이 새롭다. 그 날 아침에 선생은 또 이런 말씀을 하셨다. 보름 전이라고 하시던가, 아니면 20여일 전이라고 하셨던가는 정확하지 않지만 당신이 가지고 있던 독립과 관련된 태극기나 김구 선생으로부터 받은 보든 것들을 이화여자대학교에 다 주셨다고 했다. 또 장로회에 입교했다고도 말씀하셨다. 나는 참으로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렇게도 기독교 신앙에 빠져 계시던 분이 왜 장로회에 입교하시게 되었나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선생이 돌아가신 이후에도 왜, 생전에 자신이 귀하게 간직하던 중요한 것들을 그렇게 허망하게 떠나시기 며칠 전에 모두 학교에 기증하고, 장로회에 입교하셨는지 지금도 궁금하게 생각하는 대목이다." 임춘원, <<내 속에 살아 숨쉬는 등불>>, '아, 장준하' 추모의 글 모음에서, 장준하기념사업회.
사후
유족에 의해 운구된 시신은 8월 18일 오전에 상봉동 자택 안방에 마련된 빈소에 안치되었다. 부고를 접한 함석헌, 양호민, 김준엽, 계훈제 등이 8월 17일부터 자리를 지켰고, 8월 18일에는 김대중, 양일동, 고흥문, 정일형 등 정치인들과, 김옥길 이화여자대학교 총장, 김동길 교수 등 1백여 명이 빈소를 다녀갔다. 신민당 김영삼 총재는 외유 중이어서 조화를 보냈다.
8월 21일 오전 8시에 자택에서 가족 발인예배가 엄수되었다. 이어 유해는 영구차로 장로교회로 옮겨져 오전 10시에는 목사님들 이 집전하는 영결예배가 거행되었다. 신구 합동으로 열린 이 장례식에는 백낙준, 유진오, 김영삼, 김대중, 박순천, 함석헌, 양일동, 김홍일, 김준엽, 김동길, 천관우 등 각계 지인들과 시민 1,500여 명이 참례했다. 영결식 후 유해는 시청앞, 국회의사당, 중앙청을 거쳐 서대문형무소 앞을 지나 경기도 파주군 광탄면의 나사렛 묘지에 옮겨져 안장되었다.
장준하 사후 1주일 뒤에 호림산악회 회원 및 지인들이 사고 현장에서 추모등반 행사를 가졌다. 사후 1개월 뒤인 9월 17일에는 후학 및 민주화운동 동지 8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사고 현장에서 추모비 제막식이 열렸다. 비문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오호 장준하 선생!
여기 이 말없는 골짝은 빼앗긴 민주주의 쟁취, 고루 잘 사는 사회, 민족의 자주평화, 통일운동의 위대한 지도자 장준하 선생이 원통히 숨진 곳. 뜻을 같이 하는 젊은이들이 맨 손으로 돌을 파 비를 세우니, 비록 말 못하는 돌부리 풀뿌리여! 먼 훗날 반드시 돌베개의 뜻을 옳게 증언하리라.
1985년 8월 '장준하선생 10주기 추모행사'가 열렸다. 노태우 정부 출범 이후인 1991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고, 1993년 4월 15일 제1회 한신상이 추서되었다.
1995년 8월 16일 20주기 추모행사 및 추모문집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1999년 11월 1일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평가
긍정적 평가
안병욱은 ‘칼의 힘과 펜의 힘’(사상계 1969년 12월호)에서 다음과 같이 저술했다. “‘사상계’는 펜을 가지고 칼에 대항했다. 지성의 무기를 가지고 권력의 아성에 육박했다. ‘사상계’에는 계몽의 메시지가 있었고, 비판의 언어가 있었다. 독재에 항거하는 자유의 절규가 있었고 관권에 대결하는 민권의 필봉이 있었다.”함석헌은 ‘돌베개와 브니엘’이라는 글에서 장준하를 “장준하의 사람됨을 보면 구약의 야곱 같은 데가 있습니다. 참사람이 되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무외(無畏)의 덕을 그는 풍부히 가지고 있습니다. 겁이 없습니다.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라고 평가하였다.
고려대학교 교수이자 장준하의 친구였던 김준엽은 신청년이라는 이름의 중국 잡지를 예로 들면서 '사상계'는 자유·민권운동, 통일 문제, 경제발전 문제, 새로운 문화의 창조, 정의로운 복지사회를 줄기차게 추구했고, ‘사상계’를 중심으로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지성인들이 모여 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고 평가하였다.
지명관은 ‘사상계’가 우리나라 지식인들에게 앙가주망의 전통을 만들어주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했다. 그는 “장준하 선생 같은 분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다시 있을 수 없는 사람인 것 같다”고 했다. 영문학자 여석기는 ‘사상계’는 ‘좋은 잡지’였고 ‘잘 팔리는 잡지’였다고 하면서, “이런 경우가 앞으로 있을 것이라고 잘 믿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언론학자 정진석은 1950년대부터 60년대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잡지를 대표한 것은 ‘사상계’였으며, 장준하는 잡지 언론인으로는 제1인자로 이 나라 언론과 민주주의 발전에 획기적인 업적을 남겼다고 평가했다.
한편 한겨레 21에서 실시한 설문조사 에서는 8.15 해방 이후 민족주의의 맥을 이었다는 평가와 50∼60년대 척박한 지적 풍토 속에서 <사상계>를 창간하며 당시 지식인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는 점이 높게 평가됐다.
부정적 평가
강원용은 그가 존경받아 마땅하나 그의 사상계 등의 활동에 대해 정치적인 목적이 강했다고 평하였다. 정치적인 목적으로 사상계 등을 창간하였으며 제3공화국 출범 뒤에는 박정희에 반대하는 것으로 정치적 목표를 바꿨다고 평하였다. 한편 5·16 군사 정변 초기 5·16 군사 정변을 지지한 것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있다. 그가 '김구한테 붙었다가 장면한테 붙었다가, 또 윤보선을 따라다니며 색깔논쟁에 열 올렸다'는 비판도 있다.
또한 장준하는 이범석이 족청을 통해 발호하자 독립군 시절 사령관이었던 그와 인연을 끊을 정도로 청렴했지만, 한편으로는 김원봉이 일본군을 탈출한 한국인 청년들을 미인계로 매수하려 한다고 비이성적인 비난을 한 바 있다.여기에는 김구의 비서로서 그 영향을 받은 반공주의적 시각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야마하 피아노가 일제라고 광고를 싣지 않을 정도의 결벽적 배일주의자면서 대표적인 친일 문인 김동인을 기리는 동인문학상을 제정하고, 《사상계》 1957년 12월호에는 역시 친일파인 최남선을 추모하는 〈육당 기념호〉를 발행하며 최남선을 ‘친근한 벗이요 경애하는 스승’이라고 찬양하는 권두언을 쓰는 등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보였다. 장준하의 이런 모순된 모습들은 그의 시각이 어느정도 왜곡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며, 냉전 시기 반공주의 지식인의 어쩔 수 없는 한계라고 할 수 있다.
기타
윤보선, 장면, 이철승, 유진산, 김영삼, 김대중 외에 3공, 4공 시절 박정희의 강력한 정치적 경쟁자들 중의 한사람으로 지목되었으며 일부에서는 그를 현직 대통령인 박정희에 대비하여 재야 대통령이라는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다.
아들이자 미국 코네티컷에 거주 중인 장호준 목사가, 박정희 아들이며 박근혜 남동생 박지만에게 공개 서한을 썼다. "장준하 선생 아들이 박지만에게 보내는 글"
병적 기록부 발견
장준하 등이 일본군을 탈영했다는 주장의 진실을 찾기 위해 2004년 열린우리당 소속 국회의원 전병헌은 직접 일본군 측 자료를 조사하던 중 장준하의 일본군 탈영 증거와 병적기록부(유수명부)를 발굴해냈다. 이는 2004년 10월 국회 정무위원회에서 언론에 공개했다.
당시 열린우리당 전병헌 국회의원은 6일 "<유수명부(留守名簿)>에 남겨진, 장준하 선생이 1944년 1월 일본 학도병으로 징집되었다가, 그해 7월 7일 중국 서주에서 탈출해 6000리 대장정 끝에 중경에 도착, 한국 광복군에 합류했다는 기록이 발견됐다"며 "이 기록은 장 선생의 자서전 <돌베개>의 기록과도 일치한다"고 밝혔다. 이로써 장준하 선생의 일본군 징집 및 탈출 기록이 공개되었다.
전 의원에 의해 공개된 자료에 따르면, <유수명부>에서 찾아낸 장준하 선생의 이름(하리야스 슌가·張安俊河), 소속부대(제7991부대), 생년월일 및 본적지(평안북도 삭주군 외남면 대관동 258), 부친의 성명(장석인·張錫仁), 역종·병종 및 계급, 공탁금 번호와 상단에 탈출일자 및 탈출지 등이 기재돼 있다. 전체 114권으로 구성된 '유수명부'는 일본군의 해외파견 군인·군속의 명부로 탈출(逃亡) 및 이탈, 사망 등 행방불명된 자의 기록을 날짜와 장소와 함께 기록돼 있으며, 일본군으로부터 이탈하거나 탈출한 한국인 병사들에 대한 기록이 각 권 뒷부분에 따로 정리돼 있다.
병역 내용에 의하면 1944년(소화 19년) 1월 20일 일본군 제65사단 7991부대에 배치됐으며, 같은 해 7월7일 중국 장쑤성(江蘇省) 쉬저우(徐州)에서 탈영한 것으로 나타났다. 명부는 상단에 ‘도망(逃亡) 쉬저우’라고 기재, 장 선생의 탈영 사실을 밝히고 있다. 이는 장준하가 생전에 자서전 ‘돌베개’에서 밝힌 내용과 일치한다.
김원봉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
장준하는 조선의용대의 수령이자 한국광복군 1지대장이었던 김원봉을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장준하는 김원봉을 가리켜 '판에 박힌 공산주의자.', '공산당 노선을 취한 자'라며 혹평을 가하기도 했다.
1944년 일본군 탈출 직후의 장준하, 김준엽 등을 영입하려는 제의를 거절했다. 그러나 김원봉은 계속 사람을 보내 이들을 설득하려 했는데, 장준하는 김원봉이 일본군 탈영병, 학도병들 사이에 이간질을 획책했다고 한다. '김약산의 부하로 파견된 분견대장의 설득공작이 실패한 것을 알아차린 그들은 곧 우리에게 이간공작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장준하는 일본군이나 학도병 탈영자들을 포섭하는 과정에서 '김원봉 일파에서는 미인계까지 쓰고 나서는 형편'이라 하였다. 또한 장준하는 김원봉이 광복군의 신뢰를 떨어뜨리기 위해서 계략을 꾸몄다고 비난했다. '김원봉이 열심히 임정과 광복군에 대한 불신작용을 일본군 출신 부대에 가했다.'고 진술했다.
장준하는 김원봉의 민족유일당 결성 운동의 의도 역시 의심하였다. '김약산은 그때 김규식 박사를 당수로 업고 이끌고 있는 조선민족혁명당의 부당수로 있기는 했으나 이미 판에 박힌 공산분자의 한사람이었다. 아마 연립정부 내각에 참여하기 위해서 조선민족혁명당을 조직했던 것 같다.'는 것이다. 그는 김원봉을 부정적으로 평가했고, 김원봉이 월북함으로써 그의 주장은 신빙성을 얻게 되었다.
또한 장준하는 1945년 광복 직후에도 그가 이간질을 획책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광복군 대원들의 무지와 행패가 계속될 때 그가 이를 이용하려 했다는 것이다. '일본군 출신 부대로 하여금 임정이나 광복군에 대한 불신을 부채질하면서 그 어부지리를 노리는 김원봉의 계산이었다'고 했다. 광복군 편입을 거절하고 버티던 일본군 출신 부대의 책임자 격으로 있던 황모에게 김원봉이 직접 이소민을 파견, 광복군 제1지대로 끌어들일 공작을 했다]는 것이다. 또한 장준하는 '김원봉이 열심히 임정과 광복군에 대한 불신작용을 일본군 출신 부대에 가했다.'고 했다.
학력
평안북도 선천 교동소학교 수료
평안북도 삭주 대관보통학교 졸업
평안남도 평양 숭실고등보통학교 수료
평안북도 신의주 신성고등보통학교 졸업
일본 도요 대학교 철학과 중퇴
일본 일본신학교 중퇴
한신대학교 졸업
국방대학교 행정학사 1기 졸업(1956년)
기타 약력
1932년 4월, 평양의 숭실중학교 입학. 동아일보사의 ‘브나르도 운동’에 참여
1941년, 친구인 마라톤 선수 김익준의 권유로 일본 유학을 결심, 일본 도쿄에 유학
1941년 4월, 도요대학 예과 입학
1943년 11월, 신안소학교 시절의 제자이며 하숙집 딸이었던 김희숙(당 17세)과 결혼. 그녀가 정신대에 끌려가는 것을 막기 위한 뜻도 있었다고 함.
1945년 1월, 중국 충칭에서 광복군에 편입, 광복군 대위에 임관되어 독립 투쟁에 몸바침.
1945년 8월 18일, 독립군 신분으로 서울에 들어왔으나, 일본군의 저지로 다시 돌아감.
1946년 4월 26일, 김규식이 만든 한국청년회에 가입함. 그러나 곧 한국청년회를 탈퇴하고 이범석의 민족청년단으로 건너갔다.
1947년 12월, 이범석의 민족청년단에 가입하다.
1952년 9월, 월간 《사상》을 창간함.
1962년 8월, 막사이사이상 언론 문학상을 받음.
1965년 '조국 수호 협의회'에 참여하여, 한-일 조약 반대 투쟁을 벌임.
1966년 아버지 목사 장석인 사망
1967년 6월, 옥중 출마로 서울 동대문 을구 국회 의원에 당선됨.
1970년 2월, 새로운 민족 세력의 규합을 위하여 신당 운동을 추진함.
1970년 4월, 윤보선 등이 신민당을 탈당할 때 함께 탈당, 이후 무소속 국회의원으로 활동. 저서 돌베개 출간.
1970년 윤보선, 박기출 등과 선명여당 국민당 창당에 참여
1971년 '민주 수호 국민 협의회'에 참여함.
1973년 양일동 등과 민주통일당 창당에 참여하고, 통일당 최고위원에 선출되다.
1975년 4월 민주통일당 탈당.
1975년 8월 모종의 거사 계획 중 의문사.
1991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됨.
1993년 4월 15일, 제1회 한신상이 추서됨.
1999년 11월 1일, 잡지의 날을 맞아 금관문화훈장(1급)이 추서됨.
저서
《돌베개》
《민족주의자의 길》
《지식인과 현실》 (세계사, 1992)
방송
2004년 1월9일 KBS 인물현대사26편 장준하 1부 민족주의자의 길
2004년 1월17일 KBS 인물현대사27편 장준하 2부 거사와 죽음의 진실
1999년 8월 15일 MBC 다큐멘터리 아!장준하 구국장정 6천리
상훈
1962년 8월 필리핀 막사이사이상
1991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국장」
1994년 4월 15일 한신대학교 제정 제1회「한신상」
1999년 11월 1일 「금관문화훈장」
기타
가족의 생활고 논란
가족들은 사후에도 박정희 정권에 의한 압박에 시달렸다. 장남 장호권은 1976년에 테러를 당해 투병생활을 하기도 했으며, 정보기관의 압력으로 취업이 곤란해져 가족이 흩어지는 결과로 이어졌다. 반면 박정희 정권 말기 중앙정보부 부장이었던 김재규는 유족에게 미국행을 권유하는 등 일부 편의를 제공했다. 2012년에 장남 장호권은 노모와 일원동의 월세집에서 연금 월 100여만원에 의지하여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다고 증언하였다.이에 대해 국가보훈처는 독립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 시행령 제6조에 의거하여 미망인에게 월 143만 1천원의 보상금이 지급되고 있으며, 일원동 아파트도 동 법률에 따라 특별공급받은 주택이라고 밝혔다. 출처 위키백과
가족 관계
할아버지 : 장윤희(張潤熙, 1864년 ~ 1952년)
아버지 : 장석인(張錫仁, 1896년 8월 23일 ~ 1966년 6월 6일, 목사)
어머니 : 김경문(金京文, 1894년 12월 22일 ~ 1950년 6월 28일)
여동생 : 장영하 (張英河, 1922년 ~ 1998년)
남동생 : 장명하 (張明河, 1925년 ~ 2009년)
남동생 : 장익하 (張益河, 1929년 ~ 1951년?, 6.25전쟁 당시 UN군 통역장교로 복무중에 실종)
남동생 : 장창하 (張昌河, 1937년 ~ )
배우자 : 김희숙 (金熙淑, 1926년 ~ 2018년)
장남 : 장호권 (張豪權, 1949년 5월 14일 ~ )
책소개
장준하 선생을 “흙탕물과 같은 한국현대사에 핀 한떨기 연꽃과도 같은 존재”라고 평한 저자 김삼웅이 한국현대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장준하 선생의 삶을 재조명하는 책을 냈다. 『장준하 평전』은 장준하 선생의 삶 그리고 이승만, 박정희 정권 시절 고통 받던 국민들의 목소리를 대변했던 잡지 [사상계]를 한데 묶어 그 역사적 의의를 되살렸다. 이 책은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해’ 목숨을 걸고 투쟁했던 장준하 선생의 삶을 재조명함으로써 지난 시절의 암울했던 유산을 추종하는 정치인들, 언론인들에게 경종을 울리고 있다. 그리고 한국사회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바를 제시하고 있다.
목차
제1장 풀리지 않는 의문사, 반생의 위업
광복군으로 귀국 30년 뒤 의문사
외상 없는 시신
‘실족사’로 볼 수 없는 10가지 의문점
‘거사’ 앞두고 신변정리
‘금지된 동작’을 맨 먼저 시작한 혁명가
장준하 장남이 털어놓은 의문점
사생결단 ‘거사’ 앞두고 모살당했을 수도
신구합동의 명동성당 장례식
약사봉 계곡의 진혼곡
부재의 혼
제2장 의주에서 태어나 삭주에서 자라
역사의 길, 현실의 길
정도를 택한 의인의 길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첩첩산중의 청계동 마을로 이사
신성중학교에서 사회의식에 눈떠
평생의 동반 ‘함 도깨비 선생’
제3장 가정이 어려워 진학 포기하고 교직생활
신성학교 교사로 3년 재직
동맹시위 벌여 일경과 맞서
창공을 바라보는 소년
일본 유학생활
춘원·육당의 학병지원 강연
제자 김희숙과 결혼
제4장 일본군 탈출, 대장정에 나서
중국 망명 위해 일본군에 지원
‘잔반불식동맹’ 결성
사활을 건 탈출
모험에 나선 4명의 동지들
쫓고 쫓기는 질주
김준엽과의 만남
일본군의 포로교환 요구
불로하에서 부른 애국가
제5장 임천군관학교 활동 3개월
팔로군의 기습
한치룡 사령관의 전사
중국군 사령관의 타락상
임천분교에서 만난 김학규 주임
대원들의 교양지 《등불》 제작
열악한 생활 환경
임시정부 찾아 6000리 장정에 나서다
제6장 파촉령 넘어 중경임시정부 도착
부패한 중국군
노하구에 도착
파촉령을 넘어서다
꿈에 그리던 임시정부
임정요인들의 파벌싸움
“임정청사에 폭탄 던지고 싶다”
《등불》 속간
광복군 제2지대에 편입되다
제7장 OSS 대원에서 환국하기까지
서안에서 OSS 훈련받아
새 잡지 《제단》 창간
국내진공정진대에 선발
거듭되는 반전 또 반전
광복군으로 여의도공항 착륙
일본군과 대치하다 중국으로 돌아가
김구 주석과 선발대로 환국
환영객 없는 귀국
김구 주석 연설문 작성
제8장 해방정국에서 백범의 비서로 활동
해방공간에서 김구 주석의 행보
4당 거두의 연쇄회담 준비
임시정부 환국봉영회
지도자들의 처신에 환멸
김구 곁을 떠나 이범석의 족청으로
제9장 시대의 양식 《사상계》 창간
모든 혁명은 이론서에서 시작된다
《사상》 발행하다 《사상계》 창간
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해”
부인이 옷가지 팔아 제작비 부담
혼자서 만든 《사상계》 초창기
《사상계》를 향한 집념
한청빌딩 시대
제10장 《사상계》, 정론지로 자리잡아
편집위원 체제 갖추다
《사상계》의 편집방향과 지침
《사상계》 헌장
들사람 함석헌 ‘발굴’
낙양의 지가 올린 [할 말이 있다]
‘신인문학상’ ‘동인문학상’ 제정
친일지식인 ‘최남선’ 기념호 발행
제11장 반이승만 투쟁과 4월 혁명
함석헌의 첫 필화사건
이승만 정권의 탄압
백지 권두언
어용교수의 글, 불순광고 게재 거부
4.19혁명기의 《사상계》 깃발
‘민권승리’의 기념호
전국순회문화강연회와 《사상문고》 발행
제12장 제2공화국 참여와 반군정 투쟁
혁명과업에 대한 인식
국토건설본부의 책임 맡아
박정희 주도의 5.16쿠데타
정론정신 회복, 반군정 투쟁 벌여
함석헌 선생과 함께 체포
‘부패언론인’이란 오명
《사상계》 고사작전에 맞서
김종필과 민족주의 논쟁
박정희 사상문제에 초점 맞춰
제13장 《사상계》의 수난과 반독재 투쟁
굴욕회담 반대투쟁
정치보복 세무사찰 당해
“박정희는 밀수왕초다”
‘정치참여’ 의지인가 숙명인가
정계진출, 국회의원 옥중당선
《사상계》 발행권 부완혁에게 넘겨
《사상계》 몰락의 배경
국회의원 장준하의 활동
제14장 사활을 건 박정희와의 싸움
영구집권을 향한 친위쿠데타
[7.4남북공동성명] 지지선언
“통일 이상의 지상명령은 없다”
반유신 저항운동진영 결집 나서
100만인 서명운동
긴급조치 제1·2호 발동, 세 번째 구속
박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재야 대통령’의 재야 지도자로
제15장 “선생의 발자국 있으매” - 추모·회상
친일파 세상에 설 땅 잃은 광복군
“민족의 동량을 너무 일찍 잃었다”
동양의 선비, 서양의 인텔리겐치아
청렴·선공후사의 표상
부록
1. 장준하 선생 연보
2. 수기처럼 돌베개를 베고
3. 민주당 사인규명조사위원회 보고서
4.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진상규명 불능’ 판정
찾아보기
출처: https://japan114.tistory.com/14043 [동방박사의 여행견문록(since 2010):티스토리]
책소개
목차
2. 브나로드 운동과 신성중학교
3. 도사 선생 그리고 일본 유학
4. 학도병, 대륙의 탈출
5. 장정 6천 리
6. 임시정부와 8 · 15 광복
7. 경교장의 장 목사
8. 『사상계』, 그 구원의 등불
9. 수난과 형극의 수상자
10. 재야 대통령과 권부 대통령
11. 스러지지 않는 빛 사천추
이런 와중에 장준하는 9월에 곤명을 떠나 대원들과 함께 상해로 왔다. 패전으로 환국해야 할 일본군의 숫자가 워낙 많아 포로 상태가 아닌 그들을 미군과 중국군이 미처 통제하지 못해 무슨 불상사가 일어날지 몰라 매우 흉흉하였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 10월 초가 되자 곤명에 있던 광복군 사령관 이청천이 상해로 와서 대원들과 함께 백방으로 귀국길을 주선하려고 동분서주하였으나 그 일이 본국의 미군 사령관 하지의 손에 달려 있는지라 현지 사정은 속수무책일 뿐이었다. 그러던 중에 낭보 아닌 낭보가 하나가 있었다. 뒤에 우습게 되었지만 하지 중장이 중국의 임시정부 요인들을 귀국시키겠다는 발표를 한 것이었다. 그래서 중경의 임시정부가 모두 상해로 옮겨와 임정 요인들을 수송할 군용기를 목이 빠지게들 기다리는데 도무지 소식이 없었다.
출처: https://japan114.tistory.com/12847 [동방박사의 여행견문록(since 2010):티스토리]
책소개
그리고 40년 만에 드러난 진실
광복군으로, 언론인으로, 정치인으로, 민주투사로
박정희 유신독재에 온몸으로 맞선 장준하의 외침을 새롭게 만나다
재야인사 장준하 선생 사후 40주기를 맞아 처음 공개하는 연설 전문
장준하 선생 서거 40주기를 맞아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세상에 내놓는다. 바로 유신독재자 박정희에 의해 만들어진 중앙정보부(지금의 국가정보원, 이하 중정)가 기록한 ‘장준하 동향 보고’이다.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중정은 왜 장준하를 불법으로 사찰하고 미행하고 도청했까? 이것은 그의 의문사와 어떤 관련이 있을까?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는 독재 권력(박정희와 중앙정보부)이 자신의 정치적 반대자 장준하를 어떻게 감시하고 탄압했는지를 낱낱이 ‘기록’한 책이다. 불의한 권력이 국민의 인권을 어떻게 유린했으며 그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똑똑히 증언하고 있다.
목차
* 서장
‘온순하나 날카로움’ 중정이 평가한 장준하
1967년 4월 22일 연설 전문 최초 공개
* 1장
광복군 장준하 1918~1962
1915년과 1918년, 두 개의 출생 연도
일제 향한 첫 항거, 1937년 동맹 시위
신안소학교 교원에서 일본 유학까지
김희숙과 장석인을 지켜낸 희생
장준하의 평생 벗 김준엽
임정을 향한 6000리 대장정과 《등불》
“임정 청사에 폭탄을 던지고 싶다”
한반도 잠입 위해 OSS 요원이 되다
백범의 죽음과 한국전쟁
1953년 《사상계》를 창간하다
한국인 최초로 받은 막사이사이상
장준하와 5·16 군사쿠데타
“장준하 선생이 대통령에 출마했다면”
‘혁명 공약’ 깬 박정희의 거짓말
장준하와 박정희, 숙명적인 충돌
* 2장
중앙정보부, 장준하를 기록하다 1963~1973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 유세 발언
박정희의 굴욕적 한일조약
6·3 사태와 계엄령 선포
‘국가원수 모독죄’로 구속되다
“단 한 사람, 박정희만은 안 된다”
“부정선거, 도둑 맞지 마십시오”
중정의 《사상계》 부도공작
두 번째 구속, 옥중출마 선언하다
“국회의원 명함 한 장 있어요?”
본격적인 미행과 사찰, 도청
박정희 ‘3선 개헌’ 날치기 통과
두 번째 쿠데타 ‘10월 유신’
유신독재에 저항하다
김대중 납치, 정치인 암살 신호탄?
‘납치 주범은 누구인가’ 이철희의 증언
중정이 기록한 1973년 첫 시국 선언
유신독재 정조준 ‘100만인 서명운동’
다급해진 박정희의 최후통첩
* 3장
장준하, 박정희를 넘어서다 1974~1975. 7.
장준하의 입을 막아라
‘긴급조치’ 발동부터 연행까지
“개헌에 대한 소신은 변함없다”
차라리 감옥에서 죽겠다
“장준하를 석방하라” 박정희의 굴복
《돌베개》를 다시 쓰다
〈동아일보〉탄압과 장준하의 응원
유신헌법 찬반 투표에 반대하다
‘개헌안 단일화 촉구’ 기자회견
중정의 ‘위해분자 관찰계획 보고’
유신독재 타도 위해 전부를 걸다
김대중과의 화해, 그리고 결단
2차 100만인 서명운동을 도모하다
‘장준하의 거사’ 알고 있었던 중정
* 4장
장준하, 영원히 살다 1975. 8.~2013
고통과 희망, 그리고 비극의 8월
그날 중정은 무엇을 기록했나
사인 의혹 보도로 추방된 외신 기자
그들은 ‘진실’을 알고 있었다
어둠과 싸운 사람만이 빛이 된다
국민 가슴속에 묻힌 큰 별, 장준하
죽어서도 계속된 중정의 감시
37년 만에 밝혀진 타살 증거
위대한 ‘대한민국 애국자’ 장준하
* 에필로그
* 연보
책 속으로
“박정희 씨를 나는 믿을 수 없다”는 말로 시작하는 장준하의 사상적 공세는 정말 의외다. 대한민국에서 사상 문제로 박정희가 공격받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장준하는 무슨 이유로 박정희를 사상 문제로 공격했을까.
--- p.30
먼저 1966년 10월 15일 야당인 민중당이 포문을 열었다. 민중당이 대구에서 개최한 ‘특정 재벌 밀수 진상 폭로 및 규탄 국민대회’에 초청 연사로 등단한 이는 장준하였다. 그는 박정희를 정조준하여 포문을 연다. 박정희를 향해 입 한 번 벙긋하기도 어려운 그때, 인파가 가득한 집회장 연단에서 장준하는 거침없는 명연설을 남긴다. 바로 ‘박정희 밀수 왕초’ 발언이었다.
--- p.144
장준하의 고단한 경제적 처지를 유추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형편은 국회의원 2년차가 되는 1968년에도 나아지지 않았다. 심지어 장준하가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1975년까지도 그의 경제적 상황은 더 나빠지면 나빠졌지 좋아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러한 경제적 곤란으로 인해 오히려 장준하의 대중적 인기가 올라가고 있다는 특이한 중정 동향 보고가 눈에 띈다. 장준하가 국회의원을 2년째 하고 있던 1968년 6월 22일 중정의 동향 보고이다.
--- p.170
김종필의 경고에 장준하 역시 화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12월 28일 청원운동 본부장이었던 장준하는 김종필에게 반박한다. 다음은 중정의 동향 기록이다.
“73. 12. 28. 김종필 국무총리 담화에 대한 장준하 청원운동 본부장의 발표. -헌법 개정 청원은 국민의 권리임과 동시에 의무다 -청원운동을 혼란, 또는 선동으로 적대시하는 것은 민의의 소재를 알아보지 않겠다는 의도다 -대통령에 대한 청원운동은 계속할 것이다.”
--- p.207
장준하는 박정희가 보낸 연말의 최후통첩에 대해 늦은 답변을 내놓는다. 하지만 그건 박정희가 원하던 답이 아니었다. 중앙정보부가 작성한 1974년 1월 5일의 장준하 동향 기록이다.
“개헌청원운동에 대한 성명 발표 -오늘의 정치 정세 전망은 밝지 못하다 -말과 비판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비롯됐다. -따라서 대통령에게 이를 청원하려는 것이고 -당국은 이를 막지 말라.”
장준하의 성명은 간결했으나 명확했다. 박정희의 협박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입장이었다. 이 시기, 장준하에 대한 중정의 감시와 미행 역시 최고 수준이었다.
--- p.211
형집행정지로 풀려난 장준하는 여전히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박정희는 국민투표 결과를 통해 국민이 유신체제를 지지한다고 생각했겠으나 장준하는 부정선거로 얻은 불의한 결과라며 인정하지 않았다. 장준하는 그러한 뜻을 개인성명과 기자회견 등의 방식으로 계속해서 박정희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중정은 1975년 3월 31일 장준하에 대한 모종의 계획을 수립한다. 훗날 대통령소속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 조사 과정에서 확인된 이때의 계획은 이른바 ‘위해분자 관찰계획’이었다. 당시 중정 6국 과장의 주도 아래 작성된 이 보고는 나중에 장준하의 의문사와 맞물려 엄청난 의혹을 사게 된다.
--- p. 255
중정 역시 장준하의 이 같은 거사 계획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증거가 바로 1975년 3월 31일 장준하를 상대로 중정이 작성한 ‘위해분자 관찰계획 보고’이다. 중정은 장준하를 감시하면서 많은 보고서를 만들어냈는데, 그중 유일하게 비밀로 분류된 문서가 이것이다.
이 보고서는 “장준하의 개헌운동 계획을 사전 탐지해 와해, 봉쇄함으로써 조직 확장과 세력 확산을 방지하고 공작 필요시 ‘보고 후 실시’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즉 장준하가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을 재추진할 시 이를 저지하는 공작이 필요할 경우 ‘보고 후 실시’하라는 내용이었다. 장준하는 이 보고서가 만들어진 후 의문의 죽음을 당하게 된다. 보고서가 만들어지고 나서 불과 5개월 뒤의 일이었다.
--- p.268
나는 장준하가 스스로 자신의 묘 뒤편 석축을 무너뜨려 사람들이 묘를 열어보지 않을 수 없도록 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장준하의 투쟁은 죽어서도 치열했고 멈추지 않았다. 그러한 투쟁은 바로 1967년 박정희의 재선을 막기 위해 장준하가 외쳤던 그 유명한 연설을 다시 한번 상기시켰다.
“국민 여러분. 대한민국에서는 일정한 자격과 조건을 갖춘 사람이라면 누구나 대통령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 단 한 사람, 박정희 씨만은 절대 대통령을 할 수 없습니다. 박정희 씨는 이 민족을 배신한 친일파요, 사상을 알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출판사 리뷰
그리고 40년 만에 드러난 진실
광복군으로, 언론인으로, 정치인으로, 민주투사로
박정희 유신독재에 온몸으로 맞선 장준하의 외침을 새롭게 만나다
■ 재야인사 장준하 선생 사후 40주기를 맞아 처음 공개하는 연설 전문
장준하 선생 서거 40주기를 맞아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세상에 내놓는다. 바로 유신독재자 박정희에 의해 만들어진 중앙정보부(지금의 국가정보원, 이하 중정)가 기록한 ‘장준하 동향 보고’이다.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중정은 왜 장준하를 불법으로 사찰하고 미행하고 도청했까? 이것은 그의 의문사와 어떤 관련이 있을까?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는 독재 권력(박정희와 중앙정보부)이 자신의 정치적 반대자 장준하를 어떻게 감시하고 탄압했는지를 낱낱이 ‘기록’한 책이다. 불의한 권력이 국민의 인권을 어떻게 유린했으며 그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똑똑히 증언하고 있다.
■ 중정 자료를 토대로 장준하 일대기를 엮은 이유
저자 고상만은 2년 전 우연한 기회로 중앙정보부의 ‘장준하 동향 보고’를 입수했다. 저자는 이것을 운명으로 여겼다. 대통령소속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에서 장준하 선생 의문사를 담당했던 저자는 박정희 독재 권력하에서 숨진 장준하 선생이 미처 전하지 못한 말을 세상에 대신 알려달라는 뜻으로 해석했다.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싸우다가 박정희 유신독재에 쓰러진 장준하를 오늘날 후세의 사람들이 새롭게 재평가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따라서 장준하의 삶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고, 그가 무엇을 위해 누구와 싸웠으며 그 과정에서 어떤 탄압과 고통을 받았는지를 중정의 감시 기록을 바탕으로 낱낱이 공개했다.
한편 장준하 선생을 상대로 한 중정의 초법적인 사찰은 엄연히 명백한 범죄 증거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절대 일어나선 안 될 불법 행위를 그때 막지 못했다면, 지금이라도 제대로 알려야 한다. 불행한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중정이 장준하 선생을 상대로 한 사찰, 미행, 도청, 사설 정보원을 활용한 정보 수집 등 불의한 권력의 실태를 고발한다.
■ ‘민주주의를 밝힌 등불’ 장준하의 삶과 진실에 한 발 더 다가서다
이 책은 박정희 독재 권력하에서 누구도 기록할 수 없었던 장준하 선생의 살아 있는 말과 행동을 오늘에 다시 되살려낸다. 역설적이게도 장준하의 모든 것을 감시하고 기록한 중정 덕분이다. 장준하를 가두고 처벌할 목적으로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 선생의 말과 글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장준하의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중정이 녹취해 기록한 장준하 선생의 대중 연설 가운데 한 대목을 소개한다. 바로 1967년 4월 22일 남산야외음악당에서 있었던 야당 대통령 후보 지지를 위한 장준하 유세이다. 그는 이날 유세에서 박정희 정권의 실정과 탐욕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당시의 정치적 시대 상황과 장준하 선생의 거침없는 비판과 분노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박정희 씨를 나는 믿을 수가 없는 사람이요. 왜 박정희 씨를 믿을 수 없느냐? 사상이 없는 사람이요, 일본 군벌과 천왕에 충성을 다한 사람이요. 황도주의를 그렇게 좋아하더니 하룻밤 사이에 남북으로 조국이 갈라지고 공산당의 조직이 강해지니까 군대 내에 있어서 공산주의 조직과 빨갱이들과 완전히 결합되었었다고 소문이 자자하드군요. 그러든 박정희 씨가 군사쿠데타를 하고 나드니 행정적 민주주의를 들고 나왔어요. 그러드니 행정적 민주주의는 온데간데 없고 민족적 민주주의, 민족적 민주주의란 것은 우리 당의 정책위원장이신 부완혁 선생이 전번 선거 때 박정희 씨가 민족적 민주주의를 내세웠을 때 《사상계》에 민족적 민주주의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이야기를 썼어. 바로 전 소련 수상 흐루시초프가 아직도 공산화되지 않은 비공산주의 국가에게 공산화시키기 위해서 새로 만든 용어가 민족적 민주주의라 했소.”
“그러면 그 민족적 민주주의는 온데간데없고 박정희 씨가 정권을 잡은 4년 동안 무엇을 했습니까. 가장 악질적인 군사독재주의로 모든 인권을 짓밟고, 모든 여론을 탄압하고, 모든 야당을 돈으로 매수하고. 오늘도 어떤 소식을 들으니까 군소 정당을 잔뜩 만들어가지고 여기다가 어떤 기관에서 돈을 준다고…… (중략)
여러분 우리도 정신 차릴 때가 온 것입니다. 이렇게 갈팡질팡하는 아무런 사상을 가지지 못한 암흑 심야에 파도가 치는 일엽편주에 나침반을 잃고 선장도 없이 6년 동안을 끌어온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끝장이 온 것입니다. 박정희 정부를 합법적으로 타도하고, 새 나라를 건설하여줄 것을 당부하는 바입니다.”
민주주의자 장준하 선생이 독재자 박정희의 실체를 날카롭게 고발한 당시의 말은 이처럼 오늘날 생생하게 복원된다. 그 정의로운 외침이 40년의 세월을 지나서 이제야 독자들에게 고스란히 다가오게 된 것이다.
“중정의 동향 기록과 중요 상황 보고를 토대로 이 책을 썼지만 해석만큼은 중정의 시각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장준하가 남긴 말과 글을 장준하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장준하의 유족과 동지들이 증언하는 수많은 글과 책을 함께 담아 장준하의 일대기를 온전히 드러내려 한다. 그리하여 40년을 넘는 긴 세월을 돌고 돌아 이제라도 장준하의 외침이 제대로 평가될 수 있기를 염원한다.” - [프롤로그] 중에서
출처: https://japan114.tistory.com/14042 [동방박사의 여행견문록(since 2010):티스토리]
책소개
‘장준하 타살 사건’의 실체에 바짝 다가선 생생한 르포!
2012년 37년 만에 장준하 선생의 유골이 공개되면서 박정희 독재 세력에 의한 명백한 타살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이 사건의 전말을 가장 잘 알고 있는 담당 조사관 고상만은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들과 여전히 오해에 가려져 있는 부분들을 파헤쳐 이 사건의 재조사가 시급함을 역설했다. 2018년 장준하 탄생 100주기를 맞아 ‘장준하 타살 사건’의 실체에 더욱 가까이 다가간다. 저자는 분명히 말한다. 진실은 묻히지 않는다고.
‘한국 현대사의 순교자’ 장준하는 1918년 8월 27일에 평북 의주에서 태어나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 약사봉 계곡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이 책은 장준하 탄생 100주년을 맞아 새로 펴내는 『장준하, 묻지 못한 진실』(2012년 11월 26일 초판 발행, 돌베개)의 개정판이다.「개정판을 내며: 장준하 선생 태어나신지 100년, 그리고 2018년 7월의 부고」와 「개정판 에필로그: 장준하 비밀 밝혀줄 단서, 나는 어디 있는지 안다」를 새로 붙였으며, 본문을 새로 다듬었다.
목차
추천사 1 | 고상만 선생, 참으로 고맙소 _정연주(전 KBS 사장)
추천사 2 | 검은 구름 흩어지면 밝은 달 절로 드러난다 _명진(전 봉은사 주지)
프롤로그 | 나는 왜 이 글을 쓸 수밖에 없었나
1부 독립군 장준하 대 친일파 박정희
장준하를 처음 만나다
삼성 사카린 밀수 사건, “박정희는…”
장준하, 그는 어떤 사람이었나
연인을 위해 일본군 징집을 선택한 장준하
일본군 탈출 후 임시정부를 향한 6,000리 대장정
장준하, 《사상계》 를 통해 언론인으로 서다
장준하와 박정희의 격돌은 운명
장준하의 두 번째 구속, 정치의 길로 접어들다
돈 없는 장준하의 선거운동, ‘사탕과 손수건’의 비밀
편치 않은 정치인의 길
박정희의 영구집권 계획을 폭로한 김대중
표를 달라고 하지 않겠다던 박정희, 그가 지킨 약속은…
민주주의와 인권 압살, ‘유신시대’의 개막
긴급조치 남발, ‘거대한 감옥’으로 변한 대한민국
장준하를 석방하라, 미국 정부의 압력
2부 장준하 사건 조사관이 되다
장준하, 의문의 죽음
김대중 대통령의 인권 관련 업적 세 가지
‘교수의 양심’ 최종길 교수가 맞이한 참담한 최후
1973년 10월 19일, 중정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
의문사위원회가 규명한 사건들
1986년 서울대 김성수, 1998년 판문점 김훈 중위 의문사 사건
의문사 첫 번째 담당 사건, ‘남현진 이병 의문사’
구타 진술을 은폐한 군 헌병대 수사
헌병대 수사관도 믿지 않는 ‘구타 없는 군대’
밝혀진 남현진 이병 의문사의 진실
당신이 맡을 사건은 따로 있소
장준하 의문사 사건 조사관이 되다
3부 장준하 사건은 왜 의문사인가
1975년 8월 17일, 장준하를 본 사람들
장준하 사건에 얽힌 ‘오해와 진실’
구당 김남수의 장준하 치료설
김남수는 왜 장준하를 치료했다고 주장했을까
장준하 사건 조사팀이 세운 세 가지 원칙
답은 늘 쉬운 곳에 있었다
폐기된 ‘88년 경찰 재조사’ 기록을 찾아라!
극적으로 찾아낸 장준하 의문사 관련 기록들
사라진 ‘1시간 7분’ 증언, 녹음테이프를 찾다
국가와 민간 전문가를 동원한 음성 복원 싸움
사건 후 3일간 행적이 묘연한 목격자
김용환, 그는 왜 사실이 아닌 신원보증을 말하나
김용환, 그는 누구인가
직업 없이 무슨 돈으로 살았을까
1971년 이후 사라진 김용환이 다시 장준하에게 나타나다
4부 목격자 김용환, 그에게 묻다
김용환은 정말 목격자인가
장준하는 정말 군인 두 명을 만났을까
장준하의 약사봉 산행은 과연 사실일까
최초 공개, 1975년 8월 20일 김용환은 뭐라고 말했나
장준하는 나무를 잡은 사실이 없다? 목격자의 ‘반란’
사건 직후 사라진 목격자의 미스터리
사라진 그가 다시 사건 현장에 나타났다
장준하는 약사봉을 등반하지 않았다
장준하는 정말 벼랑에서 추락했나
사라진 보안사령관 직보 문서
유족에게 걸려온 괴전화의 정체를 추적하다
중앙정보부 ‘중요 상황 보고’에 적힌 괴전화의 주인공
괴전화를 했다는 김용환의 분노, “모두 조작이다”
괴전화를 부정한 이유, ‘새로운 늪’
김용환은 중정의 ‘사설 정보원’이다
김용환의 ‘특수인물 존안 카드’
‘박정희’의 9년 3개월 비서실장, 김정렴을 만나다
“장준하가 누구지”, 생각지도 못한 김정렴의 반격
뜬금없는 김정렴의 발언, ‘긴급조치 10호’와 김재규의 비밀
김정렴이 들려준 ‘박근혜와 구국선교단’, 그리고 진실
‘무소유’ 법정 스님이 말하는 장준하의 거사
장준하의 거사를 알고 있었던 중정
1975년 7월 29일 김대중과 장준하는 왜 만났나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전해준 ‘조언’
2004년 3월, 의문사위원회는 왜 시국성명을 발표했나
감사원으로부터 받은 시국선언 배후 조사
‘개구리 소년’ 법의학자, 마지막 희망을 쏘다
초판 에필로그 | 장준하 사건은 왜 진상규명 불능으로 결정되었나
개정판 에필로그 | 장준하 비밀 밝혀줄 단서, 나는 어디 있는지 안다
출판사 리뷰
‘한국 현대사의 순교자’ 장준하는 1918년 8월 27일에 평북 의주에서 태어나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 약사봉 계곡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이 책은 장준하 탄생 100주년을 맞아 새로 펴내는 『장준하, 묻지 못한 진실』(2012년 11월 26일 초판 발행, 돌베개)의 개정판이다.「개정판을 내며: 장준하 선생 태어나신지 100년, 그리고 2018년 7월의 부고」와 「개정판 에필로그: 장준하 비밀 밝혀줄 단서, 나는 어디 있는지 안다」를 새로 붙였으며, 본문을 새로 다듬었다.
초판 출간 후 이명박과 박근혜 정권을 거치는 동안 ‘장준하 의문사 사건’은 정부와 여당의 훼방으로 오히려 잊혀져갔다. 장준하 선생의 의문의 죽음 현장을 유일하게 목격했다 자처한 김용환 또한 2017년 9월 사망해 사건의 진실은 더더욱 멀어진 듯했다. 그런 상황에서 장준하 선생의 부인 김희숙 여사가 2018년 7월 2일 별세하셨다. 기품 있는 넉넉한 미소와 당당하고 의연한 모습으로 ‘위대한 애국자의 위대한 아내’ 김희숙 여사를 기억하는 고상만은 2013년 2월 25일 박근혜 취임식날 방문했던 고인과의 만남을 아프게 술회한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 소식을 접한 김희숙 여사는 갑작스러운 흉통으로 병원을 찾았다. 진단 결과 심장 쪽에 작은 종양이 발견되었는데 다행히 악성 종양은 아니라 전하는 의사에게 여사는 이렇게 물었다 한다. ‘앞으로 5년은 꼭 살아야겠는데, 더 살 수 있겠느냐’고. ‘더 오래 사셔야지 왜 5년이냐’는 저자의 물음에 여사는 ‘저 세상에 가서 만난 영감이, 지금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누가 하고 있소, 물으면 차마 답을 못할 것 같아서’라 했다 한다. 그리고 5년 뒤 문재인이 대통령이 되었다.
저자는 김희숙 여사의 영전 앞에 장준하 선생의 타살 의혹에 마침표를 찍겠다고 다짐한다. 그동안 밝혀낸 사실과 새롭게 드러난 진실을 더하여 곧 이어질 진실화해위원회 2기 조사를 통해 사건의 실체를 명명백백히 하는데 힘을 쏟겠다고. 누가 무엇을 감추고 있으며 어떤 것을 밝혀야 하는지 분명히 하겠다고. 이 책은 그 약속의 시작이다.
마침 2018년 장준하 탄생 100주년을 맞아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 종교인, 언론인, 사회운동가였던 선생을 기리고 뜻을 알리고자 조직된 ‘장준하100년위원회’가 지난 6일 발족식을 갖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공동위원장은 장호권 장준하 선생 장남, 박원순 서울시장, 지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이 맡았다. 우선 장준하100년위원회는 포천시청과 MOU를 맺어 장준하가 의문사한 약사봉 계곡을 장준하를 기념하는 장소화 하기로 하고 오는 8월 18일 43주기 추모식을 이곳에서 갖는다. 이어 8월 26일에는 서울시청광장에서 ‘장준하 100년 어울림 한마당’을 열고, 또한 평안북도 의주군 고성면 연하동에 위치한 장준하 선생 생가 방문과 복원도 계획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장준하 부활’의 움직임 속에 오랫동안 민주와 인권의 파수꾼 역할을 해온 ‘수사반장’ 고상만의 『장준하, 묻지 못한 진실』의 개정판을 새로 펴낸다.
■ 37년 만에 사자후를 토해낸 장준하 선생의 유골, “나는 이렇게 타살되었다!”
▶ 장준하, 그는 누구인가
1918년에 태어난 장준하 선생은 1944년 1월 김희숙과 결혼식을 올린 지 불과 14일 만에 일본군 학도병으로 징집되어 중국 쉬저우의 부대로 전속되었으나 부대를 탈출하여 무려 6,000리를 걸어 광복군에 합류했다. 이후 OSS(미국 전략첩보대) 1기 훈련을 마치고 이범석 장군 휘하에서 국내 진입 훈련을 하던 중, 닷새 차이로 해방을 맞아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45년 11월에 임정요인들과 귀국하여 김구 주석의 비서, 비상국민회의 서기 등을 역임했다.
1953년 한국 지성사에 한 획을 그은 《사상계》를 창간하여 지식인과 대학생을 비롯한 많은 독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자유당 정권, 박정희 독재를 줄기차게 비판하면서 시대의 양심과 등불 역할을 자처했다. 이 과정에서 수차례 연행되고 구속되는 등 수많은 고초를 겪어야 했다. 하나 이 공로로 1962년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막사이사이상 언론문학상을 수상하는 기쁨을 누리기도 했다.
1967년 국가원수모독죄로 구속된 상태에서 제7대 총선에 신민당 후보로 옥중 출마하여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되었다. 이후 제8대 총선에서 여당의 부정선거로 낙선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엄혹한 유신독재 시절이었던 1973년 ‘민주회복을 위한 백만인 서명운동’을 주도하여 긴급조치 1호 위반 혐의로 구속되어 징역 15년형이라는 어이없는 선고를 받았으나 이듬해 병보석으로 출감했다. 1975년 ‘제2차 민주회복을 위한 백만인 서명운동’을 준비하던 중 거사 발표 3일 전인 그해 8월 17일 경기도 포천군 약사봉 계곡에서 안타까운 생을 마감했다.
당시 검·경은 장준하 선생의 사망 원인이 ‘실족 추락사’라고 밝혔으나 75도 경사진 곳에서 15미터나 굴러 떨어졌다고 보기에는 너무도 깨끗한 시신의 상태, 유일한 목격자를 자처하는 김용환의 엇갈리는 진술, 보온병과 안경이 전혀 깨지지 않은 점 등 숱한 의문을 해소하지 못해 대표적인 의문사로 남아 있었다. 그러던 중 많은 비에 묘지 석축이 붕괴되어 2012년 이장을 하는 과정에서 37년 만에 선생의 유골이 세상 빛을 보게 되었고, 누가 봐도 선명한 지름 6센티미터 크기의 가격흔(加擊痕)이 만천하에 드러남으로써 결국 장준하 선생은 박정희 독재 세력에 의해 타살되었으리라는 그간의 의혹이 진실에 더욱 가까워지게 되었다.
▶ 조사관 고상만, ‘장준하 타살’의 증거를 쫓다
2003년 7월부터 1년간 제2기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장준하 의문사 사건을 담당했던 고상만 조사관은 처음에 이 책을 쓸 생각이 전혀 없었다. 2012년 8월 장준하 선생의 두개골이 세상에 드러난 이후 여기저기에 글을 쓰고 방송 출연을 해오면서도 사건의 전말을 궁금해 하는 많은 기자들에게 고 조사관은 자신이 작성하여 국가기록원에 이관시킨 최종 보고서를 참고하라고 말해왔다. 그러다 국가기록원에서 장준하 사건 관련 자료를 2074년까지 비공개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큰 충격에 빠졌다. 진실을 덮으려는 정부의 비열한 ‘꼼수’에 맞서 이 사건의 전말을 세상에 알려야겠다는 사명감으로 불철주야 집필에 매달려 2012년 11월에 『장준하, 묻지 못한 진실』초판을 발행한다.
그가 작심하고 밝힌 사건의 전말과 세세한 조사과정은 그야말로 한 편의 다큐멘터리와 영화와도 같다. 특히 ‘없는 자료도 실제로 없음을 확인한다’는 원칙하에 1975년 문익환, 계훈제 등이 장준하 발인 전날 찾아온 김용환과 사고 경위에 대해 1시간 7분 동안 나눈 문답이 담긴 녹음테이프와 1988년 경찰 재조사 기록을 찾아내고 복원하는 과정을 보면 그가 이 사건을 얼마나 철저히 조사했는지 잘 드러난다. 더욱이 유일한 목격자를 자처하는 김용환의 오락가락하는 진술, 《월간조선》과 가진 사실과 다른 인터뷰 내용 등을 엮어서 읽다 보면 당시 중앙정보부와 기무사령부가 끝내 협조해주지 않은 존안 자료가 하루 빨리 공개되어야 이 사건이 완벽하게 종지부를 찍을 수 있으리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 최초 공개 자료, 어떤 것들이 있었나
이 책에는 저자가 최초로 밝힌 여러 자료들이 들어 있다. 우선 문익환 목사의 혜안으로 남게 된 녹음테이프 내용을 비롯해 박정희 독재정권에 의한 타살을 확신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인터뷰, 9년 3개월간이나 박정희의 비서실장을 지냈던 김정렴이 들려준 김재규와 긴급조치 10호의 비밀, 박근혜와 최태민 목사의 구국선교단 비리 관련 사실!, 법정스님으로부터 확인한 장준하 ‘거사’의 실체, ‘진상규명 불능’이라는 결과가 도출되기까지의 상세한 과정, ‘진상규명 인정’ 의견을 밝힌 한상범 · 홍춘의 · 이기욱 위원의 ‘소수 의견서’와 당시 위문사위 위원장이었던 한상범 교수의 ‘인정 의견에 대한 보충의견서’ 전문 등이다.
장준하 의문사 사건을 가장 상세히, 또 정확히 알고 있는 저자가 들려주는 놀라운 이야기들을 통해 그동안 숱한 자료 협조 요청에 번번이 ‘존안 자료 없음’이라는 여섯 글자의 뻔뻔한 답을 되풀이해온 국가정보기관과 재조사는 더 이상 필요치 않다고 외면했던 이명박 · 박근혜 정부의 후안무치와 술수가 낱낱이 드러난다.
▶ 문제의 인물 김용환을 어떻게 볼 것인가
저자는 당시 이 사건과 관련하여 유일한 목격자를 자처하는 김용환을 최소한 열여덟 번 이상 만났다. 평범한 시골 아저씨 같은 김용환에게서 저자는 인간적인 연민을 여러 차례 느끼기도 했다. 무엇보다 저자를 가장 안타깝게 만든 것은 상황에 따라 매번 달라지는 김용환의 진술이었다. 항간에 떠도는 김용환 관련 의혹들에 대해 저자는 객관적으로 검증된 사실, 조사 결과 진실로 밝혀진 사실을 토대로 해서만 자신의 입장을 밝힌다. 일례로 김용환이 중정의 ‘사설 정보원’이었다는 ‘설’은 아직 사실로 확인되지 않은 ‘의혹’일 뿐이라며 선을 긋는다. 이외에도 김용환은 정말 유일한 목격자가 맞는지, 중정의 ‘중요 상황 보고’ 문서에 사고 당일 유족에게 ‘괴전화’를 건 인물이 김용환으로 명기되어 있는데도 왜 그는 한사코 그 문서가 조작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인지 등등 아직도 풀리지 않은 의혹들이 많다.
저자는 사건의 중심에 서서 오랫동안 시달려온 김용환 자신을 위해서라도 이 사건은 하루 빨리 재조사가 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한편 이 책을 김용환을 비난하는 근거로 삼지 말아달라는 간곡한 당부도 잊지 않았다. 김용환이 2017년 9월에 사망함으로써 그의 ‘진실’은 이제 추적하는 자와 시대의 몫이 되었다.
출처: https://japan114.tistory.com/14044 [동방박사의 여행견문록(since 2010):티스토리]
책소개
장호권 선생은 70을 넘기고서야 비로소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었고, 아버지의 아름드리 그림자에서 벗어나 나만의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회고록』이 마지막이 아니라 아버지가 못다 이룬 꿈을 이루는 새로운 출발이 되길 희망한다. 민족과 국가의 미래를 위해서 말이다.
목차
아버지와 어머니가 만나다.
6·25전쟁 발발 이후 부산으로 피난 가다.
[사상계]를 창간한다.
서울에 올라와 생활기반을 닦다.
[사상계], 민족 정론지로 거듭나다.
4·19혁명 이후 국토건설본부에 참여하다.
5·16군사정변 이후 부정 축재자로 몰리다.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하다.
박정희 쿠데타 세력의 민정 이양을 반대하다.
한일회담 반대 투쟁에 나서다.
정치인의 길로 나가 사카린 밀수사건을 파헤치다.
야당 ‘4자 회담’을 이끌다.
옥중 출마하여 7대 국회의원에 당선되다.
아버지가 나를 해군에 입대시키다.
베트남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다.
[사상계], 폐간당하다.
『돌베개』를 출판하다.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마하다.
‘헌법개정백만인서명운동’을 전개하다.
감옥에서 나와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
퇴원 후 야당 통합에 진력하다.
나의 결혼식장이 시국강연회장이 되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혼배성사를 올리다.
약사봉에서 갑작스러운 의문사를 당하다.
아버지의 시신을 안방 안치하고 검안하다.
검찰 측, 실족사로 처리하다
명동성당에서 아버지의 영결식을 치르다.
제2부 나와 아버지; 홀로서기와 의문사 진상규명 활동
의문사 현장에서 진상 규명에 나서고 추모비를 세우다.
사건 진실을 밝히려다 테러를 당하다.
가족 생계를 위해 장사를 시작하다.
말레이시아로 도피성 외유를 떠나다.
싱가포르로 떠나서도 아버지를 기리다.
‘장준하 새긴돌’을 세우다.
싱가포르에서 경제적인 기반을 닦다.
귀국 후 낯선 고국 생활을 시작하다.
귀국 전 진상 규명에 한계를 느끼다.
귀국 후 진상규명에 직접 나서다.
[사상계]를 복간하다.
18대 총선에 나가다.
제3부 민족·국가와 나; 일주명창(一炷明窓)
장준하공원을 조성하면서 37년 만에 아버지를 유골로 만나다.
전면적 재조사와 진상 규명에 나서다.
진상규명을 위한 국민들의 관심과 동참을 호소하다.
장준하선생암살의혹규명국민대책위원회 발족, 진상 규명하다,
‘겨레장’으로 영원한 안식처에 안장하다.
긴급조치 위반, 무죄 선고를 받고 국가 배상을 청구하다.
평화운동가, 통일운동가로 나서다.
‘장준하 선생 등 과거 사건 진실규명과 정의를 위한 특별법’ 제정을 추진하다.
친일파 청산에 앞장서다.
C-47 비행기, 여의도공원에 전시하다.
제19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다.
‘장준하 100년 위원회’ 출범, 다양한 활동을 펼치다.
한신대학교 초빙교수로 활동하다.
‘장준하기념사업회’를 이끌다.
‘장준하 평화관’ 건립을 추진하다.
광복회 서울지부장으로 활동하다.
광복회 서울시지부의 지회장들과 함께 6천 리 대장정에 나서다.
큰딸 원경이를 먼저 보내다.
글을 마치며
출판사 리뷰
장호권 선생이 자신이 살아온 칠십 평생의 삶을 덤덤하게 때론 격정 있게 토로한 회고록을 펴냈다. 그의 삶은 한마디로 표현하면 ‘파란만장’했다. 파도의 물결치는 것이 만장(萬丈)의 길이나 될 정도로 많은 시련과 풍파를 겪었다. 그의 아버지 장준하 선생은 독립운동가이자 제1세대 민주화운동가였다.
해방 후 완전한 독립을 이루지 못했기에 통일을 염원하였고 이 땅에 민주주의를 뿌리내리고자 이승만, 박정희 독재정권에 항거하다 세 번 구속되었고 37번 연행되었다. 결국 장준하 선생은 1975년 8월 17일, 포천의 약사봉 계곡에서 등산 중 의문의 주검으로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그는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했던 진정한 ‘행동하는 지식인’이었다. 그런 아버지 밑에서 살아온 장호권 선생의 삶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장호권 선생은 자신의 회고록 제1부에서 ‘아버지와 나; 나의 아버지 장준하’라는 제목으로 어머니 혹은 주변 사람들에게서 들었거나 자신이 경험했던 아버지의 삶을 담담하게 풀어냈다. 장호권 선생이 아버지와 함께 한 시간은 칠십여 년 동안에 26년 정도이지만, 군 제대 후 21살부터 5년 동안은 비서처럼 아버지를 측근에서 모셨다. 장준하 선생의 전기문이 여러 권 나왔지만, 아들로서 아버지의 삶을 처음으로 들여다본 것이다. 그는 회고록에서 신촌 집에서 살 때가 짧지만 가장 행복했다고 한다.
제2부는 ‘나의 아버지; 홀로서기와 의문사 진상규명활동’이란 제목으로 자신의 삶을 회고하였다. 1979년 8월 아버지가 박정희 독재정권에 의무사를 당한 뒤부터 2008년 4월까지 29여 년의 삶을 회고했다. 회고록 전체에서 가장 긴 시간이지만, 내용은 가장 짧다. 제목에서 ‘홀로서기’라고 되어 있지만, 홀로서기를 위한 준비 기간이 아니었나 한다.
아버지가 의문사를 당한 뒤로도 여전히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로 독재정권이 계속되었기에 그는 이 땅에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없어 망명 아닌 망명의 길을 떠나 해외에서 지내야만 했다. 25년 동안의 해외 생활을 접고 국내에 들어와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의 진상을 밝히고, 폐간된 [사상계]를 이어가고자 했으나 모든 것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자신이 직접 매듭을 풀고자 아버지가 경계했던 정치에 발을 들여놓아 총선에 도전했지만 이마저도 이루질 못했다.
제3부는 ‘민족·국가와 나; 일주명창’에서 비치듯 ‘심지 하나가 창을 밝힌다’라는 글귀처럼 불의한 정권에 맞서 ‘하나의 심지’, ‘하나의 불꽃’처럼 사셨던 아버지의 뒤를 이어 나간 자신의 삶을 되돌아봤다. 아버지 주검의 진실을 밝히고자 37년 만에 관을 열었다. 그렇게까지 해야만 했던 불효자로서 한겨울에 맨발로 아버지께 술을 올렸다. 아버지를 다시 묻고는 시묘살이도 했다. 이후 장호권 선생은 그 어느 때보다 진실규명을 위해 애썼고, 인권·평화·통일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며 진정한 ‘홀로서기’를 했다. 그 길이 아버지의 길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장호권 선생은 70을 넘기고서야 비로소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었고, 아버지의 아름드리 그림자에서 벗어나 나만의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회고록』이 마지막이 아니라 아버지가 못다 이룬 꿈을 이루는 새로운 출발이 되길 희망한다. 민족과 국가의 미래를 위해서 말이다.
추천평
장준하 선생님은 수많은 구속과 탄압 속에서도 민주와 정의를 이루기 위한 저항과 투쟁을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선생님이 생애를 바쳐 이루고자 하셨던 그 뜻을 이제 우리들이 완성해야 합니다. 선생님이 남기신 불꽃이 꺼지지 않는 횃불이 되도록 이 책이 그 심지가 되어줄 것입니다.
- 이낙연(제45대 국무총리)
마지막 광복군에서 언론인으로, 정치인으로, 재야민주화운동 지도자로 통한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장준하 선생님의 아들, 장호권 교수의 생생한 증언은 잃어버린 현대사의 퍼즐 조각들을 하나하나 찾아 맞추고 있습니다. 역사의 스승이신 장준하 선생님의 장남 장호권 교수의 치열했던 삶을 읽고 흥분했습니다. 화가 났습니다. 또 슬펐습니다.
그리고 이 나라와 민족의 미래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올바른 미래 인재 양성이라는 장준하 선생님의 지상명령을 유업으로 여기고 매진하고자 하는 장호권 교수의 조국애에 경의를 표하며 이 책이 많은 젊은이에게 용기를 줄 것입니다. 국민이 읽고 국가의 미래를 위한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 이재정(경기도 교육감)
장준하 선생은 청년광복군시절 항일수기 『돌베개』를 남겼다. 목숨을 걸고 일본군에서 탈출한 후 광복군 되고자 몸부림을 쳤던 중국에서의 6천리 길을 왜 다시금 떠올려야 했을까. 왜 선생은 ‘못난 조상이 되지 말자.’라는 말을 수차례에 걸쳐서 수기에 남겼을까.
장준하 선생의 아들이자 고난에 찬 한국현대사를 걸어온 장호권 선생이 쓴 회고록 『민족·국가와 나』라는 책이 내 앞에 있다. 아들은 아버지의 일대기와 의문의 죽음, 그리고 죽음을 딛고 일어선 진상 규명 과정에 관하여 상세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또한, 아버지의 죽음 이후 아들이 겪을 수밖에 없었던 삶, 장기간 도피성 해외 거주 이후 돌아온 조국에서의 치열한 노력을 나누고 있다.
우리 역사에 대한 참으로 귀한 증언이자 소중한 역사의 한 장면이리다. 민주공화국의 국민으로 살아가는 오늘 우리에게 여전히 한국현대사는 낯설고 부담스럽고 잘 모르는 이야기이다. 이 책은 그러한 답답함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중요한 책이다. 함께 읽고 보다 나은 역사의 진보를 향하여 함께 나아가자.
- 심용환(역사N교육연구소 소장)
출처: https://japan114.tistory.com/14045 [동방박사의 여행견문록(since 2010):티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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