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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교수이자 조선사편수회 근대사 편찬주임이었던 다보하시 기요시(田保橋潔)의 『근대 일선관계의 연구(近代日鮮關係の硏究)』 상·하권 중 상권의 역주본이다. 『근대 일선관계의 연구』는 근대 이행기 조선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국제 관계의 내적 동학을 규명하였으며, 1940년에 조선총독부에서 비밀리에 출간된 이래 조선 근대사 및 동아시아 외교사 연구자들이 반드시 참조해야 하는 일급 연구 문헌으로 꼽혀 왔다. 엄밀한 실증주의에 입각한 서술 방식을 취하고 있으며, 방대한 분량의 조선·청·일본의 정부문서와 외교문서를 전반적으로 조명하고 있었던 덕분이었다.
해당 연구과제와 이 책이 지니는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번역 작업이 이뤄지지 않았던 이유는, 다른 무엇보다도 원서의 방대한 분량, 그리고 그 초판이 조선총독부에서 출간된 정황에 대한 일말의 위구심 때문이었다. 이 역서에서는 원서에 원문으로 게재된 근대 동아시아 3국의 중요한 정부기록과 외교문서 내용이 평이한 우리말로 기록되어 있으며, 외교문서 특유의 생경한 단어나 문장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역주(譯註)가 부기되어 있다. 방대한 분량의 조선·청·일본의 기록문서를 인용하면서 근대 이행기 조선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외교사를 세밀하게 서술한 노작으로 그 가치를 평가받는 이유이다.
해당 연구과제와 이 책이 지니는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번역 작업이 이뤄지지 않았던 이유는, 다른 무엇보다도 원서의 방대한 분량, 그리고 그 초판이 조선총독부에서 출간된 정황에 대한 일말의 위구심 때문이었다. 이 역서에서는 원서에 원문으로 게재된 근대 동아시아 3국의 중요한 정부기록과 외교문서 내용이 평이한 우리말로 기록되어 있으며, 외교문서 특유의 생경한 단어나 문장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역주(譯註)가 부기되어 있다. 방대한 분량의 조선·청·일본의 기록문서를 인용하면서 근대 이행기 조선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외교사를 세밀하게 서술한 노작으로 그 가치를 평가받는 이유이다.
목차
옮긴이 서문 / 일러두기
서(序) / 서언(緖言)
〈제1편 근대 조선사 총설〉
제1장 근대 조선의 정정(政情)
제1절 척족세도정치의 발달
제2절 이태왕(李太王)의 즉위, 대원군의 집정
제3절 계유정변(癸酉政變), 대원군 정권의 종말
제2장 대원군의 배외정책과 열국(列國)
제4절 병인양요, 프랑스 함대의 강화 점령
제5절 병인양요(續), 제너럴셔먼호 격침 사건, 미국 함대의 강화 공격
제6절 일본의 조정(調停), 야도 마사요시의 정한설(征韓說)
〈제2편 일한 신관계의 성립〉
제3장 메이지 신정부의 성립과 일한국교의 조정(調整)
제7절 타이슈 번의 일한외교 관장
제8절 대수대차사(大修大差使)의 파견
제9절 대수대차사(大修大差使)의 거부
제4장 외무성의 일한외교 접수
제10절 판적봉환(版籍奉還)과 일한외교
제11절 폐번치현(廢藩置縣)과 일한외교의 접수
제12절 초량 왜관의 접수
제5장 일한교섭의 정돈(停頓)
제13절 외무성 시찰원의 파견, 통사(通詞) 우라세 히로시의 시안(試案)
제14절 외무성 파견원의 직접 교섭
제15절 일한교섭의 정돈(停頓)
제16절 일한교섭의 정돈(續), 차사(差使) 사가라 마사키의 동래부 난입(入)
제6장 정한론(征韓論)
제17절 정한론의 발생
제18절 정한론의 결렬
제7장 일한교섭의 재개
제19절 조선의 배외정책의 갱신, 외무성 출사 모리야마 시게루의 조선국 파견
제20절 모리야마 이사관의 조선 재파견, 일한교섭의 재정돈(再停頓)
제21절 일한교섭의 재정돈(續)
제8장 강화도 군함 운요(雲揚) 포격 사건
제22절 강화도 군함 운요(雲揚) 포격 사건
제9장 일한 신관계의 성립
제23절 전권변리대신(全權辨理大臣)의 파견
제24절 강화부에서의 예비 교섭
제25절 강화부에서의 일한회담
제26절 일한수호조규의 체결
제27절 일한수호조규의 체결(續)
제28절 일한수호조규의 조인과 비준
제10장 일한수호조규(日韓修好條規) 체결과 청국
제29절 모리 공사의 청국 파견, 청 총리아문과의 교섭
제30절 청한종속관계론, 모리 공사와 이홍장의 회담
제31절 청한관계의 새 단계, 이홍장과 이유원
〈제3편 일한국교의 갱신과 그 반동〉
제11장 병자(丙子) 수신사의 파견
제32절 병자 수신사의 파견
제12장 일한수호조규부록(日韓修好條規附錄)의 협정
제33절 미야모토 이사관의 파견, 일한수호조규부록안
제34절 일한수호조규부록의 체결
제35절 공사주차(公使駐箚)와 국서 봉정
제13장 일한통상장정(日韓通商章程)의 체결
제36절 일한무역 잠정 약정
제37절 일한통상장정의 성립, 수출입세의 협정
제14장 원산 및 인천의 개항
제38절 개항 연기론, 개항장 선정의 곤란
제39절 원산의 개항
제40절 인천 개항
제15장 신사(辛巳) 위정척사론, 국왕과 척족의 혁신 정책과 그 반동
제41절 신사(辛巳) 위정척사론, 국왕과 척족의 혁신 정책과 그 반동
제16장 임오변란(壬午變亂), 제물포조약(濟物浦條約)의 체결
제42절 임오병란(壬午兵亂)
제43절 일본 정부의 대한방침(對韓方針)
제44절 하나부사 공사의 교섭
제45절 제물포조약의 성립
제46절 청의 간섭, 대원군의 구치(拘致)
제17장 청한종속관계의 진전
제47절 청의 종주권 강화
제48절 조선 조정의 동요
제18장 갑신변란(甲申變亂), 한성조약(漢城條約)의 체결
제49절 일본세력의 진출과 독립당(獨立黨)
제50절 다케조에 공사의 적극정책
제51절 갑신변란
제52절 일청 양국군의 충돌, 다케조에 공사의 경성 철수
제53절 일한교섭의 정돈(停頓)
제54절 이노우에 외무경의 조선 파견
제55절 한성조약의 체결, 김옥균 등의 인도 요구
제19장 톈진협약(天津協約)의 성립
제56절 이토 대사의 청국 파견
제57절 톈진협약의 체결, 일청 양국군의 철수
〈부록〉
다보하시 기요시(田保橋潔) 약전(略傳)
근대 조선외교사 연표(1864∼1885)
주요 인명 색인
『근대 일선관계의 연구(하)』 차례
서(序) / 서언(緖言)
〈제1편 근대 조선사 총설〉
제1장 근대 조선의 정정(政情)
제1절 척족세도정치의 발달
제2절 이태왕(李太王)의 즉위, 대원군의 집정
제3절 계유정변(癸酉政變), 대원군 정권의 종말
제2장 대원군의 배외정책과 열국(列國)
제4절 병인양요, 프랑스 함대의 강화 점령
제5절 병인양요(續), 제너럴셔먼호 격침 사건, 미국 함대의 강화 공격
제6절 일본의 조정(調停), 야도 마사요시의 정한설(征韓說)
〈제2편 일한 신관계의 성립〉
제3장 메이지 신정부의 성립과 일한국교의 조정(調整)
제7절 타이슈 번의 일한외교 관장
제8절 대수대차사(大修大差使)의 파견
제9절 대수대차사(大修大差使)의 거부
제4장 외무성의 일한외교 접수
제10절 판적봉환(版籍奉還)과 일한외교
제11절 폐번치현(廢藩置縣)과 일한외교의 접수
제12절 초량 왜관의 접수
제5장 일한교섭의 정돈(停頓)
제13절 외무성 시찰원의 파견, 통사(通詞) 우라세 히로시의 시안(試案)
제14절 외무성 파견원의 직접 교섭
제15절 일한교섭의 정돈(停頓)
제16절 일한교섭의 정돈(續), 차사(差使) 사가라 마사키의 동래부 난입(入)
제6장 정한론(征韓論)
제17절 정한론의 발생
제18절 정한론의 결렬
제7장 일한교섭의 재개
제19절 조선의 배외정책의 갱신, 외무성 출사 모리야마 시게루의 조선국 파견
제20절 모리야마 이사관의 조선 재파견, 일한교섭의 재정돈(再停頓)
제21절 일한교섭의 재정돈(續)
제8장 강화도 군함 운요(雲揚) 포격 사건
제22절 강화도 군함 운요(雲揚) 포격 사건
제9장 일한 신관계의 성립
제23절 전권변리대신(全權辨理大臣)의 파견
제24절 강화부에서의 예비 교섭
제25절 강화부에서의 일한회담
제26절 일한수호조규의 체결
제27절 일한수호조규의 체결(續)
제28절 일한수호조규의 조인과 비준
제10장 일한수호조규(日韓修好條規) 체결과 청국
제29절 모리 공사의 청국 파견, 청 총리아문과의 교섭
제30절 청한종속관계론, 모리 공사와 이홍장의 회담
제31절 청한관계의 새 단계, 이홍장과 이유원
〈제3편 일한국교의 갱신과 그 반동〉
제11장 병자(丙子) 수신사의 파견
제32절 병자 수신사의 파견
제12장 일한수호조규부록(日韓修好條規附錄)의 협정
제33절 미야모토 이사관의 파견, 일한수호조규부록안
제34절 일한수호조규부록의 체결
제35절 공사주차(公使駐箚)와 국서 봉정
제13장 일한통상장정(日韓通商章程)의 체결
제36절 일한무역 잠정 약정
제37절 일한통상장정의 성립, 수출입세의 협정
제14장 원산 및 인천의 개항
제38절 개항 연기론, 개항장 선정의 곤란
제39절 원산의 개항
제40절 인천 개항
제15장 신사(辛巳) 위정척사론, 국왕과 척족의 혁신 정책과 그 반동
제41절 신사(辛巳) 위정척사론, 국왕과 척족의 혁신 정책과 그 반동
제16장 임오변란(壬午變亂), 제물포조약(濟物浦條約)의 체결
제42절 임오병란(壬午兵亂)
제43절 일본 정부의 대한방침(對韓方針)
제44절 하나부사 공사의 교섭
제45절 제물포조약의 성립
제46절 청의 간섭, 대원군의 구치(拘致)
제17장 청한종속관계의 진전
제47절 청의 종주권 강화
제48절 조선 조정의 동요
제18장 갑신변란(甲申變亂), 한성조약(漢城條約)의 체결
제49절 일본세력의 진출과 독립당(獨立黨)
제50절 다케조에 공사의 적극정책
제51절 갑신변란
제52절 일청 양국군의 충돌, 다케조에 공사의 경성 철수
제53절 일한교섭의 정돈(停頓)
제54절 이노우에 외무경의 조선 파견
제55절 한성조약의 체결, 김옥균 등의 인도 요구
제19장 톈진협약(天津協約)의 성립
제56절 이토 대사의 청국 파견
제57절 톈진협약의 체결, 일청 양국군의 철수
〈부록〉
다보하시 기요시(田保橋潔) 약전(略傳)
근대 조선외교사 연표(1864∼1885)
주요 인명 색인
『근대 일선관계의 연구(하)』 차례
책 속으로
타이슈 번이 신정부에 일한국교 조정에 관한 건의를 제출한 사실은 타이슈 번의 기록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아마도 전 쇼군 요시노부와 그 군대가 오사카에서 철퇴해서 교토, 오사카 지방이 평온을 되찾은 메이지 원년 정월 하순 이후의 일이었을 것이다. 신정부는 일한외교에 대한 타이슈 번의 세습 특권을 인정하고 외국관(外國官)[외무성(外務省)] 소관 업무에서 일한외교 관계 사항을 분리해서 타이슈 번에 이양했다. 또 번주 쓰시마노카미(對馬守) 소 요시아키라에게 외국사무국보(外國事務局輔)의 권한을 부여하기로 결정하고, 메이지 원년 3월 23일에 태정관의 이름으로 타이슈 번에 명령했다.
이번에 왕정을 일신하여 모든 외국 교제(交際)를 조정에서 취급하게 하신 일과 관련하여 조선국은 예로부터 내왕한 나라이니 더욱 위신을 세우게 하신 뜻에 따라,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양국의 교통을 관장하도록 가역(家役)에 임명하셨다. 대(對)조선국 사무를 처리할 때는 외국사무보(外國事務補)[輔]의 자격으로 근무하라고 하셨으니, 더욱 국위(國威)를 세울 수 있도록 진력할 것을 분부함.
다만 왕정을 일신한 때이므로 해외의 일은 특별히 깊이 유념해서, 구폐(舊弊) 등을 일소하여 반드시 봉공(奉公)할 것.
3월 ---「제3장 메이지 신정부의 성립과 일한국교의 조정(調整)」
이홍장은 우선 모리 공사의 외유와 동양 일반의 정치 문제에 관해 잡담하다가 화제를 전환해서 일청수호조규와 청한종속관계, 그리고 당면한 일한교섭에 관해 모리 공사, 데(鄭) 서기관과 일문일답을 시도했다. 이 회의는 완전히 사적 회담의 형식을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총리아문에서의 공식 회담이나 문서의 왕복보다 더 중대한 의의를 가진다. 그 중요한 대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모리 대신: 고려와 인도는 똑같이 아시아에 있지만 중국의 속국에 속하지 않는다.
답: 고려는 정삭(正朔)을 받는데 어째서 속국이 아닌가?
모리 대신: 각국에서 모두 말하길, 고려는 조공을 바치고 책봉을 받는 데 불과하며, 중국은 그 전량(錢粮)을 거두지 않고 다른 정사에 관여하지 않으니 이 때문에 속국에 속하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답:고려가 수천 년 동안 속국이었음을 누군들 모르겠는가? 화약(和約)에서 언급한 ‘소속방토(所屬邦土)’에서, ‘토(土)’자는 중국의 각 직성(直省)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는 내지(內地)니, 내속(內屬)이 되어 전량(錢糧)을 거둬들이고 정사(政事)를 관장한다. ‘방(邦)’자는 고려와 다른 나라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는 외번(外藩)이니, 외속(外屬)이 되어 전량(錢糧)과 정사(政事)를 예로부터 해당 국가의 경리(經理)에 귀속시켰다. 역래(歷來)로 이와 같아서 본조(本朝)에서 시작된 것이 아닌데, 어째서 속국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하는가?
모리 대신: 일본이 고려와의 화호(和好)를 극력 요구하는데 고려에서 일본과 화호를 꺼린다.
답:귀국과의 화호를 꺼리는 것이 아니라, 저들은 스스로 나라가 작음을 알기 때문에 근수(謹守)해서 감히 응수하지 못하는 것이다. 각국에 대해서 모두 그러하니 비단 일본에만 그런 것이 아니다.
모리 대신: 일본과 고려는 인국(隣國)이니 이 때문에 통호(通好)가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도 고려는 어째서 꺼리는 것인가?
답: 다이라노히데요시(平秀吉)가 고려에서 요란을 일으킨 이후로 아마 의려(疑慮)가 없지 않을 것이다.
데 서사(鄭 署使): 다이라노히데요시 이후 일본과 고려가 왕래를 했는데 중간에 갑자기 단절됐다. 그러다가
몇 년 전에 고려와 사신을 접대하기로 약정했다. 그런데 그 후 일본이 의관을 개변(改變)하고 국서(國書)의 자체(字體)도 고친 것을 이유로 저들이 끝끝내 받지 않았다.
답: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고려가 감히 서국(西國)과 상통(相通)하지 못하는데 일본이 서양 제도로 고쳤으니, 저들이 저절로 의심을 품어서 일본과 왕래하면 다른 나라가 바로 그 뒤를 따라서 들어올 것을 두려워한 것이다.
데 서사: 전에는 사절을 거부하는 데 불과했다. 그런데 근래 일본 병선이 고려 해변에서 담수(淡水)를 구하는데 저들이 갑자기 대포를 쏴서 우리 선척(船隻)을 상괴(傷壞)했다.
답: 그 병선은 고려 해구(海口)로 가서 수심을 측량했다. 『만국공법(萬國公法)』을 살펴보면 해안가 10리 이내의 땅은 본국의 경지(境地)에 속한다고 되어 있다. 일본이 아직 통상을 시작하지 않았으니 본래 그곳에 가서 측량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고려의 개포(開砲)에는 이유가 있다. ---「제10장 일한수호조규(日韓修好條規) 체결과 청국」
다음에 비밀훈령으로 조선 정부에 대한 요구를 명시하고 있다.
첫째, 조선 정부는 그 태만의 책임을 지고 우리나라에 문서로 사죄의 뜻을 표하며, 아울러 다음 조항을 이행해야 한다.
둘째, 우리 요구를 받은 날로부터 10일 이내에 흉도의 당류(黨類)를 나포(拿捕)하고, 우리 정부가 만족할 수 있는 엄중한 처분을 해야 한다.
셋째, 조난자를 위해 상당한 섬휼(贍恤)을 해야 한다.
넷째, 조약 위범(違犯) 및 출병 준비 비용에 대해 배상해야 한다. 배상 정도는 우리 준비의 실비(實費)에 준한다.
다섯째, 장래의 보증으로 조선 정부는 지금부터 5년간 우리 경성주재 공사관을 수호하기 위해 충분한 병원(兵員)을 상비해야 한다.
여섯째, 우리 상민을 위해 안변(安邊) 지역을 개시장(開市場)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상 6개 조건 외에 폭동의 내용과 성질이 최악인 것이 판명될 경우 일본 정부의 최대 요구 한도를, 외무경이 별도로 하나부사 공사에게 구두 전달했다.
일곱째, 만약 조선 정부의 과실에 중대한 사정이 있을 경우, 거제도 또는 송도(松都)를?울릉도 우리나라에 양여해서 사죄의 뜻을 표하게 해야 한다.
여덟째, 만약 조선 정부 내에서 흉도를 비호한 사적(事跡)이 있는 주모자를 발견할 경우, 정부는 바로 그 주모자를 면출(免黜)해서 합당한 처분을 해야 한다.
아홉째, 저들의 정상이 지극히 중대할 경우, 강제 배상[强償] 처분을 하는 것은 임기(臨機)의 적의(適宜)에 따른다.
이노우에 외무경은 하나부사 공사와 회견한 결과, 이상 6개 조 내지 9개 조의 요구로도 오히려 보상이 불충분하다고 보고 메이지 15년 8월 9일부로 다음 4개 조를 추가했다.
첫째, 함흥, 대구, 양화진의 경기 개방
둘째, 공사관원과 영사관원의 내지 여행권의 획득
셋째, 원산 및 안변(安邊)에서의함경도 일본인에 대한 폭행 사건의 해결
넷째, 통상조약에 관한 양보 획득 ---「제16장 임오변란(壬午變亂), 제물포조약(濟物浦條約)의 체결」
다케조에 공사의 알현이 있은 후 11월 3일에 국왕과 왕비는 척신 및 측근의 중신들을 소견해서 일본 공사의 내주(內奏)의 대요를 전하고 그들의 의견을 구했다. 척신 민영익은 ‘임오 배상금 40만 엔은 공법상 당연히 반환해야 할 것을 반환한 것으로 원래 일본의 호의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또 일본 정부의 대한정책은 반복무상(反覆無常)해서 신뢰할 수 없다. 전해들은 바에 따르면, 일본은 마침내 프랑스와 동맹해서 청과의 개전을 결정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조선은 도저히 국외 중립을 유지할 실력이 없으니 일청 양국의 어느 쪽에라도 보호를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논하고 국왕은 양국 가운데 어느 쪽을 선택할 의향인지 여쭈었다. 왕비가 곁에서 국왕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민영익의 의견을 물어보았으므로, 민영익은 “지나가 현재 쇠하기는 했지만 신의가 있는 나라이니 물론 지나에 의뢰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진주(陳奏)했다. 왕비가 다시 나서서 “그 방법은 절대 일본당의 귀에 들어가서는 안 되니 원세개에게 우리의 의뢰하는 뜻을 전달하시오.”라고 주의를 주었으므로 민영익은 즉시 물러나서 청영(淸營)으로 영무처(營務處) 원세개를 방문했다. 국왕은 다시 이조연, 한규직, 윤태준의 세 영사(營使)를 소견했는데 모두 “소신 등은 민영익과 같은 의견이오나 지나와 일본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일은 전하의 현려(賢慮)에 달려 있습니다.”라고 진주했다. 또한 이날 척신 민태호도 불렀는데, 그는 혐의를 피해서 사절하고 문서만 올려서 대략 민영익과 같은 의견을 내주(內奏)했다고 한다.
척신을 소견한 후 국왕은 독립당에 속한 협판군국사무 홍영식, 협판교섭통상사무 김옥균을 불러서 의견을 물었는데, 김옥균은 임오 배상금의 반환이 공법상 당연한 것이라고 한 민태호와 민영익의 말을 반박하고, 조선이 하루라도 빨리 독립해야만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나 일청 양국 중 어느 쪽에 보호를 의뢰할 것인지의 문제에 관해서는 분명한 답변을 회피했기 때문에 왕비는 크게 불만스러운 뜻을 비쳤다고 한다.
이번에 왕정을 일신하여 모든 외국 교제(交際)를 조정에서 취급하게 하신 일과 관련하여 조선국은 예로부터 내왕한 나라이니 더욱 위신을 세우게 하신 뜻에 따라,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양국의 교통을 관장하도록 가역(家役)에 임명하셨다. 대(對)조선국 사무를 처리할 때는 외국사무보(外國事務補)[輔]의 자격으로 근무하라고 하셨으니, 더욱 국위(國威)를 세울 수 있도록 진력할 것을 분부함.
다만 왕정을 일신한 때이므로 해외의 일은 특별히 깊이 유념해서, 구폐(舊弊) 등을 일소하여 반드시 봉공(奉公)할 것.
3월 ---「제3장 메이지 신정부의 성립과 일한국교의 조정(調整)」
이홍장은 우선 모리 공사의 외유와 동양 일반의 정치 문제에 관해 잡담하다가 화제를 전환해서 일청수호조규와 청한종속관계, 그리고 당면한 일한교섭에 관해 모리 공사, 데(鄭) 서기관과 일문일답을 시도했다. 이 회의는 완전히 사적 회담의 형식을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총리아문에서의 공식 회담이나 문서의 왕복보다 더 중대한 의의를 가진다. 그 중요한 대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모리 대신: 고려와 인도는 똑같이 아시아에 있지만 중국의 속국에 속하지 않는다.
답: 고려는 정삭(正朔)을 받는데 어째서 속국이 아닌가?
모리 대신: 각국에서 모두 말하길, 고려는 조공을 바치고 책봉을 받는 데 불과하며, 중국은 그 전량(錢粮)을 거두지 않고 다른 정사에 관여하지 않으니 이 때문에 속국에 속하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답:고려가 수천 년 동안 속국이었음을 누군들 모르겠는가? 화약(和約)에서 언급한 ‘소속방토(所屬邦土)’에서, ‘토(土)’자는 중국의 각 직성(直省)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는 내지(內地)니, 내속(內屬)이 되어 전량(錢糧)을 거둬들이고 정사(政事)를 관장한다. ‘방(邦)’자는 고려와 다른 나라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는 외번(外藩)이니, 외속(外屬)이 되어 전량(錢糧)과 정사(政事)를 예로부터 해당 국가의 경리(經理)에 귀속시켰다. 역래(歷來)로 이와 같아서 본조(本朝)에서 시작된 것이 아닌데, 어째서 속국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하는가?
모리 대신: 일본이 고려와의 화호(和好)를 극력 요구하는데 고려에서 일본과 화호를 꺼린다.
답:귀국과의 화호를 꺼리는 것이 아니라, 저들은 스스로 나라가 작음을 알기 때문에 근수(謹守)해서 감히 응수하지 못하는 것이다. 각국에 대해서 모두 그러하니 비단 일본에만 그런 것이 아니다.
모리 대신: 일본과 고려는 인국(隣國)이니 이 때문에 통호(通好)가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도 고려는 어째서 꺼리는 것인가?
답: 다이라노히데요시(平秀吉)가 고려에서 요란을 일으킨 이후로 아마 의려(疑慮)가 없지 않을 것이다.
데 서사(鄭 署使): 다이라노히데요시 이후 일본과 고려가 왕래를 했는데 중간에 갑자기 단절됐다. 그러다가
몇 년 전에 고려와 사신을 접대하기로 약정했다. 그런데 그 후 일본이 의관을 개변(改變)하고 국서(國書)의 자체(字體)도 고친 것을 이유로 저들이 끝끝내 받지 않았다.
답: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고려가 감히 서국(西國)과 상통(相通)하지 못하는데 일본이 서양 제도로 고쳤으니, 저들이 저절로 의심을 품어서 일본과 왕래하면 다른 나라가 바로 그 뒤를 따라서 들어올 것을 두려워한 것이다.
데 서사: 전에는 사절을 거부하는 데 불과했다. 그런데 근래 일본 병선이 고려 해변에서 담수(淡水)를 구하는데 저들이 갑자기 대포를 쏴서 우리 선척(船隻)을 상괴(傷壞)했다.
답: 그 병선은 고려 해구(海口)로 가서 수심을 측량했다. 『만국공법(萬國公法)』을 살펴보면 해안가 10리 이내의 땅은 본국의 경지(境地)에 속한다고 되어 있다. 일본이 아직 통상을 시작하지 않았으니 본래 그곳에 가서 측량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고려의 개포(開砲)에는 이유가 있다. ---「제10장 일한수호조규(日韓修好條規) 체결과 청국」
다음에 비밀훈령으로 조선 정부에 대한 요구를 명시하고 있다.
첫째, 조선 정부는 그 태만의 책임을 지고 우리나라에 문서로 사죄의 뜻을 표하며, 아울러 다음 조항을 이행해야 한다.
둘째, 우리 요구를 받은 날로부터 10일 이내에 흉도의 당류(黨類)를 나포(拿捕)하고, 우리 정부가 만족할 수 있는 엄중한 처분을 해야 한다.
셋째, 조난자를 위해 상당한 섬휼(贍恤)을 해야 한다.
넷째, 조약 위범(違犯) 및 출병 준비 비용에 대해 배상해야 한다. 배상 정도는 우리 준비의 실비(實費)에 준한다.
다섯째, 장래의 보증으로 조선 정부는 지금부터 5년간 우리 경성주재 공사관을 수호하기 위해 충분한 병원(兵員)을 상비해야 한다.
여섯째, 우리 상민을 위해 안변(安邊) 지역을 개시장(開市場)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상 6개 조건 외에 폭동의 내용과 성질이 최악인 것이 판명될 경우 일본 정부의 최대 요구 한도를, 외무경이 별도로 하나부사 공사에게 구두 전달했다.
일곱째, 만약 조선 정부의 과실에 중대한 사정이 있을 경우, 거제도 또는 송도(松都)를?울릉도 우리나라에 양여해서 사죄의 뜻을 표하게 해야 한다.
여덟째, 만약 조선 정부 내에서 흉도를 비호한 사적(事跡)이 있는 주모자를 발견할 경우, 정부는 바로 그 주모자를 면출(免黜)해서 합당한 처분을 해야 한다.
아홉째, 저들의 정상이 지극히 중대할 경우, 강제 배상[强償] 처분을 하는 것은 임기(臨機)의 적의(適宜)에 따른다.
이노우에 외무경은 하나부사 공사와 회견한 결과, 이상 6개 조 내지 9개 조의 요구로도 오히려 보상이 불충분하다고 보고 메이지 15년 8월 9일부로 다음 4개 조를 추가했다.
첫째, 함흥, 대구, 양화진의 경기 개방
둘째, 공사관원과 영사관원의 내지 여행권의 획득
셋째, 원산 및 안변(安邊)에서의함경도 일본인에 대한 폭행 사건의 해결
넷째, 통상조약에 관한 양보 획득 ---「제16장 임오변란(壬午變亂), 제물포조약(濟物浦條約)의 체결」
다케조에 공사의 알현이 있은 후 11월 3일에 국왕과 왕비는 척신 및 측근의 중신들을 소견해서 일본 공사의 내주(內奏)의 대요를 전하고 그들의 의견을 구했다. 척신 민영익은 ‘임오 배상금 40만 엔은 공법상 당연히 반환해야 할 것을 반환한 것으로 원래 일본의 호의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또 일본 정부의 대한정책은 반복무상(反覆無常)해서 신뢰할 수 없다. 전해들은 바에 따르면, 일본은 마침내 프랑스와 동맹해서 청과의 개전을 결정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조선은 도저히 국외 중립을 유지할 실력이 없으니 일청 양국의 어느 쪽에라도 보호를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논하고 국왕은 양국 가운데 어느 쪽을 선택할 의향인지 여쭈었다. 왕비가 곁에서 국왕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민영익의 의견을 물어보았으므로, 민영익은 “지나가 현재 쇠하기는 했지만 신의가 있는 나라이니 물론 지나에 의뢰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진주(陳奏)했다. 왕비가 다시 나서서 “그 방법은 절대 일본당의 귀에 들어가서는 안 되니 원세개에게 우리의 의뢰하는 뜻을 전달하시오.”라고 주의를 주었으므로 민영익은 즉시 물러나서 청영(淸營)으로 영무처(營務處) 원세개를 방문했다. 국왕은 다시 이조연, 한규직, 윤태준의 세 영사(營使)를 소견했는데 모두 “소신 등은 민영익과 같은 의견이오나 지나와 일본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일은 전하의 현려(賢慮)에 달려 있습니다.”라고 진주했다. 또한 이날 척신 민태호도 불렀는데, 그는 혐의를 피해서 사절하고 문서만 올려서 대략 민영익과 같은 의견을 내주(內奏)했다고 한다.
척신을 소견한 후 국왕은 독립당에 속한 협판군국사무 홍영식, 협판교섭통상사무 김옥균을 불러서 의견을 물었는데, 김옥균은 임오 배상금의 반환이 공법상 당연한 것이라고 한 민태호와 민영익의 말을 반박하고, 조선이 하루라도 빨리 독립해야만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나 일청 양국 중 어느 쪽에 보호를 의뢰할 것인지의 문제에 관해서는 분명한 답변을 회피했기 때문에 왕비는 크게 불만스러운 뜻을 비쳤다고 한다.
---「제18장 갑신변란(甲申變亂), 한성조약(漢城條約)의 체결」
출판사 리뷰
20세기 초, 48세의 길지 않은 생을 살다간 일본의 역사학자, 다보하시 기요시(田保橋潔, 1897~1945).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교수이자 조선사편수회의 근대사 편찬주임이었던 다보하시 기요시는 조선 근대사 및 근대 동아시아 외교사 분야의 정초(定礎)를 확립한 것으로 평가받는 학자다.
이 책은 다보하시 기요시의 『근대 일선관계의 연구(近代日鮮關係の硏究)』 상·하권 중 상권의 완역본으로, 조선 근대사를 근대 동아시아 외교사의 관점에서 서술한 최초의 본격적 연구이다. 상권 1,133쪽, 하권 969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근대 일선관계의 연구』는 초판이 간행된 지 이미 70여 년이 지났지만, 조선 근대사 내지 근대 동아시아 외교사에 관한 한 일본 내에서는 물론이고 해방 이후 식민사학의 극복을 지상 과제로 삼았던 우리 학계에서도 반드시 참조해야 하는 고전으로 인정받아 왔다.
원래 이 책은 조선총독부에서 조선 통치에 유익하다고 판단해서 인쇄비를 지급했는데, 당시에는 오직 집무에만 참고할 뿐 일반에 비공개하는 것을 전제로 출간되었다. 그것은 다보하시가 엄밀한 실증주의에 입각해서 역사가의 가치 판단을 최소화한 채 오로지 조선, 일본, 청의 문서 기록에만 의거하여 조선을 중심으로 한 근대 동아시아 외교사를 서술했기 때문이다. 1940년 당시 극도로 우경화한 일본제국주의하에서는 이 정도조차도 불온하다고 간주되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다보하시가 『근대 일선관계의 연구』를 도쿄제국대학에 박사학위논문으로 제출했는데 당시 심사위원장을 맡은 우익 교수가 청·일전쟁이 일본 해군의 음모로 발발한 것으로 암시한 부분을 문제 삼아서 결국 통과시키지 않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다보하시가 이 책을 집필한 목적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 번째는, 19세기 동아시아 외교사를 조선을 중심으로 한 내적 동학(動學)의 관점에서 규명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1940년 출간 당시 아직 발굴되지 않고 문서고에 비장(秘藏)되어 있던 동아시아 3국의 정부기록 및 외교문서를 발굴해서 원문 그대로 수록함으로써 일종의 외교문서집을 편찬하는 데 있었다. 이 책이 학계에서 가지는 위상을 역설적으로 반영이라도 하듯이 그 내용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로 비판이 있었지만, 적어도 이 책에 수록된 정부기록 및 외교문서의 가치와 중요성에 대해 의문이 제기된 일은 없었다.
그렇다면 이 책이 가지는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번역 작업이 이뤄지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무엇보다 섣불리 번역 작업에 착수하기 어려운 원서의 방대한 분량과 함께 그 초판이 조선총독부에서 출간된 정황에 대한 일말의 위구심이 없지 않았기 때문이겠지만, 19세기 동아시아 3국의 정부기록 및 외교문서를 원문 그대로 수록한 이 책의 특징에도 그 이유가 있다.
이 책에는 조선의 문서는 물론, 중국의 공공기록물 양식인 당안(?案) 문서와 서간체인 소로분(候文)을 포함한 일본 에도시대 고문(古文) 문서가 포함되어 있다. 이 때문에 전문적으로 중국이나 일본을 연구하는 역사가라고 할지라도 이 책 전체를 독해하거나 번역하기는 쉽지 않았다. 이에 대해 이 역서에서는 원서에 원문으로 게재된 근대 동아시아 3국의 중요한 정부기록과 외교문서를 평이한 우리말로 옮기고, 외교문서 특유의 생경한 단어나 문장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역주(譯註)를 부기했다. 다시 말해서 『근대 일선관계의 연구』의 집필 당시 다보하시의 의도가 근대 동아시아 3국의 정부기록과 외교문서를 망라한 일종의 문서집을 편찬하는 데 있었다면, 이 역서는 다보하시가 선별한 문서들의 번역집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역서가 『근대 일선관계의 연구』의 단순한 번역 이상의 의미를 가지는 이유이다.
이 책은 다보하시가 사용한 역사용어를 그대로 옮기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이는 『근대 일선관계의 연구』가 대단히 실증주의적인 외양을 갖고 있는 까닭에 역사용어마저 친숙한 것으로 바꿀 경우 독자들이 이 책의 서술을 가장 객관적인 사실에 부합하는 것으로 오인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역자는 독자들이 객관적·실증주의적 역사 서술의 이면에 잠복되어 있는 이데올로기적 성격에 대해 주의를 환기해 줄 것을 바란다고 했다.
오늘날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분명 이 책은 한계를 가지고 있다. 이 책이 발간된 이후 지난 70여 년간 이 책에 수록되지 않은 많은 사료가 발굴되었으며, 따라서 사실관계에서 새로운 해석을 요하는 부분이 적지 않다는 점, 다보하시 자신도 언급한 제2편의 사료의 편향성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방대한 분량의 조선·청·일본의 기록문서를 인용하면서 근대 이행기 조선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외교사를 세밀하게 서술한 노작으로서 오늘날까지도 조선 근대사 및 근대 동아시아 외교사 분야에서 반드시 참조해야 할 일급 연구서로 평가받고 있다.
이 책은 다보하시 기요시의 『근대 일선관계의 연구(近代日鮮關係の硏究)』 상·하권 중 상권의 완역본으로, 조선 근대사를 근대 동아시아 외교사의 관점에서 서술한 최초의 본격적 연구이다. 상권 1,133쪽, 하권 969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근대 일선관계의 연구』는 초판이 간행된 지 이미 70여 년이 지났지만, 조선 근대사 내지 근대 동아시아 외교사에 관한 한 일본 내에서는 물론이고 해방 이후 식민사학의 극복을 지상 과제로 삼았던 우리 학계에서도 반드시 참조해야 하는 고전으로 인정받아 왔다.
원래 이 책은 조선총독부에서 조선 통치에 유익하다고 판단해서 인쇄비를 지급했는데, 당시에는 오직 집무에만 참고할 뿐 일반에 비공개하는 것을 전제로 출간되었다. 그것은 다보하시가 엄밀한 실증주의에 입각해서 역사가의 가치 판단을 최소화한 채 오로지 조선, 일본, 청의 문서 기록에만 의거하여 조선을 중심으로 한 근대 동아시아 외교사를 서술했기 때문이다. 1940년 당시 극도로 우경화한 일본제국주의하에서는 이 정도조차도 불온하다고 간주되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다보하시가 『근대 일선관계의 연구』를 도쿄제국대학에 박사학위논문으로 제출했는데 당시 심사위원장을 맡은 우익 교수가 청·일전쟁이 일본 해군의 음모로 발발한 것으로 암시한 부분을 문제 삼아서 결국 통과시키지 않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다보하시가 이 책을 집필한 목적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 번째는, 19세기 동아시아 외교사를 조선을 중심으로 한 내적 동학(動學)의 관점에서 규명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1940년 출간 당시 아직 발굴되지 않고 문서고에 비장(秘藏)되어 있던 동아시아 3국의 정부기록 및 외교문서를 발굴해서 원문 그대로 수록함으로써 일종의 외교문서집을 편찬하는 데 있었다. 이 책이 학계에서 가지는 위상을 역설적으로 반영이라도 하듯이 그 내용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로 비판이 있었지만, 적어도 이 책에 수록된 정부기록 및 외교문서의 가치와 중요성에 대해 의문이 제기된 일은 없었다.
그렇다면 이 책이 가지는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번역 작업이 이뤄지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무엇보다 섣불리 번역 작업에 착수하기 어려운 원서의 방대한 분량과 함께 그 초판이 조선총독부에서 출간된 정황에 대한 일말의 위구심이 없지 않았기 때문이겠지만, 19세기 동아시아 3국의 정부기록 및 외교문서를 원문 그대로 수록한 이 책의 특징에도 그 이유가 있다.
이 책에는 조선의 문서는 물론, 중국의 공공기록물 양식인 당안(?案) 문서와 서간체인 소로분(候文)을 포함한 일본 에도시대 고문(古文) 문서가 포함되어 있다. 이 때문에 전문적으로 중국이나 일본을 연구하는 역사가라고 할지라도 이 책 전체를 독해하거나 번역하기는 쉽지 않았다. 이에 대해 이 역서에서는 원서에 원문으로 게재된 근대 동아시아 3국의 중요한 정부기록과 외교문서를 평이한 우리말로 옮기고, 외교문서 특유의 생경한 단어나 문장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역주(譯註)를 부기했다. 다시 말해서 『근대 일선관계의 연구』의 집필 당시 다보하시의 의도가 근대 동아시아 3국의 정부기록과 외교문서를 망라한 일종의 문서집을 편찬하는 데 있었다면, 이 역서는 다보하시가 선별한 문서들의 번역집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역서가 『근대 일선관계의 연구』의 단순한 번역 이상의 의미를 가지는 이유이다.
이 책은 다보하시가 사용한 역사용어를 그대로 옮기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이는 『근대 일선관계의 연구』가 대단히 실증주의적인 외양을 갖고 있는 까닭에 역사용어마저 친숙한 것으로 바꿀 경우 독자들이 이 책의 서술을 가장 객관적인 사실에 부합하는 것으로 오인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역자는 독자들이 객관적·실증주의적 역사 서술의 이면에 잠복되어 있는 이데올로기적 성격에 대해 주의를 환기해 줄 것을 바란다고 했다.
오늘날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분명 이 책은 한계를 가지고 있다. 이 책이 발간된 이후 지난 70여 년간 이 책에 수록되지 않은 많은 사료가 발굴되었으며, 따라서 사실관계에서 새로운 해석을 요하는 부분이 적지 않다는 점, 다보하시 자신도 언급한 제2편의 사료의 편향성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방대한 분량의 조선·청·일본의 기록문서를 인용하면서 근대 이행기 조선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외교사를 세밀하게 서술한 노작으로서 오늘날까지도 조선 근대사 및 근대 동아시아 외교사 분야에서 반드시 참조해야 할 일급 연구서로 평가받고 있다.
책소개
일제강점기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교수이자 조선사편수회 근대사 편찬주임이었던 다보하시 기요시(田保橋潔)의 『근대 일선관계의 연구(近代日鮮關係の硏究)』가 5년여의 번역 작업 끝에 상·하 2책으로 완역됐다. 『근대 일선관계의 연구』는 조선 근대사를 근대 동아시아 외교사 관점에서 서술한 최초의 본격적 연구로, 외교문서집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방대한 분량의 조선, 청, 일본의 정부기록과 외교문서를 수록하고 실증적 방법으로 역사를 서술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목차
옮긴이 서문
일러두기
『제4편 조선에서의 일청 양국의 항쟁』
제20장 갑신변란 후의 정세
제58절 묄렌도르프와 제1차 한러비밀협정 제59절 대원군의 석방·귀국/제2차 한러비밀협정
제21장 조선 방곡(防穀) 배상 사건
제60절 방곡 사건의 연혁
제61절 방곡 배상안의 일시 중단
제62절 오이시 공사의 최후통첩/손해배상의 확정
제22장 김옥균 암살 사건
제63절 독립파 간부의 일본 망명
제64절 김옥균과 이일식
제65절 김옥균 암살과 박영효 암살 미수
제23장 동학변란(東學變亂)
제66절 동학의 연혁/계사동학변란(癸巳東學變亂) 제67절 갑오동학변란(甲午東學變亂)
제24장 일청 양국의 출병
제68절 청의 출병
제69절 일본의 출병
제70절 조선 출병 후의 정세
제71절 오토리 공사와 원세개
제25장 일청의 출병과 톈진협약
제72절 일청의 출병과 톈진협약
제26장 조선 내정개혁 문제
제73절 공동개혁과 단독개혁
제74절 내정개혁과 일청개전론
제75절 내정개혁의 일시 중단
제27장 조선 내정개혁과 청
제76절 조선 내정개혁과 청
제28장 갑오정변(甲午政變)
제77절 오토리 공사의 최후통첩
제78절 대원군의 제3차 집정/청한종속관계의 폐기
제29장 열강의 조정(調停)
제79절 러시아의 조정
제80절 러시아의 조정[續]
제81절 영국의 제1차 조정
제82절 영국의 제2차 조정
제83절 미국·이탈리아 양국의 조정
제30장 일청의 위기와 청의 정세
제84절 북양대신 이홍장과 그 외교
제85절 청 조정과 북양의 대립
제86절 북양의 전쟁 준비
제31장 일청개전(日淸開戰)
제87절 풍도(豊島)와 성환(成歡)의 전투
제88절 국교단절과 선전(宣戰)
『별편 타이슈 번(對州藩)을 중심으로 한 일한관계』
별편 1 조선 통신사 역지행빙고(易地行聘考)
제1절 서론
제2절 통신사 내빙(來聘) 연기/역지행빙(易地行聘)의 기원
제3절 타이슈 빙례(聘禮) 거행의 교섭
제4절 무오(戊午) 역지행빙 조약의 성립
제5절 을축통신사행절목강정(乙丑通信使行節目講定)/왜학역관옥(倭學譯官獄)
제6절 역지행빙 협정의 폐기
제7절 기사통신사행절목(己巳通信使行節目)의 강정(講定)
제8절 타이슈 빙례의 거행
제9절 역지행빙의 재강정(再講定)
제10절 결론
별편 2 메이지유신기의 타이슈 번 재정 및 번채(藩債)에 관하여
제1절 타이슈 번 재정의 실체
제2절 타이슈 번채와 그 정리(整理)
제3절 타이슈 번 외채와 상환
제4절 결론
『부록 인용사료 서목(書目)』
부록 1 다보하시 기요시(田保橋潔) 논문목록초(論文目錄抄)
부록 2 주요 인용사료 서목
부록
근대 조선외교사 연표(1885~1894)
조선 묘호(廟號)와 일본 연호(年號) 대조표(1777~1869)
주요 인명 색인
『근대 일선관계의 연구 (상)』 차례
일러두기
『제4편 조선에서의 일청 양국의 항쟁』
제20장 갑신변란 후의 정세
제58절 묄렌도르프와 제1차 한러비밀협정 제59절 대원군의 석방·귀국/제2차 한러비밀협정
제21장 조선 방곡(防穀) 배상 사건
제60절 방곡 사건의 연혁
제61절 방곡 배상안의 일시 중단
제62절 오이시 공사의 최후통첩/손해배상의 확정
제22장 김옥균 암살 사건
제63절 독립파 간부의 일본 망명
제64절 김옥균과 이일식
제65절 김옥균 암살과 박영효 암살 미수
제23장 동학변란(東學變亂)
제66절 동학의 연혁/계사동학변란(癸巳東學變亂) 제67절 갑오동학변란(甲午東學變亂)
제24장 일청 양국의 출병
제68절 청의 출병
제69절 일본의 출병
제70절 조선 출병 후의 정세
제71절 오토리 공사와 원세개
제25장 일청의 출병과 톈진협약
제72절 일청의 출병과 톈진협약
제26장 조선 내정개혁 문제
제73절 공동개혁과 단독개혁
제74절 내정개혁과 일청개전론
제75절 내정개혁의 일시 중단
제27장 조선 내정개혁과 청
제76절 조선 내정개혁과 청
제28장 갑오정변(甲午政變)
제77절 오토리 공사의 최후통첩
제78절 대원군의 제3차 집정/청한종속관계의 폐기
제29장 열강의 조정(調停)
제79절 러시아의 조정
제80절 러시아의 조정[續]
제81절 영국의 제1차 조정
제82절 영국의 제2차 조정
제83절 미국·이탈리아 양국의 조정
제30장 일청의 위기와 청의 정세
제84절 북양대신 이홍장과 그 외교
제85절 청 조정과 북양의 대립
제86절 북양의 전쟁 준비
제31장 일청개전(日淸開戰)
제87절 풍도(豊島)와 성환(成歡)의 전투
제88절 국교단절과 선전(宣戰)
『별편 타이슈 번(對州藩)을 중심으로 한 일한관계』
별편 1 조선 통신사 역지행빙고(易地行聘考)
제1절 서론
제2절 통신사 내빙(來聘) 연기/역지행빙(易地行聘)의 기원
제3절 타이슈 빙례(聘禮) 거행의 교섭
제4절 무오(戊午) 역지행빙 조약의 성립
제5절 을축통신사행절목강정(乙丑通信使行節目講定)/왜학역관옥(倭學譯官獄)
제6절 역지행빙 협정의 폐기
제7절 기사통신사행절목(己巳通信使行節目)의 강정(講定)
제8절 타이슈 빙례의 거행
제9절 역지행빙의 재강정(再講定)
제10절 결론
별편 2 메이지유신기의 타이슈 번 재정 및 번채(藩債)에 관하여
제1절 타이슈 번 재정의 실체
제2절 타이슈 번채와 그 정리(整理)
제3절 타이슈 번 외채와 상환
제4절 결론
『부록 인용사료 서목(書目)』
부록 1 다보하시 기요시(田保橋潔) 논문목록초(論文目錄抄)
부록 2 주요 인용사료 서목
부록
근대 조선외교사 연표(1885~1894)
조선 묘호(廟號)와 일본 연호(年號) 대조표(1777~1869)
주요 인명 색인
『근대 일선관계의 연구 (상)』 차례
책 속으로
이른바 ‘인아반청(引俄反淸)’ 음모는 아마도 베베르 대리공사가 부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싹트기 시작했을 것이다. 정부 부처 내에서는 공식적으로는 거의 비밀에 부쳐졌을 것이다. 이 음모에 반대한 것은, 척신 중에서는 최근 홍콩에서 귀국한 민영익과 중신 중에서는 독판교섭통상사무 김윤식 등 2명에 불과했다. 민영익이 반대한 이유는 자신의 정치적 경험으로 볼 때 ‘인아(引俄)’가 성공할 가능성은 매우 의심스러운 반면, ‘반청(反淸)’의 보복은 가공할 만하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반면 김윤식의 반대는 이 음모가 그의 정의(正義) 관념에 반했기 때문일 것이다.
민영익의 반대는 어쩔 수 없었지만, 외무당국의 반대는 친러론자들에게 큰 불안감을 느끼게 했다. 그렇지만 김윤식은 이홍장과 원세개의 신임이 두터웠기 때문에 그의 경질은 오히려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결과를 초래할 우려가 있었다. 실제로 비밀은 그에게서 누설됐다.
제2차 한러비밀협정은 메이지 19년 8월경에 예비교섭이 대략 성립됐다. 조선 정부에서는 베베르 대리공사에게 조회문을 보내서 조선을 보호하고 타국과 ‘일률평행(一律平行)’하게 하며, 혹시 제3국과 분쟁이 발생할 경우에는 군함을 파견해서 원조해 줄 것을 요청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보다 앞서 메이지 19년 7월 말에 민영익이 원세개에게 이 사실을 밀고하고, 원세개는 즉시 이홍장에게 보고해서 방지할 수단을 취했다고 한다. --- pp.58-59
무쓰 외무대신은 도쿄지방재판소에서 발송한 조선국왕 친서를 한 번 보고는 바로 그 인새가 위조된 것임을 짐작했다. 그는 4월 2일에 오토리 주한특명전권공사에게 전명(電命)해서 친서의 진위를 확인하되, 그 회답은 반드시 공문으로 받으라고 주의를 주었다. 오토리 공사는 4월 3일에 서기관 스기무라 후카시를 독판교섭통상사무 조병직에게 보내서 외무대신의 전훈에 포함된 이일식 등의 진술을 전달하고, 그 진위, 특히 이른바 국보의 진위를 질문하게 했다. 독판 조병직은 당일로 조회를 보내서 이를 전적으로 부인하고, 아울러 이일식 등 범죄자의 인도를 요청했다.
예전에 아력(我曆)?이태왕 갑오년 정월에 귀국 수도에 주재하는 우리 공사가 전보로 이일식, 권동수가 집조(執照)를 받지 않고 종적(?跡)이 수상한 각 정절(情節)을 보고했기에, 본서(本署)에서는 즉시 세 항구의 감리(監理)에게 밀칙(密飭)해서 그들이 도착하는 대로 나판(拿辦)하게 했습니다. 아울러 귀 공사에게 언명하기를, 적절한 조치를 취해서 그들을 체포한 후 본국에 돌려보내 간악한 무리를 징계하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근래 들으니, 이일식과 권동수가 아직도 귀국에서 사단을 일으킨다고 하고, 또 오늘 귀 서기 스기무라 후카시가 와서는 “지금 우리 정부의 전명(電命)을 받으니, 이일식이 옥새가 찍힌 문빙(文憑)을 소지하고 있으므로 본 공사에게 조선 정부에 그 진위를 문의하라고 했습니다. 이에 우선 언명하니, 이후에 조회하시기 바랍니다.”라고 했습니다.
본 독판이 살펴보건대, 이일식은 문빙(文憑)을 위조하고 인국(隣國)에 몰래 월경했으니, 그 죄가 망사(罔赦)에 속합니다. 따라서 귀 정부는 응당 전장(典章)에 따라 그를 조사·체포해서 오직 신안(訊案)만 하고 이일식과 권동수 등 여러 범인들을 신속히 본 정부에 압송해서 법률에 따라 처리하게 하는 것이 실로 공정하고 윤당할 것입니다. 부디 이러한 내용을 귀 정 부에 전달해서 시행하고 조복(照覆)하시기 바랍니다.
일본·청·한국 3국 외교관계에 관한 한, 김옥균 암살 사건은 이것으로 종결됐다. 그렇지만 이 사건의 정치적 의의는 매우 중대해서 일한 양국의 내정문제로 발전했다. --- pp.192-193쪽
통신사의정대차사 정관 히라타 하야토, 도선주 시게타 도이노스케 등은 동래부사 류형이 이러한 의견을 갖고 있다는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도착하자마자 훈도, 별차에게 접대를 요구했으므로, 훈도와 별차는 당연히 처음부터 난색을 표시했다. 훈도, 별차는 정관, 도선주, 관수 등의 설명을 듣고 난 후, “지난 덴메이 8년 무신년 통신사청퇴 대차사가 도착했을 때, 그것이 규외(規外)였음에도 불구하고 조정에서는 특별히 그들을 접대하고 통신사 파견의 연기를 수락했다. 그런데 쓰시마에서 또 새로 명목을 지어내서 규외차사(規外差使)를 자주 보내는 것은, 조정의 관대함을 이용해서 접대물품을 탐하는 뜻이 없지 않다.”라고 힐난하고, 다시, “신사가 에도에 가서 전명(傳命)하는 것이 양국 간에 얼마나 중대한 일이며, 또 바꿀 수 없는 예(禮)이거늘, 비용을 절감한다는 핑계로 갑자기 쓰시마에서 전명할 것을 청하는 것은 무슨 도리이며, 무슨 예제(禮制)인가? 사체(事體)를 존중하는 도(道)에 있어 절대로 감히 이처럼 예에서 어긋난 말로 조정을 번거롭게 해서는 안 된다.”라고 주장하며 서계 등본의 진달을 거부하고, 또 대차사 원역(員役)의 왜관 퇴거를 요구했다. 정관 등은, ‘역지행빙은 결코 조약을 무시하거나 통신사의 예제(禮制)를 멸시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일본이 근년에 조잔(凋殘)이 심해서 선례에 따라 영접을 거행할 여력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이 간이(簡易)하게 하는 데 힘쓰는 것’이라고 해명하고, 속히 서계와 예물을 봉납(捧納)해 줄 것을 간청했다.
훈도, 별차의 보고를 접한 동래부사 류형은 지난번 선문사(先問使)가 나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통신사의정대차사 그 자체가 규외(規外)라서 물리치는 것만은 아니다. 그 사명(使命)의 내용으로 봐도 통신사가 국서를 받들고 에도에 들어가서 직접 간바쿠(關白)에게 전달하는 것은 약조에 명기된 바이니, 단순히 경비 절감이나 흉년을 이유로 이를 변혁하는 것은 사체(事體)를 존중하고 약조를 엄수하는 도리가 아니다.’라는 의견을 갖고 있었지만, 대차사는 에도 정부의 명으로 나왔기 때문에 자신의 권한으로는 결정하기 어려웠다. 이에 예조에 보내는 서계 등본을 진달하면서 동시에 대차사를 물리쳐야 한다는 의견을 장계로 아뢰었다.
동래부사의 장계는 12월 21일에 조정에 도착했다. 국왕은 바로 비변사에 내려보내서 품처(稟處)하게 했다. 비변사에서는 덴메이(天明) 8년의 통신사청퇴대차사조차 규외라서 물리쳐야 한다는 의견이었으므로, 이번 통신사의정대차사 같은 것은 거의 문제시되지도 않았다. 12월 25일에 좌의정 채제공은, “의빙(議聘) 두 글자는 실로 일찍이 없었던 것입니다. 왜(倭)의 교활한 실정이 참으로 몹시 악독합니다.”라는 이유로 동래부사의 장계대로 훈도와 별차를 독려해서 의정대차(議定大差)를 속히 척퇴(斥退)해야 한다고 아뢰고, 국왕의 재가를 얻은 후 비변사 관문(關文)으로 동래부사에게 명령했다.
이처럼 조선에서는 통신사 역지행빙을 무조건 거부했고, 이로 인해 타이슈 번은 조선과 막부의 중간에서 한때 진퇴양난의 처지에 빠졌다.
민영익의 반대는 어쩔 수 없었지만, 외무당국의 반대는 친러론자들에게 큰 불안감을 느끼게 했다. 그렇지만 김윤식은 이홍장과 원세개의 신임이 두터웠기 때문에 그의 경질은 오히려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결과를 초래할 우려가 있었다. 실제로 비밀은 그에게서 누설됐다.
제2차 한러비밀협정은 메이지 19년 8월경에 예비교섭이 대략 성립됐다. 조선 정부에서는 베베르 대리공사에게 조회문을 보내서 조선을 보호하고 타국과 ‘일률평행(一律平行)’하게 하며, 혹시 제3국과 분쟁이 발생할 경우에는 군함을 파견해서 원조해 줄 것을 요청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보다 앞서 메이지 19년 7월 말에 민영익이 원세개에게 이 사실을 밀고하고, 원세개는 즉시 이홍장에게 보고해서 방지할 수단을 취했다고 한다. --- pp.58-59
무쓰 외무대신은 도쿄지방재판소에서 발송한 조선국왕 친서를 한 번 보고는 바로 그 인새가 위조된 것임을 짐작했다. 그는 4월 2일에 오토리 주한특명전권공사에게 전명(電命)해서 친서의 진위를 확인하되, 그 회답은 반드시 공문으로 받으라고 주의를 주었다. 오토리 공사는 4월 3일에 서기관 스기무라 후카시를 독판교섭통상사무 조병직에게 보내서 외무대신의 전훈에 포함된 이일식 등의 진술을 전달하고, 그 진위, 특히 이른바 국보의 진위를 질문하게 했다. 독판 조병직은 당일로 조회를 보내서 이를 전적으로 부인하고, 아울러 이일식 등 범죄자의 인도를 요청했다.
예전에 아력(我曆)?이태왕 갑오년 정월에 귀국 수도에 주재하는 우리 공사가 전보로 이일식, 권동수가 집조(執照)를 받지 않고 종적(?跡)이 수상한 각 정절(情節)을 보고했기에, 본서(本署)에서는 즉시 세 항구의 감리(監理)에게 밀칙(密飭)해서 그들이 도착하는 대로 나판(拿辦)하게 했습니다. 아울러 귀 공사에게 언명하기를, 적절한 조치를 취해서 그들을 체포한 후 본국에 돌려보내 간악한 무리를 징계하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근래 들으니, 이일식과 권동수가 아직도 귀국에서 사단을 일으킨다고 하고, 또 오늘 귀 서기 스기무라 후카시가 와서는 “지금 우리 정부의 전명(電命)을 받으니, 이일식이 옥새가 찍힌 문빙(文憑)을 소지하고 있으므로 본 공사에게 조선 정부에 그 진위를 문의하라고 했습니다. 이에 우선 언명하니, 이후에 조회하시기 바랍니다.”라고 했습니다.
본 독판이 살펴보건대, 이일식은 문빙(文憑)을 위조하고 인국(隣國)에 몰래 월경했으니, 그 죄가 망사(罔赦)에 속합니다. 따라서 귀 정부는 응당 전장(典章)에 따라 그를 조사·체포해서 오직 신안(訊案)만 하고 이일식과 권동수 등 여러 범인들을 신속히 본 정부에 압송해서 법률에 따라 처리하게 하는 것이 실로 공정하고 윤당할 것입니다. 부디 이러한 내용을 귀 정 부에 전달해서 시행하고 조복(照覆)하시기 바랍니다.
일본·청·한국 3국 외교관계에 관한 한, 김옥균 암살 사건은 이것으로 종결됐다. 그렇지만 이 사건의 정치적 의의는 매우 중대해서 일한 양국의 내정문제로 발전했다. --- pp.192-193쪽
통신사의정대차사 정관 히라타 하야토, 도선주 시게타 도이노스케 등은 동래부사 류형이 이러한 의견을 갖고 있다는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도착하자마자 훈도, 별차에게 접대를 요구했으므로, 훈도와 별차는 당연히 처음부터 난색을 표시했다. 훈도, 별차는 정관, 도선주, 관수 등의 설명을 듣고 난 후, “지난 덴메이 8년 무신년 통신사청퇴 대차사가 도착했을 때, 그것이 규외(規外)였음에도 불구하고 조정에서는 특별히 그들을 접대하고 통신사 파견의 연기를 수락했다. 그런데 쓰시마에서 또 새로 명목을 지어내서 규외차사(規外差使)를 자주 보내는 것은, 조정의 관대함을 이용해서 접대물품을 탐하는 뜻이 없지 않다.”라고 힐난하고, 다시, “신사가 에도에 가서 전명(傳命)하는 것이 양국 간에 얼마나 중대한 일이며, 또 바꿀 수 없는 예(禮)이거늘, 비용을 절감한다는 핑계로 갑자기 쓰시마에서 전명할 것을 청하는 것은 무슨 도리이며, 무슨 예제(禮制)인가? 사체(事體)를 존중하는 도(道)에 있어 절대로 감히 이처럼 예에서 어긋난 말로 조정을 번거롭게 해서는 안 된다.”라고 주장하며 서계 등본의 진달을 거부하고, 또 대차사 원역(員役)의 왜관 퇴거를 요구했다. 정관 등은, ‘역지행빙은 결코 조약을 무시하거나 통신사의 예제(禮制)를 멸시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일본이 근년에 조잔(凋殘)이 심해서 선례에 따라 영접을 거행할 여력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이 간이(簡易)하게 하는 데 힘쓰는 것’이라고 해명하고, 속히 서계와 예물을 봉납(捧納)해 줄 것을 간청했다.
훈도, 별차의 보고를 접한 동래부사 류형은 지난번 선문사(先問使)가 나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통신사의정대차사 그 자체가 규외(規外)라서 물리치는 것만은 아니다. 그 사명(使命)의 내용으로 봐도 통신사가 국서를 받들고 에도에 들어가서 직접 간바쿠(關白)에게 전달하는 것은 약조에 명기된 바이니, 단순히 경비 절감이나 흉년을 이유로 이를 변혁하는 것은 사체(事體)를 존중하고 약조를 엄수하는 도리가 아니다.’라는 의견을 갖고 있었지만, 대차사는 에도 정부의 명으로 나왔기 때문에 자신의 권한으로는 결정하기 어려웠다. 이에 예조에 보내는 서계 등본을 진달하면서 동시에 대차사를 물리쳐야 한다는 의견을 장계로 아뢰었다.
동래부사의 장계는 12월 21일에 조정에 도착했다. 국왕은 바로 비변사에 내려보내서 품처(稟處)하게 했다. 비변사에서는 덴메이(天明) 8년의 통신사청퇴대차사조차 규외라서 물리쳐야 한다는 의견이었으므로, 이번 통신사의정대차사 같은 것은 거의 문제시되지도 않았다. 12월 25일에 좌의정 채제공은, “의빙(議聘) 두 글자는 실로 일찍이 없었던 것입니다. 왜(倭)의 교활한 실정이 참으로 몹시 악독합니다.”라는 이유로 동래부사의 장계대로 훈도와 별차를 독려해서 의정대차(議定大差)를 속히 척퇴(斥退)해야 한다고 아뢰고, 국왕의 재가를 얻은 후 비변사 관문(關文)으로 동래부사에게 명령했다.
이처럼 조선에서는 통신사 역지행빙을 무조건 거부했고, 이로 인해 타이슈 번은 조선과 막부의 중간에서 한때 진퇴양난의 처지에 빠졌다.
--- pp.580-581
출판사 리뷰
근대 조선 및 동아시아의 정치외교사 분야의 고전적 연구인 다보하시 기요시(田保橋潔, 1897~1945)의 『근대 일선관계의 연구(近代日鮮關係の硏究)』가 5년여의 번역 작업 끝에 상·하 2책으로 완역됐다.
조선총독부 중추원(中樞院)에서 조선 통치를 위한 참고자료로 1940년에 비밀리에 간행한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근대 일선관계의 연구』는 조선근대사 연구자들이 반드시 참조해야 하는 연구로 인정받아 왔다. 그것은 이 책이 1863년 고종의 친정(親政)부터 1894년 청일전쟁(淸日戰爭)까지의 조선과 동아시아의 정치외교사를 상권 1,133쪽, 하권 969쪽에 달하는 방대하고 치밀한 서술로 다룬 최초의 본격적인 연구이기도 하지만, 또한 19세기 조선·청·일본의 정부기록과 외교문서를 원문 그대로 수록한 일종의 외교문서집의 용도를 겸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 다보하시는 경성제국대학 교수이자 조선사편수회의 근대사 편찬주임으로서 사료 입수에서 막대한 편의와 행정적 지원을 받을 수 있었는데, 『근대 일선관계의 연구』에는 오늘날에도 입수하기 어려운 희귀한 문서들이 적지 않게 수록되어 있다. 이것이 처음 간행된 지 70여 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여전히 국내외 학계에서 절대적인 학문적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이유이다.
다만 원서에는 서로 그 체제와 문체가 다른 조선·청·일본의 정부기록과 외교문서가 원문 그대로 수록되어 있기 때문에 전공자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모두 이해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이번에 출간되는 번역서에는 이들 문서까지 모두 우리말로 번역함으로써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실제로 19세기의 중요한 정부기록과 외교문서를 쉽게 접할 수 있게 했다.
근대 조선 및 동아시아 정치외교사 분야의 초기 연구는 『근대 일선관계의 연구』의 주석 작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학문적 영향은 심대했으며, 일본학계에서는 사실관계에 관한 한 이 책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할 정도로 아직까지도 정설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한일 간의 근대사 인식의 차이를 확인하고, 아울러 우리 근대사 연구의 기원과 식민사학의 극복과정, 그리고 여전히 불식하지 못한 유산을 다시 확인한다는 점에서도 이 책의 번역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번에 출간된 하권은 시기적으로 1884년 갑신정변 직후부터 1894년 8월 1일 청과 일본이 개전을 선포하기까지의 10년을 다루고 있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의 결과로 청일 양국 세력이 대립해서 마침내 개전에까지 이르는 과정을 조선·청·일본 및 유럽 열강의 외교문서를 통해 실증적으로 규명했다. 하권 후반부에는 2개의 논문이 별편(別編)으로 수록되어 있다. 별편 1은 조선 후기 타이슈 번(對州藩, 쓰시마)을 매개로 한 조일관계의 특징과 변화과정을 이른바 역지행빙(易地行聘) 교섭과정을 통해 논술했으며, 별편 2는 타이슈 번의 채무 실태와 그 상환 과정을 통해 타이슈 번의 방만한 재정 운용 관행을 고발하고 일본사회의 전통적 지배계급이었던 사족(士族)이 메이지유신의 제도 개혁에 앞서 이미 경제적으로 몰락해 간 양상을 서술했다.
동학농민운동에 대한 멸시, 청일전쟁의 책임론에 대한 불완전한 서술 등으로 인해 『근대 일선관계의 연구』의 하권은 상권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한 관심을 받아왔다. 그럼에도 여전히 깊이 음미해봐야 할 대목이 적지 않다. 예컨대 최근 국내학계에서 고종의 자주독립외교를 상징하는 사건으로서 한러밀약사건에 대한 재조명 작업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는데, 이 문제에 관한 본격적 연구는 『근대 일선관계의 연구』가 처음이었다. 또한 하권의 상당 부분은 1884년 갑신정변의 실패 이후 일본에 망명한 개화당의 행적과 암살 시도, 일본 자유당(自由黨)의 음모를 다루고 있는데, 이는 갑신정변의 실제 원인과 그 본질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근대 일선관계의 연구』의 궁극적인 집필 의도는 조선의 정세가 어떻게 청과 일본 간의 대결을 촉발해서 결국 청일전쟁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동아시아의 외교사적 관점에서 규명하는 데 있었다. 한반도를 둘러싼 중국과 일본의 대립, 그리고 영국·러시아·미국·이탈리아 등 서구 열강을 대상으로 펼쳐진 중국과 일본, 조선의 치열한 외교적 교섭과 그 성패에 관한 서술은 오늘날 우리의 외교정책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조선총독부 중추원(中樞院)에서 조선 통치를 위한 참고자료로 1940년에 비밀리에 간행한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근대 일선관계의 연구』는 조선근대사 연구자들이 반드시 참조해야 하는 연구로 인정받아 왔다. 그것은 이 책이 1863년 고종의 친정(親政)부터 1894년 청일전쟁(淸日戰爭)까지의 조선과 동아시아의 정치외교사를 상권 1,133쪽, 하권 969쪽에 달하는 방대하고 치밀한 서술로 다룬 최초의 본격적인 연구이기도 하지만, 또한 19세기 조선·청·일본의 정부기록과 외교문서를 원문 그대로 수록한 일종의 외교문서집의 용도를 겸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 다보하시는 경성제국대학 교수이자 조선사편수회의 근대사 편찬주임으로서 사료 입수에서 막대한 편의와 행정적 지원을 받을 수 있었는데, 『근대 일선관계의 연구』에는 오늘날에도 입수하기 어려운 희귀한 문서들이 적지 않게 수록되어 있다. 이것이 처음 간행된 지 70여 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여전히 국내외 학계에서 절대적인 학문적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이유이다.
다만 원서에는 서로 그 체제와 문체가 다른 조선·청·일본의 정부기록과 외교문서가 원문 그대로 수록되어 있기 때문에 전공자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모두 이해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이번에 출간되는 번역서에는 이들 문서까지 모두 우리말로 번역함으로써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실제로 19세기의 중요한 정부기록과 외교문서를 쉽게 접할 수 있게 했다.
근대 조선 및 동아시아 정치외교사 분야의 초기 연구는 『근대 일선관계의 연구』의 주석 작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학문적 영향은 심대했으며, 일본학계에서는 사실관계에 관한 한 이 책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할 정도로 아직까지도 정설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한일 간의 근대사 인식의 차이를 확인하고, 아울러 우리 근대사 연구의 기원과 식민사학의 극복과정, 그리고 여전히 불식하지 못한 유산을 다시 확인한다는 점에서도 이 책의 번역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번에 출간된 하권은 시기적으로 1884년 갑신정변 직후부터 1894년 8월 1일 청과 일본이 개전을 선포하기까지의 10년을 다루고 있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의 결과로 청일 양국 세력이 대립해서 마침내 개전에까지 이르는 과정을 조선·청·일본 및 유럽 열강의 외교문서를 통해 실증적으로 규명했다. 하권 후반부에는 2개의 논문이 별편(別編)으로 수록되어 있다. 별편 1은 조선 후기 타이슈 번(對州藩, 쓰시마)을 매개로 한 조일관계의 특징과 변화과정을 이른바 역지행빙(易地行聘) 교섭과정을 통해 논술했으며, 별편 2는 타이슈 번의 채무 실태와 그 상환 과정을 통해 타이슈 번의 방만한 재정 운용 관행을 고발하고 일본사회의 전통적 지배계급이었던 사족(士族)이 메이지유신의 제도 개혁에 앞서 이미 경제적으로 몰락해 간 양상을 서술했다.
동학농민운동에 대한 멸시, 청일전쟁의 책임론에 대한 불완전한 서술 등으로 인해 『근대 일선관계의 연구』의 하권은 상권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한 관심을 받아왔다. 그럼에도 여전히 깊이 음미해봐야 할 대목이 적지 않다. 예컨대 최근 국내학계에서 고종의 자주독립외교를 상징하는 사건으로서 한러밀약사건에 대한 재조명 작업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는데, 이 문제에 관한 본격적 연구는 『근대 일선관계의 연구』가 처음이었다. 또한 하권의 상당 부분은 1884년 갑신정변의 실패 이후 일본에 망명한 개화당의 행적과 암살 시도, 일본 자유당(自由黨)의 음모를 다루고 있는데, 이는 갑신정변의 실제 원인과 그 본질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근대 일선관계의 연구』의 궁극적인 집필 의도는 조선의 정세가 어떻게 청과 일본 간의 대결을 촉발해서 결국 청일전쟁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동아시아의 외교사적 관점에서 규명하는 데 있었다. 한반도를 둘러싼 중국과 일본의 대립, 그리고 영국·러시아·미국·이탈리아 등 서구 열강을 대상으로 펼쳐진 중국과 일본, 조선의 치열한 외교적 교섭과 그 성패에 관한 서술은 오늘날 우리의 외교정책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36.한국근대사 연구 (독서>책소개) > 2.개항기.구한말'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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