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한국역사의 이해 (독서>책소개)/2.한국사일반

실학, 우리 안의 오랜 근대 (2024)

동방박사님 2024. 10. 12. 18:59
728x90

책소개

실학 안팎의 의미를 두루 다루다
역사 용어 실학에 담기지 않았던 실학의 풍경들
다양했던 실학의 의미

한국인이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실학은 ‘조선후기에 실용, 실질적 개혁을 주장한 실학자들의 학문’ 정도이다. 이것은 근대 이후에 성립한 역사 용어로서의 실학에 대한 설명이다. 이 설명은 ‘특정한 시기’ ‘특정한 학자들의 학문’으로 고정되어 있다. 그러나 실학은 ‘진실, 실질, 실용을 위한 학문’이란 보편적인 뜻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실학 이전에도, 오랜 기간 동안 여러 사람들이 진실하거나 실질ㆍ실용적인 학문을 실학이라고 말했었다. 예를 들어보자. 지금은 실학을 성리학의 대척적인 학문으로 여기지만, 유학자들은 유학이 실학이고, 그 반대편에 불교와 도교가 있다고 했다. 20세기 초까지의 문헌에서 실학이란 말을 가장 많이 사용한 학자는 위정척사衛正斥邪를 내세워 유학을 지키고자 했던 곽종석(1846~1919)이었다. 우리에게 익숙한 실학과는 다른 모습들이다. 우리가 아는 실학의 뒤안 풍경이 있었던 것이다.

목차

책을 내며

1장
실학 인식의세 층위 -용어·개념·담론

1. 실학이란 말
두 가지 설명
변화하는 고유명사
지속하는 보통명사
2. 실학 개념의 특징
사회적 영향력
자생自生 개념
의미장場과 이미지
3. 실학 담론의 형성
내재적 발전론과 실학의 담론화
내재적 발전론의 딜레마
개념사의 시사점
4. 논쟁과 새로운 접근
실학을 둘러싼 논쟁
이 책의 접근 방법

2장
실학의 고전적 의미

1. 실 實 의 의미
넉넉함[富]에서 참[眞]까지
성리학에서 실實의 전유專有
2. 실학의 어원과 고전적 용례
실학의 등장
송대宋代 실학 용례의 증가
성리학과 실학
양명학과 실학
3. 외연을 확장하는 표어들
이용후생
개물성무
실사구시
경세치용

3장 14~18세기 실학

1. 조선 시대 실학의 사용 빈도와 공기어 共起語
주요 문헌의 사용 빈도
실학의 시기별 공기어
2. 14 세기 후반~ 17 세기 실학 용례
여말선초麗末鮮初의 실학
경학과 강경 공부
경학의 관용화
‘ 진실한 학문’ 차지하기
17세기 이념적 발화發話, 경세의식의 발아
3. 18 세기 실, 실용의식의 부상
실實에 대한 강조
학문과 사회 풍토에 대한 반성
고도古道 회복의 지향
경세의식의 강화
실용과 각론의 강조
정조와 군주의 실학

4장 19세기 전반기 실학의 전개

1. 19 세기 전반기의 사상계와 실학
위축, 고식, 지속
한학, 고증학과 실학
양명학과 명물도수名物度數의 학문
2. 실학적 패러다임의 구축 - 정약용과 최한기
정약용의 실實 인식과 다산학
다산학에서 실학으로
최한기의 실학

5장 근대 전환기 실학 용례와 개념의 충돌

1. 19 세기 후반~ 20 세기 초 실학 용례
2. 한·중·일 삼국의 실학 의미 변화
개화파의 실학 용례
19세기 중반 이후 중국에서 실학 개념의 전환
19세기 중반 이후 일본에서 실학 개념의 전환
3. 실학을 둘러싼 의미의 확장과 충돌
동도서기의 실학
신학문의 실학
유학자들의 실학 재정의

6장 일제강점기 실학의 역사 개념화

1. 실업 실학과 실학주의 교육
실업 교육의 실학
실학 담론의 가능성과 실학주의
실업 위주 실학의 한계
2. 조선학의 재발견과 실학 개념
경세학의 발굴, 계보화
최남선의 실학풍, 정인보의 의실구독
실학의 외연 확대
3. 실학과 근대의 만남
김윤식의 기대와 좌절
다산학의 재조명
실학의 시대적 역할

7장 20세기 중·후반 실학 개념의 정립, 확장, 반성

1. 해방 후~1960년대 실학 연구와 발전 패러다임과의 조응
해방 후 실학 연구
실학 논쟁 내재적 발전에 조응하는 실학
주체성 확립, 근대화 건설의 실학
2. 실학 연구의 전성기
실학 연구의 확장
왕성한 연구와 사회 확산
실학의 통속화, 오용
3. 반성과 모색
비판과 반성
20세기 후반 실학의 추이
1980~90년대의 실학 연구

결론 21세기 실학 풍경과 실학의 미래

지역 사회 문화의 아이콘
실학 연구의 현황
실학의 열린 미래

저자 소개 

저 : 이경구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등에 재직하면서 17~19세기의 정치.사상.지식인에 대해 공부하고, 글을 썼다. 2018년 현재 한림대학교 인문한국HK 교수로서, 한림과학원 부원장으로 재직 중이다. 주요 저서는 『원문역주 각사수교各司受敎』(공역), 『조선후기 안동김문 연구』, 『17세기 조선 지식인 지도』, 『조선 후기 사상...
 

책 속으로

보통명사 실학의 의미는 예나 지금이나 크게 변하지 않았지만, 고유명사의 의미는 시기에 따라 달랐다. 한국에서 14세기에 등장한 실학은 거짓 학문인 불교에 반대되는 유학 또는 성리학이었다. 15세기 이후부터는 문장 공부에 반대되는 경학經學도 널리 쓰였다. 맥락에 따라서는 출세를 지향하는 공부와 반대되는 순수한 공부로도 쓰였고, 16세기 이후는 군주의 성학聖學, 공허한 담론에 반대하고 실천과 실용을 중시하는 경세학經世學으로도 쓰였다.
--- p.25

한자 ‘실實’과 관련한 여러 의미 가운데 실학과 관련해서는 두 가지를 주목할 수 있다. 하나는 ‘진실’의 의미이다. 실학은 진실 또는 진리를 탐구하는 학문이다. 진실은 현상 너머의 본질을 통찰해야 한다. 진리를 추구하는 학문이기에 바른 학문이기도 하다. 다른 하나는 ‘현실’이다. 실학은 실재를 탐구하는 학문이다. 실재하는 존재들에 주목하고 그것을 본질로 여긴다. 진리는 가시적이고 현재화되어 있으므로 실용적이기도 하다.
--- p.28

실학과 실학자는 동양의 역사와 지식 세계에서 기원했고 지속했다. 실학의 정신으로 소개되는 실사구시, 이용후생이나 실학과 연동했던 개물성무開物成務 등은 동양의 고전, 경전에서 기원했다. 실학은 자생自生한 개념이었으니, 근대 이후 실학의 여정은 동양에서 기원한 기본개념의 여정이었다. 따라서 실학을 살필 때 우리는 서양 근대를 접할 때 느끼는 원천적인 ‘허기짐’에서 벗어날 수 있다.
--- p.33

실학처럼 과거의 용어가 현대의 역사 용어로 재정의된 부류는 용어의 의미 변화에 대한 설명이 불가피하다. 이를 생략한 채 실학을 설명하면 ‘과거에 실학을 모토로 집단을 이룬 학자들’이란 고정적인 이미지가 생겨나 마침내 ‘실학은 으레 존재했을 것’이라는 선입견으로 굳어질 수 있다. 결국 실학의 의미가 변하는 계기적인 지점들을 보아야 한다. 실학에 대한 많은 선행 연구와 이 책의 가장 큰 차이가 바로 그 점이다. 이 책은 실학의 시기별 쓰임, 변화하는 용법, 지속과 단절의 맥락 등에 중점을 두었다.
--- p.53

실의 의미를 통해 우리는 실학이 실제의 학문, 실용의 학문, 실증하는 학문, 실천하는 학문, 성실한 학문, 참된 학문, 진리를 캐는 학문 등으로 쓰일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 p.66

실학이 유학의 종지를 계승한 성리학을 지칭하게 되자 그 반대편에 선 노장老莊과 불교의 허무, 적멸 같은 대립 개념 또한 명료해졌다. …… 주희와 그를 계승한 이들은 실학을 통해 ‘실과 허’의 대립 구도를 뚜렷하게 만들고 상대를 비판하는 실천적 성격을 부여했다고 할 수 있다.
--- p.79

실학과 결합하여 실학의 정신 혹은 실학의 지향을 나타내는 표어들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이용후생, 개물성무, 실사구시, 경세치용이다. 이 말들의 기원은 경전, 역사서 등으로 다양했고 대체로 실질, 실용, 실천, 실증 등을 강조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실 또는 실학이 실질, 실용 등을 의미하거나, 중세에 경학 또는 성리학을 지칭하거나, 근대 이후 재조명되었듯 이 말들 또한 경전, 고전에서 출발해 중세와 근대에 의미 변화를 겪었다. 주목할 변화 시점은 17세기 이후이다. 당시 사회가 전문화하고 물질에 대한 강조가 점차 중시되자 이 용어들은 실학과 연관해 사용되었고 실학의 외연을 확장했다. 그리고 19세기 중반 이후에 서양의 발전과 동양의 낙후가 비교되자, 고대 동양의 진면목을 상징하는 표어로서 재조명되었다.
--- p.85~86

강경에 합격했지만 실제 이해가 떨어지는 자들에 대해 세상에서 ‘실학급제’라고 비꼬는 표현이 널리 쓰였음을 알 수 있다. …… 경전인 실학을 읽고, 경학인 실학에 힘쓰며, 강경을 준비하는 이들에 대해 사람들이 “실학한다”고 말했다. …… 경학으로 급제한 이들에 대해 영조는 ‘바지 실학[脚袴實學]’으로 부르기도 했고 강경에 불통한 이는 ‘도령 실학[都令實學]’으로도 불렀다.
--- p.120~121

실학 사용의 증가와 의미장의 확대는 실학을 둘러싼 복잡한 논의를 유발했다. 강경을 실학으로 여겨 제도를 마련했지만, 경전 암기에 치중하는 풍조로 인해 제술에 비중을 더 두자는 대안이 계속해서 제기되었다. 강경과 제술로 뽑힌 인재의 특징이나 관직의 경로 등을 더하면 문제는 더 복잡해졌다.
--- p.122

군주의 성학聖學이자 재야 선비의 공부인 실학은 선조 대에 새로 등장했다. …… 실학은 군주와 사대부 일반이 지향해야 할 진실한 유학으로서의 성리학, 출세를 위한 과거와는 무관한 성리학이 되었다. 군주의 성학, 재야의 성리학 그와 연관한 의미들을 두루 구사하며 후대에 실학이 경세학으로 나아가도록 토대를 놓은 인물은 이이(1537~1584)였다.
--- p.125~126

17세기는 사상계가 큰 변화를 겪은 시기이기도 했다. 16세기말 임진왜란, 17세기 초중반의 병자호란 및 명·청 교체로 인해 조야朝野를 막론한 대다수 유학자는 조선을 유일한 유교 문명국으로 설정하고 성리학의 정통성을 강조했다. 바야흐로 성리학은 학문을 넘어 ‘주자주의朱子主義’라 할 만한 이념적 색채가 짙어지게 되었다. 이를 감안하면 실학을 성리학으로 사용하는 학자에게서 실학의 이념적 발화가 생겨남을 가설할 수 있다. 주자학에 대한 탈주자학적 성격을 추적하는 현대의 실학 연구로는 착목하기 힘든 지점이다. 17세기 상황에서 성리학의 경세적 성격을 강조한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주자학 강화에 대체로 공감하면서도 실질과 실용을 중시하며 안민安民을 위한 제도 개혁에 집중했다.
--- p.127~128

18세기에 이전과 달라진 양상은 실천-실용과 관련한 의미가 확대된 점이었다. 16세기 후반부터 이이를 필두로 유형원, 김육, 이수광 등에서 보였던 이 경향은 18세기에 양적으로 늘어났고 내용도 심화되었다.
--- p.135

18세기의 실-실학 및 관련 용어들의 확장은 국왕부터 관료, 학자 전반에서 다양한 방식과 주제로 제기되고 있었다. 때문에 영조와 정조 연간은 근현대에 ‘실학의 시대’라는 표현으로도 불리곤 했다.
--- p.139~140

실實-실학은 학문 풍토에 대한 비판을 넘어 사회 풍토에 대한 비판에서도 빈번하게 사용되었다. …… 18~19세기는 서울과 지방의 격차라고 할 수 있는 이른바 ‘경향분기京鄕分岐’ 현상이 점차 진행되었고 서울 명망가의 관직 독점과 지방 인재의 소외가 문제로 대두했다. 따라서 정파, 가문, 문벌 등의 명망을 업고 등용되는 이들을 허명이라 비판하고, 실질을 따져 실학을 갖춘 인재를 등용하자는 의견이 점차 늘어났다.
--- p.143~144

일상으로의 전회, 성리학에 대한 반성과 경세학의 강조는 18세기 조선학계의 특징이라 할 이념의 약화와 실질에 대한 강조를 잘 보여준다. 이익을 중심으로 형성된 이른바 성호학파와, 홍대용·박지원(1737~1805)을 중심으로 형성된 이른바 북학파는 그 흐름의 중심이었다. 두 그룹은 후대 연구에서 본격적인 실학의 개화開花로 평가되었다.
--- p.149

한학 또는 고증학은, 의미가 폭넓은 실학보다는 고증학의 학문 취지를 직접적으로 상징하는 실사구시를 모토로 삼게 되었다. 실사구시는 영조 대에 양득중의 사용으로 알려진 바가 있었으나, 그의 경우는 성리학의 논리에 입각했었다. 그러나 1815년을 전후하여 한학에 대한 성과를 바탕으로 한 실사구시 담론이 전개되었다. 당시 담론의 중심에는 김정희金正喜(1786~1856)의 〈실사구시설實事求是說〉이 있었다.
--- p.172

심대윤은 과감하게 실이 곧 이익임을 말했다. 지식과 실재를 중시하는 그의 학문의 핵심에는 기氣와 이利를 긍정하는 자세가 있었으므로 성리학의 도덕 위주의 지향과는 달라지고 있었다. 그 점에서 그는 성리학과 다른 패러다임을 구상한 정약용, 최한기와 비견할 수 있고, 실리實利를 중시하는 실학에 상당히 근접했다고 볼 수 있다.
--- p.178

실학의 집대성자 정약용과 개화의 원류로 평가받는 박제가가 정작 ‘실학’을 거의 언급하지 않았음에도 후대 사람들은 그들을 ‘실학자’로 평가한다. 당대와 현재 사이에 존재하는 이 간극은 실학의 개념 형성 또는 실학자에 대한 정의를 위해서 짚어야 할 문제이다.
--- p.183

경학에 토대한 정약용의 저술은 당대 조선의 학문적 유산과 고대 유학, 서학 등을 융통하면서 성리학적 사유 체계를 전반적으로 대체하고 있었다. …… 후대에서 본다면 정약용의 학문에서 고대의 유학, 성리학, 경세학, 박학과 고증학, 서학의 흔적을 모두 찾을 수 있다. …… 풍성한 잔칫상과 같은 그의 학문 세계는 어느 측면을 보는가에 따라서 이미 당대에도 다양하게 음미되었으니, 20세기에 그의 학문에서 원시 유학, 경세학, 실용학, 근대성의 단초 등을 캐내어 이를 ‘실학’으로 집성하는 일은 충분히 가능했다.
--- p.192~193

최한기는 학문을 허무학, 성실학, 운화학으로 구분하기도 했지만 어느 학문이건 핵심은 실-실질을 깨달아 갖추는가의 여부였다. 결국 실학은 좁게 보면 성실학이지만, 넓게 보면 실질에 조응하고 실實을 축적하는 운화의 기학氣學 자체라고도 할 수 있다. …… 그의 방대한 학문 구성에서 실實은 운화運化의 실재성과 실용성을 나타내고, 개별자들의 기氣와 신기神氣의 운용을 연결하는 가교와도 같았다. 구조상 이理-실리實理-실심實心으로 연결되는 유학과 유사한 듯하면서도, 기氣와 물질세계의 긍정을 통한 새로운 문명을 꿈꾼다는 점에서 유학적 세계관과의 단절이기도 하다.
--- p.202

심대윤, 정약용, 최한기 등 패러다임 차원에서 탈유학을 구상한 학자들이 등장했던 19세기 초중반의 사상계를 다각도로 조명해야 한다. 동시에 그들의 업적을 새로운 실학 의미가 등장하고, 근대의 실학 개념이 정립된 19세기 후반~20세기 전반기와 비교하여 정리해야 한다. 그 작업은 좁게는 실학의 기원을 밝히는 문제이고 넓게는 한국 근대 사상의 기원과 시발始發을 규명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 p.203

19세기 후반에 실학의 의미는 이제껏 보지 못한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되었다. 급격한 변화에는 배경이 있었다. 서양과 문명권 차원의 충돌, 수용이 있었으며 그 여파로 정치, 사회, 사상, 일상은 물론 그들의 구조를 형성하는 언어, 교육 등에서 신구의 대립과 혼융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실학에서도 새로운 의미가 급작스레 등장했고 색다른 국면이 빚어졌다.
--- p.207

“동양은 고대에 실학을 전개해 문명을 꽃피웠으나 중세에 허문에 빠졌고, 그 사이에 서양이 오히려 격치의 실학을 강마하여 동양을 앞서게 되었으므로, 이제 동양도 《대학》의 격치이자 천하의 공학公學인 서양의 실학을 배우고 분발하면 서양을 따라잡을 수 있다” 정도이다. 이 같은 논리는 20세기 초까지 왕성하게 전개되었다.
--- p.216

독립협회의 초대 회장이었던 안경수安?壽는 유학을 강하게 비판하고 이용후생, 부국강병, 실사구시를 모토 삼아 난국을 타개하자고 했다. 이후 독립협회의 활동은 물론, 다수의 신문과 잡지의 발간 그리고 신식 교육과 신학문은 실학의 새로운 의미가 왕성해지는 토양이 되었다.
--- p.219

량치차오는 말년인 1921년에 출간한 《청대학술개론淸代學術槪論》에서 실학을 중국의 사상 전통과 과학을 포괄하여 종합적으로 사용했다. …… 량치차오의 저술은 20세기 초 한국에서 왕성하게 번역되었고 실학 개념의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 p.224~225

일본에서 실학이 유학의 의미에서 벗어나 본격적으로 서양의 학문 특히 과학을 지칭하게 된 것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1835~1901)의 《학문의 권유?問のすすめ》의 영향이 컸다.
--- p.226

후쿠자와 유키치 이래 강조된 과학과 실업의 실학은 20세기 초에 조선에 적극적으로 소개되었고 일제강점기에 일본에 의한 ‘실학주의 교육 ’으로 표방되었다.
--- p.229

주체성을 지키고 신구의 조화를 이룬 개화야말로 ‘참 개화’이자 ‘개화 실학’이었다. 그러나 동도東道를 지탱하는 사회, 문화적 기제들은 점차 축소되고 있었다. 특히 1894년 과거제의 폐지는 유학과 한문 위주 교육의 종말을 알렸다. 오랫동안 지속했던 유학, 경학, 강경講經의 실학 또한 무력하게 되었다.
--- p.232

실학과 신지식, 신산업을 개발하면 서양과 어깨를 겨룰 수 있다. 전체적으로 유학의 논리가 줄고, 주체적 입장과 진화적 관점이 커졌다. 무엇보다 유학의 역사와 서양의 이용후생이 아니라 우리의 역사와 서양의 구도로 변했다. …… 이제 실학은 유학이나 서학이 공유하는 공학公學·격치학格致學 등의 추상적이거나 보편적인 학문이 아니라 서양식 분과에 기초한 제반 학문이 되었다.
--- p.236~237

유학자들은 실학을 유학 전반으로 보았고 근본의 학문임을 견지하려 했다. 신학문과 대결하는 양상이 있었지만, 국가의 위기가 심해질 때는 변통을 중시하며 실업, 구체적 학문을 포괄하려는 경향도 자라났다. 곽종석이나 전우의 왕성한 실학 사용은 유교 안팎의 변화에 따른 대응이었던 것이다. 과거의 개념으로 새로 유행하는 개념과 대결하거나 포섭하는 작업이라면 ‘실학의 보수적 재정의’라고도 할 만하다.
--- p.247

학문에서 실학이 유학·경학에서 실업학 또는 과학으로 전환하는 과정은, 교육에서 학교 설립과 신학문이 장려되는 과정과 발맞추고 있었다. …… 교육에서 실용에 대한 강조는 “학교를 세우고 학과를 고쳐 실학을 배우자”는 논리로 발전했다.
--- p.253

일제강점기에 일인들이 교육의 주도권을 잡게 되면서 실업-과학의 실학 담론은 더 성행했다.
--- p.259

일제가 선전한 ‘실학주의’는, 세계 열강의 반열에 오른 일본이 자기를 중심으로 대동아大東亞를 구축하는 동시에 서양과 대치하기 위해 일본에 속한 식민지 인민들이 자신들의 과거를 탈각하고 일본의 신민으로 길러져야 한다는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였다. 그러나 일제에 의한 위로부터의 ‘실학주의’ 표방은 조선에 튼튼하게 뿌리내리지 못했다.
--- p.262

애초 실학, 실학자와 근대의 과학, 기술, 실업과의 직접 연결은 무리한 일이었다. 이후 실학과 과학-실업(기술) 교육과의 연계는, 과학사와 전문 분야사에서의 역사적 서술 정도를 제외하면, 일상 교육과 학문에서는 거의 사라졌다. 굳이 흔적을 찾자면 초등학교의 교과목에 쓰였던 ‘실과實科’ 정도이겠다.
--- p.266~267

실학을 배태한 시공간과 조선 후기 경세학자들의 계보화가 진행된 토대 위에서 최남선崔南善(1890~1957)은 조선 후기 일군의 학자들과 그들의 학문을 ‘실학’으로 본격적으로 정리했다.
--- p.271~272

정인보가 1929년에 언급한 의실구독의 실학은 구체성에 기반하여 보편 진리를 확인하는 보편학이자, 조선의 실상에 의거해 독자성을 수립하는 조선학이기도 했다.
--- p.278

실학파를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은 국문학자 김태준金台俊(1905~1950)인 듯하다.
--- p.280

정인보의 실학 확장 작업은 1930년대 중반에는 정약용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 그가 1935년 에 정약용을 ‘실학자實學者’로 지칭한 것은, 실학자의 선구적 사례로서 주목할 만하다.
--- p.284

1930년대 실학은 물론이고 실학파·실학자·실학계가 등장하였고, 내용에서도 북학, 양명학, 고증학을 아우르게 되었다. 실학은 조선 후기의 개혁 사상을 대표하며 당대의 지식인에게 우리의 문화 자산으로 인식된 것이다.
--- p.285

문일평은 1938년에도 “실사구시의 학풍은 유학의 공리空理 편중에 대한 반동으로 생겨났고, (정약용의 학설은) 현대 경제에 일치하고 부국강병을 꾀한 것”이라 했다. 이 논설에서는 근대의 선구자로 홍대용과 박제가까지 포함하여 실학과 근대가 조우하는 지평을 넓혔다.
--- p.292

1935년대 중반 정약용의 서거 100주년을 지나며 실학은 정약용을 기점으로 기존 실학자들의 업적을 종합하고 서양의 근대성에 한층 동조하는 성격의 학문으로 정리된 것이다.
--- p.293

1930년대 중반 정약용과 실학자들에 대한 연구는 한국학의 정체성을 지키는 ‘국학운동’이기도 했으며, 당시 일제가 자행한 민족 말살에 대한 저항이었음은 잘 알려져 있다. 실학이 당대를 비판하고 미래를 준비한다는 실천적 성격을 갖는 한, 그것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 p.294

천관우는 〈반계 유형원 연구〉 상(1952)·하 (1953)에서 …… 실학은 ‘봉건사회의 사상적 쇠잔함[餘喘]’을 보여주면서 ‘신 단계의 사상적 지향’이라 하였다. …… 이후 그의 견해는 조정을 거치지만 1960년대 후반 이후의 이른바 자본주의 맹아론에 힘입어 오히려 강화되는 편이었다. …… 한우근韓?劤(1915~1999)의 〈이조 실학의 개념에 대하여〉(1958)는 천관우의 실학 개념에 대한 반론이었고, 실학 개념을 둘러싼 본격적인 논쟁을 알렸다.
--- p.310

김용섭, 이우성, 이광린 등은 실학을 대체로 조선 후기 사회 발전에 조응한 사상적 흐름으로 보았다. 비록 실학이 유학의 영향하에 있었더라도 발전, 자본주의, 개화, 근대를 향하고 있었음을 부각했고 그에 입각해서 실학과 실학자를 해석, 분류했다. 그들의 지향이 한국사의 내재적 발전을 조선 후기 사회에서 전반적으로 실증하여, 일제강점기에 형성된 식민사관의 ‘ 정체성론 ’을 근원적으로 차단하는 데 있었음은 잘 알려져 있다.
--- p.321

이기백은 …… 1967년에 《한국사신론》을 출간했다. 여기서 실학은 ‘실학의 발달’이란 독립된 절 아래 ‘발생·발전·융성·북학’으로 비중이 더 늘어났다. 이 책은 20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한국 통사로서 한 세대를 풍미했다. 중고등 교과서의 서술 역시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으므로 이기백의 설명은 실학의 통념 형성에 큰 역할을 했다.
--- p.328~329

실학 연구가 심화하고 한국사에서 확고한 지위를 확보하면서 실학은 한국학에 속한 여러 분야에서 조선 후기의 변화, 발전을 설명하는 주요 틀이 되었다.
--- p.329

박정희 정부의 대표적 구호였던 근대화, 민족중흥, 경제발전 등에 실학은 역사적 기원으로 인용되었을 뿐 아니라, ‘과거의 실학 실패’라는 교훈은 ‘오늘의 유신 성공’을 위한 전거가 되었다. …… 정치에서의 동원보다 큰 영향력은 한국사 국정교과서의 역할이었다. 한국사 교육의 오점으로 평가받는 1974년의 국정교과서는 전반적으로 ‘민족사관’ 정립을 지향했다. …… 그러나 역사학계는, 정부의 국정교과서 주도는 단정적 기술로 역사를 왜곡시키고 민족의식의 과잉과 역사 보편성의 약화를 불러올 수 있다고 비판하였다.
--- p.344~345

실학에 대해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해온 한국 사학계에서도 1970년대 중반부터 실학에 대한 문제 제기와 논쟁이 가열되었다. 역사학계의 비판은 유학과의 관련이나 근대의 기점 문제와 더불어 실학을 반反·탈脫주자의 사상으로 규정하고 이를 사회·경제의 발전상과 조응시켰던 내재적 발전론의 시각 전반을 향해 있었다.
--- p.352

한국에서 21세기에 실학이 지역의 사회와 문화 영역에서 새로운 생명력을 얻는 점은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지역 혹은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 아이콘으로 표방되면서 사회 일반에서의 실학에 대한 통념, 실학과 실학자에 대한 존경은 변하지 않거나 오히려 생활에 밀착하고 있는 것이다.
--- p.373

21세기 실학 연구는 과거의 그것처럼 실학자 개개인의 학문이나 정체성에 집중한 연구는 지속하지만, 바야흐로 ‘탈근대 시기의 실학’이란 새로운 화두를 두고 분야를 막론하고 주목할 만한 진전을 이루었다.
--- p.377

최근에는 실학 연구의 개념사, 지식사, 사회사적 의미를 찾는 연구가 한 흐름을 이루고 있어 주목할 만하다. 이들은 실학자에 대한 탐구보다는 실학 발화發話의 맥락, 실학 개념을 둘러싼 담론, 실학의 지식 지형 등을 포괄적으로 고찰했다. 그 고민은 실학을 둘러싼 발화에는 오랜 시간에 걸쳐 다양한 지향이 중첩되어 있고, 19세기 후반 이후 동양 각국이 서양의 근대를 의식하며 자신들의 과거를 복잡한 경로로 재구성했다는 주체적 기획 의도를 중시하는 태도가 깔려 있다.
--- p.379

하나는 근대에 규정된 실학 개념 또는 실학 연구의 시효가 다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제강점기에 시작해 1960년대에 개념으로서 정점에 오르고 1970년대에 왕성했던 실학 혹은 실학 연구는 이제 수사적으로나 기능하는 게 아닌가 한다. …… 둘째는 실학의 새로운 가능성이다. 애초 실학의 발화는 단수가 아니었고 시기와 맥락에 따라 다양해지는 복수의 경로를 걸었다. 특히 한국에서 상식화된 실학 또한 한국의 근대 여정에 따른 ‘특정한 장소와 시기에서의 실학’이었다. 경로의 다양성이 동의된다면, 이제 근대의 실학을 탈각시켜 보통명사로 쓰건, 이른바 ‘21세기의 신실학’을 새로 정립하건 그것은 발화자들의 선택일 것이다.
--- p.385~386

출판사 리뷰

진실을 향한 실학의 오랜 여정

실학은 오랜 역사를 지닌 용어이다. 1세기의 중국 문헌인 《논형論衡》에 처음 등장했고 이후 유학의 고전을 비롯한 여러 문헌에서 간간이 언급되었다. 왕성하게 쓰이기 시작한 것은 송나라에서 성리학이 발흥하면서였다. 당시 성리학은 혁신적 학문이었으므로, 성리학자들은 진실한 학문인 성리학을 실학이라고 했다. 우리나라의 문헌에서 실학은 고려 말에 처음 등장했고, 조선 시대에는 유학 또는 성리학, 경전 공부인 경학經學, 경학으로 시험 보는 강경講經 등의 의미로 쓰였다. 경학으로 과거에 급제한 이들에 대해 ‘실학 급제’라고 부르고, 어려서부터 경학을 공부한 이들을 ‘도령 실학’이라 부르기도 했다. 유학에서 경세經世의 학문까지 조선 시대에 여러 갈래로 사용되었던 실학의 의미는 19세기 중후반에서 20세기 전반기에 동아시아 차원에서 새로운 의미로 거듭났고, 한국에서는 20세기 전반기에 현대의 역사 용어로 재구성되었다.

근대 이후 새 의미로 재구성된 실학

19세기 중후반 서양의 압도적인 학문과 기술을 경험한 동양의 지식인들은 서양 문물을 수용할 수 있는 여러 논거를 고민하였다. 많은 이들이 유학의 실용 · 경세經적 측면에 주목하고 이에 공명하는 서양의 학문 · 기술을 수용하자고 했다. 한편에서는 서양의 과학 · 실용주의야말로 실학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동양에서 오랫동안 존재했던 실용’을 실학으로 재조명하며 서양문물에 대응하는 흐름이었고, 한국 · 중국 · 일본에서 모두 찾아볼 수 있다. 또 실학 말고도 이용후생利用厚生, 실사구시實事求是, 개물성무開物成務, 경세經世와 치용致用 등도 새삼 조명받았고 이들 용어들도 실학과 직간접으로 연결되었다. 한국은 20세기 전반기에 한 발 더 나갔다. 일제강점기에 최남선, 정인보를 필두로 김태준, 안재홍, 문일평 등은 조선 후기 경세학자들의 학문을 실학으로 정리하고, 실학은 근대에 접맥한 학문이었다고 평가했다. 해방 후에는 남북한 모두 건설에 매진했고 이를 정당화하는 역사 전통을 강조했다. 실학은 우리 역사 안에서 개혁, 진보, 근대성의 상징하는 개념이 되었고, 교육을 통해 국민 상식이 되었다. 실학과 근대의 만남은 동아시아 3국의 공통된 특징이었고, 실학과 실학자를 특정한 역사 패러다임으로 구성하여 우리 역사의 내재적 발전으로까지 증빙한 것은 한국의 특징이었다.

인물이 아닌 용어를 통한 접근

이 책은 ‘실학’이란 용어를 통해 실학의 역사를 구성했다. 실實이 지닌 보편과 고유의 의미를 먼저 묻고 그에 기반해서 실학이 오래 지속하였고 시대적 요구에 부응해 의미를 갈아탔음을 정리하였다. 책의 구성은 실과 실학의 의미, 고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실학을 언급한 사람들, 근대 이후 실학에서 새로운 의미의 전개, 해방 후 한국에서 실학의 사용, 그리고 21세기 이후 실학의 전망 등이다. 조선후기 실학자를 전제하고 그의 학문을 설명하는 통념적인 실학에 대한 설명은 이 책에서 제한적으로 다루어질 뿐이다. 쉽게 말해 이 책의 주인공은 실학자와 그의 학문이 아니라 실학이란 용어와 개념 그리고 실학을 말한 사람들이다. 때문에 위에서 소개한 역사적 전개가 기본 얼개이고, 기존 설명에서 포착되지 않았던 흥미로운 장면들이 캐내어졌다. 실학과 관련한 대표적인 표어 이용후생, 실사구시 등이 언제 어떻게 실학과 관련되었는지, 지금은 사라진 조선시대의 실학 논쟁과 실학 관련 용어들, 한중일이 근대에 실학을 어떻게 재구성했는지, 현대 한국에서 실학이 풍미하는 와중에 빚어진 오용의 장면, 21세기 지역에서 소비하는 실학의 모습 등등이다. 방법론에서도 주목할 만한 점이 있다. 실학이 등장하는 다수의 문헌에서 실학과 관련한 용어들 이른바 공기어共起語를 매 시기마다 분석하여 의미의 지형과 거시적인 추이를 개괄하였다.

실학 논쟁과 실학의 미래

실학은 현대 한국 역사학계의 대표 논쟁 중의 하나이다. 실학이란 개념을 전제하고 개혁 · 실용적이었던 학자들의 주장을 실학으로 정리하는 입장과, 실학을 현대의 구성물로 보고 실학은 유학이라던가 아니면 실학의 역사적 실재성을 부정하는 입장 사이의 논쟁은 195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이 책은 실학의 시대적 맥락을 따지면서 그 주장들을 통합하고 있다. 실학의 실재 발화發話와 역사적 변천에 대한 고찰을 통해, 실학의 존재를 증빙하는 입장에 대해서는 역사용어 실학이 전가의 보도가 아니라는 점을, 실학의 허구를 말하는 입장에 대해서는 실학은 장구한 내력의 용어로 의미가 변천해왔음을 상기시킨다. 시대의 표어처럼 작용하며 사회를 이끈 개념들은 오랜 역사 경험을 갖고 있으며 새로운 의미로 내용을 갱신하며 지속한다. 실학 또한 마찬가지인 것이다. 저자는 이를 긍정하면 오랜 논쟁을 정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21세기 이후에 실학이 새로운 의미와 생명력을 가질 수 있다고 본다. 20세기 ‘우리 안의 근대’를 상징했던 실학이 21세기에 신新실학으로 탈바꿈할 가능성은 오랜 변화의 역사를 긍정할 때 더 높아진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