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대한민국 현대사 (독서>책소개)/1.해방전후.미군정

반민특위 재판정 참관기

동방박사님 2022. 7. 17.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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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친일 청산을 위한 단 한 번의 기회,
1949년 반민족행위 특별재판정
‘친일반민족행위자 1호 박흥식 재판’으로 보는
반민특위 대 친일세력의 불꽃 튀는 법리 전쟁!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는 1948년 초대 제헌국회가 제정한 대한민국 법률 제3호 반민족행위 처벌법(반민법)에 따라 일제강점기 친일파 단죄를 위해 가동한 특별 조직이다. 10인의 국회의원이 이끈 특별조사위원회를 비롯해 초대 검찰총장(권승렬)과 초대 대법원장(김병로)을 수장으로 한 특별검찰부, 특별재판부로 구성되었다. 이듬해 1월, 반민특위는 1호 체포자 박흥식을 시작으로 8개월간 682명의 반민족행위자를 조사해 559명을 검찰에 송치했고, 이 가운데 221명이 재판을 받았다.

이 책은 1949년의 ‘반민족행위 특별재판정’ 안팎에서 전개된 반민특위 대 친일세력의 기록이다. 영화 [암살](2015)의 메인 빌런 강인국의 실존 모델이기도 한 친일 재벌 박흥식 사건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 법정 드라마에서는 친일세력이 영달을 위해 같은 민족을 착취하고 조국의 독립을 방해했다는 반민특위의 공격과, 친일은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으며 자신들의 행위가 오히려 조선에 이로웠다는 변호가 맞붙는다. 그런 한편 법정 밖에서는 친일 청산을 통해 독립국가의 정체성을 바로 세워야 한다는 목소리와, 국가의 기틀을 잡기 위해 유능한 친일파를 등용해야 한다는 논리가 충돌한다. 그리고 후자의 입장을 대변한 이승만 정부는 경찰력과 권력을 총동원해 반민특위 무력화에 나서게 된다.

1949년의 친일파에 대한 법적 평가는 끝내 무위로 돌아갔지만, 친일의 역사적 평가는 2020년대에도 현재진행형이다. 따라서 이리저리 흩어진 사료와 기록을 모아 복원해낸 ‘반민특위 재판정 참관기’는 실패한 역사를 냉소하지 않으면서도 해묵은 친일 청산 응어리의 실체를 파악하고, 이를 풀어낼 실마리를 모색하는 시간이 될 것이다.
 
목차
머리말
재판정 입장 전에

반민특위의 탄생
-미군정의 등장, 부활하는 친일파
사료 돋보기 - 〈맥아더 포고령 1호〉(1945)
사료 돋보기 - 〈민족반역자·부일협력자·간상배에 대한 특별조례〉(1947)

-대한민국 법률 제3호, 반민족행위처벌법
사건 돋보기 - 반민특위요원 암살음모 사건(1949)
사료 돋보기 - 〈반민족행위처벌법〉 전문(1948)

특별조사위원회의 박흥식 조사
-반민특위 구속자 1호 박흥식
-체포 막전막후
사료 돋보기 - 반민족행위자 1호에 발부된 구속영장(1949)
-특별조사위원회의 피의자 신문
사료 돋보기 - 《연합신문》에서 주최한 반민특위 좌담회(1949)

특별검찰부의 박흥식 조사
-조선 제일 재벌의 민낯
-“찔러 죽여도 분이 풀리지 않습니다” 약탈의 증인들
-궁색한 변명

민족행위 특별재판정
-특별검찰부의 공판 청구
-1차 공판: 끝없는 증거, 기막힌 변명
-2차 공판~결심 공판

밖의 반민족행위자들: 밀정 혹은 고문 경찰
-이종형, 애국자를 참칭한 밀정
-노덕술, 이승만이 총애한 고문 경찰

반민특위, 좌초하다

반민특위 연표
참고문헌

 

책 속으로

〈반민족행위처벌법〉과 반민특위 활동의 목적은 친일에 대한 역사적이고 법적인 평가에 있었다. 이는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세우는 것은 물론, 일본 제국주의를 부정함으로써 탄생한 대한민국의 법적·도덕적 근거를 다지는 일이기도 했다.
--- p.4~5

35년 넘게 일제에 지배받았던 우리 입장에서 친일파를 가려낸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저 유명한 ‘을사오적’처럼 한일강제병합 초기에 적극적으로 친일한 자들을 골라내는 것은 어렵지 않겠으나, 35년은 ‘친일’의 성격을 매우 복잡다단하게 만들 만큼 충분히 긴 시간이다. 물론 많은 경우는 조선총독부가 의도한 강제적 협력이었겠으나, 기회주의적 욕망을 지닌 조선인의 자발적 협력도 적잖게 존재했다. 그 둘은 곧잘 섞이기도 했을 것이다. 이렇기에 해방 이후 한국에서 친일파를 가려내는 일은 나치 독일에게 4년 남짓 지배받았던 프랑스의 독일 협력자 처벌에 비해 어려운 점이 많았다. 누가 친일파인지를 가리는 문제는 오늘날에도 계속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 p.13~14

박흥식은 일제강점기 35년간 친일 문제가 어떻게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에까지 침투했는지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기도 하다. 박흥식 사례를 통해 친일 문제를 다시 생각해본다는 것은 을사오적 같은 전형적이고 대표적인 친일파를 손쉽게 비판하는 방식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존재하는 기회주의적 욕망을 들여다보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의미다. 요컨대 ‘내가 그 시대에 태어났다면 어떻게 행동했을까?’란 질문을 갖고서 박흥식의 일대기와 재판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이다.
--- p.15

연합군 최고사령부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는 한반도에 들어오기 전인 1945년 9월 7일 일본에서 〈맥아더 포고령 제1호〉를 발표하며 정부, 공공단체에 종사하는 자는 별도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종래의 업무’를 수행할 것을 지시했다. 이 조치를 통해 미군정이 들어선 이후에도 친일파는 미군정청 관료, 경찰, 새로 창설된 한국군에서 요직을 차지할 수 있었다.
--- p.22

1948년 5월 10일 총선거를 통해 초대 국회(제헌 국회)가 구성되고, 7월 17일에는 최초의 헌법(제헌 헌법)이 공포되었다. 제헌 헌법 제10장 부칙 101조에는 “국회는 1945년 8월 15일 이전의 악질적인 반민족행위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라는 조문이 담겼다.
--- p.35

반민특위의 1호 체포자로 박흥식이 걸맞은가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평가가 다를 수 있다. 누군가는 일본 경찰의 밀정 노릇을 하며 독립군을 잡고 고문하는 데 앞장선 자들이 가장 나쁘다고 볼 것이다. 또 누군가는 일제에 정치적·문화적으로 협조한 명망가, 지식인들부터 잡아넣어야 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반민특위가 박흥식을 반민족행위자 1호로 점 찍은 것은, 예비조사를 통해 그가 기업 경영을 구실로 일제강점기 내내 조선 민중에게 광범한 피해를 안기며 사욕을 채운 대표적 인물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 p.64

이승만의 담화는 언뜻 반민족행위자 처벌과 관련해 억울한 피해자가 없어야 한다는 원칙론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당시는 겨우 첫 체포자가 나온 상황이었다. 게다가 반민법이 시행된 것은 해방 후 3년이나 지나서였다. 식민지배와 친일의 잔재를 해소하려는 당시 민중의 염원을 고려하면 “지난날에 구애되어 앞날에 장애가 되는 것”을 운운하는 이승만의 처신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의 입장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소극적이라고 볼 수 있겠다.
--- p.69

특별조사위: 조선군사령부에서 당신에게 조선비행기회사를 맡긴 이유는 무엇인가?
박흥식: 제가 당시 조선 실업계의 일인자였기 때문입니다.
--- p.72

검찰: 피의자가 숭배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박흥식: 정치인으로는 우가키 가즈시게 총독을 숭배하고, 실업가로는 쓰다 신고 가네보화장품 사장과 가
토 게이자부로 조선은행 총재올시다.
--- p.99

검찰: 그 당시에 피의자가 발표한 담화에서 황민화 운동을 위해 내선(일본인-조선인 간) 결혼을 장려함
이 좋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박흥식: 내선 차별을 없게 해달라는 간접적 표현이올시다.
--- p.121

검찰: 박흥식의 비행기회사 설립으로 민중이 받은 피해는 어느 정도였는가?
증인: 정신적, 물질적으로 받은 피해는 일일이 다 표시할 수가 없습니다. 그 당시 수만 명이 불안과 공포에 질려 살았습니다. 지옥 생활이나 다름없습니다. 토지를 가진 사람은 토지를 빼앗기고, 소를 가진 사람은 소를 빼앗기고, 집을 가진 사람은 집을 빼앗기고,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수많은 노동자들도 노동력을 매일같이 징용당했으니 그 비참함은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정도입니다. 그 당시 안양 천지는 박흥식에 대한 원성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심지어 우마차를 부리는 마차꾼까지도 우마조합을 강제로 조직하게 해서 사룟값도 안 되는 임금으로 부렸습니다. 주민이 사는 집조차 비행기공장에서 필요하니 내놓으라고 하면 당장에 철거하는 형편이었으니, 어느 때 어디로 쫓겨 갈지 모르는 신세였습니다.
--- p.139

검찰: 해방 후 조선 국내의 모든 재산은 조선의 것인가, 일본 정부의 것인가?
박흥식: 조선 정부의 소유이올시다.
검찰: 조선 정부의 재산을 일본인과 교섭해 일본인에게 받을 수 있는가?
박흥식: 당시 제가 받은 돈은 일본 정부의 재산이었습니다.
검찰: 말의 앞뒤가 다르지 않은가? 양심적으로 진술하라.
박흥식: 당시 제가 받은 돈은 조선은행 내에 있는 일본은행 대리점에서 발행한 수표입니다. 그런 까닭에서 저는 그 돈을 일본 정부 재산으로 생각합니다.
--- p.162

박흥식: 그 방면에 기부한 사실은 없고, 수도청 수사과장 최난수가 수사비가 부족하다고 해서 10만 원을 준 사실이 있습니다.
검찰: 대한민국 경찰 수사비를 어째서 개인인 피의자가 부담하게 되었는가? 그리고 두 번밖에 보지 않은 사람이며 내용도 잘 모르는 금전을 지불하면서 영수증도 받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박흥식: 수도청 간부였기에 믿고 주었고, 개인적으로 준 것이기에 영수증을 받지 않았습니다.
검찰: 그 돈이 정계 인사 암살계획에 사용되었다는데, 피의자는 어떻게 생각을 하는가?
박흥식: 저는 얼마 전 그 사건으로 증인 신문을 당하고서야 비로소 알았습니다. 대단히 놀랐고, 책임을 통감했으며, 이제부터는 기부에도 세심하게 살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p.169~171

역대 조선총독들이 제게 중추원 참의 등 공직을 권유했습니다만 매번 거절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항일이 아니고 시종일관 경제계에 진출한다는 신념에서 거절한 것입니다. 조선비행기회사는 전시 체제에서 총독, 군사령관, 참모장 등 요인들이 수십 차례 경영을 권유하기에 부득이 맡게 된 것입니다. 이를 모두 물리치고 거절하지 못한 것은 후회합니다만 당시 형편이 그러했음을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결과적으로 2800명의 직원이 비행기공장에 징용되어 외국 징용을 면했습니다. 비행기는 한 대도 만들어 보내지 않았고, 기계와 물자가 조선에 들어오게 되었으므로 국가와 민족에 해는 없었을 줄로 압니다.
--- p.174

이튿날인 1949년 6월 8일자 《경향신문》에는 반민특위를 공격한 ‘상부’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알리는 기사가 실렸다. 그 상부는 바로 이승만 대통령이었다. (…) 이승만의 폭주에 국회는 내각 총사퇴 요구안을 통과시키는 것으로 대응했다. 그러나 양측의 협상 끝에 이 사건은 반민특위가 구속한 친일 경찰과 경찰이 체포해간 특경대원들을 교환·석방하는 수준에서 마무리되고 만다. 결과적으로 반민특위는 뺨을 얻어맞고서도 최운하 등 친일 경찰을 풀어준 셈이 된 것이다.
--- p.244~246
 

출판사 리뷰

“반민특위의 역사를 읽은 많은 젊은 사람들이 가슴속에 불이 나거나 피가 거꾸로 도는 경험을 다 한번씩 합니다. 이 문제가 제대로 평가되지 않고, 여전히 그 시대를 거꾸로 살아온 사람들이 득세하고, 그들이 바르게 살려고 노력한 사람들을 냉소하는 역사가 계속되는 한, 우리 사회에 미래는 없습니다.” _노무현, 대한민국 16대 대통령

친일 청산을 위한 단 한 번의 기회,
1949년 반민족행위 특별재판정

‘친일반민족행위자 1호 박흥식 재판’으로 보는
반민특위 대 친일세력의 불꽃 튀는 법리 전쟁!

그리고 법정 밖에서 벌어진,
반민특위 대 이승만 정부의 명운을 건 일대 결전!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는 1948년 초대 제헌국회가 제정한 대한민국 법률 제3호 반민족행위 처벌법(반민법)에 따라 일제강점기 친일파 단죄를 위해 가동한 특별 조직이다. 10인의 국회의원이 이끈 특별조사위원회를 비롯해 초대 검찰총장(권승렬)과 초대 대법원장(김병로)을 수장으로 한 특별검찰부, 특별재판부로 구성되었다. 이듬해 1월, 반민특위는 1호 체포자 박흥식을 시작으로 8개월간 682명의 반민족행위자를 조사해 559명을 검찰에 송치했고, 이 가운데 221명이 재판을 받았다.

이 책은 1949년의 ‘반민족행위 특별재판정’ 안팎에서 전개된 반민특위 대 친일세력의 기록이다. 영화 《암살》(2015)의 메인 빌런 강인국의 실존 모델이기도 한 친일 재벌 박흥식 사건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 법정 드라마에서는 친일세력이 영달을 위해 같은 민족을 착취하고 조국의 독립을 방해했다는 반민특위의 공격과, 친일은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으며 자신들의 행위가 오히려 조선에 이로웠다는 변호가 맞붙는다. 그런 한편 법정 밖에서는 친일 청산을 통해 독립국가의 정체성을 바로 세워야 한다는 목소리와, 국가의 기틀을 잡기 위해 유능한 친일파를 등용해야 한다는 논리가 충돌한다. 그리고 후자의 입장을 대변한 이승만 정부는 경찰력과 권력을 총동원해 반민특위 무력화에 나서게 된다.

“법정에서 이기고, 정치에서 졌다”는 세간의 평가가 시사하듯, 이승만 정부의 집요한 방해공작 속에서 반민특위는 그 역사적 소임을 완수하지 못한 채 강제해산 당했다. 그리고 반민특위의 좌절은 친일의 당사자들이 거의 사라진 오늘날까지 대한민국을 분열시키는 씨앗이자, 한국인 개개인의 마음속에 깊은 응어리로 남았다. 식민 지배를 직접 겪지 않았고, 민족의식도 또렷하지 않은 21세기의 한국인들이 학교와 역사책에서, 방송과 인터넷에서 마주치는 70여 년 전의 반민특위 이야기에 너나없이 울분을 토하는 현상은 해방공간의 역사가 당시 민중과 오늘의 우리가 바라는 대로 흘러가지 않은 데서 오는 집단적 공감대일 것이다.

1949년의 친일파에 대한 법적 평가는 끝내 무위로 돌아갔지만, 친일의 역사적 평가는 2020년대에도 현재진행형이다. 따라서 이리저리 흩어진 사료와 기록을 모아 복원해낸 ‘반민특위 재판정 참관기’는 실패한 역사를 냉소하지 않으면서도 해묵은 친일 청산 응어리의 실체를 파악하고, 이를 풀어낼 실마리를 모색하는 시간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