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기독교신학 (연구>책소개)/3.칼빈주의연구

존 칼빈 (2009)

동방박사님 2023. 11. 3. 08:20
728x90

책소개

투쟁의 시대에 태어났던 질서와 평화의 사람, 존 칼빈의 생애와 업적을 기록한 책이다. 저자 T.H.L.파커 박사는 영국 더럼(durham) 대학교 명예신학 교수로, 칼빈에 대해서는 세계적인 권위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각고의 노력 끝에 칼빈의 전 생애를 처음으로 밀도 있게 저술하였고, 특히 칼빈에 대한 연구 결과를 최대한 활용하여 청년 칼빈의 학창시절에 대해 소상하게 언급하였으며 정확한 연도는 알 수 없지만 칼빈의 회심에 대해서도 부록을 첨부할 정도로 깊은 관심으로 추론하였다.

책은 제네바 시 전체를 신성한 사회로 건설해 보겠다는 칼빈의 불타는 투지와 사랑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저자는 칼빈의 저술 활동과 설교에 몰두했던 당시의 모습을 그림을 보듯 섬세하게 나타내고 있으며, 기독교 신앙에 대한 칼빈의 고전적 저술인 기독교 강요를 상세하게 분석한다.

목차

서문
서론

제 1 장 칼빈의 소년기와 청년기
학예학도 | 철학 수업

제 2 장 법률, 문학, 그리고 복음
친구들과 친지들 | 부르줴 대학과 새로운 시작 |
칼빈의 첫 번째 저서 | 부정으로부터의 도피

제 3 장 신학자 칼빈
율법, 신앙 그리고 기도 | 성례 | 그리스도인의 자유

제 4 장 제네바에서의 시련
16세기의 제네바 | 교회의 권위 | 교회 조직

제 5 장 스트라스부르그의 프랑스인 목사
새 기독교 강요 | 칼빈의 로마서 주석 | 제네바가 심경의 변화를 일으키다

제 6 장 제네바 교회의 개혁
예배하는 교회 | 설교자 칼빈

제 7 장 도전 받는 경건한 사회
가정에서의 칼빈 | 여타의 신약 성경 주석 | 반대가 강해지다 | 권징에 관한 투쟁

제 8 장 패배에서 안정으로
세르베투스의 재판 | 반대 세력이 꺾이다 | 새로운 대학 | 기독교 강요의 최종판

제 9 장 교회들에 대한 염려
편지 쓰기 명수 칼빈 | 대외적 영향력

제 10 장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는 내게 유익이라

부록1 연대 재추정론
부록2 칼빈의 회심
자료와 참고 도서 목록
색인
 

저자 소개

저자 : T.H.L. 파커
영국 더럼(durham) 대학교 명예 신학교수이다. 생애의 대부분을 영국 성공회 교구 목사로 봉사하며 칼빈에 대한 평생 동안의 연구로 그 방면에 훌륭한 글을 다수 남겼다. 각고의 노력 끝에 칼빈의 전 생애를 처음으로 밀도 있게 저술하였고, 특히 칼빈에 대한 연구 결과를 최대한 활용하여 청년 칼빈의 학창 시절에 대한 소상한 언급과 정확한 연도는 알 수 없지만 칼빈의 회심에 대해 부록을 첨부할 정도로 깊은 관심으로 ...

책 속으로

1480년에 그는, 하나의 대성당과 두 개의 수도원, 4개의 시교구(city parish)가 있는 교회가 지배하는 작은 도시, 노용으로 이주했다. 그는 여기서 줄곧 번창했다. 성당 참사회는 그를 성당 공증인(notary)과 프로모터(promoteur)로 교회 법정의 서기 일을 하게 했다. 얼마 후, 그는 이 직책에 더해서 교황의 공증인과 중요 직책의 하나인 주교의 재정 공증인까지 맡게 되었다. 그는 사공이나 통 제조업자와는 상대도 되지 않을 만큼 높은 자리에 오른 것이다. 주교와 참사회가 그를 우대했을 뿐 아니라 일 처리가 능숙하다는 명성에 그 지방의 큰 가문들까지 그를 고용하기에 이르렀다. 1497년, 그는 명실공히 중산층(bourgeois) 행세를 할 수 있었다.
분명 그가 40세쯤 되었을 때 노용에서 은퇴 생활을 즐기던 깜브레(Cambrai)의 여인숙 주인의 딸 쟌느 르 프랑끄(Jeanne Le Franc)와 결혼했다. 제라르의 장인은 제라르보다 일 년 후에 중산층(bourgeois)이 되어 시의회 의석 한자리를 차지하였다. 쟝 르 프랑끄(jean Le Franc)가 4 리브르(livres) (보통의 2배 가량)의 세금을, 제라르 꼬벵이 단지 14 수(sous)의 세금을 낸 사실에서, 그 결혼을 통해 꼬벵은 경제적 이점을, 신부는 사회적 승진을 노린 결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이 살던 집은 1552년 대 화재 때는 무사했으나 1614년에 없어지고 말았다. 그 집은 뽀르셀레트(Porcelets) 거리와 과거에는 프로망티에르(Fromentiere) 거리였으나 이제 칼빈 거리가 된 거리 사이의 곡물 시장 자리에 있었다. 노용에 대해서도 교회를 중심으로, 집 한 쪽은 노틀담 성당을 향하고 다른 쪽은 성ㅡ고드베르뜨(Sainte-Godeberte) 교구 교회를 향하였다.
1509년 7월 10일, 둘째 아들 쟝(Jean)이 태어난 후 세례 받은 곳이 바로 이 교회다. 그의 대부(代父)는 성당 참사회 의원 쟝 데 바띠네(Jean Des Vatines)다.
- 칼빈의 소년기와 청년기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