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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김여정은 왜 갑자기 남한·남조선을 ‘대한민국’이라고 칭하기 시작했을까? 김정은은 왜 미국의 비핵화 협상 요구에 수년째 묵묵부답일까? 북한은 왜 남한의 인도적 지원 제안을 10년 이상 거절하고 있을까? 냉전 시대에도 없던 ‘한미일 대 북중러’의 대결은 정말로 벌어질까? ‘북핵 vs. 미핵’이라는 불가역적 핵시대가 도래한 한반도에서 ‘공포의 균형’은 가능할까? 국내 최고의 한미동맹·북핵문제 연구자 정욱식이 2019년 이후 우리가 알던 모습과는 판이한 행보를 걷고 있는 북한을 들여다보고, 그에 따른 남북·북미 관계의 변화, 나아가 동아시아 질서의 지각변동을 내다본다.
목차
● 프롤로그: 한국의 독자를 위하여
1. 북한, 미국에 미련을 버리다
○북핵에 관한 30년의 동상이몽
○김정은의 두 가지 결심
○‘새로운 북한’을 안내하는 27통의 친서
2. 2019년 여름의 파국
○남북미 판문점 회동과 두 가지 약속
○김정은의 최후통첩
○미국의 속내와 북한의 ‘새로운 길’
3. 남북, 역대급 환대에서 근친증오로
○‘문재인 패싱’을 요구한 김정은
○부도수표가 된 종전선언과 제재 완화
○“우리는 남쪽의 바보들을 약간 놀라게 했다”
○탈냉전적 사고와 냉전적 국방정책
○노무현의 유산과 문재인의 집착
4. 이어달리기와 담대한 구상
○대북정책에서 보수가 유리한 까닭
○‘담대함’도 ‘구상’도 없는 윤석열의 자가당착
○한반도 위기의 뉴노멀
○반복되는 ‘사상 최초’의 대결
○닮아가는 한미와 북한
5. 한반도, 불가역적 핵시대로 접어들다
○북핵의 9가지 특징
○북핵, 한반도의 변수에서 상수로
○북한의 핵 독트린 vs. 한미의 확장억제
○핵 독트린의 진화가 가리키는 것
○워싱턴 선언과 이중 억제
○42년 만의 기항
6. 북한의 경제난과 식량난을 보는 다른 눈
○김정은이 통신선을 복원한 까닭
○새로운 북한과 관성에 빠진 남한
○북한의 경제성장률 -0.9% vs. 5.1%
○제재 해결에서 제재와 더불어
○아사자가 속출한다고?
○여전히 퍼주고 있다는 착각
7. 병진노선은 망국의 길일까?
○아이젠하워와 덩샤오핑의 선례
○병진노선의 세 가지 경제성
8. 북핵 인플레이션과 대북 억제 결핍감
○북핵 인플레이션
○대북 억제는 부족한가?
○과잉 억제의 대가
9. 핵공유는 왜 나라마다 다를까?
○나토와 한미동맹의 차이
○일본이 핵공유를 마다하는 까닭
10. 한반도에서 ‘공포의 균형’은 가능할까?
○냉전보다 위험하다
○중재자가 없다
11. 한미일 대 북중러의 대결이 진짜 온다
○1950-1997, 각자도생과 이합집산
○1998-2018, MD가 잉태한 한미일 대 북중러
○남북이 현실화한 한미일 대 북중러
12. 다시 친해질 수 없다면
○관계가 사라진 자리에
○가드레일과 대화의 재구성
13. 그래도 대안을 찾는다면: 사즉생의 해법은?
○비핵화를 살리려면 비핵화를 포기해야
○동결과 융합의 하모니
● 에필로그: 북한의 독자를 위하여
● 주
1. 북한, 미국에 미련을 버리다
○북핵에 관한 30년의 동상이몽
○김정은의 두 가지 결심
○‘새로운 북한’을 안내하는 27통의 친서
2. 2019년 여름의 파국
○남북미 판문점 회동과 두 가지 약속
○김정은의 최후통첩
○미국의 속내와 북한의 ‘새로운 길’
3. 남북, 역대급 환대에서 근친증오로
○‘문재인 패싱’을 요구한 김정은
○부도수표가 된 종전선언과 제재 완화
○“우리는 남쪽의 바보들을 약간 놀라게 했다”
○탈냉전적 사고와 냉전적 국방정책
○노무현의 유산과 문재인의 집착
4. 이어달리기와 담대한 구상
○대북정책에서 보수가 유리한 까닭
○‘담대함’도 ‘구상’도 없는 윤석열의 자가당착
○한반도 위기의 뉴노멀
○반복되는 ‘사상 최초’의 대결
○닮아가는 한미와 북한
5. 한반도, 불가역적 핵시대로 접어들다
○북핵의 9가지 특징
○북핵, 한반도의 변수에서 상수로
○북한의 핵 독트린 vs. 한미의 확장억제
○핵 독트린의 진화가 가리키는 것
○워싱턴 선언과 이중 억제
○42년 만의 기항
6. 북한의 경제난과 식량난을 보는 다른 눈
○김정은이 통신선을 복원한 까닭
○새로운 북한과 관성에 빠진 남한
○북한의 경제성장률 -0.9% vs. 5.1%
○제재 해결에서 제재와 더불어
○아사자가 속출한다고?
○여전히 퍼주고 있다는 착각
7. 병진노선은 망국의 길일까?
○아이젠하워와 덩샤오핑의 선례
○병진노선의 세 가지 경제성
8. 북핵 인플레이션과 대북 억제 결핍감
○북핵 인플레이션
○대북 억제는 부족한가?
○과잉 억제의 대가
9. 핵공유는 왜 나라마다 다를까?
○나토와 한미동맹의 차이
○일본이 핵공유를 마다하는 까닭
10. 한반도에서 ‘공포의 균형’은 가능할까?
○냉전보다 위험하다
○중재자가 없다
11. 한미일 대 북중러의 대결이 진짜 온다
○1950-1997, 각자도생과 이합집산
○1998-2018, MD가 잉태한 한미일 대 북중러
○남북이 현실화한 한미일 대 북중러
12. 다시 친해질 수 없다면
○관계가 사라진 자리에
○가드레일과 대화의 재구성
13. 그래도 대안을 찾는다면: 사즉생의 해법은?
○비핵화를 살리려면 비핵화를 포기해야
○동결과 융합의 하모니
● 에필로그: 북한의 독자를 위하여
● 주
책 속으로
새로운 북한이 온다면, 그 가운데서도 가장 근본적이며 파급력이 큰 변화는 무엇일까? 무엇보다 북한이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에 미련을 접은 것이라고 본다. 우리에게 ‘익숙한 북한’이 그 과격한 언사와 별개로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끊임없이 모색해왔다면, ‘새로운 북한’은 이를 내려놓고 국가전략을 세우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게임의 법칙’이 완전히 달라졌음을 의미한다.
--- p.25
대북 관계 개선에 별 매력을 느끼지 않는 미국과 그런 상대를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야 하는 북한. 이때 등장한 것이 바로 핵 카드다. 미국은 냉전 초기부터 국제원자력기구(IAEA, 1957)를 창설하고 핵확산금지조약(NPT, 1970)을 주도하는 등 핵무기에 대한 국제 규제를 꾸준히 강화해왔다. (…) 그런데 북한이 여기에 반기를 든 것이다. 제국의 뜻을 거스른 북한의 목표는 아이러니하게도 제국과 친해지는 것이었다.
--- p.27
북핵이 북한만의 카드는 아니었다. 북한이 핵개발을 지렛대 삼아 대미 관계 정상화를 노렸다면, 미국은 북핵을 명분으로 ‘한반도의 현상’을 유지·강화하고자 했다. 미국이 바라는 한반도의 현상이란 정전체제와 한미동맹, 그리고 남북·북미·북일 간의 긴장관계다. 그런데 북핵문제의 해소는 곧 한반도 현상의 근본적 전환을 의미한다. 결국 미국 입장에서 북핵은 해결하는 것보다 ‘문제로 남겨두는 게 유리한 문제’였던 셈이다.
--- p.28
클린턴의 말처럼 김정은은 달랐다. 그는 (…) 북한을 핵보유국이냐 미국과의 담판이냐는 운명의 갈림길에 세웠다. (…) 미국을 상대로 ‘힘의 균형’을 이룬 만큼 비핵화까지 테이블에 올려놓고 담판에 나선다는 ‘결심’으로 풀이된다. (…) ‘협상의 달인’을 자처하는 트럼프를 자극했다. 마침내 그는 ‘북핵문제를 해결할 사람은 나밖에 없다’며 김정은이 제안한 협상에 호기롭게 응했다. 태평양을 사이에 둔 북미 간 역사적 담판의 중재자로 나선 또 하나의 주역은 문재인 정부였다. 이제는 아련한 일장춘몽으로 남은 2018년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시작이다.
--- p.33~34
김정은은 친서에서 “각하께서 해주신 것이 무엇이며, 나는 우리가 만난 이후 무엇이 바뀌었는지에 대해 인민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하냐?”라고 따졌다. 그는 “각하께서 우리의 관계를 오직 당신에게만 득이 되는 디딤돌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면, 나를 주기만 하고 아무런 반대급부도 받지 못하는 바보처럼 보이도록 만들지는 않을 것”이라며 스스로를 가리켜 ‘바보’라는 표현까지 사용했다. 아울러 조바심을 보이던 이전과는 달리 “우리는 그때와 다른 상황에 처해 있고, 서두를 이유가 없다”라고 덧붙였다.
--- p.46~47
김정은의 변심을 하노이 회담 실패 하나로만 바라보는 것은 게으른 분석이다. (…) 하노이 노딜이 김정은에게 ‘충격’이라면, 판문점 번개팅 이후 일련의 흐름은 김정은을 변심을 넘어 또 다른 ‘결심’으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김정은의 두 번째 결심이란 북한이 남북관계와 북미관계에 미련을 접고 핵무력을 정치·안보·경제·외교를 아우르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체(國體)’로 삼은 것이다.
--- p.34~35
“나는 향후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이 아니라, 각하와 직접 한반도 비핵화 문제를 논의하길 희망하며, 지금 문 대통령이 우리의 문제에 대해 표출하고 있는 과도한 관심은 불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2018년 9월 21일 김정은이 트럼프에게 보낸 친서의 한 대목이다. (…) 평양 남북정상회담 종료 하루 뒤에 작성된 친서다. 당시 북한은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한 남측 방북단에 ‘역대급 환대’를 베풀었다. (…) 김정은은 왜 트럼프에게 ‘문재인 배제’를 요구한 것일까?
--- p.56~57
윤석열 정부에 길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 길의 시작은 대한민국에서 보수 정권이 중도·진보 정권보다 정치적으로 훨씬 유리한 위치임을 자각하는 것이다. 대북정책만 놓고 보더라도 보수 정권은 전향적 입장이나 노선을 추진해도 종북이니 친중이니 하는 정치적 시비에서 비교적 자유롭다. (…) 2022년 5월 권영세 통일부장관은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기본적으로 대북정책은 ‘이어달리기’가 되어야지, 이전 정부를 완전히 무시하고 새롭게 하는 것은 별로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후 (…) 윤석열 정부는 이어달리기는커녕 되돌아서서 전임 정부를 두들겨 패고 있다. ABM(Anything But Moon, ‘문재인이 했던 것 빼고 모두 다’)이라는 말이 등장할 정도로 모든 분야에서 문재인 정부의 흔적 지우기에 여념이 없다.
--- p.76~78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질까? 보수 정권 입장에서 대북정책은 ‘자신과의 싸움’이다. 정치적 위기 또는 수세에서 북한이나남북관계를 이용하고픈 유혹을 이겨내느냐가 대북정책의 관건이라는 뜻이다. (…) ‘자신과의 싸움’에 실패한 보수 정권은 한반도 문제를 풀 수 있는 기회를 매번 걷어찼다. (…) ‘담대한 구상’으로 명명된 윤석열 정부의 대북정책 기조는 ‘북한이 핵을 차례차례 내려놓으면 크게 쏘겠다’는 것이다. (…) 윤석열 정부는 문재인의 평화정책을 북한의 선의에만 기댄 것이라며 싸잡아 폄훼해왔다. 그런데 윤석열의 담대한 구상이야말로 ‘나의 선의를 믿어달라’며 북한에 비핵화를 요구하고 있지 않은가?
--- p.78~81
북한과 미국의 핵 정책은 싸우면서 닮아가고 있다. 이를 말리면서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야 할 윤석열 정부는 북미 간 ‘공포와 종말의 공방전’에 오히려 기름을 붓고 있다. 물론 목적은 상대의 적대 행위를 억제하려는 것이겠으나, 그 방식 ?한반도식 공포의 균형 ?은 매우 취약하고 불안정하다.
--- p.116~117
북한에 대한 고정관념, 즉 만성적 경제난의 근거는 한국은행 추정치다. (…) 이에 따르면 북한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약 -0.9%이다. 그런데 북한이 유엔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고위급 정치포럼’에 제출한 〈자발적 국가 검토 보고서〉에는 전혀 다른 수치가 등장한다. (…) 같은 기간 한국은행의 추정치보다 6%나 높은 수치다. 당시 북한은 미국의 제재로 경제발전에 심각한 장애를 겪고 있음을 호소하며 제재 해결을 강력히 요구하는 입장이었다. 제제의 고통을 강조하려는 북한으로선 유엔에 거짓으로 높은 성장률을 써낼 이유가 없다.
--- p.127~128
경제제재는 비핵화를 비롯한 대북정책의 강력한 도구였다. 경제난에 빠진 북한으로선 제재 해소가 절실했기 때문이다. 그런 북한이 제재에 대한 입장을 바꿨다. (…) 핵 포기를 압박하거나 거래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의 가치는 없다는 것이다. 이뿐만 아니다. 남북 경제협력 재개를 위해서는 제재 해결이 필수다. 그럼에도 북한이 ‘제재와 더불어’를 선택했다는 것은 남북경협에 대한 미련도 버렸다는 의미다. 남북관계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는 것이다.
--- p.133~134
문재인 정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북한을 돕겠다고 했지만 북한은 응답하지 않거나 거부했다. 윤석열 정부는 이미 중단된 대북 지원을 또다시 중단하겠다며 엄포를 놓는다. 그 덕분에 국민들은 여전히 한국과 국제사회가 북한을 돕고 있다고 착각한다. 이런 괴리는 ‘주민들은 굶주리는데 김정은 정권은 핵과 미사일에만 매달린다’는 인식과 맞물려 새로운 대북정책 수립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 p.141
색안경을 벗고 보면 북한의 이러한 선택은 유별난 게 아니다. 병진노선의 핵심은 ‘안보의 경제성’이다. 그리고 이는 재래식 군비를 축소하면서 핵전력의 증강으로 이를 상쇄하려고 한 미국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뉴룩’, 이를 그대로 모방한 소련의 흐루쇼프, ‘양탄일성’(원자탄·수소탄과 인공위성)을 완성함으로써 경제발전을 꾀한 중국의 덩샤오핑 등의 맥을 잇는 유서 깊은 논리다. 가까이는 경제발전과 자주국방을 동시에 추구한 박정희 정권이 핵개발을 시도한 것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 p.146~147
한국이 이미 충분히 강력한 미국의 확장억제를 더 강화해달라고 매달릴수록 미국은 한국에 부당 청구서를 당당히 내밀 것이다. 한국이 미국에 준 돈이 남아도는데도 방위비 분담금을 인상하라는 요구에서 인플레 이션감축법IRA과 반도체법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이기적 행태는 절제를 모른다. 존재하지 않는 결핍과 강박을 채운 대가로 미국의 갑질과 부당 청구서를 감내하는 악순환을 끊어내야 한다.
--- p.172
핵에는 핵으로 맞서야 한다’는 주장이 득세하지만, 이미 한반도에선 미국과 북한의 핵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그런데도 한국 영토 바깥에 있는 미국 핵은 신뢰할 수 없다며 미국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을수록 신뢰는 겉돌고 실리는 넘겨주게 된다. 윤석열 정부는 한미관계의 핵심 의제를 ‘핵공유’로 삼고 거기에만 매달리면서 미국의 ‘반도체 이기주의’에 대처하지 못했고, ‘반도체 대국’의 위상이 흔들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반면 핵공유 논의는 불필요하다고 선을 그은 일본은 미국과의 반도체 합작에 나서고 있다.
--- p.183
오늘날 남북한 당국에서 유행하는 화법은 ‘전쟁을 원하지 않지만, 전쟁을 피하지도 않겠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를 ‘전쟁을 원하지 않으면, 전쟁을 예방하는 방법을 찾자’는 것으로 전환해야 한다. 또 한미는 북한에 ‘조건 없는 대화’를 말하면서도 여전히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위해’라는, 당장은 실현 불가능한 최대 목표를 단서로 달고 있다. 반면 대화의 문을 굳게 닫아건 북한은 대화 재개의 조건으로 ‘적대시 정책의 철회’를 요구하고 있다. 이제 한미동맹과 북한은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한미가 비핵화를 강조할수록 비핵화는 더 멀어지고, 북한이 대화의 조건으로 적대시 정책 철회를 요구할수록 적대시 정책은 더욱 강화되는 현실 말이다.
--- p.224
끝으로 김정은 위원장에게 묻고, 또 호소하고 싶다. 아이들에게 어떤 미래를 물려주고 싶냐고 말이다. ‘김주애’로 알려진 딸을 비롯한 아이들의 미래는 기후위기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더구나 한반도는 기후변화의 취약 지역 가운데 하나이다. 북한은 남한보다 더 취약하다. (…) 이곳에서 군비통제와 군축을 통해 평화 정착과 탄소 배출 저감의 선순환을 모색하는 것이야말로 아이들에겐 최고의 선물이 되고, 남북이 세계 각국의 롤모델이 되는길 아니겠는가?
--- p.25
대북 관계 개선에 별 매력을 느끼지 않는 미국과 그런 상대를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야 하는 북한. 이때 등장한 것이 바로 핵 카드다. 미국은 냉전 초기부터 국제원자력기구(IAEA, 1957)를 창설하고 핵확산금지조약(NPT, 1970)을 주도하는 등 핵무기에 대한 국제 규제를 꾸준히 강화해왔다. (…) 그런데 북한이 여기에 반기를 든 것이다. 제국의 뜻을 거스른 북한의 목표는 아이러니하게도 제국과 친해지는 것이었다.
--- p.27
북핵이 북한만의 카드는 아니었다. 북한이 핵개발을 지렛대 삼아 대미 관계 정상화를 노렸다면, 미국은 북핵을 명분으로 ‘한반도의 현상’을 유지·강화하고자 했다. 미국이 바라는 한반도의 현상이란 정전체제와 한미동맹, 그리고 남북·북미·북일 간의 긴장관계다. 그런데 북핵문제의 해소는 곧 한반도 현상의 근본적 전환을 의미한다. 결국 미국 입장에서 북핵은 해결하는 것보다 ‘문제로 남겨두는 게 유리한 문제’였던 셈이다.
--- p.28
클린턴의 말처럼 김정은은 달랐다. 그는 (…) 북한을 핵보유국이냐 미국과의 담판이냐는 운명의 갈림길에 세웠다. (…) 미국을 상대로 ‘힘의 균형’을 이룬 만큼 비핵화까지 테이블에 올려놓고 담판에 나선다는 ‘결심’으로 풀이된다. (…) ‘협상의 달인’을 자처하는 트럼프를 자극했다. 마침내 그는 ‘북핵문제를 해결할 사람은 나밖에 없다’며 김정은이 제안한 협상에 호기롭게 응했다. 태평양을 사이에 둔 북미 간 역사적 담판의 중재자로 나선 또 하나의 주역은 문재인 정부였다. 이제는 아련한 일장춘몽으로 남은 2018년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시작이다.
--- p.33~34
김정은은 친서에서 “각하께서 해주신 것이 무엇이며, 나는 우리가 만난 이후 무엇이 바뀌었는지에 대해 인민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하냐?”라고 따졌다. 그는 “각하께서 우리의 관계를 오직 당신에게만 득이 되는 디딤돌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면, 나를 주기만 하고 아무런 반대급부도 받지 못하는 바보처럼 보이도록 만들지는 않을 것”이라며 스스로를 가리켜 ‘바보’라는 표현까지 사용했다. 아울러 조바심을 보이던 이전과는 달리 “우리는 그때와 다른 상황에 처해 있고, 서두를 이유가 없다”라고 덧붙였다.
--- p.46~47
김정은의 변심을 하노이 회담 실패 하나로만 바라보는 것은 게으른 분석이다. (…) 하노이 노딜이 김정은에게 ‘충격’이라면, 판문점 번개팅 이후 일련의 흐름은 김정은을 변심을 넘어 또 다른 ‘결심’으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김정은의 두 번째 결심이란 북한이 남북관계와 북미관계에 미련을 접고 핵무력을 정치·안보·경제·외교를 아우르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체(國體)’로 삼은 것이다.
--- p.34~35
“나는 향후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이 아니라, 각하와 직접 한반도 비핵화 문제를 논의하길 희망하며, 지금 문 대통령이 우리의 문제에 대해 표출하고 있는 과도한 관심은 불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2018년 9월 21일 김정은이 트럼프에게 보낸 친서의 한 대목이다. (…) 평양 남북정상회담 종료 하루 뒤에 작성된 친서다. 당시 북한은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한 남측 방북단에 ‘역대급 환대’를 베풀었다. (…) 김정은은 왜 트럼프에게 ‘문재인 배제’를 요구한 것일까?
--- p.56~57
윤석열 정부에 길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 길의 시작은 대한민국에서 보수 정권이 중도·진보 정권보다 정치적으로 훨씬 유리한 위치임을 자각하는 것이다. 대북정책만 놓고 보더라도 보수 정권은 전향적 입장이나 노선을 추진해도 종북이니 친중이니 하는 정치적 시비에서 비교적 자유롭다. (…) 2022년 5월 권영세 통일부장관은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기본적으로 대북정책은 ‘이어달리기’가 되어야지, 이전 정부를 완전히 무시하고 새롭게 하는 것은 별로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후 (…) 윤석열 정부는 이어달리기는커녕 되돌아서서 전임 정부를 두들겨 패고 있다. ABM(Anything But Moon, ‘문재인이 했던 것 빼고 모두 다’)이라는 말이 등장할 정도로 모든 분야에서 문재인 정부의 흔적 지우기에 여념이 없다.
--- p.76~78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질까? 보수 정권 입장에서 대북정책은 ‘자신과의 싸움’이다. 정치적 위기 또는 수세에서 북한이나남북관계를 이용하고픈 유혹을 이겨내느냐가 대북정책의 관건이라는 뜻이다. (…) ‘자신과의 싸움’에 실패한 보수 정권은 한반도 문제를 풀 수 있는 기회를 매번 걷어찼다. (…) ‘담대한 구상’으로 명명된 윤석열 정부의 대북정책 기조는 ‘북한이 핵을 차례차례 내려놓으면 크게 쏘겠다’는 것이다. (…) 윤석열 정부는 문재인의 평화정책을 북한의 선의에만 기댄 것이라며 싸잡아 폄훼해왔다. 그런데 윤석열의 담대한 구상이야말로 ‘나의 선의를 믿어달라’며 북한에 비핵화를 요구하고 있지 않은가?
--- p.78~81
북한과 미국의 핵 정책은 싸우면서 닮아가고 있다. 이를 말리면서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야 할 윤석열 정부는 북미 간 ‘공포와 종말의 공방전’에 오히려 기름을 붓고 있다. 물론 목적은 상대의 적대 행위를 억제하려는 것이겠으나, 그 방식 ?한반도식 공포의 균형 ?은 매우 취약하고 불안정하다.
--- p.116~117
북한에 대한 고정관념, 즉 만성적 경제난의 근거는 한국은행 추정치다. (…) 이에 따르면 북한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약 -0.9%이다. 그런데 북한이 유엔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고위급 정치포럼’에 제출한 〈자발적 국가 검토 보고서〉에는 전혀 다른 수치가 등장한다. (…) 같은 기간 한국은행의 추정치보다 6%나 높은 수치다. 당시 북한은 미국의 제재로 경제발전에 심각한 장애를 겪고 있음을 호소하며 제재 해결을 강력히 요구하는 입장이었다. 제제의 고통을 강조하려는 북한으로선 유엔에 거짓으로 높은 성장률을 써낼 이유가 없다.
--- p.127~128
경제제재는 비핵화를 비롯한 대북정책의 강력한 도구였다. 경제난에 빠진 북한으로선 제재 해소가 절실했기 때문이다. 그런 북한이 제재에 대한 입장을 바꿨다. (…) 핵 포기를 압박하거나 거래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의 가치는 없다는 것이다. 이뿐만 아니다. 남북 경제협력 재개를 위해서는 제재 해결이 필수다. 그럼에도 북한이 ‘제재와 더불어’를 선택했다는 것은 남북경협에 대한 미련도 버렸다는 의미다. 남북관계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는 것이다.
--- p.133~134
문재인 정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북한을 돕겠다고 했지만 북한은 응답하지 않거나 거부했다. 윤석열 정부는 이미 중단된 대북 지원을 또다시 중단하겠다며 엄포를 놓는다. 그 덕분에 국민들은 여전히 한국과 국제사회가 북한을 돕고 있다고 착각한다. 이런 괴리는 ‘주민들은 굶주리는데 김정은 정권은 핵과 미사일에만 매달린다’는 인식과 맞물려 새로운 대북정책 수립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 p.141
색안경을 벗고 보면 북한의 이러한 선택은 유별난 게 아니다. 병진노선의 핵심은 ‘안보의 경제성’이다. 그리고 이는 재래식 군비를 축소하면서 핵전력의 증강으로 이를 상쇄하려고 한 미국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뉴룩’, 이를 그대로 모방한 소련의 흐루쇼프, ‘양탄일성’(원자탄·수소탄과 인공위성)을 완성함으로써 경제발전을 꾀한 중국의 덩샤오핑 등의 맥을 잇는 유서 깊은 논리다. 가까이는 경제발전과 자주국방을 동시에 추구한 박정희 정권이 핵개발을 시도한 것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 p.146~147
한국이 이미 충분히 강력한 미국의 확장억제를 더 강화해달라고 매달릴수록 미국은 한국에 부당 청구서를 당당히 내밀 것이다. 한국이 미국에 준 돈이 남아도는데도 방위비 분담금을 인상하라는 요구에서 인플레 이션감축법IRA과 반도체법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이기적 행태는 절제를 모른다. 존재하지 않는 결핍과 강박을 채운 대가로 미국의 갑질과 부당 청구서를 감내하는 악순환을 끊어내야 한다.
--- p.172
핵에는 핵으로 맞서야 한다’는 주장이 득세하지만, 이미 한반도에선 미국과 북한의 핵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그런데도 한국 영토 바깥에 있는 미국 핵은 신뢰할 수 없다며 미국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을수록 신뢰는 겉돌고 실리는 넘겨주게 된다. 윤석열 정부는 한미관계의 핵심 의제를 ‘핵공유’로 삼고 거기에만 매달리면서 미국의 ‘반도체 이기주의’에 대처하지 못했고, ‘반도체 대국’의 위상이 흔들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반면 핵공유 논의는 불필요하다고 선을 그은 일본은 미국과의 반도체 합작에 나서고 있다.
--- p.183
오늘날 남북한 당국에서 유행하는 화법은 ‘전쟁을 원하지 않지만, 전쟁을 피하지도 않겠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를 ‘전쟁을 원하지 않으면, 전쟁을 예방하는 방법을 찾자’는 것으로 전환해야 한다. 또 한미는 북한에 ‘조건 없는 대화’를 말하면서도 여전히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위해’라는, 당장은 실현 불가능한 최대 목표를 단서로 달고 있다. 반면 대화의 문을 굳게 닫아건 북한은 대화 재개의 조건으로 ‘적대시 정책의 철회’를 요구하고 있다. 이제 한미동맹과 북한은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한미가 비핵화를 강조할수록 비핵화는 더 멀어지고, 북한이 대화의 조건으로 적대시 정책 철회를 요구할수록 적대시 정책은 더욱 강화되는 현실 말이다.
--- p.224
끝으로 김정은 위원장에게 묻고, 또 호소하고 싶다. 아이들에게 어떤 미래를 물려주고 싶냐고 말이다. ‘김주애’로 알려진 딸을 비롯한 아이들의 미래는 기후위기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더구나 한반도는 기후변화의 취약 지역 가운데 하나이다. 북한은 남한보다 더 취약하다. (…) 이곳에서 군비통제와 군축을 통해 평화 정착과 탄소 배출 저감의 선순환을 모색하는 것이야말로 아이들에겐 최고의 선물이 되고, 남북이 세계 각국의 롤모델이 되는길 아니겠는가?
--- p.243~244
출판사 리뷰
마침내 도래한 불가역적 핵시대
‘공포의 균형’을 넘어, ‘진짜 평화’를 위한
남북관계 리터러시
2023년 7월 북한은 조선노동당 중앙위 부부장 김여정 명의로 두 개의 담화를 발표한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대미·대남 비난 담화가 특별히 주목받은 것은 남한에 대한 당연한 듯 낯선 지칭 때문이다. 담화에서 김여정은 남측·남조선이란 표현 대신 ‘대한민국’이라는 표현을 네 차례에 걸쳐 사용했다. 통일부에 따르면 이전까지 북한이 성명 등 공식입장을 내며 남쪽을 대한민국이라 지칭한 사례는 없다.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가 남북관계를 ‘국가 대 국가’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특수 관계’로 규정한 이래 남북은 서로를 정식 국호인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아닌 남측과 북측 또는 남조선과 북한으로 불러왔다. 양측을 오갈 때 ‘출입국’이란 말 대신 ‘출입경’으로, 여권 대신 방문증명서를 사용해온 것도 그런 맥락이다. 남북의 ‘기본합의’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김여정의 행보에 대해, 군축·반핵·평화체제를 축으로 한미동맹과 북핵문제에 천착해온 평화 연구자·활동가 정욱식(평화네트워크 대표·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은 ‘달라진 북한’의 한 시그널로 해석한다. 나아가 이를 일회성 제스처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탈바꿈한 북한의 대외 전략구상의 일각으로 규정한다. 무슨 의미일까? 때마침 내놓은 책에 자세한 이야기를 담았다. 주제는 2018-2019년 비핵화 협상의 결렬 이후 본격화한 북한의 변화와 그런 북한이 뒤흔들고 있는 남북·북미 관계, 나아가 동아시아 6개국 판도의 격변이다. 요컨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북한이 온다!”
우리가 알던 북한은 없다. 새로운 북한의 4가지 시그널
① 미국에 미련을 버리다
변화의 핵심은 북한이 대북제재 완화를 비롯한 미국과의 관계정상화에 대한 미련을 버렸다는 것이다. 1990년대 초 사회주의 진영이 붕괴한 이래 30년간 북한의 일관된 대외정책 기조는 미국과의 수교, 그리고 평화체제 수립이었다. 핵개발은 체제의 동아줄인 동시에 미국을 협상 테이블에 앉히기 위한 비장의 카드였다. 2018-2019년 세 차례에 걸친 북미 정상 간 협상은 그런 흐름의 정점이었고, ‘하노이 노딜’ 즉 비핵화 협상의 결렬은 그 기조의 폐기로 이어졌다. 이후 핵무기는 체제를 위한 거래수단에서 체제 그 자체, 북한의 ‘국체’로 거듭났다. 저자는 이 기간 김정은-트럼프가 주고받은 27통의 친서를 포함한 각종 문헌을 통해 미국에 대한 김정은의 기대와 환멸, 미련과 변심을 복기한다. 이후 북한의 입장 변화는 남북관계는 물론 한반도 주변 역학에 지각변동을 일으키게 된다.
② 민족제일주의에서 국가제일주의로
두 번째는 남북관계의 밑그림이 바뀐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전임 정부가 ‘가짜평화’에 취해 안보를 등한시했다고 공격한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자신이 다져놓은 남북의 우의를 후임 정부가 망쳐놓은 것처럼 푸념한다. 저자에 따르면, 둘 다 거짓말이다. 윤석열의 말과 달리 문재인 정부는 안보, 특히 군비증강에 올인하다시피 한 정부였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이런 안보 강박, 다시 말해 첨단무기 도입과 군사력 증강에 집착하면서 정작 북한더러 핵포기를 요구하는 ‘내로남불’ 행보가 북한을 질리게 만들었다. 2018년 북한의 ‘역대급 환대’가 격렬한 ‘근친증오’로 바뀌는 데는 채 1년이 걸리지 않았다. 그 이후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2019년 남북의 공동 외교공관격인 개성연락사무소 폭파사건, 2023년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방북을 불허하는 성명을 대남부서(통일전선부)가 아닌 외무성에서 발표한 것, 그리고 김여정의 ‘대한민국’ 발언은 모두 민족제일주의에 입각한 ‘남북한 시대’의 끝과 ‘국가 대 국가’ 시대의 시작을 가리킨다. 이를 통해 저자는 지난 30년간 대북정책의 양대 패러다임인 포용정책(경제-평화의 교환이라는 진보의 희망고문)과 압박정책(붕괴 후 흡수통일이라는 보수의 희망회로)의 시효가 끝났음을 알린다.
③ 경제난이라는 오해, 퍼준다는 착각, 지원을 바랄 거라는 망상
세 번째는 북한 내부의 변화다. 특히 주목할 것은 그간 형용모순이라며 조롱받아온 ‘경제-핵무력 병진노선’(병진노선)에 대한 재평가다. 핵무기는 최고의 ‘가성비’를 자랑하는 비대칭 전력으로, 핵개발로 아낀 재래식 군비를 경제개발에 투자하는 것은 아이젠하워의 뉴룩(new-look)정책, 덩샤오핑의 양탄일성(??一星) 등의 선례가 효과를 입증한 전략이라는 것이다. 또한 저자는 상식처럼 통용되는 북한의 경제난과 식량 사정에 대해 추정치가 아닌 유엔의 공식 보고서를 검토하며 조심스럽지만 다른 견해를 밝힌다. 무엇보다 북한이 지난 10여 년간, 심지어 코로나19 팬데믹 국면에서도 한국과 국제사회의 지원을 거절해온 사실을 짚으며 ‘가난한 북한’이라는 고정관념이 새로운 북한을 상대하는 걸림돌임을 지적한다.(실제 문재인 정부는 임기 후반 한미연합훈련을 양보하지 않은 채 인도적 지원 카드만을 고집하다 남북관계 회복의 마지막 기회를 날려버린 바 있다.)
④ 한미일 대 북중러, 동아시아 질서의 재편
네 번째는 동아시아의 새로운 판도, 즉 ‘한미일 대 북중러’ 구도의 부상이다. 오래된 통념과 달리 한반도와 그 주변 6개국은 냉전 시대부터 진영 대결보다 각국의 이익에 따른 합종연횡을 반복해왔다. 그러나 미국이 미사일방어체제(MD)에 일본과 한국을 포섭하며 북중러를 공통의 적으로 설정한 이래, 2019년 북미 비핵화 협상이 깨지고, 중국과 러시아가 (패권 경쟁국인 미국을 견제하기 위해) 사실상 북핵을 용인하는 행보를 보이면서 한미일 대 북중러의 구도가 현실화하고 있다. 한반도가 동아시아 최대의 화약고로 부상한 것이다.
달라지는 게임의 법칙과 ‘공포의 균형’에 대해
북미 비핵화 협상의 실패, 그로 인해 달라진 북한은 결국 ‘불가역적 핵시대’를 가져왔다. 이에 일부에서는 냉전 시대 미소 간의 ‘공포의 균형’을 언급하며 한미 간 핵공유나 아예 한국의 독자적 핵무장론을 떠들어댄다. 그러나 한미동맹과 북핵문제 전문가로서 저자의 견해는 냉정하다. NPT(핵확산금지조약) 회원국으로서 한국의 독자 핵무장은 어불성설이며, 핵공유론 역시 정치적 레토릭에 불과한 까닭을 조목조목 짚는다. 오히려 저자는 민주화 이후 진보-보수를 막론한 모든 정부의 대북·평화 정책 실패의 원인을 과도한 친미주의(한미동맹 의존)와 함께 ‘힘에 의한 평화’ 추구에서 찾는다. 그에 따르면 현재 한미동맹의 군사력만으로도 북핵은 충분히 억제 가능하며, 그 이상의 군비증강은 미국의 비싼 청구서와 북한의 도발만 부르는 정치적·전략적 악수다. 결국 답은 ‘공포의 균형’이 아니라 상호주의에 바탕한 군축에 있다. 사상 최대의 한미연합훈련이 수십 일간 이어지고 거기에 북한이 ‘미사일쇼’로 맞불을 놓는 오늘날 그것이 가능할까? 저자는 반세기 전 미국과 소련이 해냈고, 오늘날 중국과 미국이 부분적으로 이뤄내고 있음을 상기하며 남북의 ‘새로운 평화 프로세스’를 촉구한다.
‘공포의 균형’을 넘어, ‘진짜 평화’를 위한
남북관계 리터러시
2023년 7월 북한은 조선노동당 중앙위 부부장 김여정 명의로 두 개의 담화를 발표한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대미·대남 비난 담화가 특별히 주목받은 것은 남한에 대한 당연한 듯 낯선 지칭 때문이다. 담화에서 김여정은 남측·남조선이란 표현 대신 ‘대한민국’이라는 표현을 네 차례에 걸쳐 사용했다. 통일부에 따르면 이전까지 북한이 성명 등 공식입장을 내며 남쪽을 대한민국이라 지칭한 사례는 없다.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가 남북관계를 ‘국가 대 국가’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특수 관계’로 규정한 이래 남북은 서로를 정식 국호인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아닌 남측과 북측 또는 남조선과 북한으로 불러왔다. 양측을 오갈 때 ‘출입국’이란 말 대신 ‘출입경’으로, 여권 대신 방문증명서를 사용해온 것도 그런 맥락이다. 남북의 ‘기본합의’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김여정의 행보에 대해, 군축·반핵·평화체제를 축으로 한미동맹과 북핵문제에 천착해온 평화 연구자·활동가 정욱식(평화네트워크 대표·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은 ‘달라진 북한’의 한 시그널로 해석한다. 나아가 이를 일회성 제스처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탈바꿈한 북한의 대외 전략구상의 일각으로 규정한다. 무슨 의미일까? 때마침 내놓은 책에 자세한 이야기를 담았다. 주제는 2018-2019년 비핵화 협상의 결렬 이후 본격화한 북한의 변화와 그런 북한이 뒤흔들고 있는 남북·북미 관계, 나아가 동아시아 6개국 판도의 격변이다. 요컨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북한이 온다!”
우리가 알던 북한은 없다. 새로운 북한의 4가지 시그널
① 미국에 미련을 버리다
변화의 핵심은 북한이 대북제재 완화를 비롯한 미국과의 관계정상화에 대한 미련을 버렸다는 것이다. 1990년대 초 사회주의 진영이 붕괴한 이래 30년간 북한의 일관된 대외정책 기조는 미국과의 수교, 그리고 평화체제 수립이었다. 핵개발은 체제의 동아줄인 동시에 미국을 협상 테이블에 앉히기 위한 비장의 카드였다. 2018-2019년 세 차례에 걸친 북미 정상 간 협상은 그런 흐름의 정점이었고, ‘하노이 노딜’ 즉 비핵화 협상의 결렬은 그 기조의 폐기로 이어졌다. 이후 핵무기는 체제를 위한 거래수단에서 체제 그 자체, 북한의 ‘국체’로 거듭났다. 저자는 이 기간 김정은-트럼프가 주고받은 27통의 친서를 포함한 각종 문헌을 통해 미국에 대한 김정은의 기대와 환멸, 미련과 변심을 복기한다. 이후 북한의 입장 변화는 남북관계는 물론 한반도 주변 역학에 지각변동을 일으키게 된다.
② 민족제일주의에서 국가제일주의로
두 번째는 남북관계의 밑그림이 바뀐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전임 정부가 ‘가짜평화’에 취해 안보를 등한시했다고 공격한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자신이 다져놓은 남북의 우의를 후임 정부가 망쳐놓은 것처럼 푸념한다. 저자에 따르면, 둘 다 거짓말이다. 윤석열의 말과 달리 문재인 정부는 안보, 특히 군비증강에 올인하다시피 한 정부였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이런 안보 강박, 다시 말해 첨단무기 도입과 군사력 증강에 집착하면서 정작 북한더러 핵포기를 요구하는 ‘내로남불’ 행보가 북한을 질리게 만들었다. 2018년 북한의 ‘역대급 환대’가 격렬한 ‘근친증오’로 바뀌는 데는 채 1년이 걸리지 않았다. 그 이후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2019년 남북의 공동 외교공관격인 개성연락사무소 폭파사건, 2023년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방북을 불허하는 성명을 대남부서(통일전선부)가 아닌 외무성에서 발표한 것, 그리고 김여정의 ‘대한민국’ 발언은 모두 민족제일주의에 입각한 ‘남북한 시대’의 끝과 ‘국가 대 국가’ 시대의 시작을 가리킨다. 이를 통해 저자는 지난 30년간 대북정책의 양대 패러다임인 포용정책(경제-평화의 교환이라는 진보의 희망고문)과 압박정책(붕괴 후 흡수통일이라는 보수의 희망회로)의 시효가 끝났음을 알린다.
③ 경제난이라는 오해, 퍼준다는 착각, 지원을 바랄 거라는 망상
세 번째는 북한 내부의 변화다. 특히 주목할 것은 그간 형용모순이라며 조롱받아온 ‘경제-핵무력 병진노선’(병진노선)에 대한 재평가다. 핵무기는 최고의 ‘가성비’를 자랑하는 비대칭 전력으로, 핵개발로 아낀 재래식 군비를 경제개발에 투자하는 것은 아이젠하워의 뉴룩(new-look)정책, 덩샤오핑의 양탄일성(??一星) 등의 선례가 효과를 입증한 전략이라는 것이다. 또한 저자는 상식처럼 통용되는 북한의 경제난과 식량 사정에 대해 추정치가 아닌 유엔의 공식 보고서를 검토하며 조심스럽지만 다른 견해를 밝힌다. 무엇보다 북한이 지난 10여 년간, 심지어 코로나19 팬데믹 국면에서도 한국과 국제사회의 지원을 거절해온 사실을 짚으며 ‘가난한 북한’이라는 고정관념이 새로운 북한을 상대하는 걸림돌임을 지적한다.(실제 문재인 정부는 임기 후반 한미연합훈련을 양보하지 않은 채 인도적 지원 카드만을 고집하다 남북관계 회복의 마지막 기회를 날려버린 바 있다.)
④ 한미일 대 북중러, 동아시아 질서의 재편
네 번째는 동아시아의 새로운 판도, 즉 ‘한미일 대 북중러’ 구도의 부상이다. 오래된 통념과 달리 한반도와 그 주변 6개국은 냉전 시대부터 진영 대결보다 각국의 이익에 따른 합종연횡을 반복해왔다. 그러나 미국이 미사일방어체제(MD)에 일본과 한국을 포섭하며 북중러를 공통의 적으로 설정한 이래, 2019년 북미 비핵화 협상이 깨지고, 중국과 러시아가 (패권 경쟁국인 미국을 견제하기 위해) 사실상 북핵을 용인하는 행보를 보이면서 한미일 대 북중러의 구도가 현실화하고 있다. 한반도가 동아시아 최대의 화약고로 부상한 것이다.
달라지는 게임의 법칙과 ‘공포의 균형’에 대해
북미 비핵화 협상의 실패, 그로 인해 달라진 북한은 결국 ‘불가역적 핵시대’를 가져왔다. 이에 일부에서는 냉전 시대 미소 간의 ‘공포의 균형’을 언급하며 한미 간 핵공유나 아예 한국의 독자적 핵무장론을 떠들어댄다. 그러나 한미동맹과 북핵문제 전문가로서 저자의 견해는 냉정하다. NPT(핵확산금지조약) 회원국으로서 한국의 독자 핵무장은 어불성설이며, 핵공유론 역시 정치적 레토릭에 불과한 까닭을 조목조목 짚는다. 오히려 저자는 민주화 이후 진보-보수를 막론한 모든 정부의 대북·평화 정책 실패의 원인을 과도한 친미주의(한미동맹 의존)와 함께 ‘힘에 의한 평화’ 추구에서 찾는다. 그에 따르면 현재 한미동맹의 군사력만으로도 북핵은 충분히 억제 가능하며, 그 이상의 군비증강은 미국의 비싼 청구서와 북한의 도발만 부르는 정치적·전략적 악수다. 결국 답은 ‘공포의 균형’이 아니라 상호주의에 바탕한 군축에 있다. 사상 최대의 한미연합훈련이 수십 일간 이어지고 거기에 북한이 ‘미사일쇼’로 맞불을 놓는 오늘날 그것이 가능할까? 저자는 반세기 전 미국과 소련이 해냈고, 오늘날 중국과 미국이 부분적으로 이뤄내고 있음을 상기하며 남북의 ‘새로운 평화 프로세스’를 촉구한다.